@juststayus
식사시간을 기다리는 개의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정기적으로, 요일은 정해두지 않은 채 열쇠를 꽂고 돌리는 소리가 나면 요슈아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나 왔어, 하고 반갑도록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슈아는 제대로 '응'이라고 답해 주고 싶었지만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잿더미를 씹어 삼킨 후에 내뱉은 찝찝한 신음뿐이라 그저 갈라진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불을 다 꺼둔 거실 안 소파 위에 누워, 팔로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아주 미세한 햇빛마저 차단하려는 듯 팔꿈치로 강하게 눈두덩이를 짓누르면서. 오지도 않는 잠을 애써 청해보려고 하는 미련한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게 보였다. 요슈아는 자신의 두 눈을 덮은 팔의 위치를 조정해서 손가락 틈새를 벌렸다. 흐리멍덩하게 검은 거실이 점점 구석구석 쌓인 먼지까지 보이는 변화에는 구역질이 났으므로……. 그가 굽은 등을 펴면서 소파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현관 복도의 모퉁이를 지나 제리가 거실로 모습을 드러내 그가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리는 카펫 위로 발가락을 말았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요슈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떨어지는 길을 따라갔다. 따라가고 따라가며 시선이 움직인 끝자락에는 어둠 속에서 형광으로 빛나는 노란색 홍채가 보였다. 어둠이 드리운 바닷가의 등대처럼, 그것은 어찌나 밝은지 거실을 포함해 온 집안을 덮은 그림자를 뚫고 선이 가느다란 이목구비를 비추었다. 아니 어쩌면, 어두웠기에 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불, 또 다 꺼두고 있었구나."
제리의 어조는 평이했다. 그에게 요슈아를 책잡으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요슈아는 미간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거동으로 똑바로 앉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어찌나 끔찍한가. 실이 없는 쿠션 사이로 스며드는 습기에 오른손 손등이 욱신거렸다. 제리가 도착하기 전 탁상 스탠드를 밀쳤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40달러였던가, 4달러였던가? 아니…… 4천 엔이지. 그렇지. 여긴, LA가 아니지. 그는 생각하면서 중얼거리듯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미안. 너무 밝아서…… 다음부터는 네가 올 때 맞춰서라도 꼭 켜고 있을게."
그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발밑 주변에 흩어진 채로 널브러진 갖가지 오선보와 불이 깜빡거리는 기기들을 옆으로 슬쩍 밀었다. 혼자 있었다면 그러한 조심스러움마저도 없었을 테지만, 제리가 있으니 그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짐승 본연의 모습은, 요슈아가 그토록 싫어하는 멍청한 이들과 퍽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실패한 무명 아티스트 같지 않은가. 정작 최근 브레이브 차일드의 주가는 최고치를 달리고 있고, 판다 사장은 새로 뽑은 이사진 한 명에게 시달려 예전처럼 폭정 수준의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어, 지금만큼 그가 걸어 온 음악의 길에서 좋은 순간이 따로 없을 텐데. 그런 요슈아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이 제리가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요슈아가 불편하다면 이렇게 해 둬. 이제 나도 익숙한걸."
제리는 검은 그림자 아래 파묻힌 깨진 유리 조각들을 모른 척해야 할는지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가방에서 소독약과 밴드, 그다음으로 가지고 온 혈액 팩들을 꺼냈다. 그곳에는 돼지 피, 사슴 피, 병원의 보관소에서 몰래 훔쳐 온 O형 혈액 팩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가죽 가방의 지퍼를 열기도 전부터 공기 중에 흐르던 쇳내가, 요슈아에게 있어선 마치 진수성찬을 대비하라는 듯한 신호탄의 연기처럼 맡아졌다.
몸이 반응하는 것과 별개로 요슈아는 요슈아였다. 동물이든 무엇이든 함부로 해치지 않으려 들고, 누구보다 먼저 중재하려고 나서고, 좋은 면을 우선하여 보려고 하는 사람. 그런데도 요슈아는 노란색 홍채 가운데 동공이 서서히 수축하면서 자꾸만 혈액 팩 쪽으로 시선이 가는 본능이, 원치 않게 탑재되어 움직이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소리를 간단히 섞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리, 나 정말 괜찮아, 다른 음식도."
