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Secret
White Secret

@xngkgkB

 


겨울의 눈 아래에 덮이는 비밀이 있다. 오로지 그 계절에만 숨길 수 있는 차가운 금기. 그런 것들은 대개가 시간에 둘러싸이는 몹시 사소한 것들이어서, 요슈아는 비밀을 마치 무게와 온도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대하듯 했다. 겨울이 오면 시체처럼 그것들을 파묻는 시늉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슈아가 아직 어릴 적, 소꿉친구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하얗게 쌓인 눈의 아래를 파고들면 부드러운 갈색의 흙과 함께 엉킨 지층이 나온다. 요슈아는 그 부분이 나올 때까지 한참, 손이 발개질 정도로 눈 아래를 파헤쳤다. 이내 피부 표면이 따가워질 정도에 이르자 요슈아는 손을 털어내고 눈과 흙이 묻지 않은 손바닥 아래쪽으로 눈을 꾹꾹 문질렀다.
작은 마을에서도 더 외진 곳,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언덕 위의 집은 늘 사람이 자주 오지 않았다. 언덕이라고 해도 그것보다는 조금 더 높아서, 마을에서는 요슈아의 집이 있는 지대를 작은 산이나 봉우리 따위로 부르기도 했다. 가족과 요슈아는 언제나 거기를 '언덕'이라고 불렀지만. 여름에는 집 앞에 있는 작은 밭과 뒤편에 있는 산 때문에 노인들이 버섯이나 약초를 캐겠다고 바구니를 이고 오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 지금 같은 겨울은 미끄러지기 쉬운 언덕에 누구도 오지 않았다. 요슈아의 하나뿐인 가족조차도 겨울에는 웬만하면 언덕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며 앓는 소리를 했는데, 정작 그의 가족은 언덕을 조심조심 내려가 근처에 있는 작은 식료품점으로 늘 향했다. 그런 그가 언덕에서 길게 미끄러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날부터는 어땠던가. 요슈아는 조용히 입김을 불며 언덕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발간 시야, 흰 눈 사이로 점점이 찍혀있는 사람들.

언덕 위, 요슈아의 집이 아니더라도 마을은 규모 자체가 아주 작았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도도 아니고, 그 집의 누가 바람이 났다더라, 누가 어떻게 됐다더라 하는 대소사까지 일정 비밀 없이 공개되고 까발려지기 일쑤였다. 이런 마을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야, 어른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언덕에 사니까 겨울철에는 비밀을 숨길 수도 있지. 봄이 오면 전부 녹아서 그것도 들통 나겠지만. 조곤조곤, 속삭이던 가족은 다행스럽게도 겨울의 눈이 조금 그쳤을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을 어른들은 요슈아를 대신해서 한 사람의 시신을 가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조심조심, 넘어지지 않게. 요슈아는 잰걸음으로 언덕을 따라 내려가며 생각했다. 둘만의 비밀은 이제 혼자만의 비밀로. 누구도 알지 못할 완벽한 범죄로. 겨울녘 동안 녹지 않을 은밀함으로.

언덕에 혼자 남은 요슈아는 그날 이후 스스로 고립되길 택했다. 언덕 아래 몇몇 집에서 요슈아에게 겨울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렴, 하는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전부 거절했다. 어차피 그들이 떨어져 살던 가족과 제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고작 그 나이에도.

마을의 중앙에는 그나마 가장 큰 건물인 영주의 저택이 자리했다. 바깥에선 총을 들다 못해 전투기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귀족이란 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 저택이 마을에서 가장 크기는 했다. 그를 중심으로 주택가들이 산재했고, 염소의 우유를 짜거나 텃밭에서 딴 과일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옆에 붙어 있었다. 마을의 주변부는 예부터 이 오래된 영지의 농노로 살아온 이들의 밭 따위가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여름철에는 아이들이 밭고랑을 건너다니며 뛰어놀고 노래를 불렀지만 겨울, 눈이 오는 날에는 특히 미끄러워 사람이 적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저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영주님의 저택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았으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검은 저택'이라 부르며 이 마을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던 아주 오래된 저택이며,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으나 유령이 종종 나오거나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는 숲과 가까이 있어 들어가 굳이 살림을 살려는 사람도 없어 처치 곤란인 장소라 했다. 실제로 요슈아 역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검은 저택에서 사람이 나오거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다.

그러니까, 어린 요슈아의 시선이 닿은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렇게 눈이 올 때는 그 저택 앞에 있는 사람이라 해봤자 밭 주변 먼 데까지 상태를 살피러 나온 농부들밖에 없을 텐데. 실루엣은 농부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가늘기 그지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이 눈발에 가볍게 나풀거리는 소녀의 뒷모습이 시렸다. 키가 어느 정도, 그러니까 어렸음에도 또래보다 큰 요슈아만큼은 컸으나 나이 들지 않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나이 들지 않았다'는 느낌보다는 '어른이 아니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하여간에 저런 아이를 이 근처에서 본 적은 없었다. 그 비슷한 아이조차도 없었고. 애초에 이 마을에 요슈아가 알 만한 또래의 아이들은 얼굴을 다 외우고 있는 터였다. 눈을 깜빡이던 요슈아는 다시 한 번 손바닥 밑의 둥그런 살로 눈을 문질렀다. 문지르고 봐도, 눈이 아니라 사람. 그는 언 밭과 밭 사이를 질량 없는 걸음으로 걸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어쩌면 저 소녀는 춤을 추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요슈아는 실없이 생각했다. 눈 아래를 파던 손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대신 요슈아는 하나의 검은 얼룩 같은 아이가 저택 앞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니는 걸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정말로 한참이고. 눈이 쌓이고 쌓여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아래에 묻는 동안, 내내.

 

 

여전히 요슈아가 어리던 날의 일. 미세하게 쌓이고 찔끔찔끔 녹던 눈이 요슈아의 무릎 위까지 쌓이게 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후의 이야기다. 폭설은 전조 없이 요슈아와 언덕의 집을 덮쳤고, 요슈아는 겨울마다 가족이 했던 일을 떠올리며 찬장에 남아있던 쓰지 못하게 된 종이와 천을 한 장 한 장 세밀하게 창문에 펴 발랐다. 그래봤자 작고 초라한 집의 추위는 조금도 가시지 않아서 양손을 문지르며 슬슬 불을 더 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즈음이다. 덜컹, 소리가 들려 요슈아는 잠시 빳빳하게 힘주었던 턱을 굳혔다. 지붕에 올라왔던 눈이 아래로 한 번에 떨어졌나? 덜컹. 소리는 문간에서 났다. 이내 덜컹거리던 소음이 가라앉으면 그 위를 작은 마찰음이 더했다. 똑똑똑. 눈발 외에는 찾을 손님이 없는 언덕 위의 작은 집. 이제는 그만이 혼자 사는. 요슈아는 숨을 죽이고 몸을 일으켰다. 채 붙이지 못한 천이 나직하게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창문의 틈을 만들고 늘어졌다. 요슈아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답이 없는 와중에도 요슈아는 알 수 없는 호기심, 혹은 떨림에 의해 한 발자국씩 문에 다가서고 있었다. 자박자박 바닥을 밟는 소리가 문 앞의 사람에게도 들렸을까. 모자이크 형식의 유리로 된, 그리고 테두리를 어두운 금색의 철로 덧댄 문에는 손님의 실루엣이 비추었다. 눈에 가득 담기는 몸체는 흐려져 있었는데, 요슈아는 불현듯 일주일 전 자신이 아래의 밭에서 보았던 소녀를 떠올렸다.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 순간 쓸데없이 가슴이 두근거린 건 왜였는지. 요슈아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세요."

 

요슈아는 어느덧 청년과 소년의 사이, 변성기가 끝날 즈음의 그럼에도 어린 시기에 있다. 더럭 낮은 목소리의 끄트머리가 옅게 떨렸다. 두 번의 물음 끝에 드디어 손님이 답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뜻밖의 나직하고도 낭랑한 목소리였다.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요슈아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한참 실루엣을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문을 열어보았다.
마주한 이는 '그' 소녀였다. 요슈아가 마을에서 보지 못한 자신 또래의 여자아이. 검은 저택의 앞에 있던. 춥지도 않은지 소녀는 잠옷이나 실내복으로 쓸 법한 하얀 홑겹의 원피스에 아무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안녕."

 

눈이 마주치자 이름도 모르는 그가 웃었다. 뒤쪽에서 눈이 하염없이 흩날렸다. 두 사람은 거기서 처음 서로의 눈을 들여다봤다. 핏기 아주 없지 않았으나 눈보라에 사람이 묻혀도 모를 날씨였던지라 소녀의 유난한 창백한 얼굴은 꼭 눈에 파묻혔다가 막 나온 것처럼 새하얬고 누구도 밟지 않은 것처럼 티끌 하나 없었다. 요슈아는 문득 그 뺨에 손을 대 제 손자국을 내고 싶다는 미묘한 충동마저 느꼈다. 잠깐의 붉은색이라도 남을까, 저 눈 위에는. 그 자국은 얼마나 오래 표면 위에 있다가 비밀로 사라질까. 마을의 모든 것이 눈에 먹히거나 비밀이 되기 좋을 때, 가장 높고 누구도 찾지 않는 눈 속의 비밀, 작은 성전.

요슈아는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놔 버렸으니 이쪽도 말을 놔도 될 성 싶었다. 그는 일부러 퉁명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날아서."

"날아?"

"어. 날아서."

"날개가 있어?"


여전히 그가 웃었다. 농담처럼.


"아니. 안에 들어가도 돼?"

"아."

 

요슈아는 단마디를 내뱉으며 자신의 뒤쪽을 돌아보았다. 집.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이었던, 이제는 혼자 남은 집. 작지만 거실과 작은 주방, 그리고 그나마 가족이 살아계실 적 작은 난로를 구해 조금 더 따뜻해진 침실, 작은 욕실만이 있는. 요슈아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보금자리가 부끄럽다고 느꼈다. 차갑고 엉망인 곳에 정말로 들어오고 싶을까.

 

"방이 더러운데."

"음, 괜찮아."

"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야?"

 

침입은 언제나 달갑지 않았다. 소녀의 앞에서 요슈아는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데의 이질감이 더 심했다. 그 질문에 소녀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네가 날 초대해서."

"내가?"

"날 보고 있었잖아."

 

요슈아는 다시 한 번 일주일 전에 보았던 언덕 아래의 정경을 떠올렸다. 눈이 쌓인 밭, 잔뜩 언 길에 춤추듯 걸어가던 뒷모습. 눈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다시 헤집어 봐도 눈이 마주친 적은 결코 없었다. 소녀가 말갛게 혹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지?"

"어떻게 알았어?"

"초대해줄 거지?"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소녀는 다시 제가 할 말을 입에 담았다. 초대해줄 거지? 어긋나는 대화 속에서도 요슈아는 자신의 언어와 소녀의 언어가 비슷한 온도를 지니고 있다는, 미세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막연한 고독의 무게였다. 눈처럼 희고 비밀처럼 검은.

요슈아는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긍정을 신호로 소녀는 굳은 듯 서 있었던 몸을 움직여 요슈아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피부에 와 닿는 화한 냉기가 요슈아를 잠시 망설이게 했다. 그는 열린 문을 닫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침실의 문을 열었다. 낡은 침대에 소녀는 거리끼지 않고, 그러나 조심스럽게 앉았다. 어쩐지 반가웠다. 아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곳에 사람이 온 게 얼마만인지, 에 대한 감격이라고 생각했다. 요슈아는 침착한 척 덤덤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제리."

"제리?"

 

소녀, 제리가 말했다.

 

"응, 제리. 너는?"

"아, ……나는 요슈아."

"요슈아."

 

막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제리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요슈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의 옆얼굴을 훑었다 시선을 떼었다.

 

"요슈아라고 해도 돼?"

 

제리가 미소를 지으며 묻고, 요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제리는 그날 요슈아에 대해서 많은 걸 묻지 않았다. 제리가 묻지 않았기에 요슈아도 그러지 않았다. 둘은 다만 앉아서 오래도록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의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를 듣기도 했고, 간혹 눈이나 마을의 길목, 언 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위가 얼마나 미끄럽고 위태로운지, 눈이 한참 쌓이면 밖으로 나가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눈 아래에 간혹 아이들이 물건을 떨어뜨리곤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도. 그러는 동안 제리의 얼었던 몸은 차근차근 녹아 온도를 되찾았다. 돌아온 온도는 어쩐지 요슈아의 것보다 조금 낮았지만, 서늘한 살갗이 요슈아는 영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 내도록 마을에는 눈이 내렸고, 요슈아는 제리의 앞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꾸벅꾸벅 감기는 눈을 애써 비벼가며 떴다.

창을 툭툭 때리던 눈 소리가 사라진 건 새벽녘 동이 터올 즈음이었다. 혼곤한 피로 속에서 헤매던 요슈아를 제리가 불렀다.

 

"요슈아."

"응?"

"나 이만 가볼게."

"어…… 더 있어도 돼."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요슈아가 말했지만, 몸을 일으킨 제리는 요슈아를 돌아보곤 가만 고개를 저었다. 투명하리만치 빛나는 검은 눈에 제가 고스란히 비추어졌다. 차가운 몸이었는데도 제 옆에서 떨어진 순간 요슈아는 지독한 추위를 느꼈다. 그런데도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자꾸 눈이 감겼다. 스르륵, 눈꺼풀이 아래로 떨어질 때 제리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잘 자, 요슈아. 그 건조하고 차가우면서 다정한 목소리.

요슈아는 꿈 녘에서 자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주름진 손을 느꼈다. 죽어버린 그의 보호자였다. 그는 요슈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울고 있었다. 불쌍해라, 불쌍해, 말하는 그에게 왜 울어요.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이 목소리도 눈도 먹어버린 것처럼 암담했다. 정신은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하고 가족의 목소리는 유일하게 먹히지 않은 귀에 자신을 새기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내 잠 속에서 정신은 하나로 모아지고, 그 순간 요슈아는 익숙한 어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을 들었다. 눈처럼 고요하게 내려앉는 다정함. 이렇게 말하는.

잘 자, 요슈아.

아, 그 매끄럽고 티 묻지 않은 살결이 제 머리칼을 쓸어주는 마지막 감촉.

 

 

꿈을 꾸고 일어난 하얀 날부터 요슈아는 눈이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주 오래도록.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면서 막막한 그리움보다 확실한 기다림에 익숙해진 요슈아는 좀 더 자랐다. 산지에 만연한 흰빛은 한동안 눈이 오지 않는 나날을 거쳐 서서히 물로 녹았고, 그로부터 사흘 뒤 언덕 아래에서 들려온 날카롭고 새된 비명이 하나의 비밀을 건져 올렸다. 폭설 탓에 학교는 일주일 내리 휴교였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이런 촌동네에 가까운 영지에서 귀족도 아닌 평민의 아이로 태어났으므로 구태여 학문을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아이들은 종종 학교를 빼먹곤 했다. 바깥세상에는 이미 자본가가 혁명을 일으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모호해졌다지만, 그것은 요슈아가 살고 있는 강촌 영지에서는 썩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눈이 녹는 동안 밖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시체를 발견했다고 마을에는 금세 소문이 돌았다. 영주님의 저택에서 고작 한 블록 너머에 사는 성당의 웨이드 신부님이더라, 그분께서 온몸에서 피를 뿜은 채로 죽어 있었더라, 아니더라, 목이 꺾여서 그 사이로 피가 질질 새고 있었더라, 이런 소문이 하염없이 도는 걸 요슈아는 조심스레 언덕 아래 가게에 찾아갔던 날 알게 되었다. 그 집에는 아내 하나와 어린 딸이 살고 있다며, 안타깝게 됐다는 말을 연신 하던 가게 주인. 마을의 누가 죽었든 요슈아는 식료품점의 주인이 제 가족이 죽었을 때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를 더 떠올렸다. 잘 죽었지, 지 식솔도 데리고 가지 그랬누, 혀를 쯧쯧 차며 내뱉던 뭉근한 악의. 요슈아는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먹을거리를 품에 안고 언덕을 올라오며, 자신이 들른 가게의 주인이나 마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요슈아는 잠시 멈춰 서서 하늘로 흰 입김을 뿜어냈다. 가족이 듣는다면 미운 생각을 한다고 할 테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줄 가족도, 가족도 더는 요슈아의 곁에 없다. 언덕 위에는 오로지 소년 혼자. 눈이 내리지 않으면 그 제리조차 찾아오지 않은, 외딴 섬처럼….

똑똑.

그러나 희게 갈라지는 물거품처럼 눈이 둥글게 사라져가는 밤에, 소녀는 다시 요슈아의 집 문을 두들겼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요슈아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제 발이 꼬이는 것도 모르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달려간 요슈아가 문을 열면, 제리가 거기에 있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다는 듯이 말간 얼굴이었다. 여전히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모슬린 잠옷.

 

"제리."

 

저도 모르게 벅찬 숨이 내뱉어졌다. 제리가 웃었다. 집 안쪽에서 났던 제 넘어지는 소리를 제리가 들은 것 같아 요슈아는 조금 맥없이 혹은 한심하게 웃었다. 제리가 말했다.

 

"들어가게 해줘."

"들어와."


대화는 짧고 건조했다. 그 차가운 공기에도 요슈아의 가슴께는 가쁘게 뛰고 있었다. 허락의 말과 함께 제리가 요슈아의 품 안으로 눈처럼 다가와 안겼기 때문에,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옅은 체온이나 숨결 같은 것들이, 어쩐지 외딴 섬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찾아냈을 때처럼 기껍고 정겨웠다. 요슈아는 긴 세월 동안 안는 법을 잊었던 사람처럼 팔을 엉성하게 제리의 등에 휘감았다.

있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왜 늘 외로울까. 누구도 나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비밀처럼 여기에 있는데.

그날 요슈아와 제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이야기를 눈처럼 쌓았다. 요슈아는 마을에 관한 이야기와 돌아가신 보호자, 식료품점의 주인과 영지 안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 라고 속닥일 때 제리는 그저 얕은 숨을 가만히 들이켰다. 어쩌면 그래서 외로웠을까,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서. 이제는 자신을 돌보아주던 이도 세상에 없어서. 이야기는 버겁지 않은 무게로 쌓여 두 사람을 덮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슈아는 오래 전에 읽었던 동화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개와 함께 눈이 오는 날 멋진 동상 앞에서 아름다움 속에 파묻혀 얼어 죽어가는 소년. 네로는 죽어갈 때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단다, 라고 조곤히 이야기하던 가족의 목소리. 이제 요슈아는 제리를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겨울마다 나타나는 제리에게 언젠가 요슈아는 우리 친구야? 라고 물었고, 제리는 웃으며 그럼 아니야? 라고 한 적 있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그리움에 휩싸여 요슈아는 조심스레 손끝을 매만졌다. 이불을 덮고 마주 본 채로 누워있는, 가까운 시야였다. 손길을 거절하지 않으며 제리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글쎄. 난 많은 곳에서 왔어…."

"많은 곳?"

"네가 알지 못하는 많은 곳에 있었거든. 하나라고 말해주기 어려워."

"나는 이 영지 마을밖에 모르는데."

"알아. 너는 아주 어리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리의 웃는 얼굴은 다섯 살 배기 어린 여자애처럼 보이다가도 아주 나이 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질감. 요슈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너는?"

"나는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그러므로 미지에서 내게로 온, 나의 유일한 앎.

느린 숨을 내뱉고 요슈아는 눈을 뜨지 않는 제리에게 맞춰 제 눈 위에 눈꺼풀을 눌렀다. 피곤하지 않았지만 편안했다. 요슈아는 감은 눈 아래에서 오래도록 소녀인 제리를, 여자인 제리를, 아주 나이가 들고 늙은 제리를 그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뭐든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아."

 

요슈아의 나직한 말을 끝으로 제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요슈아와 제리가 느끼고 있는 마음이 같다는 것이었다.

사락사락 쌓이는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다만 차가운 손을 맞잡은 채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는 제리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요슈아는 제 목에 걸린 낯선 은색 목걸이를 발견했는데, 그것의 출처는 제리가 옆자리에 남긴 쪽지를 보고서 알 수 있었다. 「선물이야.」 짧은 문장보다도 텅 비고 외로운 이불의 옆을 바라보며 요슈아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에 대해 오래 곱씹었고, 그 감정에 느리게 잠식되었다. 네가 보고 싶어. 서툴고 앳된 문장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눈 아래에 파묻혔던 비밀을 요슈아가 발개진 손으로 파헤쳐 찾아냈을 때처럼, 차갑고 경이로운 감각. 요슈아는 이제 오래 전 죽은 가족이 아니라 제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묘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기뻤다. 잔잔한 기쁨 사이에서 요슈아는 느리게 눈을 감고 제리가 누워 있었을 이불 한쪽을 구겨 끌어안았다. 이대로라면 얼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 흐려지는 이미지가 꼭 아름다움처럼 느껴질 것 같아. 동화 속의 한 구절처럼.

그리고 또 여러 해가 흘렀다. 요슈아가 좀 더 자라기까지. 요슈아가 소꿉친구라고 생각했던 제리는 그 몇 해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리지 않게 될 때마다 동화의 구석을 깨뜨리고 나타나는 언어가 있다. 해마다 마을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요슈아의 가족이 늘 가던 '시드 꽃가게'의 여주인이 논밭 근처에서 피가 다 빨린 채 희게 질려 죽어 있었고, 어른들은 앞뒤를 분간할 줄 모르는 폭도처럼 한 단어를 떠들어댔다. 소문은 입에서 입, 언어에서 언어를 타고 느리게 미끄러져 몇 해를 마을 바깥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 얼마의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너끈히 들고 영지로 돌아온 요슈아의 귀에도 들어왔다.

