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 혹은 기억
대칭 혹은 기억

@juststayus

 

 

"……나도 같이?"

"네가 같이 오면 키 쨩도 기뻐하지 않겠어? 그리고 고작 하루니까."

 

요슈아는 당연하다는 듯 제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제리의 놀란 눈동자를 보고 그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놀란 모습이 마치 예상치 못한 선물을 열어 본 어린아이 같아서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이 함께가 아니라니, 그런 선택지는 그의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제리는 잠시 망설였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데에는 익숙했으나 타인의 아이를 돌보는 것에는 미숙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고, 몰랐기에 망설였다. 그러나 한여름의 햇볕은 따끔따끔 여린 살갗을 쪼는 동시에 누군가의 망설임을 녹이기도 한다. 요슈아의 목소리가 유독 여름을 닮은 밝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는 달력 애플리케이션에 일정을 체크해 두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무렵 주택가의 평온함은 키라의 에너지로 인해 깨지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봐도 작은 여자아이가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환하게 얼굴을 빛냈다. 제법 유키를 닮은 얼굴이라고 두 사람은 동시에 생각했다.

 

"요슈아—제리—"

 

혀 짧지만, 방울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요슈아는 입꼬리를 쭉 올리면서 왼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옆에 선 제리도 손을 작게 흔들었다.

키라는 두 사람에게로 달려오다 말고 잠시 멈춰 서더니, 신이 나서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안아달라는 신호처럼. 요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을 굽혀 아이의 키에 맞췄고, 키라는 곧장 그의 품에 안겼다. 작고 따뜻한 체온이 요슈아의 가슴팍에 닿자, 그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기다리게 했어?"

"아니!"

 

키라가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엄청 기다렸어!"

 

요슈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어? 대역죄인이네, 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겠는걸."

 

키라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요슈아의 바짓자락을 이끌면서 현관문 안쪽으로 그를 끌고 갔다. 제리는 엉거주춤하게 이송되는 그를 웃으며 보면서 따라갔다.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세 사람을 반겼다. 바깥과는 다르게 안은 마치 다른 계절처럼 쾌적했다.

유키의 집은 그 주인처럼 정돈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벽지는 연한 회색빛이었고, 가구들은 모두 톤을 맞춘 듯 옅은 베이지와 아이보리 계열로 통일되어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선과 간결한 배치가 눈에 띄었고, 거실 한가운데에는 유리 상판의 테이블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화병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막 피어난 듯한 하얀 안개꽃이 담겨 있었다. 공간 전체가 마치 숨을 죽이고 있는 듯 고요했다.

복도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자, 바닥에는 색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단순히 흩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무언가를 만들다 만 채 그대로 두고 간듯한 흔적이었다. 색종이들은 대부분 반쯤 접혀 있었고, 어떤 것은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으며, 어떤 것은 손때가 묻어 색이 바래 있었다. 그 옆에는 종이접기 안내서가 몇 권 펼쳐져 있었는데, 표지에는 복잡한 도형과 정교한 동물 모양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아이가 보기에는 다소 무리일 법한 수준 높은 도안들이었다.

요슈아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혀, 바닥에 널브러진 색종이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갈색 색종이였고, 여러 번 접었다 펴기를 반복한 듯 종이의 결이 닳아 있었다. 손끝으로 문질러보니 종이가 약간 눅눅했고, 모서리는 이미 너덜너덜했다. 그는 그것을 들고 키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뭐야?"

 

키라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 대신 말했다.

 

"맞혀 봐, 맞혀 봐!"

 

요슈아는 잠시 색종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으—음, 곰돌이?"

 

그는 괜히 제리를 힐끗 보며 도움을 청하듯 말했다. 제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독수리?"

 

키라는 입을 삐죽 내밀며 외쳤다.

 

"부엉이야—!"