"저번에 쓰러졌던 때 기억 안 나?"
"그건."
요슈아는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손으로 자신의 입을 꾹 눌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전부 괜찮다며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깊숙한 장소에 묻어두려고 최선을 다했다. 요슈아가 내비치는 모든 비자발적인 경련과 울렁이는 요동을, 비디오 셔터를 누른 뒤처럼 빠짐없이 전부 관찰해 가면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요슈아가 어떻게 여길지는 제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요슈아는 자신이 먹이를 받아먹는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자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리는 요슈아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 생각에 대해 결단코 아니라 말하고 싶었으나, 식사를 준비하는 이가 자신임을 깨닫고 못내 고개를 숙였다. 그가 힐끔거리며 시야를 옮겼다. 요슈아는 손가락 뼈마디가 튀어나올 듯한 세기로 주먹을 쥔 채 깊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이렇게 동물 피라도 마셔 두면 적어도 너도 모르는 사이에 어지럽히거나, 정신을 잃는 일도 없잖아. 게다가 나랑은 다르게 요슈아는 카메라 앞에 설 일도 너무 많은걸…….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돌발 상황은 조치하기가 너무 힘들 거고……. 응? 요슈아."
요슈아는 제리의 애원 섞인 부탁과 그 시선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제리의 논리에 요슈아는 어떤 반발심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명백하고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거부하고 싶었고 거절하고 싶었다. 제리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찌푸려진 미간을 짚은 손 아래로, 시야가 흐릿해진 눈동자—이상하게도 누구보다 빛나는 것과 동시에—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슈아는 이렇게 되기 이전—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자신을 심히 우습게 흉내 내는 듯한 기분으로 몸을 구부려서 낮은 탁상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 안에서 혈액 팩을 꺼내 들었다. 밀봉된 부분을 뜯는 소리가 공사장의 콘크리트를 부수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요슈아에게 있어 착각 같은 소음은 이제 와선 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난 너한테 늘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어."
그는 떨리는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마지막 피를 닦아내며 신음했다.
"그런데, 이제…… 어떡하면 좋아?"
10월의 햇빛은 너무나도 따사로웠으므로, 기상 캐스터가 요슈아 같은 이들의 피부를 걱정해 주지 않고 코너를 마치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붉은 피가 입가에 묻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만의 용감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무너진 채로 제리를 쳐다보았다.
매일 좀스럽게도 반복되는 폭발, 슬픔, 체념, 자기 연민, 자책, 자괴, 한탄. 그리고 흡혈.
3개월 전부터 요슈아는 낮의 시간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되었다. 큰 문제란 가히 그러한 규모여야만 했다.
그날은 클라이맥스 레코드의 연대기에 새겨져 이사 회의실에 길이길이 값비싼 자랑거리가 될 영광스러운 날 중 하나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촬영과 밤샘에 지쳐 정규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아직 연수 중인 신입 스태프들마저도 등을 꼿꼿이 편 채 대기해야 하는 그런 프로젝트의 마지막 촬영의 날. 출연진은 물론 평소에는 촬영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스태프들의 눈빛에서마저 희미한 기대감이 보였다. 요슈아는 세트장 위에서 OK 사인을 그리면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에게선 성공하고자 하는,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건 요슈아 또한 잘 알고 있는 심정이었기에, 그는 속으로 동질감을 비롯한 여러 생각을 하면서 세트장 내부의 지정석에 앉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정체 모를 불안감이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된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촬영의 흥행 여부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생긴 불안정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날카롭고 사나운 감각이었다. 모른 척하여도, 아는 척하여도 인지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을 듯한 막막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돌려서, 반쯤 시야를 움직인 채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물컹거리거나 축축한, 내지는 딱딱한. 그 어떤 낯선 감각도 닿지 않았다. 세트장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자 하니, 촬영 감독인 Y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예요? 천장에 물이라도 새요?"