흡혈귀의 짓이래. 꼭 흡혈귀가 그런 것처럼 목 옆에 두 개의 뚫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거야.

불현듯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박혔다. 언덕 아래에서 내려다보던 검은 무채의 소녀. 아무도 살지 않는 오래된 불길한 저택 앞에서 거닐던,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왔던, 들여보내 달라 조곤조곤 묻던 아이. 밤중의 차갑고 안락한 손길. 포근하게 쌓인 이불 같은 눈…. 마을 입구까지 오는 길목의 모든 눈이 사람의 발자국으로 녹아 있었다. 종례 시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났으니 밤에는 집 밖에 나가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요슈아는 어리지 않고 어른이지도 않은 사이에 서서 그 말들을 그저 듣고 흘리기만 했다.

제리가 다시 변함없는―혹은 딱 요슈아만큼만 자란 모습으로 찾아온 것은 요슈아가 영지에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의 밤이었다. 항시 입는 흰 옷에 핏자국을 선명하게 묻힌 채였다. 요슈아, 들어가게 해줘, 제리는 언제나처럼 이야기했다. 난로의 불이 타닥거리며 작은 소리로 타올라, 눈이 불꽃으로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처럼 처음 듣는 소리를 냈다.

요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제리를 집 안으로 들였다. 물에 따뜻하게 적신 수건을 가져와 피로 점철된 제리의 손을 닦아주면서도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제리가 먼저, 아주 오래된 날의 대화를 끌어오듯 조용하게 말을 꺼내기 전까지도.

 

"내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었지."

 

요슈아는 문득 직감에 대해 생각했다. 제리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나이가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 혹은 '어른이 아니라'는 직감. 그는 어른이 아니었다.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슈아."

"응."

"나, 봐줘…."


투명하리만치 안쪽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은빛 눈. 금속보다는 차라리 눈 내리기 직전의 하늘을 닮은. 마주침은 공간 안에 있는 서로를 느끼기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 요슈아는 제리의 존재를 무엇보다 명확하게 느꼈다. 제리가 피가 닦여 얕은 분홍색으로 흐려진 손을 뻗었다. 그가 가만히 뺨을 쓸어내린다. 실은 요슈아는 그 순간에, 자신의 뺨에 출처 모를 피가 묻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

"나, 뱀파이어야."

 

뱀파이어. 흡혈귀.

환상에서나 나올 법한 문장. 아주 오래 전, 잠이 오지 않는 어린 밤 요슈아는 가족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먼 나라의 피를 마시는 기괴한 백작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동화의 한 페이지를 열어 읽다가 사실 그것이 어른의 전유물이라는 걸 느꼈을 때의 불쾌함과 생경함. 그리고, 불온함과 설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요슈아는 자신 안에 이런 것이 있는지 몰랐다. 눈이 녹고 드러난 지층의 불결한 무늬처럼 요슈아는 울음을 참는다. 어쩌면 웃음을 참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요슈아가 제리의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지조차 않았다는 것이다.

요슈아는 오랜 친우이자 한시도 생각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동반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람을 죽였어?"

"목이 말랐어."

 

제리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애매하고 미비하게 웃고 있었다. 요슈아는 어떤 것들을 복기한다. 빼곡하게 채워졌다가 다시 비워지는 박동. 눈 위에 피를 흩뿌리며 죽어갔을, 가족의 시체를 운반하면서도 눈을 홉뜨던 남자. 뒤에서 주름지고 억센 손을 가진 외로운 등과 그 손을 잡은 아이를 흉보던 목소리. 그들의 시체가 눈 아래 묻혀 비밀이 되었다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요슈아는 환희를 느끼진 않았지만 슬프지도 않아서, 차라리 그 어떤 것도 관심 두고 싶지 않았고, 단지 목이 말랐다고 느린 동작으로 이야기하는 제리의 목마름에만 타는 듯 아팠다. 그는 바싹 마른 입안을 제 타액으로 적시고 말했다.

 

"그 사람들 우리 가족을 무시하던 사람이었어."

 

요슈아는 이 말을 하고서 자신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적개심으로 속 울렁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대한 염오. 아주 희미한 분노….

제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무섭지 않아?"

 

요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보다 어떤 명제를, 감정을, 마음을 확신했던 적이 없었다.

 

"안 무서워."

 

정말이지 무엇도 무섭지가 않았다. 너의 갈증과 부재 외에는, 어떤 것도.

두 사람은 한참이고 서로를 마주 보며 투명하고 흐릿한 눈동자 안에 서로의 모습을 박아 넣었다. 제리는 천천히 요슈아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입을 뗐다. "이제는 우리 집으로 갈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럼에도 이때를 고대해온 것 같은. 요슈아는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우리 집?"

"사람들이 부르는'검은 저택' 말이야."

"늘 궁금했어."

 

요슈아는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그러나 눈을 아주 감지는 않아서, 그의 가늘게 뜨인 시야에는 여전히 제리의 창백한 손이 남아 있다.

 

"네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일지."

"왜?"

 

제리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물었다.

 

"네가"

 

요슈아는 여기에서 잠시 망설인다. 눈꺼풀이 다시 들리면 무슨 환한 말을 먼저 들은 것처럼 제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외로울 것 같아서."

 

나는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나, 뱀파이어야. 그 말들을 들으면서 다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어둔 데 놓아둔 촛불처럼 희붐하게 몰아낸 제리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리하여 제리만이 알고 있는 세월을 짚어내고 싶다는 욕망. 처음 그를 보았을 때에 제리의 언어에서 느꼈던 막연한 고독을 그대로 밝힌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제리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웃었다. 처음으로 핏기가 도는 소녀의 뺨을 보며 요슈아는 마음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겹친 손을 떼지 않고서 요슈아는 말했다. "갈래." 그 다음 나온 말은 이 상황보다 더 원초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다.

 

"보고 싶어."

 

그냥 너를, 오래도록.

 

 

저녁이 깊어지면 밤이 된다. 요슈아가 제리를 '초대'했듯, 이번에는 제리가 요슈아를 초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요슈아와 제리는 손을 꼭 잡고 침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검은 저택으로. 인적은 몹시 드물어지고, 마을의 불빛도 멀리 어룽지는 희미한 무리로만 남아 요슈아는 그립지도 않은 마을을 자꾸만 돌아봤다. 멀리서 보는 영지만이 퍽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검은 저택의 안은 적요하고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아 마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거미줄이 바닷속에도 있을 수 있다면 이런 실내의 형태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제리는 작게 "어서 와." 라고 말했고, 요슈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리게 "초대해줘서 고마워." 라는 말을 했다. 이내 피로가 몰려와 제리가 2층에 있는 침실로 향했을 때는 요슈아도 함께였다.

 

"이쪽으로 와, 요슈아."

 

움직일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불을 덮고 누운 제리의 옆으로 요슈아는 꾸물거리며 들어와 함께 누웠다. 함께 눕는 것은 이제 하나도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다. 두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아닐지라도 두 존재가 나란히 이불을 채워, 이불 속은 하나의 공간과 세상으로 채워졌다. 내 세상. 더는 누구도 들어와 마주 보며 눕지 않았을 요슈아의 어린 세상. 몸 바깥으로 삐져나온 제리의 손을 요슈아는 잡아 쥐었다. 피로감이 아까까지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어째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까까지 제리가 피를 묻히고 집에 들어와 그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고백한 일은 다 아주 먼 일 같았다. 그것이 먼 일이든 가까운 일이든, 영지민들이 얼마가 죽어나가든 그에게는 이제 알 바 아닌 일이었지만. 요슈아는 제리의 손을 보드랍게 감싸 쥐면서 입을 열었다.

 

"제리."

"응, 요슈아."

"외롭지 않았어?"

"여기에서?"

"응."

 

제리는 그때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인데도 그 시선이 더욱 검고 곧게 닿는 것 같았다. 요슈아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윤곽이 흐리게 뭉개진 채 보이는 제리의 얼굴을 담으려고 애를 썼다. 제리는 그때에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요슈아의 목으로 뻗쳐왔다. 요슈아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어깨 한 번 떨지 않고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곧 가벼운 무게가 목에 걸려 기울어졌다. 목걸이는 우스꽝스럽게도 두 줄이 되었지만, 요슈아는 그것 때문에 웃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요슈아가 똑똑히 깨어 있을 때 그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준 제리는 이번에야말로 명확하게 웃었다. "선물이야. 돌아온 기념." 이라고.

 

"이제는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심장에 추가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둘은 함께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하릴없이 떨어지고 마는 포근한 잠기운 안에서 요슈아는 생각했다. 세상이 오래도록 우리가 원하는 모양으로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이 녹지 않고 계속해서 쌓여 있고, 동화책은 덮이지 않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반복한다면. 닳고 닳을 때까지 우리의 시절을 머금을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우리가 고정될 수 있도록 네 갈증을 나로 오래도록 채웠을 텐데….

 

 

요슈아의 열아홉 겨울이 지나간다. 스물과 함께 서서히 눈이 녹는 계절이 찾아 오고 있었다. 그 사이 마을에는 몇 건의 살인사건이 더 일어났다. 작은 영지, 누구든 서로를 알고 있는 지긋지긋하고 가까운 마을. 이후부터 요슈아는 검은 저택에서 종종 잠을 청했고, 꼬박 며칠을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제리와 함께할 때도 있었다. 물론 언덕 위 요슈아의 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주로 영지민들이 보지 않는 어둔 밤 둘은 검은 저택과 요슈아의 집 사이를 오가곤 했다. 그래도 요슈아가 더 오래 지내는 곳은 언덕 위 자신의 집보다는 제리의 저택이었다.

그즈음 마을 사람들은 작은 시장에 나오거나 먹을 것을 사기 위해 가게로 향하는 요슈아의 뒤통수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제리에게 보여주겠다며 낡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몇 권의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광기 어린 괴성을 내지르며 야수의 성으로 밀려오던 장면. 이상하게도 그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요슈아는 꼭 성 안에 갇힌 야수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실은 언제나 그랬던가.

겨울의 눈 아래 비밀이 숨어있는 곳. 녹아 비밀이 드러날 때 그곳에는 꼭 검은 구정물이 튀고, 거리는 더러운 물로 어지러우며 밟는 곳마다 축축하게 젖는다. 호외요, 호외!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소식은 전쟁에서도 영지 안에서도 곧잘 들려 왔다. 녹은 눈이 마을을 점점 더 구정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제 발치에 붙는 눈빛만 봐도 그랬으니, 요슈아는 이제 어렵지 않게 그들이 저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류의 '의심'에서 비롯된 줄은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의 미지는 어느 날 마을의 목소리 큰 젊은 목수가 언덕을 오르고 요슈아의 집에 찾아오면서부터 어떤 확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인중과 턱에 거뭇거뭇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청년은 눈이 녹아가는 언덕 위를 올라와 요슈아의 집 문을 두드리곤 이것저것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요새는 어떻게 지내냐는 둥, 얼마 전에 다시 돌아온 것 같은데 사정은 어떠하냐는 둥, 누구도 요슈아에게 갖지 않는 관심을 구태여 떠먹이며. 그러나 그 가는 눈, 눈꺼풀과 속눈썹 사이에 숨겨진 혐오는 가시지 않고 요슈아를 짓눌렀다. 왜, 어째서, 무엇을 위해 속에서만 뭉근히 되씹던 고민은 청년의 다음 질문에 되새김질을 잠시 멈추었다.

 

"요새 밤에 밖에 돌아다니고 그러냐?"

"아뇨, 밤에는 왜요?" 요슈아는 제리의 차갑고 야윈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던 일을 떠올렸다.

"그냥. 돈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이유로."

"돈이 부족한데 왜 제가."

"너 말이야, 이젠 너희 집 어른도 안 계시고, 홀로 널 키우셨는데 남긴 재산도 그렇게 많으셨을 리가 없잖아. 솔직히 말해봐. 너, 예전 어릴 때 밤에 웨이드 신부님이나 시드 아줌마 본 적 있어?"

 

웨이드 신부, 시드 아주머니. 두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흡혈귀에 물려 죽은 시체의 이름이었으므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멍청한 표정으로 그의 낯을 무력히 보고만 있었을 테지만 요슈아의 세상은 그만큼 차근차근 넓어지고 기이하게 비틀린 채였다. 자신을 향해 오는 시선들이 어떤 모양을 가졌는지, 언어는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는 때. 마을은 끝까지 잔혹했다. 타인이 쉽게 오를 수 없는 언덕 위, 고작 그 언덕 위에 가족조차 없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외로움이 핍박받아야 할 이유였다면 요슈아는 자신의 보호자가 숨을 거뒀을 때 그의 관 옆에 함께 누워 다시는 눈뜨지 않았을 텐데. 다만 요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심증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므로 목수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으로 요슈아를 들여다보다가 '일단은 알았다'라 말하곤 언덕을 내려갔다. 잰걸음으로 걷는 그의 뒤편에서 요슈아는 끔찍한 피로를 느꼈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밤이면 제리가 찾아올 터였다. 아니라면 자신이 검은 저택으로 그를 찾아가거나. 그걸로 족했다. 모든 것이 그걸로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부류의 행운은 오래 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언덕 위를 바라보는 동안에는 더더욱. 밤중 언덕을 오르는 둘의 모습을 본 건 마을의 한 노인이 먼저였다. 그 노인은 흐리고 멍청한 눈으로 밤의 밀회를 유심히 보았고, 다음 날도 창 너머로 그 걸음을 마주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검은 저택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은 서로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로 둥글게 이동하고 서로를 연결해 결국 하나의 원이 만들어졌다. 그 원은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켰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숱한 살인사건이 저 기이한 소녀와 연관되어 있다는, 모순적이면서도 완벽한 가설을. 원은 언덕을 짓누르며 그것을 기어코 공동체의 밖으로 몰아내고 분노를 쌓았다.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들, 아이들과 노인들의 기묘한 얼굴, 제가 반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저마다 속닥이는 음성을 요슈아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어느 날엔 마을로 내려갔을 때에 영지에서 가장 덩치가 큰 또래의 남자애가 요슈아를 저녁 학교 뒤편으로 몰래 불러냈다. 뒤뜰에 발을 디디자마자 퍽, 하고 시야가 흔들렸다. 눈앞에 자신을 불러낸 남자애가 보였다. 맞은 얼굴의 고통은 그 다음이었다.

 

"너, 살인자랑 같이 지낸다면서?"

 

그가 시비를 걸어댔을 때에 요슈아는 자신의 턱밑까지 무언가가 쫓아왔음을 깨달았다. 폭력은 날 것으로 점차 요슈아를 향해 가까워져 선득선득 자신의 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슈아는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관짝에 실려 가던 가족처럼. 그토록 외롭고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식.

기어이 요슈아를 패대기친 장정이 언 땅 위로 침을 뱉었다. 그는 아주 불결한 것을 본 것처럼 짜증스러운 낯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검은 저택을 태우러 갈 거라고. 그게 있어서 이 마을에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라고."

"태운다고?"

"그래! 너, 거기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드나들지? 시체를 거기서 처리 하는 거지? 거기에 괴물과 함께 사는 거지!"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니라고!"

 

난생 처음으로 분개하여 고함을 지르며 요슈아는 엎어졌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새끼가 날 죽이려고 해, 이제는!" 언제 폭력을 행사했냐는 듯 남자는 겁에 질려 금세 골목으로 달아났다. 요슈아는 찬바람 부는 학교 뒤의 공터에 주먹을 파르라니 쥔 채로 오래 서 있었다. 외롭고 적요하여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식. 그렇다면 제리는 어떨까. 요슈아는 오래도록 검은 저택에 유령처럼 홀로 있었을 소녀이자 여자이자 제리, 그저 제리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자신 스스로보다도 제리가 더 염려되는 마음이 속에서 출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기세등등하게 지키고 있는 마을과 검은 저택 사이 길목을 지날 수 없어 둘은 요슈아의 집에서 마주 앉았다. 발갛게 붓다 못해 멍든 뺨을 제리는 밤에야 마주했다. 그는 요슈아의 앞에서야말로 드물게 웃지 않는 표정을 하고서 고요히 물었다.

 

"누가 그랬어?"

 

요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중요치 않다는 뜻이었는지.

 

"제리,"

 

다만 불렀을 뿐이다. 제리는 그의 뺨을 고집스럽게 바라보다 "응,"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요슈아가 웃었다. 다시 한 번 소녀를 호명하면서. 검은 저택, 살인자가 있는 곳, 괴물의 거처, 불길한 곳을 태워버릴 것이라고 소리치던 소년의 우악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제리."

"응."

"우리 도망칠까."

"도망?"

"네가 갔던 많은 곳에 나도 데려가줘."

 

눈 쌓인 아름다움 앞에서 그것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얼어서 죽어가는 동화. 횃불을 치켜든 채 야수의 성으로 몰려오는 화난 마을 사람들. 죽음과 분노는 마주하는 순간 요슈아는 자꾸 동화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져, 그게 꼭 제리와의 이별을 말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제리의 손을 쥐었다. 눈처럼 차가운 손. 아래로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올 즈음엔,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그럴까…."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완벽한 결말이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수런거리는 마음. 그러나 이것이 네게 향함을 이제는 알아. 동화의 한 페이지를 열어 읽다가 사실 그것이 어른의 전유물이라는 걸 느꼈을 때의 불쾌함과 생경함. 그리고, 불온함과 설렘. 여긴 언제까지나 문장과 소설의 안쪽이라, 네가 욕망하는 만큼 그 서사를 맛봐도 된다는 끔찍하고 찬란한 허락. 이곳은 더 이상 아이의 영롱한 세상이 아님에도, 이토록 벅찬 행복이….

 

 

언덕을 내려가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분명 요슈아의 가족은 이곳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죽어갔는데. 아래서 봐도 낮게만 비치는 언덕과 그 위의 작은 집을 보면서 요슈아는 웃지 않았다, 아니다, 조금 웃었다.

사람들이 우우 발소리를 내며 횃불을 들고 검은 저택으로 향한다. 그 빛이 아주 예전 요슈아가 제리의 저택으로 처음 향할 때에 돌아보았던 마을의 먼 불빛처럼 어룽지고 있었다. 둘은 통상적으로 상인들이 마차를 끌고 드나드는 입구가 아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입구 반대쪽의 검은 숲으로 향한다. 품이 큰 요슈아의 옷을 걸치고서 한참 달리다가 제리는 작게 말했다. 목말라. 스스로의 입매를 쓰다듬는 그의 손끝을 보고서 무거운 짐 가방을 메고 있던 요슈아는 마을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길목 앞에서 가만히 멈춰 서서는 제 손목을 감싼 천을 걷었다. 이토록 역동하는 맥박. 모든 피가 너로 인해 흘러가는 듯한 기이한 착각 속에서,

제리가 울 것처럼 말했다. 그에게는 죽음이 몹시 쉬웠을 것이고, 숱한 살해를 거쳐 왔을 텐데도 겨울 하늘 같은 눈동자에는 첫 두려움처럼 물기가 고였다. 너를 해치고 싶지 않다고, 무슨 선고처럼 하는 말이었는데도 이토록 달다.

 

"내가 널, 널 죽일지도 몰라…."

 

그런 환희 속에서, 요슈아가 대답했다. 별빛이 요슈아의 머리칼 위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네 갈증을 온전히 나로 적실 수 있다면.

제리는 떠는 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가, 오래 망설이다가, 마침내 요슈아의 드러난 깨끗한 팔목에 이를 박았다. 혹은 요슈아가 제리에게 저를 내어주었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고통은 기쁨과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 그러던가. 타오르는 환희 속에서, 요슈아는 자신이 초라하게 얼어 죽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바닥에 점점이 핏자국이 떨어졌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작은 성전으로 향하며 분노를 외칠 텐데, 막상 열어젖힌 그 문 안의 야수는 도망치고 없을 때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할까. 적어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게. 멋대로 문장을 씹고 맛보던 자들의 눈길에서 벗어나, 그들은….

 

 

동이 트고 눈이 녹았다.

