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antino
Andantino

@seasonaletter

 

 

꿈결처럼 새하얀 오선보 그 위에 그려지는 자그마한 음표들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기억을 꺼내 단둘만의 선율을 탄생시키자 하나의 음이 선을 오르는 것처럼 보폭을 맞춰 걷는 발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제목조차 정하지 않은 악보가 창조되는 순간 걸음이 엇갈리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멀어지는 낮은음과 높은음이 서로를 그리워하고 손가락이 맞물려 옆의 건반을 치는 날에는 찰나의 공존을 추억으로 새긴 채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기를 택하고 누를 때마다 동일하게 똑같은 음 똑같은 마음 똑같은 미소로 연주자에게 확신을 주는 순백색의 건반이 옆에서 존재를 알린다 제목을 정하는 장면을 마주하면 각자의 음이 덧붙어져 화음으로 회귀하는 연주로 귀결된다 햇볕에 그을려 만들어진 악보의 주인공은 단연코 너라는 것을 알아둔 채로,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조금 느리게, 첫걸음을 되새기면서 조금 느리게 흰 건반을 누른다

requited love
requited love

@sakae_Cheers

 

 

'찬란한 빛줄기 속, 무구히 숨쉬는 네 곁에서 나 또한 사랑을 지저귈 수 있기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검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의아함에 웃음이 새어나온다. 생기가 없는 인형 같은 얼굴은 언뜻 무표정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연인인 나는 그녀가 드물게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어렵지 않았다. 나와 똑 닮은 잿빛이 섞인 검은 머리카락이 우아한 절제미를 자아내어 무심코 머리카락을 쥔 손에 소리 내며 입을 맞췄다. 작게 입을 벌렸으나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그녀는 이내 가만히 몸을 돌려 나와 눈도 안 마주친다. 나에게 보여주는 뒷모습 가운데 붉게 물든 귀를 발견한 나는 우리 둘뿐인데도 부끄러운지 물었다.

 

"……나는 오늘 브레챠가 앨범 화보를 찍는다 해서 일행인 내가 실수하진 않을까 모든 게 조심스러웠는데 촬영이 끝나자마자 막무가내로 옷을 갈아입혀서 놀랐어."

 

확실히 지금 눈앞의 제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가슴도 많이 파여 있고 색감도 밝아서 그녀가 고를 만한 취향은 아니었다. 바람을 담은 듯이 질감이 고운 청색 드레스는 다소 화려한 느낌이었지만 가슴팍 위로 덧댄 검은 프릴과 허리 뒤로 호선을 그리는 검은 리본이 차분한 인상을 더하여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그녀와 잘 어울렸다. 애써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직접 고른 의미가 있었다. 물론 제리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노출이 지나친 거 같아. 아무리 나랑 요슈아 밖에 없다지만 이건 좀 부끄러워."

 

고개를 홱 돌리며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마다 새까만 머리카락 위로 장식된 순백의 리본이 조금씩 흔들리는 광경은 마치 그녀의 말을 공감해주는 것처럼 와닿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걸 알고 있음에도 제리는 짙은 속눈썹을 수시로 깜빡이며 어색해한다. 나는 딴청을 피우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귀여운 건데.'

 

제리는 자신의 모습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게 얼마나 엉뚱한 소리인지도 모르고. 검은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는 불가능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란 모순적인 의미를 지닌 파랑 장미를 연상시켜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남들은 좀처럼 제리의 표정 변화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마 지금도 다른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제리가 화가 난 거라고 지레짐작할 것이다. 오직 나만이 알아보고 헤아려주는 연인의 모습은, 함께할 때마다 마찬가지로 연인의 특권이었다.

 

치마를 매만지며 초조해하는 제리를 향해 나는 속마음을 바깥으로 내보이는 대신 자그마한 귓가에 저음을 속삭여 화제를 돌리는 걸 택했다.

 

"괜찮아. 오늘은 브레챠의 화보 촬영 날이기도 하지만 단둘이서 뒤풀이를 하는 날이기도 하거든."


"……그래서 오늘 멤버들을 먼저 퇴근시킨 거야?"


"그런 셈이지. 멤버들과는 이번 헤드라이너에 발표한 두 곡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지만 아직 제리랑은 못 했으니까."

 

동그랗게 눈을 뜬 제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위로 씰룩 움직였다. 기쁘고 설렌다는 의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신없었으면서 이제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입을 보기 전부터 두 뺨이 싱그럽게 상기되어 있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런 꾸밈없는 그녀를 어째서 못 알아채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갑자기 왼쪽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영문 모를 미운 통증이 번져 갔는데 아픔은 익숙한 터라 담담히 받아들인 나는 말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얇은 허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다른 손으로 가녀린 손을 마주잡으니 프릴과 같은 검은색의 장갑 감촉이 기분 좋았다.

 

"비밀과 신록 사이로 부는 바람의 네 노래 감상을 듣고 싶어."

 

두 노래 모두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 제리한테 먼저 들려주었다. 애초부터 제리와 함께한 나날을 그리며 쓴 인생이고 사랑이었다. 내 마음을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자 진심은 겁쟁이인 나로서 노래뿐이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내뱉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밀의 가사 중 요슈아는 나와의 관계를 작은 거짓의 조각으로 인해 바람 속 깊이 현혹되어 함께 헤매인다고 적었잖아. 그런데 나는 거기서 길을 잃어 원망하기보다는 요슈아와 같이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째서?"

 

마음을 굳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까지 자신이 한심해서, 과거 때문에 정상적인 일상을 보낼 수 없다고 제 탓을 돌리며 제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후회가 이따금 나를 괴롭혔는데…… 도리어 제리는 나와의 관계를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깜깜한 칠흑 위로 투명한 초점이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비밀의 제목과 가사처럼 우리에겐 함께 떠안은 비밀이 있어. 하지만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서로가 사랑이 뭔지도 몰라서 그런 거잖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

"그리고…… 우리가 깊은 바람 속에서 헤맨 덕에 신록이 반짝이는 바람의 곁에 닿을 수 있던 거니까 괜찮아. 요슈아가 나 말고 필요없다는 독백에서 기꺼이 그래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들었어."

 

수줍은 듯이 고운 미소를 머금은 제리의 눈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고개를 돌렸다가는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열기를 금세 들키고 말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내 마음을 들쑤시는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달콤한 감각으로 나도 모르게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자 애틋한 온기가 천천히 가슴 쪽으로 퍼져간다. 이 넘쳐흐르는 연심을 옮겼으면 하여, 나는 충동적으로 허리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얼굴의 각도를 틀어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달뜬 숨을 들이키는 서로의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리고 나는 머지않아 고백할 진심을 고이 삼켰다.

 

'응…… 훗날 함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할게. 사랑해. 제리.'

Gravitational Acceleration 1.625
Gravitational Acceleration 1.625

@fyodornohime

 

 

제리에게 지구는 차라리 무중력 상태에 가까웠다. 교실에 앉아 만유인력의 공식을 받아적으면서도 열여섯 제리는 도저히 중력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다. 질량을 가진 물체들 사이에 반드시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교과서의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었다. 햇볕이 유난히 희던 한낮, 선생님의 목소리가 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리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새 몇 마리가 눈이 시리도록 파란 산 호세의 하늘을 일제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보란 듯이 중력을 거슬렀다. 그러다 두 날개가 지치면 다시금 저들을 끌어당기는 지구의 양팔에 이끌려 지상으로 돌아왔다. 제리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허나 새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새였다면 한 번 날아오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하염없이 날아가기만 하는 풍선처럼. 이곳에 나를 끌어당기는 힘 같은 것은 없어. 깊은 외로움의 고해 같은 문장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녕 만유인력이 실존한다면 모든 것은 단지 자신의 문제이리라. 질량이 없는 영혼. 질량이 없는 마음. 정확히는 모든 질량을 지구가 끌어당길 수 없을 만큼 머나먼 달에 두고 와 버린 사람처럼 발끝이 하염없이 가벼웠다. 생각이 이만큼 다다랐을 때 제리는 또 한 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리는 언제나 달을 그리워하는 사람 같았다.

 

요슈아는 지구의 중력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이 끝내는 살점에 흠집을 내고 피를 보였다. 그의 창백한 손목에는 언제나 두어 개의 혐오와 대여섯 개의 강박이 자리해 있었다. 흉터는 좀처럼 지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멈출 수 없었다. 사랑하는 것들의 무게에 짓눌리는 일은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웠다. 요슈아는 거울에 비친 자잘한 상처들을 마주할 때마다 아주 노후한 조각상이 된 기분을 느꼈다. 갈라진 틈으로 부스러기를 쏟으며 깨어질 듯 말 듯 위태한 석고상. 위태로움을 들킨다면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오랜 두려움이었다. 그는 금이 간 손목을 억지로 여밀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 이따금씩 해방을 바라기도 했다. 허나 그에게 자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길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꺼이 나침반이 되어 줄 별이 오래도록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 살기엔 부적격한 두 사람이 지구를 벗어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제리의 선택지에는 언제나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 있었고, 때때로 높다란 건물 위에서 아득한 아스팔트 바닥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습관도 여기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제리가 처음으로 까마득한 바닥을 내려다보지 않은 날, 눈앞의 달을 보고 어떠한 영감을 얻은 듯이 그는 읊조렸다. 밤의 천체를 닮은 은색 눈동자 두 쌍이 맞물리고 있었다. 요슈아, 우리가 이곳의 중력을 견딜 수 없다면……. 제리는 말끝을 흐렸지만 요슈아는 미완의 문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감감히 웃으며 화답했다. 알고 있어. 달의 중력은 지구의 육 분의 일이지? 쏟아지는 달빛처럼 마침내 제리의 낯에도 미소가 번졌다. 응. 달에서라도 좋으니, 같이 살아가는 거야. 두 사람의 계획에 우주선 따위는 필요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망설임 없이 눈앞의 달을 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리탄
나폴리탄

@ghostinkansai

 

 

아가씨, 그 너머로 가지 말아요. 양의 노래를 들으면 미쳐버린답니다. 이 너머에는 인간을 현혹하는 노래를 부르는 양의 무리가 있습니다. 아가씨의 걸음이 그리로 닿아서 좋을 일이 없어요. 저 양의 무리는 죽음을 먹고 자랍니다. 죽음을 거듭할 수록 양의 이름은 이 대지에 널리 퍼지겠지요.

 

아가씨는 어찌해서 그 초석이 되려 하나요

아가씨는 어째서 그 유명遺命을 따르시나요

 

 

소년의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었고, 소녀는 그런 그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소녀에게는 아주 깊은 죄와 깊은 슬픔이 하나 있었다. 죄의 이름은 동경이고, 슬픔의 이름은 숙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커다란 인간 외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런 것도 지닐 수 없었다. 그 무소유의 끝에 그녀는 결국…….

 

안긴 품은 서늘하고 또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그 멈추지 않고 흐르는 마음도 동경하였다. "나는 당신처럼 되고만 싶어요." 따위의 말을 지껄이려던 입은 어느새 양의 말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 양은 슬플 정도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에 대해서 모두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런 그의 시선에서 그러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양의 노래는 '동류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견지하고 있어서, 그녀를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입 안에 자라는 마음을 수확하기로 하였다. 낫으로,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키스를 통해서일지도 몰랐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주문처럼 어떠한 말을 속삭이게 되었다. "나는 당신처럼 네 발로 걷고, 당신처럼 노래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말들은 입 속에서 자라 새카만 모양을 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양의 노래는 결국 사람의 노래가 될 수 없었다. 양의 노래는 결국 사람을 죽여버릴 노래다. 양은 사실 두 발로 걸으며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를 두려워하고 또 주저한다. 악귀를 물리친다는 사람들의 걱정과 마음 그리고 바람을 아주 오래간 들은 그녀는 결국 자신이 동류가 되려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오래 가지 않아 실천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실천이 빠른 것이 장점이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그랬다. 죽고 싶지 않았던 마음은 죽음의 노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어, 염원의 끝과 아주 끝에서. 그에게 자신도 울음을 배우고자 하는 시선을 아주 애달프게 보내면서, 처절하고, 또 아주 조용하게.

 

네 발로 걷게 될 수 있게 된 소녀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몸은 차갑게 식었고, 그 땅에서는 또 검은 사과나무가 일어날 터였다. 그것을, 악마의 동포는 모두 먹어 치웠다.

양떼의 악마 羊の群れの悪魔
양떼의 악마 羊の群れの悪魔

@ghostinkansai

 

 

그것은 어느 날 양의 모습을 하고 다가왔다. 그것의 동포들이 소녀에게 말을 걸기로 결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발과 두 다리를 가지고서,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다닌다. 그러고 나서 끔찍할 정도로 슬픈 이야기를 지껄이기 시작한다. '너는 나와 하나가 될 수 없어.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면 너는 죽음을 택해야만 해.' 선택지가 없는 인간은 결국 내려쳐지는 칼날에 목을 들이민다. 그 목이 굴러떨어질 때 악마는 자신들의 동포에게 먹일 수 있게 된 사과 한 알을 얻게 된다. 사람 한 명이 사과 하나가 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살고만 있었다. 그들의 검은 입 속에서는, 소녀의 비명을 먹고 자라는 사과나무가 있다고들 한다. 양은 사람을 동경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피와 살과 뼈로 만들어진 뿔.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몸부림친다. 인간의 몸부림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춘다.

불면증에 걸린 현재와 사이클롭스
불면증에 걸린 현재와 사이클롭스

@juststayus

 

 

식사시간을 기다리는 개의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정기적으로, 요일은 정해두지 않은 채 열쇠를 꽂고 돌리는 소리가 나면 요슈아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나 왔어, 하고 반갑도록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슈아는 제대로 '응'이라고 답해 주고 싶었지만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잿더미를 씹어 삼킨 후에 내뱉은 찝찝한 신음뿐이라 그저 갈라진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불을 다 꺼둔 거실 안 소파 위에 누워, 팔로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아주 미세한 햇빛마저 차단하려는 듯 팔꿈치로 강하게 눈두덩이를 짓누르면서. 오지도 않는 잠을 애써 청해보려고 하는 미련한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게 보였다. 요슈아는 자신의 두 눈을 덮은 팔의 위치를 조정해서 손가락 틈새를 벌렸다. 흐리멍덩하게 검은 거실이 점점 구석구석 쌓인 먼지까지 보이는 변화에는 구역질이 났으므로……. 그가 굽은 등을 펴면서 소파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현관 복도의 모퉁이를 지나 제리가 거실로 모습을 드러내 그가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리는 카펫 위로 발가락을 말았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요슈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떨어지는 길을 따라갔다. 따라가고 따라가며 시선이 움직인 끝자락에는 어둠 속에서 형광으로 빛나는 노란색 홍채가 보였다. 어둠이 드리운 바닷가의 등대처럼, 그것은 어찌나 밝은지 거실을 포함해 온 집안을 덮은 그림자를 뚫고 선이 가느다란 이목구비를 비추었다. 아니 어쩌면, 어두웠기에 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불, 또 다 꺼두고 있었구나."

 

제리의 어조는 평이했다. 그에게 요슈아를 책잡으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요슈아는 미간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거동으로 똑바로 앉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어찌나 끔찍한가. 실이 없는 쿠션 사이로 스며드는 습기에 오른손 손등이 욱신거렸다. 제리가 도착하기 전 탁상 스탠드를 밀쳤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40달러였던가, 4달러였던가? 아니…… 4천 엔이지. 그렇지. 여긴, LA가 아니지. 그는 생각하면서 중얼거리듯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미안. 너무 밝아서…… 다음부터는 네가 올 때 맞춰서라도 꼭 켜고 있을게."

 

그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발밑 주변에 흩어진 채로 널브러진 갖가지 오선보와 불이 깜빡거리는 기기들을 옆으로 슬쩍 밀었다. 혼자 있었다면 그러한 조심스러움마저도 없었을 테지만, 제리가 있으니 그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짐승 본연의 모습은, 요슈아가 그토록 싫어하는 멍청한 이들과 퍽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실패한 무명 아티스트 같지 않은가. 정작 최근 브레이브 차일드의 주가는 최고치를 달리고 있고, 판다 사장은 새로 뽑은 이사진 한 명에게 시달려 예전처럼 폭정 수준의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어, 지금만큼 그가 걸어 온 음악의 길에서 좋은 순간이 따로 없을 텐데. 그런 요슈아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이 제리가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요슈아가 불편하다면 이렇게 해 둬. 이제 나도 익숙한걸."

 

제리는 검은 그림자 아래 파묻힌 깨진 유리 조각들을 모른 척해야 할는지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가방에서 소독약과 밴드, 그다음으로 가지고 온 혈액 팩들을 꺼냈다. 그곳에는 돼지 피, 사슴 피, 병원의 보관소에서 몰래 훔쳐 온 O형 혈액 팩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가죽 가방의 지퍼를 열기도 전부터 공기 중에 흐르던 쇳내가, 요슈아에게 있어선 마치 진수성찬을 대비하라는 듯한 신호탄의 연기처럼 맡아졌다.
몸이 반응하는 것과 별개로 요슈아는 요슈아였다. 동물이든 무엇이든 함부로 해치지 않으려 들고, 누구보다 먼저 중재하려고 나서고, 좋은 면을 우선하여 보려고 하는 사람. 그런데도 요슈아는 노란색 홍채 가운데 동공이 서서히 수축하면서 자꾸만 혈액 팩 쪽으로 시선이 가는 본능이, 원치 않게 탑재되어 움직이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소리를 간단히 섞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리, 나 정말 괜찮아, 다른 음식도."
"저번에 쓰러졌던 때 기억 안 나?"
"그건."

 

요슈아는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손으로 자신의 입을 꾹 눌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전부 괜찮다며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깊숙한 장소에 묻어두려고 최선을 다했다. 요슈아가 내비치는 모든 비자발적인 경련과 울렁이는 요동을, 비디오 셔터를 누른 뒤처럼 빠짐없이 전부 관찰해 가면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요슈아가 어떻게 여길지는 제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요슈아는 자신이 먹이를 받아먹는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자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리는 요슈아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 생각에 대해 결단코 아니라 말하고 싶었으나, 식사를 준비하는 이가 자신임을 깨닫고 못내 고개를 숙였다. 그가 힐끔거리며 시야를 옮겼다. 요슈아는 손가락 뼈마디가 튀어나올 듯한 세기로 주먹을 쥔 채 깊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이렇게 동물 피라도 마셔 두면 적어도 너도 모르는 사이에 어지럽히거나, 정신을 잃는 일도 없잖아. 게다가 나랑은 다르게 요슈아는 카메라 앞에 설 일도 너무 많은걸…….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돌발 상황은 조치하기가 너무 힘들 거고……. 응? 요슈아."

 

요슈아는 제리의 애원 섞인 부탁과 그 시선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제리의 논리에 요슈아는 어떤 반발심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명백하고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거부하고 싶었고 거절하고 싶었다. 제리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찌푸려진 미간을 짚은 손 아래로, 시야가 흐릿해진 눈동자—이상하게도 누구보다 빛나는 것과 동시에—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슈아는 이렇게 되기 이전—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자신을 심히 우습게 흉내 내는 듯한 기분으로 몸을 구부려서 낮은 탁상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 안에서 혈액 팩을 꺼내 들었다. 밀봉된 부분을 뜯는 소리가 공사장의 콘크리트를 부수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요슈아에게 있어 착각 같은 소음은 이제 와선 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난 너한테 늘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어."

 

그는 떨리는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마지막 피를 닦아내며 신음했다.

 

"그런데, 이제…… 어떡하면 좋아?"

 

10월의 햇빛은 너무나도 따사로웠으므로, 기상 캐스터가 요슈아 같은 이들의 피부를 걱정해 주지 않고 코너를 마치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붉은 피가 입가에 묻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만의 용감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무너진 채로 제리를 쳐다보았다.
매일 좀스럽게도 반복되는 폭발, 슬픔, 체념, 자기 연민, 자책, 자괴, 한탄. 그리고 흡혈.
3개월 전부터 요슈아는 낮의 시간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되었다. 큰 문제란 가히 그러한 규모여야만 했다.

 

 

그날은 클라이맥스 레코드의 연대기에 새겨져 이사 회의실에 길이길이 값비싼 자랑거리가 될 영광스러운 날 중 하나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촬영과 밤샘에 지쳐 정규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아직 연수 중인 신입 스태프들마저도 등을 꼿꼿이 편 채 대기해야 하는 그런 프로젝트의 마지막 촬영의 날. 출연진은 물론 평소에는 촬영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스태프들의 눈빛에서마저 희미한 기대감이 보였다. 요슈아는 세트장 위에서 OK 사인을 그리면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에게선 성공하고자 하는,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건 요슈아 또한 잘 알고 있는 심정이었기에, 그는 속으로 동질감을 비롯한 여러 생각을 하면서 세트장 내부의 지정석에 앉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정체 모를 불안감이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된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촬영의 흥행 여부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생긴 불안정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날카롭고 사나운 감각이었다. 모른 척하여도, 아는 척하여도 인지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을 듯한 막막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돌려서, 반쯤 시야를 움직인 채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물컹거리거나 축축한, 내지는 딱딱한. 그 어떤 낯선 감각도 닿지 않았다. 세트장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자 하니, 촬영 감독인 Y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예요? 천장에 물이라도 새요?"
"어? 으응, 아냐.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
"아무리 우리 회사가 블랙이어도 그렇지……. 설마 물 새는 곳에서 그 돈 들여가며 촬영하겠어요? 걱정하지 마셔요."
"아하하, 고마워."

 

요슈아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며 자세히 설명하려다가 참기로 했다. 어차피 촬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구태여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한 이들 사이에서 괜한 소리를 지껄여 긴장감을 조성하기는 싫었다. 하물며 '느낌'이나 '직감' 따위를 함부로 읊었다가 현실로 옮겨져 오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그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삼켜 오는 일을 잘했다. 어렵지 않게 에둘러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채, 그는 대기실에 구비용 마이크를 두고 온 것 같다며 다녀오겠다고 전달했다. 스태프는 촬영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다녀오란 말과 함께 그를 관계자용 출입구로 들여보냈다.
이른 새벽 촬영으로 인해 그들 외에 아무도 없는 건물 내 복도는, 요슈아가 음산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만큼 서늘하였다.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걷는 요슈아의 발걸음이 복도로부터 묘한 울림을 퍼지게 했다. 그는 브레이브 차일드 전용 대기실까지 향하는 길이 이리도 멀었나 생각하며, 쭉 보지 않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단 알림 센터에 제리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저녁 뭐 할까?]

 

오래간만에 홈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장을 보러 온 것일까 추측하는 동안 요슈아의 입꼬리는 어느덧 위로 슬그머니 올라가 호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는 곧 닥칠 위험조차 모른 채로, 그때 느꼈던 직감이나 불안감을 알았음에도 눈앞의 행복이 훨씬 더 선명하였기에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로 앞에 육중한 덩치의 사내가 떡하니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요슈아가 '전골 어때'라고 전송한 바로 그 순간—케이스를 끼우지 않은 핸드폰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큰 소리가 났다.

 

"……저어, 기. 여기는 관계자용 복도인데, 혹시 길이라도 잃었어?"

 

요슈아가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양옆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뒷걸음질 한 번, 가벼운 시선 돌리기용의 말 한 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그가 핸드폰을 제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때. 모든 시야가 뒤바뀌었다.

 

"윽……?!"
"이, 이, 이…… 인."

 

사내는 마치 정신이 흐트러진 괴생명체처럼 필사적으로 요슈아의 손목을 잡고, 다섯 손가락 전부를 사용해 비틀어 놓으려고 들었다. 요슈아는 벽과 사내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로 이도 저도 못한 채로 콜록거렸다. 그때, 급작스럽게 그는 사내가 반대쪽 손으로 짓누르고 있던 견갑골 바로 아래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피부를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기형적으로 세로로 발달한 송곳니였다.
눈앞에는 쉴 틈 없이 불쏘시개가 튀고,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숨이 막혀왔다. 뇌에서부터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고통을 완화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그런데도 요슈아의 입에선 얇고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 근육이 수축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따끔거림을 겨우 참아내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어깨 위에 그 남자가 머리를 들이민 상태였다. 그가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잽싸고 빠른 사내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며, 상처 부위를 파고드는 따스한 감각에선 구리라도 씹어 삼키려는 듯한 절박한 호흡이 더불어 느껴졌다. 요슈아는 미간을 한가득 찌푸린 채, 그를 걷어차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다음 곧장 정신없어 보이는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급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가 커다란 소음과 함께 복도 구석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는지. 그 사내가 덥수룩한 수염 아래서 으르렁거리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실실 웃고 있었다. 송곳니에 의해 찢어진 셔츠와 깊은 상처에서 흐르는 검붉은 자기의 피를 바라보면서, 요슈아는 의식이 점점 옅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일이지? 안 되는데, 오늘은 정말로. 오늘은 제리와 약속이 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그가 눈을 계속해서 깜빡거렸다가 마침내 멈췄다.
마침내 그는 익숙한 천장을 마주하면서 눈을 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이 평소보다 배는 더 깔끔하게 보인다는 점 정도였다. 그가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요전 날의 일은 전부 착각이었나, 꿈이었나. 그런 허무맹랑한 믿음과 함께—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 수도 있었고—욕실 문을 열고 세면대 앞에 선 순간이었다. 삼 초 정도 거울을 바라본 그는, 멍하니 있다가 양손으로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턱 끝에 땀방울이 아롱아롱 맺혔다. 그 어느 부분도 요슈아를 요슈아라고 정의 내릴 수 있도록 똑같이 남아 있었으나 단 두 군데만이 또렷하게 달랐다. 첫째로, 그의 상처. 둘째로,

 

"……노란색?"