"어? 으응, 아냐.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
"아무리 우리 회사가 블랙이어도 그렇지……. 설마 물 새는 곳에서 그 돈 들여가며 촬영하겠어요? 걱정하지 마셔요."
"아하하, 고마워."
요슈아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며 자세히 설명하려다가 참기로 했다. 어차피 촬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구태여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한 이들 사이에서 괜한 소리를 지껄여 긴장감을 조성하기는 싫었다. 하물며 '느낌'이나 '직감' 따위를 함부로 읊었다가 현실로 옮겨져 오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그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삼켜 오는 일을 잘했다. 어렵지 않게 에둘러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채, 그는 대기실에 구비용 마이크를 두고 온 것 같다며 다녀오겠다고 전달했다. 스태프는 촬영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다녀오란 말과 함께 그를 관계자용 출입구로 들여보냈다.
이른 새벽 촬영으로 인해 그들 외에 아무도 없는 건물 내 복도는, 요슈아가 음산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만큼 서늘하였다.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걷는 요슈아의 발걸음이 복도로부터 묘한 울림을 퍼지게 했다. 그는 브레이브 차일드 전용 대기실까지 향하는 길이 이리도 멀었나 생각하며, 쭉 보지 않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단 알림 센터에 제리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저녁 뭐 할까?]
오래간만에 홈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장을 보러 온 것일까 추측하는 동안 요슈아의 입꼬리는 어느덧 위로 슬그머니 올라가 호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는 곧 닥칠 위험조차 모른 채로, 그때 느꼈던 직감이나 불안감을 알았음에도 눈앞의 행복이 훨씬 더 선명하였기에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로 앞에 육중한 덩치의 사내가 떡하니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요슈아가 '전골 어때'라고 전송한 바로 그 순간—케이스를 끼우지 않은 핸드폰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큰 소리가 났다.
"……저어, 기. 여기는 관계자용 복도인데, 혹시 길이라도 잃었어?"
요슈아가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양옆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뒷걸음질 한 번, 가벼운 시선 돌리기용의 말 한 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그가 핸드폰을 제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때. 모든 시야가 뒤바뀌었다.
"윽……?!"
"이, 이, 이…… 인."
사내는 마치 정신이 흐트러진 괴생명체처럼 필사적으로 요슈아의 손목을 잡고, 다섯 손가락 전부를 사용해 비틀어 놓으려고 들었다. 요슈아는 벽과 사내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로 이도 저도 못한 채로 콜록거렸다. 그때, 급작스럽게 그는 사내가 반대쪽 손으로 짓누르고 있던 견갑골 바로 아래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피부를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기형적으로 세로로 발달한 송곳니였다.
눈앞에는 쉴 틈 없이 불쏘시개가 튀고,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숨이 막혀왔다. 뇌에서부터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고통을 완화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그런데도 요슈아의 입에선 얇고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 근육이 수축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따끔거림을 겨우 참아내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어깨 위에 그 남자가 머리를 들이민 상태였다. 그가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잽싸고 빠른 사내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며, 상처 부위를 파고드는 따스한 감각에선 구리라도 씹어 삼키려는 듯한 절박한 호흡이 더불어 느껴졌다. 요슈아는 미간을 한가득 찌푸린 채, 그를 걷어차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다음 곧장 정신없어 보이는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급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가 커다란 소음과 함께 복도 구석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는지. 그 사내가 덥수룩한 수염 아래서 으르렁거리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실실 웃고 있었다. 송곳니에 의해 찢어진 셔츠와 깊은 상처에서 흐르는 검붉은 자기의 피를 바라보면서, 요슈아는 의식이 점점 옅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일이지? 안 되는데, 오늘은 정말로. 오늘은 제리와 약속이 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그가 눈을 계속해서 깜빡거렸다가 마침내 멈췄다.