 

그 말에 요슈아와 제리는 동시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보니, 색종이의 윗부분이 둥글게 접혀 있었고, 눈처럼 보이는 두 개의 점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날개는 다소 어설펐지만, 부엉이 특유의 둥근 실루엣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키라는 최초로 오답을 말한 요슈아에게 벌을 주듯 종아리 뒤편을 간지럽혔다. 속수무책으로 간지럽혀진 요슈아가 잠깐, 잠깐하고 방어하다가 끝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전혀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 상황이 재밌는 것처럼 금세 회복하여 키라의 허리를 간지럽혔다. 제리가 아주 익숙한 데자뷔를 느낄 때쯤 간지럽히기 공방전이 끝났다. 요슈아는 그제야 겉옷을 벗지 않았음을 깨닫고 코트 행거에 재킷을 걸친 다음 제리의 겉옷도 넘겨받아 옆에 걸어 두었다. 거실 소파로 돌아온 두 사람이 테이블 앞에 앉은 키라를 둘러싸고 자리를 잡았다. 요슈아가 이곳저곳 퍼져 있는 색종이들을 전부 모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질문했다.

 

"그래서, 키 쨩 특제 부엉이는 없다는 거야?"

"응. 뭔가 이상해. 오빠하고 언니 두 사람 몫을 미리 만들어서 주려고 했는데, 한~개도 못 만들었어."

 

키라가 아쉬운 듯 볼을 부풀렸다. 제리는 새 색종이 하나를 집으면서 '입체 부엉이 접기 가이드'를 힐끔 보았다. 꼬질꼬질해진 색종이의 모양새와 단계별 색종이 그림을 보니 어느 부분에서 막혔는지 바로 보였다. 가족들에게도 심심하면 학 같은 걸 여러 마리 접어 주고는 했기에 어렵진 않을 듯했다. 그는 손에 들린 갈색 종이를 내려놓고 요슈아를 닮은 회색 종이로 다시 집었다. 그가 키라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브레—키 특제 부엉이로 만들면 되지."

"와, 좋아! 그런데, 언니도 포함해야 하는 걸. 그러면 브레—키—제리 특제 부엉이……."

"좀 긴데. 나는 빼도 돼."

"안 되지!"

 

요슈아와 키라가 동시에 외쳤다. 요슈아는 이미 검은색 색종이를 들고 첫 번째 단계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꼼꼼하게 각을 맞춰 접으면서, 색종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굳이 네 이름을 추가할 필요는 없어.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내 소중한 사람이고, 필수 요소. 그러니까 어찌 보면 브레챠 안에 이미 제리가 포함된 거지. 알겠지, 키 쨩."

 

키라는 요슈아가 천천히 접는 것을 보면서 똑같이 따라 접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들을 보면서 제리가 웃음이 섞인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 걸 가르치고 있네……."

 

그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정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색종이와의 사투를 벌이면서 세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브레이브 차일드에 관한 이야기가 주였다. 의외인 점이 있었다면 그랬었다, 저랬었다, 하며 블록을 늘어놓듯 기억을 살펴보기보다 미래—키가 커진다면 어느 멤버의 키까지 커지고 싶냐는 둥, 제일 큰 부엉이는 누구한테 선물해 줄 거냐는 둥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지만—에 관한 것이었다. 새삼스레 제리는 지금 자신이 함께하고 있는 이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래서 쌓은 기억도 제리와 요슈아에 비하면 한참 적은 어린아이임을 느꼈다. 그러한 복기는 제리로 하여금 그 나이대 쌓인 기억들이 얼마나 오래 머무르는지를 생각하게끔 했다. 보편적인 지식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한 단계 앞선 것은 감상이었다.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그러면 그는 문득 그 애를 닮은 백건을 기억하고는 한다…….

멀리서 보면 날카로워 보이면서도, 막상 다가가서 손대어 문지르면 한없이 뭉툭한 그 모서리를.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발을 멈추게 되고 마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이쪽을 향해 환히 웃는 미소를.

감상에 더 빠져 있기도 전에 요슈아가 제리를 불렀다. 제리, 무슨 생각해?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제리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번뜩 들고 요슈아와 키라 쪽을 쳐다보았다. 으, 응? 그가 살짝 급한 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요슈아는 거의 다 접은 부엉이를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 쨩, 수상하지. 요슈아가 키라를 보면서 탐정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키라 또한 조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수상해. 제리 언니 수상해. 키라가 요슈아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접은 부엉이—요슈아는 자신의 것보다 키라의 것을 먼저 완성시켰다—를 들이밀었다. 제리는 난데없이 종이 부엉이 부리로 볼을 쪼여야 했다.

 

"자백해, 언니, 자백해~ 요슈아 오빠 생각했지~!"