 

그의 두 홍채가, 마치 페인트를 엎지른 것처럼 흉흉한 노란색으로 날카로운 눈매 안쪽에서 빛나고 있었다는 점.

 

 

21세기, 날마다 공연과 스태프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공인 신분으로서 흡혈귀가 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서바이벌'이라고 불릴만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대기실에서 팬에게 받은 도시락을 꺼내 먹다가 그대로 화장실에 가서 전부 게워냈을 땐 자기도 몰랐던 게살 알레르기가 있었다며 한 시간 동안 길고 긴 변명을 쏟아부어야 했다. 제리는 주로 여러 군데에서 남는 피를 사 오거나 받아오다가, 그것도 모자라기 시작하자 고민하던 끝에 병원이 한적한 틈을 타 몇 개를 챙겨 오는 일을 반복했다. 둘 중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피를 공급받지 않으면 요슈아는 전설 속 흡혈귀처럼 점점 햇빛에 노출되는 일에 약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에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 브레이브 차일드를 판다 사장이 가만히 놔둘 리도 없었기에, 그는 인간적으로 역겨운 감각과 흡혈귀의 시점에서 풍미가 느껴지는 피를 마시면서 어느 쪽이 지금의 본인에 더 가까운지 매번 고민했다. 이따금 인간의 피를 먹고 싶을 때가 찾아오기도 해, 그는 자기 피부에 상처를 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요슈아의 피부 아래 숨겨진 혈액은 검붉은색이 아니라 그의 눈동자와 같은 선명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그 맛 또한 시멘트를 삼키는 듯이 텁텁했고, 까슬거리며 혀뿌리에서부터 욱신거리며 타들어 가는 기분을 동반했다. 결국 거진 한두 달 내내 그의 식사는 돼지 피, 사슴 피, 그도 아니면 토끼 피나 소피가 전부였다. 각각 어느 맛이 무슨 짐승의 것인지 알아맞히는 일도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목소리가 잘 안 나오니?"
"……응, 오늘 연습은, 내일로 미뤄도 될까?"
"그래, 어쩔 수 없지. 아까 들어보니까 상태가 안 좋긴 하더라, 어서 가서 푹 쉬렴."

 

유키의 마지막 말에 요슈아가 움찔거렸다. 흡혈귀가 된 이후 생긴 가장 큰 말썽은 목소리가 예전처럼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요슈아는 평소에 얇고 시원하게 음역을 높여서 단번에 스크리밍 하는 기술보다도 한 단계씩 높여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창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면서, 목구멍 안쪽이 기형적으로 붓기 시작함에 따라 그의 자랑이나 다를 바 없는 맑은 목소리가 어딘가 턱턱 막히는 듯이 의도한 것보다 한두 음역 아래에서 멈추기 시작했다. 처음 이상을 감지했을 땐 다들 실수이겠거니, 컨디션의 난조이겠거니 싶었지만, 벌써 일주일째였다.
요슈아는 화장실 안쪽에서 챙겨 온 혈액 팩의 포장을 뜯어 물었다. 고개를 들면 낡은 조명이 깜빡거리면서 요슈아를 비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편으로 천장의 녹슨 때가 껴 있는 천장 구석이 조명에 반사되어 보였다. 사실, 일전에 제리에게 어떡하면 좋겠냐며 물은 뒤로 요슈아는 단 한 번도 혈액 팩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다는 약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반항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요슈아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다른 부위들마저 조금씩 반응은 오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으면서 마른세수했다. 그날, 제리는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요슈아의 상처를 말없이 치료해 주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그리 덧붙였다.

 

"넌 네 생각만 해 줘."
하지만, 제리. 이미 난 네 생각만이 궁금해.

 

전해질 리 없는 말을 삼키며 화장실 쓰레기통에 혈액 팩을 버리고 나온 요슈아는 세면대 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은 부패하고 썩어가는 순환이 당연한 동물이며, 요슈아는 이를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하게도, 아주 불운하게도 그가 괴인과 부딪힌 탓에 인간으로 남지 못했다. 요슈아의 양손에는 거친 힘이 들어가 서글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애매한 욱신거림이 담겼다. 홀로 있는 거실에서 스탠드 하나만 켠 채 곡의 악보를 완성하고 있을 때, 제리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이유 모를 순간에, 멤버들 사이에 둘러싸여 녹음을 체크하는 그때마다 인간이 아니게 된 그는 외로움이라는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 안에서 끊임없이 헤매야 했다. 그저 주 식사가 혈액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마땅히 그래야 했나. 답을 얻고 싶어도 묻는 순간부터 돌아올 시선이 어찌나 의미심장할지 몰라서, 그저 모른 척 웃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로 나섰다. 머릿속은 이미 진작부터 망가진 듯 온갖 생각으로 빙빙 돌았고, 손바닥은 녹아내린 긴장이 식은땀으로 변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목을 쭉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놀란 채로 멈췄다. 복도 모퉁이 쪽에 제리가 서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인사하면서, 오른손에 쥔 쇼핑백의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상처 부위의 밴드 가는 것도 깜빡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겸사겸사 인사를 하러 왔다는 말이 이어졌지만, 그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겸으로 종종 찾아온 적은 잦았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원치 않았다.

 

"제리, 이런 건, 안 해 줘도 돼."
"내가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너만 안 불편하다면 난 괜찮아."

 

제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요슈아는 잠시 상상했다. 끝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실망할 제리를.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두려움은 모두의 본성이었다. 그가 '괜찮지 않아'라고 짧게 중얼거리면서 대답하자 제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제리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고, 그 안쪽은 평소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요슈아는 계속해서 부정해 오던 것에 이름을 다는 행위가 두려워 치졸하게 무시하다가, 끝끝내 자신을 붙잡는 손에 체온이 있음을 명백하게 깨닫고서야 외쳤다.

 

"왜, 왜 계속 괜찮다고 하는 거야? 제리, 아니야. 하나도 괜찮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긴장인지,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혀 끝에서는 부정의 쓴맛이 났다. 다른 누군가가 답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다가도, 약하게 웃었다.

 

"난, 이제 제리 너랑은,…… 함께 할 수가 없잖아. 그야, 이런 몸인데. 기분 나쁘지? 사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너무 외로워서, 네가 없는 나는 생각하기가 무서워서 그랬어."

 

그는 심호흡한 채, 마지막에 가서야 애원하는 눈빛으로 제리를 보았다. 이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운을 띄우면서.

 

"이제 나 같은 건 모른 척해도 돼."

 

 

해결할 방도조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서로 약한 부분을 공유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영원을 살아간다. 그저 물살에 휩쓸리듯이 텁텁한 말은 전부 삼키면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세 음절의 진심은 미루고 미루던 종결을 재촉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건네는 인사는 늘 같았다. 눈밖에 내리지 않는 깊은 산 안쪽 오두막에서 제리가 눈이 쌓인 길을 따라 걸어오며 요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침이네."

 

그는 제리가 걸어오면서 가볍게 건네는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뜬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저 먼 산맥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는 태양 빛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의 공기는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여름철 다다미방처럼 선선했고, 근처에 피워 둔 모닥불에서 나오는 희미한 나무 연기 냄새와 코끝을 스치는 묘한 젖은 이슬 향이 섞여 있었다. 맨피부로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지탱하던 그의 발밑으로, 낙엽과 잔가지로 뒤덮인 부드럽고 축축한 눈밭이 닿았다. 그는 밤에 혀를 깨물었을 때와 엇비슷하게 남아 있던 잔향에 눈살을 찌푸리며 깊게 심호흡했다. 다름이 아니라 죽은 사슴의 날카로운 뿔이 그의 발가락을 찌르듯이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해가 완전히 뜨면서 요슈아의 눈동자를 하얀빛으로 비출 만큼 선명하게 빛났다. 그는 망막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도 눈을 감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 빛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이마 위로 투명한 땀방울이 맺혔다. 슬프다고 말하기에도 낯선 어색한 감정만을 느끼며, 그는 제리의 어깨를 그러안고 뺨을 문질렀다.
추위에 얼어붙은 그의 뺨에 요슈아의 손가락이 닿자 제리는 조금 움찔했다. 뜻 모를 대비는 그도 모르게 몸을 떨도록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작은 위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요슈아의 검지 끝에서부터 미비한 진동이 피부를 타고 전달되었고,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리를 향해 등을 숙였다. 뺨 위에서 오갈 데를 모르고 머뭇거리던 그의 손은 어느새 제리의 입술 위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변덕스러운 계절로 인하여 심히 건조해져 있었고, 요슈아는 손끝을 스치는 그 건조함을 차마 제대로 마주하기조차 힘들었다.

 

"미안해."

 

요슈아의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어버려서. 정말, 미안해."

 

말머리에 잠잠하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비명처럼 쉰 목소리로 희미하게 변했다. 그는 제리가 백 번을 괜찮다고 말해도, 백 한 번을 사과해야만 했다. 설령 이 모든 일이 그가 원해서 벌어지지 않았을지언정 사과하지 않으면 변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 더욱이 강해지고 싶었던 사이였던 제리를, 어느새 그와 함께 약해지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면서부터 잠잠하던 어깨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마치 그때 그 괴인이 억지로 상처를 후벼파서, 남아 있는 요슈아의 혈액마저도 전부 삼키려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자기 팔을 굽힌 채로 당겨서 제리와 맞잡은 두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댔다. 따스한 호흡 아래 입김이 새어 나오고, 그것은 괜스레 인간성의 증명처럼 느껴져서 더욱 가파르게 숨을 쉬었다. 요슈아는 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제리와 눈을 마주쳤다. 정면에서 마주한 제리의 눈동자는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것처럼 깨끗한 네온사인처럼 노랗게 빛났다. 둥근 형체에 빛이 반사되어, 형형 색깔의 프리즘이 섞이자 그 노란빛은 더욱 이질감이 들 만큼 강렬한 색채를 뿜어냈다. 그들 주변에는 색을 품은 풍경이라고는 오로지 위로 곧게 뻗은 고동색 자작나무와 그 위를 풍성히 가린 짙푸른 잎사귀들, 그리고 그 위와 아래 전부를 덮은 눈이 전부였다. 이곳에 오자고 제안했던 제리의 표정을 보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제리를 향한 다양한 감정들 사이에서 늘 고민했었다. 우정과 향수, 동질감, 배타적인 연민, 조금의 애정, 말로 못다 할 연정과 보은의 값어치들 사이에서.

 

"요슈아. 우리 약속했잖아."

 

그러다 마지막에 항상 선택하는 단어는 형태를 변동시킨 사랑이었다. 수식을 바꿔서, 형식을 바꿔서, 맥락을 바꿔서 전달하는 사랑은 언제나 변하면서도 남아 있는 것이라 모순적인 영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제리의 말에 짐짓 움찔거리던 요슈아는 제리를 보기 위해 손을 내리다가, 그의 얇은 손목에 난 상처가 어느덧 눈발에 녹아내려 거의 희미해졌음을 깨달았다. 한쪽 가슴이 묘한 욱신거림을 동반하여 쓰라렸다. 어젯밤 억지로 삼킨 사슴의 피가 상하였는가, 그도 아니면 요슈아 본인이 버티기 힘들 만큼 상하였는가. 어느 한쪽이든 요슈아는 그날 기억만큼은 평생 부패시키지 못한 채로 간직할 것임을 알았다.

 

그날, 요슈아가 버티고 버티다 못해 제리의 품에서 무너져 고해했던 날. 그는 자신이 머저리가 된 듯한 기분에 자조하며 마른 웃음을 토했다. 이래서야 제리의 옆에는 떳떳하게 설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면서, 갖가지 망념에 사로잡힌 채 그의 옷자락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가 그러는 동안에 제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흘러들어오는 부정적인 예감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요슈아의 어깨 바로 아래를 약하게 잡았다.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것은 제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 그러한 것은…… 어떤 방정식이나 공식을 통해, 입증을 통한 것보다 더욱 간결한 본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요슈아가 힘겹게 내뱉은 '외로워지기 싫다'라는 감정은 해결해 줄 수 있을 듯했다.
제리는 고민 끝에 혀를 입천장 위에 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고통을 삼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제리는 가방을 열어젖히고 뒤적거리다가, 코팅된 용지 하나를 찾았다. 칼날만큼이나 날카롭게 코팅된 용지 하나는 제대로 베이면 깊은 상처가 날 것 같았다. 용지를 든 제리의 오른손은 척 보기에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거나 힘을 주어서 내려치면 그대로 힘없이 떨어트릴 미래가 선했다. 그런데도 부득불 왼쪽 손으로 떨리는 손목까지 지탱해가며 놓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요슈아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 자신의 마음보다도 그를 소중히 하고자 하는 보은이 훨씬 절실했기 때문에.
요슈아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제리는 결국 일을 저질렀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부위 위로 한 번 더 선이 그려졌다. 이번엔 더 깊었다. 몇 날 며칠을 굶어 온 요슈아에게 있어 그 향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좌절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훅 맡아지는 냄새에 고개를 들고 제리 쪽을 급하게 돌아보았다. 제리는 식은땀을 이마에서부터 턱 끝까지 흘린 채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급박하게 눈을 부릅뜬 그가 제리를 향해 소리쳤다가, 입 근처로 훅 다가온 잔향에 호흡을 삼켰다. 제리가 일부러 그에게 다친 팔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오갈 데 없는 시선을 방랑하도록 놔둔 채 자신의 건조한 두 손으로 제리의 팔을 지혈하기 위해 쥐었다. 사방이 붉었다. 요슈아는 노란 눈으로 보는 붉은 세상이, 자신이 살던 세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제리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잃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요슈아의 팔뚝을 왼손으로 쓸어내리며—혹은 거의 그러안으며—답했다.

 

"……네가 외롭지 않아야 나도 외롭지 않아. 알잖아, 요슈아."

 

다음으로 올 요슈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입이 벌어진 사이 제리가 눈을 꾹 감은 채로 그의 송곳니 사이에 자기 팔을 들이밀었다. 요슈아의 의지와는 별개로 신경과 이어진 송곳니는 마치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양 피의 잔향을 감지하자마자 곧장 움직였다. 신경이 지나가는 혈관에 송곳니가 미약하게 박히는 순간부터 제리는 온몸의 근육이 한계까지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변화가 그대로 느껴졌다. 요슈아가 느꼈던 감각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겠구나, 정말로 아팠겠구나. 말로 전할 수 없는 공감을 애써 눈빛으로 전해 보기 위해, 그는 요슈아의 팔뚝을 잡은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문지르면서 요슈아가 제 얼굴을 쳐다보도록 했다. 불과 몇십 초도 되지 않는 짧은 흡혈이었기에 요슈아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본 순간엔 이미 송곳니가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제리의 피를 삼키지 않고 뱉어냈다. 옆으로 젖혀진 고개 아래서 피와 섞인 기침을 토했다. 콜록대는 요슈아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는 다른 것은 신경 쓰지도 못한 채, 급하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른팔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을 보며 주저앉은 상태였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가만히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요슈아는 그 두 가지 모두 정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제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면해 있다가 깨어난 산짐승처럼 미약한 정신을 연결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변화한 몸에 맞추어 감각을 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였다. 요슈아는 흡혈귀가 된 몸을 돌려놓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읽었던 수많은 고서 중 한 책에서 보았던 구절을 떠올려냈다. 그 문장은 끔찍이도 들어맞았다.
저주는 종속되고, 이어지고, 연결된다. 그것이 타당한 법칙.
두 가지 색이 섞여 묶여 있었던 머리카락이 어느덧 풀려서 바닥을 덮을 듯이 흘러내렸다. 어두운 밤을 볼 때면 늘 생각했던 잔잔한 불빛.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지도, 가슴 아플 정도로 어둡지도 않은 그 사이에서 제리의 눈동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란색 홍채로 변해, 입술 끝에 본능을 품고 다시 태어난 것이 명실상부했다.

 

"……제리! 아, 내, 내가 무슨……? 너, 너 지금!"

 

요슈아는 파리해진 입술을 물어뜯으면서, 급하게 정신을 차린 채 몸을 일으켜 제리를 부축했다. 손끝 하나까지도 떨려 온전히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요슈아는 제리를 품에 안은 채 계속해서 형체가 뭉개진 말을 뱉었다. 이건 전부 자기 탓이라고, 나 때문에 이리된 것이라고. 그러나 정작 제리는 요슈아와 자기 팔을 몇 번 멍한 눈으로 번갈아보더니, 피가 묻은 손으로 붉게 물든 눈두덩이를 꾹 문질렀다. 볼 위로 젖은 피가 묻었다. 요슈아는 제리가 자신을 보자마자 사과부터 담으려 크게 입을 벌렸지만, 제리는 약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을 품에 안은 요슈아의 팔을 잡고 울 듯이 웃었다. 목소리가 잠겨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마음이 분명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훗날 멀고 먼 날, 요슈아를 아끼고 또 그 본인이 아끼는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게 되어 결국 그 혼자 남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미안해야 할 건 나야, 요슈아. ……네가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요슈아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빛나는 인물이니,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와 계속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혼자만의 이별을 반복하는 일이 쉽다는 뜻은 아니리라. 만약 요슈아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래서 모두가 떠나가 홀로 남겨지는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면 그는 정말로 외롭게 되지 않을까.

 

"네 상냥함을, 네 노력을, 무시해버렸어. 정말 미안해."

 

아니, 어떤 것들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 앞으로 있을 요슈아 몫의 사과까지 전부 내가 할 테니까."

 

그게 틀리든 맞든 적어도 더 낫게 살아가고 싶어 힘을 주고 휘둘렀던 그 수많은 칼날이,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정말로 죽고 싶은 나머지 휘두르는 것이 될까 봐. 그 가정이 두려워 제리는 언제나 떨었다. 그러니 응당 이기적이라 질타받아야 할 사람은 본인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슈아의 눈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눈물을 삼킨 채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표정을 지으면서. 상대와의 약속으로 쓰라린 고통을 문지르면서. 다가올 내일의 아침 햇빛이 지금보다는 덜 강하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부탁으로 내뱉었다.

 

"부탁이야, 그런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요슈아는 제리가 건넨 부탁을 언제나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로 머물러 있었다.

 

 

곁에 있는데도 이전처럼 우스갯소리로 영원을 약속하는 일도 힘들어졌다. 이 순간에 상대만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떳떳하게 서 있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럽게 느껴졌기에, 그러다가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과 마주치면,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낯부끄러워졌기에. 요슈아는 제리와 눈이 마주치자 한없이 둥근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짓고, 젖은 눈을 감았다. 제리는 그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힘겹게 정면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발밑에 잠든 수많은 짐승과 그 속에 같이 잠든 쇠 비린내 나는 핏물. 하물며 발가락 틈새 사이사이에 머문 눈송이에도 시선을 돌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모든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요슈아는 그런 제리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노란 눈과 마주치자 그 말마저도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면서, 시큰거리는 눈물을 닦고 중얼거렸다.

 

"……응, 눈부시다."

 

일출 이십 분 전의 아침이었다.

세트프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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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inkansai

 

 

비밀의 밤을 지새운 마음

그림자처럼 붙는 내 숨

인생의 공허함을 여전히 느끼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담아본 문구입니다.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그녀의 숨은 역시나 비밀의 밤을 넘어서 존재하겠지요. 그 숨을 바라봐 주는 것은, 어딘가의 뒷면을 보고 있는 소년입니다.

 

반짝이는 별 그 너머로

차가운 숨을 새겨준 너

그리고 그녀의 삶에서 반짝이는 별은 소년의 존재일 거예요. 괴로운 순간마다 숨을 새겨준 사람은 역시 서로일 거예요. 별의 너머에는 그림자가, 그림자의 너머엔 두 사람이…….

 

셈하는 슬픔 더해지는 늪

그 모든 것을 견디더라도

그녀에게도 새겨진 상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죽음으로의 늪으로 완성되고 말아요. 그 모든 것을 견디기로 약속한 소년이 있기에, 그녀의 삶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끊어질 리도 없겠지만요.

 

넷 여덟 여섯으로 나뉜 나

모든 조각과 순간은 함께야

메트로놈의 박자는 4박, 8박, 6박 등으로 다양해요. 대표적인 것들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어진 삶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예요. 그런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숨이 어딘가에 걸려있는 기분 알고 있어? 늪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어? 너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함께 사랑하자는 말을 건넸어. 나는, 너를 영원히 찾게 될 거야. 그것은 운명과도 같아서 꼭 정해져 있는 길을 걷는 것만 같아. 거품이 언젠가 터져버리는 것과도 같은 일이야. 아주 쉽고, 아주 가볍고, 그럼에도 거듭 너의 불안을 나는 견디고 싶어 하고 있어,

 

우리가 만일 빠지게 된다면 그게 차가운 물은 아니라면 좋겠어. 따스한 곳이라면 차라리 좋겠어. 너는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지. 너는 나를 위한 사람, 그리고 너를 위한 사람이야. 그러니 부디 그 마음이 도망하지 않도록 내 곁을 꼭 지켜주었으면 해. 내가 비록 보잘것없다고 느낄지도 몰라. 너는 많은 사랑을 받지만, 그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받을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래도 말이야

나는 달을 보고도 별을 보고도 너를 꼭 생각해

 

소중한 것을 보면 너를 느껴 그리고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러니 부디 도망할 거라면 나의 세계로 와 주기를 바라 그것도 힘들다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돼 상처를 늘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어기지 않겠다는 소원을 하늘 저편으로 보낼게

 

사랑을 담아

세트프레이즈
세트프레이즈

@ghostinkansai

 

 

비밀의 밤 그 뒤편의

그림자와 같은 마음을

천재로 소문이 나 있지만 공허함을 가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담아보았어요. 그가 가진 비밀은 아주 깊은 것이라서, 본질의 뒤편에 있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모두가 볼 수 있지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떠오르는 달 그 뒤에

깊게 차오르는 네 눈

그리고 그런 소년의 눈에 비친 소녀는 달과도 같아요. 그러나 그 밝음의 뒤편에서 떠오르는 것만이 소녀의 본모습일 것임을 소년도 알고 있고, 그 깊은 눈을 바라보는 일 역시 소녀에게만 있을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숨겨져 있는 날들일지도 몰라요.

 

헤아리는 상처

새겨지는 선율

그럼에도 그에게는 새겨진 상처가 있습니다. 소녀가 빼앗아가고 싶을 정도로 깊고 슬픈 상처가. 그러면서도 선율이 새겨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의 진정한 마음은…….

 

너를 닮아 닿을 수 없도록

달리는 숨은 다섯 줄 위로

그리고 닿을 수 없는 것들은 점차 늘어만 갑니다. 그것은 음악으로 해방되지만, 동시에 오선지에 숨이 걸쳐져 있어요.

 

 

아주 빠르게 달리면 숨이 목에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곤 해. 물에 아주 오래간 잠겨 있어도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지. 나는, 어쩌면 그 순간에 너를 찾을지도 모르겠어. 너만이 나의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는 나의 이기심은 언제쯤 거두어질까. 그리고 너 역시 나의 이해자를 자처하는 일을 언제쯤 그만둘 수 있을까. 이 모든 연쇄가, 나에게는…….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지 않아. 너에게 그건 너무 무거운 일이니까. 이건 나만 짊어져야 하는 일이야.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말이야,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지도 몰라. 나는 조금 발걸음을 빠르게 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너는 나를 결승선에서 기다려주고 있잖아. 달이 차가운 밤이라도 함께라면 괜찮아. 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열병을 앓는 날이라도 우리는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어. 이 쉬운 사실을 왜 이토록 몰랐을까. 그리고 이리도 쉬운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멀리 돌아온 걸까.

 

우리는 너무 닮았어.

그래서일까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것도 닮아 버렸지.

나의 탓도 너의 탓도 아니야.

누구의 잘못이라고도 말하고 싶지 않아.