마침내 그는 익숙한 천장을 마주하면서 눈을 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이 평소보다 배는 더 깔끔하게 보인다는 점 정도였다. 그가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요전 날의 일은 전부 착각이었나, 꿈이었나. 그런 허무맹랑한 믿음과 함께—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 수도 있었고—욕실 문을 열고 세면대 앞에 선 순간이었다. 삼 초 정도 거울을 바라본 그는, 멍하니 있다가 양손으로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턱 끝에 땀방울이 아롱아롱 맺혔다. 그 어느 부분도 요슈아를 요슈아라고 정의 내릴 수 있도록 똑같이 남아 있었으나 단 두 군데만이 또렷하게 달랐다. 첫째로, 그의 상처. 둘째로,
"……노란색?"
그의 두 홍채가, 마치 페인트를 엎지른 것처럼 흉흉한 노란색으로 날카로운 눈매 안쪽에서 빛나고 있었다는 점.
21세기, 날마다 공연과 스태프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공인 신분으로서 흡혈귀가 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서바이벌'이라고 불릴만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대기실에서 팬에게 받은 도시락을 꺼내 먹다가 그대로 화장실에 가서 전부 게워냈을 땐 자기도 몰랐던 게살 알레르기가 있었다며 한 시간 동안 길고 긴 변명을 쏟아부어야 했다. 제리는 주로 여러 군데에서 남는 피를 사 오거나 받아오다가, 그것도 모자라기 시작하자 고민하던 끝에 병원이 한적한 틈을 타 몇 개를 챙겨 오는 일을 반복했다. 둘 중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피를 공급받지 않으면 요슈아는 전설 속 흡혈귀처럼 점점 햇빛에 노출되는 일에 약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에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 브레이브 차일드를 판다 사장이 가만히 놔둘 리도 없었기에, 그는 인간적으로 역겨운 감각과 흡혈귀의 시점에서 풍미가 느껴지는 피를 마시면서 어느 쪽이 지금의 본인에 더 가까운지 매번 고민했다. 이따금 인간의 피를 먹고 싶을 때가 찾아오기도 해, 그는 자기 피부에 상처를 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요슈아의 피부 아래 숨겨진 혈액은 검붉은색이 아니라 그의 눈동자와 같은 선명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그 맛 또한 시멘트를 삼키는 듯이 텁텁했고, 까슬거리며 혀뿌리에서부터 욱신거리며 타들어 가는 기분을 동반했다. 결국 거진 한두 달 내내 그의 식사는 돼지 피, 사슴 피, 그도 아니면 토끼 피나 소피가 전부였다. 각각 어느 맛이 무슨 짐승의 것인지 알아맞히는 일도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목소리가 잘 안 나오니?"
"……응, 오늘 연습은, 내일로 미뤄도 될까?"
"그래, 어쩔 수 없지. 아까 들어보니까 상태가 안 좋긴 하더라, 어서 가서 푹 쉬렴."
유키의 마지막 말에 요슈아가 움찔거렸다. 흡혈귀가 된 이후 생긴 가장 큰 말썽은 목소리가 예전처럼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요슈아는 평소에 얇고 시원하게 음역을 높여서 단번에 스크리밍 하는 기술보다도 한 단계씩 높여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창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면서, 목구멍 안쪽이 기형적으로 붓기 시작함에 따라 그의 자랑이나 다를 바 없는 맑은 목소리가 어딘가 턱턱 막히는 듯이 의도한 것보다 한두 음역 아래에서 멈추기 시작했다. 처음 이상을 감지했을 땐 다들 실수이겠거니, 컨디션의 난조이겠거니 싶었지만, 벌써 일주일째였다.
요슈아는 화장실 안쪽에서 챙겨 온 혈액 팩의 포장을 뜯어 물었다. 고개를 들면 낡은 조명이 깜빡거리면서 요슈아를 비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편으로 천장의 녹슨 때가 껴 있는 천장 구석이 조명에 반사되어 보였다. 사실, 일전에 제리에게 어떡하면 좋겠냐며 물은 뒤로 요슈아는 단 한 번도 혈액 팩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다는 약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반항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요슈아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다른 부위들마저 조금씩 반응은 오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으면서 마른세수했다. 그날, 제리는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요슈아의 상처를 말없이 치료해 주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그리 덧붙였다.