 

요슈아도 질세라 협공을 시도했다.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또 맞는 말이기도 한지라 제리는 억울함 2할과 쑥스러움 8할의 감정으로 자백하라는 두 사람의 공격에 웃음을 참아가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부리가 닿는 데마다 간지러웠다. 마침내 공격이 잦아들고 자신의 것도 완성이 되고 나서야 겨우 부엉이 세 마리가 생겼다. 꼬질꼬질한 색종이 열몇 개는 쓰레기통에 얌전히 집어넣은 다음, 부엉이를 햇볕이 안 드는 커튼 뒤편에 줄을 맞춰 세워 두었다. 요슈아, 제리, 키라 순서대로. 키라는 자신이 왜 일 등 순서가 아니냐며 마구 항의했다. 요슈아와 제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져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끝내 키라를 맨 앞으로 옮겼다. 키라는 만족스러운 듯 턱을 치켜들고 에헴, 했다. 마치 그 종이 부엉이가 자신이라도 되는 양.

 

"그런데 왜 요슈아는 계속 제리 앞에 있어?"

 

요슈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미소 지으면서 키라의 머리를 헝클어트리지 않는 선에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야 내가 제리를 지켜주는 쪽이니까."

"에—그러면 소타 군하고 내가 결혼하면, 부엉이를 하나 더 만들어야겠네!"

"하하, 그렇게 되려나."

 

 

소타 본인은 모르는 더블 데이트가 유키의 집에서 성립되고 난 후, 오후가 된 무렵 제리는 플라스틱 당근을 장난감 칼로 썰면서 요리하는 시늉을 내고 있었다. 키라가 완구 세트를 잔뜩 들고 와서는 소중한 것들인데 언니오빠들이니까 특별히 '요리'하게 해 주겠다며 허락해 준 덕이었다. 제리의 옆에서 요슈아는 파프리카를 반으로 가르고 작은 프라이팬에 넣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고 어린 총주방장에게 지시를 내려달라는 듯 슬쩍 보았다. 그런 다음엔 말이야, 소스를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키라의 목소리에는 곤란함이 묻어나 있었다. 완구 세트에 소스나 가루가 있을 리 없었다. 제리와 요슈아는 서로를 보면서 어찌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제리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가 닿았다. 남은 색종이가 몇 개 있었다. 개중에 요슈아를 닮은 하얀 색종이가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일어서서 무릎을 털고 색종이를 들고 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가위를 들어 균일한 간격으로 잘게 잘랐다. 그러자 제법 통소금이라고 우길 수 있을 듯한 형태로 변했다. 그는 그것을 프라이팬에 뿌렸다. 그리고 키라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러면 간도 맞출 수 있겠다, 그렇지."

 

제리를 옆에서 바라보던 요슈아가, 와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제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갓 씻은 수건에서 나는 섬유 유연제 향기가 희미하게 코를 간질였다. 너는 정말 대단해. 기회를 노린 것인지 정말로 감탄하여 나온 반응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리는 그 반응이 기꺼웠다. 연인의 애정 행각을 열심히 관찰한 키라가 왜 둘끼리만 노냐며, 치사하다고 성을 냈다. 부드러운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맞으니 아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볼을 긁적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둘의 웃음을 본 그 아이가 또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리의 수습으로 플라스틱 볶음밥과 형형색색의 각종 과일 플래터는 무사히 완성되었다. 키라는 몇 번이고 만들었을 터이지만 이번에는 종이 소금이 들어갔다는 점이 달랐다. 아이는 그 점이 꽤 마음에 든 듯했다. 제리에게 꼭 달라붙어 제리 언니는 마술사냐고 계속 묻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요슈아는 그 반대쪽에서 제리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제리는 마술사가 아니라, 오빠의 귀여운 여자친구야'라고 여러 차례 반박했다. 키라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리를 향해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요슈아는 귀가 축 처진 강아지처럼 굴었다. 어느 쪽이건 제리로선 떨쳐낼 수 없는 모습이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사다난한 주방 놀이가 끝나고 동화책을 읽거나 머리를 땋아 주면서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해도 뉘엿뉘엿 저물었다. 키라는 지칠 새도 없이 더 놀자며 제리의 무릎 위에서 머리를 기댔다. 제리는 키라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면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마땅히 더 놀아 줄 만한 게 무엇이 있으려나. 이 나이대면 블록 쌓기도 좋아하던가? 유키 씨에게 실례가 안 된다면 집 안을 조금 더 둘러봐도 되려나……. 곰곰이 고민하던 찰나에 요슈아가 들뜬 목소리로 둘에게 제안했다.