 

밤하늘을 바라보며 너를 떠올리는 날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내 상처를 네가 안심하고 세지 않는 날이 늘어나면 좋겠어.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잊고 다정으로 세계를 채우고 싶어.

평온한 밤
평온한 밤

@daso_somi

 


이불 밖으로 머리칼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머리칼의 출처로 보이는, 유난히 불룩한 자리 옆에 앉았다. 둥글게 모양이 잡힌 그것은 꼭 초콜릿이 들어간 마시멜로를 닮아 있었다. 그럼 제리는 초콜릿이겠네. 내부에 파묻힌 사람의 정체를 아는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오는 상상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불룩한 것은 좌우로 움직이더니 불쑥 이불을 빠져나온다.

 

"뭐하는 거야, 요슈아."
"제리 머리가 동그랗길래 보고 있었어. 어릴 적에도 이렇게 동그랬던가?"

 

어릴 적에? …모르겠네. 사람 머리는 다 동그랗지 않아? 제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는 웃는다. 글쎄, 한 번 만져볼래? 머리를 기꺼이 내밀면 반사적으로 올라간 손은 잠시 허공을 떠돈다. 손이 사뿐히 얹어지더니 형태를 따라 느리게 더듬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응, 요슈아도 동글동글한데…. 그러다 말이 끊긴다. 제리는 어느새 머리를 반쯤 쓰다듬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선을 올려 본 낯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나는 손길을 적당히 누리다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진다.

 

"제리, 계속 쓰다듬을 거야? 머리가 마음에 든다면 물론 나는 기쁘지만."
"…아, 아니! 얼른 들어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놀라서 손을 떼는 제리를 보면서 웃으면, 제리는 놀리지 말라는 듯 입을 작게 내밀면서도 이불을 들어올려 주었다. 반겨주는 손짓은 꼭 어릴 적 같다. 우리의 비밀 요새에서도 제리는 늘 내게 입구를 열어 주며 저렇게 손짓하곤 했다. 어서 와, 요슈아. 그러면 나는 기꺼이 작은 손을 맞잡고 작은 요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작은 공간도 함께라면 충분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나는 그때처럼 이불 속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옮겨 제리에게로 붙어 누웠다. 작고,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 너와 나는 어릴 적과 다르지 않은 우리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어떤 포근함이 여전히.

 

긴장이 풀리는 따스함 속에서 녹아든 초콜릿처럼 우리는 몸을 밀착하고 서로에게 기댔다.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슨함이 이불 속을 떠돌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대어 눈을 깜빡이기를 한참. 나는 문득 이불의 모난 구석에 뭉친 솜을 부드럽게 풀기 시작했다. 주무르듯이 쥐었다 펴는 손길이 눈에 띄었는지 제리가 그것을 바라보더니, 반대쪽 구석을 잡아 솜을 풀었다. 뭉친 솜이 조금씩 퍼질수록 우리의 작은 요새는 더 느슨하고 둥근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모든 게 충분히 풀어졌다고 느껴질 무렵,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눈을 마주친 우리는 조금 웃었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할 것 없이 이불을 나란히 잡아당긴다. 최선을 다해 무뎌진 마음이 머리 위를 덮으면 환한 어둠이 내린다. 우리만의 작은 밤이 온다.

 

 

…가끔 생각해…. 요슈아랑 함께라면 이렇게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비밀기지에서 지냈을 때처럼?
그때는 그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그랬지. 거기에서 과자도 먹었잖아. 부스러기를 잔뜩 흘리는 바람에 혼은 났지만.
그래도 맛있었어.
응, 나도 좋아했어.

 

과자는 주로 통에 담긴 작은 비스킷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물처럼 비밀 요새에 넣어두고 나누어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과 같이 소꿉놀이나 비밀스러운 첩보 장난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저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기만 해도 모든 게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우리만의 시간이었으니까. 그럴 때 늘 무얼 하고 있었더라. 나는 손끝을 매만지다가 제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제리.

왜 그래?
우리 손 잡을까?

갑자기?
싫어?

 

작고 둥근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제리가 잠시 몸을 움찔했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망설이는지 고개가 반대로 기울어졌다. 의아해 눈동자를 굴리면 답이 돌아온다. 요즘 손이 까칠해져서 잡으면 불편할 거야. 해답을 알게 된 나는 제리의 거부를 수긍한다.

 

그렇구나.
요슈아,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응, 그냥. 나는 제리랑 손을 잡고 싶은데 못 잡으니까 아쉬워져서.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잖아! 외치고 싶은 표정을 알아보기는 쉽다. 나는 조금 더 불쌍한 사람처럼 눈매를 내리고 제리를 바라보았다. 안 돼? 제리는 입술을 이리저리 옴싹거린다. 바라보는 시선이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리…. 시무룩하게 내려가는 내 입매. 그리고 그런 표정을 제리는 잘 견디지 못한다. 치사한 방법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소매를 조심스럽게 쥐었을 때 제리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제리의 설명대로 조금은 까칠하게 느껴지는 손끝이 손깍지에 파고든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에 느껴지는 서로 다른 체온의 감각이 좋았다. 뭉근하게 온도가 뒤섞이는 순간이면 그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밝게 웃고 만다. 제리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감는다.

 

있지, 제리.
응, 요슈아.
나는 제리가 이런 사람이라서 좋아.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사실을 설명하는 것뿐인데도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이런 게 사랑한다는 감정일 거라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제리와 있을 때는.

 

 

두근거리는 소리는 사실 선율 같아, 제리.
그래서 너랑 함께 있으면 늘 음악을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세상에서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네 곁에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너와 나이기에 서로의 심장 소리가 되어 완전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온전한 어둠이 온다.
우리는 켜놓은 등을 모두 끄고 침대에 파묻혔다. 새까만 공간에서는 서로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아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체온뿐이었다. 제리의, 약간은 불규칙한 숨소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듯했다. 나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낸다.

 

제리, 자?
아니, 아직 안 자.
언제 잘 거야?
요슈아는?
제리가 잠들면.
난 요슈아가 잠들면 자려고 했는데.

 

뭐야, 그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대어 키득거리며 웃었다. 큰일이네, 둘 다 못 자겠다. 먼저 자, 요슈아. 그렇지만 아직 졸리지 않은걸. 난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해. 상대의 손을 쥔 팔을 침대에 떨어뜨린 채로 잔잔하게 손을 흔든다. 특별한 것 없이 흘러가는 대화가 어둠을 넘어가고 있었다. 옅게 들어오는 달빛과 거리의 네온사인도 닿지 않는 자리. 평소라면 조금은 답답할 정도로 덮인 이불이 오늘은 하나도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조차 둘만의 공간처럼 소담하게 여겨진 덕이다. 나는 제리에게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면, 제리도 나를 따라 몸을 돌린다. 우리는 마침내 서로를 마주보며 누워 있다.

 

이러고 있으니까 하나도 안 보여.
그래? 나는 제리가 보이는 것 같아. 지금 눈을 내리깔고 있지?

 

그쪽에 빛이 들어와? 제리는 아마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여기도 어두워. 나는 웃는다. 제리가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분명 보지 못하겠지만.

 

마음으로 보면 볼 수 있어.
벌거벗은 왕 이야기야?
응, 하지만 이건 진짜야.
아, 지금 요슈아 웃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제리도 마음의 눈이 생긴 모양이네.

 

시시하고 즐거운 잡담이 한참 이어졌다. 유명한 동화를 처음 읽었던 때의 기억과 감상, 요즘의 생각, 일상에 대한 단상 따위가 두서없이 오가고 다시 흩어졌다. 나는 그 모든 대화를 하면서 제리의 표정을 손끝으로 훑듯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한 번씩 제리가 지을 법한 표정을 말하면 제리는 그게 제법 신기한지 목소리 끝을 올리고 제 낯을 몇 번 더듬는 것 같았다. 내 얼굴도 만져 봐도 되는데. 제리는 잠시 조용하다가 조심스럽게 손끝을 내 뺨에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느리게, 실수로라도 눈을 만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처럼 더듬기 시작했다. 약간은 까슬까슬하고 말랑한 감각이 얼굴을 가볍게 누르고 지나갔다. 간단한 문답이 오갔다. 입매를 내리고 있네. 눈은 웃고 있어? 응, 맞아. 코는 찡그리고 있고. 응, 이러니까 알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제리는 충분히 낯을 파악하더니 금방 손을 내렸다. 아쉬운 이별 끝에 우리는 다시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점차 대답이 느려지고 끝내 조용해질 때까지.

 

어둠 속이기에 더 쉬운 일들도 있다. 대화가 끊겼을 무렵에 나는 졸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팔을 제리의 몸 위로 올린 건 어느새 숨소리가 새근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즈음이었다. 으응, 올리는 동시에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잠시 들썩였으나 제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숙인 이마를 맞대면 곤히 숨을 내쉬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따스한 선율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을 음악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대답할 사람은 잠에 든 지 오래였으므로 나는 그 말을 구태여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 감상만은 계속 내 속에 내버려두고 싶었다. 꺼내지 않아 의미가 되는 말들이 있어서. 제리는 곧 몸을 조금 뒤척이더니 나를 흉내내듯 팔을 내 몸 위로 올렸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꼭 완벽한 것만 같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어둠의 순간이 밀려오고, 나는 그제야 눈을 감고 아마도 이곳에만 있을 평온을 누렸다. 수마가 온전히 나를 잠식할 때까지. 맞닿은 곳의 온기를 줄곧 상기하면서.

15번의 구시대적 로맨티시즘
15번의 구시대적 로맨티시즘

@juststayus

 

 

Chapter 1. Mom, still I fool.

 

[JRTTAXXX, 텔로디오 히어링에 접속되었습니다. 설정해 둔 기상 시각에 맞추어 전원을 가동합니다.]

 

투명한 통유리창 너머로 이른 새벽이 고개를 들고, 매일 오전 8시에 정확하게 전원이 켜지는 AI 서비스가 하나둘씩 집안을 밝혔다. 아침을 알리는 푸른 햇빛이 고층 빌딩 사이로 가뿐히 지나쳐 가는 운송 포드의 형태를 그리며, 방 안의 그림자가 차지하고 있던 영역을 침범했다. 자연이 기계를 깨우고, 기계는 다시 주인과 그 주인이 가진 다른 귀속품들을 깨웠다. 젊은 여자 한 명이 혼자 살기에 터무니없이 큰 방, 그 중앙을 차지하는 킹사이즈 침대 위 베개에 제리는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앓는 소리가 베개 안쪽으로 먹혀들어 갔다.

 

"잠 좀 자자. 다 꺼, 그냥."

[JRTTAXXX, 해당 명령은 출근에 지장이 갈 수 있으며─]

"에이, 진짜."

 

제리는 반쯤 포기하고 눌려서 벌게진 이마를 문지르면서 일어섰다. 홀로 있을 때, 남들과 부대끼고 있을 때를 확실하게 나누는 그로서는 매일 맞이하는 아침 햇살이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암막 커튼을 설치하는 계획까지 고려해 보았으니, 그것으로 제리의 심정은 말을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리가 새벽의 끝자락을 어찌 생각하든 간에, 그는 사회인이었다. 제리를 조롱하듯 벽면을 따라 움직이는 역동적인 디지털 아트워크가 짹짹거리면서 노래하는 새들을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모습을 털 하나하나까지 보여 주었다. AI 어시스턴트인 'JU'의 원한다면 자막을 영상 아래에 띄울 수 있다는 말도 들렸다. 제리는 JU에게 대답하는 대신 시시각각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맞은편 고층 빌딩 쪽 대형 디스플레이를 힐끗 보았다. 오늘도 똑같은 음악, 비슷한 음표의 행렬이 틀어졌다. 그곳은 제리가 사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큰 빌딩이자,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CPR 방송국이었다. 송신탑마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뻗어 있어 마치 타국의 관광지 같기도 했다.

제리는 허공에 오른손을 몇 번 움직여서, 이동식 테이블 위의 생수를 들이마시며 그 광경을 빤히 구경했다. 투명한 창가를 통과하고, 제리의 귓가로 음표들은 자기 몸체를 구겨 넣었다. 언젠가부터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 의미 모를 똑같은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필수적인 루틴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오늘도. 제리에 맞춰 사용자화된 조명이 느릿느릿 옅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JU가 보고 겸 질문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JRTTAXXX?]

"아니? 이 조명이 이상한 거야. 그것보다 매번 아이디 전부 부르지 말랬잖아."

[JR, 확인.]

"왜 호칭만 매번 초기화되는데…?"

 

제리는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끝으로 정적이 생기겠거니 기대한 제리의 마음을 배반하듯 JU는 다시 질문했다. [해당 조명의 구매일은 금일로부터 일주일 전입니다. 고장 여부는 JR이 직접 체크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CPR의 음악 때문인가요?] 그는 참 사소한 지점에서 질린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가령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JU, JU, JU. 아무튼 전부 이 어시스턴트가 문제인 듯했다.
사실 제리는 JU가 썩 싫지도 않았다. 그것이 없는 이상 제리가 사는 집은 단숨에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뇌리에 스치는 어떤 감각을 인정하다 못해 의미를 부여하고 명명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계속 묵묵부답으로 침묵하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제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실 소파 등받이를 막 지나칠 참에, 침실 온도 조정 디스플레이에 줄곧 자리 잡고 있던 JU는 어느새 장소를 옮겼다. 목표는 전자레인지 내부였다. JU가 마침내 모습을 감추자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는 잠시 양옆으로 주변을 살폈다.

 

"포기했나?"

 

중얼거리는 모습에서는 주인으로서의 기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지능에 기반하여 맞붙으면 제 쪽이 질 미래가 뻔히 보이는 싸움인데. 제리는 안심하며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쓸어내리고, 잠시간 깊게 자유를 만끽한 뒤 반쯤 감긴 눈으로 부엌 안쪽에 갔다. 어제 저녁 먹다 남은 토스트가 멀쩡해 보였다.

그는 뒤돌아 선반과 냉장고 내부를 살폈다. 내친김에 꼼꼼히 둘러보면서, 몇 가지 잼과 향신료, 친구들이 뭐라도 먹으라며 주고 간 선물 겸 디저트를 제외하면 보관해 둔 것도 그다지 없었다. 제리는 깊게 한숨짓고는, 금방 지워버렸다. 어차피 매일 반복되는 아침이었다. 부지런히, 든든하게. 광고가 권장하는 대로 먹으려는 욕심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유리병에 담긴 잼 종류를 훑으면서 하나를 대충 집었다. 카야 잼이었다. 뚜껑을 열고, 한쪽 면에 얼추 바른 다음 전자레인지 앞으로 갔다. 그때였다. 녀석이 말을 걸었다. 태연스럽게.

 

[JRTTAXXX, 지금 바로 텔로디오 히어링에 접속하시면.]

 

제리가 전자레인지를 열었다가 그대로 쾅 닫았다. 반사신경이나 다름없이 10번 가까이 전원 종료 버튼을 꾹꾹, 거의 난타하듯 눌러댄 그의 노력은 무색했다. 30초 동안 접시에 담긴 토스트는 360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노릇하게 데워졌고, 제리는 따뜻한 토스트와 아주 완벽한 어시스트를 수행해 준 JU를 곁에 두고서 아침을 보내야만 했다. 이 도시에 몸 담근 제리가 보내는 아침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23세기, 라이버 레코드 국가 관리국의 후원 아래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특별한 지원과 서비스가 제공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혁신 중에는 대형 광고 디스플레이 속 찬사에 의하자면, '완벽한─개인─맞춤─통합형 AI 어시스턴트'라며 현재 제리의 1순위 골칫거리도 포함되었다. 지원받을 자격은 대체로 무작위 추첨이라는 변덕스러움 아래에 정해졌으나, 선택된 이들은 집단적 익명성 속에서 서로를 추측해 냈다. 그들은 예외를 두지 않고, 전원 '감히 소시민 신분으로' 음악에 몸 담그지 않는 자들, 선율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시민들이었다. 이들 국가가 내세우고 있는─영혼이 존재하는 한,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음표로써 정점에 도달해 소멸해야 한다─이념과는 별개로 말이다.
제리는 상술한 조건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는 라이버 레코드의 수도, 말라 니트로의 끝자락에 애매하게 위치하는 회사 사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일상으로 하루하루 살아왔노라 확언할 수 있었다. TV 앞에 앉아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데에 시간 낭비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며, 삶이 지루하다며 늘어놓기에는 즐거운 순간들도 나름 적당히 존재했다. 물론, 술자리에서 큰소리쳐가며 자신이 겪어 온 화려한 여가생활을 자랑하기에도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번지르르한 물기 있는 낭만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주진 못했다.

다만 그는 종종 궁금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매일 아침 지루하게 거니는 출근길에는 언제 출발하든 늘 10분은 족히 기다려야만 하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바로 옆에는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랗고 거대한 방송국 'CPR'이 존재했는데, 그 방송국 외벽엔 광활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공중에 겹겹이 쌓여 입체적인 그래픽으로 정기적 음악 방송을 내보내고는 했다. 언제 한번 제리는 가상 들밭 장치를 켜 둔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건너가면서, 그의 정수리 위로 울려 퍼지는 토크쇼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음악 경연 대회 우승자에 대한 추측, 혹은 팝 차트 1위 가수를 겨냥한 신랄한 비평, 매일 재생하지만 도통 이름 모를 음악들이 주를 이루었다.

제리가 밟고 있는 지면 위에서는 음악이야말로 권력과 동의어다. 가진 자가 비명을 지르면 시대정신을 꿰뚫는 록이었고, 배곯은 자가 기타를 치면 공산주의 교리를 지닌 이데올로기 찬양가……. 애당초 후자의 사례는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체념이 순응으로 뒤바뀌었다는 인과라면 모를까, 그저 모두가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래를 듣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음악 청취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대중성은 기울어져 있었다. 그가 살아가면서, 정부에게 반항하며 이러한 음악은 근본부터 괴상하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겠는가. 제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음악이 송출되면 일제히 머리를 들고서 따라부르거나 홀린 듯이 멍하니 송신탑만을 바라보게 되니까. 제리 또한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거나, 혹은 불가피하게 투항한 몇 주 뒤에 CPR의 디스플레이 안에 출현해 출연진들과 똑같은 멜로디를 따라 부르면서—아니면 기쁘게 연주하면서—열의에 찬 미소를 짓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자면 속이 끊임없이 울렁거렸다. 뭔가가 크게 잘못된 기분이 들었고, 신체 내부에 들어찬 톱니바퀴, 신체를 가동하게 시키는 중심축이 고장 나서 불안정하게 삐걱거리는 듯해서.
음악이라고는 제리와 아무 인연도 없을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루는 크나큰 부분이 수차례 짓밟히고 모욕당하고 얽매이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차라리 그들의 몰상식한 이치와 반강제적으로 부여받는 삶의 원동력을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이 음악은 듣기 좋다고. 썩 들을 만도 하다고. 그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나약한 힘으로는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이번에 새롭게 당선된 T 의원의 신곡 속에는 신시사이저와 트럼펫 베이스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교묘하게 BPM을 빠르게 늘려서 엉성한 연주 실력을 덮으려는 듯했지만, 그 초라한 음색은 어찌 감출 방도가 없었다. 안 그래도 수다와 경적으로 가득 찬 교차로 거리는 매우 고지식한 록스타의 철없는 술주정에 가깝게 변했다. 그런데도 모두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그 음악을 음미하듯이 들었다. 아니면 취향이 아니라는 듯이 아예 푹 숙인 채 외면하며 걸었다.

제리는 그저 사람들의 옆모습이 전부 스쳐 지나갈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디스플레이는 다른 채널을 틀어 주었다. 어느 한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애매한 처지였다. 모든 게 확고해진 시대에서조차 위태롭게, 지푸라기가 비틀비틀 흔들리듯이.

오늘 도착한 출근길 속 횡단보도 앞에서도, 그는 언제나처럼 멍했다. 흔들리는 일이 변함없다는 말은 꽤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다마는. 평소 어깨 기장을 넘는 머리를 늘어트린 채 다니던 제리는 오늘따라 별안간 양쪽 옆머리를 잡고 한 가닥, 한 가닥 조금씩 낮게 땋았다. 두 개로 땋아서 묶은 양 갈래가 어색하기는커녕 익숙했다. 그러나 이따금 생기는 변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제리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횡단보도 쪽으로 향하면서, 늘 챙기는 오버 이어 헤드셋을 가방에서 꺼내 목에 걸쳤다. 바깥소리를 차단하는 용도일 뿐 실제로 남들처럼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이따금 JU의 자동 추천 재킹에 따라 맞춰지는 라디오 채널 속 사연 읽기 정도가 그의 청취 목록의 전부였다. 귀를 완전히 덮는 하우징, 소음들은 군중의 시선 속으로 삼켜졌다. 샛노란 형광등 불빛이 하우징 패드 가장자리에서부터 켜졌다. JU가 채널 접속을 반겼다. 이미 정해진 채로 출력되는 접속 문구였다. 제리는 수천 번도 넘게 들었을. 그다음으로 내뱉는 말은 어느 라디오, 혹은 어느 장르에 접속하겠냐는 친절한 질문이었다. 간단하게 무시했다. 그러면 저절로 잠잠해졌으므로.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6-2-2, 주파수를 확인했습니다. 채널 진입을 시도합니다.]

"뭐?"

 

신호가 초록색으로 변한 지 2분이 지났을 참,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기 시작한 제리는 난생처음으로 겪는 JU의 안내 문구를 듣자마자 삼중 교차로 지점의 중앙에서 덥썩 헤드셋을 잡고 외쳤다. 당황한 나머지 끝 음이 이상한 음 이탈로 마무리될 정도였다. AI고 뭐고 내 개인 맞춤형이라며! 왜 내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구는데!? 헤드셋 내부에선 지직거리는 전파 방해음이 제리 귓가를 간지럽혔고, 갑작스레 사방이 울렁댔다. 급한 대로 횡단보도부터 건넌 다음 해결하려던 제리의 발목을 붙잡은 이는 다름 아닌 제리 자신이었다.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가쁜 숨이 심장을 그대로 꺼낸 듯 아프게 흘러나왔다. 그를 지나쳐가는 전파 같은 군중들 사이로 그가 본능적으로 어떤 단어를 입에 올렸다. 필사적으로 도움을 외치면서, 어린아이가 손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겹게 시도했다.

 

"요,"

 

미처 못 삼킨 토스트 한 조각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쉽사리 완성되지 않는 그 순간에.

 

"──찾았다."

 

제리로서는 알지 못할 그가 말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부분은 목을 빈틈없이 조인 초커. 품이 헐렁한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나머지 눈동자보다 그 아래의 웃음기가 더 또렷해 보였다. 모든 부분을 인식하기도 잠시 그는 무릎 꿇은 제리의 손목을 단숨에 끌어당기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첨예한 눈동자 사이로 제리 자기 자신이 보였다. 초면, 그것도 전혀 다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도플갱어를 만난 것만 같다는 이상한 괴리감과 낯선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그가 '괜찮아'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가 눈을 뜬 이유는, 그가 일어날 만큼 충분히 기절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달걀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가로세로 열다섯 걸음 정도가 최대인 방 안에는 각종 녹음 장치와 노트북 한 대가 보였고, 번잡스러운 테이블 위로 대용량 간식이나 간편식도 잔뜩 쌓인 상태였다. 간단히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개인이 사용하고 있는 방임을 직감했다. 그는 적어도 불청객으로서 취급받고 있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유는 이랬다. 빗장뼈 부근까지 덮어진 두꺼운 이불과 그 아래 푹신한 매트리스. 눈동자만 왼쪽으로 굴려 확인했을 때 보이는 무방비한 등 따위. 제리를 난장판 속에서 도와주었던 사람.

제리는 그의 신체를 이루는 선들이 하나같이 얇고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어,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낯에는 여린 유약함보다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뇌리를 스치는 경적이 지금까지 안쪽을 따끔하게 찌르는데, 안심하고 몸을 맡겼던 이유는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제리가 그렇게 판단하고서 감각을 되찾으려 몸을 움직였다. 침대가 삐걱거리자 그의 시선이 제리를 향했다. 정말로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으리라 굳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한가득 기쁨과 반가움, 종잡기 어려운 감정을 모아서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정작 제리의 뇌 속에서 그는 미지수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가당키나 한 것인 가, 이런 일들이?

 

"어, 그게."

 

그는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면서, 침대 앞에 놓아둔 의자를 한 손으로 끌어와 앉았다. 기쁨, 다음으로는 걱정이 담겼다. 눈썹이 아래로 휘었다.

 

"깼구나. 몸은 많이 괜찮아졌어? 열은 안 나겠지만, 아무래도 걱정돼서."

"괜찮은 것 같아."

