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Shadow of Secrets
In the Shadow of Secrets

@adashkoibito

 

 

어두운 밤, 차가운 바람이 묘지 위를 스쳐 지나가며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넓은 묘지 속, 달빛이 흐릿하게 비추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낡은 돌을 쓸고 있었다. 묘지기인 나는 이 조용한 곳에서 살아 있는 자들의 흔적을 지키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묘지를 돌며, 나를 찾아온 이들에게 마지막 예의를 다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이곳을 죽은 자들이 쉬는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흔적을 지키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도 평소처럼 묘지를 돌고 있자 한 구석에서 비석 위에 앉아있는 남자를 만났다. 그의 얼굴은 자신에 차 있었고 손에는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연인이자 도굴꾼인 요슈아였다.

 

"요슈아는 이곳에 뭐가 있다고 생각해?"

 

묘지를 돌보는 내 의무처럼 자연스레 나온 질문. 연인은 고개를 들어 달을 응시한 후, 입을 열었다.

 

"여기에는 숨겨진 것이 있어. 사람들이 잊고 지나간 비밀들 말이야. 나는 그걸 찾고 싶어."

 

그의 목소리는 마치 부드러운 바람처럼, 잔잔하게 귓가에 스며들어왔지만 나는 그 비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무슨 뜻이야?"

"내가 원하는 건 잊히지 않게끔 그저 진실을 찾는 거야, 제리."

 

숨겨둔 것들을 파헤친다는 그의 말이 내게는 낯설기만 했다. 그 말속에 담긴 의미가 점차 내게 다가오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오랜 시간 동안 묶어 놓은 상자를 열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비밀은… 때로는 누군가를 지킬 수 있지만 그것을 숨기는 것 자체가 괴로울 때도 있어."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 손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눈을 마주치자, 내 손에 반지가 살짝 얹어졌다. 그의 눈은 여전히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의 눈길과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점차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찾고 있던 것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비밀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 비밀 속에는 나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도굴꾼이든, 내가 묘지기든,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을 쥐고 있으면, 비밀이란 것이 더 이상 부담스러운 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지켜갈 수 있는 다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숨겨진 진실을 찾고, 그 진실 속에서 서로를 더욱 깊이 알게 될 것을 믿으며.

 

언젠가 너와 내가 맺어지는 날에 이곳에 애도를 표하고 싶어.

The back of a secret
The back of a secret

@adashkoibito

 

 

어두운 방 안,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가구들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제리는내가 싫지 않아?"

 

낮은 목소리가 공기 속에 스며들듯 흘러나왔다. 옆에서 악보를 보고 있던 그녀가 눈길을 멈췄다. 손끝으로 데모곡의 악보를 쓸던 손이 멈추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을 해?"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손끝에 남아 있는 감촉이 떠올랐다. 차갑게 반짝이던 칼날,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던 순간.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한테 그런 비밀을 만들고, 거짓말을 해서 상처까지 줬어."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누구보다 네가 소중하다고 말했는데… 그런데도 계속…"

 

그녀가 늘 예쁘다고 말해주던 목소리는 지금은 듣기 흉할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나를,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손끝으로 번져왔다.

 

"요슈아는 너의 비밀이 나쁘다고 생각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녀의 손이 조금 더 힘을 주며 내 손을 감쌌다. 

 

"그런 비밀이 있다는 건, 네가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거잖아. 그런 다정한 부분까지도 요슈아인 거야."

"내가 너의 모든 걸 알지 못해도, 널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아도 돼, 요슈아."

 

그 말 한마디에 어깨가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그녀를 바라보자 언제나처럼 따뜻한 눈동자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옅게 웃었다. 정말… 너에겐 도무지 못 당하겠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피아노의 맑은 음처럼, 내 어지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했다. 그동안 숨겨 왔던 것들,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 같이 있지 못한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이 순간만큼은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듯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선 제리 너만 손해잖아?"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반박하려던 그녀의 입이 멈췄다. 그리고 곧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런 의도가 아닌, 내가 심술궂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다시 한번 꼭 잡았다. 맞잡은 온기가 따뜻했다.

퍼피 라이브
퍼피 라이브

@juststayus

 

 

느지막한 가을의 오후였다. 창밖의 풍경이 파도 없는 해변의 물결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부드럽고 기울어진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깊숙이 밀려들어와, 빛의 파장을 한 겹 한 겹 섬세하게 포개 놓은 듯했다. 거실의 공기는 언젠가 익숙히 읽었던 오래된 책장처럼 온화하고 나른한 냄새를 품고 있었다. 계절이 주는 느릿한 흐름에 몸을 맡기면, 몸을 뒤척거리는 사소한 움직임 하나조차도 마치 커다란 일이라도 성취한 듯한 기분이 들어버리는 그런 오후였다.

특히 오늘처럼 오랫동안 기다려온 휴일에는 더욱 그러했다. 요슈아는 제리의 무릎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는 무심하게 눈을 깜박이며 제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손끝의 감촉은 더없이 부드럽고 익숙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째 요슈아는 늘 강아지하고 붙어 있는 것 같네."

 

요슈아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얼굴을 올리며 눈을 떴다. 그는 커다란 갈색 레트리버와 하나의 덩어리처럼 밀착되어 있었다. 살집 두텁고 눈꺼풀이 무겁게 쳐진 개는 요슈아의 호흡 리듬에 맞춰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요슈아는 자신이 숨을 쉴 때마다 배 위에서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개의 체온과 숨결을 조용히 즐기고 있었다.

문득 그는 털빛이 짙은 갈색 레트리버를 보며 자신이 너무 창백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의문을 품었다. 온통 하얗기만 한 자신과는 달리, 나무와 비슷한 색을 품은 레트리버 때문에 그의 주변을 흐르는 희끄무레한 기운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는 제리의 질문을 들은 척 만 척하며 고개를 조금 더 깊숙이 제리의 품속으로 파묻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몸집 큰 레트리버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그리고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제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몽글몽글하게 엉켜 있는, 사람과 커다란 개가 뒤섞인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한 가지 생각에 서서히 잠겼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풍경이 되었을까, 하고.

하늘 한가운데를 두 사람이 함께 낙하했던 날을 기점으로 우연히 제리는 한 여자와 안면을 텄다. 그날 그들의 뒤편에서 줄을 서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호주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휴식차 일본에 몇 달 동안 머물기로 하였다고 했다.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발을 디딘 제리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제이 팝을 꽤 즐겨 들어 그날 요슈아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긴 머리의 소심한 그 여자는 제리에게 사인을 대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요슈아에게 사인 하나를 받아와 건넸다. 평소 제리였다면 그대로 인사를 나눈 채 헤어졌을 인연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는 유독 변덕을 부리고 싶었고 원래 자신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그는 사인을 받고 뒤돌아가려는 여자를 붙잡았다. 제리가 K와 알게 된 사연은 그랬다. 그는 종종 K와 브레이브 차일드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요슈아의 음악에 관해서, 요슈아와 전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의 길고 긴 감상을 듣는 것은 제리로서도 생경한 체험이었다. K는 고민거리 하나 없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감상을 들으면서, 제리는 같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다. 요슈아는 언제인가 한 번 그와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 제리는 시간이 되면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K는 귀국 일주일 전까지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바쁜 사람이었다. 제리는 그의 얼굴이 약간 가물가물해질 때쯤 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혹시 개 한 마리를 며칠간 맡아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그 메시지 이후로 연달아 여러 메시지가 더 날아왔다. '버트'라는 이름의 세 살짜리 레트리버는 꽤 온순한 성격—일단 K는 그렇게 주장했다—이었고 다른 레트리버들과 다르게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것을 더욱 즐긴다고 말했다. 잠시 맡는 동안 크게 말썽 피울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귀국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집주인과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당장에 버트만이라도 다른 곳에 머물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는 사람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린 것이라고 그는 절절하게 설명했다. 제리는 잠시 고민했다가 수락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혼자 살거니와 서너 일 정도면 그리 부담이 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K와 만나지 못한 요슈아가 꽤 아쉬워했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 번 맡기고 다시 돌려보내는 상황에서 그와의 약속을 잡아 볼 수도 있었다. 제리는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서 자신이 맡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버트가 제리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전해 들은 말대로 버트는 정말 순한 아이였다. 성을 내지도 않았고 더럭 놀랄 만큼 자주 짖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온순하여, 제리가 잠시간 걱정할 정도였다. 버트에게 사료를 주고 나면 버트는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몇 입 먹다가 제리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털로 이루어진 몸뚱어리를 제리의 팔에 비볐다. 그 모습이 어쩐지 둘이서만 있을 때 제리에게 달라붙는 요슈아를 연상시켰다. 때마침 요슈아도 휴식기였겠다, 그는 별다른 지체 없이 요슈아를 집에 초대했다. 요슈아는 K보다 K가 키우는 개와 먼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버트를 보자마자 화색이 되어 현관에서부터 코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상기된 얼굴이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가 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팔로 살살 안았다. 그러자 그의 하얀 후드에 갈색 털이 보란 듯이 묻었다. 그는 자신의 후드와 제리를 번갈아 보면서 벌써 이만큼이나 묻었다며 자랑하듯 웃었다. 버트를 데리고 거실 소파로 향한 두 사람은 아이의 느릿한 걸음에 맞추어 여유롭게 낮을 보냈다.

 

"레트리버치고 정말 순하네, 조용하고."

"나는 미리 말을 들었는데도 놀랐다니까. 산책도 잘 안 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햇볕 있는 곳에라도 있도록 해 주고 있어."

"헤에, 제리랑 닮은 구석이 있네."

"……."

 

제리가 요슈아를 장난스럽게 째려보았다. 요슈아는 키득거리며 두 다리를 뻗고 앉은 제리의 무릎 위에 누웠다. 창가 쪽에서 어슬렁거리던 버트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요슈아 쪽으로 걸어와 슬그머니 따라 누웠다. 그 광경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아이의 걸음 하나, 몸짓 하나가 배부르고 게으른 듯했기 때문이다. 요슈아의 배가 들썩거릴 때마다 버트는 코를 킁킁거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느슨하게 누워 있었다.

몇십 분 정도 지났을까, 요슈아가 제리의 손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K 씨는 브레챠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고 했지?"

"응, 애초에 그래서 친해진 거니까. 그건 왜?"

"집에서 자주 들었다면 버트도 익숙하지 않을까 싶어서."

 

요슈아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두 팔로 기지개를 켜고 제리를 향해 물었다.

 

"저번에 두고 간 기타, 아직 있지?"

"응. 저쪽 방에."

 

제리는 복도의 침실 옆방을 가리켰다. 요슈아는 제리에게 잠깐 여기 있어 보라고 한 다음 방에 들어가 통기타를 꺼내왔다.

 

"연주해 주게?"

"익숙한 노래를 들으면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기타는 여전히 빛바랜 구석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는 제리의 옆에 앉아 자리를 잡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천천히 무릎 위에 악기를 올려놓고, 손가락이 익숙하고 능숙하게 줄 위를 오르내렸다. 기타의 차가운 금속 현이 따뜻한 체온의 일부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가 짓궂은 눈빛으로 힐끗 제리를 바라봤다.

 

"오늘 관객은 제리 말고도 한 명 더 있네. 한 마리라고 해야 하나?"

 

짧은 말 한마디가 오래 머물며 공기를 간지럽혔다. 제리는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한동안 그 따뜻한 손길에 의지해 있다가 곧 제 갈 길을 가듯 느긋이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움직였다. 목적지는 이미 결정이라도 된 듯 망설임은 없었다. 요슈아의 무릎 위, 당연하다는 듯 두 앞발을 떡하니 올리고 엎드리는 아이의 나른하고 게으른 자태가 두 사람의 입꼬리를 내려가지 않게 했다.

요슈아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천천히 첫 줄을 튕겨냈다. 그의 가늘게 뻗은 손가락은 기타 줄의 저항마저 다정하게 달래는 연인의 손처럼 움직였다. 첫 음이 공중에 떨림을 그리며 흩어지자 마치 오랜 숨을 내쉬는 듯, 정갈한 마음을 펼쳐 보이는 듯한 소리가 방안 가득 서서히 번져나갔다. 길게 늘어뜨린 새하얀 머리칼은 요슈아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흐릿한 그림자처럼 얼굴을 타고 내렸다가 그가 섬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고 나른한 오후를 녹여낸 것처럼 흔들렸다.

소리를 겹쳐나갈수록 마음의 깊은 곳에 머무르던 감정들이 점점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감고 음악이 이끄는 대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온전히 선율에 자신을 맡겼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음률은 깊고 진득했다. 버트는 검은 코를 찡긋거리며 앞발을 앞으로 밀었다. 요슈아가 입은 바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침내 마지막 음표가 소멸할 때, 요슈아는 천천히 눈을 뜨고 여운이 남은 기타 줄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투르게 남겨져 있었고 방 안은 고요함 사이로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음악이 제 흔적을 끝까지 남기려는 듯 잔잔한 흐름이 남아있었다. 요슈아가 기타를 옆으로 치우고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어떠셨어요, 버트 씨?"

 

당연히 되돌아오는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멍'하고 짖은 짧은소리였다. 요슈아는 그마저도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제리는 전혀 다른 두 색깔과 종으로 뒤섞인 눈앞의 풍경에서 느릿하고 연약하게 흐르는 반짝임을 보았다. 그것은 손을 뻗어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흩어질 듯해서 제리는 자신도 모르게 요슈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소 짓고 있던 요슈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내 연주에 뭔가 문제 있었어?"

"아, 전혀……. 너무 좋았어. 그냥, 뭐라고 해야 하지……."

 

제리가 요슈아의 어깨를 잡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풍경 속에 그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자 물 밀려오듯 모든 단촐한 생각들이 하나로 뭉쳐져 제리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제리가 중얼거리듯 혹은 읊조리듯 말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늘 겉으로 티가 나는 것 같아서."

 

요슈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몇 초 뒤 장난기를 담아 퉁명스럽게 답했다.

 

"에, 그 '아이들'에 나도 포함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왕이면 사람을 좋아하는 '멋진 남자친구'인 편이 좋은데 말이지."

 

웃음이 뒤섞였고, 실내의 온도는 따뜻했다. 익숙지 않은 숨소리가 그들의 풍경에 들어왔어도 여전히 그들은 똑같이 웃고 있었다. 제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게, 한 입 더!
부드럽게, 한 입 더!

@juststayus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짝. 경쾌한 박수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소리가 겹쳐서 흡사 폭죽 터지는 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소리가 메아리친 방 안에 벌써 뜨거운 열기가 공기 중을 유랑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는 흰쌀밥을 각자 한 그릇씩 앞에 둔 상태였다. 유키가 젓가락을 들자 다른 이들도 일제히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라 할 새도 없이 각자 자신 앞에 제일 가까운 부위를 뜯어 갔다. 뜯어질 때 거대한 오코노미야키의 포슬포슬한 겉면이 유독 도드라졌다. 반죽 사이사이로 얇게 채를 썬 양배추와 고르게 갈아 넣은 마가 보였다. 제리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오코노미야키를 바라보면서 어쩌다가 이 자리에 끼게 된 것일까, 잠시 생각했다.

계기는 간단했다. 매번 좋아하는 재료를 가지고 요슈아의 집에 모여 식사하는 브레챠만의 정기 모임이 있었는데, 요슈아가 그 전날 제리에게 함께하는 것은 어떠하냐며 제안한 덕분이었다. 그래도 돼? 그렇게 묻는 제리에게 요슈아는 당연하지, 하고 또박또박 발음하며 기대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러 번 집을 오갈 정도로 익숙해진 이들이었지만 그러한 정기 모임에 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래간만에 제리는 약간의 긴장을 느꼈다.

그러나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분위기는 최고조를 달렸다. 유키는 준마이긴죠 청주를 들고 왔고 소타와 마츠는 각각 돼지고기와 특제 스파이시 소스, 그리고 베이컨과 달걀 등을 가지고 왔다. 요슈아와 제리가 함께 구매한 최고급 오징어도 물론 곁들여졌다. 요리하는 동안 부엌은 계속 시끄러웠다. 칼을 들고 있으니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유키의 말에도 불구하고 요슈아가 음을 흥얼거리자 다 같이 브레이브 차일드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어코 마지막에는 소타가 고음을 내지르기까지 했다. 요란법석 하게 준비하다 보니 여기저기에 가루나 가쓰오부시가 묻어났다. 다섯 사람은 각기 다른 부위에 가루를 묻힌 채 거대한 오코노미야키를 완성했다. 제리는 자연스럽게 그 크기에 감탄했다. 아무리 다섯 명이라지만 다 먹을 수 있나 싶은 크기였다. 물론,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요슈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첫입으로 오징어가 든 부위를 맛보았다. 물컹한 오징어를 둘러싸고 부드러운 반죽이 씹혔다. 겉면 가장자리는 약간 아슬아슬할 정도로 태워져 있었는데, 부드러운 안쪽과 대비되어 오히려 더 식감이 살았다. 그는 공깃밥 한 숟갈을 떠서 한입에 넣었다. 밥알에 밴 소금기가 고소한 가쓰오부시와 절묘하게 섞여 감칠맛을 만들어 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기와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뜨거움도 첫입의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입천장이 조금 따갑기까지 할 정도였는데도. 요슈아는 달아오른 두 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릇을 들고 으음, 소리 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을 잠깐 깜박였다. 다른 멤버들 또한 엇비슷하게 오코노미야키를 즐기고 있었다. 소타는 자신이 가져온 돼지고기가 있는 부위를 골라 미소 된장국과 함께 맛보았는데, 곧바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잠깐만, 이렇게 맛있어도 돼? 불독 소스하고 조합 장난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다니까? 소스 만들 때 케첩 대신 좀 더 매운 걸 넣어 보길 잘했어!"

 

요슈아는 오른편에 앉은 소타에게 맞장구를 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았다. 그사이 몇 입을 더 급하게 씹어 삼킨 소타가 요슈아에게 이쪽 부위를 먹어 보라며 자신 앞을 가리켰다. 요슈아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반죽 안에는 매콤한 소스 사이로 담백한 달걀과 베이컨이 기름내를 풍기고 있었다. 요슈아는 잘근잘근 씹히는 베이컨을 한쪽으로만 씹었다. 저절로 오른쪽 볼이 부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제리는 야금야금 가쓰오부시와 파래 가루가 상당하게 몰려 있는 가장자리를 맛보면서 요슈아를 관찰했다. 입 안으로 퍼지는 열기가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지속되는 듯했다. 단정한 블라우스 아래로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오코노미야키보다도 잔을 비우기 바빴던 마츠가 그제야 젓가락을 집었다.

 

"그 정도? 어디, 나도 한 입."

 

이미 첫입을 맛본 유키는 준마이긴죠를 홀짝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마츠가 손을 뻗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돼지고기가 유독 많이 들어간 부위를 골라 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씹던 그의 눈매가 잠시 날렵해졌다. 그리고 한껏 웃음기를 띄우면서 호탕하게 미소지었다.

 

"어, 뭐야! 바꾼 소스도 맛있잖아?"

 

마츠의 목소리도 한껏 기분이 들뜬 것처럼 변했다. 잘게 썬 돼지고기가 그의 입 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그 모습을 본 멤버들과 제리가 가볍게 웃었다. 소타와 요슈아가 제안한 특제 소스는 아무래도 모두의 입맛에 들어맞았던 모양이다. 제리 또한 무난하게 오코노미야키를 씹어 삼켰다. 약간 기름기가 있는 부침에 적절히 매운맛이 가미되니 가리는 재료들도 예상보다는 먹을 만했다. 모두 한 입씩 맛을 보고 나서 분위기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제리는 한 입 한 입 씹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입을 가리면서 먹었다. 씹는 소리 또한 거의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엄연히 브레이브 차일드만의 정기 모임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참석하게 된 제리로서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제리와 요슈아는 서로 짜맞추기라도 한 듯 계속 오코노미야키 조각을 가져오는 타이밍이 맞았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 먼저 하라며 젓가락을 물렸다. 얼떨결에 팔을 주춤거리던 둘이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소타가 돌연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를 모두가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이크 대신 숟가락을 가까이하고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는 별안간 토크쇼 사회자처럼 자세를 취했다.

 

"오늘 모여 주신 브레챠와 제리 씨에게, 우선 감사의 말씀 올리면서…….”

"뭐 하는 거야?"

 

마츠가 테이블을 훑어보며 빈 잔을 찾아 채웠다. 준마이긴죠는 청명한 소리를 내면서 작은 잔에 가득 담겼다. 아슬아슬할 때까지 청주를 따르는 그를 보며 유키가 손짓하며 말했다.

 

"늘 하는 거잖니. 즐거워 보이니까 놔두자."


그리고 청주가 넘쳐흐르려는 자신의 잔을 본 제리가 앗,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소타가 이미 비운 청주 병을 높이 들어 숟가락으로 두드렸다.

 

"자, 자! 브레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할 때잖아!"

"아하하. 어쩐지 오늘은 안 하나 했어!"

"또?"

"아아, 제리는 모르겠구나."

 

요슈아가 어느새 제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로 제 잔을 툭툭 두드렸다. 제리도 잔 들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익살스러운 눈빛이 영 낯설지 않았다. 제리는 약간은 반신반의한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찰랑찰랑 표면이 흔들리는 잔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러자 소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잔을 집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단숨에 일 분간 건배사를 쏟아냈다. 다들 이번에도 수고했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이번에는 제리도 꼈으니 색다른 기분이라든지, 다음에는 오코노미야키 대신 전골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 등등 거진 수다에 가까운 내용들이 마구 쏟아졌다. 그가 열변을 토해내는 동안 마츠는 오코노미야키를 한 입 더 먹었다. 제리가 속으로 폐활량이 엄청 좋구나, 생각할 즈음에 소타가 마지막으로 힘껏 외쳤다.

 

"여기 없는 데빌즈들을 향해, 건배~!"

 

그러면서 잔을 높게 치켜들었다. 찰랑거리던 청주가 결국 한 방울 툭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라도 삼은 듯 나머지 멤버들이 건배를 외쳤다. 제리 또한 반 박자 늦게 건배, 하고 잔을 높게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한꺼번에 술을 들이켰다. 좀 전부터 빠른 페이스로 마시고 있던 탓인지 알딸딸한 기운이 확 몰려올 정도였다. 제리는 빈 잔을 뚫어져라 보다가 요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매번 이렇게 요란하게 건배하는 거야?"

"응, 매번 돌아가면서 한 명씩 건배사를 준비해 오는 거야. 저번에는 생맥주로 했었지? 다 같이 한 잔을 가득 채워서 원 샷 했는데, 그때는 배불러 죽는 줄 알았어─"

"엄살 부리기는. 그래봤자 맥주잖아!"

"후후. 저번에는 나도 꽤 고생했어? 신이 나서 건배사만 다섯 번은 외친 것 같은데."

"다섯 번!"

 

제리가 감탄스럽게 외쳤다. 소타가 씩 웃으며 자리에 시원스럽게 앉았다. 바닥과 그의 다리가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줄곧 턱을 괴고 있는 유키를 따라 하듯 소타 또한 턱을 괴면서 제리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제리 씨도 함께할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준비해 오는 게 좋을 거야~?"

 

제리가 잠시 짧게 멍한 소리를 냈다. 그는 제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되물었다.


"이번만 참석하는 게 아니었어? 브레챠의 정기 모임이니까, 나는 해당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유키가 요슈아와 제리를 보며 작게 웃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리가 의문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 그가 대답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소중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도 소중한 친구잖아. 그리고…… 제리가 함께했으니 요슈아도, 우리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브레챠 모임에 제리가 못 낄 이유는 전혀 없지. 마지막 문장으로 말을 마친 그가 입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제리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청주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잔이 보였다. 반투명한 잔에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흐리멍덩하게 비추어졌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직접 보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분명, 조금은 바보 같고 또 조금은 설렘을 담은 표정일 것이다. 그가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요슈아는 언제나 그랬듯 그의 곁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두 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가 부드럽게—어쩌면 반쯤은 취기가 섞인 것 같기도 했다—말했다.

 

"응, 그 말대로야."

 

그러면서 제리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제리는 그대로 이끌린 채 어영부영한 자세로 요슈아와 볼이 맞닿았다. 요슈아가 예의 익살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멤버들을 쳐다보았다.

 

"앞으로도, 제리도 브레챠도 쭉 함께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말한 그의 눈동자가 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잿빛 눈동자가 언뜻 그의 머리카락보다 좀 더 밝은 흰색을 띄우는 듯했다. 제리가 그와 멤버들을 번갈아 보며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소타가 외친 순간부터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감추기 어려웠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있을 곳을 찾았다는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정한 이들과 별것 아닌 시간으로 나누는 즐거움을 새삼스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깨달음에 제리가 입술을 떼지 못하고 있을 참이었다. 눈앞에 갑자기 불쑥 준마이긴죠 병이 내밀어졌다. 마츠였다.

 

"자자, 그런 말 할 여유 있으면 한 잔 더!"

"잠깐잠깐, 소타 군~?! 왜 맥주잔을 들고 오는 거야?"

"후후, 술은 많으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 자, 제리, 받아!"

"지—진짜로? 사이즈가……."

 

제리는 아마도 오늘 밤에는 요슈아의 집에서 자고 가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직감적으로 받으며, 마츠가 청주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술잔에 차오르는 청주의 빛깔을 바라보니 어쩐지 모든 것이 마냥 즐겁게만 느껴졌다. 그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밤이 아직 길었다.

구체의 사랑
구체의 사랑

@juststayus

 

 

최근까지 써 오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유선 이어폰으로 바꾸었다. 딱히 별 이유가 있어서 바꾼 것은 아니었다. 자꾸만 잃어버리거나 망가져 버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유선 이어폰으로 바꾸니 잃어버릴 일이 아예 없어져서 한결 나았다. 대신 어느 곳에 넣어 두어도 항상 줄이 꼬였다. 엉킨 줄을 푸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골치가 아팠다. 결국 이동 중에 음악을 듣지 말자는 결론이 나왔다. 한 번 듣지 않기 시작하니 그전까지는 거슬렸던 주변 소음이 도리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를 요슈아에게 전해주자 그는 그래도 자기 전에는 브레챠의 노래를 종종 들어줘, 라며 부탁하듯 농담했다. 부탁하지 않아도 이미 그러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덕분인지 꿈에 자주 요슈아가 나왔다.

꿈속의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손가락을 얽힌 채 누워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고 저택의 주인이 되어 손님인 나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꿈속의 것들은 가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슈아가 나올 적이면 그런 생각은 고이 접어두고 그에게 곧바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유를 구태여 꼽자면, 그가 꿈속의 자신이 어떠하였는지를 들으며 표정을 시시각각 바꾸는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TV에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조잘거리고는 했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등장인물의 대사와 우리 둘의 목소리가 겹치면, 자막이 필요 없는 감정만 그 자리에 잔뜩 흘러넘쳤다. 그것이 좋아서 자주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상투적인 단어로밖에 포장할 수 없는 내가 약간은 원망스럽다. 그러나 이리 말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그 시간들은 정말 꿈만 같았다.

그의 집에서 흰 우유를 엎질렀을 때, 나는 내가 항상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현듯 떠오른 감정이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였다. 돌이켜 보면 그런 셈이었다. 마음을 먼저 전해준 쪽도, 도쿄로 돌아와 다시금 나를 끌어안은 것도, 부풀린 그것을 음악으로 내뱉어 주는 것도 요슈아였다. 검은 고양이 매트 위에 흰 우유가 쏟아지면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털 사이사이로 하얀 점들이 물감처럼 퍼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요슈아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그 광경을 한참 동안이나 쪼그려 앉아 지켜보았다. 손에 든 우유갑이 구겨지는 소리가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였을까. 그날부터는 잠들기 전 그의 부탁대로—그의 부탁이 없었어도 종종 그러하였지만—매일 브레챠의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내가 그에게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초대받지 않고도 들어가기를 원해서. 그가 나를 원할 때 한 발짝 먼저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난해함을 논하는 그의 목소리는 가사에서도 말하듯 어쩐지 유감스러워서 그 부분을 돌려 들었다. 잦아드는 드럼 소리를 입에 삼키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 복도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비치는 내 모습에 눈이 피로해졌다. 잠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새벽녘 아침과 비슷한 색조가 지면 전체에 깔려 있었다. 바닥은 표면이 마치 구름 같았는데, 발을 들었다 떼면 파문이 일 듯 울렁거리면서 자그마한 원을 그렸다. 나는 몇 번 더 그 행위를 반복했다.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가 문득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발을 멈추었다. 사방이 막힌 그곳은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고 고요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 기운 덕에 이곳이 꿈속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눈을 깜빡거리는 동안 솜털 같은 무언가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돌아 움켜쥐었다. 펼친 손바닥 안에 그 아이와 함께 보았던 불꽃놀이의 잔해가 들어 있었다. 문지르거나 후 바람을 불면 날아갔다.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사방에 그것이 반짝이는 유성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은 모이고 모여 하나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궤적을 따라 걸었다. 끝없어 보이는 복도의 저편이 아른거렸다. 가까워질수록 형태가 점점 선명해졌다. 새벽을 닮은 색깔로 인해 순간 그와 이곳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열 발짝 정도 멀어진 곳에서 그를 불렀다.