"넌 네 생각만 해 줘."
하지만, 제리. 이미 난 네 생각만이 궁금해.
전해질 리 없는 말을 삼키며 화장실 쓰레기통에 혈액 팩을 버리고 나온 요슈아는 세면대 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은 부패하고 썩어가는 순환이 당연한 동물이며, 요슈아는 이를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하게도, 아주 불운하게도 그가 괴인과 부딪힌 탓에 인간으로 남지 못했다. 요슈아의 양손에는 거친 힘이 들어가 서글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애매한 욱신거림이 담겼다. 홀로 있는 거실에서 스탠드 하나만 켠 채 곡의 악보를 완성하고 있을 때, 제리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이유 모를 순간에, 멤버들 사이에 둘러싸여 녹음을 체크하는 그때마다 인간이 아니게 된 그는 외로움이라는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 안에서 끊임없이 헤매야 했다. 그저 주 식사가 혈액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마땅히 그래야 했나. 답을 얻고 싶어도 묻는 순간부터 돌아올 시선이 어찌나 의미심장할지 몰라서, 그저 모른 척 웃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로 나섰다. 머릿속은 이미 진작부터 망가진 듯 온갖 생각으로 빙빙 돌았고, 손바닥은 녹아내린 긴장이 식은땀으로 변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목을 쭉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놀란 채로 멈췄다. 복도 모퉁이 쪽에 제리가 서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인사하면서, 오른손에 쥔 쇼핑백의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상처 부위의 밴드 가는 것도 깜빡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겸사겸사 인사를 하러 왔다는 말이 이어졌지만, 그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겸으로 종종 찾아온 적은 잦았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원치 않았다.
"제리, 이런 건, 안 해 줘도 돼."
"내가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너만 안 불편하다면 난 괜찮아."
제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요슈아는 잠시 상상했다. 끝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실망할 제리를.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두려움은 모두의 본성이었다. 그가 '괜찮지 않아'라고 짧게 중얼거리면서 대답하자 제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제리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고, 그 안쪽은 평소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요슈아는 계속해서 부정해 오던 것에 이름을 다는 행위가 두려워 치졸하게 무시하다가, 끝끝내 자신을 붙잡는 손에 체온이 있음을 명백하게 깨닫고서야 외쳤다.
"왜, 왜 계속 괜찮다고 하는 거야? 제리, 아니야. 하나도 괜찮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긴장인지,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혀 끝에서는 부정의 쓴맛이 났다. 다른 누군가가 답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다가도, 약하게 웃었다.
"난, 이제 제리 너랑은,…… 함께 할 수가 없잖아. 그야, 이런 몸인데. 기분 나쁘지? 사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너무 외로워서, 네가 없는 나는 생각하기가 무서워서 그랬어."
그는 심호흡한 채, 마지막에 가서야 애원하는 눈빛으로 제리를 보았다. 이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운을 띄우면서.
"이제 나 같은 건 모른 척해도 돼."
해결할 방도조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서로 약한 부분을 공유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영원을 살아간다. 그저 물살에 휩쓸리듯이 텁텁한 말은 전부 삼키면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세 음절의 진심은 미루고 미루던 종결을 재촉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건네는 인사는 늘 같았다. 눈밖에 내리지 않는 깊은 산 안쪽 오두막에서 제리가 눈이 쌓인 길을 따라 걸어오며 요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침이네."
