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매일 이렇게 날 보며 웃어줘요
그저 매일 이렇게 날 보며 웃어줘요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꽃은 연주회 혹은 필사적으로 준비했던 공연 이후에 선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지만 요슈아에게는 예사로운 날에도 그저 그 애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품을 한 아름 채우는 꽃다발을 건네주고 싶어

평소에는 관심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던 화원이었지만 오늘따라 진열된 꽃에 눈이 가서 발걸음이 멈추고, 잠시 구경만 하고 가겠다는 다짐은 널 닮은 하얀 리시안셔스를 발견해서 무너져 버렸어 기억을 더듬으며 변치 않는 사랑이란 꽃말을 말해주면 꽃송이보다도 환하게 피어난 네 웃음이 예뻐서 괜한 행동을 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아침 안개처럼 금세 흩어졌고 나에게 있어 낭만은 모두 보컬리스트로부터 배운 것이니까 수신인도 그 애여야만 해

동굴처럼 캄캄한 길이라 한대도 너의 세상을 알고 싶어
동굴처럼 캄캄한 길이라 한대도 너의 세상을 알고 싶어

첫새벽까지 작업에 골몰하느라 책상 위에 고꾸라져 곤히 잠든 소꿉친구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눈가를 가리는 백색 머리카락을 연한 귓가 뒤로 슬쩍 쓸어 넘겨주면서 음악을 향한 그 애의 사랑을 가늠해 봐 모국어와도 같은 어쩌면 그보다 능숙할 표현의 방식인 동시에 그가 겪는 외로움과 고통을 탄생케 한 근원이라니 지금껏 시도해 본 것들을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관둔 나로서는 영영 겪어볼 수 없는 사랑의 성질이 아닐까

요슈아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다 해서 음악을 연모하는 걸 그만두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행동이야말로 정답이고 어느 길이 상궤인지 알 수 없으니까… 지금은 네가 더 사랑하는 쪽에 무게 추를 덧놓아 기울어볼게

사랑이라 말하긴 어설플지 몰라도 아주 솔직히 그냥
사랑이라 말하긴 어설플지 몰라도 아주 솔직히 그냥

왼편부터 드는 낮볕을 만끽하며 소파에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던 주말, 포슬해 보이는 요슈아의 머리카락은 타고나길 자기주장이 강했지만 오늘은 보다 중력을 거스르려 하는 것 같아서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무심코 속마음을 말하고 말았어 양털 같아….

제게 닿는 시선은 진즉 눈치챘어도 그런 말은 예상치 못했는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부스스 웃는 그 애는 품에 안고 있던 기타를 발목 옆에 내려놓은 다음 마음껏 만져도 괜찮다 말해주었고 본인의 허락도 받았겠다, 마음이 가는 대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잿빛 머리를 쓰다듬으면 등 뒤로 뼈가 도드라지는 섬수가 이번에는 반대로 내 뒤통수를 감싸와 공평하게 저도 엉성하게 땋은 양갈래를 쓸어내려보겠다는 양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 단지 그대 하나로 다른 의미가 되어 가는 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 단지 그대 하나로 다른 의미가 되어 가는 게

처음 해외에 나오고선 눈물로 너울 없는 해원을 창조했던 초등학생 시절 아득하고 낯선 세계에 놓인 소꿉친구가 걱정되어 매일 밤 10시에 맞춰 전화를 걸어주던 너 
당시 수화기 너머로 보드라운 담홍빛 입술이 자장가 삼아 불러주었던 노래들은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하나하나 한없이 기억하고 있어 그 음을 듣는 동안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네 등에 기댄 일본에서의 나날로 돌아간 것 같았거든 

하지만 너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너와 함께하고 싶어

먹 번진 듯 짙푸른 밤하늘에 낮게 걸린 달이 당장에라도 손안에 담길 것처럼 보여서 몇 번이고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을 쥐었다 폈던 어린 날과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다 잡히지 않을 달 대신 제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얽어오며 체온을 나눠주던 그 애