 

제리는 그대로 끝까지 존칭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평소 먹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섭취하는 행위나 다름없게 다가왔다. 말이 혀끝에 붙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아랫입술을 더듬으면서, 결국 남자가 말하는 방식과 같게, 간결한 반말로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광경을 자세히 보면, 문득 데자뷔를 느꼈다. 이렇게 나의 대답과 반응을 기다리면서 아낌없이 친절을 드러내던 이가 주변에 있던가. 제리가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막상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무생물까지 범위를 넓혀 JU가 생각났다. 그는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면서 계속 생각, 또 생각만을 반복하고 싶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자를 볼 때마다 떠올랐다. 제리가 JU가 필요하다고 느낀 상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 JU가 절실하게 보고 싶었다. 그 형체도 무엇도 없는 인공지능이 불쑥 튀어나와 전부 이러한 맥락과 인과에 의해 발생한 사태라고,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면 혼란스러운 감정도 수월하게 마무리될 텐데.

 

"저기, 있잖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네가 궁금한 거라면,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서 뭐든."

"너는 누구야? 여긴 어디고, 무슨 일인지 혹시 날 알아?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처음 봐. 이전에 우리가 알던 사이였다면 알려 줬으면 좋겠어."

 

처음 질문은 조금 느렸고, 두 번째 질문은 약간 빨랐다. 마지막으로 갔을 땐 거의 속사포로 물었다. 제리의 말을 들은 그는 눈을 내리깔고, 긴 소매 셔츠로 가려진 손목을 쓸어내리면서 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밝은 어조로 다른 제안을 제리에게 건넸다. 우리 이럴까. 운을 띄우는 목소리는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부드럽고 섬세했다.

 

"나도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각자 하나씩 묻고 대답해 주는 걸로. 어때?"

 

그가 검지를 들고 제리의 양쪽 눈앞에 몇 센티미터쯤 들이밀었다. 초점이 흐릿하게 잡힌 검지 너머로 고개를 기울인 낯이 제리 시야를 가득 채웠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 가르마가 나뉘는 지점에서 반대 방향으로 삐져나온 얇은 세 가닥. 그곳에 신경을 쓰다 보면 역시나 종래엔 눈이 마주치게 됐다. 이상했다. 분명 색채 없는 회색임에도, 정면을 향해 똑바로 응시하면 제리는 그 두 눈동자에서 샛노란 네온사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제리는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도 만족스럽게 응, 하고 짧게 웃었다.

 

"그러네, 음. 우선 '내가 누군지'부터인가. 널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정도?"

 

그는 그리 말하면서 손가락을 접고 웃었다. 또 아까 제리에게 보였던 그 쓸쓸한 미소였다.

 

"라고는 해도, 실제로 이렇게 소개해야 할 상황이 오니까 예상은 했지만. 조금 슬프네."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와 정반대로 양손을 가만두질 못하는 그를 보면서, 제리는 자기 자신을 장악하는 기묘한 슬픔이 마치 그의 미소를 보고 전염된 것 같았다. 손끝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옮겨붙어서 자신도 모르는 깊은 안쪽까지 작은 입자들이 들어와, 제멋대로의 '소중함'을 논하는 이 남자에게 그럴 바엔 너를 더 소중히 여기면 안 되느냐고 다그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으니까. 아니, 디스플레이에 쉽게 검색하여 재생하듯이 뇌리에 한 장면이 어른거렸다. 행하지 않은 기억이 생각과 섞여서, 제리는 어쩐지 눈가가 따가웠다. 제리의 변화를 놓칠 리 없는 남자는 급하게 제리의 팔목을 잡고서 물었다.

 

"제리!? 너 괜찮아? 역시 어디가 아픈 건가, 큰일이네. 상비약을 챙겨 두지는 않았는데…. 저기, 조금만 참아 줄 수 있어? 여기 역 근처니까. 금방 약 사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 질문 남았어."

"어? 응?"

 

희미한 조명이 켜진 방 안에서 제리는 제 키만큼 몸을 일으켜 세웠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남자의 소매를 잡았다. 우습게도 그 힘은 미약했다. 제리는 그가─심지어 어린아이라도─마음만 먹으면 쉽게 뿌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마치 수갑이 채워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눈썹을 아래로 내리는 그가 눈길을 어디에도 고정하지 못한 채 곤란한 표정만 지었다.

그는 발을 움직이지도, 제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기다렸다. 침묵이 둘 사이를 메우는지 떨어트리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요슈아는 마치 침묵의 실체를 빚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제리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래, 그 참을성과 인내심. 바로 그 인내가 그의 자세에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제리는 되려 자신이 평정심을 잃어갔다. 무어라도 쏘아붙이면 된다. 떨쳐내고 모른 척하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입 바른 거짓말로 제리를 놓아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제리가 그를 붙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제리가 기나긴 고민 끝에 굳게 붙어 있던 두 입술을 뗐다.

 

"너도 나한테 질문하고 가."

"하지만…."

 

제리는 말없이 미미한 힘으로 옷자락을 당겼다. 그는 입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민했다가, 이 또한 하지 말라는 걱정을 들었던 기억이 나 그만두었다. 정작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걱정해 준 당사자는 불안한 낯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만. 끝내 제리가 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그가 얌전히 허리를 숙여서 눈높이를 맞췄다. 이 세계에 온 그가 제리에게 묻고 싶은 가장 첫 번째 질문이자 부탁은 이미 한참 전에 정해 두었다. 말만 꺼내면 되었다. 그가 자기 소매를 잡은 제리 손을 반대쪽 손으로 잠시 떨어트렸다가, 조금이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빠르게 겹쳐 잡았다. 제리는 토닥거리는 그의 손이 따듯해 어깨에 들어간 긴장이 풀렸다. 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든 나를 믿어 줄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부탁이었다. 그런 말을 뒤로하면서 남자는 아까 다 못 밝힌 신원부터 밝히겠다며 덧붙였다.

 

"내 이름은 요슈아야."

 

이름을 말하면서 '요슈아'는 한 차례 뜸을 들였다. 마치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중대한 비밀처럼. 그는 지금까지 두 눈만 깜빡거리는 제리를 보고 그럴 만도 하다면서, 제리의 오른손을 뒤집었다. 그런 다음 자기 검지를 세워서 제리의 손바닥을 캔버스 삼아 어떤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각 문자가 형태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하며 마침내 'ヨシュア'로 마무리 지으면서 제리가 그 철자를 '요슈아'로 인식하는 순간, 제리는 자신이 알아들을 리가 없는 언어로 계속 그와 소통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그렇게 살아왔기에 의문점을 못 느꼈던 것처럼. 제리가 시험이라도 하듯 '요슈아'라고 숨죽여 발음했다. 단순한 호명 한 번에 요슈아의 몸 안쪽에서 형언 불가능한 감정이 꿈틀댔다. 그가 애써 버릇으로 자리 잡은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제리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요슈아, 하고 여러 차례 반복해 보더니 그쪽을 응시했다.

 

"역시 우리, 예전에."

 

제리가 의문을 토로하려던 순간에, 요슈아는 그 전에 보여 줄 게 있다며 제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불쑥 일어나 선 채로 등을 낮추고서 어지럽게 짐이 늘어트려진 원목 테이블 서랍 아래로 긴 팔을 넣고 휘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먼지 쌓인 스탠드가 덜컹거릴 정도로 어수선하게 움직이고서야 가까스로 찾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에 들린 오버 이어 헤드셋을 보고서 놀라 흠칫거렸다. 그것은 제리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분신을 능숙하게 서랍을 닫고, 빙그르르 돌려서 전원을 켰다. LED 패널이 빠른 속력으로 활성화되어 순식간에 번쩍였다.

 

"그건 또 어떻게?"

 

요슈아는 아무것도 들지 않아 비어 있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반쯤 눈꼬리를 접은 채로 쿡쿡 웃었다. 제리의 당혹스러운 반응을 진즉 예상했었다. 그가 당황한 이유를 근본부터 늘어놓자면 끝도 없었으나, 가타부타 서론은 전부 생략하고서라도 지금 놀란 지점은 딱 하나였다. 제리는 그 오버 이어 헤드셋에 JU를 내장하면서부터, 오직 제리와 제리 본인이 직접 승인한 이에게만 관리자 권한을 부여하도록 설정해 두었다. 제리가 기억하기에는 본인만이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슈아는 태연한 낯으로 제리 앞으로 다시금 돌아와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JU는 관리자 권한을 확인했다는 짤막한 승인 문구 다음으로 요슈아의 조작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는 요슈아의 손바닥 안에서 시시각각 패드 화면을 조정하는 JU를 보면서 입만 뻐금거렸다. 그야말로, 주인 자격을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제리는 억울했다. 요슈아는 그런 제리를 힐끔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아직 신원을 밝히는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혹은 6-2-2."

 

하우징 패드가 허무해하는 제리의 양쪽 귀를 안정적으로 덮었다. 그는 작은 백색소음이 차단되는 효과와 동시에 채널로 접속을 시도한다는 JU의 이어지는 안내 음성을 들었다. 주파수 6-2-2로 연결된다는 알림이었다. 청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 시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에 방해받고 있어, 제리는 그 소리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기 시야를 가득 채운 요슈아가, 양쪽 입꼬리에 검지를 갖다 대며 쭉 올리는 모습이 낯익었다. 기대가 커질수록 아래로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입꼬리의 가여운 표정. 그러다 기대하던 바를 이루고 나면 한없이 기뻐하며 올라가는 입꼬리. 본 적이 있다. 상상이 아니라 재현이었다. 제리를 관통하듯 요슈아가 한쪽 손을 떼고, 공중을 간지럽힐 정도로 조심스럽게 제리의 뺨에 손을 댔다. 이마가 닿을 듯한 지근거리까지 다가갔는데도 제리는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불편하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머뭇거리면서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댔다. 그는 요슈아가 나른한 숨을 뱉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숨엔 안도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제리는 멋대로 짐작했다. 요슈아가 속삭였다.

 

"난 항상 이 채널 속에 있을 거야, 따라 해 봐. 두려워하지 말고 오선보를 그리듯이."

"6, 2, 2?"

 

제리는 침묵했다.

왜 나는 네가 이렇게 차분하게 건네는 말에 안심될까.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게 되는 걸까.

 

한 번 터트리고 나면 작은 틈새 하나까지도 전부 합쳐져서 전부 나오게 되리라. 그건 비단 요슈아를 향한 마음뿐만은 아닐 거라고, 그는 짧게 쌓은 견식으로나마 확신했다. 한편으로 요슈아는 자신을 향한 제리의 눈길을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응. 잘했어. 그렇게 하면, 우린 어디 있든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라디오는 일방적이었다. 제리가 사연이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요슈아는 일방향으로 자기 이야기만을 전달해야 했고, 제리는 그가 하는 말을 일일이 섭취하면서 그의 정체를 계속 고찰해야 할 것이다. 제리에게는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하다못해 적어도 요슈아가 어째서 열망에 찬 시선으로 제리를 바라보는지, 짧은 시간 동안 제리가 질문할 때마다 쓸쓸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알려 주어야만 수지타산이 맞았다. 아니, 전부 핑계라고 해도 좋았다. 제리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요슈아의 파편을 하나라도 더 얻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 자신도 그가 느끼는 욕망이 억지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적어도 후회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지닌 채로. 요슈아가 일어서면서 슬슬 제리를 내보내려고 하자, 그는 뒤에 서서 일어나 대뜸 질문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기억해야 해? 날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으로는 부족해."

 

그러자 그는 일어난 제리를 향해 반쯤 뒤돌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기억해 줄래."

 

때마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자동 보호막이 정확한 순간에 걷혔다. 저물어가는 석양빛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흩트려 놓은 방 안으로 침투하자 요슈아 또한 노을에 감염되듯 젖어 들어갔다. 그의 표정이 역광에 의해 제리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쩐지 제리는 그가 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슈아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리 널 진심으로 애정하고 있는, 너의 *인간*적인 친구라고."



Chapter 2. Give me the Love, and, Gasoline!

 

제리는 꿈에서 깨어나도 깨지 못한 감각이 이러하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다. 그는 종일 몽롱했다. 사내에 배치된 각각의 지정석엔 터치패드 형식 모니터가 지급되었다. 조금만 가만히 있어도 근무 태만을 경고하는 기능이 장착된 모니터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불독이 침을 뚝뚝 흘리면서 매섭게 짖는 소리' 따위로. 잠결에 빠지거나 공상으로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매일 들어오는 방송국에 관한 민원 안건을 눈알이 충혈되도록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있었다. 제리나 제리의 회사에만 내려진 업무만은 아니었다. 말라니트로 내의 중소기업은 대체로 CPR 산하에 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제리가 이런 감각을 업무 도중에 느껴야 할 사유는 마땅히 없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불독 세 마리가 한꺼번에 짖으면서, 소방차와 경찰차, 구급차까지 모조리 불러낸 다음 온갖 종류의 밴드와 고대에 멸종한 짐승이 울부짖는 괴성을 풀 데시벨로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목을 뒤로 젖힌 채 한 남자만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직장이었다. 주변 직장 동료들마저 그가 제발 스크린을 터치하기를 바라면서 힐끔거렸다. 보다 못한 옆 옆자리, 표독스럽기로 사내에 소문이 깔린 S가 혀를 차며 제리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제리 씨?"

 

제리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제리 씨!"

"……라디오 자주 들으세요?"

 

S가 돌발 질문에 말문이 막혔고, 타 직원들은 평소 평가가 썩 좋지 않았던 S가 물먹었다는 점에만 집중했다. 정작 질문자인 제리는 S에게 정말로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서 질문했는데, 답변은커녕 미쳤냐는 말과 함께 반강제적으로 점심시간 이전에 반차를 쓰게 되었다. 그는 한적한 거리를 거닐면서 평일 이른 오후 시간대는 이런 건가, 하고 시시한 감상을 품었다. 그 시간대에 귀가하는 일도 처음이기는 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갑작스레 기진맥진해져 로퍼도 벗지 않은 채로 현관 신발장과 복도를 구분하는 턱에 털썩 주저앉아 상념에 빠졌다. 두 무릎을 굽혀서 그 사이로 턱을 꾹 눌렀다. 사방이 가로막히도록 만들어낸 작은 공간 속, 작게 뱉어낸 한숨은 따듯해서 우습게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제리가 요슈아에게 헤드셋을 돌려받은 그날, 그는 제리의 품 안에 요청한 적도 없는 물품들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속사포로 설명하며 안겨 주었다.

이건 네가 좋아하는 과자고, 이 재킷은 너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서 샀던 거니까 입고 가고, 저건 혹시 모르니까 호신용 스프레이로 들고 가고, 아! 이건 우리 둘이 같이 골랐던 건데 보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재촉하려고 주는 용도는 절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줄게, 그리고 또 어쩌고저쩌고….

구구절절한 물품 목록 늘어놓기 끝에, 제리 양손 안에 빈틈이 없어 더는 들고 갈 물건이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는 만족스러워하면서 제리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물어보고 싶었던 그였지만, 바깥에 이미 세워져 있던 차 한 대가 그의 이목을 확 낚아챘다. 번호판이 부착되어 있지 않은 낡은 택시였다. 제리는 탑승하면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툭툭 두드리고 있는 흑발의 남성은 척 보기에도 요슈아와 또래일 만큼 젊었다. 또한 그 옆 조수석에도 자홍색도 갈색도 아닌 그 어중간한 밝은 머리칼의 젊은 남성이 한 명 더 탑승한 채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의도적으로 제리의 시선을 피했다. 제리의 품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물품들이 제리의 몸을 건드리자, 그는 가까스로 물어봐야 할 질문이 산더미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는 이미 닫힌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는 요슈아에게 급히 외쳤다. 이 사람들은 누구고, 도대체 *인간*적이라는 건 무슨 의미냐고.

하지만 요슈아는 '내 친구들이니까, 제리에게도 친구이려나' 같은 엉뚱한 대답을 끝으로 잠자코 고요해졌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요슈아를 바라보면서 제리는 착잡한 마음을 이루 감추지 못하고, 애꿎은 안전벨트만 손톱으로 갉작거렸다. 거짓말과 침묵 중에 더 무거운 추는 어느 쪽에 매달아야 할까. 제리는 문득 그 무게를 쟀다.

 

"언제, 어디 있든 만날 수 있다고 했지."

 

제리는 가벼운 짐을 검은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는 제리가 혹여 그 숫자를 잊을까 봐 여러 번 복기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JU는 그가 현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집 안에 있는 가구 중 디스플레이가 있는 어디든 그 존재를 옮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리가 JU를 소리 높여 불렀다. 침실 방향에서 짧고 경쾌한 버튼음이 울렸다. 제리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JU는 벽면 디스플레이에 찡그린 표정—이라 하기엔 그저 제리가 아스키아트를 보고 적당히 추정했을—이 떠 있는 채로 제리와 맞닥뜨렸다. 제리는 어쩐지 요슈아와 묘하게 짓궂은 면에서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떠올렸다가, 고개를 양옆으로 휘젓고 엎드렸다. 침대 아래로는 흘러내린 이불 탓에 그림자가 드리워 어둠만이 가득했다. 제리가 잠시 고개를 빼내고 심호흡했다가, 한 번에 상체를 숙이면서 팔을 쭉 뻗었다.

 

"됐다!"

 

제리는 자기가 얻어낸 수확물이자 어린 시절 앨범을 천장 위로 쭉 뻗으면서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다가도 본인이 외친 말이 요슈아가 보였던 행동과 꽤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닮은 구석이 계속 생기는 건지 알 방도가 없었다. 제리는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멋쩍게 웃는 소리를 냈다. 하하. 그러다 품 안에 앨범을 꼭 쥐고서 그대로 다시 소파로 향했다. 제법 묵직한 양장본 앨범은 먼지가 가득 차 있었다. JU가 물었다.

 

[JR, 또 다른 관리자가 해당 앨범 속에 등장한다는 가설을 세웠나요?]

 

제리는 앨범 표지를 펼치자마자 그의 질문에 위쪽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요슈아가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떠올렸다. 제리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면서 JU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JU는 자신에게 등록된 데이터로는 JR이 직접 요슈아를 제2 관리자로 등록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고 짤막하게나마 답변했다. 제리는 우선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JU의 질문에도 답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 사람하고 지냈던 기억이 나…. 난 분명 여기에서만 자랐는데."

 

그는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코팅된 사진을 넘겼다. 어느 사진에서도 요슈아를 떠올릴 흔적은 마땅찮았다. 제아무리 절대적으로 똑같이, 평등하게 흐르는 시간이란 불손한 상상에 가까우며, 예상대로만 자라는 이가 없다지만 사진 속에 있는 이들 중 요슈아일 가능성이 보이는 자는 없었다. 제리는 결국 힘이 빠져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JU가 어느새 자리를 옮겼다. 장소는 그의 왼쪽,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입구 사이로 몸체가 반쯤 빠져나온 헤드셋 패드였다. 제리는 고민하다가 그 헤드셋을 쥐고 목에 걸쳤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JU가 빠르게 전원을 가동하면서, 제리의 의사를 간접적으로나마 물었다.

 

[원한다면 라디오 채널 연결을 돕겠습니다. 주파수를 맞춰 주세요.]

 

그는 언제나 묻는 쪽은 JU여도, 결국 자신이 유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억지로 부득불 이행하는 느낌보다는 수작임을 알면서도 사랑스러워 당해 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최근에 제리는 낯선 이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한 번 더 느낀 적이 있었다. 어떤 연결고리가 살짝 맞춰지려는 순간, 헤드셋 내부에서 전파가 지직거리면서 그를 재촉했다. 제리는 초조하면서도 기대를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주파수는 6-2-2."

 

JU는 확인했다는 안내를 다음으로 빠르게 라디오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번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라디오 채널 체크가 금세 이루어졌다. 제리는 눈을 감았다. 처음 들린 소리는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자그마한 소리였다. 집중하지 않고 싫증만 낸다면 아무도 그 소리를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얼마 안 가 익숙하고도 깔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이곳은 브레이브. 6-2-2. 지금 이걸 듣고 있다면, 내 *인간*적인 친구가 내 말을 믿어줬다는 거겠지?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야.]

 

제리는 무어라도 좋으니 똑바로 그를 향해 말하고 싶었지만, 라디오라는 점에서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요슈아가 잇는 말을 그대로 들었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나에게 들려주지 않을래? 나도 이곳에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능숙한 라디오 진행자처럼 그는 제리가 요청치도 않은 추천곡을 재생하기 시작했는데, 제리가 길거리에서 자주 듣는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솔직히 말해 제리는 음악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방송국 아래를 스쳐 지나가면서 드리우는 그림자는 매일 그를 소음 안으로 씹어 삼켰고, 그는 그럴수록 더욱 JU에게 주변 소음을 차단해 달라는 명령의 강도를 높였다. 횡단보도는 흑과 백이 나누어져 있어 그가 걸으면서 어느 한 색을 밟고, 다시 다른 색을 밟으면서 그 행동을 매 순간 반복할 때마다 그를 질타했다. 어느 한 곳에 속하지 못한 그는 나쁘다고, 옳지 못한 대중이라고. 대중성에 굴복하든, 확고한 이념을 가지든 무엇 하나 온전하게 지니기는커녕 높게 쌓아 올린 빌딩들 사이로 몸을 숨기고 애써 괜찮은 척 살아왔다. 그런데도 요슈아가 들려주는 그 노래는 그런 애매한 제리마저도 간절함이 묻어나는 이처럼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아 어느 한 곳이 울컥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리는 이 곡의 내용을 이해할 리가 없었는데, 전부 이해가 되었으니까. 마치 제가 겪은 일처럼.

 

[──이렇게 첫 곡은 끝이야. 아마 절대로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아, 너무 자신만만했나? 하핫.]

 

요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떻게 웃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곡은 <そばにいて>라는 곡인데, 어떨 때 썼던 곡이냐면그런 적 있어? 솔직해지면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상대가 있는 기분. 그런데도 솔직해지고 싶고, 하지만, 그래서 숨기고 싶어서어떻게든 감추고 싶은 마음.]

 

그는 요슈아가 조심스레 선물상자에서 꺼내듯이 하나둘씩 내뱉는 단어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자신이 경험해 온 기억 안에 녹인 다음 대입해 보았다. 그러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불쑥 자세를 바꿔, 아예 누운 상태에서 몸을 살짝 좁은 소파 안에 전부 구겨 넣었다. 체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양모 털로 뒤덮인 소파. 제아무리 부드럽고 따듯해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분은 내지 못 하리라. 뺨을 비비적거려 봤자일 텐데, 자기 귀를 덮은 헤드셋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하나에 제리는 요슈아가 제 위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라디오로밖에, 일방향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그에게 이러한 기분을 느껴본들 환상 속의 노스텔지어에 불과했다. 제리는 요슈아를 알면 알수록 닿고 싶었고, 모르면 모를수록 불안했으며, 자신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할수록 불안한 기쁨에 시달렸다. 딱 들어맞는 방법론이 있다면 그리 해결하고 싶을 정도로. 제리는 충동을 참았다.

 

"알 것 같아, 그 기분."

 

제리는 요슈아가 듣지 못할 대답을 하면서 서서히 눈이 감기는 감각을 느꼈다. 따스한 햇볕이 유독 셌고, 강했다. 요슈아도 지금, 이 햇볕 아래에서 라디오를 녹음하고 있는 것일까. 이 라디오는 나만을 위한 거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통화가 아니라. 제리가 의문을 깊이 파고들수록 의문점은 깊어져만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제리는 요슈아의 꿈을 꾸게 되리란 짐작이 들었다. 숨결이 점점 차분하게 잦아들었다.

 

 

"그럼, 안녕. 너의 *인간*적인 친구가."

 

마침내 제리만을 위한 아홉 번째 라디오가 종료되었다.

마이크에서 멀어진 요슈아는 참아왔던 숨을 거칠게 토해내면서 가쁘게 호흡했다. 고개가 아래로 기울어지고, 테이블로 상체가 고꾸라지면서 정수리가 부딪쳤다. 바로 전, 그가 보안관 무리에게 쫓기면서 그의 오른팔 어깨 부분을 향해 쏜 테이저건이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혈관 내부에서 전류가 찌릿찌릿하게 흐르는 감각이 들었다. 요슈아는 쓰라린 어깨 부분을 억세게 문지르듯 응급처치만 시도했다. 그가 말하는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이란 이런 때였다. 이 정도의 거짓말만큼은 돌아와서도 아마 용서해 주지 않으려나. 요슈아는 혼잣말로 조소를 섞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알고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가 이렇게 된 꼴을 목격하면, 또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낯빛으로 자기 자신이 더 괴로워하리란 사실을.