 

"피크닉 가자!"

"응? 이 시간에?"

"이 시간이니까 좋은걸, 하늘도 주황색이고 바람도 시원하고. 마침 근처에 넓은 공원도 있잖아? 샌드위치만 간단하게 싸서 가자."

"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와! 완전 좋아! 딸기잼 말고 땅콩버터 발라 줘! 천장 구석에 있어, 내가 알아!"

"OK, 그럼 결정된 걸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한 요슈아와 키라의 지시에 따라 천장 구석에서—아마도 유키가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숨겨 두었을 듯한—땅콩버터를 찾아냈다. 뒤를 따른 제리가 밀봉된 식빵 몇 개를 꺼내 토스터에 넣고, 몇 초 후 바로 꺼냈다. 땅콩버터를 식빵 한쪽 면에 듬뿍 바른 다음 합쳤다. 대각선으로 칼집을 내고 썰었다. 그 상태로 비닐에 담으려다가 기대에 찬 키라의 작은 입을 보고서 요슈아는 한 번 더 칼집을 냈다. 그 정도 크기면 알맞을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제리가 몰래 웃었다. 거실을 정리하고서 셋은 바깥으로 나섰다.

바깥은 여름 저녁 공기를 머금어 몽롱한 기운을 품은 채 선선하게 더운 바람을 정면으로 보내왔다. 공원에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개가 잔디밭을 박차고 뛰어다니는 마찰음이 선명하게 들렸다. 키라는 두 사람의 가운데에 서서 한 손씩 잡고 걸으며 언뜻 들은 브레챠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디에도 나온 적 없는 노래였다. 신곡으로 예정된 곡도 아니었으며 폐기된 곡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요슈아가 유키에게 보낸 샘플링 후보 중 하나였을 뿐인데 어쩌다 지나가며 그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제리가 갸웃거리는 사이 요슈아는 키라를 흘끔거렸다.

 

"키 쨩은 그게 마음에 들어?"

"응, 뭔가 몽글몽글ふわふわ."

"으흠. 몽글몽글하구나. 오빠는 그게 뭉실뭉실もこもこ하다고 생각했어."

 

제리는 두 단어 사이 덩어리진 감각의 차이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안타깝게도 제리보다 키라의 이해가 훨씬 더 빠른 듯했다. 키라는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흑건과 백건만이 전부였을 때라면 이해했을 수도 있겠다고 제리는 문득 느꼈다. 아쉬움은 아니었으나 그 엇비슷한 감정이 제리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어느새 공원에 도착했다. 저녁 햇살이 잔디 위로 길게 드리워지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세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 온 향기에 키라가 고개를 불쑥 요슈아 쪽으로 내밀었다.

 

"오빠, 좋은 냄새가 나."

"그래?"

"응. 아까 말했던 몽글몽글한 냄새."

 

요슈아의 향은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다가와 등 뒤를 살짝 밀어주는 듯한 부드러움이 있었다. 사람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어 말로는 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해 주는 듯했다. 그것은 맞잡은 손과 손 사이를 좁히는 향이었다. 오래된 여름날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향이었다. 어렴풋한 향이었기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요슈아는 키라의 단어 선택에 웃음 지으면서 질문했다.

 

"그 곡, 어쩌다가 들은 거야?"

"거실 지나가다가 들었어! 뭔가 어수선했는데……. 기억나는 대로 부른 거라 맞는 건지는 모르겠어."

"그랬구나. 나중에 다시 제대로 들려줄게."

 

그는 그 곡을 따로 완성해야겠다고 속으로 결정했다. 기본적인 멜로디만 겨우 기억나는 곡이었지만, 어쩐지 제대로 완성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기억으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오늘의 기억은 너무나 소중했으니까.

공원은 한적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부드러운 하얀색 돗자리를 깔았다. 키라는 털썩 주저앉았다. 제리는 치마를 정돈하며 앉았고 요슈아는 두 사람이 앉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세 명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 후 앉았다. 바구니를 열자 막 구운 토스트의 열기와 고소한 땅콩버터 냄새가 훅 올라왔다. 키라는 돗자리에 앉자마자 거의 엎드려 뒹굴 것처럼 있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요슈아는 키라와 제리에게 샌드위치를 하나씩 주었다. 제리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요슈아 거는?"