뿌리내린 다정함은 몇 년이 지난들 한결같아서 캠프파이어 앞에 나란히 붙어 둥근 달을 올려다보던 날에도 영하처럼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어 오가는 말 한마디 없어도 백은빛 눈을 들여다볼 때 알아차릴 수 있는 이런 감정이 바로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소꿉친구의 집에서 머무는 날 렌즈를 까먹고 가져오지 않은 탓에 시야가 희뿌예서 조금 더 가까이 와달라 부탁하자 이마가 콩 맞닿을 정도로 붙어주는 상냥한 그 애 이제는 내 얼굴이 잘 보여? 헤실헤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에 어쩐지 나도 되돌려주고 싶어져… 동그란 이마뿐 아니라 입술이 스칠 정도로 몸을 그쪽으로 기대면 다음에 올 대답을 안다는 듯 반사 신경처럼 자연스레 눈꺼풀이 내려감기는데 그 기대에 부응해 숨을 섞는 대신 부드럽고 단단한 요슈아의 오른볼을 잡아당기고

함박눈을 기대하며 창문을 열었다가 비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사람처럼 놀란 얼굴 크게 뜨인 토끼 눈이 평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과 달라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어 그 대가로 무자비하게 간지럼을 당해 결국 둘 다 숨이 찬 채로 소파 위에 엎어져 버렸지만 어쨌거나 복수 성공이야!

바스락거린 속삭임 혀끝에 맺힌 호기심
바스락거린 속삭임 혀끝에 맺힌 호기심

브레챠가 현재의 브레챠가 되기 전에, 창문 바깥의 보름달을 올려다보면서 로스에 있던 시절에도 달이 뜨는 날이면 내가 그리웠다고 말해준 적 있었잖아 실은 그때의 나도 유난히 잠 못 드는 밤이면 방 안이 온통 네 생각으로 뒤덮일 때까지 요슈아 너를 계속해서 떠올렸어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음정 없는 고요한 단어에 일약 월백색 선율을 부여하는 널 따라 입술 밖으로 요슈아 라는 이름 석 자를 길게 늘어트리면서, 말에 힘을 담을 수 있다면 이 쓸쓸함이 영영 너만큼은 빗겨나가기를 바라면서

울어서 갈라진 목소리와 정렬되지 않아 엉망진창인 멜로디였지만 고작 그 한 번의 흥얼거림만으로도 어째서 네가 음악을 사랑하는지 이유를 깨달았어….

잔털 하나 없는 너의 가느다란 목에 숨 쉴 때
잔털 하나 없는 너의 가느다란 목에 숨 쉴 때

매달의 마지막 주말은 요슈아의 집에 머무는 날이야 작곡에 매진할 때면 어김없이 통조림이 되는 소꿉친구가 걱정되니까 테이크아웃 타피오카를 들고 방문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게 여러 번 반복된 나머지 월말 중 이틀만큼은 고생했을 상대에게 온전히 내주게 되었어

일요일에는 일찍이 눈이 떠졌는데 머리가 멍하긴 해도 잠은 오질 않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침 준비라도 할까 상체를 일으키면 곁이 허전하다는 걸 그 짧은 사이에도 알아챈 건지 희고 긴 손가락이 내 손목을 감아오고 일어나지 못하게 살짝 힘을 주어 붙잡아

일어났어? 으응…. 아직 졸린 얼굴인데 조금 더 자. 가지 마…. 아침으로 팬케이크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점심으로 해줘… 지금은 같이 있고 싶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밀려드는 수마를 못 이기고 다시 새근새근 잠든 그 애 이번 팬케이크에는 설탕 대신 코코아를 넣어 구워볼 생각이었지만 수선화 같은 얼굴 위로 간지럽게 흩어져 내리는 은백색 머리칼 옅은 분홍색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숨소리 은사처럼 가늘고 촘촘하게 자라난 속눈썹 같은 것을 마주하면 결국에는 요슈아가 원했던 것처럼 이불에 뺨을 기대어 다시 눕고 말아 잠버릇처럼 그 애의 팔이 등을 감싸오는 걸 느끼며