 

"요슈아, 거기 있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요슈아에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요슈아가 주춤거리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렁거리는 지면을 밟았다. 땅은 마시멜로처럼 말캉거렸다. 그럼에도 내 발걸음 소리는 지나치게 크게 들려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왜 그런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뇌리를 스친 사소한 의문도 진공 속에서는 무자비하게 흩어졌다. 소리가 둔탁한 대신 몸이 부유하듯 허공에 떠올랐다가 다시 땅에 내려앉았다. 그것이 걸음마다 반복되었다. 이질적인 조합과 함께 서서히 그에게 다가갔다. 희끄무레했던 실루엣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한 발짝 정도를 남기고 요슈아의 앞에 섰다. 그가 나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일 있어?"

 

묻는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위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띄울 것처럼. 요슈아가 급작스레 훅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까 싶어 양팔을 뻗었다. 얄상한 허리에 두 팔을 둘렀다. 그러면서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내 머리카락이 얇은 와이셔츠에 맞닿았다. 천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정답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요슈아는 정답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었다—굳이 따지자면 그는 현답에 가까운 사람이었다—힘을 더 세게 주었다. 그와 나 사이에 투명한 막 하나가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까지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그 막을 열어젖히듯, 경계를 흐리게 하듯 그의 어깨에 손을 댔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왜?"

"요슈아는 원래 만졌을 때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데, 이번에는 부드럽기보다…… 반질거린다고 해야 할까. 잘 빚은 도자기 같아. 응."

"하핫. 뭐야, 그게."

 

요슈아가 잘게 조각난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멀게 들렸다. 나는 그를 붙잡듯이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의 부드러운 어깨가 내 손바닥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괜스레 손바닥을 문지르면서 천 하나를 두고 살갗을 마주했다. 그가 간지러워, 하고 머리를 내 어깨에 푹 얹고 나서야 그 행위를 멈추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어깨를 들썩거렸다. 요슈아의 이마가 흔들거렸다. 에잇. 별것 아니라는 듯한 추임새와 함께 그가 내 허리를 덥석 그러안았다. 나 또한 그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의문이 든 것은 숨을 몇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 후였다. 왼손은 그대로 어깨에 둔 채, 오른손으로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매끈하고, 동그랗다. 조금은 차가운 듯도 하다. 어째서일까? 그의 말랑거리는 볼도, 매끄러운 어깨도. 어째서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들은 전부 둥근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일까.

 

"너는 너무 동그란 것 같아."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요슈아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자신의 양쪽 눈꼬리를 꾹 눌렀다.

 

"왜지? 이렇게 뾰족한데."

"바보."

"아! 나왔다! 제리의 말 돌리기!"

 

그가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표정을 무너뜨렸다. 배를 부여잡고 글썽이는 눈물을 닦아내자 그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아무튼 이유는 말 안 해 주겠다 이거지."

"응, 요슈아는 그냥 동그란 바보 강아지야."

"뭔가 하나 추가됐는데!"

 

그의 말에 장난기가 솟아나는 것은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모른 척하며 뒤를 돌았다. 곧장 요슈아가 뒤에서 양쪽 팔로 훅 몸을 감싸 안고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

 

"강아지는 주인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아하하, 결국 인정하는 거구나."

"너하고 함께 있으면 그렇게 돼. 신기하지?"

"그러게……. 나도 그러는데."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면 이윽고 그가 몸을 뗐다. 그가 발을 뗄 때도 묵직한 소리가 났다. 나는 바닥과 요슈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발걸음을 뗐다. 가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따라가자 하얀 그랜드 피아노 하나가 복도의 끝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지 하나 묻지 않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이 너무나도 그와 닮아서, 나는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멋쩍은 것처럼 웃으면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발견했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자마자 제리 네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답이었네."

 

그 말에 나는 내가 한 번 더 그에게 져버렸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도쿄에서도, 꿈속에서도 항상 그는 한 발짝 앞서나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패배가 억울하면서도 기분 좋게 느껴져서 나는 너털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을 곱씹는 동안 그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그 손짓에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옆에 앉자 익숙한 풍경이 그려졌다. 옛날에는 자주 이러고 놀았지, 그의 귀에 중얼거리자 그가 그렇지, 하고 즐겁게 대답했다. 그는 내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서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제는 전부 안다고 생각했던 소꿉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있으면 듣지 못했던 쓸쓸한 피아노 연주 소리를 듣게 되었다. 꿈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방이 거울로 된 벽은 그에게 기대고 있는 나를 비추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요, 슈, 아. 그런 다음 나의 이름을. 제, 리. 네 글자에서 한두 개씩 빠져버린 듯 발음되는 그 음절들을 곱씹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너와 나도 불완전한 발음만큼은 같구나.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나는 꿈속의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나를 데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닐 것이라고 약속한 그였으니, 나는 꿈속에서 어디든, 언제나 그를 데리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가파르게 치솟을 때쯤이면 새로운 다짐 하나가 더 떠올랐다. 그것은 젖은 매트만큼이나 사소한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전화를 걸어야지. 그리고 내가 먼저 오늘도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약속하듯 읊조리면서.

코르도바의 탑에서 중력을 보다
코르도바의 탑에서 중력을 보다

@juststayus

 

 

제리가 마침내 고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것은 골목길 가장 아래에 있을 때였다.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요슈아가 서 있었다. 목에는 조금 전에 샀던 비즈 목걸이가 걸려 있는 채였고 왼손 검지에는 각각 하나씩 사서 맞춘 얇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 중앙에는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요슈아의 것은 노란 오팔이었고 제리의 것은 검은 스피넬이었다. 가게 주인인 젊은 남자가 영어를 하지 못해 가방 속에 넣어둔 스페인어 사전을 꺼내야 하나 갈팡질팡했던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 요슈아가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번역기를 곁들인 것으로 위기는 얼추 넘어갔다.

가게 주인이 계산을 하는 동안 그는 제리에게 이대로라면 몇 개 국어까지 할 수 있으려나, 하고 농담 삼아 속닥거렸다. 제리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5개 국어도 거뜬히 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배우는 건 판다 사장님의 정보 갱신에 무리가 올 거라면서 농담을 받아치기만 했다. 된다고 하면 무리해서라도 배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무리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스케쥴 사이로 어찌어찌 잡은 여행이었다. 제리는 그가 이왕이면 이 7박 8일 내내 일도 잊을 정도로 푹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돌아간다면 자기가 걱정하더라도 그 혹독한 스케쥴을 감행할 터였다. 그렇다면 쉴 때 확실하게 쉬는 것이 좋았다.

제리의 바람대로 요슈아는 간만의 휴식에 꽤 들뜬 듯했다. 입꼬리는 귀에 걸릴 듯 올라갔고 눈썹은 보기 좋게 휘어져 있었다. 제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관찰했다. 그가 모자를 잠시 벗고 요슈아를 향해 외쳤다.

 

"저번에도 그렇고, 요슈아는 항상 나 혼자만 찍더라."

"에—그야 매번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부탁하기도 좀 그렇고, 나는 찍어둔 사진을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으니까."

"그러면 나는 무슨 사진을 보고 재미를 찾으라고. 안 되겠어, 이제부터 나도 막 찍어야지."

"아하하! 항상 포즈라도 취하고 있어야겠네."

 

요슈아는 카메라를 내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리는 속으로 그것이 어떤 음이었을지 가늠해 보았다. 고민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박자가 비슷한 브레이브 차일드의 몇몇 곡들을 대입해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그것이 어떤 음인지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창 고점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달리 말해 가장 기억하고픈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억은 제리가 생각한 나름의 음을 가지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틀렸다고 해도 생각한 대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것은 꽤 중요한 차이였다. 제리는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가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요슈아는 반대였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두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나란히 서게 됐다. 요슈아는 지근거리에 있는 제리의 옆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멀뚱히 있는 손을 맞잡아 오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그가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어떻게?"

"계속 번갈아 찍어주다가, 탑 위에서 같이 찍는 걸로. 뭔가 기념비적이고 좋지 않아?"

 

카메라를 집어넣은 요슈아가 남은 한 손으로 V 자를 그렸다.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카락이 부스스 흐트러졌다. 길고 얇은 머리칼들이 제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제리가 잡고 있던 왼손에 속으로 힘이 더 들어갔다. 손가락 뼈마디가 살짝 당겨지면서 손톱이 손바닥을 눌렀다. 투명한 흔적이 남았다. 그는 오른팔을 요슈아의 이마 쪽으로 뻗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의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가볍게 스친 이마 온도는 삼십육 도쯤. 아니, 그것보다 살짝 더 따뜻했던 것 같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브레챠의 요슈아 군."

"에엑—너무 갑작스럽잖아, 거리감!"

 

요슈아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볼을 부풀렸다. 볼 안쪽에 공기가 차올랐다. 그러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 그것도 나름 듣기 좋으니까. 열심히 힘내서 가 볼까요, 요슈아의 제리 양."

"네 거야?"

"싫어?"

"으응, 좋아서."

 

제리가 대답하자 요슈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리 한쪽에 무게를 실으며 돌아선 그의 뒷모습이 문득 작게 느껴졌다. 어린아이 같기도 했고 캔버스 위에 어설프게 그려진 실루엣 같기도 했다. 건물 뒤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찌푸리면서, 제리는 그의 흔들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걸으며 제리는 손바닥을 펼쳤다. 내려다보자 누르면서 났던 자국이 흐려진 게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흔적처럼 오늘의 대화도, 그의 표정도 기억에서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윽고 고개를 도리질하고 들었다. 저 위쪽에 있는 칼라오라 탑이 보였다. 그곳에서 찍을 사진 한 장으로 이 모든 순간이 박제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고점을…… 느끼며 걸었다. 코르도바의 열기가 더웠다.

 

제리가 요슈아와의 여행을 계획한 것은 지난가을부터로, 꽤 오래전부터였다. 의식하지 못했건만 그리도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서바이벌이 세 번째에 다다를 시기, 브레이브 차일드가 클라이맥스 레코드에 합류한 날도 새삼스러울 정도로 옛날이었다. 아직도 요슈아는 그들과 처음 만난 때가 엊그제 같다고 자주 회상했다. 그런 시간에 따라 제리도 요슈아도 의식하지 못한 부분에서 많이 변했다.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나지막이 부르는 서로의 이름 정도였다. 시간이라는 것은 묘하게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흘러가고 있는 순간엔 보이지 않는다. 느낄 수도 없다. 그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뇌리를 스치듯 겨우 네 개의 숫자로, 하루의 정해진 요일로, 또는 한 조각의 순간 따위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하는 것이다. 야속하게도 혹은 느닷없이.

그 한 조각의 순간은 가령 이런 것이었다. 지난 시즌 마지막 공연이었다. 제리는 관중석 멀리서 요슈아를 보고 있었다. 요슈아는 무대 위에서 온전히 한 사람이 될 줄 아는 남자였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머리카락은 반짝였고, 박수와 함성 사이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날것 그대로였다.

 

"모두들, 정말 고마워."

 

그는 외쳤다. 천장을 뚫는 음향의 잔상이 귓가에서 흩어지기 전에 그는 한 번 더 외쳤다.

 

"정말로, 이 자리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그 외침에는 예전과 다르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제리는 수백 명의 낯선 얼굴들 속에서 입술을 조용히 움직였다.

 

"나도 고마워, 요슈아."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리는 불현듯 생각했다. 이 모든 과거와 기대와 감정 앞에서 자신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감사에 답해야 한다고.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계획은 그 하나의 프레임에서 피어났다. 딱히 거창하거나 대단하지도 않았다. 사실상 사소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이유가 된다는 점이었다.

행선지를 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선택지는 이미 넘칠 만큼 많았다. 파리, 리우데자네이루, 도쿄, 로스앤젤레스까지. 제리는 하얀 종이 위에 도시 이름들을 적고, 하나씩 엑스를 그었다. 여러 번 가 봤으니까 이번엔 다른 곳을 가 보고 싶어. 로스앤젤레스에 엑스가 그어졌다. 축제 기간이 막 지났지. 파리에 엑스가 그어졌다. 휴가를 보내기에는 너무 번잡스럽지. 리우데자네이루에도 엑스가 그어졌다. 그런 식으로 신중하면서도 어딘가 무심하게 엑스 자를 치던 끝에 마지막 이름이 남았다. 코르도바.

제리는 펼쳐둔 지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그는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볼펜으로 코르도바 이름 위를 빙글빙글 여러 번 돌렸다. 선은 원을 이루고 원은 반복되었다. 마치 확신을 새기는 행위 같았다. 볼펜을 내려놓고 제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결정의 흔적을 카메라 앱으로 찍었다. 그다음 라인 앱을 켰다. 화면 상단에 고정된 요슈아의 이름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이제 막 연습 중, 이라고 적힌 미리 보기가 보였다. 제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고 서두를 떼면 좋을는지. 고민하던 끝에 시작을 이렇게 냈다.

 

[연습 힘내]

[그리고 여행 가자]

[(사진)]

 

몇 초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가 떴다. 바로 답장이 왔다. 딱 한 글자였다.

 

[에]

 

 

지난 몇 달간 요슈아는 내내 들떠 있었다. 서바이벌이 끝나는 대로 가게 될 여행 덕분이었다. 서바이벌이 이어지는 한동안은 시간이 나는 대로 제리와 계획을 짰다. 판다 사장에게 양해를 구해 스케쥴을 조정하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요슈아는 그렇게 계획을 짜는 일 자체가 즐거웠다.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은 백지에 또박또박 글자를 채워 넣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오선보에 음표를 그리는 행위와도 엇비슷했다. 그렇게 한창 계획을 짜는 와중 그가 제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그 많은 도시 중에 코르도바였냐고. 제리는 수줍게 대답했다.

 

"꽃의 도시라잖아. 요슈아가 좋아할 것 같았어."

 

그 말을 꺼낸 제리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끝을 살짝 늘인 것도 계산된 것 같았다. 그 순간 요슈아의 얼굴이 묘하게 멍해졌다. 피식 웃는 소리가 난 것은 몇 초 후였다. 아니,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더듬거리는 느낌이 곁들어져 있었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꼭 안에 감춘 낯부끄러움을 숨기려고 하는 표정. 그런데도 새어 나오고 있는 표정. 자신의 표정이 어색하다는 사실을 알기는 아는지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꽃이라니, 뭔가 느낌이 이상해."

"왜?"

 

제리의 말은 물음보다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에 가까웠다.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왜냐니."

 

요슈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꽃의 도시'라는 걸 보고 날 생각했다는 거잖아. 그건 어쩐지…… 엄청 부끄러워진다고 해야 하나."

 

요슈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부끄러움이 흔적처럼 얼굴 가장 자리서부터 퍼져나갔다. 그 작은 떨림을 제리가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 난 걸 어떡해? 요슈아는 엄청 부드럽고, 상냥하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슈아는 손을 휘저으며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막으려 했다. 고개를 자꾸 흔들었다.

 

"우와, 진짜 그만! 부끄러워! 항복할게."

 

 

코르도바의 태양은 대충 쏟아지고 있었다. 빛이 무심하게 내리쬐었고 그 아래 모든 사물은 녹아내릴 것처럼 아지랑이와 함께 출렁였다. 일전에 둘이 함께 갔던 마드리드의 더위는 코르도바의 그것에 비하면 겨울의 첫눈 같은 것이었다. 습기는 낮고 기온은 높다. 뜨거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목구멍에 자욱한 뜨거움이 끈적하게 남았다. 매운 공기가 얼굴과 목덜미를 핥고 다녔다. 흩날리는 열기가 마치 새 부리가 뺨을 쪼는 듯했다.

두 사람은 탑승 게이트를 지나 택시로 향했다. 캐리어 바퀴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울림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는 흥얼거리고 있던 노래를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사는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코르도바의 더위는요. 간격을 두고. 피부로 먼저 오는 게 아니라 숨으로 먼저 느끼게 된다고 하더랍니다. 목소리는 거칠었다. 모래바람을 머금은 사내의 목소리 같았다. 요슈아와 제리는 설핏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도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을, 두 사람은 깨달았다. 차창을 열 때마다 말라붙은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의도 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스읍. 폐가 부푸는 순간마다 바람이 몸속에 쌓여가곤 했다. 제리가 그 더위를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혀를 입천장에 살짝 붙인 채로.

 

"덥다."

 

요슈아가 조용히 중얼대며 핸드폰 화면을 켜고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타자 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에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엑. 요슈아는 작게 외치더니 화면을 제리 쪽으로 내밀었다.

 

"이것 봐, 최고 기온이 37도래!"

 

제리는 그 아래 1.9mm라고 적힌 강우량을 보고 더 놀랐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얼빠진 사람들처럼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먼저 화면에서 눈길을 뗀 것은 제리였다. 그는 땋은 머리카락을 멋쩍게 빙글빙글 돌리며 이야기했다.

 

"내가 본의 아니게 요슈아를 서바이벌에 다시 밀어 넣고 있는 건가?"

 

요슈아가 마른 기침 소리와 함께 호쾌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홍조가 맺혀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무릎에 내려놓고 제리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게, 여기 판다 사장이 있었네. 내 귀여운 제리는 어디 갔담."

 

제리가 아야, 하고 짧게 엄살을 피웠다. 그가 요슈아를 불퉁한 표정으로 노려보았으나 그닥 효능은 없었다. 요슈아는 그 표정이 더 재미있는 듯 손끝에 힘을 더해 얼굴의 곡선을 그대로 당겼다. 눌리고, 늘어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장난감보다 간단한 패턴이다. 얼마 안 가 그가 제리를 풀어주었다. 제리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뺨을 문지르면서 요슈아를 슬몃슬몃 바라보았다. 그는 웃음이 날락말락 하는 것을 겨우 참았다. 더위가 어느새 가신 기분이었다.

택시가 호텔 근처 다리에 멈춰 섰다. 턱 끝에 땀 몇 방울을 흘리며 둘은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바퀴 소리가 다시 울렸다. 메스키타 사원이 건너편에 있었다. 먼 거리에서 보면 건너는 다리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펼쳐진 사원과 탑, 근처의 모든 건물들이 하나처럼 보였다. 흰빛을 띠는 상아와 꿀 빛의 사암을 섞어 만들었다고 했다. 도시는 그 전체가 색이 바랜 조각상 같았다. 요슈아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와, 하고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는 캐리어를 다리의 구석진 곳에 얼추 세워두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SD카드도 바꾸어 놓았으니 용량 문제도 걱정 없어! 문득 제리의 머릿속에서 요슈아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며 말한 것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에도 셔터 음과 내내 함께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리가 요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질문했다.

 

"잘 찍혀져?"

"응! 카메라 컨디션도 절호조. 제리도 찍어 줄까?"

"나? 나는 뭐…… 괜찮아. 나중에 다른 곳에서 같이 찍지, 뭐."

 

제리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요슈아가 아쉽다는 듯 카메라 옆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침울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억지로 찍지는 않는 것이 요슈아다웠다. 그런 점이 제리가 그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즐거운 일이라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재미라면 억지로 하지 않는 부분. 제리는 요슈아의 소맷부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면 갈까."

"응."

 

 

호텔 로비를 빠져나온 순간부터 그들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코르도바로 여행을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그 꽃의 골목길이었다. 사계절 내내 꽃이 피는 이곳 날씨에 알맞았지만 동시에 이름이 투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리가 그것을 이야기하자 요슈아가 제리도 그렇게 생각했냐며 키득거렸다.

그곳까지 오는 내내 지나간 수많은 거리와 골목에는 저마다의 꽃들이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느 꽃집 주인은 두 사람이 무척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인다며 장미 두 송이를 선물해 주었다. 내킨다면 꽃다발도 보고 가라는 식이었다. 제리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골목길에 가면서 제리는 자신의 장미를 요슈아에게 건네주었다. 요슈아의 곁에 있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런 이유였다. 꽃집을 지나치면서는 반지 한 쌍을 샀다.

마침내 골목길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양옆으로 찌그러진 철문들, 녹슨 간판들이 보였다. 그곳에서 제리는 벽돌 틈새로 무성히 자란 들꽃들과 간판마다 위에 걸쳐 둔 파란 화분들을 보았다. 그 화분 안에는 넝쿨 진 장미가 보였다. 한꺼번에 터져 나온 과일 껍질 같은, 지나치게 색채를 띤 생기로운 파편들이었다. 그 광경 앞에서 제리는 잠시 멈칫했다. 불현듯 어느 하나의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자신도, 요슈아도 목적지 없이 갑작스럽게 어떤 고점에 도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아니, 도달은 했으나 그렇다 하여서 해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 상태.

어찌 되었든 간에 그것은 이상했다. 낯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몸에 딱 맞는 감각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착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거기—그리고 여기—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고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고점의 감각은 단 하나—퍽 쓸데없고 시시한 것에서 당신을 느끼는 것이었다. 사소한 습관. 화분 위를 지나가며 느끼는 고요, 반지 하나를 손가락에 끼울 때 느껴지는 그 미미한 무게와 차가움 같은 것.

카메라 셔터 소리는 그때 울렸다.

 

 

양쪽으로 솟은 하얀 회벽들은 하늘을 가르듯 서 있었다. 벽 사이의 간격은 어른 두 사람만 지나가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벽 위로는 눈에 띄게 파란 화분들이 칸칸이 걸려 있었고 그 화분들 속에서는 넝쿨 진 장미가 벽을 따라 흐드러지게 뻗어나갔다. 꽃은 빨갛고도 선명했다. 벽이 흰색이라 더더욱 도드라졌다. 그곳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좁은 정원처럼 느껴졌다.

숨이 약간 막히는 듯하면서도 꽃의 향기가 코끝을 맴돌며 모든 걸 덮어 버렸다. 제리는 발끝이 간지러웠다. 바람이라도 불어 꽃잎들이 흩날리는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짝 말린 잎 조각들이 발에 스친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 또한 멈춘 듯했다. 아니면 꽃 냄새에 모든 소리가 가려졌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갑자기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알록달록한 꽃이 시간을 그냥 흘러가게 두지 않았다. 그 느릿느릿한 시간 속에서 제리는 요슈아에게 말을 걸었다.

 

"닮았어."

"응? 뭐가?"

"요슈아랑, 여기."

 

너와 있으면 나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뒷말은 삼켰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말이 있었다. 혹은 전달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는 말이 있었다. 요슈아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자신이 쥔 장미 두 송이를 들고 제리 앞에 섰다. 그리고 마치 풋풋한 고교생을 연기하는 것처럼 두 손을 내밀어 제리의 앞으로 장미를 들이밀었다. 달큰거리는 냄새가 제리의 콧속을 훅 맴돌았다. 놀란 그가 관자놀이에서 땀 한 방울을 흘리며 물었다.

 

"에, 요슈아, 뭐 해?"

 

요슈아가 장미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 눈엔 네가 훨씬 더 닮았지만, 자꾸 날 닮았다고 하니까. 그러면 꽃을 닮은 요슈아 군이 주는 장미도, 제리 양은 받아주실 건가~ 해서."

"그게 뭐야……."

 

제리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웃음소리를 냈다. 눈길은 웃음과는 상관 없이 요슈아의 손끝에 가 있었다. 제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장미 두 송이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잠깐 요슈아와 스친 순간, 제리는 문득 그를 끌어안고 장미와 시트러스 향이 섞인 그의 냄새는 어떨지 맡아 보고 싶어졌다. 그의 머리칼. 그의 어깨. 그의 체온과 냄새. 장미와 시트러스, 댓잎처럼 쌉싸름한 향. 그 자체를 맡고, 보고, 만지는 것.

사람이 많으므로 그것은 나중을 생각하며 참기로 했다. 그의 품이 아닌 두 손의 장미로 만족하기로 했다. 제리가 장미를 받아드는 그 순간, 지나가던 행인들이 휙,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제야 제리와 요슈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백처럼 보일까?"

 

요슈아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더 높았다.

 

"……어…… 얼른 나가자!"

 

풋내기를 벗어나지 못한 둘.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벼운 웃음소리와 만발한 꽃들의 향기 속에서 제리와 요슈아는 황급하게 자리를 떴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과 식은땀이 확실한 물증으로 남아 있었다. 공기 중에 흐르는 장미 향이 그들을 따라서 움직였다.

 

골목길을 쭉 따라 걸어 모퉁이를 돌자 어수선한 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장은 낮은 말소리와 타는 냄새로 출렁였다. 한 발 들어서자 과일 더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밟혔다. 빨갛고 노랗기도, 주홍빛을 띠기도 했다. 붉은빛이 선명한 석류가 벌어진 입처럼 쩍 벌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저마다 다른 색과 크기로 나부끼는 천들이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그 천들은 이방인을 압도하는 동시에 그들을 초대하는 것처럼 은근히 맞이하는 듯했다. 그곳을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결국 제리와 요슈아는 장신구 가게에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요슈아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장난스럽게 흉내를 내기도 했다. 목걸이의 비즈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리는 조용히 웃으며 요슈아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시장 뒤편, 줄지어 있던 꽃의 골목길이었다. 색색의 꽃들 사이로 좁다랗게 나 있는 길의 양옆에는 작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낮은 담장들이 이웃의 허물까지 애써 숨기지 못한 채 삐죽 서 있었다. 그 안쪽의 작은 집에서 온갖 소음이 나고 있었다. 제리가 말했다.

 

"요슈아, 이리 와 봐."

 

두 사람은 소리의 근원을 찾아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소음이 아닌 냄새가 길잡이 역할을 했다. 비가 갓 지나간 여름처럼 축축한 공기 속에서 장미 향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동물의 젖은 털에서 나는 냄새가 가늘게 솟아올랐다.

냄새에 이끌려 도달한 곳은 대문이 열린 어느 집의 작은 안뜰이었다. 거기에서는 물줄기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초록빛 풀들이 서로 가깝게 엉켜 자란 중심에 강아지 대여섯 마리가 있었다. 발톱을 바닥에 긁으며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물방울들이 젖은 털 사이로 반짝였고 바닥에는 뿌려진 물이 얇게 고여 흘렀다. 요슈아는 제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강아지 목욕 중인가 봐."

 

제리는 그의 말을 듣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안뜰 한쪽에서 주근깨가 난 여자가 호스를 쥔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똑바르고 선명했다. 제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이며 지나던 길이었다는 짧은 변명을 남기려 했다. 그러나 여자의 응답은 예상보다 더 간단했다.

 

"아녜요, 잠깐 구경하실래요?"

 

시간이 지나 그날의 일을 떠올릴 때면, 제리는 항상 같은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 코르도바는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는 도시라고.

두 사람이 안뜰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강아지 몇 마리가 물줄기를 쫓아 하늘로 뛰는 풍경이었다. 털에 엉겨 붙은 비눗방울, 눈가에 매달린 거품, 입 주변까지 포개져 있는 비누의 잔해. 꼬리를 바쁘게 흔들거리며 그 아이들은 젖은 코끝을 킁킁댔다. 냄새의 근원을 찾는 듯했다. 그러다 강아지들 모두가 동시에 멈춰 섰다. 방황하던 눈빛들이, 마치 신호라도 받은 양 어느 한 곳에 박혔다. 눈을 크게 뜬 요슈아를 향해서.

순식간이었다. 강아지들이 요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열에 찬 아이들의 숨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당황한 요슈아가 손을 마구 내젓다가 뒤로 넘어갔다. 그의 등은 곧 눅눅한 땅에 닿았다. 시원한 흙냄새가 콧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강아지들은 요슈아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뺨을 핥거나 배 위로 올라타는 둥 온갖 방식으로 달려들었다. 하나둘, 셋, 그리고 대여섯. 강아지 무리가 요슈아를 에워쌌다. 어디서 깜빡 떨어진 거품 덩어리가 그의 머리에도 달라붙었다. 강아지들은 무겁지 않았으나 그만큼 움직임이 날쌨다. 요슈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팔을 허우적거려도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 와중에도 제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손에 쥔 카메라로 요슈아를 찍으면서—약속대로 말이다—서 있었다. 흰 거품이 온몸을 뒤덮은 요슈아와 흰 거품에 엉긴 털을 찰랑거리며 그를 집요하게 감싸는 강아지 떼들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한 형제 같았다. 제리가 계속 사진을 찍자 요슈아가 비명을 질렀다. 퍽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줘, 제리—이!"

"미안, 안 돼."

 

제리의 손끝을 따라 카메라 셔터가 움직였다. 강아지들이 짖었다. 찰칵. 컹. 소리가 겹쳤다.

 

"그 강아지들이 널 선택했는걸."

"못됐어!"

 

여자 또한 그 광경이 즐거웠는지 제리의 옆에 서서 한참 웃었다. 요슈아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듣다가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서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그 아이의 뺨을 문질렀다. 바보. 요슈아가 입 모양으로 말하며 헥헥거리는 강아지의 털을 쓸어내렸다.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가 외쳤다.

 

"그 아이는 테리예요."

 

요슈아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작게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테리, 저기 양 갈래로 땋은 여자애가 내 여자친구인데. 남자친구가 이렇게 곤경에 처했는데 구해주질 않아. 나빴지."

 

카메라로 요슈아를 찍던 제리가 그제야 요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말이 퍽 사랑스럽기도 했고, 놀릴 만큼 놀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슈아와 테리가 동시에 제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주변에 다른 강아지들이 꼬리를 쫑긋대며 요슈아의 뺨과 손을 핥았다. 제리는 구해주고 싶다가도 그 광경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와 비슷한 눈빛으로 제리를 바라보며 요슈아가 말했다.

 

"응? 어떻게 생각해, 테리."

"테리한테 말 거는 거야. 나한테 말하는 거야?"

"그을—쎄."

 

요슈아가 볼을 부풀렸다가 바람을 뺐다. 제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요슈아가 겨우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강아지들은 여전히 그의 발치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리가 수건을 꺼내 요슈아의 뺨과 손을 닦아주면서 여자에게 말했다.

 

"고마웠어요, 가 볼게요."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제가 더 고맙죠. 잘 가요."