겨울의 눈 아래에 덮이는 비밀이 있다. 오로지 그 계절에만 숨길 수 있는 차가운 금기. 그런 것들은 대개가 시간에 둘러싸이는 몹시 사소한 것들이어서, 눈이 사라지고 나면 부드러운 흙 위에 비밀의 행방은 남지 않고 흩어진다. 아침, 영지 밖으로 벗어나는 골목 어귀에 찍혀있던 발자국 두 쌍과 핏자국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의해 흐리게 지워졌다. 그리고 모든 눈이 녹은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소문과 이야기 혹은 눈으로 빚은 순백의 동화 같은 문장 한 줄이 나돌 뿐이었다. 외로운 두 사람, 두 존재가 있었노라. 비로소 함께였다더라.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르면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르면

@peieace

 

제리. 호명은 내면의 음악을 닮아 한도 없이 부드럽다. 천사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 적 있어? 앰프를 떠난 잔음의 울림은 천국으로 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어느날 당신의 무대 아래에서 해본 일이 있다고는 도무지 고백할 수 없었다. 장내를 가득 채우는 네 노래에 압도 당하는 것 쯤이야 매양, 무수한 관객들의 얼굴에서 발견할 게 분명하면서도. 요슈아가 웃는다. 아니, 실은 그가 불러주는 아주 사소한 노래에서도 나는 천국을 연상한 일이 있다. 환하고, 따스하고, 아름다우며 순결한 세계를. 잘은 몰라도 그곳에는 분명 이만큼의 평온함은 깃들어야 마땅하리라고. 변칙적인 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준 사람이니까. 네가 내 노래를 들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아? 언뜻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어쩐지 그가 말하는 광경은 상상이 갔다. 그가 날 보며 노래를 부를 때의 얼굴과 같겠지. 요슈아. 그러므로 호명은 새삼스레 간지럽거나 낯설지 않았다. 상상해 본 적 있어. 피아노의 건반을 떠올린다. 어쩌면 아주 오래토록 떠올려 왔다.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peieace

 

지표로 삼은 흉터가 맞아야만 했을 불가피한 통증. 인내로 전한 내 사랑이 어찌나 초라해 보였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세상이 깨어지느라 맞이한 실금같은 균열로 부터 빛이 쏟아졌다. 그 아래로 나란히 누워 굴곡을 헤아릴 수 있는 까닭은 이 껍질 안이 대낮처럼 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늑한 두 명분의 세계에서 우리는 먼저 유실했던 자아의 파편을 도로 삼켜야만 했고, 어둠을 낱낱이 밝히지 않아도 분별할 수 있듯 서로의 기운 살갗을 어루만져 익혀야만 했다. 발 딛은 이 별이 완전한 구의 형태이지 않듯 우리의 뾰족한 모서리 또한 영원히 둥글어 질 순 없겠지만 베이지 않을 만큼 무뎌질 순 있을 것 같단 가능성의 징조는 사포처럼 우둘투둘하기 보다 바람이 불어오거나 물길이 퍼지듯 도무지 아플 것 같지 않았다. 어떠한 변칙도 없이 감미롭기만 한 이때를 영원히 누릴 순 없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아주 오랫동안 괜찮을 것만 같다고. 어쩌면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불멸의 평화를 함께 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_tsuki

 

음악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어느 날 제리가 물었다. 단순한 말장난 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라기엔 그녀의 얼굴은 사뭇 진지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에 요슈아는 가볍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잠시 자리에 서서 정지하길 택했다. 낯선 땅과 낯선 존재들 그 사이에서 가뜬히 부유하던 어떤 이방인, 나. 요슈아. 방어기제 쌓지 못하고 벽을 세우는 대신 물처럼 흘러가길 원하니 다른 이들은 수면 위로 돌을 던졌다.


바닥으로 가라앉던 돌의 수가 늘어나고 종내 돌에서 자갈로, 자갈에서 입자가 고운 모래로 바뀌는 시간보다 빠르게 공간이 가득 차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물은 범람하기 시작한다. 둑을 쌓지 않아 평평한 땅으로 서서히 스며들지 못하고 울컥울컥 경계를 침범하는 힘은 도저히 홀로 막을 수있는 부류의 재해가 아니었기에, 세상은 수몰되고 의식은 심해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이따금씩 위로 올라가는 공기방울 만이 수면 너머의 공간을 상기시켜줄 뿐, 뒤바뀐 세계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소리가 먹혀들어 먹먹한 수중 생활에서 요슈아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기실 소리는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수면 아래서 몇 배는 더 빨리 헤엄친다는 사실이었다. 본래 알던 언어의 작법을 모조리 뜯어내고 새로운 언어를 익힌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니 한참을 방황하다가 어느 날 우연찮게 수면 아래로 흘러들어온 것은 잊혀져가던 모국어로 된 음악이었다. 정확히는 제목 생각나지 않는 자신의 습작 중 하나를 흥얼거리는 어떤 목소리. 완벽한 어인 魚人 이 되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아득한 기억 속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러니 수면 위의 이는 어려운 추측 차치하고서도 쉬이 알아챌 수 있는, 어렸을 적부터 지겹도록 뱉고 삼켜낸 이름의 주인일 터였다.

"제리."

 

"아, 요슈아! 오랜만에 보지, 타지 생활은 이제 좀 적응 했어?"

 

"여기서 우리 둘 다 머무른 지 3년이 넘었는데, 설마 아직도 어색할까봐."

 

"헤헤…. 그냥, 혹시 몰라서. 가끔 요슈아 눈을 들여다보면 범람할 것 같이 촉촉할 때가 있거든-"

 

"또, 괜한 걱정이야, 제리. 정말이라니까…."

 

"난 곧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잖아! 요슈아도 참,"

걱정 마, 네가 있는 한 알고 있던 언어를 완벽히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라는 추레한 고백같은 말은 하기 부끄러워서,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일 수 밖에 없다. 오늘 헤어지고 나면 며칠 뒤, 제리는 머나먼 땅을 딛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같은 언어를 독해하는 이 사라지고 나면 요슈아는 인간의 호흡법을 망각하고 아가미를 새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음악이, 환청같은 목소리마저 완벽히 말소되고 난 뒤엔 가지고 있던 목적마저 상실할 지도 모른다고….

[이 파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영구 삭제 시 복원할 수 없습니다.]

[예]
[예]

타인에게 어물쩍 흘려보내기엔 너무 큰 질량의 감정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수챗구멍을 뽑아 땅을 집어삼킨 물을 빼내는 방법 대신 또다시 보이지 않는 저 너머 바닥으로 큰 돌을 버리길 택한다. 제리가 돌아간 뒤 처음 잡은 마이크, 노래의 첫 소절을 위해 운을 떼는 요슈아의 목 너머로 비릿한 무언가가 걸려 목소리를 막아버렸다. 진실을 고하지 못하고 거짓만을 이야기하는 이는 결국 목소리를 잃게 된다…. ⊙

그래도 여전히 랑데뷰를 원해!
그래도 여전히 랑데뷰를 원해!

@juststayus

 

 

그래서, 우리들

 

어른이 되는 일은 어려워서 종종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닥쳐온다. 그런데도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보내고, 또 내일을 맞고, 그 내일은 또 오늘이 되어버리고 만다. 자연히 내 옆엔 항상 네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진 채로. 어쩌면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온전히 순진한 기대였을까? 누군가가 나의 곁에 언제 어디서든 머물러 주리라는 미약한 이기심이었을까. 각자의 상황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립을 확인하는 길은 너무 멀고 가팔라서. 아무 일도 없어. 오늘도 그냥 그렇지. 소중하게 여길수록 거짓말과 은폐는 늘어난다. 자신이 약해졌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상대가 무조건 있어 주지 못한다는 진실을 직면한 후로부터.

"그래도 난 너와 함께하고 싶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진심을 건네면서 관계는 두 사람의 차이처럼 페인트를 엎지르듯 역변한다. 견고히 쌓아둔 Iアイ를 드러내고,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있는 나를 그대로 사랑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 너를 위해 나아질 수 있는 나를 지켜봐 줘. 이 음표의 행방을 쫓고 싶어. 너와 나로!

박동하다
박동하다

@WxIuk

 

 

천사가 입술을 누르기 전까지, 

우리, 약속하자.
네 슬픔은 나만의 것이야.

 

 

너는 마치, 달과 같아.
집. 사적인 영역. 연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가득할 수도 있는 공간. 반대로 묘사하자면, 집을 보면 주인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덧붙여, 취향이나 성향도 파악하기 충분하다. 사람을 안다. 반들거리는 액정 너머 CF에서 나올 법한 문구였으나, 제리는 그 문장을 누구보다 통감했다. 깔끔한 하얀 벽지. 편안한 모던 형식의 가구. 그나마 자연적인 걸 꼽자면, 편백나무로 만든 테이블이다. 심플하고 눈에 편안한 거처의 모습에서 다정한 면이 보이는 것을 왜일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보이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은색으로 요요하게 자랑하고 있다. 요슈아다. 연인의 집에 깜빡 잠드는 일은, 잦은 해프닝이었다. 본디 바깥을 자유로이 여행하고 횡보하는 데이트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을 지닌 '공인' 신분의 남자친구를 둔 탓이다.

실은 불만은 없다. 오히려 제리는 기꺼워했고, 차분하게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다. 상황이 달랐더라도 서로의 보금자리를 찾는 일이 잦았을 거다. 그리 단언하며, 졸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제리는, 시계를 찾으며 시침과 분침이 새벽 2시가 넘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기억 필름을 샅샅이 되짚어보니, 편한 소파 위에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여름의 끝. 가을의 시작. 끝과 시작은 언제나 반복되기 마련인데, 너와 함께하는 건 어찌나 새로운지. 날씨는 신선해지고, 공사다망한 일이 마무리 지을 무렵 긴장이 절로 풀렸다. 돌아온 계절을 실감하기라도 한 듯, 요슈아는 에어컨을 작동하기보다는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뒀다. 도시의 소음이 간간이 들렸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에겐 감미로운 음악적 요소이리라 감히 짐작했다. 그렇게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 아마, 깜빡 먼저 잠든 쪽은 여럿 고뇌해도 제 쪽인 게 분명했다. 몸에 걸쳐진 담요나, 푹신한 베개의 존재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머쓱한 낯으로 제리는 조심스레 아무것도 덮지 않은 요슈아의 상체에 담요를 덮었다.


"…네 몸을 더 아껴줘, 요슈아."


혹여라도 잠이 든 요슈아가 깰까, 두려워 제리는 입술만 달싹이며 모양을 내었다. 다정하긴. 언뜻 차가운 색과 달리 요슈아는 따뜻한 성정을 지녀, 제리의 마음을 두드리곤 했다. 한 번의 노크면, 우리는 고작 친구란 단어에 머물렀겠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낯 위에 흐드러진 머리카락을 단정케 하곤 제리는 웃었다. 시야를 살짝 내리면, 요슈아의 손목이 훤히 보인다. 사적의 영역. 울타리 내부. 빗금이 늘지 않아, 변함이 없는 흔적. 붉은 자상이 없는 그 손목 안쪽에 안도라도 한 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쪽에도 눈물샘이 있다면, 펑펑 울고 있을 거다. 기쁨이란 명제로. 극복의 증거. 계절은 변화하고, 매해 돌고 돈다. 우리도 다시 시련에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고, 우울이란 명사에 허우적거리다가 심해 아래로, 또 아래로 가라앉으리.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과거에 얽매여 실패를 곱씹으며, 헤어 나올 수 없는 씁쓸함에 눈물 흘리며 반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음을, 너는 고통을. 그런데도…. 요슈아를 보고 싶었다. 무대 위. 노래. 도시. 난반사하는 네온사인. 그 아래에서 너와 나. 어딘가 후련해진 제리는 거실 불을 껐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내려앉자, 명백히 보이는 달빛이 공교롭게도 요슈아의 낮에 내려앉는다. 마치 영화나 소설 같다. 창작물도 모두 인간사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인생의 모든 파란과 굴곡진 하이라이트는 전부 너에게서 따온 게 아닐까? 과거엔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헤매고 있어야 하나요? 탓하고 욕보이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답변 없이 신이 요슈아를 가리키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미래를 꿈꾸지 않고 죽음만을 바랐던 과거를 뒤로한다. 앞에는 네가, 있었으니까. 뒤처지지 않게 부단하게, 나아갈 차례였다. 소파 위, 한쪽에 엉덩이를 누르고 얌전히 바라보니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제리.


"요슈아…."

"깼네. 뭐하고, 있었어?"

"그냥……. 네 생각을 조금 했어."


웃음소리. 그리고 닿는 체온에 제리는 힘을 풀고 가슴에 기댄다. 다정한 체온, 외로운 도시 사람들을 감싸 안는 달처럼, 무던히 끌어안는 힘에 안도했다. 잠결에 취한 듯 목소리가 나른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덧없는 무의식 속 진실이란, 표명과 같다.


"제리, 따뜻하네."

"네가, 더 그래…."


끌어당기는 손길에, 제리는 속수무책으로 품에 기대어 강제로 누었다. 정확히는 요슈아의 품. 눈 동그랗게 뜨고, 시야를 마주하더니 이번에는 입술이 닿는다. 자연스러운 행위에, 심장박동이 쿵쿵하고 뜀박질함을 느낀다. 반칙이야. 데이트의 말로는 체온을 느끼며 잠자는 행위로 언제나 귀결된다. 오늘의 데이트는 끝. 자고 일어나면, 월요일 아침이 둘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며, 이윽고 겨울이 찾아오는 듯이. 내일이 오고, 죽음을 바라고, 고통을 내어도, 삶을 떠올리며 너란 정상궤도로 진입해 빙글빙글 돈다. 살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인생에 자전하고 있고, 사랑이란 중력에 이끌린다. 비록, 공전이라도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으니 심장이 뛰는 찰나를 거스를 수 없다. 지당한 사실이다. 수천 년 과거 조상이 증명했듯이,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며 사랑한다는 걸. 나는, 너를 사랑해. 요슈아의 입이 달싹인다.


"앞으로도 함께해줘."


제리. 짧은 문장 한마디에, 제리는 살고자 했다. 요슈아의 곁을 우리 집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삶이, 박동했다. 다시.

너와 함께라면
너와 함께라면

@WxIuk

 

 

목덜미를 보이는 무방비한 상태.
천 하나 사이에 전해지는 미지근한 온기.
전부, 기꺼워 생을 영위하게 만드는 지독한 파라다이스.

연결
연결

@daso_somi

 

 

그해의 여름은 유화 같았다.
녹음은 쏟아지는 볕에 따라 덧칠되듯 사방으로 연해지고 짙어지기를 반복하며 시야를 채웠다. 볕뉘 아래에 서 있을 때면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빛이 그늘 위로 내 손을 밝게 덧그렸고, 거리는 불투명하고 거친 붓놀림으로 세워져 있었다. 모네의 유화처럼 인상에 강하게 남겨진 순간들은 때로 화창했고 때로 비가 올 듯 흐렸으며 때로는 안개로 묽게 번졌다. 나는 순간을 사진처럼 기억에 남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되 귀로 기억하는 법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광경은 풍경보다도 먼저 소리로 남았다. 그리하여 같은 빛깔 아래 유달리 기억에 남은 순간들에는 전부 같은 소리가 있다.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소리. 멈추지 않고 속력을 높이는, 나를 잃을 것만 같은 심장박동이.

 

 

또 엉켰어.
나는 주머니를 뒤적인 끝에 끈 뭉치 같은 것을 집는다. 찾던 물건이었으나 달가운 형태는 아니었다. 더위에 젖어 미끈거리는 손으로 이어폰을 꺼내보면, 볼 것도 없이 줄은 양 끝을 서로에게 녹여놓은 듯 달라붙은 채다. 그것은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끝없는 난제를 품고 영원히 제 모습을 되찾지 않겠다는 양 몸을 뒤틀고 있었다. 이러지 마…. 손끝으로 줄을 더듬으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소용없다. 나는 별다른 도리 없이 줄의 처음과 끝을 찾았다. 그러나 한 갈래의 선을 아무리 따라가 보았자 미궁에 빠진 것만 같은 혼선 속에서 꼬리는 모습을 감춘다.

 

그러면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만다. 올려다본 하늘은 쨍쨍하게 빛을 내리쬐며 답답한 마음을 한층 더 후덥지근하게 만들고 있었다. 온 세상이 이렇게나 새파란데도 덥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야. 괜한 사실에 투정을 부려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손에는 엉망진창으로 꼬인 이어폰이 걸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모든 걸 칼로 잘라내듯 결단할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고작 이어폰 하나인데도 더위 탓인지 기운이 빠졌다. 아마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어폰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잘라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이어폰 줄이었다면 그걸 잘라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은 나는 다시 긴 줄을 살살 풀어나갔다.

 

마침내 성가심을 이겨내고 처음과 끝을 찾았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제리. 응? 당황해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요슈아가 있다. 회색 머리칼이 반짝이며 은빛 하이라이트를 두른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은 나를 보더니 가만히 눈매를 내려 웃는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제리가 이어폰을 마구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부터려나. 한참 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응,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곧 할 말을 잃는다. 왔으면 말해달란 말이야. 중얼거리는 말에 큰 의미는 없다. 요슈아에게는 결국 지고 마니까. 햇살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낯에서 시선을 돌릴 핑계를 댈 뿐이다.

 

오늘은 무슨 노래야?
아직 안 정했는데… 요슈아가 고를래?

 

아이팟을 건네면 요슈아는 기꺼이 그것을 넘겨받는다. 손끝이 스친 자리에는 더위 아닌 다른 열기가 번진다. 나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요슈아 몰래 짧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팔을 뻗어야 닿을 정도로 먼 거리를 실감하면서.

 

자, 이어폰 줘.

 

노래를 고른 요슈아가 손을 내민다. 얼추 풀어놓았던 이어폰은 요슈아의 손안에서 꼬인 적 따위 없었던 것처럼 가지런해진다. 이어폰 한 짝을 제외한 나머지는 곧 내 손으로 돌아오고, 나는 이어폰을 꽂은 요슈아를 보았다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먼저 시작 버튼을 누른다.

 

요슈아.

 

작게 부르는 목소리는 잔잔한 음악에 가려진다. 눈을 감은 요슈아를 보고 있으면 여름의 소리가 들렸다. 더운 바람결에 흩어지는 나뭇잎의 소리. 멀리서 울리는 버스의 경적 소리. 매미의 울음소리와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끝내 숨을 들이마시고 간격을 줄이면 들려오는, 누군가의 빠른 심장 박동 소리. 나는 요슈아와 한 뼘을 두고 나란히 섰다. 이어폰의 줄은 기억보다 짧은 편이었으므로 어쩌면 그보다 더 가까이. 느리게 이어폰을 귀에 꽂고, 모든 게 음악에 가려지는 이 순간을 매번 기대하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박동과 섞인 음악은 그 자체로 후덥지근한 여름의 풍경이 된다.

나아가는 우리들은
나아가는 우리들은

@juststayus

 

 

나아가는

우리들은

 

 

2023 시즌 1개 15세 관람가
풋풋한 • 청춘 로맨스 • 상처를 회복하는 • 무거운 • 드라마CD 원작

 

소꿉친구로 지낸 기간이 연인으로 지낸 기간보다 훨씬 긴 제리와 요슈아. 그린 듯이 다른 두 사람, 아픔의 형태는 비슷하다. 관계가 나아진 거라면, 왜 아직 아픈지. 이 여름이 끝나기는 하는지. 상처가 곪기 전에 계절이 넘어갈는지. 확신 없는 청춘이 밟아가는 성장의 이야기.

나아가는 우리들은 ▼

1화
작사, 작곡, 보컬. 대인관계도, 성품도, 자기관리도 완벽. 뭐 하나 빠지는 분야 없는 천재 음악가 요슈아. 새로운 싱글 앨범의 발매 준비에 한창인 그. 여자친구 제리와의 데이트에도 완벽하다!

2화
싱글 준비, 요슈아는 자기 스스로 만족할 만한 곡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필두로 한 파괴적 충동이 그를 에워싼다. 한편 제리는 요슈아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마는데…….

3화
서로 겁만 내던 때는 이제 지났을까. 상처에 관해 알게 된 둘은 더 대담하게 서로를 믿고 지지한다. 그러나 아직 '거짓말'을 품고 있는 사람. 요슈아는 녹음을 정상적으로 이어 나가지 못한다. 제리는 요슈아의 '괜찮아'라는 말을 이번에도 믿어야 할까?

4화
또 한 번 상처를 내고만 요슈아와 제리는 난장판인 집안에서 서로 마주 본다. 제리는 어떻게 하면 요슈아를 이해할 수 있을지, 괜찮다는 말을 돌려줄 수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잠깐, 제리가 어디로 가는 거지?

5화
벌써 중도 참가한 서바이벌도 세 번째. 삶이나 음악도 비가역적, 절대 뒤로 돌릴 수 없다. 성공적으로 시즌이 끝났지만 요슈아는 이 성취를 지속하기가 어렵다.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6화
익숙한 커터칼의 소리를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제리는 상처받지 않고 빛나기를 계속해서 믿는다. 요슈아는 그가 믿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네가 힘이 되어준다면 어디까지고 가능할 것 같아. 그러니 보컬리스트, 부디 이 마음을 불러줄래?

당신의 초상
당신의 초상

@m33k_Comu

 

 

달의 표면이 매번 그 빛깔을 조금씩 바꾸듯, 요슈아의 머리칼은 볕, 달빛, 라임라이트를 받을 때마다 그 색을 각기 달리한다. 그의 곱슬머리는 손가락을 사이에 넣어 쓰다듬으면 부드럽게 휘감고 지나가지만 얌전히 정돈될 생각은 도통 않는다. 그는 아주 다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연하고 부드러운 속내 안에는 분명히 어떤 고집스러움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어떨 때는 머리칼이 그 성정을 은근슬쩍 비추고 있다는 짐작마저 든다. 하지만 실은, 나는 그의 머리가 단정하게 다듬어졌을 때보다 제멋대로 헝클어졌을 때를 더 좋아한다. 왜냐면, 앞머리가 눈가로 부드럽게 흩어지면 은사로 짠 만틸라 베일이 네 눈을 가린 것처럼 보이니까. 그럴 때면 소년이자 신비, 달과 한 몸이라고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부르고 싶게 만드는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니까.
그래, 정묘하고 섬세한 솜씨로 다듬은 얼굴의 아름다움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얼굴에서 찾아낼 수 있는 무수한 찰나의 면모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나뿐이라 감히 자부할 수 있다. 가령 그의 눈매는 날카로워 보이기 십상이지만 나는 그 잿빛 눈동자를 들여다본다면, 옅은 속눈썹의 그늘 아래 외로움 속에서도 숨 붙이고 살아온 다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오래도록 가슴속 추위에 떨었던 탓에 제 눈에 닿는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보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눈빛이 거기에 있다. 다들 그의 날렵하고 호리호리한 몸을 보고 무척이나 가뿐해 보인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의 손목을 감싼 아대 아래에 무슨 자국이 있는지는 나만이 안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기어코 하고 만다.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그 상처들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되어 나이테처럼 남은 것과 아문 지 얼마 되지 않아 루비를 가는 실로 꿰맨 것 같은 자국이 남은 것들을 모두 아울러 남김없이…. 그리고 그걸로 그의 아픔 역시도 덜어낼 수만 있다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눈빛의 깊이, 유리창에 비친 쓸쓸한 옆모습은 모두 그 아픔들이 만들어낸 것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에게만큼은 한없는 행복이, 황금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결국 동화처럼 형편 좋고 따분한 이야기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뻔한 해피 엔드를 맞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스스로 결심하는 것이다. 단지, 달을 닮은 소년이 이제는 덜 추워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여금.