가는 곳마다 빛이 될 거야 사랑하니까 그렇게나 사랑이니까
가는 곳마다 빛이 될 거야 사랑하니까 그렇게나 사랑이니까

생일이 되기 사흘 전 요슈아가 내게 건넨 것은 YZF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 두 장, 처음 보는 공항 코드라서 손안에 쥐여줄 때까지 상황 파악을 하느라 잠시 얼어있었어 Y로 시작하는 걸 보니 캐나다인가? 벤쿠버는 아닌 것 같지 ZF가 도대체 어디람 바보가 된 내 얼굴을 본 그 애는 미소 지으며 이맘때가 되면 계속 보고 싶어 했잖아 라며 힌트를 주었고 그 말을 듣자 하나 남은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넣은 것처럼 모든 게 이해되었네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또 다른 소원을 소꿉친구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고맙다는 인사를 전부 끝마치기도 전에 품에 뛰어들어 두 팔로 감싸면 말하지 않아도 전부 전해진다는 듯 마주 안아주는, 나조차도 잃어버리는 과거의 낭만을 간직하는 네가 정말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이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짐을 챙겨야 해서 결국은 놓아주었고

지체되는 입국 수속과 익숙지 않은 게이트를 통과해 장장 열다섯 시간의 여행 후 도착한 옐로우나이프 공항은 늦은 시각임에도 생각 외로 북적였지만 최근 핫한 보컬리스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오히려 다행이야 숙소에 캐리어를 두고 한참 늦은 저녁을 먹고 가이드분이 운전하는 미니밴 뒷좌석에 앉아 몇십 분 눈을 붙이면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해서, 비몽사몽한 채로 먼저 내린 요슈아의 손을 잡으며 따라가면 너무 멀리는 가지 마세요 주의하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수면 아래로 잠기는 것처럼 멀어져 가

그렇게 눈밭 위를 얼마나 걸었을까? 제리, 눈을 떠봐.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부름에 응답해 졸음에서 깨어나면 시야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설원과 신비로운 색으로 밤하늘을 치장하는 빛의 커튼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빛 그리고 그 아래 벽록색 청색 남보라색으로 물든 요슈아가 지금껏 꿨던 어떤 꿈보다도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을 장식해 오로라를 직접 내 눈으로 관찰하는 건 오랜 꿈이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해서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서 있는 기분으로 넋 놓은 채 연인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계속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말았다 하던 소꿉친구는 마침내 시간이 되었는지 맞잡은 손을 끌어당기고 자기 자신도 한 발짝 다가와

찬란한 광경을 뒤로하고 서로의 투명한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리까지 붙어 속삭이는 말은 생일 축하해, 제리. 앞으로도 가장 먼저 네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요슈아, 네 앞에 놓인 나는 분명 장점 하나 없이 유약하고 못날 뿐인 겁쟁이인데. 이런 축하와 사랑을 받기에는 한참 부족한 사람인데. 어째서 네 은색 눈에 비쳐 보이는 내 모습은 이토록 강인하고 빛나 보이는 걸까? 습관처럼 음울한 생각이 올라왔지만 답변을 기다리는 듯 기대하는 그의 얼굴은 마음속 불안을 전부 흐릴 만큼 빛이 나서, 결국 서투른 말로 고마움을 전하는 대신 차가운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는 것으로 답장을 대신하며 머리 위 별들을 촛불 삼아 올해의 생일 소원을 빌었어

네가 나를 그렇게 바라봐준다면 나 또한 이제부터 나를 그렇게 생각해 보고 싶다고….