 

여자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원래의 행선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아무래도 감기에 걸릴 것 같다며 장난 같은 엄살을 부렸다.

 

"만약에 걸리면 내가 딱 붙어서 간호해 줄게."

"진짜? 그러면 꼭 걸려야겠네."

"무슨 소리야, 정말."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난 후 조금 더 걸어서 칼라오라 탑에 도착했다. 우뚝 선 칼라오라 탑의 건너편에는 로마교를 사이에 두고 메스키타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별다른 특징 없이 높이 세워진 성벽과도 같은 모양새였는데, 안에 그려진 커다란 역사화가 요슈아의 시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4.5유로짜리 입장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기에 그 가치가 꽤 커 보였다. 안쪽의 다른 구석에도 전시관이 있었다. 요슈아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재미있는 듯 제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통유리창 앞에 서서 전시물을 구경하는 그의 모습을 보느라 정작 제리는 그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감상을 물을 때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요슈아는 제리에게 물으면서도 자신이 제일 좋았던 것이 있었다며, 지나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걸음새가 어느덧 코르도바에 익숙해진 사람 같았다.

요슈아가 멈춰 선 곳은 작은 미니어처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 있는 작은 메스키타가 노란빛을 내며 수백 개의 기둥 속에서 눈을 현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리는 기둥의 줄무늬를 따라 세다가 눈이 빠질 것 같다는 생각에 시선을 뗐다. 하품하며 눈을 깜빡이자 졸음 섞인 눈물 한 방울이 나왔다. 전시 곳곳을 둘러보면서도 실상 제리는 크게 감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요슈아의 동그란 이마, 놀라움에 가득 차서 벌어지는 얇은 입술과 커다래지는 눈동자, 이방인들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목소리에 쫑긋거리는 귀 따위를 보느라 바빴던 탓이 컸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따져 보자면 요슈아가 본능적으로 감탄하는 것에 제리가 혀를 내둘렀던 적이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멋있다, 확실히 남다르다, 라는 감상은 들었음에도 그 이상으로 생각이 진전된 적은 없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 표현하려고 해도 두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아서 곤란할 때가 잦았다. 아름답다는 것에 아름답다는 말을, 좋았던 것에 좋다는 말 외에 무엇을 더 표현할 수 있을까. 제리에게는 언어를 잃은 생물로 회귀하려는 본성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어가 물살을 타고 올라가듯 끝과 처음을 연결 지으려는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언어와 동떨어지려도 그럴 수 없는 보컬리스트였다.

요슈아는 멍하니 서 있는 제리를 또 다른 미니어처 앞으로 끌어당겼다. 제리의 입에서 순간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슈아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 하면서 그건 무슨 소리야, 하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제리는 제 입술을 문지르며 발개진 볼을 애써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보여줘. 요슈아가 제일 좋았던 거. 그는 그렇게 말을 돌렸다. 우회하는 마음까지도 알아차린 듯 요슈아가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입꼬리로 그리는 호선이 제리에게는 익숙한 선이었다. 그는 제리의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자신 앞의 통유리창을 가리켰다.

 

"여기 봐."

 

제리가 요슈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사흔 옆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발을 씻는 남자의 미니어처가 있었다. 분수대는 뾰족한 육각형 형태인 데 반해 남자의 발가락은 둥글게 닳아 있었다. 미니어처 전시대 옆에는 그것이 기도 전 신자로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드리기 위한 의식 행위 중 하나라 쓰여 있었다. 그는 아주 작은 발가락의 아주 작은 흠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발을 씻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닳고 닳아 생긴 흠집은 필시 칼라오라 탑이 성벽에서 전시관으로 변해버린 이후부터 쭉 세워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요슈아는 제리에게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흠집이 날 정도로 오래도록 씻은 걸까, 생각하면 그게 존경스러워져."

"계속 한 곳만 씻는데도?"

"그 점이 딱 좋은 부분이지."

 

요슈아는 검지를 허공에 치켜들며 후후,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새삼스러운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지금의 순간도 그랬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교해서 좋다는 소리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쭉 정지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존경스럽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적어도 제리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요슈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요상스러운 확신이 들었다. 그들은 발을 씻는 사내를 뒤로하고 탑의 정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요슈아를 따라 계단을 걸어올라가던 제리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그것에 안도했다. 요슈아와는 다른 이유였다. 자신만 줄곧 어딘가에서 멈춰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은 정상에 올랐다.

탑 꼭대기에 올랐을 때는 해가 막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다섯 시 반쯤 되었다. 계단을 지나가며 마주친 다른 한 쌍의 연인은 제리와 요슈아를 붙잡고 길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어렵잖게 안내를 도왔다. 길 안내를 끝내고 나서 다시 올라가려던 때에 연인은 말했다. 여섯 시까지는 꼭 보다 가라고. 그러면 풍경이 참 좋을 것이라고. 그들은 감사를 전했다. 조언대로 할 생각이었다.

탑 꼭대기에서는 다녀왔던 곳들과 다녀올 예정인 곳들이 한눈에 보였다. 아래서는 불지 않았던 바람이 훅 쏟아졌다. 로마교와 메스키타 사원이 한눈에 보였고, 다리를 건너 중앙으로 이동하는 여러 행렬을 마주했다. 꽃의 골목길은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있어 고개를 기웃거려야 볼 수 있었다. 제리가 요슈아와 함께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요슈아가 말했다.

 

"아, 아래에 자판기 있던데. 물이라도 사 올게."

"어? 목말라?"

"으응. 네가 그럴 것 같아서. 바람도 덥고 하니까, 다녀올게."

"그러면 같이 가자. 상관없어."

 

등을 돌리는 제리를 요슈아가 한사코 말렸다. 그는 아예 어깨를 잡고 제리를 난간 근처까지 쭉 밀어 보냈다. 제리가 어어, 하고 그대로 난간 앞까지 움직였다. 어깨를 잡은 손과 가까이 한 얼굴에서 순한 시트러스 향이 났다. 그 열기 속에서도 희미하게 퍼지는 냄새에 제리가 코를 움찔거렸다. 요슈아는 제리가 멈칫거린 것을 깨닫고 기회라 생각하였는지, 잽싸게 다녀오겠다며 잘 보고 있으라 선언했다. 제리가 그의 이름을 외쳤을 때는 이미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제리는 눈썹을 아래로 찡그렸다가 펴면서 정말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방심한 틈을 타 행동하는 것은 변하질 않는 요슈아의 특징이었다. 그런 요슈아도 요슈아였지만, 제리도 제리였다. 익숙해졌을 참에는 그가 재킷을 빌려줄까 물었을 때 그 대신 팔을 활짝 벌려 달라며 부탁하고는 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요슈아가 팔을 벌렸을 때는 그것이 너무나도 순진해 보여서, 하려고 했던 행동 대신 코를 꾹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제리는 그를 놀리는 것보다 그의 품에 안겨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그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때는 두 팔을 벌린 품에 몸을 가까이 붙이고 올곧게 펴져 있는 등을 쓸어내렸다.

요슈아는 잠시 당황하며 제리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못 말린다고 속삭이면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제리는 그의 손 아래서 머리카락이 더욱 부스스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자신의 검고 흰 머리카락이 그렇게 좋았던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전도였다. 요슈아가 제리를 끌어안는 순간 요슈아의 감정도 제리에게로 옮겨 갔던 것이다. 요슈아가 제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사랑스럽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리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제 와 제리는 타국의 풍경을 한눈에 보면서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낭만을 읊는 것이 서툴렀다. 그의 시선에 비치는 풍경은 현란한 색채를 띄고 있지만 동시에 순백색으로밖에 차 있지 않았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수많은 색과 낭만을 배웠다. 그렇다면 요슈아는 제리를 통해 무엇을 전도 받았던가. 어떤 감정이 그에게로 옮겨 붙어버린 걸까. 서로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은 같아질 수 있을까. 제리는 묻고 싶었다. 너는 나를 통해서 무엇을 보고 있어?

 

"제리."

 

그때 마침 요슈아가 그를 불렀다. 제리가 난간에서 손을 뗐다. 뒤를 돌아보았다. 친숙한 얼굴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제리가 미소 짓자 요슈아도 반사적으로 따라 웃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요슈아의 셔츠 깃이 바람에 날려 펄럭거렸다. 그 소리가 소라게 안쪽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한 듯도 했다. 잘 찾아보면 이 세상은 비슷한 것들뿐인데,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받을 일도 없을 터인데, 어째서 항상 그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욱죄여 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까. 제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몽롱한 감각에 취해 있었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요슈아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정도 거리는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제리는 듣고 있었다. 요란하게 뛰고 있는 요슈아의 심장 박동을. 어쩌면 자신의 것도 저렇게 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생각하면서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요슈아의 심장 쪽에 대었다. 요슈아가 잠시 움찔거렸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리는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을 가만히 느꼈다. 이윽고 고민했다. 잠시 후 머리를 기댔다. 닿을 수 있는 곳곳마다 그의 박동이 전해졌다. 흉내 낼 수 없는 진동이었다. 확실하게 살아있는 그 박자를 손으로 기억했다. 기억을 안에 담듯 쓸어내렸다. 그것은 꽤 기분 좋은 감각이라 제리는 오래도록 취해 있고 싶다고 느꼈다. 머리를 기대었다. 요슈아는 별다른 말 없이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질문으로 말을 이었다.

 

"위에서 보는 풍경은 뭔가 좀 달랐어?"

 

질문이 공중으로 부유하더니 제리의 귀 바로 옆에 멈췄다. 묻는 어투는 아주 가벼웠지만 질문 자체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제리는 대답하기 전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요슈아의 심장이 뛰는 박자에 맞추어서. 그가 눈을 깜빡거렸다.

 

"응……. 엄청 다르던데. 아래에서 보는 느낌이랑 많이 차이 나더라."

 

요슈아가 질문을 더했다. 더 작은 목소리로.

 

"헤에,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

 

제리가 팔짱을 꼈다. 손끝으로 팔뚝을 꾹꾹 눌렀다. 자국이 희미하게 피부에 남았다. 금방 사라질 흔적이지만 기억 속에서 똑같은 느낌을 떠올릴 만큼 선명한 것이었다.

 

"그러게. 말로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려나. 나는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니까, 두루뭉술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걸."

"괜찮아, 그편이 좋아. 아니면……. 그래. 이런 방식은 어때?"

 

요슈아가 제리의 두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떼어냈다. 몸을 난간 쪽으로 돌렸다. 제리 또한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가 본 것은 바람이었다. 정확히는 바람에 흔들려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켜질락 말락 했다. 구름은 제 모습을 감추면서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두 사람을 감싸는 공기는 점점 더 쌀쌀해져 갔다. 여름의 끄트머리는 그랬다. 조용하지만 어쩐지 차갑고 무거웠다. 머지않아 모두가 떠나갈 준비를 할 것 같은 계절이었다. 요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로 난간 너머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는 성당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렴풋한 십자가 첨탑이 보였다.

 

"나, 가사를 쓸 때 항상 전체보다는 부분을 관찰해서 쓰거든. 지금도 이곳 전부를 보고 있기보다는 저 성당을 쭉 보고 있었어. 아까 지나온 곳이잖아."

 

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리의 어깨를 감싸안고 마저 말했다.

 

"아래서는 그렇게 뾰족해 보였던 게, 어두워질수록 흐릿해져서 말이지.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밤이 더 상냥하게 느껴지는구나—싶은, 그런 느낌. 이런 방식이면 쉽지 않을까? 작은 부분만 보기."

"……응, 그거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제리가 한참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둑해지는 하늘은 너무 넓고 아득해서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수많은 건물은 제각각 다른 불빛을 내고 있어서 어느 곳에 시선을 두면 좋을지 모르겠다. 작은 부분, 아주 미세한 부분. 작은 손안에 잡힐 정도로 조그마한 부분. 그것을 찾느라 시선이 계속 방황했다. 우왕좌왕하던 시선이 멈춘 것은 그들이 지나온 어느 한 곳에서였다. 제리는 요슈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난간 쪽으로 가까이 붙으라는 신호였다. 요슈아가 제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약간은 아슬아슬하게, 약간은 위험하게. 난간에 상체를 기울인 채 제리는 요슈아가 했던 것처럼 어느 곳을 가리켰다. 그가 따라 보았다. 그곳은 꽃의 골목길이었다. 위에서 보니 꽃들이 점처럼 보였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 색색의 프릴들이 얽히고설킨 풍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벽을 타고 올라온 장미 넝쿨이 위에서는 작은 미로의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장미는 피어났다기보다 산뜻하게 뿌려진 듯 보였다. 사실상 어둠에 잠겨 대다수의 꽃은 모습을 감추었고 몇몇 꽃들만 선명히 보였는데, 그마저도 넝쿨 옆에 켜진 노란 등불 덕분에 보인 것이라 언뜻 보면 알알이 박힌 전구 같았다. 제리는 난간에 기댄 채 말했다.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까 저곳을 걸었을 때 있잖아.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어."

"작아지는 기분?"

"왜, 넝쿨이 거의 벽 끝까지 자라 있었잖아. 쭉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내가 어영부영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달까."

 

요슈아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너다운 감상이네,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계속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제리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의 앞머리가 잠시 눈을 찔렀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눈앞의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느꼈던 감상이 더욱 확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미적지근하게 울렁거렸다. 그것이 좋은 건지 아무것도 아닌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와서 내려다보니까, 위에서는 나도 넝쿨도 꽃도 전부 작고 작구나, 점처럼 보이는구나. 나만 어영부영 서 있는 건 아니네, 다행인걸. 이런 느낌을 받았어."

 

말을 마치고 제리는 요슈아를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둠에 가려져 표정이 보일락말락 했다.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그 눈 안에 비치는 요슈아 자기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똑같이 난간에 기대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서 큰 웃음이 터져 나온 건 그로부터 몇 초 후였다. 요슈아는 특유의 경쾌하고 마른 웃음소리를 내면서 하하, 웃었다. 제리가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요슈아는 한참 더 웃다가 갑작스럽게 제리를 껴안았다. 안는 힘이 억세었기에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제리는 요슈아, 하고 의문스러운 말투로 그를 불렀다. 그다음 한 번 더 말했다. 내 말 이상했어? 그러자 요슈아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아니. 전혀. 오히려 좋아서."

 

요슈아의 말은 어째서인지 하늘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귀가 먹먹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요슈아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는 잠시 제리를 말없이 보았다. 부슬부슬한 검은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 위에 얇은 입술을 눌러 얹듯이 입 맞추었다. 몇십 분 같은 몇 초가 이어졌다. 시간은 영원을 보낼 듯하다가도 금세 미래로 넘어갔다. 입을 뗀 그가 제리를 내려다보았다. 제리는 그 표정이 무언가를 저 먼 선착장에 두고 온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요슈아에게도 전해졌을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손을 요슈아가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요슈아는 끊어졌던 말의 매듭을 다시 묶기 시작했다.

 

"네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낀다고 했을 때, 놀랐어. 나는 그 기분을 항상 느끼고 있었거든.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그걸 제리 네가 정리해 준 것만 같았거든."

"요슈아도 그런 걸 느껴?"

"응. 많이. 셀 수 없을 만큼."

"그렇구나. 요슈아도 나랑 같은 거네."

"맞아. 그래서 좋았던 거야. 어영부영 서 있는 게 나뿐만은 아니어서. 아주 높은 곳에 있는 너니까, 닿을 수 있도록 한참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난 아무래도 또 너한테 진 모양이야."

 

요슈아는 손을 놓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었다. 굳게 마음먹은 눈동자 아래로 옅게 띤 홍조가 보였다. 건드리면 더욱 빨갛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그런 제리의 감상도 알지 못한 채로 그는 말했다.

 

"너도, 나도, 여기 서 있어. 어설프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느다랬다. 둘 사이를 유영하는 공기처럼 가벼웠다. 그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일부러 엉킨 채로 내버려 둔 그 말을 떼놓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가 표정으로, 말로, 손끝의 떨림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엉성하게 수 놓은 자수. 고장났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돌아가는 태엽. 한 조각이 빈 퍼즐. 그러니까 요슈아의 입에서 뱉어진 그 말은 맞지 않는 모서리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공백이 있었다. 그는 그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적막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낯섦은 단 하나의 되물음으로 깨졌다.

 

"같이?"

 

제리가 단 하나의 말을 던짐으로써 공백에 금이 갔다. 찢겼다. 하지만 동시에 치유였다. 무너지는 것도, 뭉쳐지는 것도 아닌. 그 경계선에 있는 무언가. 어리숙한 그들에게 딱 맞는 그 중간이었다.

요슈아의 눈동자는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말을 꺼내고 삼켰다. 그러다 결국 조용히 뱉어냈다.

 

"응."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떨어진 말들과 비틀거리는 중심과 끼워 맞춘 음. 숨을 쉬고 내뱉는 소리 이외에 들리지 않는 침묵이 다시금 이어졌다. 두 사람의 실루엣은 완전히 떨어지지도, 완전히 붙지도 않은 채 근거리를 유지했다. 침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경계인지 유대인지는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답처럼 조용히 자리를 굳히다가, 훅 불어오는 바람결에 요슈아가 기침을 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둘은 멍하니 서로를 마주 보다가 쿡쿡 조심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작은 웃음이 얼마 안 가 빠르게 커졌다.

해는 기울고 하늘은 정체 모를 주홍빛으로 물들어 사방이 잔잔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탑 꼭대기에서 내려가기 직전, 요슈아는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얹었다. 동작은 빠르고 익숙했다. 그는 카메라에서 멀어지며 제리 옆으로 섰다. 차가운 공기는 숨을 쉴 때마다 그들의 호흡이 엉겨 붙게 만들었다. 브이. 요슈아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제리도 손가락을 들어 브이를 그렸다. 카메라 셔터 음이 울리기까지 몇 초의 뜸이 있었다. 그때쯤 바람이 한 번 더 강하게 불었다. 제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두 사람은 탑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를 때는 그렇게 가팔라 보였던 계단길이 내려갈 때는 한없이 친절해 보였다. 얼마나 방심했는지 제리의 손을 잡고 앞장서던 요슈아가 발을 헛디딜 정도였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돌부리도 없었는데 넘어질 뻔했다며 나름대로 웃어넘겼다. 제리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대신 택시에서 요슈아가 했던 대로 그의 뺨을 꾹 꼬집으면서 이 말썽꾸러기, 한번 말하고 말 뿐이었다.

제리는 탑 아래로 내려와 계획을 적어둔 노트를 꺼냈다. 그동안 요슈아는 백 팩의 짐을 정리하고 있기로 했다. 노트 속 계획표에는 벌써 여러 곳에 엑스 표를 그려두었다. 제리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면서 칼라오라 탑 위로도 엑스 자를 그었다. 어느새 남은 곳은 두 곳뿐이었다. 유대인 회당과 메스키타 사원이었다. 그중 거리상으로 먼저 갈 만한 곳은 메스키타 사원이었다. 현지에서 잠깐 만났던 가이드는 두 사람의 계획을 듣고 꽤 잘 짠 동선이라며 감탄을 보냈었다. 그 말에 요슈아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제리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정확히는 거의 끌어안은 것에 가까웠다. 요슈아는 그에게 스페인어로 무어라 말했는데, 제리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웃음기가 가득한 걸로 보아 또 짓궂은 말이지 않을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요슈아는 그런 것이 있다며 에둘러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이럴 때는 꼭 얄밉기도 했다. 동시에 사랑스럽기도 했고. 어느 한 감정만 우세하지 못하다는 건 싫은 듯 좋다.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가이드는 제리의 노트를 가리키며 꽃의 골목길을 이미 지나온 것 같으니, 이왕이면 유대인 회당을 마지막에 향하고 메스키타를 그전에 보는 것으로 수정하는 것이 동선상으로 편하겠다고 말했다. 제리는 군말 없이 그렇게 수정했다. 넘치는 수용성은 제리의 특기이자 자랑 중 하나였다.

메스키타. 그곳은 수많은 여행객이 코르도바를 찾는 목적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랜드마크라고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모스크'라고 하던가. 제리는 서치 중에 보았던 블로그 글의 제목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다리 건너편에서 멀찍이 보았던 풍경으로만 생각했을 때도 그것은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사원 전체가 불그스레한 홍예석과 흰 사암을 번갈아 만들어 교묘하게 짜인 상앗빛 조각 같았다. 이슬람 사원과 가톨릭 성당이 한 건물 속에 공존한다는 오묘한 조합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도착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저 추측에 불과한 어림짐작일 뿐이었다.

코르도바 기차역에서 내린 뒤 제리와 요슈아는 03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좁은 도로를 굽이굽이 지나갔다. 상점 진열장에 쌓인 먼지가 창문 너머 풍경 속으로 흩어졌다. 산 페르난도 정류장에서 하차한 두 사람은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도보 7분. 길 위의 소음과 부스러진 햇빛, 발밑에 굴러다니는 무언가가 그들의 사이로 스며들었다. 걷는 동안 두 사람은 주변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다. 뚱뚱한 고양이를 양팔에 가득 끌어안고 지나가는 중년 남성, 회색 정장에 신발 끝이 닳아 있는 남자. 그는 골목 모퉁이 근처에서 애인을 기다렸다. 손가락 끝으로 담배를 비벼대며. 그러나 애인이 나타나자마자 재빨리 담배를 꺼트렸다. 요슈아는 그 옆을 지나치며 고개를 돌렸다. 작게 기침했다. 담배 맛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제리는 이런 점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어긋난 데칼코마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둘이었다. 마치 데칼코마니를 만든 다음 어느 한 쪽의 물감을 손으로 문댄 듯했다. 제리는 흐트러진 쪽이 당연히 자신이라고 여겼다. 요슈아의 꾸밈없는 말투는 오히려 제리의 엉키고 흐트러진 생각을 도드라지게 했다. 표준이 있다면 요슈아일 것이라는, 애인 이전의 데빌즈로서의 막연한 생각이 그를 감쌌다. 제리는 요슈아의 중얼거림에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그 사람들도 뭐가 좋은지 모를 것 같아."

 

요슈아가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하늘 아래에서, 뜨거워진 공기의 틈 사이에서 계속 눈앞에 고여 있는 것들을 확인하려는 듯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그의 시선은 사원의 첨탑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관자놀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반짝였다. 제리는 요슈아의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았다. 요슈아가 말했다.

 

"어쩌면 다들 그런 걸까."

"우리 둘만 어영부영한 건 아니네."

 

제리는 아까의 대화를 복기하듯 말했다. 요슈아가 그 말에 입꼬리를 솔직하게 끌어올렸다.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녹아내린 듯한 시간이 천천히 뒤섞이며 흐르고 있었다. 노을빛이 바닥에 떨어져 나른히 퍼지고 바람 한 점 없는 공기가 두 사람의 피부를 스쳤다. 한 발자국씩, 이름 모를 것에 이끌리듯 걸었다.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는 메스키타 사원이 서 있었다. 메스키타 사원은, 그 거대한 존재는, 웅장함 이상의 무엇이었다.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억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원의 첨탑을 좇아 눈높이를 올리자 자연스레 고개가 꺾여졌다. 압도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늘 높이까지 이어진 날카로운 첨탑. 그것은 직선이었고, 날이었고, 어떠한 무결함이었다. 첨예하게 건축된 그것은 모든 부분에 제각각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직선들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첨탑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 침묵은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직선들이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존재한다고. 이렇게 아름답게, 이렇게 폭력적으로. 오랜 시간 고개를 젖혀 바라보고 있노라면, 심장에서 서서히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저릿함이 느껴졌다. 입을 다물고 바라보기만 하던 두 사람은 이내 숨을 들이쉬며 감탄을 터뜨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요슈아였다. 감탄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있지, 서바이벌에서 오로라를 봤다고 했었잖아."

"응. 그랬지."

"그때 오로라를 봤던 것하고 비슷한 기분이 들어."

"그건…… 엄청난 감상이네."

 

제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폐 속에서 공기를 훔쳐 가 버린 것처럼. 그는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들이마셔 보아도 채워지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드는 열기.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꺼끌꺼끌한 천처럼 그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대로 벗겨지지도, 떼어내지도 못 하는 껍질과도 같이.

사원은 빛났다. 돌 하나하나가, 창 하나하나가 각각의 존재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 대단히 기묘했다. 요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천장이 있을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광경이 문득 오로라를 떠올리게 했음은 이루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차갑고 깊은 북쪽의 기운과는 달랐다. 그것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타오르는 열기였다. 모든 것이 밝고, 뜨겁고, 묘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제리가 천천히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요슈아도 제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다. 제리는 잠시간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 그 목적을. 하지만 머릿속에서 끝까지 잡히지 않았다. 그때 그를 현실로 복귀시키듯 요슈아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체온은 유난히도 따뜻해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만들었다.

 

"갈까."

 

둘은 짧은 시간 어정거리며 서 있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옆 작은 데스크에서 돈을 넣었다. 동전 몇 개의 소리가 귀에 대롱대롱 메아리치듯 울렸다. 제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사원의 폐장 시간은 일곱 시였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여섯 시 반이었다.

조용했다. 거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른 오후에 보이던 수많은 여행객들은 대부분 사라진 듯했다. 대신 어느 정적이 그곳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웠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발을 맞추었지만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필요한 말이 딱히 없었고 굳이 끌어낼 이유도 없었다. 침묵이 싫지 않은 사이였다. 제리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잠시 확인하며 말했다.

 

"다 둘러봐도 시간 넉넉할 것 같지 않아?"

"응, 생각보다?"

 

요슈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런 일을 걱정하는 곳은 아니었다. 대신 한적한 적막이 둘을 반길 뿐이었다. 그것은 고요하기도 어쩐지 쓸쓸하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사원의 벽과 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들이 이곳의 진짜 주인이었을지 모른다. 본격적으로 사원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풍성하게 열매를 감싸 쥔 오렌지 나무가 시야를 채웠다. 열매는 잔뜩 매달려 있었고 이파리는 햇볕에 윤기를 띠며 마치 살아있는 듯 바스락거렸다. 나무들은 안뜰 한가운데에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그 주위를 걷자마자 묘한 무게감을 가진 달큰하면서도 날카로운 향기가 코끝을 휘감았다. 향이 콧속을 파고들 때마다 한순간 기억의 벌판으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 어디선가 맡았을 법한, 익숙하다 못해 알 수 없는 냄새. 그것은 로스앤젤레스의 냄새였다.

바깥의 태양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뜨거웠지만 안쪽은 미적지근하다 못해 서늘했다. 바닥을 스치듯 느릿하게 번지는 물 냄새가 그곳을 더더욱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사흔 덕택인 듯했다. 폭발할 듯한 더위 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가히 중독적이었다. 사원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건물은 더더욱 자신을 낱낱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방이 대리석과 석영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표면은 얼음처럼 매끈했고, 결마다 고유의 반짝임을 품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완전해 보였지만, 결정 하나하나에 미세한 금이 서려 있었다. 붉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말발굽 모양의 이중 아치가 끝없이 이어졌다. 약 850개쯤 되었던가. 정확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니 숫자는 의미가 없다. 마치 붉은 피와 하얀 뼈를 휘감아 만들어놓은 거대한 숲 같았다. 아치 사이사이마다 세워진 돌기둥은 흑요석으로 깎아낸 듯 검고 단단했다. 길쭉한 그림자들이 눈길을 잡아챘다.

제리는 한순간—더욱더 완벽하고, 완전하게—작아지는 기분에 숨을 삼켰다. 요슈아 역시 자신이 먼지만큼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돌기둥을 따라 위로 끌려갔다. 마침내 도착한 끝에는 검은 원반 모양의 샹들리에가 천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구조, 직선과 원형의 반복. 지나치게 단순해 보였지만 그 단순함은 반대로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어스름하게 깔려오는 은광의 빛은 장내를 가득 채우면서도 투명하게 사라졌고 모든 것을 조금씩 더 희뿌옇게 덮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요슈아가 그것을 다시 잡았다. 제리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얗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앞머리를 가릴 듯 말 듯 흩날렸다.

왜, 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 작아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까.

제리는 말을 삼켰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전달되는 말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내뱉지 않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었다. 제리는 그것이 지금의 순간임을 잘 알았다. 그는 말없이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유약한 미소였다. 요슈아는 그것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손에 힘을 주려던 것을 포기하고 손가락을 얽혔다. 그의 굳은살과 제리의 부드러운 살이 스쳐 지나가면서 맞닿았다. 손마디 끝이 담홍색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그것을 애써 모른척했다. 무심코 가지고 있는 속마음을 전부 내뱉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내뱉어버리는 것이 맞을지 그대로 삼켜버리는 것이 맞을지,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두 사람 모두 모르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손마디 끝에 힘을 주고 서로의 것을 문질렀다. 손가락이 굽어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제리의 시선은 어느새 요슈아의 얼굴에서 두 사람의 손끝으로 향해 있었다. 제리는 잠시 짓궂게 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얽힌 검지로 요슈아의 손등뼈를 쓸었다. 요슈아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도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리가 한 행위를 똑같이 따라 했다. 그런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제리는 역시 그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속으로 삼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손을 맞잡고 한두 마디 말장난을 섞어가며 천천히 걸었다. 둘은 발 끝이 가벼운 사람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덜컥 멈췄다. 사원의 제단 앞이었다. 중앙 제단은 온통 금빛이었다. 금색으로 도금된 조각들이, 오래된 붓질로 덧칠된 그림들이 사방에서 빛을 뿜어냈다. 벽을 따라 늘어선 성경의 장면들. 성인과 천사 조각들이 엄숙하게 제단을 감싸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다듬어진 천사의 날개를 보면서 제리는 불현듯 생각했다. 원래라면 가장 부드러워야 하는 것이 천사의 날개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고 흠잡을 데 없이 매끈했다.