그는 제리가 걸어오면서 가볍게 건네는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뜬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저 먼 산맥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는 태양 빛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의 공기는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여름철 다다미방처럼 선선했고, 근처에 피워 둔 모닥불에서 나오는 희미한 나무 연기 냄새와 코끝을 스치는 묘한 젖은 이슬 향이 섞여 있었다. 맨피부로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지탱하던 그의 발밑으로, 낙엽과 잔가지로 뒤덮인 부드럽고 축축한 눈밭이 닿았다. 그는 밤에 혀를 깨물었을 때와 엇비슷하게 남아 있던 잔향에 눈살을 찌푸리며 깊게 심호흡했다. 다름이 아니라 죽은 사슴의 날카로운 뿔이 그의 발가락을 찌르듯이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해가 완전히 뜨면서 요슈아의 눈동자를 하얀빛으로 비출 만큼 선명하게 빛났다. 그는 망막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도 눈을 감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 빛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이마 위로 투명한 땀방울이 맺혔다. 슬프다고 말하기에도 낯선 어색한 감정만을 느끼며, 그는 제리의 어깨를 그러안고 뺨을 문질렀다.
추위에 얼어붙은 그의 뺨에 요슈아의 손가락이 닿자 제리는 조금 움찔했다. 뜻 모를 대비는 그도 모르게 몸을 떨도록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작은 위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요슈아의 검지 끝에서부터 미비한 진동이 피부를 타고 전달되었고,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리를 향해 등을 숙였다. 뺨 위에서 오갈 데를 모르고 머뭇거리던 그의 손은 어느새 제리의 입술 위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변덕스러운 계절로 인하여 심히 건조해져 있었고, 요슈아는 손끝을 스치는 그 건조함을 차마 제대로 마주하기조차 힘들었다.
"미안해."
요슈아의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어버려서. 정말, 미안해."
말머리에 잠잠하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비명처럼 쉰 목소리로 희미하게 변했다. 그는 제리가 백 번을 괜찮다고 말해도, 백 한 번을 사과해야만 했다. 설령 이 모든 일이 그가 원해서 벌어지지 않았을지언정 사과하지 않으면 변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 더욱이 강해지고 싶었던 사이였던 제리를, 어느새 그와 함께 약해지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면서부터 잠잠하던 어깨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마치 그때 그 괴인이 억지로 상처를 후벼파서, 남아 있는 요슈아의 혈액마저도 전부 삼키려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자기 팔을 굽힌 채로 당겨서 제리와 맞잡은 두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댔다. 따스한 호흡 아래 입김이 새어 나오고, 그것은 괜스레 인간성의 증명처럼 느껴져서 더욱 가파르게 숨을 쉬었다. 요슈아는 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제리와 눈을 마주쳤다. 정면에서 마주한 제리의 눈동자는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것처럼 깨끗한 네온사인처럼 노랗게 빛났다. 둥근 형체에 빛이 반사되어, 형형 색깔의 프리즘이 섞이자 그 노란빛은 더욱 이질감이 들 만큼 강렬한 색채를 뿜어냈다. 그들 주변에는 색을 품은 풍경이라고는 오로지 위로 곧게 뻗은 고동색 자작나무와 그 위를 풍성히 가린 짙푸른 잎사귀들, 그리고 그 위와 아래 전부를 덮은 눈이 전부였다. 이곳에 오자고 제안했던 제리의 표정을 보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제리를 향한 다양한 감정들 사이에서 늘 고민했었다. 우정과 향수, 동질감, 배타적인 연민, 조금의 애정, 말로 못다 할 연정과 보은의 값어치들 사이에서.
"요슈아. 우리 약속했잖아."
그러다 마지막에 항상 선택하는 단어는 형태를 변동시킨 사랑이었다. 수식을 바꿔서, 형식을 바꿔서, 맥락을 바꿔서 전달하는 사랑은 언제나 변하면서도 남아 있는 것이라 모순적인 영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제리의 말에 짐짓 움찔거리던 요슈아는 제리를 보기 위해 손을 내리다가, 그의 얇은 손목에 난 상처가 어느덧 눈발에 녹아내려 거의 희미해졌음을 깨달았다. 한쪽 가슴이 묘한 욱신거림을 동반하여 쓰라렸다. 어젯밤 억지로 삼킨 사슴의 피가 상하였는가, 그도 아니면 요슈아 본인이 버티기 힘들 만큼 상하였는가. 어느 한쪽이든 요슈아는 그날 기억만큼은 평생 부패시키지 못한 채로 간직할 것임을 알았다.