사랑을 생각하면 너를 생각하면 까닭도 없이 행복해져서
사랑을 생각하면 너를 생각하면 까닭도 없이 행복해져서

발이 공중에 떠 있고 무중력 속을 헤엄치는 것 같았던 몇 년 전 하굣길에 들린 우체통에 들어있던 한 통의 편지
그 당시 내게 우편물을 보낼 사람은 없었기에 의아했지만 봉투 안에서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건 빳빳한 티켓 한 장, 거기에 적힌 건 로스앤젤레스에 있다는 한 건물의 주소 며칠 남지 않은 날짜와 공연 시각 그리고 익숙한 밴드의 이름…. 확인하자마자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어 소꿉친구는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편지는 잘 받았냐며 능청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텄고
내가 늦게 확인했다면 어쩔 뻔했어? 그렇게 묻자 돌아온 답은 오지 못해도 제리 널 위한 마음으로 연주하는 건 변함없을 거래 그런 말을 들었는데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잖아

떨리는 마음에 안전벨트를 단단히 채운 채로 5번 고속도로를 몇 시간씩 달려 참석한 브레이브 차일드의 첫 공연은 어땠는지 지금으로선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 떠오르는 건 그저 무대 위에 서있던 그 애가 관중석에 어영부영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꽃 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는 것 그게 중력처럼 날 이곳 캘리포니아에 붙잡아 두었다는 것 두근대던 심장이 안심되는 걸 느끼며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다시금 깨달았을 뿐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부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부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어렸을 때 너는 같은 이불을 덮고 잠들면 꿈에서도 함께할 수 있다고 믿었었지 얼마 전 공원에서 친해진 아이가 가르쳐 주었다면서 침대에 먼저 들어가 베개를 내게 양보하고 자리를 마련해주었던 순간이 네 집에서 자고 갈 때면 종종 떠올라
드물게 먼저 잠든 요슈아의 손을 깍지껴 잡으며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둥근 이마를 맞대고 연정을 속삭이며 심장 소리에 맞춰 숨을 내뱉고 들이쉬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느릿느릿 수마에 빠져들어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어릴 때와 다름없이 사랑스러운 얼굴 비록 소꿉친구의 믿음처럼 꿈속에서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근거 없는 이야기라도 널 좋아하니까 그것마저 따라 해보고 싶었던 거야

한 뼘 더 다정해지고 싶어서 모인 눈으로 오므린 입술로
한 뼘 더 다정해지고 싶어서 모인 눈으로 오므린 입술로

그늘진 자리에 서 바람을 오래 쐬면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하고 얇은 옷을 입고 나가기라도 하면 제가 걸치고 온 자켓을 벗어줄까 물어보는 요슈아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신 팔을 활짝 벌려달라고 부탁했어 영문 모르는 요구에도 순순히 따라준 그 애의 품으로 허들링하는 황제펭귄처럼 폭 안기면 찰나의 정적, 그리고 뒤따라 온화한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 우리의 틈을 메웠지
소꿉친구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 두 눈을 마주치고 싶다가도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콧등을 보여주기 부끄러워서…. 멀리 떨어지는 대신 단정한 등에 손을 얹고 다정한 품에 더욱 파고들면 희미하고도 순한 시트러스 향기가 코끝을 맴도는 게 좋아서 몇 분이고 그렇게 서 있었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애일이 저문 뒤 도착한 해변은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기 때문인지 우리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어 평소보다 변장이 느슨해 걱정했는데 세계 제일의 보컬리스트를 알아볼 사람이 나 말고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야 우스개에 요슈아는 그저 따라 웃고 그 상냥한 미소를 계속해 감상하다간 여기까지 온 보람 없이 너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렸지

인적 없는 검푸른 겨울 바다의 아름다움을 독점한 것 같다는 진부한 감상 모래사장을 에우기 위해 밀려오다 암초에 부딪혀 갈가리 찢어지는 파도 소리는 의외로 듣기 좋다는 깨달음, 소꿉친구와 함께하는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다고 상념을 끝없이 늘어뜨리면 코끝으로 눈송이가 톡 떨어지는 동시에 서늘해진 손으로 연한 온기가 닿아와 상상을 깨트리곤 해 생각의 수렁에 너무 깊게 물들지 말라는 듯

연안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저 너머 주택가의 조명은 이까지 닿는 대신 포말 위만을 희미하게 떠돌고 빛이 들지 않는 밤하늘은 누군가 슈가 파우더를 엎지른 듯 소나기눈을 하나둘씩 쏟아내는데, 문득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서 머리 위에 눈이 쌓이는 것도 모르고 멈춰 선 나를 이끌어 주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요슈아

머리로는 영화 속 구절을 떠올리느라 시선은 사랑하는 얼굴에 고정하느라 발걸음은 아득한 밤을 뒤따라 걸어가는 데에 집중하느라 네가 한 말을 놓쳤어 그러니 한 번 더 말해줄래 사랑한다고….