제단 뒤편, 중앙에 작은 돔이 있었다. 돔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노르스름하여 금빛과 비슷하게 찬란했다. 제리는 저곳에 태양을 몰래 심어놓는다면 저런 빛이 날까, 생각하였다. 돔 안에는 성인이 모셔져 있었다. 빛이 그의 얼굴을 침착히 비추고 있었다. 빛 때문에 눈가가 반짝이고 있어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아니면, 어쩌면 성인의 조각상도 울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요슈아가 조용히 제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제리의 귓가를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요슈아가 속삭였다. 비밀처럼 말했다.

 

"누구라도 우는 걸 감출 수는 없나 봐."

 

제리는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속삭여 답했다.

 

"요슈아는 잘 감추던데. 내 앞에서만 빼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짓궂은 거야, 제리!"

"평소의 복수라고 생각해."

"정말이지, 화도 못 내는데. 알면서 그러는 거지."

 

요슈아는 이미 좁혀진 거리를 다시 넓히지 않겠다는 듯 손깍지를 풀지 않은 채 팔짱을 꼈다. 그의 움직임은 가볍고도 견고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성인의 울음 앞에서 그들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꼭 장난스럽다고 할 수 없는, 그렇다고 충분히 진지하지도 않은 어떤 애매한 웃음. 그 웃음 속에는 연인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순간이 찰나에 길드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였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이 정도 모독에는 눈을 감을 법하다. 숨길 수 없는 무덤덤한 고백 앞에서 말이다.

그늘에 반쯤 잠긴 먼지 낀 빛 아래 천사 조각상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다고 믿는 쪽이 맞겠다. 반짝이는 눈썹 밑, 돌 조각의 균열이 흘낏 그들 쪽을 향하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뒤로 젖히고 날아오를 것 같은 자세. 그런 허상이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맴돌았다. 그 속에서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견고한 두 사람이 있었다.

 

유대인 회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어둠이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노을은 멀찍이 자취를 감췄고, 거리는 뜨거웠던 햇살의 흔적을 겨우겨우 지우고 있었다. 붉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길 망설이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녁 공기는 그 틈새를 타고 스며들었다. 그들은 로마교를 따라 호텔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틈에서 좌판대를 펼친 한 상인이 요슈아의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 나란히 서서 구경을 했다. 이것도 예쁘다, 저것도 귀엽다,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옥 귀걸이 하나를 보았다. 반짝이는 옥 귀걸이가 천 조각 위에서 빛을 품고 있었다. 요슈아가 말했다.

 

"나눠서 끼면 엄—청 좋지 않을까? 게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특이해 보일 것 같고."

 

그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귀걸이에 다시 눈을 돌렸다. 한쪽만 들어올려 보았다. 뒤집어 보기도 하고 빛에 비춰 보기도 한 다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일본에는 안 팔 것 같은 디자인이긴 해."

 

그 귀걸이는 4분음표 모양이었는데, 중심이 작은 헤일로처럼 동그랗게 비어 있었다. 귀걸이의 장식 자체가 너무나 작은 크기였기 때문에 그것이 헤일로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한참 걸렸다. 그런 소소한 깨달음도 여행의 묘미라면 묘미일까. 제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소한 것들. 중요치 않은 것들. 그러나 지나치려야 지나칠 수 없어 마음을 건드리는 어떤 것들.

코르도바의 바람은 쌀쌀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숨을 밀치는 듯 뜨거웠다. 바람은 혀끝으로 스며들었다. 그 자극은 매콤하고 날카로웠다. 선들선들했지만 땅 위로 달궈진 열기가 어딘가 바람 사이에서 길을 잘못 들어버린 듯 느껴졌다. 그들은 그 더위에 익숙해져 있었다. 호텔 앞에 멈춰선 제리와 요슈아는 얼마간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잠들기 직전 요슈아가 제리의 귀에 속삭였다.

잘 자. 그리고 내일 또 봐.

 

 

"와—아! 일본이다!"

 

요슈아가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외쳤다.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공항에 퍼졌다. 활주는 이미 끝났다. 비행기는 멈췄다. 하네다 공항의 공기는 그들의 도착을 환영하듯 맑고 깨끗했다.

요슈아는 작은 손에 스페인 국기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크기도 작고 색도 선명했다. 그것을 들고 있으니 그의 손이 마치 어린아이의 손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들떠 보이는 듯한 그런 손을, 제리는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요슈아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얼굴에 적혀 있었다. 그가 입을 움직였다.

 

"나, 제리가 그때 뭘 봤길래 그렇게 놀랐는지 알 것 같아."

"응?"

"왜, 탑에서 내려가기 직전에 말이야. 사원 쪽이었나? 그쪽을 보면서 제리 눈이 엄청 커지길래, 뭘 봤는지 한참 고민했거든."

 

요슈아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았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냥 물어봤어도 좋았겠지만…… 음~ 어쩐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리고 또, 제리에 관한 건 꼭 스스로 알아내고 싶으니까."

 

요슈아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지금 확신했어. 나도 본 것 같거든. 왜냐하면, 그때도 네 손을 잡고 있었잖아."

 

제리가 숨을 들이마셨다. 제리가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깊게. 옥 귀걸이가 손안에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촉감은 제리를 지금 여기로, 바로 이곳으로 붙잡아 놓았다. 현실이라는 단어가 형태를 가지면 꼭 그 귀걸이처럼 생겼을 것 같았다. 그 붙잡음은 강제적이었지만 동시에 상냥했다. 제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을 벌렸다.

 

"……뭘 봤어?"

 

요슈아가 시선을 왼쪽으로 보냈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다시 오른쪽을 보았다. 이번에는 천천히. 시간을 곱씹듯이. 마침내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중력을."

 

Andantino
Andantino

@seasonaletter

 

 

꿈결처럼 새하얀 오선보 그 위에 그려지는 자그마한 음표들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기억을 꺼내 단둘만의 선율을 탄생시키자 하나의 음이 선을 오르는 것처럼 보폭을 맞춰 걷는 발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제목조차 정하지 않은 악보가 창조되는 순간 걸음이 엇갈리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멀어지는 낮은음과 높은음이 서로를 그리워하고 손가락이 맞물려 옆의 건반을 치는 날에는 찰나의 공존을 추억으로 새긴 채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기를 택하고 누를 때마다 동일하게 똑같은 음 똑같은 마음 똑같은 미소로 연주자에게 확신을 주는 순백색의 건반이 옆에서 존재를 알린다 제목을 정하는 장면을 마주하면 각자의 음이 덧붙어져 화음으로 회귀하는 연주로 귀결된다 햇볕에 그을려 만들어진 악보의 주인공은 단연코 너라는 것을 알아둔 채로,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조금 느리게, 첫걸음을 되새기면서 조금 느리게 흰 건반을 누른다

requited love
requited love

@sakae_Cheers

 

 

'찬란한 빛줄기 속, 무구히 숨쉬는 네 곁에서 나 또한 사랑을 지저귈 수 있기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검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의아함에 웃음이 새어나온다. 생기가 없는 인형 같은 얼굴은 언뜻 무표정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연인인 나는 그녀가 드물게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어렵지 않았다. 나와 똑 닮은 잿빛이 섞인 검은 머리카락이 우아한 절제미를 자아내어 무심코 머리카락을 쥔 손에 소리 내며 입을 맞췄다. 작게 입을 벌렸으나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그녀는 이내 가만히 몸을 돌려 나와 눈도 안 마주친다. 나에게 보여주는 뒷모습 가운데 붉게 물든 귀를 발견한 나는 우리 둘뿐인데도 부끄러운지 물었다.

 

"……나는 오늘 브레챠가 앨범 화보를 찍는다 해서 일행인 내가 실수하진 않을까 모든 게 조심스러웠는데 촬영이 끝나자마자 막무가내로 옷을 갈아입혀서 놀랐어."

 

확실히 지금 눈앞의 제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가슴도 많이 파여 있고 색감도 밝아서 그녀가 고를 만한 취향은 아니었다. 바람을 담은 듯이 질감이 고운 청색 드레스는 다소 화려한 느낌이었지만 가슴팍 위로 덧댄 검은 프릴과 허리 뒤로 호선을 그리는 검은 리본이 차분한 인상을 더하여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그녀와 잘 어울렸다. 애써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직접 고른 의미가 있었다. 물론 제리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노출이 지나친 거 같아. 아무리 나랑 요슈아 밖에 없다지만 이건 좀 부끄러워."

 

고개를 홱 돌리며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마다 새까만 머리카락 위로 장식된 순백의 리본이 조금씩 흔들리는 광경은 마치 그녀의 말을 공감해주는 것처럼 와닿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걸 알고 있음에도 제리는 짙은 속눈썹을 수시로 깜빡이며 어색해한다. 나는 딴청을 피우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귀여운 건데.'

 

제리는 자신의 모습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게 얼마나 엉뚱한 소리인지도 모르고. 검은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는 불가능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란 모순적인 의미를 지닌 파랑 장미를 연상시켜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남들은 좀처럼 제리의 표정 변화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마 지금도 다른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제리가 화가 난 거라고 지레짐작할 것이다. 오직 나만이 알아보고 헤아려주는 연인의 모습은, 함께할 때마다 마찬가지로 연인의 특권이었다.

 

치마를 매만지며 초조해하는 제리를 향해 나는 속마음을 바깥으로 내보이는 대신 자그마한 귓가에 저음을 속삭여 화제를 돌리는 걸 택했다.

 

"괜찮아. 오늘은 브레챠의 화보 촬영 날이기도 하지만 단둘이서 뒤풀이를 하는 날이기도 하거든."


"……그래서 오늘 멤버들을 먼저 퇴근시킨 거야?"


"그런 셈이지. 멤버들과는 이번 헤드라이너에 발표한 두 곡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지만 아직 제리랑은 못 했으니까."

 

동그랗게 눈을 뜬 제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위로 씰룩 움직였다. 기쁘고 설렌다는 의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신없었으면서 이제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입을 보기 전부터 두 뺨이 싱그럽게 상기되어 있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런 꾸밈없는 그녀를 어째서 못 알아채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갑자기 왼쪽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영문 모를 미운 통증이 번져 갔는데 아픔은 익숙한 터라 담담히 받아들인 나는 말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얇은 허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다른 손으로 가녀린 손을 마주잡으니 프릴과 같은 검은색의 장갑 감촉이 기분 좋았다.

 

"비밀과 신록 사이로 부는 바람의 네 노래 감상을 듣고 싶어."

 

두 노래 모두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 제리한테 먼저 들려주었다. 애초부터 제리와 함께한 나날을 그리며 쓴 인생이고 사랑이었다. 내 마음을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자 진심은 겁쟁이인 나로서 노래뿐이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내뱉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밀의 가사 중 요슈아는 나와의 관계를 작은 거짓의 조각으로 인해 바람 속 깊이 현혹되어 함께 헤매인다고 적었잖아. 그런데 나는 거기서 길을 잃어 원망하기보다는 요슈아와 같이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째서?"

 

마음을 굳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까지 자신이 한심해서, 과거 때문에 정상적인 일상을 보낼 수 없다고 제 탓을 돌리며 제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후회가 이따금 나를 괴롭혔는데…… 도리어 제리는 나와의 관계를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깜깜한 칠흑 위로 투명한 초점이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비밀의 제목과 가사처럼 우리에겐 함께 떠안은 비밀이 있어. 하지만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서로가 사랑이 뭔지도 몰라서 그런 거잖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

"그리고…… 우리가 깊은 바람 속에서 헤맨 덕에 신록이 반짝이는 바람의 곁에 닿을 수 있던 거니까 괜찮아. 요슈아가 나 말고 필요없다는 독백에서 기꺼이 그래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들었어."

 

수줍은 듯이 고운 미소를 머금은 제리의 눈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고개를 돌렸다가는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열기를 금세 들키고 말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내 마음을 들쑤시는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달콤한 감각으로 나도 모르게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자 애틋한 온기가 천천히 가슴 쪽으로 퍼져간다. 이 넘쳐흐르는 연심을 옮겼으면 하여, 나는 충동적으로 허리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얼굴의 각도를 틀어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달뜬 숨을 들이키는 서로의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리고 나는 머지않아 고백할 진심을 고이 삼켰다.

 

'응…… 훗날 함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할게. 사랑해. 제리.'

Gravitational Acceleration 1.625
Gravitational Acceleration 1.625

@fyodornohime

 

 

제리에게 지구는 차라리 무중력 상태에 가까웠다. 교실에 앉아 만유인력의 공식을 받아적으면서도 열여섯 제리는 도저히 중력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다. 질량을 가진 물체들 사이에 반드시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교과서의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었다. 햇볕이 유난히 희던 한낮, 선생님의 목소리가 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리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새 몇 마리가 눈이 시리도록 파란 산 호세의 하늘을 일제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보란 듯이 중력을 거슬렀다. 그러다 두 날개가 지치면 다시금 저들을 끌어당기는 지구의 양팔에 이끌려 지상으로 돌아왔다. 제리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허나 새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새였다면 한 번 날아오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하염없이 날아가기만 하는 풍선처럼. 이곳에 나를 끌어당기는 힘 같은 것은 없어. 깊은 외로움의 고해 같은 문장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녕 만유인력이 실존한다면 모든 것은 단지 자신의 문제이리라. 질량이 없는 영혼. 질량이 없는 마음. 정확히는 모든 질량을 지구가 끌어당길 수 없을 만큼 머나먼 달에 두고 와 버린 사람처럼 발끝이 하염없이 가벼웠다. 생각이 이만큼 다다랐을 때 제리는 또 한 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리는 언제나 달을 그리워하는 사람 같았다.

 

요슈아는 지구의 중력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이 끝내는 살점에 흠집을 내고 피를 보였다. 그의 창백한 손목에는 언제나 두어 개의 혐오와 대여섯 개의 강박이 자리해 있었다. 흉터는 좀처럼 지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멈출 수 없었다. 사랑하는 것들의 무게에 짓눌리는 일은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웠다. 요슈아는 거울에 비친 자잘한 상처들을 마주할 때마다 아주 노후한 조각상이 된 기분을 느꼈다. 갈라진 틈으로 부스러기를 쏟으며 깨어질 듯 말 듯 위태한 석고상. 위태로움을 들킨다면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오랜 두려움이었다. 그는 금이 간 손목을 억지로 여밀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 이따금씩 해방을 바라기도 했다. 허나 그에게 자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길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꺼이 나침반이 되어 줄 별이 오래도록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 살기엔 부적격한 두 사람이 지구를 벗어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제리의 선택지에는 언제나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 있었고, 때때로 높다란 건물 위에서 아득한 아스팔트 바닥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습관도 여기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제리가 처음으로 까마득한 바닥을 내려다보지 않은 날, 눈앞의 달을 보고 어떠한 영감을 얻은 듯이 그는 읊조렸다. 밤의 천체를 닮은 은색 눈동자 두 쌍이 맞물리고 있었다. 요슈아, 우리가 이곳의 중력을 견딜 수 없다면……. 제리는 말끝을 흐렸지만 요슈아는 미완의 문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감감히 웃으며 화답했다. 알고 있어. 달의 중력은 지구의 육 분의 일이지? 쏟아지는 달빛처럼 마침내 제리의 낯에도 미소가 번졌다. 응. 달에서라도 좋으니, 같이 살아가는 거야. 두 사람의 계획에 우주선 따위는 필요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망설임 없이 눈앞의 달을 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리탄
나폴리탄

@ghostinkansai

 

 

아가씨, 그 너머로 가지 말아요. 양의 노래를 들으면 미쳐버린답니다. 이 너머에는 인간을 현혹하는 노래를 부르는 양의 무리가 있습니다. 아가씨의 걸음이 그리로 닿아서 좋을 일이 없어요. 저 양의 무리는 죽음을 먹고 자랍니다. 죽음을 거듭할 수록 양의 이름은 이 대지에 널리 퍼지겠지요.

 

아가씨는 어찌해서 그 초석이 되려 하나요

아가씨는 어째서 그 유명遺命을 따르시나요

 

 

소년의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었고, 소녀는 그런 그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소녀에게는 아주 깊은 죄와 깊은 슬픔이 하나 있었다. 죄의 이름은 동경이고, 슬픔의 이름은 숙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커다란 인간 외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런 것도 지닐 수 없었다. 그 무소유의 끝에 그녀는 결국…….

 

안긴 품은 서늘하고 또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그 멈추지 않고 흐르는 마음도 동경하였다. "나는 당신처럼 되고만 싶어요." 따위의 말을 지껄이려던 입은 어느새 양의 말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 양은 슬플 정도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에 대해서 모두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런 그의 시선에서 그러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양의 노래는 '동류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견지하고 있어서, 그녀를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입 안에 자라는 마음을 수확하기로 하였다. 낫으로,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키스를 통해서일지도 몰랐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주문처럼 어떠한 말을 속삭이게 되었다. "나는 당신처럼 네 발로 걷고, 당신처럼 노래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말들은 입 속에서 자라 새카만 모양을 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양의 노래는 결국 사람의 노래가 될 수 없었다. 양의 노래는 결국 사람을 죽여버릴 노래다. 양은 사실 두 발로 걸으며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를 두려워하고 또 주저한다. 악귀를 물리친다는 사람들의 걱정과 마음 그리고 바람을 아주 오래간 들은 그녀는 결국 자신이 동류가 되려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오래 가지 않아 실천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실천이 빠른 것이 장점이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그랬다. 죽고 싶지 않았던 마음은 죽음의 노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어, 염원의 끝과 아주 끝에서. 그에게 자신도 울음을 배우고자 하는 시선을 아주 애달프게 보내면서, 처절하고, 또 아주 조용하게.

 

네 발로 걷게 될 수 있게 된 소녀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몸은 차갑게 식었고, 그 땅에서는 또 검은 사과나무가 일어날 터였다. 그것을, 악마의 동포는 모두 먹어 치웠다.

양떼의 악마 羊の群れの悪魔
양떼의 악마 羊の群れの悪魔

@ghostinkansai

 

 

그것은 어느 날 양의 모습을 하고 다가왔다. 그것의 동포들이 소녀에게 말을 걸기로 결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발과 두 다리를 가지고서,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다닌다. 그러고 나서 끔찍할 정도로 슬픈 이야기를 지껄이기 시작한다. '너는 나와 하나가 될 수 없어.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면 너는 죽음을 택해야만 해.' 선택지가 없는 인간은 결국 내려쳐지는 칼날에 목을 들이민다. 그 목이 굴러떨어질 때 악마는 자신들의 동포에게 먹일 수 있게 된 사과 한 알을 얻게 된다. 사람 한 명이 사과 하나가 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살고만 있었다. 그들의 검은 입 속에서는, 소녀의 비명을 먹고 자라는 사과나무가 있다고들 한다. 양은 사람을 동경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피와 살과 뼈로 만들어진 뿔.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몸부림친다. 인간의 몸부림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춘다.

불면증에 걸린 현재와 사이클롭스
불면증에 걸린 현재와 사이클롭스

@juststayus

 

 

식사시간을 기다리는 개의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정기적으로, 요일은 정해두지 않은 채 열쇠를 꽂고 돌리는 소리가 나면 요슈아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나 왔어, 하고 반갑도록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슈아는 제대로 '응'이라고 답해 주고 싶었지만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잿더미를 씹어 삼킨 후에 내뱉은 찝찝한 신음뿐이라 그저 갈라진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불을 다 꺼둔 거실 안 소파 위에 누워, 팔로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아주 미세한 햇빛마저 차단하려는 듯 팔꿈치로 강하게 눈두덩이를 짓누르면서. 오지도 않는 잠을 애써 청해보려고 하는 미련한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게 보였다. 요슈아는 자신의 두 눈을 덮은 팔의 위치를 조정해서 손가락 틈새를 벌렸다. 흐리멍덩하게 검은 거실이 점점 구석구석 쌓인 먼지까지 보이는 변화에는 구역질이 났으므로……. 그가 굽은 등을 펴면서 소파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현관 복도의 모퉁이를 지나 제리가 거실로 모습을 드러내 그가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리는 카펫 위로 발가락을 말았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요슈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떨어지는 길을 따라갔다. 따라가고 따라가며 시선이 움직인 끝자락에는 어둠 속에서 형광으로 빛나는 노란색 홍채가 보였다. 어둠이 드리운 바닷가의 등대처럼, 그것은 어찌나 밝은지 거실을 포함해 온 집안을 덮은 그림자를 뚫고 선이 가느다란 이목구비를 비추었다. 아니 어쩌면, 어두웠기에 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불, 또 다 꺼두고 있었구나."

 

제리의 어조는 평이했다. 그에게 요슈아를 책잡으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요슈아는 미간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거동으로 똑바로 앉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어찌나 끔찍한가. 실이 없는 쿠션 사이로 스며드는 습기에 오른손 손등이 욱신거렸다. 제리가 도착하기 전 탁상 스탠드를 밀쳤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40달러였던가, 4달러였던가? 아니…… 4천 엔이지. 그렇지. 여긴, LA가 아니지. 그는 생각하면서 중얼거리듯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미안. 너무 밝아서…… 다음부터는 네가 올 때 맞춰서라도 꼭 켜고 있을게."

 

그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발밑 주변에 흩어진 채로 널브러진 갖가지 오선보와 불이 깜빡거리는 기기들을 옆으로 슬쩍 밀었다. 혼자 있었다면 그러한 조심스러움마저도 없었을 테지만, 제리가 있으니 그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짐승 본연의 모습은, 요슈아가 그토록 싫어하는 멍청한 이들과 퍽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실패한 무명 아티스트 같지 않은가. 정작 최근 브레이브 차일드의 주가는 최고치를 달리고 있고, 판다 사장은 새로 뽑은 이사진 한 명에게 시달려 예전처럼 폭정 수준의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어, 지금만큼 그가 걸어 온 음악의 길에서 좋은 순간이 따로 없을 텐데. 그런 요슈아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이 제리가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요슈아가 불편하다면 이렇게 해 둬. 이제 나도 익숙한걸."

 

제리는 검은 그림자 아래 파묻힌 깨진 유리 조각들을 모른 척해야 할는지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가방에서 소독약과 밴드, 그다음으로 가지고 온 혈액 팩들을 꺼냈다. 그곳에는 돼지 피, 사슴 피, 병원의 보관소에서 몰래 훔쳐 온 O형 혈액 팩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가죽 가방의 지퍼를 열기도 전부터 공기 중에 흐르던 쇳내가, 요슈아에게 있어선 마치 진수성찬을 대비하라는 듯한 신호탄의 연기처럼 맡아졌다.
몸이 반응하는 것과 별개로 요슈아는 요슈아였다. 동물이든 무엇이든 함부로 해치지 않으려 들고, 누구보다 먼저 중재하려고 나서고, 좋은 면을 우선하여 보려고 하는 사람. 그런데도 요슈아는 노란색 홍채 가운데 동공이 서서히 수축하면서 자꾸만 혈액 팩 쪽으로 시선이 가는 본능이, 원치 않게 탑재되어 움직이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소리를 간단히 섞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리, 나 정말 괜찮아, 다른 음식도."
"저번에 쓰러졌던 때 기억 안 나?"
"그건."

 

요슈아는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손으로 자신의 입을 꾹 눌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전부 괜찮다며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깊숙한 장소에 묻어두려고 최선을 다했다. 요슈아가 내비치는 모든 비자발적인 경련과 울렁이는 요동을, 비디오 셔터를 누른 뒤처럼 빠짐없이 전부 관찰해 가면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요슈아가 어떻게 여길지는 제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요슈아는 자신이 먹이를 받아먹는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자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리는 요슈아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 생각에 대해 결단코 아니라 말하고 싶었으나, 식사를 준비하는 이가 자신임을 깨닫고 못내 고개를 숙였다. 그가 힐끔거리며 시야를 옮겼다. 요슈아는 손가락 뼈마디가 튀어나올 듯한 세기로 주먹을 쥔 채 깊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이렇게 동물 피라도 마셔 두면 적어도 너도 모르는 사이에 어지럽히거나, 정신을 잃는 일도 없잖아. 게다가 나랑은 다르게 요슈아는 카메라 앞에 설 일도 너무 많은걸…….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돌발 상황은 조치하기가 너무 힘들 거고……. 응? 요슈아."

 

요슈아는 제리의 애원 섞인 부탁과 그 시선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제리의 논리에 요슈아는 어떤 반발심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명백하고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거부하고 싶었고 거절하고 싶었다. 제리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찌푸려진 미간을 짚은 손 아래로, 시야가 흐릿해진 눈동자—이상하게도 누구보다 빛나는 것과 동시에—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슈아는 이렇게 되기 이전—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자신을 심히 우습게 흉내 내는 듯한 기분으로 몸을 구부려서 낮은 탁상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 안에서 혈액 팩을 꺼내 들었다. 밀봉된 부분을 뜯는 소리가 공사장의 콘크리트를 부수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요슈아에게 있어 착각 같은 소음은 이제 와선 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난 너한테 늘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어."

 

그는 떨리는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마지막 피를 닦아내며 신음했다.

 

"그런데, 이제…… 어떡하면 좋아?"

 

10월의 햇빛은 너무나도 따사로웠으므로, 기상 캐스터가 요슈아 같은 이들의 피부를 걱정해 주지 않고 코너를 마치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붉은 피가 입가에 묻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만의 용감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무너진 채로 제리를 쳐다보았다.
매일 좀스럽게도 반복되는 폭발, 슬픔, 체념, 자기 연민, 자책, 자괴, 한탄. 그리고 흡혈.
3개월 전부터 요슈아는 낮의 시간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되었다. 큰 문제란 가히 그러한 규모여야만 했다.

 

 

그날은 클라이맥스 레코드의 연대기에 새겨져 이사 회의실에 길이길이 값비싼 자랑거리가 될 영광스러운 날 중 하나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촬영과 밤샘에 지쳐 정규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아직 연수 중인 신입 스태프들마저도 등을 꼿꼿이 편 채 대기해야 하는 그런 프로젝트의 마지막 촬영의 날. 출연진은 물론 평소에는 촬영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스태프들의 눈빛에서마저 희미한 기대감이 보였다. 요슈아는 세트장 위에서 OK 사인을 그리면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에게선 성공하고자 하는,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건 요슈아 또한 잘 알고 있는 심정이었기에, 그는 속으로 동질감을 비롯한 여러 생각을 하면서 세트장 내부의 지정석에 앉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정체 모를 불안감이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된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촬영의 흥행 여부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생긴 불안정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날카롭고 사나운 감각이었다. 모른 척하여도, 아는 척하여도 인지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을 듯한 막막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돌려서, 반쯤 시야를 움직인 채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물컹거리거나 축축한, 내지는 딱딱한. 그 어떤 낯선 감각도 닿지 않았다. 세트장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자 하니, 촬영 감독인 Y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예요? 천장에 물이라도 새요?"
"어? 으응, 아냐.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
"아무리 우리 회사가 블랙이어도 그렇지……. 설마 물 새는 곳에서 그 돈 들여가며 촬영하겠어요? 걱정하지 마셔요."
"아하하, 고마워."

 

요슈아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며 자세히 설명하려다가 참기로 했다. 어차피 촬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구태여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한 이들 사이에서 괜한 소리를 지껄여 긴장감을 조성하기는 싫었다. 하물며 '느낌'이나 '직감' 따위를 함부로 읊었다가 현실로 옮겨져 오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그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삼켜 오는 일을 잘했다. 어렵지 않게 에둘러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채, 그는 대기실에 구비용 마이크를 두고 온 것 같다며 다녀오겠다고 전달했다. 스태프는 촬영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다녀오란 말과 함께 그를 관계자용 출입구로 들여보냈다.
이른 새벽 촬영으로 인해 그들 외에 아무도 없는 건물 내 복도는, 요슈아가 음산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만큼 서늘하였다.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걷는 요슈아의 발걸음이 복도로부터 묘한 울림을 퍼지게 했다. 그는 브레이브 차일드 전용 대기실까지 향하는 길이 이리도 멀었나 생각하며, 쭉 보지 않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단 알림 센터에 제리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저녁 뭐 할까?]

 

오래간만에 홈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장을 보러 온 것일까 추측하는 동안 요슈아의 입꼬리는 어느덧 위로 슬그머니 올라가 호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는 곧 닥칠 위험조차 모른 채로, 그때 느꼈던 직감이나 불안감을 알았음에도 눈앞의 행복이 훨씬 더 선명하였기에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로 앞에 육중한 덩치의 사내가 떡하니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요슈아가 '전골 어때'라고 전송한 바로 그 순간—케이스를 끼우지 않은 핸드폰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큰 소리가 났다.

 

"……저어, 기. 여기는 관계자용 복도인데, 혹시 길이라도 잃었어?"

 

요슈아가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양옆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뒷걸음질 한 번, 가벼운 시선 돌리기용의 말 한 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그가 핸드폰을 제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때. 모든 시야가 뒤바뀌었다.

 

"윽……?!"
"이, 이, 이…… 인."