그날, 요슈아가 버티고 버티다 못해 제리의 품에서 무너져 고해했던 날. 그는 자신이 머저리가 된 듯한 기분에 자조하며 마른 웃음을 토했다. 이래서야 제리의 옆에는 떳떳하게 설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면서, 갖가지 망념에 사로잡힌 채 그의 옷자락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가 그러는 동안에 제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흘러들어오는 부정적인 예감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요슈아의 어깨 바로 아래를 약하게 잡았다.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것은 제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 그러한 것은…… 어떤 방정식이나 공식을 통해, 입증을 통한 것보다 더욱 간결한 본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요슈아가 힘겹게 내뱉은 '외로워지기 싫다'라는 감정은 해결해 줄 수 있을 듯했다.
제리는 고민 끝에 혀를 입천장 위에 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고통을 삼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제리는 가방을 열어젖히고 뒤적거리다가, 코팅된 용지 하나를 찾았다. 칼날만큼이나 날카롭게 코팅된 용지 하나는 제대로 베이면 깊은 상처가 날 것 같았다. 용지를 든 제리의 오른손은 척 보기에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거나 힘을 주어서 내려치면 그대로 힘없이 떨어트릴 미래가 선했다. 그런데도 부득불 왼쪽 손으로 떨리는 손목까지 지탱해가며 놓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요슈아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 자신의 마음보다도 그를 소중히 하고자 하는 보은이 훨씬 절실했기 때문에.
요슈아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제리는 결국 일을 저질렀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부위 위로 한 번 더 선이 그려졌다. 이번엔 더 깊었다. 몇 날 며칠을 굶어 온 요슈아에게 있어 그 향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좌절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훅 맡아지는 냄새에 고개를 들고 제리 쪽을 급하게 돌아보았다. 제리는 식은땀을 이마에서부터 턱 끝까지 흘린 채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급박하게 눈을 부릅뜬 그가 제리를 향해 소리쳤다가, 입 근처로 훅 다가온 잔향에 호흡을 삼켰다. 제리가 일부러 그에게 다친 팔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오갈 데 없는 시선을 방랑하도록 놔둔 채 자신의 건조한 두 손으로 제리의 팔을 지혈하기 위해 쥐었다. 사방이 붉었다. 요슈아는 노란 눈으로 보는 붉은 세상이, 자신이 살던 세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제리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잃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요슈아의 팔뚝을 왼손으로 쓸어내리며—혹은 거의 그러안으며—답했다.
"……네가 외롭지 않아야 나도 외롭지 않아. 알잖아, 요슈아."
다음으로 올 요슈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입이 벌어진 사이 제리가 눈을 꾹 감은 채로 그의 송곳니 사이에 자기 팔을 들이밀었다. 요슈아의 의지와는 별개로 신경과 이어진 송곳니는 마치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양 피의 잔향을 감지하자마자 곧장 움직였다. 신경이 지나가는 혈관에 송곳니가 미약하게 박히는 순간부터 제리는 온몸의 근육이 한계까지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변화가 그대로 느껴졌다. 요슈아가 느꼈던 감각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겠구나, 정말로 아팠겠구나. 말로 전할 수 없는 공감을 애써 눈빛으로 전해 보기 위해, 그는 요슈아의 팔뚝을 잡은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문지르면서 요슈아가 제 얼굴을 쳐다보도록 했다. 불과 몇십 초도 되지 않는 짧은 흡혈이었기에 요슈아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본 순간엔 이미 송곳니가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제리의 피를 삼키지 않고 뱉어냈다. 옆으로 젖혀진 고개 아래서 피와 섞인 기침을 토했다. 콜록대는 요슈아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는 다른 것은 신경 쓰지도 못한 채, 급하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른팔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을 보며 주저앉은 상태였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가만히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요슈아는 그 두 가지 모두 정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제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면해 있다가 깨어난 산짐승처럼 미약한 정신을 연결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변화한 몸에 맞추어 감각을 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였다. 요슈아는 흡혈귀가 된 몸을 돌려놓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읽었던 수많은 고서 중 한 책에서 보았던 구절을 떠올려냈다. 그 문장은 끔찍이도 들어맞았다.