그는 가까스로 테이블 앞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몸을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일으켜 세웠다. 이번이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예정은 없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백 팩에 홀로그램 레코드와 전파 방해기, 라디오 녹음기, 테이저건 등을 전부 챙겼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수많은 물품과 계획 용지들이 널브러진 채로 요슈아의 마지막 순간을 기리고 있었다. 그는 나가기 전, 아지트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한 다음 제 옷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당겨 짧게 입 맞췄다. 제리가 미약한 힘으로 붙잡았던 그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몇 달간이나 상주했던 아지트 바깥으로 나왔다.

그 단순한 문장을 순탄한 과정이라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아슬아슬하게 회전하는 시선의 방향을 가로세로 직경 30cm 네온사인 간판에 맞췄다. 간판 형태가 울렁거렸다. 가솔린을 섞은 칵테일처럼? 전자칩을 삽입한 교통 안내 로봇처럼, 혹은 그 무엇도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감성에 맞춘, 참으로 한심하고 너저분한 주파수와 같은 것처럼.

 

"하, 흡."

 

나오자마자 피부 아래 기이하리만치 뜨겁게 맥동하는 혈관의 감각이 느껴졌다. 요슈아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소란스럽게 떠드는 군중의 발소리와 빗발치는 시위 함성 사이로, 신음을 삼켰다. 아. 정신을 잃으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그가 안간힘을 다해 겨우 발끝에 힘을 주었다. 재킷 안에서 급히 약통을 꺼내 입 안으로 넣었다. 약의 씁쓸한 고무 맛이 한동안 목구멍 안을 감돌더니, 점차 고통을 가라앉히게 했다. 이윽고 뇌 안쪽에서 울리던 이상한 초음파 소리도 멎었다. 요슈아는 단 한 개밖에 남지 않은 '중독─음성─해체제'를 내려다보면서 느리게 한숨지었다. 마지막 한 개만큼은 제리를 위해 아껴 두어야 했다. 요슈아는 흐린 눈동자를 비비면서, 무슨 연유로 두 사람이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회상했다. 전부 처음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처음 이 세계에 도달했던 때, 두 사람은 모두 기억이 온전한 상태였다. 그곳에 온 인과를 어림잡아 짐작해 보자면 두 사람이 함께 들었던 구식 라디오 속 한 채널—622—의 멘트 때문이었다.

 

상처가 있으신가요? 인연을 강하게 하고 싶으신가요? 있을 곳이 필요하신가요. 그렇다면, 그런 익명의 청취자 중 한 분께 특별한 기회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침대 위에서 하릴없이 느긋하게 다리를 겹친 채로 누운 둘은 팟캐스트 화면과 서로를 번갈아보았다. 제리의 눈썹보다 요슈아의 눈썹이 훨씬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제리는 그런 남자친구의 엉뚱한 소망을 거절하기엔 너무나 심지가 약한 여자친구인지라,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슈아는 두 주먹을 모으고 기뻐하면서 제리를 끌어안은 다음에, 짤막하게 사연을 적어 보냈다. 사연의 내용은 둘이 함께—대체로 요슈아 혼자—적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에 언제나 음악이 있었는데, 이번에 잊지 못할 기억을 하나 만들고 싶어요. 이번에도 음악과 관련된 기억으로 말이죠 이하생략, 구구절절하게 제리를 향한 자랑의 메시지 열다섯 줄. 팟캐스트 진행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보낸 사연을 실시간으로 읽었다. 잘 들었다는 예의상의 말이 서두로 시작되었다. 형식적으로 이어지는 위로나 칭찬이 이어지고, 남자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가락 마디를 꺾는 소리를 두어 번 냈다. 그다음 마무리 문구를 이런 식으로 장식했다.

 

커튼콜이 다가오면, 두 사람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익명의 청취자, 당신이 사랑하는 아주 *인간*적인 음악으로요.

 

"아마도 그거 같지."

 

제리가 말했다.

 

"잊, 잊지 못할 추억이긴 하지 않아?"

 

요슈아가 애써 긍정적으로 말했다. 제리가 가늘게 눈을 떴다. 요슈아는 멋쩍게 웃다가 미안하다는 말만 몇십 번을 반복했다.
물론, 그들은 이곳에 머무르는 주민도 아니었으며 명백하리만치 이방인 그 자체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제리에게 자꾸만 요슈아는 눈길이 갔다. 그 시선 안에 내포된 성분엔 단순한 걱정이 차지한 총량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본의 아니게도 이곳은 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했듯 쉬이 잊지 못할 장소였다. 다르게 말해 제리와 요슈아가 지금이 아니라면 절대로 체험하지 못할 공간이란 뜻이기도 했다. 그가 제리를 불안에 처하게 했던 수많은 상황을 복기하면서, 그가 제리를 안심시켜주지 못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소망도 존재했다. 공중을 빠르게 회전하는 운송 포드를 보면서 제리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정작 제리 본인은 요슈아가 이곳을 꽤 즐기고 싶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별말을 안 하기로 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때부터 모든 일이 꼬였던 것도 같다. 정확히 말해서 라이버 레코드 수도, 말라니트로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제리! 이것 봐."

"에 3,604가지 맛이 동시에 나는 아이스크림이라고?"

"신기하지 않아? 먹어보고 싶지 않아?"

"요슈아 그냥 먹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데."

 

제법 즐거웠다고 요슈아는 자부했다. 톡 쏘면서도 달콤하고, 강렬한 핫소스와 치즈가 섞여서 초콜릿 베이스를 크림치즈로 녹이는 동시에 피스타치오가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며 알 수 없는 12번째 은하의 물에서 추출한 고당도 크림의 경험도 경험이지만(사실 요슈아는 이때 이후로 아직도 미각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공간 속에 지내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는 느낌과 현실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 적당히 이 세계를 즐기는 순간은 두 사람을 이솝우화의 주인공처럼 만들어버렸다. '안전한 위험'. 딱 거기까지의 경계선. 매일 반복되는 껍데기 같은 일상을 탈피했다는 전제를 두고서, 나름의 안정감과 함께 지낸다. 상처를 회복 중인 두 사람은 단내에 쉽게 흔들렸다. 실상 어른이든 아이든 흔들림은 누구에게라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중요한 점은 선택된 이들이 요슈아와 제리, 둘이라는 점이었다. 세계의 오선보가 그들을 가파르게 지나쳐서 지금껏 기억으로 쌓아온 페이지들마저 지나쳤다.

요슈아는 그들이 잠시 머무르려고 임대한 집 안 거실에 나오자마자 머그잔을 깨트렸다. 믿기지 않는 말에 그가 손을 떨었다. 손목 부근 자상으로 새겨진 흉터가 욱신거렸다. 제리는 창밖 너머 거대한 디스플레이 속 어지러운 불협화음에 잠시 귀 기울이더니, 요슈아를 힐끔 보면서 자신이 한 말이 평범하다고 굳게 믿고서 재확인했다.

말이 어떻게 음표가 되는가. 음표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음악은 어떻게

 

"별로 괜찮지 않아? 여기서 계속 이렇게 지내도."

 

타인을 잊게 하는가.

 

 

제리와 다르게 도시 전역에 송출되는 음악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던 요슈아는, 몇 주 뒤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게 클라이맥스 레코드 본사 회의실 중앙에 뜬금없이 돌아왔다. 회의를 진행하던 다른 보컬들과 홍보가 주변을 멍한 표정으로 둘러보는 요슈아를 동시다발적으로 응시했다. 에이대시 혼자서만 한눈을 판 채 더블 치즈 더블 패티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먹다가 뒤늦게서야 그를 발견하고, 냅다 소리부터 지르고 보았다.

 

"에, 에에엥──?! 요슈슈? 언제부터 닌자 자리마저 뺏은 거?! 베로니카 포지션 배틀 위험한 거 아냐?"

 

양상추가 테이블 위로 후드득 자유낙하를 했다. 요슈아는 그 양상추가 마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채로 돌아온 자신을 보는 듯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 속 수다가 그가 방금까지 머무르고 있던 세계 속 시끄러운 소리와 겹쳐서 그의 뇌리를 강렬하게 주먹으로 내려치듯 울려 퍼졌다. 다른 보컬들의 목소리가 그토록 거슬린 적은 난생처음인지라 도무지 자신을 주체할 수조차 없었다.

 

"아하하하. 무슨 소리야? 지금 아무것도 없다가 뚝 생겼다고, 안 보였어? 하 하하…."

"제, 제리가."

 

벌떡 일어서면서 퉁명스럽게 말하는 모모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야의 불분명함이 그가 느끼는 절망을 입증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은 없다. 그래서 요슈아라는 인간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죽고 싶을 만큼 노력했다. 아니, 죽지 않기 위해 내일을 오늘로, 오늘을 어제로 만드는 연습을 하루하루 해 오면서 살아왔다. 요슈아가 여태까지 해 온 노력은 가장 친애하는 소꿉친구이자 애인이 건넨 미숙하고, 또 그와 비슷한 온정 때문이었는데도.

 

"제리가 아직 거기 있는데."

 

요슈아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이내 한 줄기로 뭉쳐 흘러내렸다. 보컬리스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그가 장난으로 벌이고 있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청년은 다시 소년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 예상치 못한 이별에 떨었다.

 

진정한 요슈아는 언제나 그랬듯 제리와 마찬가지로 굳게 신뢰하고 있는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들에게 해당 사건에 관해서 침착하게 설명하면서 상담했다. 처음엔 농담으로 안 마츠가 웃으면서 연기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가, 요슈아의 눈동자를 보고 진담임을 깨달았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유키가 한 번 더 그 팟캐스트를 들어보는 건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동일한 시각에,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와 같이. 이번엔 다른 사연을 보내서.
다행스럽게도 유키의 제안은 들어맞았다. 처음 말라니트로 중심부로 들어서자마자 마츠와 소타는 방송국 송신소 쪽에서 거침없이 루프 되는 찢어질 듯한 음악에 귀를 틀어막았다. 저게 문제 아니냐고, 저게?! 요슈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더욱 거칠고 난잡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속에서 마츠는 거의 공연장에서 외치듯이—어차피 시민 대부분은 헤드셋을 착용했거나 그 음악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소리쳤다. 그는 마츠가 한 말과 제리가 그간 보인 여러 정황을 돌이켜 보았다. 해답은 예상외로 가까이 있었다. 요슈아는 검지로 입술을 툭툭 건드리다가 시야를 위로 올렸다. 창공을 침범한 거대한 송신탑 쪽, 괴성에 가까운 음악에도 태연한 시민들을 보면서 요슈아가 드디어 정답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불쑥 내렸다. 멤버들이 없었으면 이곳에 다시 오지도 못했으리란 생각까지 미쳤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내 주변엔 다정한 사람밖에 없구나. 갑작스레 감명에 젖은 요슈아가 횡단보도를 대기하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을 덥썩 끌어안고 고맙다며 마음 깊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츠가 땀 한 방울을 턱 끝에 매단 채, 요슈아의 등을 어물쩍 두드리면서 대답했다.

 

"어엉, 어. 그래. 근데 요슈아, 넌 네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냐?"

 

요슈아는 약 기운이 가신 상태에서 회상을 멈췄다. 그날 이후로 얼마나 부단하게 노력했던가. 클라이맥스 레코드, 브레이브 차일드, 나아가 요슈아와 LA, 그 모든 일을 잊어버린 것까지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제리가 제리 자신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은 순간, 요슈아의 마음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조해졌다. 그린 듯이 다른 둘이었다. 한데도 서로의 삶은 무척이나 닮은 꼴로 자라나서, 이젠 서로를 가장 이해하는 이가 본인임을 인지하고 있다. 요슈아는 이전에도 그랬듯 그와 극적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아무리 비정상적이고 혼돈에 빠져 있어,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막막해도 그는 제리가 곁을 지켜준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만 피트가 넘는 고도에서 추락하는 기상천외한 체험도, 며칠 내내 폭설 속의 산장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는 조난 생활도. 심지어 아픈 상처를 지워 준다며 속살대는 빗방울을 외면하고 상대를 진심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까짓거 못할 게 뭔가. 이 부조리한 세계를 지배하는 불평등하고 엉망진창인 음악을 종료시키고, 도시 전역을 자신의 음악으로 뒤덮어버리는 기행 정도야 쉬울 것이다.

 

"널 정말 좋아하니까."

 

요슈아가 제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손쓸 도리 없는 *인간*적인 소년이다. 사랑에 맹목적이고, 그 맹목으로 인해 나약함을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나약함마저 사랑을 위해 드러낼 수 있었다. 그는 백 팩 안에 든 장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고개를 내밀어 거리에 있는 보안관과 경찰의 수를 눈대중으로 셌다. 계속해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 요슈아를 저지하기 위해 수가 늘어났었다.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테니, 지금 시기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더 제리가 이곳 음악에 노출된다면. 그땐 정말로. 요슈아가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었다. 부정적인 망상은 본능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요슈아는 그들의 눈을 피해 가야 할 곳으로 갔다.

 

그날 밤. 제리는 현관문 앞에서 뭔가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그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문 앞으로 갔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얇고 가느다란 상체가 제리를 향해 앞으로 기울어졌다. 회색 머리카락이 제리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낭만이라고는 다 죽은 여자, 이제 와 판타지를 기대하기엔 현실을 너무 잘 아는 여자. 그런 제리가 틀기만 하면 잠자리에 드는 로맨스 영화 속 몇 가지 클리셰가 있었다. 갑자기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집에 들이닥쳐서 하룻밤을 보내는 그런 이야기. 제리는 정말로 기대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

그 상황을 직접 겪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몇 번 당황하다가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겨우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제리의 품 안에 빠듯하게 들어온 이를 확인한 그는 두 번째로 놀랐다. 요슈아였다. 그것도 상처 입은 상태의.

 

 

Chapter 3. So What’s Your Plan, My AI?

 

"앗, 아야."

"조금만 참아. 거의 다 끝나가니까…"

 

요슈아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제리 혼자만 앉아 있던 소파 맞은편 좌식 테이블에 걸터앉아 그에게 치료받고 있었다. 난 바닥에 있어도 되는데, 하는 그를 제리가 만류하면서 앉힌 덕분이었다. 그는 제리가 이끄는 손길대로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와이셔츠를 벗기자 드러난 어깨에 입은 상처가 보였다. 제리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요슈아는 있지, 좀 더 자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

"…엣."

"응? 어, 어라.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주제넘었나?"

 

제리는 자기가 한 말을 곰곰이 검토했다가 또 한 번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단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약에 적신 거즈를 문대다가도 말문이 막혔다. 그 앞에만 있으면 제리는 본인이 알던 제리로 있다기보다, 본인이 모르는 제리를 자꾸만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하는 감각이 사뭇 낯설어서 모르는 약품을 건들 듯 흠칫거리다가도 적응하면 금세 빠져들어선, 구제 불능이라고 봐도 좋았다. 생각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비슷한 심정은 배가 되고 곱절이 되어 제리에게 돌아왔다. 요슈아 또한 덩달아 한 박자 뒤늦게 놀라더니, 양손을 홱홱 내저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시도하려고 했다. 제리가 치료하고 있는 오른팔 손등은 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왼쪽 손만.

 

"아니! 아닌데! 그건 아니야. 걱정해 줘서 기뻐. 오히려 엄청나게 두근거렸어."

 

제리는 약간 황망해졌다. 볼이 붉어졌다.

 

"저번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넌 나를 너무 좋은 사람처럼 여기는데."

 

요슈아는 제리가 누르는 손에 자기도 반대쪽 손을 겹쳤다. 체온이 겹쳐서 흐르자 조금 더 따듯해졌다. 제리는 슬쩍 요슈아 쪽으로 눈동자를 굴려서 그를 훔치듯이 살폈다. 요슈아 또한 제리를 훔쳐보았기에 둘은 동시에 동선이 겹쳤다. 머쓱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래로 슬금슬금 피하는 제리였지만, 그는 집요하게 각도를 바꾸어서 제리와 마주했다. 마침내 제리가 포기하고서 아예 홱 정면으로 요슈아를 바라보자 그가 만족스럽게 콧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잘 정돈된 손톱으로 제리의 손마디를 톡톡 건드리면서 말했다.

 

"실제로 그러니까."

 

제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을 부정하고 싶었고, 평온했던 제 삶을 수수께끼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린 요슈아에게 반박할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따라서 표현하자면 오히려 달가웠다. 하지만 제리가 가진 용기는 그러한 마음을 꺼내놓기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입을 벌리는 대신 행동으로 옮겼다. 거즈를 얹은 어깨에 붕대를 꼼꼼히 감고서, 천천히 테이핑했다. 제리는 과거 자신이 생겼던 상처보다도 지금 그를 치료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썼다. 딱 그만큼이 제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요슈아는 애써 노력해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보이는, 그가 내보이고자 하는 '최선'이 기뻐서 제리가 보지 못하도록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다음 실실 웃었다. 제리는 요슈아가 계획한 대로 그가 웃었단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마지막까지 치료를 마무리한 다음에서야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튼, 이제 치료 다 했어."

 

다만 아무리 용기 없는 자라도, 필요한 상황에서는 꼭 말을 꺼내게 되는 법이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등을 돌린 채 응급 상자를 소파 아래로 밀어 넣으면서, 문득 생각난 의문점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아 올랐다. 묻지 않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요슈아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짐을 챙기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다. 부스럭거리면서 재킷이 손끝을 스치는 소리가 마치 예리한 칼날이 제리의 피부를 베고 지나가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제리는 묻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꾹 눌러 담았고, 참아 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쳐와서 이토록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 웃옷을 걸칠 뿐인 행동으로 조급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그는 쭈그려 앉은 몸을 일으키면서 왼손으로 주먹을 쥔 채 꾹, 누르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이 보였다면 질문조차 못 했을 것이다.

 

"저기, 있잖아."

"응?"

"혹시, 요슈아는 날 위해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

 

실내에는 정적이 깊게 깔렸다. 그 순간 제리는 '망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단번에 속으로 차오르는 온갖 잡념을 무찌르려 안달복달 댔다. 그가 살면서 이렇게 당황한 적도 없었다. 요슈아는 정말 제리에서 최초란 최초는 전부 앗아가야 만족하는 걸까. 제리가 잠깐 생각했다. 지금 얼굴, 우습겠지? 엄청 뜨거운데!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귓불을 진정시키려 무어라도 말을 뱉어야겠단 생각에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아, 내, 내 말은. 그러니까, 멋대로 착각하는 거일 수도 있는데, 아 그게, 분명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는 생각하지만."

 

머릿속이 엉망이니 덩달아 몸도 어느 쪽 방향으로 향할지 정하질 못한 채 이리저리 움직여졌다. 요슈아가 당황한 낯으로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제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제리는 보이지 않는지 혼자서 소파 쪽으로 향했다. 요슈아가 보기에는 그는 이미 요슈아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는지라, 해명할 필요가 다분했다. 요슈아가 그에게 가까이 가던 참이었다.

 

"요슈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계속 신경 써 주고, 나를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는걸.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나만 보호받는 건 너무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제리는 양손을 꼼지락대면서 결국 자기가 가진 모든 패를 드러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고 있던 마음을 실토하고 나니 속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었다. 고작 한두 번 만난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제리는 그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주 오랜 시간 그리웠던 이를 만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매분 매초, 그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그는 제리에게 기억처럼 다가오는 상상을 그려내게 했다.
꿈을 꾸고는 했다.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서 얇은 이불을 같이 덮고, 같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면서 우스갯소리로 소원을 비는. 꿈에서도 제리는 꿈을 좇았다. 요슈아 또한 제리에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이한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하고 눈을 질끈 감은 제리는 계속 이어지는 침묵과 고요함에 다시 슬그머니 시야를 되돌렸다. 그러자 눈앞에는 그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눈높이를 맞춘 채, 제리의 뺨에 가까이 손을 뻗고서 고민하는 요슈아는,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미소 중에서 가장 순수하면서도 괴로운 듯한 것을 꺼내 보였다. 그러고선 이마를 제리의 목선에 가볍게 기댄 채 속삭였다.

 

"네 말들이야말로, 치사해. 그러면 내가 멋대로 짊어질 수가 없잖아."

 

그들은 서로를 차마 똑바로 직시할 수 없을 만큼, 거울조차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감정을 내핵 안에 품고 있었다. 그것은 터지지 않은 상태로 심장을 울리게 했다. 요슈아는 결심한 것처럼 제리의 머리카락을 몇 차례 쓰다듬다가 몸을 곧추세웠다. 제리는 저절로 그를 올려보아야만 했다. 또다시 그 눈빛이었다.

 

"치료 고마워, 네 덕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위험한 거야?"

"*인간*적인 거야."

 

제리는 도통 그 단어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제 손바닥에 적은 것이 요슈아의 이름을 적는 철자인 것도 알았으며, 그가 들려준 음악의 가사와 수없이 내뱉은 말의 뜻도 전부 이해했지만, 오로지 그 단어만큼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타지에 버려진 이방인으로서 제리를 존재하게 했다. 요슈아는 제리의 심정을 안다는 듯이 더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대신 다른 말로 물꼬를 텄다.

 

"내가 부탁했던 말 기억해?"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널 믿어 줄 수 있냐는 말."

 

제리는 기억 속을 더듬어서 대답했다.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백 팩을 챙기면서 물었다. 이번엔 그의 표정을 가리는 석양의 그늘진 감염은 물러난 뒤였다. 또한 요슈아만이 제리를 향해 말하는 라디오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요슈아는 제리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달라고, 그러면 전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하면. 믿어 줄 수 있어?"

 

제리가 머뭇거렸다. 언제나 그는 누군가가 하라는 방침대로 살아왔었다. 이번에도 요슈아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태평하게 진행될 일도 많은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싫었다. 제리 또한 결심했다. 결심의 형태는 양쪽으로 찍어낸 데칼코마니처럼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부턴 붓으로 색을 섞은 듯 달라지기 시작해 이내 제리와 요슈아가 다른 사람임을 입증했다. 제리가 지닌 회색 홍채와 요슈아가 지닌 회색 홍채는 비슷했다. 그럼에도 요슈아는 그 안에서 자신이 아니라 여리고, 서투르지만 노력하려는 한 소녀만을 발견했다.

 

"혼자 짊어지게 하기보다는 같이 책임지고 싶어. 믿고 싶으니까."

 

세간은 그것을 반짝이는 아이덴티티라고 말한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과 목적을 간략하게 들었다. 소시민에 불과한 그로서는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 요슈아에게 '미쳤어'라고 세 번이나 말했다. 그러려나? 라고 짓궂게 대답한 그를 향해 다시 한번 복기한 횟수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었다.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음파를 송출하는 장소는 방송국의 송신소에 위치한 중심 송신탑이다. 멤버들—요슈아가 재빠르게 소개해준—이 방송국 내부로 잠입해 24시간 가동되는 부조정실 스튜디오의 스태프들을 제지하고, 제리는 요슈아가 건넨 모종의 자동 재생 홀로그램 레코드로 원래 끼워져 있던 레코드를 대신할 것. 그 사이에 요슈아는 송신탑에 있는 송신기를 조작해 홀로그램 레코드 속의 내용물을 도시 전역에 송신시키겠다는 소리였다. 요슈아는 구태여 제리가 혼란스러워할 만한 이야기는 건너뛰고 싶었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처럼 느껴져 입을 열었다. 지난 삶을 살아가며 계속 들어온 음침하고 꺼림칙한—무엇보다 요슈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수식을 붙일 생각 조차 안 했을—음악이 자기 뇌를 갉아 먹고 있었단 사실에 조금 비틀댔다. 현재까지도 제리는 제대로 믿기진 않았다. 그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나, 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슈아를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요슈아는 이때야말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면서, 설령 잘못되더라도 네 잘못이 아니라는 당부와 함께 알약 하나를 건넸다. 이게 무엇이냐는 제리의 말에, 그는 짧게 부탁했다.

 

"정말 나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신뢰하게 된다면 삼켜줘."

 

그가 더 물을 새도 없이 요슈아는 헬멧을 쓰고, 빠르게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송신소로 향했다. 점점 멀어지는 요슈아의 등을 바라보면서 제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Chapter 4. Time to call it a night, My Telomere.

 

"이쪽은 OK—그쪽은?"

"제대로 끼운 것 같아요. 이젠 요슈아가 말한 시각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쿵, 하고 유키와 마츠가 제압한 마지막 덩치가 바닥 아래로 포박되어 깔렸다. 제리는 여러 차례 자기가 제대로 레코드를 끼웠는지 확인했다. 레코드를 끼우자마자 핀이 켜지면서, 조작 화면에는 제리가 모르는 가수 명과 제목이 나열된 곡들이 차곡차곡 정렬된 플레이리스트가 보였다. 제리는 주변을 살피다가 곡명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중 제리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는 곡들이 몇 가지 존재했다. 그 곡들은 전부 요슈아가 그만의 라디오를 들려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소개하였던 노래 제목과 똑같았다. 제리는 그제야 요슈아가 어떤 행동을 하려는지 감이 잡혔다. 제리가 급하게 관계자들을 제압한 채로 대기 중인 멤버들을 향해 외쳤다.