 

사내는 마치 정신이 흐트러진 괴생명체처럼 필사적으로 요슈아의 손목을 잡고, 다섯 손가락 전부를 사용해 비틀어 놓으려고 들었다. 요슈아는 벽과 사내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로 이도 저도 못한 채로 콜록거렸다. 그때, 급작스럽게 그는 사내가 반대쪽 손으로 짓누르고 있던 견갑골 바로 아래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피부를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기형적으로 세로로 발달한 송곳니였다.
눈앞에는 쉴 틈 없이 불쏘시개가 튀고,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숨이 막혀왔다. 뇌에서부터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고통을 완화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그런데도 요슈아의 입에선 얇고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 근육이 수축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따끔거림을 겨우 참아내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어깨 위에 그 남자가 머리를 들이민 상태였다. 그가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잽싸고 빠른 사내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며, 상처 부위를 파고드는 따스한 감각에선 구리라도 씹어 삼키려는 듯한 절박한 호흡이 더불어 느껴졌다. 요슈아는 미간을 한가득 찌푸린 채, 그를 걷어차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다음 곧장 정신없어 보이는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급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가 커다란 소음과 함께 복도 구석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는지. 그 사내가 덥수룩한 수염 아래서 으르렁거리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실실 웃고 있었다. 송곳니에 의해 찢어진 셔츠와 깊은 상처에서 흐르는 검붉은 자기의 피를 바라보면서, 요슈아는 의식이 점점 옅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일이지? 안 되는데, 오늘은 정말로. 오늘은 제리와 약속이 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그가 눈을 계속해서 깜빡거렸다가 마침내 멈췄다.
마침내 그는 익숙한 천장을 마주하면서 눈을 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이 평소보다 배는 더 깔끔하게 보인다는 점 정도였다. 그가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요전 날의 일은 전부 착각이었나, 꿈이었나. 그런 허무맹랑한 믿음과 함께—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 수도 있었고—욕실 문을 열고 세면대 앞에 선 순간이었다. 삼 초 정도 거울을 바라본 그는, 멍하니 있다가 양손으로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턱 끝에 땀방울이 아롱아롱 맺혔다. 그 어느 부분도 요슈아를 요슈아라고 정의 내릴 수 있도록 똑같이 남아 있었으나 단 두 군데만이 또렷하게 달랐다. 첫째로, 그의 상처. 둘째로,

 

"……노란색?"

 

그의 두 홍채가, 마치 페인트를 엎지른 것처럼 흉흉한 노란색으로 날카로운 눈매 안쪽에서 빛나고 있었다는 점.

 

 

21세기, 날마다 공연과 스태프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공인 신분으로서 흡혈귀가 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서바이벌'이라고 불릴만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대기실에서 팬에게 받은 도시락을 꺼내 먹다가 그대로 화장실에 가서 전부 게워냈을 땐 자기도 몰랐던 게살 알레르기가 있었다며 한 시간 동안 길고 긴 변명을 쏟아부어야 했다. 제리는 주로 여러 군데에서 남는 피를 사 오거나 받아오다가, 그것도 모자라기 시작하자 고민하던 끝에 병원이 한적한 틈을 타 몇 개를 챙겨 오는 일을 반복했다. 둘 중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피를 공급받지 않으면 요슈아는 전설 속 흡혈귀처럼 점점 햇빛에 노출되는 일에 약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에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 브레이브 차일드를 판다 사장이 가만히 놔둘 리도 없었기에, 그는 인간적으로 역겨운 감각과 흡혈귀의 시점에서 풍미가 느껴지는 피를 마시면서 어느 쪽이 지금의 본인에 더 가까운지 매번 고민했다. 이따금 인간의 피를 먹고 싶을 때가 찾아오기도 해, 그는 자기 피부에 상처를 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요슈아의 피부 아래 숨겨진 혈액은 검붉은색이 아니라 그의 눈동자와 같은 선명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그 맛 또한 시멘트를 삼키는 듯이 텁텁했고, 까슬거리며 혀뿌리에서부터 욱신거리며 타들어 가는 기분을 동반했다. 결국 거진 한두 달 내내 그의 식사는 돼지 피, 사슴 피, 그도 아니면 토끼 피나 소피가 전부였다. 각각 어느 맛이 무슨 짐승의 것인지 알아맞히는 일도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목소리가 잘 안 나오니?"
"……응, 오늘 연습은, 내일로 미뤄도 될까?"
"그래, 어쩔 수 없지. 아까 들어보니까 상태가 안 좋긴 하더라, 어서 가서 푹 쉬렴."

 

유키의 마지막 말에 요슈아가 움찔거렸다. 흡혈귀가 된 이후 생긴 가장 큰 말썽은 목소리가 예전처럼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요슈아는 평소에 얇고 시원하게 음역을 높여서 단번에 스크리밍 하는 기술보다도 한 단계씩 높여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창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면서, 목구멍 안쪽이 기형적으로 붓기 시작함에 따라 그의 자랑이나 다를 바 없는 맑은 목소리가 어딘가 턱턱 막히는 듯이 의도한 것보다 한두 음역 아래에서 멈추기 시작했다. 처음 이상을 감지했을 땐 다들 실수이겠거니, 컨디션의 난조이겠거니 싶었지만, 벌써 일주일째였다.
요슈아는 화장실 안쪽에서 챙겨 온 혈액 팩의 포장을 뜯어 물었다. 고개를 들면 낡은 조명이 깜빡거리면서 요슈아를 비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편으로 천장의 녹슨 때가 껴 있는 천장 구석이 조명에 반사되어 보였다. 사실, 일전에 제리에게 어떡하면 좋겠냐며 물은 뒤로 요슈아는 단 한 번도 혈액 팩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다는 약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반항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요슈아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다른 부위들마저 조금씩 반응은 오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으면서 마른세수했다. 그날, 제리는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요슈아의 상처를 말없이 치료해 주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그리 덧붙였다.

 

"넌 네 생각만 해 줘."

하지만, 제리. 이미 난 네 생각만이 궁금해.

 

전해질 리 없는 말을 삼키며 화장실 쓰레기통에 혈액 팩을 버리고 나온 요슈아는 세면대 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은 부패하고 썩어가는 순환이 당연한 동물이며, 요슈아는 이를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하게도, 아주 불운하게도 그가 괴인과 부딪힌 탓에 인간으로 남지 못했다. 요슈아의 양손에는 거친 힘이 들어가 서글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애매한 욱신거림이 담겼다. 홀로 있는 거실에서 스탠드 하나만 켠 채 곡의 악보를 완성하고 있을 때, 제리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이유 모를 순간에, 멤버들 사이에 둘러싸여 녹음을 체크하는 그때마다 인간이 아니게 된 그는 외로움이라는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 안에서 끊임없이 헤매야 했다. 그저 주 식사가 혈액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마땅히 그래야 했나. 답을 얻고 싶어도 묻는 순간부터 돌아올 시선이 어찌나 의미심장할지 몰라서, 그저 모른 척 웃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로 나섰다. 머릿속은 이미 진작부터 망가진 듯 온갖 생각으로 빙빙 돌았고, 손바닥은 녹아내린 긴장이 식은땀으로 변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목을 쭉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놀란 채로 멈췄다. 복도 모퉁이 쪽에 제리가 서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인사하면서, 오른손에 쥔 쇼핑백의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상처 부위의 밴드 가는 것도 깜빡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겸사겸사 인사를 하러 왔다는 말이 이어졌지만, 그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겸으로 종종 찾아온 적은 잦았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원치 않았다.

 

"제리, 이런 건, 안 해 줘도 돼."
"내가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너만 안 불편하다면 난 괜찮아."

 

제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요슈아는 잠시 상상했다. 끝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실망할 제리를.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두려움은 모두의 본성이었다. 그가 '괜찮지 않아'라고 짧게 중얼거리면서 대답하자 제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제리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고, 그 안쪽은 평소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요슈아는 계속해서 부정해 오던 것에 이름을 다는 행위가 두려워 치졸하게 무시하다가, 끝끝내 자신을 붙잡는 손에 체온이 있음을 명백하게 깨닫고서야 외쳤다.

 

"왜, 왜 계속 괜찮다고 하는 거야? 제리, 아니야. 하나도 괜찮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긴장인지,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혀 끝에서는 부정의 쓴맛이 났다. 다른 누군가가 답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다가도, 약하게 웃었다.

 

"난, 이제 제리 너랑은,…… 함께 할 수가 없잖아. 그야, 이런 몸인데. 기분 나쁘지? 사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너무 외로워서, 네가 없는 나는 생각하기가 무서워서 그랬어."

 

그는 심호흡한 채, 마지막에 가서야 애원하는 눈빛으로 제리를 보았다. 이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운을 띄우면서.

 

"이제 나 같은 건 모른 척해도 돼."

 

 

해결할 방도조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서로 약한 부분을 공유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영원을 살아간다. 그저 물살에 휩쓸리듯이 텁텁한 말은 전부 삼키면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세 음절의 진심은 미루고 미루던 종결을 재촉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건네는 인사는 늘 같았다. 눈밖에 내리지 않는 깊은 산 안쪽 오두막에서 제리가 눈이 쌓인 길을 따라 걸어오며 요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침이네."

 

그는 제리가 걸어오면서 가볍게 건네는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뜬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저 먼 산맥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는 태양 빛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의 공기는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여름철 다다미방처럼 선선했고, 근처에 피워 둔 모닥불에서 나오는 희미한 나무 연기 냄새와 코끝을 스치는 묘한 젖은 이슬 향이 섞여 있었다. 맨피부로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지탱하던 그의 발밑으로, 낙엽과 잔가지로 뒤덮인 부드럽고 축축한 눈밭이 닿았다. 그는 밤에 혀를 깨물었을 때와 엇비슷하게 남아 있던 잔향에 눈살을 찌푸리며 깊게 심호흡했다. 다름이 아니라 죽은 사슴의 날카로운 뿔이 그의 발가락을 찌르듯이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해가 완전히 뜨면서 요슈아의 눈동자를 하얀빛으로 비출 만큼 선명하게 빛났다. 그는 망막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도 눈을 감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 빛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이마 위로 투명한 땀방울이 맺혔다. 슬프다고 말하기에도 낯선 어색한 감정만을 느끼며, 그는 제리의 어깨를 그러안고 뺨을 문질렀다.
추위에 얼어붙은 그의 뺨에 요슈아의 손가락이 닿자 제리는 조금 움찔했다. 뜻 모를 대비는 그도 모르게 몸을 떨도록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작은 위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요슈아의 검지 끝에서부터 미비한 진동이 피부를 타고 전달되었고,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리를 향해 등을 숙였다. 뺨 위에서 오갈 데를 모르고 머뭇거리던 그의 손은 어느새 제리의 입술 위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변덕스러운 계절로 인하여 심히 건조해져 있었고, 요슈아는 손끝을 스치는 그 건조함을 차마 제대로 마주하기조차 힘들었다.

 

"미안해."

 

요슈아의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어버려서. 정말, 미안해."

 

말머리에 잠잠하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비명처럼 쉰 목소리로 희미하게 변했다. 그는 제리가 백 번을 괜찮다고 말해도, 백 한 번을 사과해야만 했다. 설령 이 모든 일이 그가 원해서 벌어지지 않았을지언정 사과하지 않으면 변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 더욱이 강해지고 싶었던 사이였던 제리를, 어느새 그와 함께 약해지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면서부터 잠잠하던 어깨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마치 그때 그 괴인이 억지로 상처를 후벼파서, 남아 있는 요슈아의 혈액마저도 전부 삼키려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자기 팔을 굽힌 채로 당겨서 제리와 맞잡은 두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댔다. 따스한 호흡 아래 입김이 새어 나오고, 그것은 괜스레 인간성의 증명처럼 느껴져서 더욱 가파르게 숨을 쉬었다. 요슈아는 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제리와 눈을 마주쳤다. 정면에서 마주한 제리의 눈동자는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것처럼 깨끗한 네온사인처럼 노랗게 빛났다. 둥근 형체에 빛이 반사되어, 형형 색깔의 프리즘이 섞이자 그 노란빛은 더욱 이질감이 들 만큼 강렬한 색채를 뿜어냈다. 그들 주변에는 색을 품은 풍경이라고는 오로지 위로 곧게 뻗은 고동색 자작나무와 그 위를 풍성히 가린 짙푸른 잎사귀들, 그리고 그 위와 아래 전부를 덮은 눈이 전부였다. 이곳에 오자고 제안했던 제리의 표정을 보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제리를 향한 다양한 감정들 사이에서 늘 고민했었다. 우정과 향수, 동질감, 배타적인 연민, 조금의 애정, 말로 못다 할 연정과 보은의 값어치들 사이에서.

 

"요슈아. 우리 약속했잖아."

 

그러다 마지막에 항상 선택하는 단어는 형태를 변동시킨 사랑이었다. 수식을 바꿔서, 형식을 바꿔서, 맥락을 바꿔서 전달하는 사랑은 언제나 변하면서도 남아 있는 것이라 모순적인 영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제리의 말에 짐짓 움찔거리던 요슈아는 제리를 보기 위해 손을 내리다가, 그의 얇은 손목에 난 상처가 어느덧 눈발에 녹아내려 거의 희미해졌음을 깨달았다. 한쪽 가슴이 묘한 욱신거림을 동반하여 쓰라렸다. 어젯밤 억지로 삼킨 사슴의 피가 상하였는가, 그도 아니면 요슈아 본인이 버티기 힘들 만큼 상하였는가. 어느 한쪽이든 요슈아는 그날 기억만큼은 평생 부패시키지 못한 채로 간직할 것임을 알았다.

 

그날, 요슈아가 버티고 버티다 못해 제리의 품에서 무너져 고해했던 날. 그는 자신이 머저리가 된 듯한 기분에 자조하며 마른 웃음을 토했다. 이래서야 제리의 옆에는 떳떳하게 설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면서, 갖가지 망념에 사로잡힌 채 그의 옷자락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가 그러는 동안에 제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흘러들어오는 부정적인 예감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요슈아의 어깨 바로 아래를 약하게 잡았다.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것은 제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 그러한 것은…… 어떤 방정식이나 공식을 통해, 입증을 통한 것보다 더욱 간결한 본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요슈아가 힘겹게 내뱉은 '외로워지기 싫다'라는 감정은 해결해 줄 수 있을 듯했다.
제리는 고민 끝에 혀를 입천장 위에 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고통을 삼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제리는 가방을 열어젖히고 뒤적거리다가, 코팅된 용지 하나를 찾았다. 칼날만큼이나 날카롭게 코팅된 용지 하나는 제대로 베이면 깊은 상처가 날 것 같았다. 용지를 든 제리의 오른손은 척 보기에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거나 힘을 주어서 내려치면 그대로 힘없이 떨어트릴 미래가 선했다. 그런데도 부득불 왼쪽 손으로 떨리는 손목까지 지탱해가며 놓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요슈아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 자신의 마음보다도 그를 소중히 하고자 하는 보은이 훨씬 절실했기 때문에.
요슈아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제리는 결국 일을 저질렀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부위 위로 한 번 더 선이 그려졌다. 이번엔 더 깊었다. 몇 날 며칠을 굶어 온 요슈아에게 있어 그 향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좌절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훅 맡아지는 냄새에 고개를 들고 제리 쪽을 급하게 돌아보았다. 제리는 식은땀을 이마에서부터 턱 끝까지 흘린 채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급박하게 눈을 부릅뜬 그가 제리를 향해 소리쳤다가, 입 근처로 훅 다가온 잔향에 호흡을 삼켰다. 제리가 일부러 그에게 다친 팔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오갈 데 없는 시선을 방랑하도록 놔둔 채 자신의 건조한 두 손으로 제리의 팔을 지혈하기 위해 쥐었다. 사방이 붉었다. 요슈아는 노란 눈으로 보는 붉은 세상이, 자신이 살던 세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제리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잃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요슈아의 팔뚝을 왼손으로 쓸어내리며—혹은 거의 그러안으며—답했다.

 

"……네가 외롭지 않아야 나도 외롭지 않아. 알잖아, 요슈아."

 

다음으로 올 요슈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입이 벌어진 사이 제리가 눈을 꾹 감은 채로 그의 송곳니 사이에 자기 팔을 들이밀었다. 요슈아의 의지와는 별개로 신경과 이어진 송곳니는 마치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양 피의 잔향을 감지하자마자 곧장 움직였다. 신경이 지나가는 혈관에 송곳니가 미약하게 박히는 순간부터 제리는 온몸의 근육이 한계까지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변화가 그대로 느껴졌다. 요슈아가 느꼈던 감각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겠구나, 정말로 아팠겠구나. 말로 전할 수 없는 공감을 애써 눈빛으로 전해 보기 위해, 그는 요슈아의 팔뚝을 잡은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문지르면서 요슈아가 제 얼굴을 쳐다보도록 했다. 불과 몇십 초도 되지 않는 짧은 흡혈이었기에 요슈아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본 순간엔 이미 송곳니가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제리의 피를 삼키지 않고 뱉어냈다. 옆으로 젖혀진 고개 아래서 피와 섞인 기침을 토했다. 콜록대는 요슈아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는 다른 것은 신경 쓰지도 못한 채, 급하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른팔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을 보며 주저앉은 상태였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가만히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요슈아는 그 두 가지 모두 정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제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면해 있다가 깨어난 산짐승처럼 미약한 정신을 연결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변화한 몸에 맞추어 감각을 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였다. 요슈아는 흡혈귀가 된 몸을 돌려놓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읽었던 수많은 고서 중 한 책에서 보았던 구절을 떠올려냈다. 그 문장은 끔찍이도 들어맞았다.
저주는 종속되고, 이어지고, 연결된다. 그것이 타당한 법칙.
두 가지 색이 섞여 묶여 있었던 머리카락이 어느덧 풀려서 바닥을 덮을 듯이 흘러내렸다. 어두운 밤을 볼 때면 늘 생각했던 잔잔한 불빛.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지도, 가슴 아플 정도로 어둡지도 않은 그 사이에서 제리의 눈동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란색 홍채로 변해, 입술 끝에 본능을 품고 다시 태어난 것이 명실상부했다.

 

"……제리! 아, 내, 내가 무슨……? 너, 너 지금!"

 

요슈아는 파리해진 입술을 물어뜯으면서, 급하게 정신을 차린 채 몸을 일으켜 제리를 부축했다. 손끝 하나까지도 떨려 온전히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요슈아는 제리를 품에 안은 채 계속해서 형체가 뭉개진 말을 뱉었다. 이건 전부 자기 탓이라고, 나 때문에 이리된 것이라고. 그러나 정작 제리는 요슈아와 자기 팔을 몇 번 멍한 눈으로 번갈아보더니, 피가 묻은 손으로 붉게 물든 눈두덩이를 꾹 문질렀다. 볼 위로 젖은 피가 묻었다. 요슈아는 제리가 자신을 보자마자 사과부터 담으려 크게 입을 벌렸지만, 제리는 약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을 품에 안은 요슈아의 팔을 잡고 울 듯이 웃었다. 목소리가 잠겨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마음이 분명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훗날 멀고 먼 날, 요슈아를 아끼고 또 그 본인이 아끼는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게 되어 결국 그 혼자 남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미안해야 할 건 나야, 요슈아. ……네가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요슈아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빛나는 인물이니,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와 계속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혼자만의 이별을 반복하는 일이 쉽다는 뜻은 아니리라. 만약 요슈아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래서 모두가 떠나가 홀로 남겨지는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면 그는 정말로 외롭게 되지 않을까.

 

"네 상냥함을, 네 노력을, 무시해버렸어. 정말 미안해."

 

아니, 어떤 것들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 앞으로 있을 요슈아 몫의 사과까지 전부 내가 할 테니까."

 

그게 틀리든 맞든 적어도 더 낫게 살아가고 싶어 힘을 주고 휘둘렀던 그 수많은 칼날이,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정말로 죽고 싶은 나머지 휘두르는 것이 될까 봐. 그 가정이 두려워 제리는 언제나 떨었다. 그러니 응당 이기적이라 질타받아야 할 사람은 본인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슈아의 눈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눈물을 삼킨 채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표정을 지으면서. 상대와의 약속으로 쓰라린 고통을 문지르면서. 다가올 내일의 아침 햇빛이 지금보다는 덜 강하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부탁으로 내뱉었다.

 

"부탁이야, 그런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요슈아는 제리가 건넨 부탁을 언제나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로 머물러 있었다.

 

 

곁에 있는데도 이전처럼 우스갯소리로 영원을 약속하는 일도 힘들어졌다. 이 순간에 상대만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떳떳하게 서 있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럽게 느껴졌기에, 그러다가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과 마주치면,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낯부끄러워졌기에. 요슈아는 제리와 눈이 마주치자 한없이 둥근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짓고, 젖은 눈을 감았다. 제리는 그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힘겹게 정면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발밑에 잠든 수많은 짐승과 그 속에 같이 잠든 쇠 비린내 나는 핏물. 하물며 발가락 틈새 사이사이에 머문 눈송이에도 시선을 돌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모든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요슈아는 그런 제리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노란 눈과 마주치자 그 말마저도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면서, 시큰거리는 눈물을 닦고 중얼거렸다.

 

"……응, 눈부시다."

 

일출 이십 분 전의 아침이었다.

세트프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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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inkansai

 

 

비밀의 밤을 지새운 마음

그림자처럼 붙는 내 숨

인생의 공허함을 여전히 느끼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담아본 문구입니다.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그녀의 숨은 역시나 비밀의 밤을 넘어서 존재하겠지요. 그 숨을 바라봐 주는 것은, 어딘가의 뒷면을 보고 있는 소년입니다.

 

반짝이는 별 그 너머로

차가운 숨을 새겨준 너

그리고 그녀의 삶에서 반짝이는 별은 소년의 존재일 거예요. 괴로운 순간마다 숨을 새겨준 사람은 역시 서로일 거예요. 별의 너머에는 그림자가, 그림자의 너머엔 두 사람이…….

 

셈하는 슬픔 더해지는 늪

그 모든 것을 견디더라도

그녀에게도 새겨진 상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죽음으로의 늪으로 완성되고 말아요. 그 모든 것을 견디기로 약속한 소년이 있기에, 그녀의 삶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끊어질 리도 없겠지만요.

 

넷 여덟 여섯으로 나뉜 나

모든 조각과 순간은 함께야

메트로놈의 박자는 4박, 8박, 6박 등으로 다양해요. 대표적인 것들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어진 삶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예요. 그런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숨이 어딘가에 걸려있는 기분 알고 있어? 늪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어? 너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함께 사랑하자는 말을 건넸어. 나는, 너를 영원히 찾게 될 거야. 그것은 운명과도 같아서 꼭 정해져 있는 길을 걷는 것만 같아. 거품이 언젠가 터져버리는 것과도 같은 일이야. 아주 쉽고, 아주 가볍고, 그럼에도 거듭 너의 불안을 나는 견디고 싶어 하고 있어,

 

우리가 만일 빠지게 된다면 그게 차가운 물은 아니라면 좋겠어. 따스한 곳이라면 차라리 좋겠어. 너는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지. 너는 나를 위한 사람, 그리고 너를 위한 사람이야. 그러니 부디 그 마음이 도망하지 않도록 내 곁을 꼭 지켜주었으면 해. 내가 비록 보잘것없다고 느낄지도 몰라. 너는 많은 사랑을 받지만, 그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받을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래도 말이야

나는 달을 보고도 별을 보고도 너를 꼭 생각해

 

소중한 것을 보면 너를 느껴 그리고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러니 부디 도망할 거라면 나의 세계로 와 주기를 바라 그것도 힘들다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돼 상처를 늘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어기지 않겠다는 소원을 하늘 저편으로 보낼게

 

사랑을 담아

세트프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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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inkansai

 

 

비밀의 밤 그 뒤편의

그림자와 같은 마음을

천재로 소문이 나 있지만 공허함을 가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담아보았어요. 그가 가진 비밀은 아주 깊은 것이라서, 본질의 뒤편에 있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모두가 볼 수 있지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떠오르는 달 그 뒤에

깊게 차오르는 네 눈

그리고 그런 소년의 눈에 비친 소녀는 달과도 같아요. 그러나 그 밝음의 뒤편에서 떠오르는 것만이 소녀의 본모습일 것임을 소년도 알고 있고, 그 깊은 눈을 바라보는 일 역시 소녀에게만 있을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숨겨져 있는 날들일지도 몰라요.

 

헤아리는 상처

새겨지는 선율

그럼에도 그에게는 새겨진 상처가 있습니다. 소녀가 빼앗아가고 싶을 정도로 깊고 슬픈 상처가. 그러면서도 선율이 새겨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의 진정한 마음은…….

 

너를 닮아 닿을 수 없도록

달리는 숨은 다섯 줄 위로

그리고 닿을 수 없는 것들은 점차 늘어만 갑니다. 그것은 음악으로 해방되지만, 동시에 오선지에 숨이 걸쳐져 있어요.

 

 

아주 빠르게 달리면 숨이 목에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곤 해. 물에 아주 오래간 잠겨 있어도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지. 나는, 어쩌면 그 순간에 너를 찾을지도 모르겠어. 너만이 나의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는 나의 이기심은 언제쯤 거두어질까. 그리고 너 역시 나의 이해자를 자처하는 일을 언제쯤 그만둘 수 있을까. 이 모든 연쇄가, 나에게는…….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지 않아. 너에게 그건 너무 무거운 일이니까. 이건 나만 짊어져야 하는 일이야.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말이야,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지도 몰라. 나는 조금 발걸음을 빠르게 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너는 나를 결승선에서 기다려주고 있잖아. 달이 차가운 밤이라도 함께라면 괜찮아. 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열병을 앓는 날이라도 우리는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어. 이 쉬운 사실을 왜 이토록 몰랐을까. 그리고 이리도 쉬운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멀리 돌아온 걸까.

 

우리는 너무 닮았어.

그래서일까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것도 닮아 버렸지.

나의 탓도 너의 탓도 아니야.

누구의 잘못이라고도 말하고 싶지 않아.

 

밤하늘을 바라보며 너를 떠올리는 날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내 상처를 네가 안심하고 세지 않는 날이 늘어나면 좋겠어.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잊고 다정으로 세계를 채우고 싶어.

평온한 밤
평온한 밤

@daso_somi

 


이불 밖으로 머리칼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머리칼의 출처로 보이는, 유난히 불룩한 자리 옆에 앉았다. 둥글게 모양이 잡힌 그것은 꼭 초콜릿이 들어간 마시멜로를 닮아 있었다. 그럼 제리는 초콜릿이겠네. 내부에 파묻힌 사람의 정체를 아는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오는 상상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불룩한 것은 좌우로 움직이더니 불쑥 이불을 빠져나온다.

 

"뭐하는 거야, 요슈아."
"제리 머리가 동그랗길래 보고 있었어. 어릴 적에도 이렇게 동그랬던가?"

 

어릴 적에? …모르겠네. 사람 머리는 다 동그랗지 않아? 제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는 웃는다. 글쎄, 한 번 만져볼래? 머리를 기꺼이 내밀면 반사적으로 올라간 손은 잠시 허공을 떠돈다. 손이 사뿐히 얹어지더니 형태를 따라 느리게 더듬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응, 요슈아도 동글동글한데…. 그러다 말이 끊긴다. 제리는 어느새 머리를 반쯤 쓰다듬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선을 올려 본 낯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나는 손길을 적당히 누리다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진다.

 

"제리, 계속 쓰다듬을 거야? 머리가 마음에 든다면 물론 나는 기쁘지만."
"…아, 아니! 얼른 들어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놀라서 손을 떼는 제리를 보면서 웃으면, 제리는 놀리지 말라는 듯 입을 작게 내밀면서도 이불을 들어올려 주었다. 반겨주는 손짓은 꼭 어릴 적 같다. 우리의 비밀 요새에서도 제리는 늘 내게 입구를 열어 주며 저렇게 손짓하곤 했다. 어서 와, 요슈아. 그러면 나는 기꺼이 작은 손을 맞잡고 작은 요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작은 공간도 함께라면 충분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나는 그때처럼 이불 속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옮겨 제리에게로 붙어 누웠다. 작고,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 너와 나는 어릴 적과 다르지 않은 우리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어떤 포근함이 여전히.

 

긴장이 풀리는 따스함 속에서 녹아든 초콜릿처럼 우리는 몸을 밀착하고 서로에게 기댔다.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슨함이 이불 속을 떠돌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대어 눈을 깜빡이기를 한참. 나는 문득 이불의 모난 구석에 뭉친 솜을 부드럽게 풀기 시작했다. 주무르듯이 쥐었다 펴는 손길이 눈에 띄었는지 제리가 그것을 바라보더니, 반대쪽 구석을 잡아 솜을 풀었다. 뭉친 솜이 조금씩 퍼질수록 우리의 작은 요새는 더 느슨하고 둥근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모든 게 충분히 풀어졌다고 느껴질 무렵,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눈을 마주친 우리는 조금 웃었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할 것 없이 이불을 나란히 잡아당긴다. 최선을 다해 무뎌진 마음이 머리 위를 덮으면 환한 어둠이 내린다. 우리만의 작은 밤이 온다.

 

 

…가끔 생각해…. 요슈아랑 함께라면 이렇게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비밀기지에서 지냈을 때처럼?
그때는 그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그랬지. 거기에서 과자도 먹었잖아. 부스러기를 잔뜩 흘리는 바람에 혼은 났지만.
그래도 맛있었어.
응, 나도 좋아했어.

 

과자는 주로 통에 담긴 작은 비스킷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물처럼 비밀 요새에 넣어두고 나누어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과 같이 소꿉놀이나 비밀스러운 첩보 장난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저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기만 해도 모든 게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우리만의 시간이었으니까. 그럴 때 늘 무얼 하고 있었더라. 나는 손끝을 매만지다가 제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제리.

왜 그래?
우리 손 잡을까?

갑자기?
싫어?