아드레날린 언리미티드 신드롬
아드레날린 언리미티드 신드롬

@juststayus

 

 

하늘 위에서 연분홍색 비가 24시간 내내 내린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로 카메라 셔터음이 들리지 않게 된 시기는 1주 정도 지났고, 제리와 요슈아가 한 달 전부터 기대하며 만반의 준비를 거친 출사 일정이 꼬인 지도 꽤 되었다. 이 무렵 오하요 닛폰¹ NHK 뉴스 오하요 닛폰(NHKニュースおはよう日本). NHK 종합 텔레비전의 간판 아침 뉴스 프로그램. 에서는 서글서글한 인상을 띤 남자 아나운서가 사상 최초 기상 이변이라며 속보 기사를 읊었고, 로손이나 세븐일레븐에서는 통유리 출입문 위에 붙여둔 '우산 상시 판매' 안내문이 심심찮게 보였다. 오늘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핑크 레인'. 누구든지 두 명 이상 모여서 수닷거리 삼는 데에 있어 아주 적법하고 간결한 통칭. 그 현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도쿄 상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두 방울, 물감을 풀은 물이 담긴 생수통 뚜껑을 실수로 닫지 않은 듯 작게 떨어지더니 이내 서서히 덩치를 불렸다. 기묘한 현상인데도 아무도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투명한 빗방울이 어렴풋이 분홍빛을 머금고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퍼졌다. 벚꽃이나 살구보다는 짙으며 장미보다는 확연히 옅은 색, 흡사 갓난아기의 말랑한 뺨에 부드럽게 물드는 홍조, 혹은 연정과 애정을 입에 올릴 때 생기가 감도는 입술을 닮은 색. 몽상가가 꾸는 꿈결을 파고들 듯이—아무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바라지 않았는데도—다가온 비에게 한 가지 특효가 있다는 점이 밝혀진 시기는 처음 관측 시점에서부터 약 사흘 뒤였다. 매일 침울한 낯으로 JR 야마노테 라인 칸츠메² かんづめ. 일본에서 꽉 막힌 지하철, 한국 기준으로는 지옥철을 뜻하는 용어. 원 의미는 통조림. 에 올라 출근하는 K 모 씨가 핑크 레인에 흠뻑 젖은 다음 날부터 기묘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변한 데다가, 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안 좋은 기억을 몽땅 잊어버린 사건이 알려진 후였다. 
그 사건 이후 누군가는 이를 세상이 무너질 징조로 보았으며, 누군가는 현 정치사와 엮어 교묘하게 헤드라인을 써 내려갔고, 어떤 이들은 이를 신이 내린 영적 체험이라 이름 붙이고 심취했다. 또 누군가는 연인, 가족, 친구 엇비슷한 이들과 SNS 인증을 하기도 했고. 제리는…… 확실히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본인이 보든지, 타인이 보든지 간에. 물론 타인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인류 공통의 골칫거리이기에 제리 또한 요슈아가 어느 쪽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추측은 했지만, 그 스스로 불확실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제 몸이 시소처럼 흔들거리는 와중에도 영구운동으로 굴러간다. 부속품—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삐걱거리면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제리는 역 개찰구 근처 세븐일레븐 현수막 아래로 도망치듯 들어가 비를 피했다. 현수막 가장자리에 빗물이 맺혀 뚝뚝 떨어졌기에, 들어오면서 어깨가 젖는 정도는 감안해야만 했다. 블라우스 어깨 부분이 젖어 맨살에 들러붙었고, 얇은 손목 위를 감싼 손목시계의 메탈 밴드가 빗방울로 번들거렸다. 제리는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팔을 가슴께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반투명한 시계 유리 안 분침이 분주히 째깍거리며 향한 방향을 보아하니, 평소 그가 귀가하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딱 제리의 한 손 크기인 접이식 우산이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그는 푸념하는 대신에 가방 깊숙이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내 LINE을 켜고, 가장 최근 연락한 사람의 메신저 창으로 들어갔다. 으슬으슬한 기운에 얼은 손으로는 타자가 빠르게 쳐지지 않았다. 제리는 메시지를 전부 입력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요슈아, 미안한데 시부야역 세븐일레븐으로 와줄 수 있어?]
[아침에 들고나온 우산 망가져 있었어 ᅲ.ᅲ]

답장은 몇십 초 뒤에 금방 도착했다. 많이 젖지는 않았어? 연습실 근처니까 금방 갈게! 메시지를 읽기만 해도 제리는 요슈아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겼다. 돌아온 답장에 또 한번 간결하게 답을 보내고, 핸드폰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벼운 인사나 부탁일 뿐인데 매번 미소가 그려진다면 아직도 그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인지, 혹은 반대로 그가 주는 기쁨에 익숙하니 다가올 순간을 기대하게 된다는 의미인지. 그는 어느 쪽이든 요슈아에게 향할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히 다루고 싶다고 잠깐이나마 생각했다. 그러다 귀 안쪽에 현수막 위로 빗방울이 투둑 투둑 빗발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 소리에 집중했다. 그가 스마트폰 화면을 향해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어서 정면을 보았다. 
두 눈동자에 연분홍색 빗방울이 사람들의 안쪽 깊숙이 침입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장난하듯 쏟아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모여서 어느새 빗줄기가 되었고, 지금은 일본 전역을 덮었다.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제법 상당수가 우산도 펼치지 않고 지나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제리는 지나가듯 보고 넘긴 K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제가 잊지 못하는 어린 시절 괴로운 기억이 있어서, 그걸 치료하려고 매번 정신과에 간 기억은 또렷해요. 그런데 그 기억이 말끔히 지워진 것처럼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그러니까, 마치 기적 같지 않나요? 정말로 싫은 기억을 고운 비로 씻어내리는 것 같잖아요. 
참으로 고민 하나 없어 보이는 낭랑한 목소리였다…….
그마저도 검은색 긴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요슈아가 뛰어오는 광경이 보이자 머릿속 깊은 곳으로 파묻혔다. 


오래간만에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 제리 덕분에 요슈아는 기분이 한껏 들뜬 채로 앞장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열쇠구멍에 알맞게 열쇠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요슈아는 젖은 우산을 현관문 앞에 놔두고 들어갔다. 제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 우산을 힐끔거리며 곁눈질했다. 매끄럽고 탄탄해 보이는 우산 표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분홍빛 빗물. 어쩐지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제리는 눈썹 머리를 휘고는 했다. 제리가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자니 먼저 들어간 요슈아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현관문 쪽을 살폈다. 혹시나 제리가 마음을 바꿨을까 싶어, 그는 으레 내는 것보다 조금 더 확신 덜 섞인 투로 물었다. 

"왜? 혹시 무슨 일 생겼어?"

반대로 제리는 혹시나 요슈아가 오해할까 싶어 황급하게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질했다. 그가 서둘러서 보여 준 반응에 요슈아가 그렇다면 다행이라면서 다시 들뜬 티를 거리낌 없이 냈다. 서로 집에 방문하거나 묵고 가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닌데. 매번 이리도 작은 파편에도 당황하며, 순간의 불안정, 찰나의 망설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크기를 부풀려서 섭취했다. 권장량을 초과한 긴장이 제리의 위 속에서 꿈틀거렸다. 다행히도 긴장은 오래가진 못했다. 제리가 정신을 차리고 제 양 뺨을 가볍게 톡톡 쳤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 나쁜 생각은 그만해야지. 그는 다짐하면서 그제야 우산 곁을 벗어나 거실 쪽으로 향했다. 
제리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들어간 와중에, 이미 얼추 홈웨어를 갖춘 요슈아는 모던하게 디자인된 개방형 주방 개수대에서 과일을 담을 그릇을 씻고 있었다. 제리가 친구와 방문했던 창고형 그릇도매점에서 요슈아가 생각난다며 사 온 보헤미안 스타일 그릇이었다. 노란 무늬가 테두리만 감싸듯이 새겨져 있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요슈아는 그가 준 선물이니 아껴서 사용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그릇을 제리와 있을 때만 사용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에 들린 그릇을 보면서 소파에 앉고, 방금 요슈아가 그랬듯 똑같이 고개만 빼꼼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할까? 요슈아, 연습 몇 시간 내내 하고 와서 힘들 것 같은데."
"괜—찮—아, 문제없어. 뭔가 먹고 싶은 건 없어? 어차피 밖에는…… 못 나갈 것 같으니까."

호흡을 한 번 끊어갈 때 요슈아가 고개 돌려 창밖을 확인하고서 말을 연이었다. 말의 진의를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아도 비가 현재진행형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걸 제리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스마트폰을 켜서 몇몇 가게를 살폈다. 즐겨찾기로 등록된 가게는 전부 요슈아 입맛에 맞추어 선정해둔 곳이었다. 식탐이 그다지 많지 않은 제리는 무슨 음식을 시켜도 요슈아가 먹는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었고, 그는 그게 퍽 좋았다. 한참 제리가 저녁 메뉴를 고를 동안 그릇에 몇 가지 과일을 담아 온 요슈아가 그릇을 내려놓은 다음에 그 옆에 앉았다. 세 명이 앉고도 넉넉한 널따란 소파인데도 살갗 닿을 정도로 가깝게 앉는 행위에 있어서 이유는 불필요했다. 제리는 제 어깨에 딱 붙은 요슈아의 어깨와 그 위쪽에 있는 안면을 번갈아 훑었다. 요슈아는 그와 시선이 스칠 때는 순진무구한 레트리버처럼 눈을 반쯤 감았는데, 태생부터 가로로 뾰족하게 뻗은 눈매가 둥글게 보일 정도였다. 요슈아는 사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크로 오른손을 뻗어서 사과 하나를 찍었다. 배어 나온 살짝 연노랗고도 투명한 과즙이 포크 끄트머리를 적셨다. 요슈아는 포크를 들어서 제리 입가 근처로 갖고 갔다. 

매체 안 가리고 로맨스 주인공들이 갖는 만물의 법칙은 이 순간에도 적용된다. 가장 흐트러진 상태에 상대를 마주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오면 상대와 같이 쓰는 게 옳듯이, 둘 중 한 명이 식기를 들어 한 입 크기로 요리를 집었다면, 그 한 입은 무조건 다른 한 명의 입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법칙. 요슈아가 반쯤 감은 눈에 힘을 주며 미소 짓자 제리 머릿속에 무의식의 잡념이 들어섰다. 요슈아는 무엇이든 가느다랗고 길구나…….
때마침 상상 속 생각은 현실 속 목소리로 지워졌다. 

"아—앙, 해봐."
"……진짜?"
"진짜."

둘만 있는 공간인데도 제리는 괜스레 부끄러워 주변을 살폈고, 곧이어 그 행동이 요슈아 보기에 더 부끄러운 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만히 있으면 무념해 보이는 듯한 얼굴에 옅은 붉은색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그가 망설일 동안에 요슈아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톡톡, 제리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눈도 감아 줘, 라고 태연하게 부탁을 하나 더 늘렸다. 제리는 새삼스레 이런 데에서만 뻔뻔한 면이 있다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핀잔을 주고, 머뭇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그다음으로 입을 작게 벌렸다. 
그러나 입 안으로 느껴져야 할 단맛도, 콧속을 자극하는 단내—남자에게서 늘 풍기는 머스크 향과는 조금 다른—도 없었다. 다만 제리가 이상함을 감지하자마자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귓속으로 카메라 셔터음이 들어갔다. 그가 눈을 단번에 번쩍 뜨면서 본 광경은 왼손에 셔터를 누른 채로 DSLR을 들고, 오른손에 사과 한 조각이 여전히 박힌 포크를 든 요슈아였다. 요슈아가 검은 DSLR을 옆으로 치우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면서, 그가 가볍게 윙크했다. 

"출사, 결국 못 나갔으니까 네 귀여운 모습이라도 찍어보고 싶어서 그만."
"분명 이상하게 찍혔을 거야."

"귀여운데 뭘."

요슈아는 DSLR 갤러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가 내뱉는 말이 간질간질해서 제리는 어색하게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자기도 보여달라고 뒤늦게 덧붙였다. 제리는 사진에 찍힌 본인 모습을 같이 보면서, 요슈아가 귀엽지 않으냐고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설명하는 게 창피한 나머지 요슈아에게서 DSLR을 뺏으려고 했다. 그러나 요슈아는 능숙하게 제리가 뻗는 손길을 전부 피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결국 웃음 뒤에는 빗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는 입꼬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올라갔다고 해서 기분마저도 좋다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짧은 침묵과 들숨 다음으로는. 

"그래도 맑은 하늘 아래 제리가 찍고 싶었어."

요슈아가 조금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제리는 그 말에 아까 위를 헤집었던 긴장감이 되살아나는 기우를 감지했다. 그가 양손을 써서 요슈아의 왼손을 따뜻하게 덮으면서 말없이 문질렀다. 물기 없는 손등은 보드랍고, 또, 연약해서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린넨처럼 구겨질 것 같았다. 제리는 확신할 수 없는 일들에 약속을 거는 행위에 본능적으로 미약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기묘하게도 언제나 확신을 주고 싶은 상대와의 순간에서 자주 발생하는 감정이었다. 미래는 보증할 수 없어서 섣불리 새끼를 걸기에는 많은 부분이 제리의 몸과 마음 안에서 턱턱 걸렸다. 그 망설임은 제리에게 있어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였고, 지금껏 살아오며 어려웠을, 그리고 방만했을 여러 약속을 하지 않도록 제어를 거는 장치였다. 차라리 지난날 셀 수 없을 만큼 겪어온 기억 속 쓴맛으로 존재하는 일들을 잊었다면, 없던 일처럼 대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제리는 요슈아에게 아무런 고민 없이 비가 금방 그치고 해가 갤 게 분명하다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생각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직설적으로 묻기에는 아직 어리고 두려움이 많은지라 함께 맞이했던 추락을 가슴 속에서 되새기면서 질문했다. 

"요슈아는 어떻게 생각해? 핑크 레인."

질문을 들은 요슈아는 카메라를 쥔 채로 제리를 빤히 보았다. 회색 홍채에 제리 머리카락의 두 색과 소파 바로 옆에 켜 둔 무드 등의 노란 불빛이 한데 모여 여러 색깔이 모래 알갱이처럼 섞였다. 그는 무언가 섞이는 일에 익숙했다. 눈동자가 품은 회색은 무슨 색이든 수용할 수 있었고, 작곡은 언제나 연주하는 이들이 만드는 화음을 생각하며 짓는 일이기에 더 능숙했다. 감정까지도 데칼코마니처럼 잘 영향을 받고는 했는데, 그늘진 면을 살펴보자면 두려움이나 불안이 섞이는 일에도 익숙하다는 점이나 다름없었다. 그 부분이 요슈아를 멈칫거리게 했다. 그래도 그는 진심으로 답해야만 했다. 

"정확히 어떤 부분?"
"뉴스에서 그러더라, 잊고 싶은 기억을 잊게 해준대. 비를 좀 맞은 정도로…."

제리는 눈두덩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요슈아에게도 잊고 싶은 순간이 있어?"

빠르게 대답하기 어려운 나머지 요슈아는 말하기에 앞서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잊고 싶은 기억. 그런 기억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기 때문에 어려웠다. CD를 고르듯 손가락으로 짚어서 뽑아낼 만큼 어느 시간만 괴롭다면 좋았을지도 모르나, 그는 삶 대부분의 순간에 늘 손가락 하나만 한 우울함을 어금니 안쪽에 물고 있었고, 그것은 노래할 때 급작스럽게 튀어나와 그를 괴롭히고는 했다. 음식을 먹어도 먹어도 어금니 안쪽에 자리 잡은 불청객을 쫓아내지 못했기에 포만감은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래, 영구운동. 세상은 삐걱거리는 요슈아를 기다려 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인간은 결코 닿아본 적도 없는 완전하고도 평온한 상태를 평생 그리워하는 종이라서. 그 또한 죽는 순간까지 완벽해질 수는 없으리라고 직감한 지도 많은 날이 지났다. 

다만 옆에 있는 존재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이나 기꺼워, 그를 위해서는 삐걱거리더라도 다시 한번 내일을 어렵사리 버텨보고 싶다고 다짐했을 뿐이었다. 

괴로운 음절을 곱씹는 일을 제리 몫으로 하고 싶지 않아서 요슈아는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자기 안으로만 소화 시켰다. 잊고 싶은 순간.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은 기억. 지우고 싶은 고통. 그는 아까보다 거세진 빗발을 보면서 사실대로 토로했다. 

"……응, 있어. 아마도 내 생각보다도 많겠지."

더 이어 나갈 말은 있었지만, 우선 운은 그렇게 띄웠다. 요슈아는 안팎으로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아까 전 제리와 마찬가지로 만지작댔고, 제리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 무언가 결심했다. 괴로운 기억이 없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가 품은 사랑의 형태는 요슈아를 감싸듯 가운데가 뚫린 원형이었다. 그가 소파에서 갑자기 예고 없이 벌컥 일어섰다. 요슈아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럼 나가자."
"에? 응? 어딜?"
"밖에. …비 맞으러."


요슈아는 제 말을 설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제리는 그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 하나만을 품고 집 밖으로 나갔다. 요슈아는 뒤따라 가면서 우산을 급히 챙기고 펼쳤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산을 펼치자 그들과 다른 이들이 펼친 우산 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공간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바닥이 분홍빛에 흠뻑 젖어서 축축해졌거나 웅덩이가 생긴 풍경이 더욱 생생하게 그들 눈에 띄었다. 제리는 자기 자신이 지금 충동적이라고 느끼면서도, 그에게 확신을 안겨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멈출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깻죽지에 닿을락 말락 스치는 빗방울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요슈아는 움찔거리는 제리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으며 우산을 조금 더 강하게 쥐었다. 제리가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는 그도 얼추 알 듯도 했다. 동시에 결국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을 갈무리했다. 그는 손바닥과 팔뚝에 닿는 옅은 체온에 얇은 눈썹 머리를 찌푸리면서 제 체온을 나누어주듯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제리는 어깨 뒤쪽에 딱 붙은 손목 위 자국이 주는 감촉에 결국 그를 안았다. 그가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요슈아에게 괴로운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결론만이 도출되어 도리어 그가 괴로웠다. 결국 파편처럼 흩어진 말이 정처 없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마저도 벗지 못한 아이 티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어째서?"

나, 요슈아가 잊고 싶은 건 잊었으면 좋겠는데, 아픈 기억도 전부,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제리가 흩뿌린 말은 조금씩 모여 무력할 정도로 상대를 아끼는 애정 어린 순수함이 되었다. 그 부드럽고 연약한 마음을 어루만지듯 요슈아가 입을 뗐다. 

"분명, 제리. 너와 좋은 기억만을 갖고 싶은 마음도 있어. 하지만…… 말했잖아. 넌 내가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해?"

제리가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요슈아가 그 행동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을 골랐다.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야."

함께 추락했던 때를 떠올렸던 사람은 제리만이 아니라, 요슈아도 마찬가지였다. 고도 13,000피트에서 쿵쾅거리던 맥박과 하늘을 둘러싼 폭음을, 보이지 않는 지면을 향해 낙하하는 순간에 몸 전체에 들러붙던 묵직한 기압을. 그런 요슈아의 손을 꽉 잡았던 제리의 눈동자 속 자신을. 그 짧은 찰나에 요슈아는 깨닫고 말았다. 그렇게 한없이 못났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제리의 눈동자 속에서는 무척이나 눈부신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요슈아가 잊고 싶었을 기억 매 순간에 그는 살아 숨 쉬고 있었고, 반대로 제리가 잊고 싶었을 기억 매 순간에 요슈아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했을 뿐 쭉 그곳에 있었다. 

"너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

제리는 그 말을 듣고서 긴장한 것처럼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것 또한 무의식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깨달음은 언제나 한 박자씩 늦고는 했지만, 결론은 언제나 본인이 해야 할 몫이었다. 요슈아는 제리를 응시하며 아무 말 없이 숨을 쉬었다. 일정한 박자가 마치 오선보 위 음표처럼 들렸다. 그 순간 제리 또한 보았다. 아니, 볼 수밖에 없었다. 그 회색빛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은 분명 약하고, 여리고, 두려움 많은 어린아이에 불과해야 할 터인데. 그런데도 요슈아는 그를 여전히 가장 눈부시게 보고 있었다.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아팠던 순간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면서 기뻐할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고, 내일의 나를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제리는 돌려주지 못했던 대답을 일 년이 지나고서야 건넸다. 나도 그래僕も、そう。 

요슈아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기묘한 확신을 하고서 우산을 쥔 손을 놓았다. 검은 장우산이 웅덩이 위로 '찰박' 소리를 내며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는 제리의 눈물샘에서 흘러나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제리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그만 안심하면서 뺨을 손바닥에 기댔다. 눈물과 비는 구분되지 않아야 정상인데도,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품은 분홍빛에 구분이 명백히 되었다. 요슈아는 그 빗줄기를 하늘에서 보란 듯이 조금 더 억세게 문댔다. 그 무엇도 잊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한 달이 지났다. 뉴스에서는 핑크 레인에 관하여 이제 보도하지 않고, 편의점 통유리창 출입문에 붙은 안내문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비를 맞고서도 아무 기억도 잃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바다 냄새 시원해……. 기분 좋다~ 제리, 제리! 얼른 여기에 서 봐!"
"요슈아, 조금 진정해."