 

"요슈아하고 연락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더는 듣는 쪽만으로는 안 됐다.

 

"정말 급해요."

 

귀에 헤드셋을 끼자마자, 헤드셋 가장자리에서부터 번쩍이는 네온 불빛이 들어왔다. 참 요란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잠시간 관리자 권한 부여와 함께 제리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면, 헤드셋은 제 주인을 반겼다. [JRTTAXXX, 텔로디오 히어링에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라는 재회의 인사말로. 어찌 감히 헤드셋 따위가 주인을 반긴단 표현을 운운할 수 있겠냐고 조롱하는 작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오버 이어 헤드셋의 이어 패드는 한동안 제리가 입력하는 조작도 무시한 채 요란한 아스키아트─우는 이모지, 기쁜 이모지의 바리에이션─를 반복적으로 띄우면서 통 말을 듣지 않았었다. 제리는 '그리움'이란 감정을 그것에게 부여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리는 JU가 요슈아와 닮았던 이유를 늦게나마 눈치챘다.

 

"내가 그렇게 설정한 거지? 너를… 개인 맞춤형이니까."

 

기억이 전부 제거됐어도 그리움은 여전했기에, 어떻게든 무의식중에 요슈아를 떠올려가면서 입력한 정보들 사이로 만들어진 그 어시스턴스는 제리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들이 알려 준 요슈아의 긴급 연락처로 통화를 시도했다. 제리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으면서 애써 울음을 참았다. 소음으로 막혀 있던 페이지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할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요슈아 또한 전화를 받았다. 그 너머로 인체 인식형 홀로그램이 지직거리며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조급하게 외쳤다.

 

"저기, 있잖아, 요슈아!"

"쉿. 들어봐."

 

순간 제리가 요슈아의 목소리에 따라 조용히 집중하면, 요슈아가 운전하면서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인간이 우는 소리와 더 비슷한 느낌이었다. 식스-투-투. 그러니까, 둘만의 암호를. 절대로 정확한 뜻을 알려 주지 않았던 그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투-투. 제리는 그걸 따라 읊으면서 되새김질했다. 그러다 요슈아와 제리가 이때까지 내뱉은 열두 번째 '식스'가 입술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쳤을 때, 송신탑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제리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검고 하얀 머리카락이 마천루를 가리면서 바람에 나부꼈다. '투'. 반사적으로 외치게 되는 신호.

 

"…응, 좋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인간*적인 친구네, 어쩐 일이야?"

 

그가 '식스'─'투' 사이 간격이 '투'─'투' 사이 간격보다 넓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한 번 더 신호를 입에 담고 나서였다. 정신을 흩뜨려 놓듯이 요슈아가 가느다란 미성으로 질문한 참이었다. 그는 해야 할 말을 정리하면서 답했다.

 

"요슈아, 있잖아. 돌아가면 네 노래를 전부 듣고 싶어. 이런 상황이 아니라, 제대로 둘이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요슈아는 그 부분에서 잠깐 웃었다. 망설임을 버린 채 또렷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곱씹었다. 어느새 코앞에는 송신탑이 보였다. 그는 헬멧을 가뿐히 벗고서, 백 팩을 맨 채 미리 계산해 둔 루트로 진입했다. 통화는 쭉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디오는 오늘까지겠네. 아쉽지만 종료 문구를 말해야 하려나…. 너도 외웠겠지만."

 

제리는 헤드셋 너머로 요슈아의 구두가 반자동식 계단을 빠르게 뛰어가는 발소리를 언뜻 들으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수신기 앞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현재까지는 평소 흘러나오는 음악을 송신하고 있는 송신기를 향해, 요슈아가 손을 뻗는 도중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뺨에 걸친 핸즈프리 이어폰이 그의 귓가에서 빠져나갔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이 일이 무사히 끝나면 전부 나한테 들려줄래? 나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난 요슈아야. 네 *인간*적인 친구고,"

 

혹은 6-2-2.

마지막으로 신원을 밝히는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암흑과도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몇 초 동안 이어진 정적 끝에, 누군가는 말을 꺼냈을지도 몰랐다. '밤이 이리 조용할 수 있던가.'

단숨에 시작을 알리는 음이 고요했던 빌딩 곳곳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슨 노래인지 알아보기 위해 하나둘씩 조명을 켜면서, 새벽녘에 찢어질 듯한 기타 리프를 듣든 말든 수면 상태에 접어들었던 그들이 이제는 바깥에 고개를 내밀어 송신탑을 주목했다. 정확히는 깊은 구석에서부터 이상하리만치 고양감을 끌어올리는, 낯선 감각을 주는 그 수상한 음악이 밟고 지나가는 오선보의 흐름을. 방송국 안에 있는 제리 또한 그 노래를 들었다.

별처럼 속속히 점점 켜져서, 조명으로 밝아가는 창밖을 멍하니 선 채 내다보는 제리를 향해 멤버들은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쳤다. 제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채 바깥으로 뜀박질했다. 시끄러운 경고음과 침입자를 색출하라는 성난 합성 음성이 그들을 가로막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붉은 조명이 시야를 방해해 정신없는 상태에서마저 요슈아 일행 쪽이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 외부 비상구가 거칠게 열렸다. 요슈아가 거칠게 호흡을 내뱉으면서 외쳤다.

 

"이쪽으로!"

 

멤버들은 처음 이동했던 차에 탔고, 요슈아는 제리 또한 그 안에 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제리는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오토바이를 끌고 온 요슈아의 뒷좌석에 탑승했다. 와중에 헛발질하는 그를 보면서 요슈아는 침착하게 행동해도 된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제리에게도 보였다. 송신탑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저 음악이, 이 세계를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원래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되돌아가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께름칙한 예감을. 제리는 요슈아의 허리를 양팔로 꽉 붙들고, 차를 뒤따라가는 요슈아의 등에 고개를 잠시 파묻었다가 들었다.

맞은편 공중 도로를 연결하는 시간은 훌쩍 지나, 지금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곳의 종착점은 맞은편 고층 빌딩과의 접점뿐이었다. 이대로 쭉 가면 그대로 자유낙하였다. 요슈아가 자신을 대입한, 에이대시가 떨어트린 햄버거 속 양상추처럼. 그 사실은 꿈에도 모를 제리는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언제나 현실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정답이라 여긴 채로 요슈아에게 외쳤다.

 

"요슈아! 정말… 뭐, 뭐야? 무슨 생각이야?!"

 

요슈아 또한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인지.

 

"네가 보기엔 어때?"

 

 

──이 세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점이라 정의 내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느 구역에서 음악이 가진 자유의 문제를 논하며 팻말을 높이 치켜들고, 그 반대 구역에선 테이저건을 충전하는 요원들이 옷매무새를 다듬는 미래도시. 그 안의 작은 점 두 개에 불과한 이들이 만든 이야기도 어느덧 커튼콜 장막을 올릴 시기에 점점 가까이 진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함께 해 준 익명의 청취자에게 전달해야 할 한 가지 법칙이 있다. 부디 귀를 기울여 유심히 들어주었으면 한다. 꽤 어려운 일이다. 이 법칙은 한 세계의 존재에 관한 예의이면서 격식이므로. 곧 있을 커튼콜 장막이 올라가면, 접고 있던 세 손가락을 위로 높이 치켜들어야 한다. 그리고 박자에 맞추어 스트레이트로 이어지는 숫자열을 본인만의 언어로 외칠 것. 단지 그뿐이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막이 내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빛바래지 않고 계속되리란 기대를 품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책장을 완전히 덮거나, 영사기가 더는 제 기능을 못 한 채 돌아가지 않거나, 게임기의 종료 버튼을 누르게 되는 이후가 오더라도.

수많은 청취자가 오갔고, 다양한 이들이 세계를 지나쳤다. 그 순간마다 위태롭게 지켜진 법칙 덕분에 두 주역을 포함해 이 세계는 내려오는 붉은 커튼의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눈부신 미래를 향해 흥분한 나머지 급박하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제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속한 회색빛 눈동자는 더 나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완전하고도 찬란한 신호 그 자체다. 그 신호가 제리를 향해서 이토록 숨 가쁘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밤을 밝히는 불빛들이 모인 이곳에서 오로지 너만이 보인다고. 소중한 사람이 지나가는 길을 쫓는 일이 맹목적으로 즐겁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나는, 몇 번이고, 어디까지고, 언제까지고, 어느 세계에서든.

너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찬 주파수라고.

 

"난… 너를."

 

갑작스레 어떤 파동을 느낀 제리는 감히 수식을 하나 덧붙이고 싶었다. 간혹 이런 순간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의미 모를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를 붙여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를 품는 순간 말이다. 제리가 밭은 숨을 뱉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요슈아의 허리를 잡은 왼쪽 손을 떼고서, 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무언가를 입 안에 단숨에 털어 넣고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요슈아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 정체를 보지 않았어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나의 *인간*적인 친구, 6-2-2. 나의, 요슈아라고 생각해."

 

그러므로 이 세계의 모든 음표를 지루한 불협화음이라 여길 수 있게 된 한 인간은, 비현실을 해답이라 외치는 그 찬란한 신호에 응답했다.

 

요슈아는 오토바이 핸들을 쥔 손에 일순 힘을 주었다. 손등 피부의 옅은 혈색에 생기가 돌 정도였다. 그가 머리를 아래로 숙이면서 작은 숨을 내뱉었다. 대가나 보답을 바라고 계획하며 시작한 일도 아니었거니와, 제리가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끝끝내 그가 품은 욕심이 미련으로 변하게 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주 일부, 반신반의하며 돌려받은 신호 하나에 그는 숨이 떨렸다. 제리. 수많은 파편이 모여서, 우리는….

그는 다음 말을 잇기엔─비단 그 말조차도 입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고 단발적인 사고로서 존재했지만─자신을 맹신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겁 많은 소년의 발걸음이 멈추면서, 바닥을 향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기를 반복했다. 제리는 그와 그 너머로 들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집중했다.

요슈아가 자기 허리를 감싼 제리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다섯 손가락 틈새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그들을 끊임없이 추격해 오는 이들이 뿜어대는 분노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이었다. 요슈아가 테이저건에 잘못 닿았을 때 손마디를 타고 흘렀던 전류하고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맥박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까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요슈아는 잠시간 자신의 오만에 대해 반성했다. 당장 처한 사태와 세계에서 벗어나고 나면 점차 해결될 수도 있지도 않을까, 했던.

요슈아야말로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 그 자체였으며, 정답에 도달할 의무를 지녔다.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도, 아지랑이 같은 '안전한 위험'의 불빛 사이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이 세계 속 제리가 더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절대로 놓으면 안 돼."

 

요슈아가 제리의 흔들리는 시선을 말로 붙들었다. 제리는 떨리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크나큰 결단이었다. 겹쳐 울리는 3단 사이렌과 웅성거림을 전부 무시할 정도로 강인한 사람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나섰더라면. 기쁨과 흥분, 그리고 동반되는 감정.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배덕감이 머리와 발끝을 타고 제리의 온몸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절대로 꿈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서히 고층 빌딩 앞으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풍경이 선처럼 그려질 때, 몸이 부유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아주 익숙한 음표들 사이로 천천히 빠져드는 몸, 두 사람을 빨아들이듯 품은 빛.

빛이 눈 부셨다. 지독할 정도로.

 

 

Chapter 5. You can listen to whatever kind of music creams your twinkie.

 

고막을 관통하는 열차 지나가는 소리에 제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몇 초 동안 그를 습격했다가, 이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는 사방팔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이곳이 어딘지 확인했다. JR 야마노테선. 시부야에서 하카타까지. 심심한 표정으로 핸드폰 속 출근 시간대를 확인하는 직장인과 테스트를 걱정하는 고교생의 안절부절못한 낯빛. 그 사이로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도 보이지 않는 한 인영을 찾으면서, 제리가 머리를 숙였다. 그의 옷차림이 어느새 평소 출근용으로 입는 와이셔츠와 카디건으로 변해 있었다. 눈썹 머리를 찌푸리고는, 카디건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안쪽 깊은 곳에 박힌 핸드폰을 찾았다. 그가 원래 쓰는 기종이었다. 능숙하게 1번을 누르고 기다렸다. 하지만 불안한 오랜 기다림 끝에 제리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었다. JU와는 전혀 다른 단조로운 기계음.
이럴 리가 없었다. 분명 두 사람은 손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제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팟캐스트를 켜고, 6-2-2로 채널을 맞춰 보았다. 그러나 현 채널은 현재 방송 중이지 않다는 녹음된 메시지가 경쾌한 배경음이 틀어지자, 제리의 등줄기로 오싹한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앞에 있는 자판기 숫자가 또다시 울렁대는 기분이었다. 제리는 그대로 힘이 빠져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요, 요슈아… 요슈아. 요슈아."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름을 불렀다. 완결지었다. 떠올렸다. 그런데 정작 그가 옆에 없었다. 제리가 핸드폰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상체를 푹 숙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보았다가 때마침 멀리서 땡땡거리는 소리와 함께 JR선 승차장으로 진입하는 지하철에 고개를 돌렸다. 제리만이 오직 그의 행방을 물었다.

 

"어디 있어?"

 

소음이 잦아들면서 승차장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열차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흰색 스니커즈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발짝씩 제리에게 다가섰다. 마침내, 제리의 코앞에 서자 앞코가 구겨졌다. 그가 시야에 맞추어 쪼그린 탓이었다. 제리는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앞이 깜깜해 순간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달콤한 카야 잼과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들어와 제리의 긴장을 녹였다.

 

"여기는 아침 식사 장소로 적절하진 않은걸."

 

여느 때보다 반가운 데자뷔와 함께한 채로 요슈아가 제리 앞에서 웃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는 제리에게 토스트를 물리면서. 따스한 햇볕이 젖은 눈가를 건드렸다. 놀란 제리는 애써 침착한 체할 겨를도 없이 떡하니 입술을 벌렸다.

 

"요슈아?"

"응, 네 요슈아."

"6-2-2?"

"널 아주 많이 좋아하는 소꿉친구 그리고 남자친구."

"정말, 정말 너 맞지?"

"그건 내 쪽이 하고 싶은 말인데! 바보, 얼마나 내가 널 걱정했는지나 알아? 네가 없을 때 정말이지…."

 

요슈아는 가뿐히 떨어지는 토스트를 맨손으로 잡으면서, 태연하게—하지만 왼손이 떨리는 걸 감추고서—웃으며 농담이 섞인 투정을 부리려 했다. 하지만 그다음 그럴 틈도 없이 제리가 강하게 양팔로 요슈아를 끌어안자 그마저도 실패했다. 아, 언제까지고 그는 소꿉친구에게 당하는 쪽이었다. 파급력이 너무 강한 걸 어떡하겠는가. 요슈아는 머뭇거리면서 더 이상 떨리지 않는 손으로, 훌쩍거리는 제리의 어깨부터 등을 토닥이듯이 쓸어내렸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듯이 기대자 지금까지 하지 못 한 것들을 충족시키듯 더 가까이 붙게 되었다. 요슈아는 쓰게 웃고는, 제리의 어깨를 살짝 떼어낸 다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를 달랬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커튼콜은 어떻게 끝맺음 지어야 할까.

 

"그러면, 제리. 나 부탁이 있어. 이번에야말로 들려줄래?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제리는 아직 감이 오지 않은 나머지 요슈아의 부탁에도 양쪽 눈을 깜빡거리면서 몸을 꼼지락대기만 했다. 요슈아는 토스트를 적당히 봉투 안에 넣어 두고,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지긋지긋한 자동차 매연과 각자 다른 음악을 듣는, 말 그대로 매캐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 속에서 요슈아는 제리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전부 나한테 들려줄래? 나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아, 그러려면 신원을 밝혀야 하려나? 일단은."

 

일축하여 제리 그 자체를. 제리라는 인간을 이루는 요소들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그렇기에 요슈아는 사랑스러운 그의 인간적인 친구의 뺨을 문지르면서, 못내 그리웠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환희에 찬 채로 덧붙였다.

 

"난 말이야. 정말 좋아하는 너를 언제나 듣고 싶고, 노래하고 싶은…."

 

 

시부야 스크램블의 교차로에서는 언제나 믹서기 속에서 갈리다 만 세계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1엔 동전이라도 더 벌고자 혈안이 된 소비의 상징은 거대한 쇼핑센터 형태로 중심부를 차지하고, 그 아래 빼곡히 들어선 간판들이 저마다 이목을 갈구하며 경쟁한다. 가게 곳곳 열린 문마다 고동치는 비트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길은 청취자, 청취자, 또 다른 청취자들로 가득 찬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호객과 광고음악은 신물이 날 지경이기에, 아스팔트 도로를 급하게 지나가는 군중은 저마다의 사운드트랙에 취해 지나갈 뿐이므로.

이들 몇몇은 플레이리스트 곡을 전환하면서 시시각각 바뀌는 대형 스크린을 향해 집중한다. 그러면, 립스틱을 붉게 칠한 광고의 여왕은 당찬 미소와 함께 올해를 빛낸 코스메틱을 소개할 것이고. 다음 주에는 유명 해외 록 밴드가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시부야 스크램블을 지나가리라는 희소식이 뜰 것이며….

그런 다음,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한 방의 클린치처럼—콘크리트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여 그라피티와 같은 샛노란 그라피티가 트랜지션된다. 실물보다 몇 배는 큰 앨범 커버가 그 위로 떨어지는 효과를 내는 것과 동시에, 스크린은 LP 축을 올리듯 음악을 재생시킨다. 관계자 몇몇을 제외하면 아무도 듣지 못 한 그 곡을. 왼편에서 빠르게 반대쪽으로 스크롤 되는 선동적인 헤드라인은, 그야말로 축제에서 들리는 축포나 다름없이.

 

LAPAN 장르를 개척한 천재 밴드, Brave Child! 금일 6월 22일 신 앨범 <TELOMERE> 본격 발매 개시!!

 

관심 없던 이들에게도 열망과 간절함을, 상냥해지는 법을 전달해 주는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그들만의 청취자를 생산해 냈다. 어쩌면 평생 마주치지 않을 사람임에도 떨리는 심정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어서, 그로 인해 조금은 지긋지긋한 거리를 올려다보았을 때 어느 한 명쯤은 반드시 '팬'이라고 외칠 수 있게 해 주어서.

하여, 익명의 청취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순간 또한 감사함을 담아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15번의 반복 끝에 되찾아온, 아주 인간적인 음악으로.

White Sec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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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ngkgkB

 


겨울의 눈 아래에 덮이는 비밀이 있다. 오로지 그 계절에만 숨길 수 있는 차가운 금기. 그런 것들은 대개가 시간에 둘러싸이는 몹시 사소한 것들이어서, 요슈아는 비밀을 마치 무게와 온도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대하듯 했다. 겨울이 오면 시체처럼 그것들을 파묻는 시늉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슈아가 아직 어릴 적, 소꿉친구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하얗게 쌓인 눈의 아래를 파고들면 부드러운 갈색의 흙과 함께 엉킨 지층이 나온다. 요슈아는 그 부분이 나올 때까지 한참, 손이 발개질 정도로 눈 아래를 파헤쳤다. 이내 피부 표면이 따가워질 정도에 이르자 요슈아는 손을 털어내고 눈과 흙이 묻지 않은 손바닥 아래쪽으로 눈을 꾹꾹 문질렀다.
작은 마을에서도 더 외진 곳,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언덕 위의 집은 늘 사람이 자주 오지 않았다. 언덕이라고 해도 그것보다는 조금 더 높아서, 마을에서는 요슈아의 집이 있는 지대를 작은 산이나 봉우리 따위로 부르기도 했다. 가족과 요슈아는 언제나 거기를 '언덕'이라고 불렀지만. 여름에는 집 앞에 있는 작은 밭과 뒤편에 있는 산 때문에 노인들이 버섯이나 약초를 캐겠다고 바구니를 이고 오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 지금 같은 겨울은 미끄러지기 쉬운 언덕에 누구도 오지 않았다. 요슈아의 하나뿐인 가족조차도 겨울에는 웬만하면 언덕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며 앓는 소리를 했는데, 정작 그의 가족은 언덕을 조심조심 내려가 근처에 있는 작은 식료품점으로 늘 향했다. 그런 그가 언덕에서 길게 미끄러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날부터는 어땠던가. 요슈아는 조용히 입김을 불며 언덕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발간 시야, 흰 눈 사이로 점점이 찍혀있는 사람들.

언덕 위, 요슈아의 집이 아니더라도 마을은 규모 자체가 아주 작았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도도 아니고, 그 집의 누가 바람이 났다더라, 누가 어떻게 됐다더라 하는 대소사까지 일정 비밀 없이 공개되고 까발려지기 일쑤였다. 이런 마을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야, 어른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언덕에 사니까 겨울철에는 비밀을 숨길 수도 있지. 봄이 오면 전부 녹아서 그것도 들통 나겠지만. 조곤조곤, 속삭이던 가족은 다행스럽게도 겨울의 눈이 조금 그쳤을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을 어른들은 요슈아를 대신해서 한 사람의 시신을 가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조심조심, 넘어지지 않게. 요슈아는 잰걸음으로 언덕을 따라 내려가며 생각했다. 둘만의 비밀은 이제 혼자만의 비밀로. 누구도 알지 못할 완벽한 범죄로. 겨울녘 동안 녹지 않을 은밀함으로.

언덕에 혼자 남은 요슈아는 그날 이후 스스로 고립되길 택했다. 언덕 아래 몇몇 집에서 요슈아에게 겨울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렴, 하는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전부 거절했다. 어차피 그들이 떨어져 살던 가족과 제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고작 그 나이에도.

마을의 중앙에는 그나마 가장 큰 건물인 영주의 저택이 자리했다. 바깥에선 총을 들다 못해 전투기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귀족이란 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 저택이 마을에서 가장 크기는 했다. 그를 중심으로 주택가들이 산재했고, 염소의 우유를 짜거나 텃밭에서 딴 과일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옆에 붙어 있었다. 마을의 주변부는 예부터 이 오래된 영지의 농노로 살아온 이들의 밭 따위가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여름철에는 아이들이 밭고랑을 건너다니며 뛰어놀고 노래를 불렀지만 겨울, 눈이 오는 날에는 특히 미끄러워 사람이 적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저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영주님의 저택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았으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검은 저택'이라 부르며 이 마을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던 아주 오래된 저택이며,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으나 유령이 종종 나오거나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는 숲과 가까이 있어 들어가 굳이 살림을 살려는 사람도 없어 처치 곤란인 장소라 했다. 실제로 요슈아 역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검은 저택에서 사람이 나오거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다.

그러니까, 어린 요슈아의 시선이 닿은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렇게 눈이 올 때는 그 저택 앞에 있는 사람이라 해봤자 밭 주변 먼 데까지 상태를 살피러 나온 농부들밖에 없을 텐데. 실루엣은 농부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가늘기 그지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이 눈발에 가볍게 나풀거리는 소녀의 뒷모습이 시렸다. 키가 어느 정도, 그러니까 어렸음에도 또래보다 큰 요슈아만큼은 컸으나 나이 들지 않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나이 들지 않았다'는 느낌보다는 '어른이 아니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하여간에 저런 아이를 이 근처에서 본 적은 없었다. 그 비슷한 아이조차도 없었고. 애초에 이 마을에 요슈아가 알 만한 또래의 아이들은 얼굴을 다 외우고 있는 터였다. 눈을 깜빡이던 요슈아는 다시 한 번 손바닥 밑의 둥그런 살로 눈을 문질렀다. 문지르고 봐도, 눈이 아니라 사람. 그는 언 밭과 밭 사이를 질량 없는 걸음으로 걸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어쩌면 저 소녀는 춤을 추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요슈아는 실없이 생각했다. 눈 아래를 파던 손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대신 요슈아는 하나의 검은 얼룩 같은 아이가 저택 앞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니는 걸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정말로 한참이고. 눈이 쌓이고 쌓여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아래에 묻는 동안, 내내.

