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의 사랑
구체의 사랑

@juststayus

 

 

최근까지 써 오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유선 이어폰으로 바꾸었다. 딱히 별 이유가 있어서 바꾼 것은 아니었다. 자꾸만 잃어버리거나 망가져 버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유선 이어폰으로 바꾸니 잃어버릴 일이 아예 없어져서 한결 나았다. 대신 어느 곳에 넣어 두어도 항상 줄이 꼬였다. 엉킨 줄을 푸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골치가 아팠다. 결국 이동 중에 음악을 듣지 말자는 결론이 나왔다. 한 번 듣지 않기 시작하니 그전까지는 거슬렸던 주변 소음이 도리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를 요슈아에게 전해주자 그는 그래도 자기 전에는 브레챠의 노래를 종종 들어줘, 라며 부탁하듯 농담했다. 부탁하지 않아도 이미 그러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덕분인지 꿈에 자주 요슈아가 나왔다.

꿈속의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손가락을 얽힌 채 누워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고 저택의 주인이 되어 손님인 나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꿈속의 것들은 가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슈아가 나올 적이면 그런 생각은 고이 접어두고 그에게 곧바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유를 구태여 꼽자면, 그가 꿈속의 자신이 어떠하였는지를 들으며 표정을 시시각각 바꾸는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TV에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조잘거리고는 했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등장인물의 대사와 우리 둘의 목소리가 겹치면, 자막이 필요 없는 감정만 그 자리에 잔뜩 흘러넘쳤다. 그것이 좋아서 자주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상투적인 단어로밖에 포장할 수 없는 내가 약간은 원망스럽다. 그러나 이리 말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그 시간들은 정말 꿈만 같았다.

그의 집에서 흰 우유를 엎질렀을 때, 나는 내가 항상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현듯 떠오른 감정이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였다. 돌이켜 보면 그런 셈이었다. 마음을 먼저 전해준 쪽도, 도쿄로 돌아와 다시금 나를 끌어안은 것도, 부풀린 그것을 음악으로 내뱉어 주는 것도 요슈아였다. 검은 고양이 매트 위에 흰 우유가 쏟아지면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털 사이사이로 하얀 점들이 물감처럼 퍼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요슈아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그 광경을 한참 동안이나 쪼그려 앉아 지켜보았다. 손에 든 우유갑이 구겨지는 소리가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였을까. 그날부터는 잠들기 전 그의 부탁대로—그의 부탁이 없었어도 종종 그러하였지만—매일 브레챠의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내가 그에게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초대받지 않고도 들어가기를 원해서. 그가 나를 원할 때 한 발짝 먼저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난해함을 논하는 그의 목소리는 가사에서도 말하듯 어쩐지 유감스러워서 그 부분을 돌려 들었다. 잦아드는 드럼 소리를 입에 삼키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 복도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비치는 내 모습에 눈이 피로해졌다. 잠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새벽녘 아침과 비슷한 색조가 지면 전체에 깔려 있었다. 바닥은 표면이 마치 구름 같았는데, 발을 들었다 떼면 파문이 일 듯 울렁거리면서 자그마한 원을 그렸다. 나는 몇 번 더 그 행위를 반복했다.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가 문득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발을 멈추었다. 사방이 막힌 그곳은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고 고요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 기운 덕에 이곳이 꿈속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눈을 깜빡거리는 동안 솜털 같은 무언가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돌아 움켜쥐었다. 펼친 손바닥 안에 그 아이와 함께 보았던 불꽃놀이의 잔해가 들어 있었다. 문지르거나 후 바람을 불면 날아갔다.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사방에 그것이 반짝이는 유성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은 모이고 모여 하나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궤적을 따라 걸었다. 끝없어 보이는 복도의 저편이 아른거렸다. 가까워질수록 형태가 점점 선명해졌다. 새벽을 닮은 색깔로 인해 순간 그와 이곳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열 발짝 정도 멀어진 곳에서 그를 불렀다.

 

"요슈아, 거기 있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요슈아에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요슈아가 주춤거리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렁거리는 지면을 밟았다. 땅은 마시멜로처럼 말캉거렸다. 그럼에도 내 발걸음 소리는 지나치게 크게 들려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왜 그런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뇌리를 스친 사소한 의문도 진공 속에서는 무자비하게 흩어졌다. 소리가 둔탁한 대신 몸이 부유하듯 허공에 떠올랐다가 다시 땅에 내려앉았다. 그것이 걸음마다 반복되었다. 이질적인 조합과 함께 서서히 그에게 다가갔다. 희끄무레했던 실루엣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한 발짝 정도를 남기고 요슈아의 앞에 섰다. 그가 나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일 있어?"