둘은 일부러 인파가 몰리는 관광명소를 피해서, 한적한 해변으로 출사를 갔다. 바다 근처 새들이 내는 소리와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가 겹쳤다. DSLR을 든 요슈아는 쾌청한 하늘과 콧속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다 향에 들떴고, 제리는 요슈아보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꽤 신난 상태였다. 그는 제리가 바다를 등지게 서자 삼각대에 DSLR을 올려 두고 초점을 맞췄다. 렌즈에 제리가 담기는 동시에 바람으로 인해 제리가 걸친 반투명한 셔츠가 나부꼈다. 그는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그리며 셔터를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제리가 서 있던 자리에서 이탈해 요슈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만화였다면 요슈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다섯 개쯤은 떴으리라. 요슈아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제리는 그의 팔목을 붙잡고 말했다. 

"이것도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니까, 함께 찍어야지."

내 말이 맞지? 어느 날을 되갚아 주듯 제리는 평소답지 않게 윙크까지 해 보였다. 그 모습에 요슈아는 한참 말이 없다가 웃음을 크게 터뜨리며 볼을 붉혔다. 그가 진정하고서 대답했다.

"네가 맞아."

그렇기에 그는 오늘도 그의 옆에 선다. 언제까지고, 쭉.

론도와 조이트로프
론도와 조이트로프

@0404_06

 

 

있지, 나는 아직도 기억해. 어린애들의 웃음소리와 바닥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 바이엘과 체르니 사이에 바흐, 미뉴에트, G장조. 피아노 학원 구석, 살짝 문이 열린 연습실.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어딘가 서툴고 따뜻한 연주, 네 옆모습은, 창문 너머에서 내린 햇볕을 받아 꿈같이 노란빛으로.

맞아, 너는 피아노를 관뒀지. 그러나 먼 날에 들었던 다정한 선율은, 끝없이,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어, 차가운 밤이 남긴 상처를 감싸안아. 오래된 축음기가 돌아가면, 타향에서부터의 귀로에 오른 우리가, 홀로는 인간이 될 수 없었던 우리가, 조용히 흘린 눈물로 이어져 인간이 되었어.

 

하지만, 이제는 론도를 끝맺자. 더 이상 햇빛 속의 환영에, 늘어진 카세트 테이프 같은 과거에, 침잠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어. 우리는 서로의 절반이지만, 반쪽짜리 존재는 아니니까, 잠시 손을 놓더라도, 마주보며 웃을 수 있도록.

 

그래도 되도록이면 네 손을 놓치지 않고 싶어. 사랑해.

Safe and Sound
Safe and Sound

@xngkgkB

 

 

두 사람이 추라우미 수족관을 가기로 약속한 것은 2주 전이다. 요슈아가 밴드 활동으로 워낙 바빴으므로 약속이 아니라 야외 데이트로 치면 꽤 간극이 있는 편이었다. 제리는 달력에 표시된 요슈아와의 데이트 날짜를 이따금 눈 깜빡거리며 쳐다보는 일이 잦아졌는데, 공연히 연락하기보다는 바쁜 연인을 위해 조금이라도 참고 기다리는 것이 나으리라고 여긴 데서 나온 얕은 버릇이 되겠다. 아마도 이전의 바깥에서의 데이트가 그랬듯이 그가 공인이므로 그가 메이크업을 하지 않거나 모자와 선글라스 혹은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요슈아 본인의 평소 모습 그대로인 채로 데이트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답답함은 별개여서 제리는 오늘도 달력의 데이트 날짜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 추라우미 수족관에 대한 정보를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그와의 데이트를 위해 뭔가를 준비해야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도리어 생각을 쏟을 수 있는 다른 것을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추라우미 수족관. 일본 최대 규모의 아쿠아리움. 오키나와에서도 상당히 외곽에 위치한 모토부 반도에 있는 해양박람회 기념공원 안에 자리를 잡은 그곳은 오사카의 가이유칸과 더불어 고래상어를 키우는 매우 드문 수족관 중 하나다. 굿즈 역시 고래상어 모양의 키링, 쿠션, 조각상과 고래상어 마스코트까지. 어필하고 있는 건 뻔하다. 전시관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산호초 전시관, 쿠로시오관, 심해 전시관이 바로 그것이다. 제리는 딸깍거리며 노트북에 연결된 블루투스 마우스를 움직였다. 수조 옆에 앉아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카페도 있고, 출구 쪽에 있는 기념품관에 가면 온갖 종류의 해양생물 인형을 비롯한 기념품을 살 수 있으며, 아이들에겐 200엔짜리 피규어 뽑기 기계가 인기 있다…… 고. 제리는 문득 뽑기 기계 앞에서 어떤 피규어를 뽑을 것인지 골몰하며 시간을 보내는 자신과 요슈아를 한번 떠올렸다가 그만 스스로 웃고 말았다.
요슈아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은 그날 밤 늦게였다. 제리는 잠에 들려 폰을 침대 맡에 놓아두었다가 메시지 알림이 울리는 것을 듣고서 얼른 다시 폰을 들었다. 반짝이는 액정 너머로 요슈아의 라인 메시지가 떠올랐다.

자?
좀 더 일찍 연락하고 싶었는데, 편곡이 늦게 끝났어……. 오전 12:05

 

아냐, 아직!

오전 12:06 안 피곤해? (。•́︿•̀。)

 

조금. 오전 12:06

그래도 연락 받아주니 기쁘다. 오전 12:07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라인을 했다.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새벽 1시가 다 되어간다. 내일 약속 잊지 않았냐는 요슈아의 말에 제리는 당연하지, 뒤에다가 느낌표를 세 개 붙일지 다섯 개 붙일지 사소하게 고민했다. 요슈아가 액정 너머로 웃는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메시지가 하나 더 온다. 마지막으로.

 

잘 자. 오전 12:58

 

아주 간결한 문자마저 요슈아가 보내는 것은 전부 그를 닮았다. 누운 자신의 귓가에 잘 자, 그가 속삭이는 기분 좋은 착각을 느끼면서 제리는 폰을 한쪽에 밀어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리는 어떤 꿈을 꿨다. 아주 이전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아주 이전의 일이라고 말해야 옳겠다. 혼곤한 몽중에서 제리는 요슈아의 흔들리는 눈을 보았다. 비추는 빛에 따라 온난한 색으로도 비치고 무기질적인 무채의 색으로도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그때에 명백하게 불안을 담고 있었다. 제리. 그가 이름을 불렀지만 제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다, 멈추지 않은 제리는 꿈을 꾸는 '제리'가 아니다. 꿈을 꾸고 있는 '제리'는 흘러가는 영화처럼 무의식에 영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안에서 그는 커터칼을 들고 있었다. 깨끗하지만은 않은 손목에 날카롭다 못해 예리한 날붙이의 끝이 느리게 그이고 나면 붉은 선을 따라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힌다. 제리. 요슈아가 자신을 한 번 더 부른다. 이러지 마. 이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요슈아는 차마 제리의 자해흔이 남은 손을 잡지 못해 칼을 쥐고 있는 제리의 반대쪽 손목을 잡아챘다. '제리'가 있는 곳에서는 제리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지 말자. 요슈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낯을 일그러뜨리고, 제리는 손에서 커터칼을 놓친다. 스스로 놓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요슈아가 그를 끌어안으면 제리도 요슈아를 끌어안는다. 둘은 한 사람처럼 우는 것 같다. 영상이 흐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제리'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이 뒤가 어떻게 될지 알 것만 같아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그리고,
삐― 삐― 삐―
……아, 꿈에서 나갈 시간이야. '제리'가 생각했다. 그 순간에 그는 꿈에서 깬다.

 

 

아침 날씨는 무척 좋다. 초여름의 한가운데라는 것이 훤히 느껴지는 파란 하늘과 바람. 햇살 아래 요슈아는 꽁꽁 싸매는 대신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제리는 집 앞까지 찾아온 그를 눈 끔뻑이며 새삼스런 얼굴로 맞는다. "뭐야, 반응이 왜 이래." 요슈아가 장난스럽게 말하면 제리가 느슨하게 웃었다. "왠지 오늘따라 변장이 덜 철저한 것 같아서……." 요슈아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문간에 선 제리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철저하지 않은 편이 오히려 나을 때도 있더라. 무장하지 않은 것 같잖아." 제리는 그 말에 그의 긴소매를 내려다봤다. 저 소매 길이는 늘 변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하는 또 한 번의 여름이 다가옴에도 여전히 그가 가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제리는 그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추라우미 수족관까지의 경로는 한참이나 멀다. 제리는 어제 찾아본 길대로 자신을 이끄는 요슈아의 옆에서 가끔 졸거나 자주 창밖을 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슈아를 알아볼 만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에 있겠다. 평일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주 한여름은 피해 온 덕에 그런 것인지. 제리는 꿈 없이 이따금 드는 졸음 속에서 그런 것을 생각했다. 전철 창 너머로 파란 하늘과 쨍하게 비추는 햇빛이 지나가고 늘어선 빌딩 그림자가 스치면 제리는 요슈아의 손을 잡은 채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 한참 남았어. 좀 더 자도 돼." 요슈아가 말했다.

"좋다." 맥락도 없이 제리가 말했다.

"뭐가?" 요슈아는 당연하게 묻는다. 사실 둘에게는 맥락이랄 게 필요치 않으므로.

"너랑 같이 있는 거……."

 

제리는 그 말을 하면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문득 어젯밤 꾸었던 꿈이 생각나서다. 다시 한 번 커다란 빌딩이 지나가면 요슈아가 잡은 손에 괜히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맞닿는 체온이 기꺼워서 제리는 조금 웃었다가, 이내 어제 꾸었던 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도착하는 것은 점심을 조금 넘긴 오후다. 두 사람은 간단히 주변에서 식사를 하고 곧바로 수족관에 들어갔다. 어제 찾아본 안내대로 수족관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산호초 전시관, 쿠로시오관, 심해 전시관. "쿠로시오관이 제일 크대." 제리가 팻말을 살펴보는 요슈아를 보며 덧붙였다. "어제 찾아봤어." 요슈아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오는 거 많이 기대됐나봐." 제리는 너랑 같이니까, 라는 말을 참는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여러 신기한 모양의 산호가 생물로서 전시되어 있는 산호초 전시관을 지나 쿠로시오관으로 향하면 관람객이 꽤 보인다. 아쿠아리움 안쪽에 비치는 조명 탓에 불이 최소한으로 켜져 있는 관람객들이 있는 복도는 시커매 도리어 사람들이 올 곳이 아닌 것만 같다. 바다의 바닥.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쥐가오리를 가리키느라 손을 놓았다. "저것 봐, 제리." 묘하게 사람의 웃는 얼굴을 닮은 가오리가 날개 같은 지느러미를 퍼덕이고 있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꼬리에 둘은 일제히 시선을 빼앗긴다. 쥐가오리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고래상어가 떼를 지어 머리 위를 지나간다.
엄마, 저것 봐. 아빠! 물고기. 물고기. 함께 보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 까만 바닥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광활하고 푸른 바다.
요슈아가 저도 모르게 한 발 유리벽을 향해 나아가면 제리는 한 발짝 뒤에 남겨진다. 한 걸음 뒤에서 그와 같은 것들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요슈아의 등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시 꾼 꿈이 생각이 났다. 제리. 처절하게 부르던 목소리도 다 지난 일인 걸 알면서. 이곳은 바람이 불지 않아 그의 머리칼을 헤집어놓을 것도 없고, 바다는 유리 너머로 쏟아질 일 없어 이 푸르고 검은 아쿠아리움 안에서 우리는 몹시 안전하고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고 안전한 건 우리가 아닌가.
제리는 눈을 감았다 떴다. 꿈속에서 꿈을 보듯이. 사실은 언제든 네가 아름답고 안전하기를 바랐다. 이제 우리는 서로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또 그러한 상태로 내내 함께 있기로 약속했으나, 이따금 불쑥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노라고. 자신을 등지고 인공의 바다를 보면서 서 있는 네가 무슨 표정을 하는지 나는 도저히 볼 수 없듯이.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네 등에 어떤 고통스러운 무게도 더 얹히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내 맞잡았던 손의 온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그걸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쏟아질지도 모르는 바다와 고래상어와 쥐가오리와 거대한 유리 앞에서도 평온할 수 있는 거라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곧 요슈아는 몸을 돌려 제리에게로 손을 뻗는다. "봤어? 고래상어." 제리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고래상어 피규어도 뽑을 수 있대. 200엔."

"어린애 같다, 그거……."

"지금 고래상어 봤냐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던 사람이 누구지……."

"참 나."

 

둘은 작게 소리 내어 웃는다. 커다란 물고기들의 지느러미와 꼬리가 파도처럼 벽 너머로 흘러간다.

Le Grand Bleu
Le Grand Bleu

@m33k_Comu

 

 

우리는 오래도 서로의 뒤를 쫓았다. 키가 부쩍 자라며 벌어진 뼈마디 틈을 서늘한 외로움으로 채운 소년 소녀가 되어서도 꼭 어린아이처럼 숨바꼭질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마다 우울이 질척하게 묻어나 푸른 얼룩을 남겼다. 그러나 비로소 한 점에서 만났을 때.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맞잡고 뒤돌았을 때, 우리는 보았다. 서로 겹치고 번지며 굳어간 기억들이 어느덧 모여 포말이 이는 바다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아도, 아득하게 깊고 눈물겹게 아름다운 우리의 바다를.

애니웨이 하이드리머
애니웨이 하이드리머

@juststayus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한 도시에는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번화한 도시의 거리와, 도로 양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이 보였다. 한 핫도그 푸드 트럭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그 냄새가 길 양쪽 인도를 따라 늘어선 수십 개의 다른 노점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와 섞였다. 차들은 계속 경적을 쉴 새 없이 울려댔고, 혼잡한 도로는 브레이크와 액셀을 반복하며 충돌을 간신히 피해대는 이들로 가득 찼다. 높은 고층 빌딩이 번화한 거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아래에는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상점들이 눈에 띄기를 간절히 바라는 광고처럼 밝게 번쩍였다. 최신 유행 팝송이 옷가게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울려 퍼졌다. 거리에는 버스킹을 하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그 정신없는 길거리 사이, 눈에 띄는 골목 하나가 있었다. 골목 안쪽에서 팝송과 어울리지 않는 록 밴드 음악―설명하자면 길지만 너바나부터 시작해서 핑크 플로이드, 도이즈까지 쉴 새 없이 말이다―이 물 흐르듯 계속 흘러나왔다. 소리의 출처는 방음 하나는 더럽게 안 되는 셰어 하우스였다. 건물 외관은 분홍색, 파란색, 녹색의 다양한 색조의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고 곳곳에 녹이 슬어 있었다. 타일 몇 개가 없는 옥상 때문에 햇빛이 투과되어, 거실에 기다란 조명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공용 거실에는 누런색 테이블 조명과 낡은 빈티지 가구들로 가득했다. 거실 가운데에 떡하니 놓인 붉은색 천 소재 소파가 있었고, 책과 잡지가 쌓여 있는 커피 테이블 위에 오래된 레코드 플레이어가 소음의 원인 같았다. 소파에서 잠든 회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가 움찔대다가, 얼굴 위에 올려둔 잡지를 끙 소리 내며 내렸다. 잠이 덜 깨 눈을 끔뻑대는 모습에서 아직 졸음기가 보였다. 남자는 충전을 까먹은 탓에 배터리가 육 퍼센트 남은 핸드폰을 비척비척 들었다. 그중 하나 있는 음성 사서함을 틀었다.

 

[요슈아, 너 진짜로 관둘 거냐? 이거 보면 연락해라. 꼭이다]
[네가 아니고 우리의 브레챠잖아 확실히 책임지라고]

 

익숙하게 귀를 건드리는 목소리는 분명 마츠의 목소리였다. 그는 별다른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핸드폰 전원을 꺼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요슈아는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용 거실의 왼쪽에는 주방이 있고, 중앙에는 묵직한 오크 테이블이 있었다. 으음. 낮게 웅얼거리며 요슈아가 일어나 주방 냉장고 앞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비닐 랩으로 감싸 놓은 토스트와 베이컨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2인분 같은 양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비몽사몽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욕실로 향해 이를 닦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의 회색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친 푸들의 털처럼 복슬복슬했다. 요슈아는 머리를 이리저리 손으로 다듬어 보다가,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아, 나왔구나."
"응? 제리, 언제 깼… 아니, 나간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방금 깼는걸."


제리는 여전히 부스스한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보며 전자레인지에서 노릇노릇하게 데워진 토스트와 베이컨을 꺼내 오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제리의 말이 사실인지 정말로 제리는 잠옷을 입은 상태였다. 요슈아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손잡이에 걸어둔 뒤 제리의 앞에 걸어오며 말했다.

"요리가 있길래 당연히 네가 해놓고 간 줄 알았어. 아니었구나."
"아, 예약 딜리버리시켰지. 골목 앞에 브런치 가게 생겼더라……. 삼일 정도 먹어보고 괜찮으면 계속하려고."
"에, 진짜 좋잖아. 그야 우리 둘 다 바쁘고."

제리는 요슈아 것을 꺼낸 다음 자기 것까지 데운 뒤에 자리에 앉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앉을 때까지 포크를 들지 않고 있다가, 제리가 앉고 나서야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서야 손을 움직였다. 식기가 접시와 닿으며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유로운―적어도 둘은 그렇지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에―식사가 이루어졌다. 요슈아가 먼저 식사 평을 말했다. 이거 괜찮다, 좋네! 제리도 맞장구쳤다. 응, 그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별 거 없는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 요슈아가 베이컨 한 입을 찍은 포크를 입에 넣으며 아침 날씨를 말하듯 태연하게 말했다.

"있지, 오늘 새 프로듀서가 소속사로 온대."
"……아. 그렇구나."
"음악은 못 하겠지만…… 클라이맥스와는 계약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응. 밴드는 그만두더라도 당분간 다른 활동은 해야 할 것 같네. 라디오라든가, 그런 것들."

제리는 그의 입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말을 실제로 듣자 기분이 묘했다. 바뀌는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토스트 한 조각을 작게 베어 물며 고개를 숙였다. 미소는 나오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결정된 사안은 아니었다. 아니, 맞던가? 제리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킬 수 없어 그저 흐트러진 채로 사고하기 바빴다. 요슈아는 일전의 사건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일을 반복했다. 식은땀과 붉은 방울을 토해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그는 제리가 싫다면 음악을 관두겠다 선언했지만, 제리는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저 그를 안아 어떻게든 잡을 수밖에 없었다. 천재. 그 수식어는 요슈아의 껍질을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의 내면을 더욱 약하고 뭉그러지게 했다. 그가 서서히 나약해져 갈 동안 제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옆에 머물러 주는 게 전부였다. 요슈아는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실제로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겨울 새벽에 일은 닥쳤다.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처럼 고요하고 별일 없이 흘러가던 하루였다. 제리는 여느 때와 같이 들뜬 요슈아의 목소리와 따뜻한 손의 온기를 느꼈다. 시부야역의 혼잡한 거리는 요슈아의 불안을 충분히 숨겨주었던 걸까. 이제 와 제리가 생각해 본들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의 집에서 나올 때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리는 오 분 정도 걷다가 다시 뒤로 돌아 골목길을 해쳐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무거운 발걸음이 낯설었다. 현관으로부터 열 걸음 안팎의 거리를 남겨 두었을 순간, 그는 문에 달린 손잡이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손대서는 안 될 뜨거운 납덩이처럼. 그는 추를 단 듯이 묵직한 구두 굽을 애써 땅바닥에서 떼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손잡이에 스페어 키를 꽂아 넣고 돌렸다. 천천히, 천천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언젠가 한 번 목도하였던 날카로운 파편들과 그가 평소 부르는 음보다도 좀 더 얇고 약한 신음.

제리가 현관 복도를 소리 없이 걸었다. 의도치 않은 고요한 방문은 요슈아의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찰나에 끝났다. 제리는 가늘게 베어진 손목의 상처에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졌다. 본능은 의식적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요슈아가 고통에 찌푸리던 미간의 힘을 단숨에 풀고 제리를 보았다. 서서히 새파래지는 안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웠다. 거꾸로 뒤집힌 노트북과, 엎어진 채로 바닥을 기어가며 천천히 덮는 커피. 요슈아가 무어라고 설명하려는 찰나 제리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방향에 마음을 맡기기로 했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그 방향에. 못의 울퉁불퉁한 단면이 단단한 나무를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한 번 깨어지면 모든 게 쉬웠다. 제리는 달싹거리는 입으로 내뱉었다.

 

"네가 이렇게 아프다면, 음악…… 그만두면 안 돼?"

 

연인의 기대를 배신한 것은 누구였는지 알 턱이 없었다. 제리도, 요슈아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이것이 최선이리라 당시에 생각하였다.

 

일은 생각 이외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요슈아는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에게 죄책감과 책임이 섞인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열 줄 이내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통보로 마무리 지었다. 판다 사장에게는 계약 상의 문제도 있으니 직접 찾아가야 했다. 사장실 안에서는 두꺼운 담배를 커다란 손에 쥐고 있는 판다가 요슈아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이건 계약 위반이다냐. 따로 대책은 생각해 둔 거냐? 홍보는 무뚝뚝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판다 사장은 수익만 내면 되는 거지? 그러면 방송 활동 같은 건 전부 참여할게. 공연은, 이번 활동에서 필참 공연은 전부 진행했으니까. 지장 없잖아."