 

 

여전히 요슈아가 어리던 날의 일. 미세하게 쌓이고 찔끔찔끔 녹던 눈이 요슈아의 무릎 위까지 쌓이게 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후의 이야기다. 폭설은 전조 없이 요슈아와 언덕의 집을 덮쳤고, 요슈아는 겨울마다 가족이 했던 일을 떠올리며 찬장에 남아있던 쓰지 못하게 된 종이와 천을 한 장 한 장 세밀하게 창문에 펴 발랐다. 그래봤자 작고 초라한 집의 추위는 조금도 가시지 않아서 양손을 문지르며 슬슬 불을 더 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즈음이다. 덜컹, 소리가 들려 요슈아는 잠시 빳빳하게 힘주었던 턱을 굳혔다. 지붕에 올라왔던 눈이 아래로 한 번에 떨어졌나? 덜컹. 소리는 문간에서 났다. 이내 덜컹거리던 소음이 가라앉으면 그 위를 작은 마찰음이 더했다. 똑똑똑. 눈발 외에는 찾을 손님이 없는 언덕 위의 작은 집. 이제는 그만이 혼자 사는. 요슈아는 숨을 죽이고 몸을 일으켰다. 채 붙이지 못한 천이 나직하게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창문의 틈을 만들고 늘어졌다. 요슈아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답이 없는 와중에도 요슈아는 알 수 없는 호기심, 혹은 떨림에 의해 한 발자국씩 문에 다가서고 있었다. 자박자박 바닥을 밟는 소리가 문 앞의 사람에게도 들렸을까. 모자이크 형식의 유리로 된, 그리고 테두리를 어두운 금색의 철로 덧댄 문에는 손님의 실루엣이 비추었다. 눈에 가득 담기는 몸체는 흐려져 있었는데, 요슈아는 불현듯 일주일 전 자신이 아래의 밭에서 보았던 소녀를 떠올렸다.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 순간 쓸데없이 가슴이 두근거린 건 왜였는지. 요슈아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세요."

 

요슈아는 어느덧 청년과 소년의 사이, 변성기가 끝날 즈음의 그럼에도 어린 시기에 있다. 더럭 낮은 목소리의 끄트머리가 옅게 떨렸다. 두 번의 물음 끝에 드디어 손님이 답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뜻밖의 나직하고도 낭랑한 목소리였다.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요슈아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한참 실루엣을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문을 열어보았다.
마주한 이는 '그' 소녀였다. 요슈아가 마을에서 보지 못한 자신 또래의 여자아이. 검은 저택의 앞에 있던. 춥지도 않은지 소녀는 잠옷이나 실내복으로 쓸 법한 하얀 홑겹의 원피스에 아무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안녕."

 

눈이 마주치자 이름도 모르는 그가 웃었다. 뒤쪽에서 눈이 하염없이 흩날렸다. 두 사람은 거기서 처음 서로의 눈을 들여다봤다. 핏기 아주 없지 않았으나 눈보라에 사람이 묻혀도 모를 날씨였던지라 소녀의 유난한 창백한 얼굴은 꼭 눈에 파묻혔다가 막 나온 것처럼 새하얬고 누구도 밟지 않은 것처럼 티끌 하나 없었다. 요슈아는 문득 그 뺨에 손을 대 제 손자국을 내고 싶다는 미묘한 충동마저 느꼈다. 잠깐의 붉은색이라도 남을까, 저 눈 위에는. 그 자국은 얼마나 오래 표면 위에 있다가 비밀로 사라질까. 마을의 모든 것이 눈에 먹히거나 비밀이 되기 좋을 때, 가장 높고 누구도 찾지 않는 눈 속의 비밀, 작은 성전.

요슈아는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놔 버렸으니 이쪽도 말을 놔도 될 성 싶었다. 그는 일부러 퉁명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날아서."

"날아?"

"어. 날아서."

"날개가 있어?"


여전히 그가 웃었다. 농담처럼.


"아니. 안에 들어가도 돼?"

"아."

 

요슈아는 단마디를 내뱉으며 자신의 뒤쪽을 돌아보았다. 집.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이었던, 이제는 혼자 남은 집. 작지만 거실과 작은 주방, 그리고 그나마 가족이 살아계실 적 작은 난로를 구해 조금 더 따뜻해진 침실, 작은 욕실만이 있는. 요슈아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보금자리가 부끄럽다고 느꼈다. 차갑고 엉망인 곳에 정말로 들어오고 싶을까.

 

"방이 더러운데."

"음, 괜찮아."

"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야?"

 

침입은 언제나 달갑지 않았다. 소녀의 앞에서 요슈아는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데의 이질감이 더 심했다. 그 질문에 소녀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네가 날 초대해서."

"내가?"

"날 보고 있었잖아."

 

요슈아는 다시 한 번 일주일 전에 보았던 언덕 아래의 정경을 떠올렸다. 눈이 쌓인 밭, 잔뜩 언 길에 춤추듯 걸어가던 뒷모습. 눈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다시 헤집어 봐도 눈이 마주친 적은 결코 없었다. 소녀가 말갛게 혹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지?"

"어떻게 알았어?"

"초대해줄 거지?"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소녀는 다시 제가 할 말을 입에 담았다. 초대해줄 거지? 어긋나는 대화 속에서도 요슈아는 자신의 언어와 소녀의 언어가 비슷한 온도를 지니고 있다는, 미세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막연한 고독의 무게였다. 눈처럼 희고 비밀처럼 검은.

요슈아는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긍정을 신호로 소녀는 굳은 듯 서 있었던 몸을 움직여 요슈아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피부에 와 닿는 화한 냉기가 요슈아를 잠시 망설이게 했다. 그는 열린 문을 닫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침실의 문을 열었다. 낡은 침대에 소녀는 거리끼지 않고, 그러나 조심스럽게 앉았다. 어쩐지 반가웠다. 아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곳에 사람이 온 게 얼마만인지, 에 대한 감격이라고 생각했다. 요슈아는 침착한 척 덤덤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제리."

"제리?"

 

소녀, 제리가 말했다.

 

"응, 제리. 너는?"

"아, ……나는 요슈아."

"요슈아."

 

막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제리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요슈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의 옆얼굴을 훑었다 시선을 떼었다.

 

"요슈아라고 해도 돼?"

 

제리가 미소를 지으며 묻고, 요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제리는 그날 요슈아에 대해서 많은 걸 묻지 않았다. 제리가 묻지 않았기에 요슈아도 그러지 않았다. 둘은 다만 앉아서 오래도록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의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를 듣기도 했고, 간혹 눈이나 마을의 길목, 언 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위가 얼마나 미끄럽고 위태로운지, 눈이 한참 쌓이면 밖으로 나가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눈 아래에 간혹 아이들이 물건을 떨어뜨리곤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도. 그러는 동안 제리의 얼었던 몸은 차근차근 녹아 온도를 되찾았다. 돌아온 온도는 어쩐지 요슈아의 것보다 조금 낮았지만, 서늘한 살갗이 요슈아는 영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 내도록 마을에는 눈이 내렸고, 요슈아는 제리의 앞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꾸벅꾸벅 감기는 눈을 애써 비벼가며 떴다.

창을 툭툭 때리던 눈 소리가 사라진 건 새벽녘 동이 터올 즈음이었다. 혼곤한 피로 속에서 헤매던 요슈아를 제리가 불렀다.

 

"요슈아."

"응?"

"나 이만 가볼게."

"어…… 더 있어도 돼."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요슈아가 말했지만, 몸을 일으킨 제리는 요슈아를 돌아보곤 가만 고개를 저었다. 투명하리만치 빛나는 검은 눈에 제가 고스란히 비추어졌다. 차가운 몸이었는데도 제 옆에서 떨어진 순간 요슈아는 지독한 추위를 느꼈다. 그런데도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자꾸 눈이 감겼다. 스르륵, 눈꺼풀이 아래로 떨어질 때 제리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잘 자, 요슈아. 그 건조하고 차가우면서 다정한 목소리.

요슈아는 꿈 녘에서 자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주름진 손을 느꼈다. 죽어버린 그의 보호자였다. 그는 요슈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울고 있었다. 불쌍해라, 불쌍해, 말하는 그에게 왜 울어요.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이 목소리도 눈도 먹어버린 것처럼 암담했다. 정신은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하고 가족의 목소리는 유일하게 먹히지 않은 귀에 자신을 새기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내 잠 속에서 정신은 하나로 모아지고, 그 순간 요슈아는 익숙한 어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을 들었다. 눈처럼 고요하게 내려앉는 다정함. 이렇게 말하는.

잘 자, 요슈아.

아, 그 매끄럽고 티 묻지 않은 살결이 제 머리칼을 쓸어주는 마지막 감촉.

 

 

꿈을 꾸고 일어난 하얀 날부터 요슈아는 눈이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주 오래도록.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면서 막막한 그리움보다 확실한 기다림에 익숙해진 요슈아는 좀 더 자랐다. 산지에 만연한 흰빛은 한동안 눈이 오지 않는 나날을 거쳐 서서히 물로 녹았고, 그로부터 사흘 뒤 언덕 아래에서 들려온 날카롭고 새된 비명이 하나의 비밀을 건져 올렸다. 폭설 탓에 학교는 일주일 내리 휴교였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이런 촌동네에 가까운 영지에서 귀족도 아닌 평민의 아이로 태어났으므로 구태여 학문을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아이들은 종종 학교를 빼먹곤 했다. 바깥세상에는 이미 자본가가 혁명을 일으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모호해졌다지만, 그것은 요슈아가 살고 있는 강촌 영지에서는 썩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눈이 녹는 동안 밖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시체를 발견했다고 마을에는 금세 소문이 돌았다. 영주님의 저택에서 고작 한 블록 너머에 사는 성당의 웨이드 신부님이더라, 그분께서 온몸에서 피를 뿜은 채로 죽어 있었더라, 아니더라, 목이 꺾여서 그 사이로 피가 질질 새고 있었더라, 이런 소문이 하염없이 도는 걸 요슈아는 조심스레 언덕 아래 가게에 찾아갔던 날 알게 되었다. 그 집에는 아내 하나와 어린 딸이 살고 있다며, 안타깝게 됐다는 말을 연신 하던 가게 주인. 마을의 누가 죽었든 요슈아는 식료품점의 주인이 제 가족이 죽었을 때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를 더 떠올렸다. 잘 죽었지, 지 식솔도 데리고 가지 그랬누, 혀를 쯧쯧 차며 내뱉던 뭉근한 악의. 요슈아는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먹을거리를 품에 안고 언덕을 올라오며, 자신이 들른 가게의 주인이나 마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요슈아는 잠시 멈춰 서서 하늘로 흰 입김을 뿜어냈다. 가족이 듣는다면 미운 생각을 한다고 할 테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줄 가족도, 가족도 더는 요슈아의 곁에 없다. 언덕 위에는 오로지 소년 혼자. 눈이 내리지 않으면 그 제리조차 찾아오지 않은, 외딴 섬처럼….

똑똑.

그러나 희게 갈라지는 물거품처럼 눈이 둥글게 사라져가는 밤에, 소녀는 다시 요슈아의 집 문을 두들겼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요슈아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제 발이 꼬이는 것도 모르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달려간 요슈아가 문을 열면, 제리가 거기에 있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다는 듯이 말간 얼굴이었다. 여전히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모슬린 잠옷.

 

"제리."

 

저도 모르게 벅찬 숨이 내뱉어졌다. 제리가 웃었다. 집 안쪽에서 났던 제 넘어지는 소리를 제리가 들은 것 같아 요슈아는 조금 맥없이 혹은 한심하게 웃었다. 제리가 말했다.

 

"들어가게 해줘."

"들어와."


대화는 짧고 건조했다. 그 차가운 공기에도 요슈아의 가슴께는 가쁘게 뛰고 있었다. 허락의 말과 함께 제리가 요슈아의 품 안으로 눈처럼 다가와 안겼기 때문에,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옅은 체온이나 숨결 같은 것들이, 어쩐지 외딴 섬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찾아냈을 때처럼 기껍고 정겨웠다. 요슈아는 긴 세월 동안 안는 법을 잊었던 사람처럼 팔을 엉성하게 제리의 등에 휘감았다.

있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왜 늘 외로울까. 누구도 나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비밀처럼 여기에 있는데.

그날 요슈아와 제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이야기를 눈처럼 쌓았다. 요슈아는 마을에 관한 이야기와 돌아가신 보호자, 식료품점의 주인과 영지 안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 라고 속닥일 때 제리는 그저 얕은 숨을 가만히 들이켰다. 어쩌면 그래서 외로웠을까,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서. 이제는 자신을 돌보아주던 이도 세상에 없어서. 이야기는 버겁지 않은 무게로 쌓여 두 사람을 덮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슈아는 오래 전에 읽었던 동화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개와 함께 눈이 오는 날 멋진 동상 앞에서 아름다움 속에 파묻혀 얼어 죽어가는 소년. 네로는 죽어갈 때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단다, 라고 조곤히 이야기하던 가족의 목소리. 이제 요슈아는 제리를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겨울마다 나타나는 제리에게 언젠가 요슈아는 우리 친구야? 라고 물었고, 제리는 웃으며 그럼 아니야? 라고 한 적 있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그리움에 휩싸여 요슈아는 조심스레 손끝을 매만졌다. 이불을 덮고 마주 본 채로 누워있는, 가까운 시야였다. 손길을 거절하지 않으며 제리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글쎄. 난 많은 곳에서 왔어…."

"많은 곳?"

"네가 알지 못하는 많은 곳에 있었거든. 하나라고 말해주기 어려워."

"나는 이 영지 마을밖에 모르는데."

"알아. 너는 아주 어리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리의 웃는 얼굴은 다섯 살 배기 어린 여자애처럼 보이다가도 아주 나이 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질감. 요슈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너는?"

"나는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그러므로 미지에서 내게로 온, 나의 유일한 앎.

느린 숨을 내뱉고 요슈아는 눈을 뜨지 않는 제리에게 맞춰 제 눈 위에 눈꺼풀을 눌렀다. 피곤하지 않았지만 편안했다. 요슈아는 감은 눈 아래에서 오래도록 소녀인 제리를, 여자인 제리를, 아주 나이가 들고 늙은 제리를 그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뭐든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아."

 

요슈아의 나직한 말을 끝으로 제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요슈아와 제리가 느끼고 있는 마음이 같다는 것이었다.

사락사락 쌓이는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다만 차가운 손을 맞잡은 채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는 제리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요슈아는 제 목에 걸린 낯선 은색 목걸이를 발견했는데, 그것의 출처는 제리가 옆자리에 남긴 쪽지를 보고서 알 수 있었다. 「선물이야.」 짧은 문장보다도 텅 비고 외로운 이불의 옆을 바라보며 요슈아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에 대해 오래 곱씹었고, 그 감정에 느리게 잠식되었다. 네가 보고 싶어. 서툴고 앳된 문장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눈 아래에 파묻혔던 비밀을 요슈아가 발개진 손으로 파헤쳐 찾아냈을 때처럼, 차갑고 경이로운 감각. 요슈아는 이제 오래 전 죽은 가족이 아니라 제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묘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기뻤다. 잔잔한 기쁨 사이에서 요슈아는 느리게 눈을 감고 제리가 누워 있었을 이불 한쪽을 구겨 끌어안았다. 이대로라면 얼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 흐려지는 이미지가 꼭 아름다움처럼 느껴질 것 같아. 동화 속의 한 구절처럼.

그리고 또 여러 해가 흘렀다. 요슈아가 좀 더 자라기까지. 요슈아가 소꿉친구라고 생각했던 제리는 그 몇 해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리지 않게 될 때마다 동화의 구석을 깨뜨리고 나타나는 언어가 있다. 해마다 마을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요슈아의 가족이 늘 가던 '시드 꽃가게'의 여주인이 논밭 근처에서 피가 다 빨린 채 희게 질려 죽어 있었고, 어른들은 앞뒤를 분간할 줄 모르는 폭도처럼 한 단어를 떠들어댔다. 소문은 입에서 입, 언어에서 언어를 타고 느리게 미끄러져 몇 해를 마을 바깥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 얼마의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너끈히 들고 영지로 돌아온 요슈아의 귀에도 들어왔다.

흡혈귀의 짓이래. 꼭 흡혈귀가 그런 것처럼 목 옆에 두 개의 뚫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거야.

불현듯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박혔다. 언덕 아래에서 내려다보던 검은 무채의 소녀. 아무도 살지 않는 오래된 불길한 저택 앞에서 거닐던,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왔던, 들여보내 달라 조곤조곤 묻던 아이. 밤중의 차갑고 안락한 손길. 포근하게 쌓인 이불 같은 눈…. 마을 입구까지 오는 길목의 모든 눈이 사람의 발자국으로 녹아 있었다. 종례 시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났으니 밤에는 집 밖에 나가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요슈아는 어리지 않고 어른이지도 않은 사이에 서서 그 말들을 그저 듣고 흘리기만 했다.

제리가 다시 변함없는―혹은 딱 요슈아만큼만 자란 모습으로 찾아온 것은 요슈아가 영지에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의 밤이었다. 항시 입는 흰 옷에 핏자국을 선명하게 묻힌 채였다. 요슈아, 들어가게 해줘, 제리는 언제나처럼 이야기했다. 난로의 불이 타닥거리며 작은 소리로 타올라, 눈이 불꽃으로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처럼 처음 듣는 소리를 냈다.

요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제리를 집 안으로 들였다. 물에 따뜻하게 적신 수건을 가져와 피로 점철된 제리의 손을 닦아주면서도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제리가 먼저, 아주 오래된 날의 대화를 끌어오듯 조용하게 말을 꺼내기 전까지도.

 

"내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었지."

 

요슈아는 문득 직감에 대해 생각했다. 제리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나이가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 혹은 '어른이 아니라'는 직감. 그는 어른이 아니었다.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슈아."

"응."

"나, 봐줘…."


투명하리만치 안쪽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은빛 눈. 금속보다는 차라리 눈 내리기 직전의 하늘을 닮은. 마주침은 공간 안에 있는 서로를 느끼기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 요슈아는 제리의 존재를 무엇보다 명확하게 느꼈다. 제리가 피가 닦여 얕은 분홍색으로 흐려진 손을 뻗었다. 그가 가만히 뺨을 쓸어내린다. 실은 요슈아는 그 순간에, 자신의 뺨에 출처 모를 피가 묻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

"나, 뱀파이어야."

 

뱀파이어. 흡혈귀.

환상에서나 나올 법한 문장. 아주 오래 전, 잠이 오지 않는 어린 밤 요슈아는 가족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먼 나라의 피를 마시는 기괴한 백작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동화의 한 페이지를 열어 읽다가 사실 그것이 어른의 전유물이라는 걸 느꼈을 때의 불쾌함과 생경함. 그리고, 불온함과 설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요슈아는 자신 안에 이런 것이 있는지 몰랐다. 눈이 녹고 드러난 지층의 불결한 무늬처럼 요슈아는 울음을 참는다. 어쩌면 웃음을 참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요슈아가 제리의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지조차 않았다는 것이다.

요슈아는 오랜 친우이자 한시도 생각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동반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람을 죽였어?"

"목이 말랐어."

 

제리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애매하고 미비하게 웃고 있었다. 요슈아는 어떤 것들을 복기한다. 빼곡하게 채워졌다가 다시 비워지는 박동. 눈 위에 피를 흩뿌리며 죽어갔을, 가족의 시체를 운반하면서도 눈을 홉뜨던 남자. 뒤에서 주름지고 억센 손을 가진 외로운 등과 그 손을 잡은 아이를 흉보던 목소리. 그들의 시체가 눈 아래 묻혀 비밀이 되었다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요슈아는 환희를 느끼진 않았지만 슬프지도 않아서, 차라리 그 어떤 것도 관심 두고 싶지 않았고, 단지 목이 말랐다고 느린 동작으로 이야기하는 제리의 목마름에만 타는 듯 아팠다. 그는 바싹 마른 입안을 제 타액으로 적시고 말했다.

 

"그 사람들 우리 가족을 무시하던 사람이었어."

 

요슈아는 이 말을 하고서 자신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적개심으로 속 울렁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대한 염오. 아주 희미한 분노….

제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무섭지 않아?"

 

요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보다 어떤 명제를, 감정을, 마음을 확신했던 적이 없었다.

 

"안 무서워."

 

정말이지 무엇도 무섭지가 않았다. 너의 갈증과 부재 외에는, 어떤 것도.

두 사람은 한참이고 서로를 마주 보며 투명하고 흐릿한 눈동자 안에 서로의 모습을 박아 넣었다. 제리는 천천히 요슈아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입을 뗐다. "이제는 우리 집으로 갈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럼에도 이때를 고대해온 것 같은. 요슈아는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우리 집?"

"사람들이 부르는'검은 저택' 말이야."

"늘 궁금했어."

 

요슈아는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그러나 눈을 아주 감지는 않아서, 그의 가늘게 뜨인 시야에는 여전히 제리의 창백한 손이 남아 있다.

 

"네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일지."

"왜?"

 

제리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물었다.

 

"네가"

 

요슈아는 여기에서 잠시 망설인다. 눈꺼풀이 다시 들리면 무슨 환한 말을 먼저 들은 것처럼 제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외로울 것 같아서."

 

나는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나, 뱀파이어야. 그 말들을 들으면서 다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어둔 데 놓아둔 촛불처럼 희붐하게 몰아낸 제리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리하여 제리만이 알고 있는 세월을 짚어내고 싶다는 욕망. 처음 그를 보았을 때에 제리의 언어에서 느꼈던 막연한 고독을 그대로 밝힌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제리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웃었다. 처음으로 핏기가 도는 소녀의 뺨을 보며 요슈아는 마음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겹친 손을 떼지 않고서 요슈아는 말했다. "갈래." 그 다음 나온 말은 이 상황보다 더 원초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다.

 

"보고 싶어."

 

그냥 너를, 오래도록.

 

 

저녁이 깊어지면 밤이 된다. 요슈아가 제리를 '초대'했듯, 이번에는 제리가 요슈아를 초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요슈아와 제리는 손을 꼭 잡고 침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검은 저택으로. 인적은 몹시 드물어지고, 마을의 불빛도 멀리 어룽지는 희미한 무리로만 남아 요슈아는 그립지도 않은 마을을 자꾸만 돌아봤다. 멀리서 보는 영지만이 퍽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검은 저택의 안은 적요하고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아 마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거미줄이 바닷속에도 있을 수 있다면 이런 실내의 형태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제리는 작게 "어서 와." 라고 말했고, 요슈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리게 "초대해줘서 고마워." 라는 말을 했다. 이내 피로가 몰려와 제리가 2층에 있는 침실로 향했을 때는 요슈아도 함께였다.

 

"이쪽으로 와, 요슈아."

 

움직일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불을 덮고 누운 제리의 옆으로 요슈아는 꾸물거리며 들어와 함께 누웠다. 함께 눕는 것은 이제 하나도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다. 두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아닐지라도 두 존재가 나란히 이불을 채워, 이불 속은 하나의 공간과 세상으로 채워졌다. 내 세상. 더는 누구도 들어와 마주 보며 눕지 않았을 요슈아의 어린 세상. 몸 바깥으로 삐져나온 제리의 손을 요슈아는 잡아 쥐었다. 피로감이 아까까지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어째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까까지 제리가 피를 묻히고 집에 들어와 그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고백한 일은 다 아주 먼 일 같았다. 그것이 먼 일이든 가까운 일이든, 영지민들이 얼마가 죽어나가든 그에게는 이제 알 바 아닌 일이었지만. 요슈아는 제리의 손을 보드랍게 감싸 쥐면서 입을 열었다.

 

"제리."

"응, 요슈아."

"외롭지 않았어?"

"여기에서?"

"응."

 

제리는 그때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인데도 그 시선이 더욱 검고 곧게 닿는 것 같았다. 요슈아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윤곽이 흐리게 뭉개진 채 보이는 제리의 얼굴을 담으려고 애를 썼다. 제리는 그때에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요슈아의 목으로 뻗쳐왔다. 요슈아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어깨 한 번 떨지 않고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곧 가벼운 무게가 목에 걸려 기울어졌다. 목걸이는 우스꽝스럽게도 두 줄이 되었지만, 요슈아는 그것 때문에 웃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요슈아가 똑똑히 깨어 있을 때 그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준 제리는 이번에야말로 명확하게 웃었다. "선물이야. 돌아온 기념." 이라고.

 

"이제는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심장에 추가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둘은 함께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하릴없이 떨어지고 마는 포근한 잠기운 안에서 요슈아는 생각했다. 세상이 오래도록 우리가 원하는 모양으로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이 녹지 않고 계속해서 쌓여 있고, 동화책은 덮이지 않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반복한다면. 닳고 닳을 때까지 우리의 시절을 머금을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우리가 고정될 수 있도록 네 갈증을 나로 오래도록 채웠을 텐데….

 

 

요슈아의 열아홉 겨울이 지나간다. 스물과 함께 서서히 눈이 녹는 계절이 찾아 오고 있었다. 그 사이 마을에는 몇 건의 살인사건이 더 일어났다. 작은 영지, 누구든 서로를 알고 있는 지긋지긋하고 가까운 마을. 이후부터 요슈아는 검은 저택에서 종종 잠을 청했고, 꼬박 며칠을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제리와 함께할 때도 있었다. 물론 언덕 위 요슈아의 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주로 영지민들이 보지 않는 어둔 밤 둘은 검은 저택과 요슈아의 집 사이를 오가곤 했다. 그래도 요슈아가 더 오래 지내는 곳은 언덕 위 자신의 집보다는 제리의 저택이었다.