저주는 종속되고, 이어지고, 연결된다. 그것이 타당한 법칙.
두 가지 색이 섞여 묶여 있었던 머리카락이 어느덧 풀려서 바닥을 덮을 듯이 흘러내렸다. 어두운 밤을 볼 때면 늘 생각했던 잔잔한 불빛.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지도, 가슴 아플 정도로 어둡지도 않은 그 사이에서 제리의 눈동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란색 홍채로 변해, 입술 끝에 본능을 품고 다시 태어난 것이 명실상부했다.
"……제리! 아, 내, 내가 무슨……? 너, 너 지금!"
요슈아는 파리해진 입술을 물어뜯으면서, 급하게 정신을 차린 채 몸을 일으켜 제리를 부축했다. 손끝 하나까지도 떨려 온전히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요슈아는 제리를 품에 안은 채 계속해서 형체가 뭉개진 말을 뱉었다. 이건 전부 자기 탓이라고, 나 때문에 이리된 것이라고. 그러나 정작 제리는 요슈아와 자기 팔을 몇 번 멍한 눈으로 번갈아보더니, 피가 묻은 손으로 붉게 물든 눈두덩이를 꾹 문질렀다. 볼 위로 젖은 피가 묻었다. 요슈아는 제리가 자신을 보자마자 사과부터 담으려 크게 입을 벌렸지만, 제리는 약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을 품에 안은 요슈아의 팔을 잡고 울 듯이 웃었다. 목소리가 잠겨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마음이 분명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훗날 멀고 먼 날, 요슈아를 아끼고 또 그 본인이 아끼는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게 되어 결국 그 혼자 남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미안해야 할 건 나야, 요슈아. ……네가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요슈아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빛나는 인물이니,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와 계속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혼자만의 이별을 반복하는 일이 쉽다는 뜻은 아니리라. 만약 요슈아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래서 모두가 떠나가 홀로 남겨지는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면 그는 정말로 외롭게 되지 않을까.
"네 상냥함을, 네 노력을, 무시해버렸어. 정말 미안해."
아니, 어떤 것들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 앞으로 있을 요슈아 몫의 사과까지 전부 내가 할 테니까."
그게 틀리든 맞든 적어도 더 낫게 살아가고 싶어 힘을 주고 휘둘렀던 그 수많은 칼날이,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정말로 죽고 싶은 나머지 휘두르는 것이 될까 봐. 그 가정이 두려워 제리는 언제나 떨었다. 그러니 응당 이기적이라 질타받아야 할 사람은 본인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슈아의 눈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눈물을 삼킨 채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표정을 지으면서. 상대와의 약속으로 쓰라린 고통을 문지르면서. 다가올 내일의 아침 햇빛이 지금보다는 덜 강하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부탁으로 내뱉었다.
"부탁이야, 그런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요슈아는 제리가 건넨 부탁을 언제나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로 머물러 있었다.
곁에 있는데도 이전처럼 우스갯소리로 영원을 약속하는 일도 힘들어졌다. 이 순간에 상대만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떳떳하게 서 있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럽게 느껴졌기에, 그러다가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과 마주치면,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낯부끄러워졌기에. 요슈아는 제리와 눈이 마주치자 한없이 둥근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짓고, 젖은 눈을 감았다. 제리는 그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힘겹게 정면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발밑에 잠든 수많은 짐승과 그 속에 같이 잠든 쇠 비린내 나는 핏물. 하물며 발가락 틈새 사이사이에 머문 눈송이에도 시선을 돌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모든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요슈아는 그런 제리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노란 눈과 마주치자 그 말마저도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면서, 시큰거리는 눈물을 닦고 중얼거렸다.
"……응, 눈부시다."
일출 이십 분 전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