 

홍보와 판다는 서로를 힐끗거렸다. 요슈아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다는 불이 붙은 담배 끝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 그와 몇 마디 말을 오갔다. 독대 면담 내내 요슈아는 눈가 아래 짙게 깔린 다크서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클라이맥스 레코드에 소속한 밴드에서 자진해 밴드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다들 음악을 집착적으로 사랑하니까. 그것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니까…….
요슈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마른 입술에 한숨을 묻혔다. 후회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숨소리였다. 복도 맞은편에서 투덜대며 걸어오던 츠유가 요슈아를 발견하고 반쯤 감긴 눈을 크게 떴다. 요슈아를 향해 오른손을 흔든 그를 본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오는 츠유를 향해 애써 들뜬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

 

"……유 군, 안녕! 어디 가?"
"아~ 판다가 불러서 잠깐 면담. 근데 요슈아, 안색 최악 아냐? 잠 못 잤어?"
"그… 런가? 조금 설쳤나 봐."
"분명 그렇다니까. 조심해. 우린 목이 생명이니까, 건강 관리는 필수라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츠유는 급하게 지나쳐 가는 요슈아를 보며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종종 안색이 안 좋을 때는 있었는데……. 오늘은 진짜 상태 엉망이네. 짧은 의문도 잠시 사장실에서 판다와 홍보가 다투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이크' 소리를 내며 서둘러 복도를 뛰어갔다. 복도의 코너 저편에서는 요슈아가 벽을 짚은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필시 이게 맞는 거라고 몇 번이나 새로이 다짐하며.

 

 

도피하듯이 떠나온―어쩌면 돌아온―미국에 둘은 아예 자리 잡았다. 음악과 관련된 물품은 기타 한 개를 빼고 전부 두고 왔다. 제리는 비행기 좌석에 등을 붙이고 앉아 창밖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요슈아에게 음악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충동적으로 내뱉었을 때 보았던 그의 표정이 제리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제리가 반투명한 창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직면할 용기가 있다면 진즉 요슈아를 향해 전부 충동이었노라 말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제리가 그 문을 두드리기에는 여전히도 겁이 났다. 먼지를 닦아내도 쌓이는 창고 구석의 골동품을 언젠가부터 손대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꺼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처럼. 요슈아가 제리를 마주 보았을 때 미소 짓지 않을 일말의 가능성에 관하여 생각하다가 제리는 의자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안으로 말려 들어간 어깨가 욱신거렸다. 요슈아는 천천히 맺혀가는 한 줌의 불안감이 더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빠르게 구한 셰어 하우스를 정돈하여 이삿짐을 전부 넣어놓자 둘이 살기에는 어느 한 명이 부족한 것처럼 텅 비었고, 셋이 살기에는 둘만의 물건이나 향기가 가득했다. 결국 둘은 조금 비싼 집값을 그대로 부담하기로 했다. 요슈아가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와 만날 일은 아예 없었다. 어느 날은 연락이 오거나 음성 사서함이 남겨져 있었지만, 요슈아는 자신의 상처투성이 손목을 덮었던 것마냥 핸드폰도 뒤집어서 덮어두었다. 제리는 아래를 향한 화면에 그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을 피했다. 두 명의 도피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밤. 새벽에 나온 제리는 부엌으로 향해 물을 따랐다. 미적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그는 한 손으로 머그잔 손잡이를 붙잡은 채 거실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풍경이라고 누군들 생각하 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세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그 한기에 짧게 한숨 쉬고서 구석에 놓은 기타 케이스를 곁눈질로 보았다.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케이스 앞에 섰다. 케이스에는 여러 모양의 방수 스티커와 기스 난 흔적이 눈에 띄었다. J 알파벳 스티커 두 개가 딱 달라 붙어 있어 제리가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자기가 웃은 게 놀라운 나머지 입을 가렸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더니 머그잔을 내려놓고 케이스 지퍼를 조용하게 당겼다. 검은 케이스 안에는 요슈아가 제리와 함께 보낸 어린시절부터 쓰던 어쿠스틱 기타가 있었다. 요슈아는 제리가 묻지 않았는데도 마치 해명하듯 이유를 천자락 덧대듯 먼저 말했다. 이건…… 너와의 추억이 더 깊은 물건이니까.
제리는 낡아서 상하기 직전인 기타 줄과 나뭇결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파 앞 테이블로 걸어가 스탠드를 켰다. 어두컴컴한 거실을 독차지한 제리의 숨결이 부드럽게 새벽 공기를 타고 흘렀다. 노란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 볼펜을 들어서 장 볼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꾹꾹 눌러쓰는 손에는 힘이 담겼다. 요슈아가 그 목록을 보게 되는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요슈아는 예약 딜리버리에 맞춰 배달 된 브런치를 먹고, '플레처'라는 새 프로듀서의 오더에 따라 몇몇 방송 스케쥴을 나가고, 다시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제리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늘었다. 더 이상 밴드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요슈아의 발걸음이 들리자 제리는 급하게 케이스 앞에서 물러나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더 일찍 온 것 같아. 제리의 말에 요슈아가 등 뒤에 마련한 작은 꽃다발을 건넸다. 시야를 뒤덮는 하얀 장미의 행렬과, 그에 뒤따르는 짙은 꽃향기.

"이게 뭐야?"
"요즘 직장에서 고생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위로할 수 없으려나~ 싶었거든. 기뻐?"
"당연히 기쁘지! 고마워…… 바쁠 텐데."

제리가 자연스레 살구색으로 물드는 볼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요슈아는 언제나 갑작스러운 선물이나 이벤트를 좋아했다. 제리가 예상치 못한 채로 눈썹을 위로 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과 힘이 느슨하게 빠진 푸슬거리는 웃음소리가 좋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꽃다발을 품에 가득 안아 든 모습을 보다가 두 팔을 벌렸다. 제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응?"
"착한 남자친구를 안아줄 기회 줄게."
"기회 포기하면 어떻게 돼?"
"그러면…… 착한 남자친구가 슬퍼하겠지."

제리는 웃으면서 꽃다발을 한 팔로 든 채, 그 상태로 요슈아를 끌어안았다. 그가 지금 옆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빠른 심장 고동이 꽃다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렸다. 요슈아는 팔을 좀 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제리의 머리카락이 요슈아의 목덜미에 문대어졌다. 좋아? 응, 좋아. 요슈아의 짤막한 물음에 제리 또한 한 단어로 답했다. 불안을 애정으로 숨겨 덮은 온기가 유난스럽게 뜨거웠다. 요슈아는 작은 허밍조차도 하지 않았다. 꽃다발의 장미가 두 사람의 품 안에서 조금씩 형태를 뭉그러트렸다. 꽃잎 수십 장이 겹쳐져 만들어진 장미조차도 쉽게 형태를 잃어가는데 사람은 심장 한 개를 가지고 어떻게 이리도 올곧은 척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요슈아는 왼손 약지에 자리한 은빛 반지에, 빠진 타일의 자리에서 설탕 가루처럼 내려와 쪼아대는 빛결을 제리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노래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에 안심했고, 실망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요슈아의 목소리 끝이 피아노 건반을 약하게 누르듯 미세하게 떨렸다. 제리는 자기 등을 누르는 손결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휩쓸렸다. 하지만, 또 한 번 충동이 너를 상처받게 하면 어떡하지. 건넬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피를 대본 적도 없는 입술 끝에서 철 맛이 났다. 새하얀 와이셔츠가 구겨졌다.

 


"요슈아. 혹시 놀러 나가지 않을래?"
"엇, 응? 진짜?"
"오늘은 스케쥴 없다고 해서. 바쁘면 괜찮아."
"아냐! 안 바빠! 진짜로 하나도 안 바쁘……!"

 

방문을 두드린 뒤 반쯤 열어 고개를 빼꼼 내민 제리에게 요슈아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잡지를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발목과 목선이 훤히 드러나는 편한 복장이었다. 방문을 다시 닫으려는 제리를 붙잡기 위해 벌떡 일어나 손잡이를 움켜쥐려던 그는 발을 헛디디고는 얼마 되지 않는 방문과 침대 사이를 앞뒤로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문 끝에 발을 찧었다. 아…… 아야…. 요슈아가 관성적으로 침대에 다시 앉아 발을 감쌌다. 제리는 요슈아를 닮은 이불 위로 다이빙하듯 앉은 그를 보며 웃었다. 요슈아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거 진짜 아프다구."
"알아, 알아. 귀여워서 그랬어."


제리는 아예 방문을 열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요슈아는 자연스럽게 침대 중앙에 붙어 있는 제 몸을 왼편으로 조금 옮겼다. 제리는 넉넉하게 자리가 남은 오른쪽에 앉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에 우리 본격적인 데이트는 많이 못 한 것 같아서. 같이 보내는 시간은 늘었는데, 그렇지. 요슈아는 이불 위에 얹은 제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손마디 사이를 파고들어, 위로 깍지 끼었다. 회색 홍채에 살결의 색깔이 겹쳐서 오묘한 색상이 담긴 채로 변했다. 제리는 그의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그렇네……. 우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첫 데이트도 아니고."
"요슈아, 무리하는 거 아니지?"
"무슨! 그럴 리가. 애초에 너랑 함께 있는 건데 무리일 리가 없잖아."

음악을 그만두었다고 한들 요슈아는 대부분 여전했다. 활기찬 목소리로 이런저런 것을 내뱉으며 손등을 문지르던 요슈아는 이내 일어났다.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나갈까, 데이트하러. 제리는 아직 땋지 않은 머리카락이 앞을 간지럽히는 듯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일어섰다. 그래. 두 사람은 조금씩 맞지 않는 미묘한 기류를 조금씩 좁혀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요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면서 바지 주머니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플레처로부터의 전화였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요슈아가 전화를 받았다. 받지 않고 싶었지만.
허무맹랑한 말과 함께 어쨌든 긴급한 스케쥴이니 빨리 오라는 소리가 쾅쾅 귓가를 때렸다. 요슈아는 어떻게든 그것을 캔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등 뒤에서 제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핸드폰을 든 손을 허리 아래로 내리며 등을 돌렸다. 제리가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채로 서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머리를 홱홱 저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무어라 뻐끔거리며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가 봐. 둘만이 있을 때 사용하는 일본어 발음은 선명하게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로맨스 소설의 도입부는 아니었다.

 

플레처의 부름에 요슈아는 라디오 녹음 현장에 들어섰다. 아직 온 에어 버튼이 켜지기 전이었다. 겉옷을 챙겨 입던 그는 다행스럽게도―새 프로듀서이자 어린 예술가를 무시하는 남자의 기준서―얼마 걸리지 않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플레처는 요슈아를 보자마자 거만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지 않고 손가락을 계속 두드렸다. 요슈아는 촬영장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따끔거리는 손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플레처는 그의 상태를 위아래로 훑고서는, 쯧쯧대며 혀를 찼다. 그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남자의 지시에 따라 녹음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스탠바이가 몇십 초 뒤에 이루어지고, 요슈아는 급히 통지받은 탓에 외우지 못한 오프닝 멘트를 적당히 따라 했다. 라디오 MC는 요슈아를 소개하며 한없이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방긋거렸다.
MC의 진행은 물 흐르듯 진행되어 갑자기 찾아온 요슈아도 무리 없이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요슈아는 라디오에 들어온 사연을 읽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역할이면 끝이었다. 아까부터 그의 속이 좋지 않았다. 사연은 다양했다.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신청한 부드러운 발라드, 길 가다가 도둑을 만났는데 가까스로 도움을 받아 그 행인을 꼭 찾고 싶다는 이가 신청한 댄스곡, 그런 사소하고도 동시에 큰 사연들을 요슈아가 흔들림 없이 읽었다. 그러다 한 사연 카드를 건네받은 순간 그가 멈췄다. 한 뮤지션의 사연이었다. MC가 요슈아 씨, 라고 세 번쯤 부르고 나서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아, 응, 응……. 사연 읽을게. 20살 C 씨의 사연입니다.
요슈아의 낯빛은 사연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어두워져 갔다. 흔한 뮤지션의 고난이었다. 너무나도 음악을 하고 싶지만, 재능이 없어 주변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언제나 음악을 향해 가 있다. 그러한 젊은 예술가들이 할 법한 보편적인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요슈아가 사연을 읽는 사이사이마다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따금 자신과 비슷한 문장이 나오고는 하면, 비어 있는 왼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눌렀다. 상처로 가는 습관적인 도피가 잦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끊어 내며 겨우 사연을 끝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신청 곡을 보자마자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MC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청 곡에는 브레이브 차일드의 곡명이 쓰여 있었다. 게스트가 출연한 때에 그 게스트의 노래가 있는 사연을 꼽는 건, 지극히도 당연하고 잦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C라고 칭해진 누군가에게서부터 책망받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떠올리고 써내렸을 곡 제목이었다. 그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은 힘겹게 내뱉어진 제리의 목소리였다. 그는 제리가 줄 이어폰을 꽂고 MPC 플레이어에 그의 노래를 담아 듣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 좋다며, 왜 좋은지, 가사는 또 어떤지 하나하나 상냥하게 읊조리며 말해주던 때였다.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간지럽히면 제리는 요슈아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한 소절을 불러달라 청했다. 그러면 요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목을 가다듬고 한 소절씩 불러나가기 시작했다. 상냥하게 허공을 두드리는 음계는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꽃봉오리처럼 피어났다. 제리는 요슈아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색깔의 꽃을 사랑했다. 요슈아는 제리가 포기한 꽃내음과, 자기가 놓은 꽃잎의 모양을 느지막이 기억해 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추억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일은 아니었다.
MC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그가 녹음실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플레처를 포함해 조정실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시선이 요슈아에게로 향했다. 그가 각종 회전 다이얼과 믹싱 콘솔 쪽을 눈으로 훑더니, 녹음실 안으로 송출되는 마이크 버튼을 OFF로 바꾸었다. 플레처가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이제 그만 둘 거야."
"뭘 그만둬?"
"날…… 속이는 거."

 

요슈아는 옷깃 맨 위까지 전부 잠가둔 단추 한두 개를 풀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음악을 관둔 요슈아라니, 계속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속으로 단언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다시 마음을 바로잡은 것만으로 요란하게 가슴이 뛰면 안 되었다. 플레처는 그가 어떤 연유에서 이렇게 심경을 바꾸었는지 대충 짐작했다. 그는 수익을 창출하는 엔터테이너에게 어떤 야심이나 자아를 바라는 성정이 아니었다. 플레처는 한숨 쉬며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며, 다시 녹음실 안으로 들어가라 명했다. 하지만 요슈아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이였다. 제 선택이 틀릴까 두려움을 동반한 고양감에 떨었으며,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 더욱 쉽고 가슴이 뛰었다. 요슈아의 모든 세포가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붉게 물든 손등뼈와 귓불이 익어갔다. 스튜디오 녹음실 안쪽 MC는 이제 참견하기도 지친 듯 요슈아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밴드 한 번에 실패, 두 번에는 포기, 세 번에는 뭐지. 그런 타이틀을 얻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건 지금 눈을 감고 MC의 옆에 앉아 신청 곡을 틀어달라 말하면 언젠가 보게 될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그것만큼은 정말로 싫었다. 요슈아는 꿈쩍도 하지 않는 늙은 프로듀서에게 그는 무력감을 느끼는 대신 떨리지만 단언하듯 말했다.

 

"역시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돼."

 

요슈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양손으로 이마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를 감싼 그는 한 번 길게 마른세수하고서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창문 바깥에서 들리는 달고 쓰던 소음들이 전부 요슈아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창문과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슈아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렇게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불안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그의 구두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도 몸 안의 모든 것이 움직이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부조리할수록 빛나는 불빛은 매섭게 그를 비추었다. 플레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침음을 냈다. 플레처는 품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길고 가는 궐련 끝에 붙은 불꽃이 반딧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플레처는 필터를 입에 머금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담배를 입술 사이에서 꺼낸 뒤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래서…… 도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요슈아는 플레처의 질문에 걸음을 주춤거렸다가, 이내 확신이 담긴 어투로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음악을 할 거야."

 

플레처는 프로듀싱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댔다. 라디오 MC가 엉성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계속 진행하냐는 물음을 제스쳐로 보냈다. 플레처는 구두로 바닥을 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스튜디오 녹음실에 전달되는 마이크 버튼이 다시 한번 OFF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요슈아를 향해 말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투였다.

 

"넌 지금 네가 얼마나 애처럼 구는지 몰라……. 너 같은 놈들을 내가 잘 알지. 지금 당장은 시시한 감정에 휘둘리다가, 나중에 와서 다시 받아달라고 할걸."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요슈아는 한순간에 정점을 찍은 감정을 다스렸다. 짧은 남자의 말을 몇 번 되새겼다. 화만 내서는 언제까지고 그대로였다. 하고 싶은 말들을 가다듬어 정제된 언어로 내뱉었다. 그 시시한 감정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거야. 그러니까 바뀌는 건 없어. 요슈아는 그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돌아서 왔는지 생각했다. 주변에서 그를 칭하던 수많은 호칭이나, 유명세에 휩쓸려 본인이 정말 특별하다고 자부했다. 기다란 실로 만들어진 원형의 길을 계속 돌며 답을 찾았다. 애초부터 길은 그의 옆에 바로 나 있었는데. 붉어진 눈가를 마구 비빈 뒤, 플레처의 대답을 듣지 않고 요슈아가 먼저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 조용해진 스튜디오는 애써 끌어 올린 분주함마저도 사라진 상태였다.

 

요슈아는 셰어 하우스에 급하게 들렸다. 빗방울이 세게 그를 때렸다. 점점 빗발이 거세져 추위가 초겨울에 비슷해질 정도였다. 벅차오르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건가. 담벼락 너머 고양이 우는 소리부터 시작해 어린아이의 떼 쓰는 소리, 풀잎들이 바르작거리는 소리, 물웅덩이를 밟는 단촐한 신사의 첨벙이는 발소리, 모든 게 요슈아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스튜디오의 볼륨 버튼을 최대치로 올린 듯한 감각이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요슈아는 젖은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떨리는 손이 계속 헛손질하며 열쇠 구멍에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딱 맞게 들어갔다.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풍경이 반겼다. 똑같은 집안의 풍경인데도 불구하고 이전부터 계속 오묘하게 느껴지던 한기가 사라진 것마냥 온화했다. 마룻바닥을 신발로 밟아서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 케이스를 집어 등에 메었다. 그리운 묵직함이었다. 노래를 부른지는 반년이 넘었고, 기타를 친 지는……. 요슈아의 기억으로는 가늠이 가지 않는 세월이었다. 이따금 소타와 반주 리듬을 맞추기 위해 꺼내 와 합주해 본 것 빼고는.


"나도 참…… 하하…. 바보 같다니까, 진짜…"


스스로도 영 황당한 사고 흐름에 요슈아의 입에서 바람 빠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플레처의 말대로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가 아무 일도 없던 척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해서,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는 일을 해도 되었다. 혹은 다른 방송에 나와서 브레이브 차일드 시절 있었던 유쾌한 일화를 풀어내며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시즌의 계약 기간을 두루뭉술하게 채울 수도 있었다.
그날을 떠올렸다. 현관 복도 가장자리를 돌아서서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며 체념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던 제리의 목소리를.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해놓고서 피하려는 자신이 나약하고 한심해서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헛웃음 끝에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요슈아가 기타 케이스의 줄을 꽉 잡고, 빗발치는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쏟아지는 빗방울로 인해 한참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요슈아가 셰어 하우스로 들어서기 이전 단 몇 분의 차이였다. 그런데 이미 충분히 거리는 일사불란한 수준의 차이가 눈으로 보기에도 훤히 났다. 무채색의 우산들이 부딪치며 흑백 콜라주를 이루는 듯했다. 피곤함에 찌든 다크서클을 주체 삼아 움직이는 이들의 발걸음은 지나가는 순간만 모아 담아도 긴 나날을 그렸다. 요슈아는 숨을 헐떡이며 거리 중앙으로 향하며 인파 사이를 헤쳤다. 낡은 부츠가 길바닥의 물웅덩이 사이로 튀어나오고, 얇은 자켓 하나만을 간신히 걸친 와이셔츠가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낡은 페도라 모자로 눈을 가려 보이는 풍경은 오로지 한산하게 옹기종기 낀 채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다리뿐이었다. 쇼핑 거리의 끝에서 보이는 포장도로에선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 사이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젖은 포장도로에 눈부시게 밝게 반사되어 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매서운 칼날에 스치는 것처럼 힘겨웠다.
매연에 목이 타들어 가는 듯이 따끔거렸다. 모자의 챙 아래로 머리카락을 집어넣은 후 시야를 어지럽히는 물방울만 간신히 닦아냈다. 그럴 때면 잠깐 멈춘 요슈아는 네온 불빛으로 빛나는 간판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행인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가 멈춰선 탓에 뒤에서 걷던 누군가가 기타 케이스 윗동에 부딪혔다. What the…. 요슈아는 뒤에서 욕설을 읊조리는 이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움직여 지나갔다. 저 너머의 도로 신호등이 붉은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는 순간, 마침내 요슈아는 발을 거리 중앙에 붙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하늘은 도저히 맑아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굽 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기타 케이스를 두드리는 빗방울이 그를 재촉하는 듯했다. 그는 젖은 콘크리트 냄새를 마시며 호흡을 정돈했다.
어릴 적에는 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때라 해 보았자 제리와 함께 했던 짧은 시절이었다. 이따금 서로가 사는 도시에 놀러 가면 귀신같이 하늘은 어둠을 그리며 비를 쏟아냈다. 요슈아는 제리에게 우비를 입히고, 밖으로 꼭 나갔다. 반투명한 우비는 아래 입은 옷의 실루엣을 대부분 그대로 보여줬다. 둘이 사는 세상은 현실이었기에 로맨틱한 배경 음악이나, 갑자기 몇십 명이 도로로 달려들어 플래시몹 댄스를 선보이는 일은 없었다. 즐거운 일도 딱히 없었다. 그래도 어깨를 감싸는 차갑고 한기 서린 일정한 감촉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레어서 발을 맞추고 놀았다. 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옛날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필시 과거가 노스텔지어로 덧씌워져 아름답게 보이기만 하는 탓은 아니었다.
요슈아는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를 두리번거리고, 거리 중앙에 정해진 간격으로 배치된 나무와 그 아래 벤치를 쳐다보았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벤치에 우비를 입은 채 잠시 시간을 죽이는 이들에게 요슈아는 관심 외의 인물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탓에, 더더욱. 그는 잠시 떨리는 손마디를 느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차가운 호흡, 귀에 전해져 오는 고동 소리.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에 빗방울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한가득 맺혔다. 노래를 부르지 않은지도 반 년이 넘게 지났다.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사방에 노이즈가 껴 시야가 흐려지려는 순간, 요슈아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아 과거를 더듬었다. 그의 지나온 나날 속 존재했던 제리의 모든 흔적을. 그러자 잠시나마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호흡이 마침내 진정됐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길가에 내려놓고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꺼내자 그의 눈동자가 수축하였다가 돌아왔다. 음악을 그만두기로 한 뒤에, 요슈아는 일부러 기를 쓰고 기타를 쳐다보지 않았다. 기타리스트는 따로 있었지만, 음악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인다면 다시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먼지가 쌓여 있어야 할 기타였다. 결심한 이후로는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으니까.
마모된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기타는 그 확신을 배신했다. 기타 표면 나뭇결의 부드러운 촉감이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은 것 같았다. 현은 반짝이는 금속 프렛 위에 단단히 조여진 새 제품이었다. 요슈아의 마스크 안에서 땀과 흘러 들어간 빗방울이 섞였다. 그는 그것을 손질할 수 있는 유일한 이를 생각해냈다.