그즈음 마을 사람들은 작은 시장에 나오거나 먹을 것을 사기 위해 가게로 향하는 요슈아의 뒤통수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제리에게 보여주겠다며 낡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몇 권의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광기 어린 괴성을 내지르며 야수의 성으로 밀려오던 장면. 이상하게도 그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요슈아는 꼭 성 안에 갇힌 야수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실은 언제나 그랬던가.

겨울의 눈 아래 비밀이 숨어있는 곳. 녹아 비밀이 드러날 때 그곳에는 꼭 검은 구정물이 튀고, 거리는 더러운 물로 어지러우며 밟는 곳마다 축축하게 젖는다. 호외요, 호외!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소식은 전쟁에서도 영지 안에서도 곧잘 들려 왔다. 녹은 눈이 마을을 점점 더 구정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제 발치에 붙는 눈빛만 봐도 그랬으니, 요슈아는 이제 어렵지 않게 그들이 저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류의 '의심'에서 비롯된 줄은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의 미지는 어느 날 마을의 목소리 큰 젊은 목수가 언덕을 오르고 요슈아의 집에 찾아오면서부터 어떤 확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인중과 턱에 거뭇거뭇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청년은 눈이 녹아가는 언덕 위를 올라와 요슈아의 집 문을 두드리곤 이것저것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요새는 어떻게 지내냐는 둥, 얼마 전에 다시 돌아온 것 같은데 사정은 어떠하냐는 둥, 누구도 요슈아에게 갖지 않는 관심을 구태여 떠먹이며. 그러나 그 가는 눈, 눈꺼풀과 속눈썹 사이에 숨겨진 혐오는 가시지 않고 요슈아를 짓눌렀다. 왜, 어째서, 무엇을 위해 속에서만 뭉근히 되씹던 고민은 청년의 다음 질문에 되새김질을 잠시 멈추었다.

 

"요새 밤에 밖에 돌아다니고 그러냐?"

"아뇨, 밤에는 왜요?" 요슈아는 제리의 차갑고 야윈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던 일을 떠올렸다.

"그냥. 돈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이유로."

"돈이 부족한데 왜 제가."

"너 말이야, 이젠 너희 집 어른도 안 계시고, 홀로 널 키우셨는데 남긴 재산도 그렇게 많으셨을 리가 없잖아. 솔직히 말해봐. 너, 예전 어릴 때 밤에 웨이드 신부님이나 시드 아줌마 본 적 있어?"

 

웨이드 신부, 시드 아주머니. 두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흡혈귀에 물려 죽은 시체의 이름이었으므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멍청한 표정으로 그의 낯을 무력히 보고만 있었을 테지만 요슈아의 세상은 그만큼 차근차근 넓어지고 기이하게 비틀린 채였다. 자신을 향해 오는 시선들이 어떤 모양을 가졌는지, 언어는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는 때. 마을은 끝까지 잔혹했다. 타인이 쉽게 오를 수 없는 언덕 위, 고작 그 언덕 위에 가족조차 없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외로움이 핍박받아야 할 이유였다면 요슈아는 자신의 보호자가 숨을 거뒀을 때 그의 관 옆에 함께 누워 다시는 눈뜨지 않았을 텐데. 다만 요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심증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므로 목수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으로 요슈아를 들여다보다가 '일단은 알았다'라 말하곤 언덕을 내려갔다. 잰걸음으로 걷는 그의 뒤편에서 요슈아는 끔찍한 피로를 느꼈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밤이면 제리가 찾아올 터였다. 아니라면 자신이 검은 저택으로 그를 찾아가거나. 그걸로 족했다. 모든 것이 그걸로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부류의 행운은 오래 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언덕 위를 바라보는 동안에는 더더욱. 밤중 언덕을 오르는 둘의 모습을 본 건 마을의 한 노인이 먼저였다. 그 노인은 흐리고 멍청한 눈으로 밤의 밀회를 유심히 보았고, 다음 날도 창 너머로 그 걸음을 마주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검은 저택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은 서로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로 둥글게 이동하고 서로를 연결해 결국 하나의 원이 만들어졌다. 그 원은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켰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숱한 살인사건이 저 기이한 소녀와 연관되어 있다는, 모순적이면서도 완벽한 가설을. 원은 언덕을 짓누르며 그것을 기어코 공동체의 밖으로 몰아내고 분노를 쌓았다.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들, 아이들과 노인들의 기묘한 얼굴, 제가 반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저마다 속닥이는 음성을 요슈아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어느 날엔 마을로 내려갔을 때에 영지에서 가장 덩치가 큰 또래의 남자애가 요슈아를 저녁 학교 뒤편으로 몰래 불러냈다. 뒤뜰에 발을 디디자마자 퍽, 하고 시야가 흔들렸다. 눈앞에 자신을 불러낸 남자애가 보였다. 맞은 얼굴의 고통은 그 다음이었다.

 

"너, 살인자랑 같이 지낸다면서?"

 

그가 시비를 걸어댔을 때에 요슈아는 자신의 턱밑까지 무언가가 쫓아왔음을 깨달았다. 폭력은 날 것으로 점차 요슈아를 향해 가까워져 선득선득 자신의 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슈아는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관짝에 실려 가던 가족처럼. 그토록 외롭고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식.

기어이 요슈아를 패대기친 장정이 언 땅 위로 침을 뱉었다. 그는 아주 불결한 것을 본 것처럼 짜증스러운 낯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검은 저택을 태우러 갈 거라고. 그게 있어서 이 마을에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라고."

"태운다고?"

"그래! 너, 거기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드나들지? 시체를 거기서 처리 하는 거지? 거기에 괴물과 함께 사는 거지!"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니라고!"

 

난생 처음으로 분개하여 고함을 지르며 요슈아는 엎어졌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새끼가 날 죽이려고 해, 이제는!" 언제 폭력을 행사했냐는 듯 남자는 겁에 질려 금세 골목으로 달아났다. 요슈아는 찬바람 부는 학교 뒤의 공터에 주먹을 파르라니 쥔 채로 오래 서 있었다. 외롭고 적요하여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식. 그렇다면 제리는 어떨까. 요슈아는 오래도록 검은 저택에 유령처럼 홀로 있었을 소녀이자 여자이자 제리, 그저 제리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자신 스스로보다도 제리가 더 염려되는 마음이 속에서 출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기세등등하게 지키고 있는 마을과 검은 저택 사이 길목을 지날 수 없어 둘은 요슈아의 집에서 마주 앉았다. 발갛게 붓다 못해 멍든 뺨을 제리는 밤에야 마주했다. 그는 요슈아의 앞에서야말로 드물게 웃지 않는 표정을 하고서 고요히 물었다.

 

"누가 그랬어?"

 

요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중요치 않다는 뜻이었는지.

 

"제리,"

 

다만 불렀을 뿐이다. 제리는 그의 뺨을 고집스럽게 바라보다 "응,"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요슈아가 웃었다. 다시 한 번 소녀를 호명하면서. 검은 저택, 살인자가 있는 곳, 괴물의 거처, 불길한 곳을 태워버릴 것이라고 소리치던 소년의 우악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제리."

"응."

"우리 도망칠까."

"도망?"

"네가 갔던 많은 곳에 나도 데려가줘."

 

눈 쌓인 아름다움 앞에서 그것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얼어서 죽어가는 동화. 횃불을 치켜든 채 야수의 성으로 몰려오는 화난 마을 사람들. 죽음과 분노는 마주하는 순간 요슈아는 자꾸 동화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져, 그게 꼭 제리와의 이별을 말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제리의 손을 쥐었다. 눈처럼 차가운 손. 아래로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올 즈음엔,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그럴까…."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완벽한 결말이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수런거리는 마음. 그러나 이것이 네게 향함을 이제는 알아. 동화의 한 페이지를 열어 읽다가 사실 그것이 어른의 전유물이라는 걸 느꼈을 때의 불쾌함과 생경함. 그리고, 불온함과 설렘. 여긴 언제까지나 문장과 소설의 안쪽이라, 네가 욕망하는 만큼 그 서사를 맛봐도 된다는 끔찍하고 찬란한 허락. 이곳은 더 이상 아이의 영롱한 세상이 아님에도, 이토록 벅찬 행복이….

 

 

언덕을 내려가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분명 요슈아의 가족은 이곳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죽어갔는데. 아래서 봐도 낮게만 비치는 언덕과 그 위의 작은 집을 보면서 요슈아는 웃지 않았다, 아니다, 조금 웃었다.

사람들이 우우 발소리를 내며 횃불을 들고 검은 저택으로 향한다. 그 빛이 아주 예전 요슈아가 제리의 저택으로 처음 향할 때에 돌아보았던 마을의 먼 불빛처럼 어룽지고 있었다. 둘은 통상적으로 상인들이 마차를 끌고 드나드는 입구가 아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입구 반대쪽의 검은 숲으로 향한다. 품이 큰 요슈아의 옷을 걸치고서 한참 달리다가 제리는 작게 말했다. 목말라. 스스로의 입매를 쓰다듬는 그의 손끝을 보고서 무거운 짐 가방을 메고 있던 요슈아는 마을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길목 앞에서 가만히 멈춰 서서는 제 손목을 감싼 천을 걷었다. 이토록 역동하는 맥박. 모든 피가 너로 인해 흘러가는 듯한 기이한 착각 속에서,

제리가 울 것처럼 말했다. 그에게는 죽음이 몹시 쉬웠을 것이고, 숱한 살해를 거쳐 왔을 텐데도 겨울 하늘 같은 눈동자에는 첫 두려움처럼 물기가 고였다. 너를 해치고 싶지 않다고, 무슨 선고처럼 하는 말이었는데도 이토록 달다.

 

"내가 널, 널 죽일지도 몰라…."

 

그런 환희 속에서, 요슈아가 대답했다. 별빛이 요슈아의 머리칼 위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네 갈증을 온전히 나로 적실 수 있다면.

제리는 떠는 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가, 오래 망설이다가, 마침내 요슈아의 드러난 깨끗한 팔목에 이를 박았다. 혹은 요슈아가 제리에게 저를 내어주었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고통은 기쁨과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 그러던가. 타오르는 환희 속에서, 요슈아는 자신이 초라하게 얼어 죽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바닥에 점점이 핏자국이 떨어졌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작은 성전으로 향하며 분노를 외칠 텐데, 막상 열어젖힌 그 문 안의 야수는 도망치고 없을 때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할까. 적어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게. 멋대로 문장을 씹고 맛보던 자들의 눈길에서 벗어나, 그들은….

 

 

동이 트고 눈이 녹았다.

겨울의 눈 아래에 덮이는 비밀이 있다. 오로지 그 계절에만 숨길 수 있는 차가운 금기. 그런 것들은 대개가 시간에 둘러싸이는 몹시 사소한 것들이어서, 눈이 사라지고 나면 부드러운 흙 위에 비밀의 행방은 남지 않고 흩어진다. 아침, 영지 밖으로 벗어나는 골목 어귀에 찍혀있던 발자국 두 쌍과 핏자국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의해 흐리게 지워졌다. 그리고 모든 눈이 녹은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소문과 이야기 혹은 눈으로 빚은 순백의 동화 같은 문장 한 줄이 나돌 뿐이었다. 외로운 두 사람, 두 존재가 있었노라. 비로소 함께였다더라.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르면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르면

@peieace

 

제리. 호명은 내면의 음악을 닮아 한도 없이 부드럽다. 천사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 적 있어? 앰프를 떠난 잔음의 울림은 천국으로 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어느날 당신의 무대 아래에서 해본 일이 있다고는 도무지 고백할 수 없었다. 장내를 가득 채우는 네 노래에 압도 당하는 것 쯤이야 매양, 무수한 관객들의 얼굴에서 발견할 게 분명하면서도. 요슈아가 웃는다. 아니, 실은 그가 불러주는 아주 사소한 노래에서도 나는 천국을 연상한 일이 있다. 환하고, 따스하고, 아름다우며 순결한 세계를. 잘은 몰라도 그곳에는 분명 이만큼의 평온함은 깃들어야 마땅하리라고. 변칙적인 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준 사람이니까. 네가 내 노래를 들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아? 언뜻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어쩐지 그가 말하는 광경은 상상이 갔다. 그가 날 보며 노래를 부를 때의 얼굴과 같겠지. 요슈아. 그러므로 호명은 새삼스레 간지럽거나 낯설지 않았다. 상상해 본 적 있어. 피아노의 건반을 떠올린다. 어쩌면 아주 오래토록 떠올려 왔다.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peieace

 

지표로 삼은 흉터가 맞아야만 했을 불가피한 통증. 인내로 전한 내 사랑이 어찌나 초라해 보였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세상이 깨어지느라 맞이한 실금같은 균열로 부터 빛이 쏟아졌다. 그 아래로 나란히 누워 굴곡을 헤아릴 수 있는 까닭은 이 껍질 안이 대낮처럼 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늑한 두 명분의 세계에서 우리는 먼저 유실했던 자아의 파편을 도로 삼켜야만 했고, 어둠을 낱낱이 밝히지 않아도 분별할 수 있듯 서로의 기운 살갗을 어루만져 익혀야만 했다. 발 딛은 이 별이 완전한 구의 형태이지 않듯 우리의 뾰족한 모서리 또한 영원히 둥글어 질 순 없겠지만 베이지 않을 만큼 무뎌질 순 있을 것 같단 가능성의 징조는 사포처럼 우둘투둘하기 보다 바람이 불어오거나 물길이 퍼지듯 도무지 아플 것 같지 않았다. 어떠한 변칙도 없이 감미롭기만 한 이때를 영원히 누릴 순 없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아주 오랫동안 괜찮을 것만 같다고. 어쩌면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불멸의 평화를 함께 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_tsuki

 

음악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어느 날 제리가 물었다. 단순한 말장난 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라기엔 그녀의 얼굴은 사뭇 진지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에 요슈아는 가볍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잠시 자리에 서서 정지하길 택했다. 낯선 땅과 낯선 존재들 그 사이에서 가뜬히 부유하던 어떤 이방인, 나. 요슈아. 방어기제 쌓지 못하고 벽을 세우는 대신 물처럼 흘러가길 원하니 다른 이들은 수면 위로 돌을 던졌다.


바닥으로 가라앉던 돌의 수가 늘어나고 종내 돌에서 자갈로, 자갈에서 입자가 고운 모래로 바뀌는 시간보다 빠르게 공간이 가득 차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물은 범람하기 시작한다. 둑을 쌓지 않아 평평한 땅으로 서서히 스며들지 못하고 울컥울컥 경계를 침범하는 힘은 도저히 홀로 막을 수있는 부류의 재해가 아니었기에, 세상은 수몰되고 의식은 심해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이따금씩 위로 올라가는 공기방울 만이 수면 너머의 공간을 상기시켜줄 뿐, 뒤바뀐 세계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소리가 먹혀들어 먹먹한 수중 생활에서 요슈아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기실 소리는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수면 아래서 몇 배는 더 빨리 헤엄친다는 사실이었다. 본래 알던 언어의 작법을 모조리 뜯어내고 새로운 언어를 익힌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니 한참을 방황하다가 어느 날 우연찮게 수면 아래로 흘러들어온 것은 잊혀져가던 모국어로 된 음악이었다. 정확히는 제목 생각나지 않는 자신의 습작 중 하나를 흥얼거리는 어떤 목소리. 완벽한 어인 魚人 이 되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아득한 기억 속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러니 수면 위의 이는 어려운 추측 차치하고서도 쉬이 알아챌 수 있는, 어렸을 적부터 지겹도록 뱉고 삼켜낸 이름의 주인일 터였다.

"제리."

 

"아, 요슈아! 오랜만에 보지, 타지 생활은 이제 좀 적응 했어?"

 

"여기서 우리 둘 다 머무른 지 3년이 넘었는데, 설마 아직도 어색할까봐."

 

"헤헤…. 그냥, 혹시 몰라서. 가끔 요슈아 눈을 들여다보면 범람할 것 같이 촉촉할 때가 있거든-"

 

"또, 괜한 걱정이야, 제리. 정말이라니까…."

 

"난 곧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잖아! 요슈아도 참,"

걱정 마, 네가 있는 한 알고 있던 언어를 완벽히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라는 추레한 고백같은 말은 하기 부끄러워서,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일 수 밖에 없다. 오늘 헤어지고 나면 며칠 뒤, 제리는 머나먼 땅을 딛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같은 언어를 독해하는 이 사라지고 나면 요슈아는 인간의 호흡법을 망각하고 아가미를 새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음악이, 환청같은 목소리마저 완벽히 말소되고 난 뒤엔 가지고 있던 목적마저 상실할 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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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타인에게 어물쩍 흘려보내기엔 너무 큰 질량의 감정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수챗구멍을 뽑아 땅을 집어삼킨 물을 빼내는 방법 대신 또다시 보이지 않는 저 너머 바닥으로 큰 돌을 버리길 택한다. 제리가 돌아간 뒤 처음 잡은 마이크, 노래의 첫 소절을 위해 운을 떼는 요슈아의 목 너머로 비릿한 무언가가 걸려 목소리를 막아버렸다. 진실을 고하지 못하고 거짓만을 이야기하는 이는 결국 목소리를 잃게 된다…. ⊙

그래도 여전히 랑데뷰를 원해!
그래도 여전히 랑데뷰를 원해!

@juststayus

 

 

그래서, 우리들

 

어른이 되는 일은 어려워서 종종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닥쳐온다. 그런데도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보내고, 또 내일을 맞고, 그 내일은 또 오늘이 되어버리고 만다. 자연히 내 옆엔 항상 네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진 채로. 어쩌면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온전히 순진한 기대였을까? 누군가가 나의 곁에 언제 어디서든 머물러 주리라는 미약한 이기심이었을까. 각자의 상황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립을 확인하는 길은 너무 멀고 가팔라서. 아무 일도 없어. 오늘도 그냥 그렇지. 소중하게 여길수록 거짓말과 은폐는 늘어난다. 자신이 약해졌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상대가 무조건 있어 주지 못한다는 진실을 직면한 후로부터.

"그래도 난 너와 함께하고 싶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진심을 건네면서 관계는 두 사람의 차이처럼 페인트를 엎지르듯 역변한다. 견고히 쌓아둔 Iアイ를 드러내고,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있는 나를 그대로 사랑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 너를 위해 나아질 수 있는 나를 지켜봐 줘. 이 음표의 행방을 쫓고 싶어. 너와 나로!

박동하다
박동하다

@WxIuk

 

 

천사가 입술을 누르기 전까지, 

우리, 약속하자.
네 슬픔은 나만의 것이야.

 

 

너는 마치, 달과 같아.
집. 사적인 영역. 연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가득할 수도 있는 공간. 반대로 묘사하자면, 집을 보면 주인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덧붙여, 취향이나 성향도 파악하기 충분하다. 사람을 안다. 반들거리는 액정 너머 CF에서 나올 법한 문구였으나, 제리는 그 문장을 누구보다 통감했다. 깔끔한 하얀 벽지. 편안한 모던 형식의 가구. 그나마 자연적인 걸 꼽자면, 편백나무로 만든 테이블이다. 심플하고 눈에 편안한 거처의 모습에서 다정한 면이 보이는 것을 왜일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보이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은색으로 요요하게 자랑하고 있다. 요슈아다. 연인의 집에 깜빡 잠드는 일은, 잦은 해프닝이었다. 본디 바깥을 자유로이 여행하고 횡보하는 데이트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을 지닌 '공인' 신분의 남자친구를 둔 탓이다.

실은 불만은 없다. 오히려 제리는 기꺼워했고, 차분하게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다. 상황이 달랐더라도 서로의 보금자리를 찾는 일이 잦았을 거다. 그리 단언하며, 졸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제리는, 시계를 찾으며 시침과 분침이 새벽 2시가 넘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기억 필름을 샅샅이 되짚어보니, 편한 소파 위에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여름의 끝. 가을의 시작. 끝과 시작은 언제나 반복되기 마련인데, 너와 함께하는 건 어찌나 새로운지. 날씨는 신선해지고, 공사다망한 일이 마무리 지을 무렵 긴장이 절로 풀렸다. 돌아온 계절을 실감하기라도 한 듯, 요슈아는 에어컨을 작동하기보다는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뒀다. 도시의 소음이 간간이 들렸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에겐 감미로운 음악적 요소이리라 감히 짐작했다. 그렇게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 아마, 깜빡 먼저 잠든 쪽은 여럿 고뇌해도 제 쪽인 게 분명했다. 몸에 걸쳐진 담요나, 푹신한 베개의 존재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머쓱한 낯으로 제리는 조심스레 아무것도 덮지 않은 요슈아의 상체에 담요를 덮었다.


"…네 몸을 더 아껴줘, 요슈아."


혹여라도 잠이 든 요슈아가 깰까, 두려워 제리는 입술만 달싹이며 모양을 내었다. 다정하긴. 언뜻 차가운 색과 달리 요슈아는 따뜻한 성정을 지녀, 제리의 마음을 두드리곤 했다. 한 번의 노크면, 우리는 고작 친구란 단어에 머물렀겠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낯 위에 흐드러진 머리카락을 단정케 하곤 제리는 웃었다. 시야를 살짝 내리면, 요슈아의 손목이 훤히 보인다. 사적의 영역. 울타리 내부. 빗금이 늘지 않아, 변함이 없는 흔적. 붉은 자상이 없는 그 손목 안쪽에 안도라도 한 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쪽에도 눈물샘이 있다면, 펑펑 울고 있을 거다. 기쁨이란 명제로. 극복의 증거. 계절은 변화하고, 매해 돌고 돈다. 우리도 다시 시련에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고, 우울이란 명사에 허우적거리다가 심해 아래로, 또 아래로 가라앉으리.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과거에 얽매여 실패를 곱씹으며, 헤어 나올 수 없는 씁쓸함에 눈물 흘리며 반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음을, 너는 고통을. 그런데도…. 요슈아를 보고 싶었다. 무대 위. 노래. 도시. 난반사하는 네온사인. 그 아래에서 너와 나. 어딘가 후련해진 제리는 거실 불을 껐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내려앉자, 명백히 보이는 달빛이 공교롭게도 요슈아의 낮에 내려앉는다. 마치 영화나 소설 같다. 창작물도 모두 인간사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인생의 모든 파란과 굴곡진 하이라이트는 전부 너에게서 따온 게 아닐까? 과거엔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헤매고 있어야 하나요? 탓하고 욕보이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답변 없이 신이 요슈아를 가리키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미래를 꿈꾸지 않고 죽음만을 바랐던 과거를 뒤로한다. 앞에는 네가, 있었으니까. 뒤처지지 않게 부단하게, 나아갈 차례였다. 소파 위, 한쪽에 엉덩이를 누르고 얌전히 바라보니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제리.


"요슈아…."

"깼네. 뭐하고, 있었어?"

"그냥……. 네 생각을 조금 했어."


웃음소리. 그리고 닿는 체온에 제리는 힘을 풀고 가슴에 기댄다. 다정한 체온, 외로운 도시 사람들을 감싸 안는 달처럼, 무던히 끌어안는 힘에 안도했다. 잠결에 취한 듯 목소리가 나른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덧없는 무의식 속 진실이란, 표명과 같다.


"제리, 따뜻하네."

"네가, 더 그래…."


끌어당기는 손길에, 제리는 속수무책으로 품에 기대어 강제로 누었다. 정확히는 요슈아의 품. 눈 동그랗게 뜨고, 시야를 마주하더니 이번에는 입술이 닿는다. 자연스러운 행위에, 심장박동이 쿵쿵하고 뜀박질함을 느낀다. 반칙이야. 데이트의 말로는 체온을 느끼며 잠자는 행위로 언제나 귀결된다. 오늘의 데이트는 끝. 자고 일어나면, 월요일 아침이 둘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며, 이윽고 겨울이 찾아오는 듯이. 내일이 오고, 죽음을 바라고, 고통을 내어도, 삶을 떠올리며 너란 정상궤도로 진입해 빙글빙글 돈다. 살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인생에 자전하고 있고, 사랑이란 중력에 이끌린다. 비록, 공전이라도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으니 심장이 뛰는 찰나를 거스를 수 없다. 지당한 사실이다. 수천 년 과거 조상이 증명했듯이,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며 사랑한다는 걸. 나는, 너를 사랑해. 요슈아의 입이 달싹인다.


"앞으로도 함께해줘."


제리. 짧은 문장 한마디에, 제리는 살고자 했다. 요슈아의 곁을 우리 집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삶이, 박동했다.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