 

묻는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위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띄울 것처럼. 요슈아가 급작스레 훅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까 싶어 양팔을 뻗었다. 얄상한 허리에 두 팔을 둘렀다. 그러면서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내 머리카락이 얇은 와이셔츠에 맞닿았다. 천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정답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요슈아는 정답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었다—굳이 따지자면 그는 현답에 가까운 사람이었다—힘을 더 세게 주었다. 그와 나 사이에 투명한 막 하나가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까지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그 막을 열어젖히듯, 경계를 흐리게 하듯 그의 어깨에 손을 댔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왜?"

"요슈아는 원래 만졌을 때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데, 이번에는 부드럽기보다…… 반질거린다고 해야 할까. 잘 빚은 도자기 같아. 응."

"하핫. 뭐야, 그게."

 

요슈아가 잘게 조각난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멀게 들렸다. 나는 그를 붙잡듯이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의 부드러운 어깨가 내 손바닥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괜스레 손바닥을 문지르면서 천 하나를 두고 살갗을 마주했다. 그가 간지러워, 하고 머리를 내 어깨에 푹 얹고 나서야 그 행위를 멈추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어깨를 들썩거렸다. 요슈아의 이마가 흔들거렸다. 에잇. 별것 아니라는 듯한 추임새와 함께 그가 내 허리를 덥석 그러안았다. 나 또한 그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의문이 든 것은 숨을 몇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 후였다. 왼손은 그대로 어깨에 둔 채, 오른손으로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매끈하고, 동그랗다. 조금은 차가운 듯도 하다. 어째서일까? 그의 말랑거리는 볼도, 매끄러운 어깨도. 어째서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들은 전부 둥근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일까.

 

"너는 너무 동그란 것 같아."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요슈아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자신의 양쪽 눈꼬리를 꾹 눌렀다.

 

"왜지? 이렇게 뾰족한데."

"바보."

"아! 나왔다! 제리의 말 돌리기!"

 

그가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표정을 무너뜨렸다. 배를 부여잡고 글썽이는 눈물을 닦아내자 그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아무튼 이유는 말 안 해 주겠다 이거지."

"응, 요슈아는 그냥 동그란 바보 강아지야."

"뭔가 하나 추가됐는데!"

 

그의 말에 장난기가 솟아나는 것은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모른 척하며 뒤를 돌았다. 곧장 요슈아가 뒤에서 양쪽 팔로 훅 몸을 감싸 안고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

 

"강아지는 주인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아하하, 결국 인정하는 거구나."

"너하고 함께 있으면 그렇게 돼. 신기하지?"

"그러게……. 나도 그러는데."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면 이윽고 그가 몸을 뗐다. 그가 발을 뗄 때도 묵직한 소리가 났다. 나는 바닥과 요슈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발걸음을 뗐다. 가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따라가자 하얀 그랜드 피아노 하나가 복도의 끝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지 하나 묻지 않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이 너무나도 그와 닮아서, 나는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멋쩍은 것처럼 웃으면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발견했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자마자 제리 네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답이었네."

 

그 말에 나는 내가 한 번 더 그에게 져버렸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도쿄에서도, 꿈속에서도 항상 그는 한 발짝 앞서나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패배가 억울하면서도 기분 좋게 느껴져서 나는 너털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을 곱씹는 동안 그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그 손짓에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옆에 앉자 익숙한 풍경이 그려졌다. 옛날에는 자주 이러고 놀았지, 그의 귀에 중얼거리자 그가 그렇지, 하고 즐겁게 대답했다. 그는 내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서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제는 전부 안다고 생각했던 소꿉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있으면 듣지 못했던 쓸쓸한 피아노 연주 소리를 듣게 되었다. 꿈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방이 거울로 된 벽은 그에게 기대고 있는 나를 비추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요, 슈, 아. 그런 다음 나의 이름을. 제, 리. 네 글자에서 한두 개씩 빠져버린 듯 발음되는 그 음절들을 곱씹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너와 나도 불완전한 발음만큼은 같구나.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나는 꿈속의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나를 데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닐 것이라고 약속한 그였으니, 나는 꿈속에서 어디든, 언제나 그를 데리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가파르게 치솟을 때쯤이면 새로운 다짐 하나가 더 떠올랐다. 그것은 젖은 매트만큼이나 사소한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전화를 걸어야지. 그리고 내가 먼저 오늘도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약속하듯 읊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