 

"너는 항상 날 봐주고 있었구나."

 

요슈아가 마른 웃음과 함께 자조했다. 목소리가 흐렸다. 정작 당사자는 듣지 못할 혼잣말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흔들리던 한 점의 망설임까지도 전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타를 메고, 심호흡한 뒤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건 전부 너를 위한 거겠지.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에서 몸을 일으켜 화음을 빠르게 조율한 뒤 마스크를 벗고 목을 가다듬었다. 쓰고 있던 모자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양에 가까운 회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 어린아이처럼 순정을 잃지 않은 눈동자. 그를 구성하는 모든 상냥한 순수함의 증명. 아주 일부만이 그를 눈치채고 소곤댔지만, 그 광경은 요슈아의 신경 밖이었다. 그는 터질 듯이 요란한 심장을 입 밖으로 꺼내야만 했다.

 

작고 재잘대는 듯한 목소리가 가사를 읊조리듯이 노래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에서 진동하는 줄 하나하나를 다시 한번 느꼈다. 선이 얇으면서도 강한 음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 한두 명이 그를 주목했다. 몇몇 걸음걸이가 슬로우 모션을 걸듯 느려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에 줄을 튕기는 손가락은 계속 미끄러지고, 오랫동안 손대지 않아 녹슨 동작에 연주는 엉성했다. 거리를 울리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예전을 그리워하는 입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음이 거칠고 생생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지. 제리. 입과 손이 저절로 움직여.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짓에 따라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가, 뒤로 젖혀졌다. 빗방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튕겨 나왔다. 높게 찌르는 음과 함께 요슈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사람들의 위에서 끊임없이 내리던 비가 한두 줄기씩 주춤댔다. 이것이 드라마라면 분명 최종화. 이것이 영화라면 분명 클라이 맥스. 이것이 노래라면 마지막의 브릿지 부분……. 우스운 비유를 머릿속에 품은 요슈아의 머리 위로 회색빛 세상에 균열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 조금 전까지 햇빛을 가렸던 뭉게구름과 그림자 사이로 태양이 소심하게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었다. 푸른 조각이 퍼즐을 맞추듯 재배열되어가고, 회색빛으로 생기를 잃었던 거리 위로 조금씩 햇살이 내리쬐며 따스한 빛깔로 물들었다. 무거운 커튼 뒤의 세룰리안을 드러내는 것처럼 푸른 결점들이 줄무늬를 이루었다. 이슬비는 부드러운 안개처럼 옅어지다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완전히 증발하여 도시 전체를 비추었다. 마침내 거리를 가득 덮던 어둠이 물러나자 눈을 질끈 감은 채 필사적으로 음을 내뱉던 요슈아도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아주 짧은 순간 숨을 멈췄다.

활기찬 옷차림이나 페인트 얼룩이 묻은 너덜너덜한 셔츠를 입고, 누군가는 직장으로 달려가면서도 그를 향해 계속 힐끗거리고, 일부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는 커피를 든 채 그를 가리키고 수다를 떨었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부터, 누군가는 핸드폰을 꺼내 요슈아를 피사체 삼아 영상을 찍고 있었다. 전부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순간이었다. 낯선 이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누군가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그 순간. 입이 벌어지면서 구름을 삼킨 듯 가슴이 둥글게 팽창하는 듯했다. 주춤대던 목소리는 턱이 사방이 기울어질 때마다 서서히 웃음기를 머금었다. 새벽 한 시에 오선보의 음표를 찢어내던 순간 밀려오던 파도를 기억했다. 입술을 깨물면 나오던 피의 철 맛을 기억했다. 사랑하는 것을 깨워 쫓아내던 때를 기억했다. 제리가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듯 더욱 그을음을 떠올렸다. 아팠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빛난다는 걸.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석양을 기다리며 서서히 주황빛을 끌고 오는 태양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크게 기타 줄을 튕기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단숨에 내뱉어 끝을 맺었다. 거리를 뚫는 높은음이 갈무리되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벅찬 심장을 진정시키려 호흡했다. 몇 초 동안 거리가 조용했다. 그러다 박수 세례가 나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느끼자마자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요슈아는 이제야 그 쓰라리고 상처 깊었던 기억을 입 맞추어 떠나보내게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제리는 파토 난 약속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들어온 업무 처리 요청에 한숨을 쉬며 자책 섞인 미련을 한창 곱씹었다. 차라리 일하는 편이 좋았다. 바쁘면 괜한 생각에 깊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두세 시간 정도 일한 뒤에 보고를 마친 그는 집 앞 현관에 서서 스페어 키를 꺼냈다. 예기치 못하게 쏟아진 비 탓에 제리는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다. 집에 들어가면 곧장 욕실로 향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실 불이 전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제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불쑥 확인했다. 요슈아가 참여한 라디오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먼 시각이었다. 그는 설마 싶은 마음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거의 똑같이 축축하게 젖은 요슈아가 그의 방문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제리의 인영을 보고 나아가는 걸 멈췄다.


"제리."
"요, 요슈아? 무슨 일이야?"
"…저기, 들어 봐. 꼭 들어줘야 해."

 

그는 요슈아의 필사적인 말에 고개를 어렵사리 끄덕이며 긍정했다. 젖은 몸체가 거슬렸지만, 그것보다도 몸도 약한 그가 쫄딱 젖은 모습이 신경 쓰였다. 그는 제리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남겨 두고 정지했다. 창밖에는 이십 분 전 그친―멀고 먼 제리의 근무처는 야속하게도 편도로 사십 분 정도 걸렸다―비로 인해 밝은 햇빛을 드러냈다. 제리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에 이별을 고할 수 있는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요슈아는 전혀 제리가 생각지도 못한 문장으로 운을 띄웠다.

 

"다시는 음악 안 한다고, 너와 약속했던 거 있잖아."

 

요슈아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고민하는 듯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뻐끔, 입이 한번 작게 열렸다가 다물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천천히 창문 너머로 먼 곳을 바라보듯 움직였다. 그 눈매가 무언가 그리운 풍경을 가늠하는 것처럼 가로로 길게 가늘어졌다. 입술의 틈새가 벌어졌다. 그리고 쓰게 웃는 미소를 제리에게 건넸다.

 

"―미안해. 거짓말이 되어버렸어."

 

제리는 그의 얼굴에 잠시 어두컴컴한 후회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기타 케이스의 줄을 질끈 쥐는 요슈아의 손등에 핏줄이 강하게 드러났다. 한쪽 입꼬리만을 엉성하게 올려 만든 미소는 한없이 무너질 것처럼 가파르고 조급했다. 거짓은 아니었지만, 태연함 또한 없었다. 빗방울에 젖은 눈꺼풀이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진한 검은색을 띤 채 깜빡거리며 떨었다. 흠뻑 물든 와이셔츠 아래가 초라하게 맨살을 내비쳤다.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마음을. 이 고동을. 이 감정을. 요슈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심정을 제리에게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소녀의 뭉그러진 심장 모양처럼. 호밀밭을 헤매는 순수의 끝처럼. 그 비 오는 거리에서 반년도 넘는 시간 만에 입을 열어 노래한 순간, 젖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관성을 따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제리가 먼저 말문을 텄다.

 

"요슈아?"

 

침을 삼켰다. 본능을 삼켰다. 마음을 삼켰다. 고개를 든 요슈아가 호소하듯 와이셔츠의 가슴께 부분을 꽉 잡고 무너질 것처럼 토해냈다. 한 줌의 작고 낮은음이 아주 느리게 재생되었다. 제리는 그 음을 듣기 위해 앞으로 발걸음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리며 움직였다.

 

"이러고 싶지 않았어. 정말로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런데도 노래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알아, 내가 바보 같다는걸."

 

제리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그는 부드러운 연인의 손짓에 뺨을 기대었다. 차갑고 축축한 뺨은 지나치게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요슈아의 은빛 눈동자에 새겨진 상흔이 반짝거리며, 그에서부터 작게 여위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여윔이 그를 감쌌다. 제리는 음표가 뾰족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요슈아의 살은 무척 여려서 그것을 끌어안았을 때 한없이 상처 입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요슈아가 안고자 하는 건 언제나 오선보에 찍히는 검은 잉크 자국들이었다. 접촉의 순간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요슈아의 붉은 눈가를 제리가 쳐다보았다.
제리와 시선이 부닥치는 찰나에 요슈아가 그의 손목을 두 손 사이로 밀어 넣고, 약한 힘을 주었다. 차가운 셔츠 소매가 제리의 손목에 닿아 마구 비벼졌다. 제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를 둥근 눈으로 응시했다. 요슈아와 제리는 서로를 한순간도 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증오나 경멸만이 사람을 해치고 찢는 감정은 아니었다. 가끔 누군가의 다정함은 슬픔과 공존하였다. 요슈아의 말에 이번엔 제리가 할 말을 찾는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그의 앞에서만 서면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헤매는 미아가 되는 기분이었다. 망설임을 감싸 한 문장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넌 늘 아파하잖아…."
"네 탓이라고 생각해? 이번에도?"
"아니야. 알아. 전부 다."
"플레처가 그랬어. 내가 지금 시시한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고."

 

요슈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복부가 팽창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하늘을 가린 먹구름 때문에 멎지 않는 습기를 입안으로 강하게 집어넣는 듯한 동작이었다. 플레처를 입에 올리는 잠깐의 억양이 거세졌다. 제리는 그 프로듀서가 설마 거기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놀란 탓에 손목 근처의 혈관에 긴장이 도사려,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요슈아는 눈치를 챈 채로 힘을 느슨하게 하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내가 정말로 혐오스러운 건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였어. 어떤 마음으로 네가 내게 음악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한 건지…… 잘 아니까. 제리 네가 안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요슈아는 미약하고 나약한 심정에 몸을 맡겼다. 한 발자국 멀어진 걸음은 두 발자국 떨어지고, 세 발자국에 다다랐다. 거리가 멀어지는 한순간마다 요슈아의 몸이 느리게 흐트러졌다. 제리는 그로 인해 축축해진 자기 손목 부근과 요슈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요슈아가 들뜬 목소리로 읊어주었던 수많은 보컬리스트가 생각났다. 폴 매카트리, 존 레논, 프레디 머큐리, 로저 달트리…. 그가 되고자 바랐던 이들을. 입을 다문 채 요슈아의 눈동자를 마주 보려고 제리는 애를 썼다. 고개 숙인 요슈아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리. 나는 네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어서 선택한 거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그래서 그냥 내키는 대로 해버렸어. 플레처의 말이고 나발이고, 전부 무시하고. 거리로 나가서. 기타 하나를 들고…… 계속 노래했어. 요슈아는 날카롭게 정제되지 않은 자신의 날것을 천천히 약한 껍질로 덮었다. 핏방울에 그을어진 흉터가 따끔거렸지만, 불손한 생각보다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관해 전해주고 싶었다. 요슈아의 젖은 머리카락이 그가 고개를 흔들면서 헝클어졌다. 멀어졌던 세 걸음을 그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깨달았어."
"……뭐를?"
"네가 내 음악을 들어주는 게 좋아. 내가 널 생각하며 노래 부르는 게 좋아. 널 위해 음악을 만드는 게 좋아. 노래하는 날 사랑해 주는 네가 좋아."

그 보컬리스트는 마침내 정면을 똑바로 본 채 자신의 연인에게 고해했다.

 

"이게 나의 본망이야.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 있어 줘."

 

제리는 더할 나위 없이 수줍고 고양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가 노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확신했다. 제리의 대답 또한 정해져 있었다. 당연하지. 끌어안은 품이 지독하게 따뜻해서 요슈아는 얼굴을 한참 동안 묻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일어났을 때 요슈아는 이미 예견된 야단법석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핸드폰 화면에 미친 듯이 쌓이는 플레처로부터의 부재중 통화나, 가까운 지인으로부터의 안부 문자. 더 나아가 밴드 시절 팬이었던 이들이 보내는 기다란 팬레터들. 그는 미리보기로 띄워진 것만 읽어도 날밤을 샐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투명한 핸드폰 케이스를 위로 한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공용 거실에는 이미 제리가 먼저 나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흠뻑 젖고 돌아온 덕분에 요슈아가 에취, 하고 짧게 기침했다. 몸이 으슬으슬하니 몇 초 고민해 보지 않아도 감기였다. 열이 오르지 않았으니 며칠 안 가 사라질 듯한 정도였다. 빳빳하게 마른 흰 티셔츠를 입고서도 몸을 떠는 걸 본 제리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괜찮아? 역시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이 정도는 괜찮아. 너는 날 너무 애처럼 보는 면이 있어. 제리도 알지?"
"애 맞다구. 내 속만 썩이고."
"알았어. 용서해 주세요, 누나."

 

요슈아는 언제 풀 죽었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제리는 어느새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린 요슈아를 빤히 보다가, '콩' 소리가 나게 이마에 한 대 딱밤을 때렸다. 요슈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 제리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서 잠깐 말이 없다가 본론을 꺼냈다. 정말로 괜찮겠냐고. 요슈아는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아래로 향해 양쪽 허리를 짚었다. 솔직히 말해……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반년 동안이나 플레처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당분간 메이저 진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지도. 거기까지 말한 그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살짝 굽어 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태의 심각성을 읊던 모습은 어디 가고,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도 후회 안 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지금까지도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에 제리가 눈을 크게 떴다. 멍하니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셰어 하우스의 바깥에서는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주택 거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새가 재잘대듯 사방을 비추는 햇볕은 따뜻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요슈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리는 자신이 그에게 해준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요슈아는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별빛과 햇빛의 조각이 동시에 가득하게 차 있어, 그의 앞에 어둠이 한두 개 생긴들 다른 빛이 작고 무거운 고동을 울리며 맥박했다. 그러니 그의 유성이 꺼질 일은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는 봄의 따스함에 몸을 기울였다. 제리는 별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제리의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가 요슈아의 손목을 끌어당겨 잡았다.

 

"다시 후회하게 된다면, 내가 잡아줄게."

 

요슈아는 반대쪽 손으로 그의 팔뚝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제대로 잡아주어야 해. 제리는 산들바람이 입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잘게 미소 지었다. 잠깐 나갔다 올래? 저번에 우리…… 결국 못 나갔잖아. 요슈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아이가 세우듯 놀러 나갈 계획을 세울 동안, 플레처는 도저히 전화를 받지 않는 요슈아로 인해 이마를 짚고 히스테릭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모자를 쓰고, 혹시 몰라 평소 입는 옷과는 조금 다르게 입었다. 가끔 입는 검은 터틀넥 위로 링 목걸이와 하얀 단추형 자켓, 굽 없는 샌들. 제리는 쇄골이 드러나는 널찍한 품의 검은 투피스 원피스를 입은 채 나갔다. 요슈아는 핸드폰을 들고 나가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나가 제리를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떤 봄의 순간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기쁘기도 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먼저 현관을 나서 제리가 나온 뒤에 문을 닫았다. 요슈아는 간질거리는 속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꺼낼지 한참 고민하고는, 웃음기가 담긴 어투로 물었다.

 

"기타 말이야."
"아."
"그거, 전부 네가 손질해 주던 거… 맞지?"
"……내 입으로 말하면 부끄러워."

 

요슈아는 볼에 홍조를 띤 채 한껏 올라간 어깨를 감추지 않았다. 헛기침을 하며 제리의 손을 마주 잡고 이어 말했다.

 

"그걸 발견했을 때, 확신했던 것 같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노래하지 못할 거라고. ……네 덕분이야."
"나랑 반대네. 난, 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야."

 

제리는 조곤조곤 설명하며 품 안에서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 요슈아의 앞에 건넸다. 요슈아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포스트잇을 건네받았다. 살 목록: 마스킹 테이프, 핑거보드 관리용 오일, 새 기타 줄. 그가 더듬더듬 목록을 읽으면서 점점 환해지는 요슈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힘을 주어 엮은 손마디를 건드렸다. 음악의 음 자도 모르는 제리는 트러스 로드를 조정하던 도중 손가락을 베이는 일도 잦았다. 요슈아는 보컬리스트인데도 불구하고 언젠가 다시 노래하게 된다면 그 기타를 가장 처음 먼저 손대리라는 무의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매일 새벽이나, 제리가 퇴근한 뒤 요슈아가 보이지 않으면 그는 곧장 기타를 꺼내 먼지를 닦았다. 전체적으로 교체할 때가 되면 그렇게 도구를 사 와서 손을 보았다. 처음 한두 번은 기타 꼴이 엉망으로 변하기도 했다. 괜한 일은 한 건 아닌가 싶다가도 눈을 감으면 아주 어린 시절 간단한 즉석 연주와 함께 허밍하듯 들려준 옛 노래의 순간들이 둥실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그와 똑같은 색으로 세상을 보는데도, 함께 하는 순간 세상의 색깔이 몇 배는 다채로워졌다.

 

두 사람은 다양각색의 주택이 늘어진 브라운 스톤을 지나 브루클린 하이츠에 다다르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이스트강을 가로지르는 브루클린 브릿지가 하늘과 물 사이에 매달린 거대한 거미줄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케이블과 타워를 따라 황금빛 조명이 반짝이고, 아래를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파도처럼 행렬을 따라 이어졌다. 다른 관광객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감탄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작은 렌즈에 아름다운 금빛 물결을 담았다. 왼편으로 불이 꺼진 맨해튼 다운타운과 발아래 멀리 펼쳐진 부두가 대조를 이루었다. 온통 하얀 요슈아마저도 밤의 눈부시고도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혀 별빛만이 겨우 밝게 빛났다. 녹색 조명의 레이디 리버티 뒤로는 각기 다른 높이의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르듯 키를 자랑했다.
검은 하늘에 자수가 새겨지듯이 알알이 콕콕 박힌 금색이 반지처럼 반짝였다. 제리는 입을 벌리며 요슈아를 보았다. 요슈아도 그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에 차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밤바람이 자켓 안쪽을 파고들어 오는 감촉을 즐기며, 오른손으로 브루클린 브릿지를 가리듯 허공에 뻗었다. 그리고 건물을 손에 쥐듯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스쳐 지나가던 한기 서린 바람이 손아귀에 갇혔다가 빠져나오면서 정말로 별빛이 담겼다 사라진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짓을 보고 똑같이 따라했다. 낭만이라 하기에는 제법 유치했고, 유치하다 하기에는 깨나 설득력 있었다. 그는 제리가 자신을 따라하는 걸 보고 느리게 웃었다.

 

"어때."
"요슈아가 담은 것보다 조금 덜 담았어."
"그럼 내가 이긴 거네, 신난다! 소원 하나 들어 줘."
"으응? 이거 내기였어?"