너의 모든 것은 다 나에게로 와 까만 오늘의 닿은 의미가 돼
너의 모든 것은 다 나에게로 와 까만 오늘의 닿은 의미가 돼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니 생일에도 여타 날처럼 별달리 바라는 것 고대하는 것 없이 허무하게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내가 어디에 있든 시침과 분침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정각이 되자마자 걸려 오는 요슈아의 전화만큼은 욕심내어 기대하고 있었어 생일 축하한다고 매해 누구보다도 먼저 기쁘게 전해주는 요슈아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그립고 사랑스러웠지 직접 만나서 축하해 주고 싶은데 이번에도 네가 있는 곳으로 가기는 힘들 것 같다며 수화기 너머로 시무룩한 감정이 전해지지만, 나는 네 입에서 나온 축하의 말 한마디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물 같은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걸

그렇기에 소꿉친구가 남자친구가 된 후에는 성대하게 열린 둘만의 생일 파티에 굉장히 얼떨떨해졌네 색색의 벌룬 아트와 여러 명이 둘러앉아 나눠 먹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 어느 옷에도 쉽게 어울리는 은색의 반지 이렇게까지 축하받을 줄은 몰랐다고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니까 만나지 못했던 그동안 계속 네게 이렇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해주어서 그 애가 가진 상냥함에 다시금 마음이 녹아내리는 건 불가항력

여전히 널 사랑해 여전히 널 기억해
여전히 널 사랑해 여전히 널 기억해

살과 살이 맞닿아 온기가 전도되는 순간 그 순간을 좋아하는 어리광 많은 소꿉친구를 좋아해 내게 기대하는 소원이 있을 때마다 짓는 불쌍한 표정도, 목적이 달성되면 그믐달처럼 휘어지는 웃음기 가득한 눈매도…. 미인계에 넘어가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금방 그 안타깝고 안쓰러운 목소리에 속절없이 휘말려 결국엔 바라는 모든 걸 이뤄주게 돼버려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쉽게 패배한다는 말처럼 요슈아에겐 언제나 나를 몇 번이고 굽혀줄 수 있어 그 애가 내게 그래주었듯이

파란 바다 위로 반짝이는 물결에
파란 바다 위로 반짝이는 물결에

몇 번 입지 않은 수영복을 챙겨 인근의 한적한 해변으로 놀러 가면 모래밭에 앉아 하얗게 흩어지는 포말을 멍하니 구경하는 나와 다르게 요슈아는 얼굴을 스치는 미풍을 맞으며 서핑까지 알차게 즐기는 중이야

평소 물장구를 치는 것보다 고무 오리처럼 느긋하게 동동 떠다니길 좋아하지마는 오늘은 파도가 너무 높지도 얕지도 않은 완벽한 타이밍이라며 서프보드를 품에 안고 파란을 향해 헤엄치는데, 일렁이는 마음과 함께 물결을 가르다가도 나를 두고 온 게 신경 쓰였는지 몇십 분 후 사장으로 돌아온 소꿉친구는 선크림 바르는 걸 잊어버린 채로 입수해 버렸기에 황금빛 볕에 양 볼이 발갛게 익어버렸어

후토마키처럼 비치 타올을 여러 겹 둘러준 뒤 진줏빛 머리카락에 남은 짠 물기를 수건으로 꾹 눌러주면 나른하다는 듯이 내 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은 조금 축축한데도, 서서히 젖어드는 감각이 거북하지만은 않아서 밀어내고 싶지 않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