 

작고 둥근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제리가 잠시 몸을 움찔했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망설이는지 고개가 반대로 기울어졌다. 의아해 눈동자를 굴리면 답이 돌아온다. 요즘 손이 까칠해져서 잡으면 불편할 거야. 해답을 알게 된 나는 제리의 거부를 수긍한다.

 

그렇구나.
요슈아,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응, 그냥. 나는 제리랑 손을 잡고 싶은데 못 잡으니까 아쉬워져서.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잖아! 외치고 싶은 표정을 알아보기는 쉽다. 나는 조금 더 불쌍한 사람처럼 눈매를 내리고 제리를 바라보았다. 안 돼? 제리는 입술을 이리저리 옴싹거린다. 바라보는 시선이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리…. 시무룩하게 내려가는 내 입매. 그리고 그런 표정을 제리는 잘 견디지 못한다. 치사한 방법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소매를 조심스럽게 쥐었을 때 제리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제리의 설명대로 조금은 까칠하게 느껴지는 손끝이 손깍지에 파고든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에 느껴지는 서로 다른 체온의 감각이 좋았다. 뭉근하게 온도가 뒤섞이는 순간이면 그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밝게 웃고 만다. 제리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감는다.

 

있지, 제리.
응, 요슈아.
나는 제리가 이런 사람이라서 좋아.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사실을 설명하는 것뿐인데도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이런 게 사랑한다는 감정일 거라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제리와 있을 때는.

 

 

두근거리는 소리는 사실 선율 같아, 제리.
그래서 너랑 함께 있으면 늘 음악을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세상에서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네 곁에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너와 나이기에 서로의 심장 소리가 되어 완전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온전한 어둠이 온다.
우리는 켜놓은 등을 모두 끄고 침대에 파묻혔다. 새까만 공간에서는 서로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아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체온뿐이었다. 제리의, 약간은 불규칙한 숨소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듯했다. 나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낸다.

 

제리, 자?
아니, 아직 안 자.
언제 잘 거야?
요슈아는?
제리가 잠들면.
난 요슈아가 잠들면 자려고 했는데.

 

뭐야, 그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대어 키득거리며 웃었다. 큰일이네, 둘 다 못 자겠다. 먼저 자, 요슈아. 그렇지만 아직 졸리지 않은걸. 난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해. 상대의 손을 쥔 팔을 침대에 떨어뜨린 채로 잔잔하게 손을 흔든다. 특별한 것 없이 흘러가는 대화가 어둠을 넘어가고 있었다. 옅게 들어오는 달빛과 거리의 네온사인도 닿지 않는 자리. 평소라면 조금은 답답할 정도로 덮인 이불이 오늘은 하나도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조차 둘만의 공간처럼 소담하게 여겨진 덕이다. 나는 제리에게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면, 제리도 나를 따라 몸을 돌린다. 우리는 마침내 서로를 마주보며 누워 있다.

 

이러고 있으니까 하나도 안 보여.
그래? 나는 제리가 보이는 것 같아. 지금 눈을 내리깔고 있지?

 

그쪽에 빛이 들어와? 제리는 아마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여기도 어두워. 나는 웃는다. 제리가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분명 보지 못하겠지만.

 

마음으로 보면 볼 수 있어.
벌거벗은 왕 이야기야?
응, 하지만 이건 진짜야.
아, 지금 요슈아 웃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제리도 마음의 눈이 생긴 모양이네.

 

시시하고 즐거운 잡담이 한참 이어졌다. 유명한 동화를 처음 읽었던 때의 기억과 감상, 요즘의 생각, 일상에 대한 단상 따위가 두서없이 오가고 다시 흩어졌다. 나는 그 모든 대화를 하면서 제리의 표정을 손끝으로 훑듯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한 번씩 제리가 지을 법한 표정을 말하면 제리는 그게 제법 신기한지 목소리 끝을 올리고 제 낯을 몇 번 더듬는 것 같았다. 내 얼굴도 만져 봐도 되는데. 제리는 잠시 조용하다가 조심스럽게 손끝을 내 뺨에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느리게, 실수로라도 눈을 만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처럼 더듬기 시작했다. 약간은 까슬까슬하고 말랑한 감각이 얼굴을 가볍게 누르고 지나갔다. 간단한 문답이 오갔다. 입매를 내리고 있네. 눈은 웃고 있어? 응, 맞아. 코는 찡그리고 있고. 응, 이러니까 알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제리는 충분히 낯을 파악하더니 금방 손을 내렸다. 아쉬운 이별 끝에 우리는 다시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점차 대답이 느려지고 끝내 조용해질 때까지.

 

어둠 속이기에 더 쉬운 일들도 있다. 대화가 끊겼을 무렵에 나는 졸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팔을 제리의 몸 위로 올린 건 어느새 숨소리가 새근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즈음이었다. 으응, 올리는 동시에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잠시 들썩였으나 제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숙인 이마를 맞대면 곤히 숨을 내쉬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따스한 선율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을 음악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대답할 사람은 잠에 든 지 오래였으므로 나는 그 말을 구태여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 감상만은 계속 내 속에 내버려두고 싶었다. 꺼내지 않아 의미가 되는 말들이 있어서. 제리는 곧 몸을 조금 뒤척이더니 나를 흉내내듯 팔을 내 몸 위로 올렸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꼭 완벽한 것만 같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어둠의 순간이 밀려오고, 나는 그제야 눈을 감고 아마도 이곳에만 있을 평온을 누렸다. 수마가 온전히 나를 잠식할 때까지. 맞닿은 곳의 온기를 줄곧 상기하면서.

15번의 구시대적 로맨티시즘
15번의 구시대적 로맨티시즘

@juststayus

 

 

Chapter 1. Mom, still I fool.

 

[JRTTAXXX, 텔로디오 히어링에 접속되었습니다. 설정해 둔 기상 시각에 맞추어 전원을 가동합니다.]

 

투명한 통유리창 너머로 이른 새벽이 고개를 들고, 매일 오전 8시에 정확하게 전원이 켜지는 AI 서비스가 하나둘씩 집안을 밝혔다. 아침을 알리는 푸른 햇빛이 고층 빌딩 사이로 가뿐히 지나쳐 가는 운송 포드의 형태를 그리며, 방 안의 그림자가 차지하고 있던 영역을 침범했다. 자연이 기계를 깨우고, 기계는 다시 주인과 그 주인이 가진 다른 귀속품들을 깨웠다. 젊은 여자 한 명이 혼자 살기에 터무니없이 큰 방, 그 중앙을 차지하는 킹사이즈 침대 위 베개에 제리는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앓는 소리가 베개 안쪽으로 먹혀들어 갔다.

 

"잠 좀 자자. 다 꺼, 그냥."

[JRTTAXXX, 해당 명령은 출근에 지장이 갈 수 있으며─]

"에이, 진짜."

 

제리는 반쯤 포기하고 눌려서 벌게진 이마를 문지르면서 일어섰다. 홀로 있을 때, 남들과 부대끼고 있을 때를 확실하게 나누는 그로서는 매일 맞이하는 아침 햇살이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암막 커튼을 설치하는 계획까지 고려해 보았으니, 그것으로 제리의 심정은 말을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리가 새벽의 끝자락을 어찌 생각하든 간에, 그는 사회인이었다. 제리를 조롱하듯 벽면을 따라 움직이는 역동적인 디지털 아트워크가 짹짹거리면서 노래하는 새들을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모습을 털 하나하나까지 보여 주었다. AI 어시스턴트인 'JU'의 원한다면 자막을 영상 아래에 띄울 수 있다는 말도 들렸다. 제리는 JU에게 대답하는 대신 시시각각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맞은편 고층 빌딩 쪽 대형 디스플레이를 힐끗 보았다. 오늘도 똑같은 음악, 비슷한 음표의 행렬이 틀어졌다. 그곳은 제리가 사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큰 빌딩이자,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CPR 방송국이었다. 송신탑마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뻗어 있어 마치 타국의 관광지 같기도 했다.

제리는 허공에 오른손을 몇 번 움직여서, 이동식 테이블 위의 생수를 들이마시며 그 광경을 빤히 구경했다. 투명한 창가를 통과하고, 제리의 귓가로 음표들은 자기 몸체를 구겨 넣었다. 언젠가부터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 의미 모를 똑같은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필수적인 루틴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오늘도. 제리에 맞춰 사용자화된 조명이 느릿느릿 옅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JU가 보고 겸 질문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JRTTAXXX?]

"아니? 이 조명이 이상한 거야. 그것보다 매번 아이디 전부 부르지 말랬잖아."

[JR, 확인.]

"왜 호칭만 매번 초기화되는데…?"

 

제리는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끝으로 정적이 생기겠거니 기대한 제리의 마음을 배반하듯 JU는 다시 질문했다. [해당 조명의 구매일은 금일로부터 일주일 전입니다. 고장 여부는 JR이 직접 체크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CPR의 음악 때문인가요?] 그는 참 사소한 지점에서 질린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가령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JU, JU, JU. 아무튼 전부 이 어시스턴트가 문제인 듯했다.
사실 제리는 JU가 썩 싫지도 않았다. 그것이 없는 이상 제리가 사는 집은 단숨에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뇌리에 스치는 어떤 감각을 인정하다 못해 의미를 부여하고 명명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계속 묵묵부답으로 침묵하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제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실 소파 등받이를 막 지나칠 참에, 침실 온도 조정 디스플레이에 줄곧 자리 잡고 있던 JU는 어느새 장소를 옮겼다. 목표는 전자레인지 내부였다. JU가 마침내 모습을 감추자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는 잠시 양옆으로 주변을 살폈다.

 

"포기했나?"

 

중얼거리는 모습에서는 주인으로서의 기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지능에 기반하여 맞붙으면 제 쪽이 질 미래가 뻔히 보이는 싸움인데. 제리는 안심하며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쓸어내리고, 잠시간 깊게 자유를 만끽한 뒤 반쯤 감긴 눈으로 부엌 안쪽에 갔다. 어제 저녁 먹다 남은 토스트가 멀쩡해 보였다.

그는 뒤돌아 선반과 냉장고 내부를 살폈다. 내친김에 꼼꼼히 둘러보면서, 몇 가지 잼과 향신료, 친구들이 뭐라도 먹으라며 주고 간 선물 겸 디저트를 제외하면 보관해 둔 것도 그다지 없었다. 제리는 깊게 한숨짓고는, 금방 지워버렸다. 어차피 매일 반복되는 아침이었다. 부지런히, 든든하게. 광고가 권장하는 대로 먹으려는 욕심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유리병에 담긴 잼 종류를 훑으면서 하나를 대충 집었다. 카야 잼이었다. 뚜껑을 열고, 한쪽 면에 얼추 바른 다음 전자레인지 앞으로 갔다. 그때였다. 녀석이 말을 걸었다. 태연스럽게.

 

[JRTTAXXX, 지금 바로 텔로디오 히어링에 접속하시면.]

 

제리가 전자레인지를 열었다가 그대로 쾅 닫았다. 반사신경이나 다름없이 10번 가까이 전원 종료 버튼을 꾹꾹, 거의 난타하듯 눌러댄 그의 노력은 무색했다. 30초 동안 접시에 담긴 토스트는 360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노릇하게 데워졌고, 제리는 따뜻한 토스트와 아주 완벽한 어시스트를 수행해 준 JU를 곁에 두고서 아침을 보내야만 했다. 이 도시에 몸 담근 제리가 보내는 아침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23세기, 라이버 레코드 국가 관리국의 후원 아래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특별한 지원과 서비스가 제공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혁신 중에는 대형 광고 디스플레이 속 찬사에 의하자면, '완벽한─개인─맞춤─통합형 AI 어시스턴트'라며 현재 제리의 1순위 골칫거리도 포함되었다. 지원받을 자격은 대체로 무작위 추첨이라는 변덕스러움 아래에 정해졌으나, 선택된 이들은 집단적 익명성 속에서 서로를 추측해 냈다. 그들은 예외를 두지 않고, 전원 '감히 소시민 신분으로' 음악에 몸 담그지 않는 자들, 선율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시민들이었다. 이들 국가가 내세우고 있는─영혼이 존재하는 한,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음표로써 정점에 도달해 소멸해야 한다─이념과는 별개로 말이다.
제리는 상술한 조건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는 라이버 레코드의 수도, 말라 니트로의 끝자락에 애매하게 위치하는 회사 사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일상으로 하루하루 살아왔노라 확언할 수 있었다. TV 앞에 앉아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데에 시간 낭비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며, 삶이 지루하다며 늘어놓기에는 즐거운 순간들도 나름 적당히 존재했다. 물론, 술자리에서 큰소리쳐가며 자신이 겪어 온 화려한 여가생활을 자랑하기에도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번지르르한 물기 있는 낭만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주진 못했다.

다만 그는 종종 궁금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매일 아침 지루하게 거니는 출근길에는 언제 출발하든 늘 10분은 족히 기다려야만 하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바로 옆에는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랗고 거대한 방송국 'CPR'이 존재했는데, 그 방송국 외벽엔 광활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공중에 겹겹이 쌓여 입체적인 그래픽으로 정기적 음악 방송을 내보내고는 했다. 언제 한번 제리는 가상 들밭 장치를 켜 둔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건너가면서, 그의 정수리 위로 울려 퍼지는 토크쇼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음악 경연 대회 우승자에 대한 추측, 혹은 팝 차트 1위 가수를 겨냥한 신랄한 비평, 매일 재생하지만 도통 이름 모를 음악들이 주를 이루었다.

제리가 밟고 있는 지면 위에서는 음악이야말로 권력과 동의어다. 가진 자가 비명을 지르면 시대정신을 꿰뚫는 록이었고, 배곯은 자가 기타를 치면 공산주의 교리를 지닌 이데올로기 찬양가……. 애당초 후자의 사례는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체념이 순응으로 뒤바뀌었다는 인과라면 모를까, 그저 모두가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래를 듣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음악 청취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대중성은 기울어져 있었다. 그가 살아가면서, 정부에게 반항하며 이러한 음악은 근본부터 괴상하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겠는가. 제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음악이 송출되면 일제히 머리를 들고서 따라부르거나 홀린 듯이 멍하니 송신탑만을 바라보게 되니까. 제리 또한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거나, 혹은 불가피하게 투항한 몇 주 뒤에 CPR의 디스플레이 안에 출현해 출연진들과 똑같은 멜로디를 따라 부르면서—아니면 기쁘게 연주하면서—열의에 찬 미소를 짓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자면 속이 끊임없이 울렁거렸다. 뭔가가 크게 잘못된 기분이 들었고, 신체 내부에 들어찬 톱니바퀴, 신체를 가동하게 시키는 중심축이 고장 나서 불안정하게 삐걱거리는 듯해서.
음악이라고는 제리와 아무 인연도 없을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루는 크나큰 부분이 수차례 짓밟히고 모욕당하고 얽매이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차라리 그들의 몰상식한 이치와 반강제적으로 부여받는 삶의 원동력을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이 음악은 듣기 좋다고. 썩 들을 만도 하다고. 그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나약한 힘으로는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이번에 새롭게 당선된 T 의원의 신곡 속에는 신시사이저와 트럼펫 베이스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교묘하게 BPM을 빠르게 늘려서 엉성한 연주 실력을 덮으려는 듯했지만, 그 초라한 음색은 어찌 감출 방도가 없었다. 안 그래도 수다와 경적으로 가득 찬 교차로 거리는 매우 고지식한 록스타의 철없는 술주정에 가깝게 변했다. 그런데도 모두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그 음악을 음미하듯이 들었다. 아니면 취향이 아니라는 듯이 아예 푹 숙인 채 외면하며 걸었다.

제리는 그저 사람들의 옆모습이 전부 스쳐 지나갈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디스플레이는 다른 채널을 틀어 주었다. 어느 한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애매한 처지였다. 모든 게 확고해진 시대에서조차 위태롭게, 지푸라기가 비틀비틀 흔들리듯이.

오늘 도착한 출근길 속 횡단보도 앞에서도, 그는 언제나처럼 멍했다. 흔들리는 일이 변함없다는 말은 꽤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다마는. 평소 어깨 기장을 넘는 머리를 늘어트린 채 다니던 제리는 오늘따라 별안간 양쪽 옆머리를 잡고 한 가닥, 한 가닥 조금씩 낮게 땋았다. 두 개로 땋아서 묶은 양 갈래가 어색하기는커녕 익숙했다. 그러나 이따금 생기는 변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제리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횡단보도 쪽으로 향하면서, 늘 챙기는 오버 이어 헤드셋을 가방에서 꺼내 목에 걸쳤다. 바깥소리를 차단하는 용도일 뿐 실제로 남들처럼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이따금 JU의 자동 추천 재킹에 따라 맞춰지는 라디오 채널 속 사연 읽기 정도가 그의 청취 목록의 전부였다. 귀를 완전히 덮는 하우징, 소음들은 군중의 시선 속으로 삼켜졌다. 샛노란 형광등 불빛이 하우징 패드 가장자리에서부터 켜졌다. JU가 채널 접속을 반겼다. 이미 정해진 채로 출력되는 접속 문구였다. 제리는 수천 번도 넘게 들었을. 그다음으로 내뱉는 말은 어느 라디오, 혹은 어느 장르에 접속하겠냐는 친절한 질문이었다. 간단하게 무시했다. 그러면 저절로 잠잠해졌으므로.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6-2-2, 주파수를 확인했습니다. 채널 진입을 시도합니다.]

"뭐?"

 

신호가 초록색으로 변한 지 2분이 지났을 참,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기 시작한 제리는 난생처음으로 겪는 JU의 안내 문구를 듣자마자 삼중 교차로 지점의 중앙에서 덥썩 헤드셋을 잡고 외쳤다. 당황한 나머지 끝 음이 이상한 음 이탈로 마무리될 정도였다. AI고 뭐고 내 개인 맞춤형이라며! 왜 내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구는데!? 헤드셋 내부에선 지직거리는 전파 방해음이 제리 귓가를 간지럽혔고, 갑작스레 사방이 울렁댔다. 급한 대로 횡단보도부터 건넌 다음 해결하려던 제리의 발목을 붙잡은 이는 다름 아닌 제리 자신이었다.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가쁜 숨이 심장을 그대로 꺼낸 듯 아프게 흘러나왔다. 그를 지나쳐가는 전파 같은 군중들 사이로 그가 본능적으로 어떤 단어를 입에 올렸다. 필사적으로 도움을 외치면서, 어린아이가 손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겹게 시도했다.

 

"요,"

 

미처 못 삼킨 토스트 한 조각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쉽사리 완성되지 않는 그 순간에.

 

"──찾았다."

 

제리로서는 알지 못할 그가 말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부분은 목을 빈틈없이 조인 초커. 품이 헐렁한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나머지 눈동자보다 그 아래의 웃음기가 더 또렷해 보였다. 모든 부분을 인식하기도 잠시 그는 무릎 꿇은 제리의 손목을 단숨에 끌어당기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첨예한 눈동자 사이로 제리 자기 자신이 보였다. 초면, 그것도 전혀 다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도플갱어를 만난 것만 같다는 이상한 괴리감과 낯선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그가 '괜찮아'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가 눈을 뜬 이유는, 그가 일어날 만큼 충분히 기절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달걀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가로세로 열다섯 걸음 정도가 최대인 방 안에는 각종 녹음 장치와 노트북 한 대가 보였고, 번잡스러운 테이블 위로 대용량 간식이나 간편식도 잔뜩 쌓인 상태였다. 간단히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개인이 사용하고 있는 방임을 직감했다. 그는 적어도 불청객으로서 취급받고 있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유는 이랬다. 빗장뼈 부근까지 덮어진 두꺼운 이불과 그 아래 푹신한 매트리스. 눈동자만 왼쪽으로 굴려 확인했을 때 보이는 무방비한 등 따위. 제리를 난장판 속에서 도와주었던 사람.

제리는 그의 신체를 이루는 선들이 하나같이 얇고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어,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낯에는 여린 유약함보다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뇌리를 스치는 경적이 지금까지 안쪽을 따끔하게 찌르는데, 안심하고 몸을 맡겼던 이유는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제리가 그렇게 판단하고서 감각을 되찾으려 몸을 움직였다. 침대가 삐걱거리자 그의 시선이 제리를 향했다. 정말로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으리라 굳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한가득 기쁨과 반가움, 종잡기 어려운 감정을 모아서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정작 제리의 뇌 속에서 그는 미지수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가당키나 한 것인 가, 이런 일들이?

 

"어, 그게."

 

그는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면서, 침대 앞에 놓아둔 의자를 한 손으로 끌어와 앉았다. 기쁨, 다음으로는 걱정이 담겼다. 눈썹이 아래로 휘었다.

 

"깼구나. 몸은 많이 괜찮아졌어? 열은 안 나겠지만, 아무래도 걱정돼서."

"괜찮은 것 같아."

 

제리는 그대로 끝까지 존칭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평소 먹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섭취하는 행위나 다름없게 다가왔다. 말이 혀끝에 붙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아랫입술을 더듬으면서, 결국 남자가 말하는 방식과 같게, 간결한 반말로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광경을 자세히 보면, 문득 데자뷔를 느꼈다. 이렇게 나의 대답과 반응을 기다리면서 아낌없이 친절을 드러내던 이가 주변에 있던가. 제리가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막상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무생물까지 범위를 넓혀 JU가 생각났다. 그는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면서 계속 생각, 또 생각만을 반복하고 싶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자를 볼 때마다 떠올랐다. 제리가 JU가 필요하다고 느낀 상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 JU가 절실하게 보고 싶었다. 그 형체도 무엇도 없는 인공지능이 불쑥 튀어나와 전부 이러한 맥락과 인과에 의해 발생한 사태라고,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면 혼란스러운 감정도 수월하게 마무리될 텐데.

 

"저기, 있잖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네가 궁금한 거라면,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서 뭐든."

"너는 누구야? 여긴 어디고, 무슨 일인지 혹시 날 알아?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처음 봐. 이전에 우리가 알던 사이였다면 알려 줬으면 좋겠어."

 

처음 질문은 조금 느렸고, 두 번째 질문은 약간 빨랐다. 마지막으로 갔을 땐 거의 속사포로 물었다. 제리의 말을 들은 그는 눈을 내리깔고, 긴 소매 셔츠로 가려진 손목을 쓸어내리면서 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밝은 어조로 다른 제안을 제리에게 건넸다. 우리 이럴까. 운을 띄우는 목소리는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부드럽고 섬세했다.

 

"나도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각자 하나씩 묻고 대답해 주는 걸로. 어때?"

 

그가 검지를 들고 제리의 양쪽 눈앞에 몇 센티미터쯤 들이밀었다. 초점이 흐릿하게 잡힌 검지 너머로 고개를 기울인 낯이 제리 시야를 가득 채웠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 가르마가 나뉘는 지점에서 반대 방향으로 삐져나온 얇은 세 가닥. 그곳에 신경을 쓰다 보면 역시나 종래엔 눈이 마주치게 됐다. 이상했다. 분명 색채 없는 회색임에도, 정면을 향해 똑바로 응시하면 제리는 그 두 눈동자에서 샛노란 네온사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제리는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도 만족스럽게 응, 하고 짧게 웃었다.

 

"그러네, 음. 우선 '내가 누군지'부터인가. 널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정도?"

 

그는 그리 말하면서 손가락을 접고 웃었다. 또 아까 제리에게 보였던 그 쓸쓸한 미소였다.

 

"라고는 해도, 실제로 이렇게 소개해야 할 상황이 오니까 예상은 했지만. 조금 슬프네."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와 정반대로 양손을 가만두질 못하는 그를 보면서, 제리는 자기 자신을 장악하는 기묘한 슬픔이 마치 그의 미소를 보고 전염된 것 같았다. 손끝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옮겨붙어서 자신도 모르는 깊은 안쪽까지 작은 입자들이 들어와, 제멋대로의 '소중함'을 논하는 이 남자에게 그럴 바엔 너를 더 소중히 여기면 안 되느냐고 다그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으니까. 아니, 디스플레이에 쉽게 검색하여 재생하듯이 뇌리에 한 장면이 어른거렸다. 행하지 않은 기억이 생각과 섞여서, 제리는 어쩐지 눈가가 따가웠다. 제리의 변화를 놓칠 리 없는 남자는 급하게 제리의 팔목을 잡고서 물었다.

 

"제리!? 너 괜찮아? 역시 어디가 아픈 건가, 큰일이네. 상비약을 챙겨 두지는 않았는데…. 저기, 조금만 참아 줄 수 있어? 여기 역 근처니까. 금방 약 사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 질문 남았어."

"어? 응?"

 

희미한 조명이 켜진 방 안에서 제리는 제 키만큼 몸을 일으켜 세웠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남자의 소매를 잡았다. 우습게도 그 힘은 미약했다. 제리는 그가─심지어 어린아이라도─마음만 먹으면 쉽게 뿌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마치 수갑이 채워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눈썹을 아래로 내리는 그가 눈길을 어디에도 고정하지 못한 채 곤란한 표정만 지었다.

그는 발을 움직이지도, 제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기다렸다. 침묵이 둘 사이를 메우는지 떨어트리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요슈아는 마치 침묵의 실체를 빚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제리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래, 그 참을성과 인내심. 바로 그 인내가 그의 자세에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제리는 되려 자신이 평정심을 잃어갔다. 무어라도 쏘아붙이면 된다. 떨쳐내고 모른 척하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입 바른 거짓말로 제리를 놓아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제리가 그를 붙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제리가 기나긴 고민 끝에 굳게 붙어 있던 두 입술을 뗐다.

 

"너도 나한테 질문하고 가."

"하지만…."

 

제리는 말없이 미미한 힘으로 옷자락을 당겼다. 그는 입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민했다가, 이 또한 하지 말라는 걱정을 들었던 기억이 나 그만두었다. 정작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걱정해 준 당사자는 불안한 낯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만. 끝내 제리가 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그가 얌전히 허리를 숙여서 눈높이를 맞췄다. 이 세계에 온 그가 제리에게 묻고 싶은 가장 첫 번째 질문이자 부탁은 이미 한참 전에 정해 두었다. 말만 꺼내면 되었다. 그가 자기 소매를 잡은 제리 손을 반대쪽 손으로 잠시 떨어트렸다가, 조금이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빠르게 겹쳐 잡았다. 제리는 토닥거리는 그의 손이 따듯해 어깨에 들어간 긴장이 풀렸다. 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든 나를 믿어 줄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부탁이었다. 그런 말을 뒤로하면서 남자는 아까 다 못 밝힌 신원부터 밝히겠다며 덧붙였다.

 

"내 이름은 요슈아야."

 

이름을 말하면서 '요슈아'는 한 차례 뜸을 들였다. 마치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중대한 비밀처럼. 그는 지금까지 두 눈만 깜빡거리는 제리를 보고 그럴 만도 하다면서, 제리의 오른손을 뒤집었다. 그런 다음 자기 검지를 세워서 제리의 손바닥을 캔버스 삼아 어떤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각 문자가 형태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하며 마침내 'ヨシュア'로 마무리 지으면서 제리가 그 철자를 '요슈아'로 인식하는 순간, 제리는 자신이 알아들을 리가 없는 언어로 계속 그와 소통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그렇게 살아왔기에 의문점을 못 느꼈던 것처럼. 제리가 시험이라도 하듯 '요슈아'라고 숨죽여 발음했다. 단순한 호명 한 번에 요슈아의 몸 안쪽에서 형언 불가능한 감정이 꿈틀댔다. 그가 애써 버릇으로 자리 잡은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제리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요슈아, 하고 여러 차례 반복해 보더니 그쪽을 응시했다.

 

"역시 우리, 예전에."

 

제리가 의문을 토로하려던 순간에, 요슈아는 그 전에 보여 줄 게 있다며 제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불쑥 일어나 선 채로 등을 낮추고서 어지럽게 짐이 늘어트려진 원목 테이블 서랍 아래로 긴 팔을 넣고 휘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먼지 쌓인 스탠드가 덜컹거릴 정도로 어수선하게 움직이고서야 가까스로 찾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에 들린 오버 이어 헤드셋을 보고서 놀라 흠칫거렸다. 그것은 제리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분신을 능숙하게 서랍을 닫고, 빙그르르 돌려서 전원을 켰다. LED 패널이 빠른 속력으로 활성화되어 순식간에 번쩍였다.

 

"그건 또 어떻게?"

 

요슈아는 아무것도 들지 않아 비어 있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반쯤 눈꼬리를 접은 채로 쿡쿡 웃었다. 제리의 당혹스러운 반응을 진즉 예상했었다. 그가 당황한 이유를 근본부터 늘어놓자면 끝도 없었으나, 가타부타 서론은 전부 생략하고서라도 지금 놀란 지점은 딱 하나였다. 제리는 그 오버 이어 헤드셋에 JU를 내장하면서부터, 오직 제리와 제리 본인이 직접 승인한 이에게만 관리자 권한을 부여하도록 설정해 두었다. 제리가 기억하기에는 본인만이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슈아는 태연한 낯으로 제리 앞으로 다시금 돌아와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JU는 관리자 권한을 확인했다는 짤막한 승인 문구 다음으로 요슈아의 조작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는 요슈아의 손바닥 안에서 시시각각 패드 화면을 조정하는 JU를 보면서 입만 뻐금거렸다. 그야말로, 주인 자격을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제리는 억울했다. 요슈아는 그런 제리를 힐끔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아직 신원을 밝히는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혹은 6-2-2."