 

요슈아는 키라가 오물오물 샌드위치를 만족스럽게 씹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서바이벌도 곧 다가올 것 같고, 관리 겸."

"아아."

 

새삼스럽게 그가 프로라는 사실이 다가왔다. 제리는 그때서야 몽글몽글과 뭉실뭉실의 차이를 알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을 터였다. 제리는 옆눈으로 요슈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요슈아는 계속 키라를 주시하면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가 토스트 가루를 흘리면 그것을 닦아주었고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으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도드라졌다. 색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그 하얀 피부는 노을을 머금고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요슈아와는 언뜻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요슈아의 손은 꽤 컸다. 제리는 토스트 가루가 잔뜩 묻은 키라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드럽고 색이 연했다. 그들에 비하면 한없이 작았다. 살아온 날들만큼이나 작았다. 기억의 크기가 손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은 기억이 많을수록 더 상냥하고 더 부드러운 행동을 하는 손을 갖게 되는 걸까. 제리는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자조하면서도 어느새 키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키라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좋은 기억의 부피를 넓히는 일뿐이었다. 반면에 키라는 난데없이 쓰다듬어져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에…… 내가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한 거야?"

"응, 키라가 오늘 엄청 착했어."

"정말? 어느 정도로?"

"소타 씨하고 결혼할 수 있을 만큼?"

 

제리가 웃음을 머금고 말하자 키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아이는 두 볼에 한가득 머금고 있던 샌드위치를 급하게 삼켰다. 그러고 나서 제리의 팔짱을 끼고 마치 어드바이스라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리 언니가 최고야. 제리 언니가 소타 군 다음으로 제일 좋아. 제리가 부스스한 웃음을 흘리며 키라의 작은 손을 맞대고 요슈아를 본 채로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사실 키라가 제일 좋아.

요슈아가 3초 뒤에 지금 애인 자리를 내어 준 것이냐며 삐친 척한 것은 키라의 웃음을 꽤 많이 이끌었다.

 

 

돌아가는 길 역시 한적했다. 공원에서 그리 오래 머무를 생각은 아니었건만, 막상 자리를 뜨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노닥거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하늘은 어느새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낮의 기운은 자취를 감추고, 밤의 기척이 조용히 세상을 덮고 있었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별이 유난히 많이 떠 있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인공위성일 테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것들이 모두 진짜 별이기를 바랐다. 요슈아도, 제리도 그랬다. 요슈아가 키라의 보드라운 손을 간지럽히며 소곤거리듯 말했다. 저기 봐, 키 쨩. 별 세 개가 나란히 있어. 키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대로 반짝이는 하얀 점이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제리 또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검정, 그리고 하양. 대조를 이루기에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세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색깔들. 그날로 돌아가고 싶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그래서 무어라고 답했더라……. 흔들거리는 시야 속에서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답이 나오기도 전에 키라의 명랑한 목소리가 제리의 내면세계를 침범했다.

 

"와! 그러면 우리 셋이서 하나인 거네, 제2의 브레챠인 거네!"

"으응?"

 

키라의 감탄사에 제리가 놀라며 반문했다. 키라는 두 사람의 손을 각각 하나씩 잡고 흔들었다. 우리는 특제 부엉이잖아, 그러니까 부엉이 음악대인 거야. 그런 말을 하는 키라는 반짝이고 있었다. 요슈아는 잠시 침묵했다가 가장 빛나는 별을 가리키고는 단장은 키 쨩이 맡아 달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키라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제리보다 빨라졌다. 제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놓고 한 발짝 뒤따라 걸었다.

별을 보며 아직 셋밖에 안 모인 음악대를 꾸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리는 천천히 뒤에서 걷고 있었다. 그는 언제인가부터 동심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언제인가부터 그것의 무게가 가볍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문득 그날 무어라고 답했는지 생각이 났다. 그는 고개를 저었었다. 어떤 것은 지나갔기에 제리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동심은 제리의 곁에서 떠나지를 않고 줄곧 머물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것은 분명 다른 이름으로 추억이라고 칭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