 

하우징 패드가 허무해하는 제리의 양쪽 귀를 안정적으로 덮었다. 그는 작은 백색소음이 차단되는 효과와 동시에 채널로 접속을 시도한다는 JU의 이어지는 안내 음성을 들었다. 주파수 6-2-2로 연결된다는 알림이었다. 청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 시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에 방해받고 있어, 제리는 그 소리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기 시야를 가득 채운 요슈아가, 양쪽 입꼬리에 검지를 갖다 대며 쭉 올리는 모습이 낯익었다. 기대가 커질수록 아래로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입꼬리의 가여운 표정. 그러다 기대하던 바를 이루고 나면 한없이 기뻐하며 올라가는 입꼬리. 본 적이 있다. 상상이 아니라 재현이었다. 제리를 관통하듯 요슈아가 한쪽 손을 떼고, 공중을 간지럽힐 정도로 조심스럽게 제리의 뺨에 손을 댔다. 이마가 닿을 듯한 지근거리까지 다가갔는데도 제리는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불편하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머뭇거리면서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댔다. 그는 요슈아가 나른한 숨을 뱉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숨엔 안도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제리는 멋대로 짐작했다. 요슈아가 속삭였다.

 

"난 항상 이 채널 속에 있을 거야, 따라 해 봐. 두려워하지 말고 오선보를 그리듯이."

"6, 2, 2?"

 

제리는 침묵했다.

왜 나는 네가 이렇게 차분하게 건네는 말에 안심될까.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게 되는 걸까.

 

한 번 터트리고 나면 작은 틈새 하나까지도 전부 합쳐져서 전부 나오게 되리라. 그건 비단 요슈아를 향한 마음뿐만은 아닐 거라고, 그는 짧게 쌓은 견식으로나마 확신했다. 한편으로 요슈아는 자신을 향한 제리의 눈길을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응. 잘했어. 그렇게 하면, 우린 어디 있든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라디오는 일방적이었다. 제리가 사연이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요슈아는 일방향으로 자기 이야기만을 전달해야 했고, 제리는 그가 하는 말을 일일이 섭취하면서 그의 정체를 계속 고찰해야 할 것이다. 제리에게는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하다못해 적어도 요슈아가 어째서 열망에 찬 시선으로 제리를 바라보는지, 짧은 시간 동안 제리가 질문할 때마다 쓸쓸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알려 주어야만 수지타산이 맞았다. 아니, 전부 핑계라고 해도 좋았다. 제리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요슈아의 파편을 하나라도 더 얻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 자신도 그가 느끼는 욕망이 억지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적어도 후회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지닌 채로. 요슈아가 일어서면서 슬슬 제리를 내보내려고 하자, 그는 뒤에 서서 일어나 대뜸 질문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기억해야 해? 날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으로는 부족해."

 

그러자 그는 일어난 제리를 향해 반쯤 뒤돌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기억해 줄래."

 

때마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자동 보호막이 정확한 순간에 걷혔다. 저물어가는 석양빛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흩트려 놓은 방 안으로 침투하자 요슈아 또한 노을에 감염되듯 젖어 들어갔다. 그의 표정이 역광에 의해 제리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쩐지 제리는 그가 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슈아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리 널 진심으로 애정하고 있는, 너의 *인간*적인 친구라고."



Chapter 2. Give me the Love, and, Gasoline!

 

제리는 꿈에서 깨어나도 깨지 못한 감각이 이러하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다. 그는 종일 몽롱했다. 사내에 배치된 각각의 지정석엔 터치패드 형식 모니터가 지급되었다. 조금만 가만히 있어도 근무 태만을 경고하는 기능이 장착된 모니터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불독이 침을 뚝뚝 흘리면서 매섭게 짖는 소리' 따위로. 잠결에 빠지거나 공상으로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매일 들어오는 방송국에 관한 민원 안건을 눈알이 충혈되도록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있었다. 제리나 제리의 회사에만 내려진 업무만은 아니었다. 말라니트로 내의 중소기업은 대체로 CPR 산하에 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제리가 이런 감각을 업무 도중에 느껴야 할 사유는 마땅히 없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불독 세 마리가 한꺼번에 짖으면서, 소방차와 경찰차, 구급차까지 모조리 불러낸 다음 온갖 종류의 밴드와 고대에 멸종한 짐승이 울부짖는 괴성을 풀 데시벨로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목을 뒤로 젖힌 채 한 남자만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직장이었다. 주변 직장 동료들마저 그가 제발 스크린을 터치하기를 바라면서 힐끔거렸다. 보다 못한 옆 옆자리, 표독스럽기로 사내에 소문이 깔린 S가 혀를 차며 제리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제리 씨?"

 

제리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제리 씨!"

"……라디오 자주 들으세요?"

 

S가 돌발 질문에 말문이 막혔고, 타 직원들은 평소 평가가 썩 좋지 않았던 S가 물먹었다는 점에만 집중했다. 정작 질문자인 제리는 S에게 정말로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서 질문했는데, 답변은커녕 미쳤냐는 말과 함께 반강제적으로 점심시간 이전에 반차를 쓰게 되었다. 그는 한적한 거리를 거닐면서 평일 이른 오후 시간대는 이런 건가, 하고 시시한 감상을 품었다. 그 시간대에 귀가하는 일도 처음이기는 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갑작스레 기진맥진해져 로퍼도 벗지 않은 채로 현관 신발장과 복도를 구분하는 턱에 털썩 주저앉아 상념에 빠졌다. 두 무릎을 굽혀서 그 사이로 턱을 꾹 눌렀다. 사방이 가로막히도록 만들어낸 작은 공간 속, 작게 뱉어낸 한숨은 따듯해서 우습게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제리가 요슈아에게 헤드셋을 돌려받은 그날, 그는 제리의 품 안에 요청한 적도 없는 물품들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속사포로 설명하며 안겨 주었다.

이건 네가 좋아하는 과자고, 이 재킷은 너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서 샀던 거니까 입고 가고, 저건 혹시 모르니까 호신용 스프레이로 들고 가고, 아! 이건 우리 둘이 같이 골랐던 건데 보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재촉하려고 주는 용도는 절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줄게, 그리고 또 어쩌고저쩌고….

구구절절한 물품 목록 늘어놓기 끝에, 제리 양손 안에 빈틈이 없어 더는 들고 갈 물건이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는 만족스러워하면서 제리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물어보고 싶었던 그였지만, 바깥에 이미 세워져 있던 차 한 대가 그의 이목을 확 낚아챘다. 번호판이 부착되어 있지 않은 낡은 택시였다. 제리는 탑승하면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툭툭 두드리고 있는 흑발의 남성은 척 보기에도 요슈아와 또래일 만큼 젊었다. 또한 그 옆 조수석에도 자홍색도 갈색도 아닌 그 어중간한 밝은 머리칼의 젊은 남성이 한 명 더 탑승한 채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의도적으로 제리의 시선을 피했다. 제리의 품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물품들이 제리의 몸을 건드리자, 그는 가까스로 물어봐야 할 질문이 산더미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는 이미 닫힌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는 요슈아에게 급히 외쳤다. 이 사람들은 누구고, 도대체 *인간*적이라는 건 무슨 의미냐고.

하지만 요슈아는 '내 친구들이니까, 제리에게도 친구이려나' 같은 엉뚱한 대답을 끝으로 잠자코 고요해졌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요슈아를 바라보면서 제리는 착잡한 마음을 이루 감추지 못하고, 애꿎은 안전벨트만 손톱으로 갉작거렸다. 거짓말과 침묵 중에 더 무거운 추는 어느 쪽에 매달아야 할까. 제리는 문득 그 무게를 쟀다.

 

"언제, 어디 있든 만날 수 있다고 했지."

 

제리는 가벼운 짐을 검은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는 제리가 혹여 그 숫자를 잊을까 봐 여러 번 복기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JU는 그가 현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집 안에 있는 가구 중 디스플레이가 있는 어디든 그 존재를 옮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리가 JU를 소리 높여 불렀다. 침실 방향에서 짧고 경쾌한 버튼음이 울렸다. 제리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JU는 벽면 디스플레이에 찡그린 표정—이라 하기엔 그저 제리가 아스키아트를 보고 적당히 추정했을—이 떠 있는 채로 제리와 맞닥뜨렸다. 제리는 어쩐지 요슈아와 묘하게 짓궂은 면에서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떠올렸다가, 고개를 양옆으로 휘젓고 엎드렸다. 침대 아래로는 흘러내린 이불 탓에 그림자가 드리워 어둠만이 가득했다. 제리가 잠시 고개를 빼내고 심호흡했다가, 한 번에 상체를 숙이면서 팔을 쭉 뻗었다.

 

"됐다!"

 

제리는 자기가 얻어낸 수확물이자 어린 시절 앨범을 천장 위로 쭉 뻗으면서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다가도 본인이 외친 말이 요슈아가 보였던 행동과 꽤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닮은 구석이 계속 생기는 건지 알 방도가 없었다. 제리는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멋쩍게 웃는 소리를 냈다. 하하. 그러다 품 안에 앨범을 꼭 쥐고서 그대로 다시 소파로 향했다. 제법 묵직한 양장본 앨범은 먼지가 가득 차 있었다. JU가 물었다.

 

[JR, 또 다른 관리자가 해당 앨범 속에 등장한다는 가설을 세웠나요?]

 

제리는 앨범 표지를 펼치자마자 그의 질문에 위쪽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요슈아가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떠올렸다. 제리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면서 JU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JU는 자신에게 등록된 데이터로는 JR이 직접 요슈아를 제2 관리자로 등록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고 짤막하게나마 답변했다. 제리는 우선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JU의 질문에도 답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 사람하고 지냈던 기억이 나…. 난 분명 여기에서만 자랐는데."

 

그는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코팅된 사진을 넘겼다. 어느 사진에서도 요슈아를 떠올릴 흔적은 마땅찮았다. 제아무리 절대적으로 똑같이, 평등하게 흐르는 시간이란 불손한 상상에 가까우며, 예상대로만 자라는 이가 없다지만 사진 속에 있는 이들 중 요슈아일 가능성이 보이는 자는 없었다. 제리는 결국 힘이 빠져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JU가 어느새 자리를 옮겼다. 장소는 그의 왼쪽,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입구 사이로 몸체가 반쯤 빠져나온 헤드셋 패드였다. 제리는 고민하다가 그 헤드셋을 쥐고 목에 걸쳤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JU가 빠르게 전원을 가동하면서, 제리의 의사를 간접적으로나마 물었다.

 

[원한다면 라디오 채널 연결을 돕겠습니다. 주파수를 맞춰 주세요.]

 

그는 언제나 묻는 쪽은 JU여도, 결국 자신이 유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억지로 부득불 이행하는 느낌보다는 수작임을 알면서도 사랑스러워 당해 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최근에 제리는 낯선 이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한 번 더 느낀 적이 있었다. 어떤 연결고리가 살짝 맞춰지려는 순간, 헤드셋 내부에서 전파가 지직거리면서 그를 재촉했다. 제리는 초조하면서도 기대를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주파수는 6-2-2."

 

JU는 확인했다는 안내를 다음으로 빠르게 라디오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번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라디오 채널 체크가 금세 이루어졌다. 제리는 눈을 감았다. 처음 들린 소리는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자그마한 소리였다. 집중하지 않고 싫증만 낸다면 아무도 그 소리를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얼마 안 가 익숙하고도 깔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이곳은 브레이브. 6-2-2. 지금 이걸 듣고 있다면, 내 *인간*적인 친구가 내 말을 믿어줬다는 거겠지?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야.]

 

제리는 무어라도 좋으니 똑바로 그를 향해 말하고 싶었지만, 라디오라는 점에서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요슈아가 잇는 말을 그대로 들었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나에게 들려주지 않을래? 나도 이곳에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능숙한 라디오 진행자처럼 그는 제리가 요청치도 않은 추천곡을 재생하기 시작했는데, 제리가 길거리에서 자주 듣는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솔직히 말해 제리는 음악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방송국 아래를 스쳐 지나가면서 드리우는 그림자는 매일 그를 소음 안으로 씹어 삼켰고, 그는 그럴수록 더욱 JU에게 주변 소음을 차단해 달라는 명령의 강도를 높였다. 횡단보도는 흑과 백이 나누어져 있어 그가 걸으면서 어느 한 색을 밟고, 다시 다른 색을 밟으면서 그 행동을 매 순간 반복할 때마다 그를 질타했다. 어느 한 곳에 속하지 못한 그는 나쁘다고, 옳지 못한 대중이라고. 대중성에 굴복하든, 확고한 이념을 가지든 무엇 하나 온전하게 지니기는커녕 높게 쌓아 올린 빌딩들 사이로 몸을 숨기고 애써 괜찮은 척 살아왔다. 그런데도 요슈아가 들려주는 그 노래는 그런 애매한 제리마저도 간절함이 묻어나는 이처럼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아 어느 한 곳이 울컥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리는 이 곡의 내용을 이해할 리가 없었는데, 전부 이해가 되었으니까. 마치 제가 겪은 일처럼.

 

[──이렇게 첫 곡은 끝이야. 아마 절대로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아, 너무 자신만만했나? 하핫.]

 

요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떻게 웃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곡은 <そばにいて>라는 곡인데, 어떨 때 썼던 곡이냐면그런 적 있어? 솔직해지면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상대가 있는 기분. 그런데도 솔직해지고 싶고, 하지만, 그래서 숨기고 싶어서어떻게든 감추고 싶은 마음.]

 

그는 요슈아가 조심스레 선물상자에서 꺼내듯이 하나둘씩 내뱉는 단어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자신이 경험해 온 기억 안에 녹인 다음 대입해 보았다. 그러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불쑥 자세를 바꿔, 아예 누운 상태에서 몸을 살짝 좁은 소파 안에 전부 구겨 넣었다. 체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양모 털로 뒤덮인 소파. 제아무리 부드럽고 따듯해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분은 내지 못 하리라. 뺨을 비비적거려 봤자일 텐데, 자기 귀를 덮은 헤드셋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하나에 제리는 요슈아가 제 위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라디오로밖에, 일방향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그에게 이러한 기분을 느껴본들 환상 속의 노스텔지어에 불과했다. 제리는 요슈아를 알면 알수록 닿고 싶었고, 모르면 모를수록 불안했으며, 자신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할수록 불안한 기쁨에 시달렸다. 딱 들어맞는 방법론이 있다면 그리 해결하고 싶을 정도로. 제리는 충동을 참았다.

 

"알 것 같아, 그 기분."

 

제리는 요슈아가 듣지 못할 대답을 하면서 서서히 눈이 감기는 감각을 느꼈다. 따스한 햇볕이 유독 셌고, 강했다. 요슈아도 지금, 이 햇볕 아래에서 라디오를 녹음하고 있는 것일까. 이 라디오는 나만을 위한 거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통화가 아니라. 제리가 의문을 깊이 파고들수록 의문점은 깊어져만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제리는 요슈아의 꿈을 꾸게 되리란 짐작이 들었다. 숨결이 점점 차분하게 잦아들었다.

 

 

"그럼, 안녕. 너의 *인간*적인 친구가."

 

마침내 제리만을 위한 아홉 번째 라디오가 종료되었다.

마이크에서 멀어진 요슈아는 참아왔던 숨을 거칠게 토해내면서 가쁘게 호흡했다. 고개가 아래로 기울어지고, 테이블로 상체가 고꾸라지면서 정수리가 부딪쳤다. 바로 전, 그가 보안관 무리에게 쫓기면서 그의 오른팔 어깨 부분을 향해 쏜 테이저건이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혈관 내부에서 전류가 찌릿찌릿하게 흐르는 감각이 들었다. 요슈아는 쓰라린 어깨 부분을 억세게 문지르듯 응급처치만 시도했다. 그가 말하는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이란 이런 때였다. 이 정도의 거짓말만큼은 돌아와서도 아마 용서해 주지 않으려나. 요슈아는 혼잣말로 조소를 섞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알고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가 이렇게 된 꼴을 목격하면, 또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낯빛으로 자기 자신이 더 괴로워하리란 사실을.

그는 가까스로 테이블 앞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몸을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일으켜 세웠다. 이번이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예정은 없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백 팩에 홀로그램 레코드와 전파 방해기, 라디오 녹음기, 테이저건 등을 전부 챙겼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수많은 물품과 계획 용지들이 널브러진 채로 요슈아의 마지막 순간을 기리고 있었다. 그는 나가기 전, 아지트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한 다음 제 옷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당겨 짧게 입 맞췄다. 제리가 미약한 힘으로 붙잡았던 그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몇 달간이나 상주했던 아지트 바깥으로 나왔다.

그 단순한 문장을 순탄한 과정이라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아슬아슬하게 회전하는 시선의 방향을 가로세로 직경 30cm 네온사인 간판에 맞췄다. 간판 형태가 울렁거렸다. 가솔린을 섞은 칵테일처럼? 전자칩을 삽입한 교통 안내 로봇처럼, 혹은 그 무엇도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감성에 맞춘, 참으로 한심하고 너저분한 주파수와 같은 것처럼.

 

"하, 흡."

 

나오자마자 피부 아래 기이하리만치 뜨겁게 맥동하는 혈관의 감각이 느껴졌다. 요슈아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소란스럽게 떠드는 군중의 발소리와 빗발치는 시위 함성 사이로, 신음을 삼켰다. 아. 정신을 잃으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그가 안간힘을 다해 겨우 발끝에 힘을 주었다. 재킷 안에서 급히 약통을 꺼내 입 안으로 넣었다. 약의 씁쓸한 고무 맛이 한동안 목구멍 안을 감돌더니, 점차 고통을 가라앉히게 했다. 이윽고 뇌 안쪽에서 울리던 이상한 초음파 소리도 멎었다. 요슈아는 단 한 개밖에 남지 않은 '중독─음성─해체제'를 내려다보면서 느리게 한숨지었다. 마지막 한 개만큼은 제리를 위해 아껴 두어야 했다. 요슈아는 흐린 눈동자를 비비면서, 무슨 연유로 두 사람이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회상했다. 전부 처음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처음 이 세계에 도달했던 때, 두 사람은 모두 기억이 온전한 상태였다. 그곳에 온 인과를 어림잡아 짐작해 보자면 두 사람이 함께 들었던 구식 라디오 속 한 채널—622—의 멘트 때문이었다.

 

상처가 있으신가요? 인연을 강하게 하고 싶으신가요? 있을 곳이 필요하신가요. 그렇다면, 그런 익명의 청취자 중 한 분께 특별한 기회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침대 위에서 하릴없이 느긋하게 다리를 겹친 채로 누운 둘은 팟캐스트 화면과 서로를 번갈아보았다. 제리의 눈썹보다 요슈아의 눈썹이 훨씬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제리는 그런 남자친구의 엉뚱한 소망을 거절하기엔 너무나 심지가 약한 여자친구인지라,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슈아는 두 주먹을 모으고 기뻐하면서 제리를 끌어안은 다음에, 짤막하게 사연을 적어 보냈다. 사연의 내용은 둘이 함께—대체로 요슈아 혼자—적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에 언제나 음악이 있었는데, 이번에 잊지 못할 기억을 하나 만들고 싶어요. 이번에도 음악과 관련된 기억으로 말이죠 이하생략, 구구절절하게 제리를 향한 자랑의 메시지 열다섯 줄. 팟캐스트 진행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보낸 사연을 실시간으로 읽었다. 잘 들었다는 예의상의 말이 서두로 시작되었다. 형식적으로 이어지는 위로나 칭찬이 이어지고, 남자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가락 마디를 꺾는 소리를 두어 번 냈다. 그다음 마무리 문구를 이런 식으로 장식했다.

 

커튼콜이 다가오면, 두 사람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익명의 청취자, 당신이 사랑하는 아주 *인간*적인 음악으로요.

 

"아마도 그거 같지."

 

제리가 말했다.

 

"잊, 잊지 못할 추억이긴 하지 않아?"

 

요슈아가 애써 긍정적으로 말했다. 제리가 가늘게 눈을 떴다. 요슈아는 멋쩍게 웃다가 미안하다는 말만 몇십 번을 반복했다.
물론, 그들은 이곳에 머무르는 주민도 아니었으며 명백하리만치 이방인 그 자체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제리에게 자꾸만 요슈아는 눈길이 갔다. 그 시선 안에 내포된 성분엔 단순한 걱정이 차지한 총량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본의 아니게도 이곳은 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했듯 쉬이 잊지 못할 장소였다. 다르게 말해 제리와 요슈아가 지금이 아니라면 절대로 체험하지 못할 공간이란 뜻이기도 했다. 그가 제리를 불안에 처하게 했던 수많은 상황을 복기하면서, 그가 제리를 안심시켜주지 못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소망도 존재했다. 공중을 빠르게 회전하는 운송 포드를 보면서 제리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정작 제리 본인은 요슈아가 이곳을 꽤 즐기고 싶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별말을 안 하기로 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때부터 모든 일이 꼬였던 것도 같다. 정확히 말해서 라이버 레코드 수도, 말라니트로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제리! 이것 봐."

"에 3,604가지 맛이 동시에 나는 아이스크림이라고?"

"신기하지 않아? 먹어보고 싶지 않아?"

"요슈아 그냥 먹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데."

 

제법 즐거웠다고 요슈아는 자부했다. 톡 쏘면서도 달콤하고, 강렬한 핫소스와 치즈가 섞여서 초콜릿 베이스를 크림치즈로 녹이는 동시에 피스타치오가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며 알 수 없는 12번째 은하의 물에서 추출한 고당도 크림의 경험도 경험이지만(사실 요슈아는 이때 이후로 아직도 미각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공간 속에 지내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는 느낌과 현실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 적당히 이 세계를 즐기는 순간은 두 사람을 이솝우화의 주인공처럼 만들어버렸다. '안전한 위험'. 딱 거기까지의 경계선. 매일 반복되는 껍데기 같은 일상을 탈피했다는 전제를 두고서, 나름의 안정감과 함께 지낸다. 상처를 회복 중인 두 사람은 단내에 쉽게 흔들렸다. 실상 어른이든 아이든 흔들림은 누구에게라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중요한 점은 선택된 이들이 요슈아와 제리, 둘이라는 점이었다. 세계의 오선보가 그들을 가파르게 지나쳐서 지금껏 기억으로 쌓아온 페이지들마저 지나쳤다.

요슈아는 그들이 잠시 머무르려고 임대한 집 안 거실에 나오자마자 머그잔을 깨트렸다. 믿기지 않는 말에 그가 손을 떨었다. 손목 부근 자상으로 새겨진 흉터가 욱신거렸다. 제리는 창밖 너머 거대한 디스플레이 속 어지러운 불협화음에 잠시 귀 기울이더니, 요슈아를 힐끔 보면서 자신이 한 말이 평범하다고 굳게 믿고서 재확인했다.

말이 어떻게 음표가 되는가. 음표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음악은 어떻게

 

"별로 괜찮지 않아? 여기서 계속 이렇게 지내도."

 

타인을 잊게 하는가.

 

 

제리와 다르게 도시 전역에 송출되는 음악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던 요슈아는, 몇 주 뒤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게 클라이맥스 레코드 본사 회의실 중앙에 뜬금없이 돌아왔다. 회의를 진행하던 다른 보컬들과 홍보가 주변을 멍한 표정으로 둘러보는 요슈아를 동시다발적으로 응시했다. 에이대시 혼자서만 한눈을 판 채 더블 치즈 더블 패티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먹다가 뒤늦게서야 그를 발견하고, 냅다 소리부터 지르고 보았다.

 

"에, 에에엥──?! 요슈슈? 언제부터 닌자 자리마저 뺏은 거?! 베로니카 포지션 배틀 위험한 거 아냐?"

 

양상추가 테이블 위로 후드득 자유낙하를 했다. 요슈아는 그 양상추가 마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채로 돌아온 자신을 보는 듯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 속 수다가 그가 방금까지 머무르고 있던 세계 속 시끄러운 소리와 겹쳐서 그의 뇌리를 강렬하게 주먹으로 내려치듯 울려 퍼졌다. 다른 보컬들의 목소리가 그토록 거슬린 적은 난생처음인지라 도무지 자신을 주체할 수조차 없었다.

 

"아하하하. 무슨 소리야? 지금 아무것도 없다가 뚝 생겼다고, 안 보였어? 하 하하…."

"제, 제리가."

 

벌떡 일어서면서 퉁명스럽게 말하는 모모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야의 불분명함이 그가 느끼는 절망을 입증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은 없다. 그래서 요슈아라는 인간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죽고 싶을 만큼 노력했다. 아니, 죽지 않기 위해 내일을 오늘로, 오늘을 어제로 만드는 연습을 하루하루 해 오면서 살아왔다. 요슈아가 여태까지 해 온 노력은 가장 친애하는 소꿉친구이자 애인이 건넨 미숙하고, 또 그와 비슷한 온정 때문이었는데도.

 

"제리가 아직 거기 있는데."

 

요슈아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이내 한 줄기로 뭉쳐 흘러내렸다. 보컬리스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그가 장난으로 벌이고 있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청년은 다시 소년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 예상치 못한 이별에 떨었다.

 

진정한 요슈아는 언제나 그랬듯 제리와 마찬가지로 굳게 신뢰하고 있는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들에게 해당 사건에 관해서 침착하게 설명하면서 상담했다. 처음엔 농담으로 안 마츠가 웃으면서 연기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가, 요슈아의 눈동자를 보고 진담임을 깨달았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유키가 한 번 더 그 팟캐스트를 들어보는 건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동일한 시각에,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와 같이. 이번엔 다른 사연을 보내서.
다행스럽게도 유키의 제안은 들어맞았다. 처음 말라니트로 중심부로 들어서자마자 마츠와 소타는 방송국 송신소 쪽에서 거침없이 루프 되는 찢어질 듯한 음악에 귀를 틀어막았다. 저게 문제 아니냐고, 저게?! 요슈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더욱 거칠고 난잡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속에서 마츠는 거의 공연장에서 외치듯이—어차피 시민 대부분은 헤드셋을 착용했거나 그 음악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소리쳤다. 그는 마츠가 한 말과 제리가 그간 보인 여러 정황을 돌이켜 보았다. 해답은 예상외로 가까이 있었다. 요슈아는 검지로 입술을 툭툭 건드리다가 시야를 위로 올렸다. 창공을 침범한 거대한 송신탑 쪽, 괴성에 가까운 음악에도 태연한 시민들을 보면서 요슈아가 드디어 정답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불쑥 내렸다. 멤버들이 없었으면 이곳에 다시 오지도 못했으리란 생각까지 미쳤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내 주변엔 다정한 사람밖에 없구나. 갑작스레 감명에 젖은 요슈아가 횡단보도를 대기하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을 덥썩 끌어안고 고맙다며 마음 깊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츠가 땀 한 방울을 턱 끝에 매단 채, 요슈아의 등을 어물쩍 두드리면서 대답했다.

 

"어엉, 어. 그래. 근데 요슈아, 넌 네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냐?"

 

요슈아는 약 기운이 가신 상태에서 회상을 멈췄다. 그날 이후로 얼마나 부단하게 노력했던가. 클라이맥스 레코드, 브레이브 차일드, 나아가 요슈아와 LA, 그 모든 일을 잊어버린 것까지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제리가 제리 자신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은 순간, 요슈아의 마음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조해졌다. 그린 듯이 다른 둘이었다. 한데도 서로의 삶은 무척이나 닮은 꼴로 자라나서, 이젠 서로를 가장 이해하는 이가 본인임을 인지하고 있다. 요슈아는 이전에도 그랬듯 그와 극적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아무리 비정상적이고 혼돈에 빠져 있어,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막막해도 그는 제리가 곁을 지켜준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만 피트가 넘는 고도에서 추락하는 기상천외한 체험도, 며칠 내내 폭설 속의 산장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는 조난 생활도. 심지어 아픈 상처를 지워 준다며 속살대는 빗방울을 외면하고 상대를 진심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까짓거 못할 게 뭔가. 이 부조리한 세계를 지배하는 불평등하고 엉망진창인 음악을 종료시키고, 도시 전역을 자신의 음악으로 뒤덮어버리는 기행 정도야 쉬울 것이다.

 

"널 정말 좋아하니까."

 

요슈아가 제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손쓸 도리 없는 *인간*적인 소년이다. 사랑에 맹목적이고, 그 맹목으로 인해 나약함을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나약함마저 사랑을 위해 드러낼 수 있었다. 그는 백 팩 안에 든 장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고개를 내밀어 거리에 있는 보안관과 경찰의 수를 눈대중으로 셌다. 계속해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 요슈아를 저지하기 위해 수가 늘어났었다.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테니, 지금 시기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더 제리가 이곳 음악에 노출된다면. 그땐 정말로. 요슈아가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었다. 부정적인 망상은 본능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요슈아는 그들의 눈을 피해 가야 할 곳으로 갔다.

 

그날 밤. 제리는 현관문 앞에서 뭔가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그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문 앞으로 갔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얇고 가느다란 상체가 제리를 향해 앞으로 기울어졌다. 회색 머리카락이 제리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낭만이라고는 다 죽은 여자, 이제 와 판타지를 기대하기엔 현실을 너무 잘 아는 여자. 그런 제리가 틀기만 하면 잠자리에 드는 로맨스 영화 속 몇 가지 클리셰가 있었다. 갑자기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집에 들이닥쳐서 하룻밤을 보내는 그런 이야기. 제리는 정말로 기대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

그 상황을 직접 겪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몇 번 당황하다가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겨우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제리의 품 안에 빠듯하게 들어온 이를 확인한 그는 두 번째로 놀랐다. 요슈아였다. 그것도 상처 입은 상태의.

 

 

Chapter 3. So What’s Your Plan, My AI?

 

"앗, 아야."

"조금만 참아. 거의 다 끝나가니까…"

 

요슈아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제리 혼자만 앉아 있던 소파 맞은편 좌식 테이블에 걸터앉아 그에게 치료받고 있었다. 난 바닥에 있어도 되는데, 하는 그를 제리가 만류하면서 앉힌 덕분이었다. 그는 제리가 이끄는 손길대로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와이셔츠를 벗기자 드러난 어깨에 입은 상처가 보였다. 제리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요슈아는 있지, 좀 더 자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

"…엣."

"응? 어, 어라.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주제넘었나?"

 

제리는 자기가 한 말을 곰곰이 검토했다가 또 한 번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단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약에 적신 거즈를 문대다가도 말문이 막혔다. 그 앞에만 있으면 제리는 본인이 알던 제리로 있다기보다, 본인이 모르는 제리를 자꾸만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하는 감각이 사뭇 낯설어서 모르는 약품을 건들 듯 흠칫거리다가도 적응하면 금세 빠져들어선, 구제 불능이라고 봐도 좋았다. 생각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비슷한 심정은 배가 되고 곱절이 되어 제리에게 돌아왔다. 요슈아 또한 덩달아 한 박자 뒤늦게 놀라더니, 양손을 홱홱 내저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시도하려고 했다. 제리가 치료하고 있는 오른팔 손등은 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왼쪽 손만.

 

"아니! 아닌데! 그건 아니야. 걱정해 줘서 기뻐. 오히려 엄청나게 두근거렸어."

 

제리는 약간 황망해졌다. 볼이 붉어졌다.

 

"저번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넌 나를 너무 좋은 사람처럼 여기는데."

 

요슈아는 제리가 누르는 손에 자기도 반대쪽 손을 겹쳤다. 체온이 겹쳐서 흐르자 조금 더 따듯해졌다. 제리는 슬쩍 요슈아 쪽으로 눈동자를 굴려서 그를 훔치듯이 살폈다. 요슈아 또한 제리를 훔쳐보았기에 둘은 동시에 동선이 겹쳤다. 머쓱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래로 슬금슬금 피하는 제리였지만, 그는 집요하게 각도를 바꾸어서 제리와 마주했다. 마침내 제리가 포기하고서 아예 홱 정면으로 요슈아를 바라보자 그가 만족스럽게 콧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잘 정돈된 손톱으로 제리의 손마디를 톡톡 건드리면서 말했다.

 

"실제로 그러니까."

 

제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을 부정하고 싶었고, 평온했던 제 삶을 수수께끼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린 요슈아에게 반박할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따라서 표현하자면 오히려 달가웠다. 하지만 제리가 가진 용기는 그러한 마음을 꺼내놓기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입을 벌리는 대신 행동으로 옮겼다. 거즈를 얹은 어깨에 붕대를 꼼꼼히 감고서, 천천히 테이핑했다. 제리는 과거 자신이 생겼던 상처보다도 지금 그를 치료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썼다. 딱 그만큼이 제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요슈아는 애써 노력해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보이는, 그가 내보이고자 하는 '최선'이 기뻐서 제리가 보지 못하도록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다음 실실 웃었다. 제리는 요슈아가 계획한 대로 그가 웃었단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마지막까지 치료를 마무리한 다음에서야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튼, 이제 치료 다 했어."

 

다만 아무리 용기 없는 자라도, 필요한 상황에서는 꼭 말을 꺼내게 되는 법이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등을 돌린 채 응급 상자를 소파 아래로 밀어 넣으면서, 문득 생각난 의문점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아 올랐다. 묻지 않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요슈아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짐을 챙기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다. 부스럭거리면서 재킷이 손끝을 스치는 소리가 마치 예리한 칼날이 제리의 피부를 베고 지나가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제리는 묻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꾹 눌러 담았고, 참아 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쳐와서 이토록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 웃옷을 걸칠 뿐인 행동으로 조급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그는 쭈그려 앉은 몸을 일으키면서 왼손으로 주먹을 쥔 채 꾹, 누르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이 보였다면 질문조차 못 했을 것이다.

 

"저기, 있잖아."

"응?"

"혹시, 요슈아는 날 위해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

 

실내에는 정적이 깊게 깔렸다. 그 순간 제리는 '망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단번에 속으로 차오르는 온갖 잡념을 무찌르려 안달복달 댔다. 그가 살면서 이렇게 당황한 적도 없었다. 요슈아는 정말 제리에서 최초란 최초는 전부 앗아가야 만족하는 걸까. 제리가 잠깐 생각했다. 지금 얼굴, 우습겠지? 엄청 뜨거운데!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귓불을 진정시키려 무어라도 말을 뱉어야겠단 생각에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아, 내, 내 말은. 그러니까, 멋대로 착각하는 거일 수도 있는데, 아 그게, 분명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는 생각하지만."

 

머릿속이 엉망이니 덩달아 몸도 어느 쪽 방향으로 향할지 정하질 못한 채 이리저리 움직여졌다. 요슈아가 당황한 낯으로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제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제리는 보이지 않는지 혼자서 소파 쪽으로 향했다. 요슈아가 보기에는 그는 이미 요슈아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는지라, 해명할 필요가 다분했다. 요슈아가 그에게 가까이 가던 참이었다.

 

"요슈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계속 신경 써 주고, 나를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는걸.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나만 보호받는 건 너무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제리는 양손을 꼼지락대면서 결국 자기가 가진 모든 패를 드러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고 있던 마음을 실토하고 나니 속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었다. 고작 한두 번 만난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제리는 그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주 오랜 시간 그리웠던 이를 만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매분 매초, 그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그는 제리에게 기억처럼 다가오는 상상을 그려내게 했다.
꿈을 꾸고는 했다.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서 얇은 이불을 같이 덮고, 같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면서 우스갯소리로 소원을 비는. 꿈에서도 제리는 꿈을 좇았다. 요슈아 또한 제리에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이한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하고 눈을 질끈 감은 제리는 계속 이어지는 침묵과 고요함에 다시 슬그머니 시야를 되돌렸다. 그러자 눈앞에는 그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눈높이를 맞춘 채, 제리의 뺨에 가까이 손을 뻗고서 고민하는 요슈아는,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미소 중에서 가장 순수하면서도 괴로운 듯한 것을 꺼내 보였다. 그러고선 이마를 제리의 목선에 가볍게 기댄 채 속삭였다.

 

"네 말들이야말로, 치사해. 그러면 내가 멋대로 짊어질 수가 없잖아."

 

그들은 서로를 차마 똑바로 직시할 수 없을 만큼, 거울조차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감정을 내핵 안에 품고 있었다. 그것은 터지지 않은 상태로 심장을 울리게 했다. 요슈아는 결심한 것처럼 제리의 머리카락을 몇 차례 쓰다듬다가 몸을 곧추세웠다. 제리는 저절로 그를 올려보아야만 했다. 또다시 그 눈빛이었다.

 

"치료 고마워, 네 덕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위험한 거야?"

"*인간*적인 거야."

 

제리는 도통 그 단어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제 손바닥에 적은 것이 요슈아의 이름을 적는 철자인 것도 알았으며, 그가 들려준 음악의 가사와 수없이 내뱉은 말의 뜻도 전부 이해했지만, 오로지 그 단어만큼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타지에 버려진 이방인으로서 제리를 존재하게 했다. 요슈아는 제리의 심정을 안다는 듯이 더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대신 다른 말로 물꼬를 텄다.

 

"내가 부탁했던 말 기억해?"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널 믿어 줄 수 있냐는 말."

 

제리는 기억 속을 더듬어서 대답했다.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백 팩을 챙기면서 물었다. 이번엔 그의 표정을 가리는 석양의 그늘진 감염은 물러난 뒤였다. 또한 요슈아만이 제리를 향해 말하는 라디오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요슈아는 제리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달라고, 그러면 전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하면. 믿어 줄 수 있어?"

 

제리가 머뭇거렸다. 언제나 그는 누군가가 하라는 방침대로 살아왔었다. 이번에도 요슈아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태평하게 진행될 일도 많은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싫었다. 제리 또한 결심했다. 결심의 형태는 양쪽으로 찍어낸 데칼코마니처럼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부턴 붓으로 색을 섞은 듯 달라지기 시작해 이내 제리와 요슈아가 다른 사람임을 입증했다. 제리가 지닌 회색 홍채와 요슈아가 지닌 회색 홍채는 비슷했다. 그럼에도 요슈아는 그 안에서 자신이 아니라 여리고, 서투르지만 노력하려는 한 소녀만을 발견했다.

 

"혼자 짊어지게 하기보다는 같이 책임지고 싶어. 믿고 싶으니까."

 

세간은 그것을 반짝이는 아이덴티티라고 말한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과 목적을 간략하게 들었다. 소시민에 불과한 그로서는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 요슈아에게 '미쳤어'라고 세 번이나 말했다. 그러려나? 라고 짓궂게 대답한 그를 향해 다시 한번 복기한 횟수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었다.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음파를 송출하는 장소는 방송국의 송신소에 위치한 중심 송신탑이다. 멤버들—요슈아가 재빠르게 소개해준—이 방송국 내부로 잠입해 24시간 가동되는 부조정실 스튜디오의 스태프들을 제지하고, 제리는 요슈아가 건넨 모종의 자동 재생 홀로그램 레코드로 원래 끼워져 있던 레코드를 대신할 것. 그 사이에 요슈아는 송신탑에 있는 송신기를 조작해 홀로그램 레코드 속의 내용물을 도시 전역에 송신시키겠다는 소리였다. 요슈아는 구태여 제리가 혼란스러워할 만한 이야기는 건너뛰고 싶었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처럼 느껴져 입을 열었다. 지난 삶을 살아가며 계속 들어온 음침하고 꺼림칙한—무엇보다 요슈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수식을 붙일 생각 조차 안 했을—음악이 자기 뇌를 갉아 먹고 있었단 사실에 조금 비틀댔다. 현재까지도 제리는 제대로 믿기진 않았다. 그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나, 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슈아를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요슈아는 이때야말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면서, 설령 잘못되더라도 네 잘못이 아니라는 당부와 함께 알약 하나를 건넸다. 이게 무엇이냐는 제리의 말에, 그는 짧게 부탁했다.

 

"정말 나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신뢰하게 된다면 삼켜줘."

 

그가 더 물을 새도 없이 요슈아는 헬멧을 쓰고, 빠르게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송신소로 향했다. 점점 멀어지는 요슈아의 등을 바라보면서 제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Chapter 4. Time to call it a night, My Telomere.

 

"이쪽은 OK—그쪽은?"

"제대로 끼운 것 같아요. 이젠 요슈아가 말한 시각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쿵, 하고 유키와 마츠가 제압한 마지막 덩치가 바닥 아래로 포박되어 깔렸다. 제리는 여러 차례 자기가 제대로 레코드를 끼웠는지 확인했다. 레코드를 끼우자마자 핀이 켜지면서, 조작 화면에는 제리가 모르는 가수 명과 제목이 나열된 곡들이 차곡차곡 정렬된 플레이리스트가 보였다. 제리는 주변을 살피다가 곡명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중 제리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는 곡들이 몇 가지 존재했다. 그 곡들은 전부 요슈아가 그만의 라디오를 들려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소개하였던 노래 제목과 똑같았다. 제리는 그제야 요슈아가 어떤 행동을 하려는지 감이 잡혔다. 제리가 급하게 관계자들을 제압한 채로 대기 중인 멤버들을 향해 외쳤다.

 

"요슈아하고 연락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더는 듣는 쪽만으로는 안 됐다.

 

"정말 급해요."

 

귀에 헤드셋을 끼자마자, 헤드셋 가장자리에서부터 번쩍이는 네온 불빛이 들어왔다. 참 요란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잠시간 관리자 권한 부여와 함께 제리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면, 헤드셋은 제 주인을 반겼다. [JRTTAXXX, 텔로디오 히어링에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라는 재회의 인사말로. 어찌 감히 헤드셋 따위가 주인을 반긴단 표현을 운운할 수 있겠냐고 조롱하는 작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오버 이어 헤드셋의 이어 패드는 한동안 제리가 입력하는 조작도 무시한 채 요란한 아스키아트─우는 이모지, 기쁜 이모지의 바리에이션─를 반복적으로 띄우면서 통 말을 듣지 않았었다. 제리는 '그리움'이란 감정을 그것에게 부여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리는 JU가 요슈아와 닮았던 이유를 늦게나마 눈치챘다.

 

"내가 그렇게 설정한 거지? 너를… 개인 맞춤형이니까."

 

기억이 전부 제거됐어도 그리움은 여전했기에, 어떻게든 무의식중에 요슈아를 떠올려가면서 입력한 정보들 사이로 만들어진 그 어시스턴스는 제리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들이 알려 준 요슈아의 긴급 연락처로 통화를 시도했다. 제리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으면서 애써 울음을 참았다. 소음으로 막혀 있던 페이지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할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요슈아 또한 전화를 받았다. 그 너머로 인체 인식형 홀로그램이 지직거리며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조급하게 외쳤다.

 

"저기, 있잖아, 요슈아!"

"쉿. 들어봐."

 

순간 제리가 요슈아의 목소리에 따라 조용히 집중하면, 요슈아가 운전하면서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인간이 우는 소리와 더 비슷한 느낌이었다. 식스-투-투. 그러니까, 둘만의 암호를. 절대로 정확한 뜻을 알려 주지 않았던 그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투-투. 제리는 그걸 따라 읊으면서 되새김질했다. 그러다 요슈아와 제리가 이때까지 내뱉은 열두 번째 '식스'가 입술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쳤을 때, 송신탑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제리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검고 하얀 머리카락이 마천루를 가리면서 바람에 나부꼈다. '투'. 반사적으로 외치게 되는 신호.

 

"…응, 좋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인간*적인 친구네, 어쩐 일이야?"

 

그가 '식스'─'투' 사이 간격이 '투'─'투' 사이 간격보다 넓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한 번 더 신호를 입에 담고 나서였다. 정신을 흩뜨려 놓듯이 요슈아가 가느다란 미성으로 질문한 참이었다. 그는 해야 할 말을 정리하면서 답했다.

 

"요슈아, 있잖아. 돌아가면 네 노래를 전부 듣고 싶어. 이런 상황이 아니라, 제대로 둘이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요슈아는 그 부분에서 잠깐 웃었다. 망설임을 버린 채 또렷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곱씹었다. 어느새 코앞에는 송신탑이 보였다. 그는 헬멧을 가뿐히 벗고서, 백 팩을 맨 채 미리 계산해 둔 루트로 진입했다. 통화는 쭉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디오는 오늘까지겠네. 아쉽지만 종료 문구를 말해야 하려나…. 너도 외웠겠지만."

 

제리는 헤드셋 너머로 요슈아의 구두가 반자동식 계단을 빠르게 뛰어가는 발소리를 언뜻 들으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수신기 앞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현재까지는 평소 흘러나오는 음악을 송신하고 있는 송신기를 향해, 요슈아가 손을 뻗는 도중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뺨에 걸친 핸즈프리 이어폰이 그의 귓가에서 빠져나갔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이 일이 무사히 끝나면 전부 나한테 들려줄래? 나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난 요슈아야. 네 *인간*적인 친구고,"

 

혹은 6-2-2.

마지막으로 신원을 밝히는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암흑과도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몇 초 동안 이어진 정적 끝에, 누군가는 말을 꺼냈을지도 몰랐다. '밤이 이리 조용할 수 있던가.'

단숨에 시작을 알리는 음이 고요했던 빌딩 곳곳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슨 노래인지 알아보기 위해 하나둘씩 조명을 켜면서, 새벽녘에 찢어질 듯한 기타 리프를 듣든 말든 수면 상태에 접어들었던 그들이 이제는 바깥에 고개를 내밀어 송신탑을 주목했다. 정확히는 깊은 구석에서부터 이상하리만치 고양감을 끌어올리는, 낯선 감각을 주는 그 수상한 음악이 밟고 지나가는 오선보의 흐름을. 방송국 안에 있는 제리 또한 그 노래를 들었다.

별처럼 속속히 점점 켜져서, 조명으로 밝아가는 창밖을 멍하니 선 채 내다보는 제리를 향해 멤버들은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쳤다. 제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채 바깥으로 뜀박질했다. 시끄러운 경고음과 침입자를 색출하라는 성난 합성 음성이 그들을 가로막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붉은 조명이 시야를 방해해 정신없는 상태에서마저 요슈아 일행 쪽이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 외부 비상구가 거칠게 열렸다. 요슈아가 거칠게 호흡을 내뱉으면서 외쳤다.

 

"이쪽으로!"

 

멤버들은 처음 이동했던 차에 탔고, 요슈아는 제리 또한 그 안에 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제리는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오토바이를 끌고 온 요슈아의 뒷좌석에 탑승했다. 와중에 헛발질하는 그를 보면서 요슈아는 침착하게 행동해도 된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제리에게도 보였다. 송신탑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저 음악이, 이 세계를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원래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되돌아가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께름칙한 예감을. 제리는 요슈아의 허리를 양팔로 꽉 붙들고, 차를 뒤따라가는 요슈아의 등에 고개를 잠시 파묻었다가 들었다.

맞은편 공중 도로를 연결하는 시간은 훌쩍 지나, 지금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곳의 종착점은 맞은편 고층 빌딩과의 접점뿐이었다. 이대로 쭉 가면 그대로 자유낙하였다. 요슈아가 자신을 대입한, 에이대시가 떨어트린 햄버거 속 양상추처럼. 그 사실은 꿈에도 모를 제리는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언제나 현실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정답이라 여긴 채로 요슈아에게 외쳤다.

 

"요슈아! 정말… 뭐, 뭐야? 무슨 생각이야?!"

 

요슈아 또한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인지.

 

"네가 보기엔 어때?"

 

 

──이 세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점이라 정의 내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느 구역에서 음악이 가진 자유의 문제를 논하며 팻말을 높이 치켜들고, 그 반대 구역에선 테이저건을 충전하는 요원들이 옷매무새를 다듬는 미래도시. 그 안의 작은 점 두 개에 불과한 이들이 만든 이야기도 어느덧 커튼콜 장막을 올릴 시기에 점점 가까이 진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함께 해 준 익명의 청취자에게 전달해야 할 한 가지 법칙이 있다. 부디 귀를 기울여 유심히 들어주었으면 한다. 꽤 어려운 일이다. 이 법칙은 한 세계의 존재에 관한 예의이면서 격식이므로. 곧 있을 커튼콜 장막이 올라가면, 접고 있던 세 손가락을 위로 높이 치켜들어야 한다. 그리고 박자에 맞추어 스트레이트로 이어지는 숫자열을 본인만의 언어로 외칠 것. 단지 그뿐이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막이 내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빛바래지 않고 계속되리란 기대를 품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책장을 완전히 덮거나, 영사기가 더는 제 기능을 못 한 채 돌아가지 않거나, 게임기의 종료 버튼을 누르게 되는 이후가 오더라도.

수많은 청취자가 오갔고, 다양한 이들이 세계를 지나쳤다. 그 순간마다 위태롭게 지켜진 법칙 덕분에 두 주역을 포함해 이 세계는 내려오는 붉은 커튼의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눈부신 미래를 향해 흥분한 나머지 급박하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제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속한 회색빛 눈동자는 더 나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완전하고도 찬란한 신호 그 자체다. 그 신호가 제리를 향해서 이토록 숨 가쁘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밤을 밝히는 불빛들이 모인 이곳에서 오로지 너만이 보인다고. 소중한 사람이 지나가는 길을 쫓는 일이 맹목적으로 즐겁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나는, 몇 번이고, 어디까지고, 언제까지고, 어느 세계에서든.

너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찬 주파수라고.

 

"난… 너를."

 

갑작스레 어떤 파동을 느낀 제리는 감히 수식을 하나 덧붙이고 싶었다. 간혹 이런 순간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의미 모를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를 붙여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를 품는 순간 말이다. 제리가 밭은 숨을 뱉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요슈아의 허리를 잡은 왼쪽 손을 떼고서, 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무언가를 입 안에 단숨에 털어 넣고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요슈아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 정체를 보지 않았어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나의 *인간*적인 친구, 6-2-2. 나의, 요슈아라고 생각해."

 

그러므로 이 세계의 모든 음표를 지루한 불협화음이라 여길 수 있게 된 한 인간은, 비현실을 해답이라 외치는 그 찬란한 신호에 응답했다.

 

요슈아는 오토바이 핸들을 쥔 손에 일순 힘을 주었다. 손등 피부의 옅은 혈색에 생기가 돌 정도였다. 그가 머리를 아래로 숙이면서 작은 숨을 내뱉었다. 대가나 보답을 바라고 계획하며 시작한 일도 아니었거니와, 제리가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끝끝내 그가 품은 욕심이 미련으로 변하게 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주 일부, 반신반의하며 돌려받은 신호 하나에 그는 숨이 떨렸다. 제리. 수많은 파편이 모여서, 우리는….

그는 다음 말을 잇기엔─비단 그 말조차도 입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고 단발적인 사고로서 존재했지만─자신을 맹신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겁 많은 소년의 발걸음이 멈추면서, 바닥을 향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기를 반복했다. 제리는 그와 그 너머로 들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집중했다.

요슈아가 자기 허리를 감싼 제리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다섯 손가락 틈새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그들을 끊임없이 추격해 오는 이들이 뿜어대는 분노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이었다. 요슈아가 테이저건에 잘못 닿았을 때 손마디를 타고 흘렀던 전류하고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맥박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까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요슈아는 잠시간 자신의 오만에 대해 반성했다. 당장 처한 사태와 세계에서 벗어나고 나면 점차 해결될 수도 있지도 않을까, 했던.

요슈아야말로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 그 자체였으며, 정답에 도달할 의무를 지녔다.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도, 아지랑이 같은 '안전한 위험'의 불빛 사이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이 세계 속 제리가 더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절대로 놓으면 안 돼."

 

요슈아가 제리의 흔들리는 시선을 말로 붙들었다. 제리는 떨리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크나큰 결단이었다. 겹쳐 울리는 3단 사이렌과 웅성거림을 전부 무시할 정도로 강인한 사람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나섰더라면. 기쁨과 흥분, 그리고 동반되는 감정.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배덕감이 머리와 발끝을 타고 제리의 온몸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절대로 꿈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서히 고층 빌딩 앞으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풍경이 선처럼 그려질 때, 몸이 부유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아주 익숙한 음표들 사이로 천천히 빠져드는 몸, 두 사람을 빨아들이듯 품은 빛.

빛이 눈 부셨다. 지독할 정도로.

 

 

Chapter 5. You can listen to whatever kind of music creams your twinkie.

 

고막을 관통하는 열차 지나가는 소리에 제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몇 초 동안 그를 습격했다가, 이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는 사방팔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이곳이 어딘지 확인했다. JR 야마노테선. 시부야에서 하카타까지. 심심한 표정으로 핸드폰 속 출근 시간대를 확인하는 직장인과 테스트를 걱정하는 고교생의 안절부절못한 낯빛. 그 사이로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도 보이지 않는 한 인영을 찾으면서, 제리가 머리를 숙였다. 그의 옷차림이 어느새 평소 출근용으로 입는 와이셔츠와 카디건으로 변해 있었다. 눈썹 머리를 찌푸리고는, 카디건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안쪽 깊은 곳에 박힌 핸드폰을 찾았다. 그가 원래 쓰는 기종이었다. 능숙하게 1번을 누르고 기다렸다. 하지만 불안한 오랜 기다림 끝에 제리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었다. JU와는 전혀 다른 단조로운 기계음.
이럴 리가 없었다. 분명 두 사람은 손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제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팟캐스트를 켜고, 6-2-2로 채널을 맞춰 보았다. 그러나 현 채널은 현재 방송 중이지 않다는 녹음된 메시지가 경쾌한 배경음이 틀어지자, 제리의 등줄기로 오싹한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앞에 있는 자판기 숫자가 또다시 울렁대는 기분이었다. 제리는 그대로 힘이 빠져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요, 요슈아… 요슈아. 요슈아."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름을 불렀다. 완결지었다. 떠올렸다. 그런데 정작 그가 옆에 없었다. 제리가 핸드폰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상체를 푹 숙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보았다가 때마침 멀리서 땡땡거리는 소리와 함께 JR선 승차장으로 진입하는 지하철에 고개를 돌렸다. 제리만이 오직 그의 행방을 물었다.

 

"어디 있어?"

 

소음이 잦아들면서 승차장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열차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흰색 스니커즈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발짝씩 제리에게 다가섰다. 마침내, 제리의 코앞에 서자 앞코가 구겨졌다. 그가 시야에 맞추어 쪼그린 탓이었다. 제리는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앞이 깜깜해 순간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달콤한 카야 잼과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들어와 제리의 긴장을 녹였다.

 

"여기는 아침 식사 장소로 적절하진 않은걸."

 

여느 때보다 반가운 데자뷔와 함께한 채로 요슈아가 제리 앞에서 웃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는 제리에게 토스트를 물리면서. 따스한 햇볕이 젖은 눈가를 건드렸다. 놀란 제리는 애써 침착한 체할 겨를도 없이 떡하니 입술을 벌렸다.

 

"요슈아?"

"응, 네 요슈아."

"6-2-2?"

"널 아주 많이 좋아하는 소꿉친구 그리고 남자친구."

"정말, 정말 너 맞지?"

"그건 내 쪽이 하고 싶은 말인데! 바보, 얼마나 내가 널 걱정했는지나 알아? 네가 없을 때 정말이지…."

 

요슈아는 가뿐히 떨어지는 토스트를 맨손으로 잡으면서, 태연하게—하지만 왼손이 떨리는 걸 감추고서—웃으며 농담이 섞인 투정을 부리려 했다. 하지만 그다음 그럴 틈도 없이 제리가 강하게 양팔로 요슈아를 끌어안자 그마저도 실패했다. 아, 언제까지고 그는 소꿉친구에게 당하는 쪽이었다. 파급력이 너무 강한 걸 어떡하겠는가. 요슈아는 머뭇거리면서 더 이상 떨리지 않는 손으로, 훌쩍거리는 제리의 어깨부터 등을 토닥이듯이 쓸어내렸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듯이 기대자 지금까지 하지 못 한 것들을 충족시키듯 더 가까이 붙게 되었다. 요슈아는 쓰게 웃고는, 제리의 어깨를 살짝 떼어낸 다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를 달랬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커튼콜은 어떻게 끝맺음 지어야 할까.

 

"그러면, 제리. 나 부탁이 있어. 이번에야말로 들려줄래?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제리는 아직 감이 오지 않은 나머지 요슈아의 부탁에도 양쪽 눈을 깜빡거리면서 몸을 꼼지락대기만 했다. 요슈아는 토스트를 적당히 봉투 안에 넣어 두고,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지긋지긋한 자동차 매연과 각자 다른 음악을 듣는, 말 그대로 매캐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 속에서 요슈아는 제리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전부 나한테 들려줄래? 나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아, 그러려면 신원을 밝혀야 하려나? 일단은."

 

일축하여 제리 그 자체를. 제리라는 인간을 이루는 요소들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그렇기에 요슈아는 사랑스러운 그의 인간적인 친구의 뺨을 문지르면서, 못내 그리웠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환희에 찬 채로 덧붙였다.

 

"난 말이야. 정말 좋아하는 너를 언제나 듣고 싶고, 노래하고 싶은…."

 

 

시부야 스크램블의 교차로에서는 언제나 믹서기 속에서 갈리다 만 세계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1엔 동전이라도 더 벌고자 혈안이 된 소비의 상징은 거대한 쇼핑센터 형태로 중심부를 차지하고, 그 아래 빼곡히 들어선 간판들이 저마다 이목을 갈구하며 경쟁한다. 가게 곳곳 열린 문마다 고동치는 비트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길은 청취자, 청취자, 또 다른 청취자들로 가득 찬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호객과 광고음악은 신물이 날 지경이기에, 아스팔트 도로를 급하게 지나가는 군중은 저마다의 사운드트랙에 취해 지나갈 뿐이므로.

이들 몇몇은 플레이리스트 곡을 전환하면서 시시각각 바뀌는 대형 스크린을 향해 집중한다. 그러면, 립스틱을 붉게 칠한 광고의 여왕은 당찬 미소와 함께 올해를 빛낸 코스메틱을 소개할 것이고. 다음 주에는 유명 해외 록 밴드가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시부야 스크램블을 지나가리라는 희소식이 뜰 것이며….

그런 다음,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한 방의 클린치처럼—콘크리트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여 그라피티와 같은 샛노란 그라피티가 트랜지션된다. 실물보다 몇 배는 큰 앨범 커버가 그 위로 떨어지는 효과를 내는 것과 동시에, 스크린은 LP 축을 올리듯 음악을 재생시킨다. 관계자 몇몇을 제외하면 아무도 듣지 못 한 그 곡을. 왼편에서 빠르게 반대쪽으로 스크롤 되는 선동적인 헤드라인은, 그야말로 축제에서 들리는 축포나 다름없이.

 

LAPAN 장르를 개척한 천재 밴드, Brave Child! 금일 6월 22일 신 앨범 <TELOMERE> 본격 발매 개시!!

 

관심 없던 이들에게도 열망과 간절함을, 상냥해지는 법을 전달해 주는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그들만의 청취자를 생산해 냈다. 어쩌면 평생 마주치지 않을 사람임에도 떨리는 심정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어서, 그로 인해 조금은 지긋지긋한 거리를 올려다보았을 때 어느 한 명쯤은 반드시 '팬'이라고 외칠 수 있게 해 주어서.

하여, 익명의 청취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순간 또한 감사함을 담아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15번의 반복 끝에 되찾아온, 아주 인간적인 음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