 

요슈아는 얇은 입꼬리를 양옆으로 얄궂게 끌어올렸다. 당연하지. 제리가 울타리에 양쪽 팔꿈치를 올린 채 등을 굽히고서 요슈아를 응시했다. 그래, 소원이 뭔데? 그는 단조롭게, 하지만 조금은 기대한 목소리로 요슈아의 소원을 기다렸다. 요슈아는 히죽거리다가 이내 그를 끌어당겨 안고서는,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해 줘. 제리가 놀란 듯이 요슈아의 등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당연하고 사소한 소원이었다. 그 말은 억만 번도 더 넘게 말해 줄 수 있는 말인데. 그럼 억만 번 넘게 말해주면 되겠네, 좋다. 제리는 요슈아의 품에서 바스락대며 먼지를 터는 듯한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요슈아가 목덜미가 간지럽다며 장난스레 입을 벌려 엄살을 부렸다. 검고 노란빛 가운데 강 위로 형형색깔의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이보다 더 환한 빛은 두 번 다시 없을 정도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강렬한 색채였다. 붉은색 폭죽이 가장 먼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고, 그 다음은 초록. 그 다음은 노랑. 그 다음은 파랑……. 다섯 번째 폭죽이 어둠을 밝히는 찰나에 요슈아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제리가 덥썩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눈높이를 맞췄다. 요슈아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를 응시했다. 시야에 오롯이 그만 담기는 거리였다. 제리는 자신의 두 손에 깍지를 끼고, 더없이 명백하고 확실한 말을 건넸다. 언젠가의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말을.
요슈아는 둥글게 벌어졌다가 가로로 찢어지고, 다시 타원을 그리며 마지막에 입술을 삐죽 내미는 제리의 입을 보았다. 폭죽 소리에 제리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들리지 않아도 괜찮았기에……. 요슈아는 연인의 품에 가두어진 목덜미에 닿는 손결을 주름 하나까지도 기억하려고 애썼다. 영원에 가까운 순간으로 남았으면 하였다. 레이디 리버티가 밤의 몽환경처럼 반짝였다. 수백 수천 개의 창문 조명.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빛. 멀리서 보면 그것들의 모임은 밤을 가로지르는 점묘. 분명 지금 그와 마주 보는 이 순간도 누군가에겐 점 한 개가 되어 커다란 그림의 한 부분이 되겠지. 요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제리도 따라 웃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게 사랑하고 싶다. 그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움직였다. 입술이 맞닿아 숨이 가로막혔다. 여전히 온기가 가득했다. 불꽃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둘이 살기에는 넓고, 셋이 살기엔 좁은 집. 남은 공간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기로 결심한 아마도, 그랬어야 할, 처음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기타와 피아노가 다시 들어섰다. 전부 떼어냈던 포스터들이 다시 벽에 붙여졌다. 요슈아의 밴드 시절 음반 CD들이 차곡차곡 책장과 선반 안을 채웠다. 조금씩 빈 곳을 지워나갔다. 요슈아는 문득 생각했다. 제리와 그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우연인지, 필연인지에 대해. 사실 그가 어째서 제리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요슈아 본인조차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일순간의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제리가 연인으로 보인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별 끝의 미래가 상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슈아는 제리와 헤어지게 되어도 쭉 함께할 수 있으리란 묘한 확신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제리의 입술에 더 이상 입 맞출 수 없더라도, 제리가 내는 심장 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없는 위치가 되더라도.
어릴 때부터 잡아온 손은 여전히 비슷한 크기 차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키도 얼추 비슷했다. 그 외에 식사량부터 하는 일, 대부분 요소는 늘 그랬듯 정반대를 가리켰다. 인테리어 취향도 아마 조금은. 제리는 액자에 걸어둘 사진을 요슈아와 함께 고르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이거 내가 너무 이상하게 나오는데!"
"왜? 전부 다 엄~청 귀여운데……. 앗, 이것도!"
"그건 진짜 찐빵같이 나왔잖아."
"그래서 귀여운 거라니까."

 

요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가리킨 사진에는 아침을 먹다가 요슈아가 불러 고개를 든 제리가 피사체로 담겨 있었다. 제리는 조금 투덜거리며 요슈아가 짚은 사진 왼쪽에 있는 걸 선정했다. 이번엔 요슈아가 한참 졸다가 깨어나 눈이 반쯤 부은 상태로 소파에 드러누운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요슈아의 턱과 귀 끝이 살짝씩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돼! 왜 안 되는데? 아니, 그게. 너무…… 아무튼 안 돼. 요슈아는 논리가 턱없이 부족한 주장을 펼치며 손사래 쳤다. 하나하나 짚어갈 때마다 추억이 이슬처럼 송골송골 맺혀 물컵 하나를 꽉 채우다 못해 흘러넘칠 것처럼 합쳐졌다. 일이 해결되니 풀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꾸며두고…… 다시 돌아가는 거야?

"음, 뭐 그렇지. 나중에 투어 올 수도 있으니까."
"에에."
"그리고 라멘 먹고 싶은걸."
"이유가 단순해."

 

요슈아가 입을 가린 채 쿡쿡대며 웃었다. 둘 옆에는 잔뜩 짐이 실린 캐리어가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여전히 기타가 든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상의 끝에 그것을 두고 가기로 하였다.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 기타를 한 번 더 다시 보도록. 그리고 마음을 다잡도록. 결심은 공존을 통해 자리 잡았다.

그가 즉석 버스킹―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설프게 시작한―을 한 뒤로 판다 사장으로부터 미친 듯한 연락이 쏟아졌다. 음악을 안 하겠다고 해서 열 받지만 어떻게든 돈 버는 거 도와주었더니 은혜를 웬수로 갚는다, 뭐다… 그러다가 영상 플랫폼에 올라간 그의 영상이 몇백만 조회수를 찍자 군말 없이 다시 음악 활동이나 하라며 대충 마무리 지었다. 요슈아는 애초부터 판다 사장은 걱정거리에서 논외였다며 가볍게 말했다. 문제는…….

 

"정말…… 미안! 정말로 할 말이 없어, 미안해! 다들, 내가 책임지고 한 대, 아니, 백 대씩 맞을게!"
"아니아니, 우리 세 명이라고? 삼백 대 맞을 자신 있어?"
"요슈아는 각오를 하고 말한 거니까, 맛츠. 우리도 기대대로 해주지 않으면 안 돼."
"……아니, 보통 거기서 각오를 말하냐고…?"

 

요슈아는 브레이브 차일드 단체 채팅방에 공항 사진 한 개를 보낸 뒤 물음표가 가득 올라온 메시지에 데빌즈 이모티콘까지 전송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날 일본에 도착해 세 사람과 대면했다. 요슈아는 제대로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제리와 함께 그들 앞에 섰다. 언제나 그렇듯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합주실 안을 거처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의자에 앉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변만 살폈다. 요슈아가 사과하는 순간마다 고개를 같이 푹 숙이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하고 싶은 걸 확신할 수 없어서 너희들에게 계속 폐를 끼쳤어. 상담해봤자, 분명 이상한 취급 받고 끝날 거라고 생각해서……. 그의 말에 의자 팔걸이에 팔을 기댄 마츠가 요슈아에게 머리를 들어보라는 듯 딱, 핑거 스냅을 쳤다. 요슈아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흔들며 정면을 쳐다보는 일순간에 이마에 강렬한 타격이 닥쳤다. 요슈아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양손으로 이마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소타와 제리가 허둥대며 아파하는 그를 바라볼 동안, 마츠는 오른손을 털며 콧방귀를 뀌었다.

 

"뭘 멋대로 착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냥 한 대 때리고 싶었어."
"양아치 같아, 맛츠."
"나름대로 애정 표현인 거지. 후후…."

 

제리는 유키의 말대로 그들이 이미 요슈아를 용서했다는 걸 느꼈다. 동시에 기뻤다. 이렇게 좋은 이들이 요슈아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요슈아 또한 그 사실을 느꼈는지 투명한 눈물이 살짝 맺힌―사실 너무나도 강력한 딱밤에 아픈 나머지 그런 것도 조금은 있었으나―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신기할 만큼 주변 이들을 미소로 끝맺게 만드는 요슈아가, 제리는 부러우면서도 좋았다. 누군가가 제리에게 언젠가부터 사랑을 느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가 건네는 미소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었을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그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은 순간은.

 

 

"들어갈게요……?"

 

몇 개월이 지났다. 제리는 아무도 듣지 않을 인사를 건네며 합주실 출입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이전에 요슈아에게 건네받은 스페어 키를 가방에 다시 넣고, 발을 안으로 넣었다. 몇 개월 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들락거려도 되는 건지 여러 번 물었다. 양, 양심이 있지……. 제리의 자책과는 별개로 멤버 전원이 흔쾌히 수락했지만, 여전히 외부인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발을 들여놓고 나서도 그러하였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한 걸음걸이로 돌아다니며 주변을 구경했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는 멤버들이 연습을 끝내고 잠깐 쉬고 있을 때 들렸거나, 혹은 시간이 남아돌 때 요슈아가 불러서 아주 잠시 이야기하고 돌아간 정도였으니까. 영 어색한 건 다름이 없었다.

 

"…익숙해지겠지, 뭐."

 

결국 체념하듯 혼잣말을 내뱉고, 제리는 합주실을 두리번댔다. 조명이 어둑한 방 안에는 가운데에 대형 연주 공간이 있고, 흡음재로 처리된 벽 쪽에 칸칸이 진열된 장비들이 보였다. 외장형 프리 앰프, 리버브 유닛, 딜레이 모듈……. 그는 요슈아가 들뜬 말투로 하나하나 속사포로 알려주는 걸 이름만 간신히 외웠다. 요슈아는 음악을 정말로 사랑했다. 과거형은 잘못된 설명이었다. 그는 정말로 음악을 사랑한다……. 제리가 문을 전부 닫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앉을 생각은 뇌리에 미치지도 못한 듯 합주실 내를 서성거렸다. 탁자 위에 얼기설기 놓인 음악 잡지와 장식용으로 붙여놓은 포스터 또한 눈에 띄었다. 곳곳에 기묘하게 탄 호일 냄새가 노르스름하게 났다. 제리는 앰프 연결 케이블을 들었다 놔보기도 하고, 드럼 앞에 앉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처럼 누런색을 띠는 화려한 포스터들을 구경하며 요슈아를 기다렸다. 손목에 걸친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면서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문이 열렸다. 제리에게는 익숙한 이의 인영이 서서히 드리웠다. 그는 사랑해 마지 않는 목소리로 연인의 이름 두 글자를 입에 올렸다. 애정을 한데 꾹꾹 눌러 담아서. 제리가 포스터나 장비를 둘러보다가 합주실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에 제리는 그 모습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환히 웃었다. 그 미소는 분명 가장 소중한 이와 닮아 있었다.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변치 않을.

BABY STAN DON’T PANIC
BABY STAN DON’T PANIC

@juststayus

괴상 이상 현상 비디오 중독자들 前 편: Panic singer

 

 

"'클로즈업할 준비가 되었어요, 드밀 씨'¹ 선셋 대로(1950). 빌리 와일더의 영화로, 잊혀진 무성 영화 여배우의 광기와 실패한 각본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거론된다. 는 꼭 내 귀로 듣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사실, 제리 네가 잠들 거 알고 있었어."


제리가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팔짱을 낀 채로 푸념하듯 말했다. 맹세컨대 제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잠들 생각이 없었다. 장르 태그에 로맨스 한 번 붙었다 하면 스태프 롤에 비척비척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 손꼽히는 위상이 있어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요슈아는 잠시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가 다시 날카로운 은색 눈으로 메뉴를 훑어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동안이나 제리와 재잘거리다 잠들었던 것이 자그마치 이 주 하고도 사흘 전 일이었다. 당분간 사무소도 긴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고 미루고 미루던 것을 해치울 차례였다. 둘에게는 두 번째 고향이라도 불러도 손색없을 캘리포니아의 낭만, 이방인 대부분이 꿈꾸는 기회의 도시. 여행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각자가 홀로 채우던 시간을 석 달이나마 같이 있는 시간으로 상쇄시키고 싶다'라는 다소 기운 넘치는 이유였다. 공항에서 맞이하는 번잡한 출국 수속은 낭만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정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40대 남자가 수하물을 착각해 들고 가려고 하는 걸 제리가 먼저 발견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입에 맞지 않은 기내식까지 합하여 좋은 것이 별로 없었으나, 막상 발을 딛고 고개를 어렵사리 들면 지중해의 바람이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따스한 기운이 맨 피부에 오롯이 닿아서야 겨우 그곳에 다시 오게 됐다는 걸 느꼈다. 처음엔 제법 번지르르하게 입고 다녔던 요슈아가 서서히 홈웨어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확실하게 거리를 커다란 구처럼 뭉쳐 다니는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외관은 눈에 띄었다.

코팅된 페이지를 넘기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하얗고, 앞으로 몸을 숙이자 보드랍고 덥수룩한 곱슬머리가 살랑거렸다. 빈티지 전문 샵에서 43달러에 주고 산 빈티지 가죽 재킷은 허리를 완전히 덮었다. 어디 그뿐만인가. 짙은 워싱을 한 데님이 그의 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소맷단 부분이 닳은 채였다. 시티즌 오브 휴머니티의 1980 에디션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테이블 아래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엎드린 채 아쉬움을 토로하는 제리의 구두를 장난스럽게 툭툭 건들고 있었다. 제리는 커다란 스크린에 억지로 화질이 늘려진 흑백 멜로 영화를 되새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알면 왜 안 깨웠어."

 

요슈아의 두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갔다가 제리의 물음에 메뉴판 모서리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음. 그는 몇 초간의 짧고도 긴 시간 동안 고민을 이어가며 길게 소리를 내뺐다. 유키가 드럼 스틱을 두세 번 두드릴 수 있을 정도 간격.


"네가 너무 잘 자니까, 그만."

"…내가 그렇게 잘 잤어?"
"뭐어, 괜찮아. 나는 또 봐도 돼."

 

그는 스스럼없이 거짓 하나 안 보태고,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으며 가벼이 대답했다. 처음엔 느슨한 자세에서 똑바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던 고개가 서서히 요슈아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툭.' 체구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에게 완전히 기대었을 때 볼 수 있는 가르마. 양쪽 볼이 달뜨게 만드는 기억. 제리가 못 살아, 라며 요슈아의 손등을 약하게 꼬집었다. 어렸을 적부터 서로의 영화 취향 같은 사소한 호불호는 진즉 알고 있었다. 요슈아가 엄살을 부리며 한술 더 떴다.


"로맨틱한 대사는 제리의 자장가 같은 거니까."
"……그만 놀려!"


기어코 제리가 소심하게 요슈아의 발목을 약한 힘으로 건드리고 나서야 요슈아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쿡쿡대는 소리까지는 막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주크박스서 익숙한 밴드 수록곡이 흘러나왔다. 분주한 대도시 한가운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과거의 타임캡슐 같은 전형적 아메리칸 24/7 다이너 간판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WELCOME'이라는 일곱 글자의 간판에 전구 달린 줄이 가장자리에 얽혀 있었다. 그 위쪽을 차지한 햇빛은 하릴없이 무더위를 생산해 내며 얼룩 묻은 창문을 빛냈다. 색이 바랜 분홍과 파란색의 오묘한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는 벽은 짓궂은 청소년들의 낙서로 가득 찼다. 제리가 SNS에서 보기로는, 가본 적 없는 이들마저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향수를 느낀다고도 했다. 그러나 향수를 느끼기엔 영 만만치 않지 않은가?
다이너 내부에선 튀김 기름과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한 부스에 앉은 노부부는 마지막 파이 조각을 두고 다투고 있었고, 카운터 쪽 바에 앉은 소년소녀들은 서로 킥킥거리며 속삭였다.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피곤해 보이는 웨이트리스는 달걀과 베이컨 접시를 테이블로 나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간색과 흰색 체크무늬 식탁보, 크롬 바 스툴, 구석에 50년대 로큰롤을 틀어주는 주크박스까지!―물론 전부 구식, 중고, 사용감 넘치는 이백 퍼센트 카피 디자인 인테리어―주방 저 안쪽에서부터, 베이컨이 구워지며 작은 구슬을 쏟듯 지글거리는 소리와 플라스틱 그릇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가 뒤섞여 끊임없이 배경 소음으로 들렸다. 리놀륨 바닥은 긁히고 얼룩져 있어 종종 할 일 없이 배회하는 웨이트리스가 걸레질해도 상태가 비슷했다. 뭐 이런 것도 낭만이라면 낭만일지도 모르겠다.

요슈아는 메뉴를 결정하고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제리로서는 꽤 오랜만에 듣는 그의 영어였다. 그는 능숙하게 페이지 곳곳을 가리켰다. 고개를 숙여 끄덕이는 웨이트리스의 명찰에는 '에이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요슈아는 마지막까지 주문한 뒤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제리를 바라보았다. 제리가 엎드린 몸을 일으켜 그냥 아이스 티 한 잔만 달라고 하려던 순간 이미 웨이트리스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기…"

 

순진무구한 낯이 되돌아보았다. 제리는 뺨을 긁으며 말했다.

 

"제 아이스 티도 한 잔 주시겠어요."

 

그제야 웨이트리스가 놀란 듯이 매니큐어가 발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었나? 동양인 커플이 24시간 다이너의 구석 부스에 와서 아이스 티를 주문하는 게? 제리 또한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고 웨이트리스의 어색한 자백으로 종결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일행분께서 손님 것까지 전부 시키신 줄 알고……. 제리는 그 말을 듣고 눈알을 굴렸다. 저 멀리 주방으로 도망친 웨이트리스의 리본이 자꾸 생각났다. 빨간색. 지금 제 눈앞에서 웨이트리스가 얼버무린 말끝을 짐작하고 있는 요슈아의 얼굴과 비슷한 색. 제리는 복수의 때가 왔다는 걸 눈치챘다.


"괜찮아. 요슈아의 한 끼가 남들 두 끼 정도의 양이라는 것도 난 귀엽다고 생각해. 모르는 사람은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 놀릴 거면 멋있다는 쪽이 좋은데 말이야."

 

대꾸하는 투에서는 작은 불만이 드러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꿉친구였다. 요슈아는 자신의 그런 반응이 더더욱 멋있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고 있을까. 제리는 요슈아를 보며 느리게 미소 짓고는 아까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 숙소 근처 길목에서 발견한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고전 영화 수 편을 대여했다는 말. 심야에 영화관에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들어가 둘만 남은 걸 확인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재개봉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그럴 일은 없었다.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백 가지 재미 중 한 개를 느끼지 못해도 남은 99개가 있었다. 제리가 방문한 그 비디오 대여점은 OTT 플랫폼에도 나오지 않는 수백 개에 다다른 고전의 늪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격도 의심 갈 정도로 싸거나 비싸지 않고 적당한 값을 불렀다. 제리는 미래도 예상치 못한 채, 요슈아와 즐길 수 있을 법한 비디오들을 골라 집었었다. 제리가 재잘대며 요슈아에게 닳고 닳은 제목들을 나열하며 소개했다.


"혹시 모르잖아?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제리가 말하는 도중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려진 크림소다가 테이블 위에 나왔다. 중간에 하트 모양으로 구부러진 분홍 빨대에 입술을 대고 쭉 빨았다. 제리는 속으로 일반 빨대가 편했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면에선 지극히도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녀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요슈아는 어느새 턱을 괴고 제리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영감을 얻는다면 그건 그 영화를 본 네 감상에서일 거야. 내 음악은 사랑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으니까."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각은 있는 걸까. 단어 끝마디마다 녹아 있는 애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리는 자신도 모르게 연인보다는 데빌즈의 자세에 서게 되었다.


"...이런 게 귀엽다고 하는 거야."
"에?! 세일즈 포인트를 전혀 모르겠어. 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네에."


제리가 한 번 더 소다를 빨아들였다. 톡 쏘는 탄산이 목 안쪽을 자극했다. 요슈아가 '정말……'이라며 불만족스럽다는 양 음료 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제리에게까지 닿았다.

 

나른한 오후의 온기가 둘을 감쌌을 때쯤 식사가 끝났다. 스크램블은 설익었고, 베이컨은 기름기가 심했다. 10달러 한두 장을 꺼내 요슈아가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그동안 제리는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다짐했다. 뭐든 좋지만, 이왕이면 이곳에는 다신 오지 말자고. 아마 요슈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은식기 옆에 놔둔 스마트폰과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계산을 마치고 제리의 곁으로 돌아오려는 그 순간, 낡은 바닥 타일 틈새에 제리의 부츠 앞코가 걸렸다. 5cm의 굽이 있는 부츠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제리를 바닥으로 이끌었다. 곱게 양쪽으로 땋은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향했다. 그가 놀라 소파 끄트머리를 억세게 잡고 겨우 중심축을 바로 세웠다. 다행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탱할 수 있었다. 요슈아가 급히 달려와 그를 챙겼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여기 타일 바닥 때문에 그런가 봐. 괜찮아, 나가자."

 

문제는 통증이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휘청거리다가 겨우 일어난 제리의 어깨를 누군가가 제대로 치고 지나갔다. 제리가 반사적으로 사과를 뱉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흉흉한 인상의 남자는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으르렁거렸다. 그의 모습에서 언뜻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제리를 거칠게 내려다보면서 혀를 찼다. 요슈아가 제리의 오른쪽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이 애한테 무슨……"

 

이왕 타국에 왔으니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리가 요슈아의 팔을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요슈아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 짜증이 섞여 미간에 주름이 잡힌 상태였다. 그는 예의 없는 괴인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한테도 화를 되돌리는 사람이었다. 좋은 것만 겪게 해주고 싶은데, 그리 생각하며 요슈아는 제리가 그냥 가자고 재촉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슈아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제리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짐짓 대형견처럼 느껴져 쓰다듬을 뻔했다. 생각을 뒤로하고 발이 먼저 움직였다. 벨이 달린 문을 향해 몸을 돌려 나갔다. 요슈아는 석연치 못한 듯 뒤쪽을 자꾸 쳐다보았지만, 이미 따지기엔 멀리 갔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홀로 남은 남자는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남루한 운동화를 신은 발치에 은색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손이 그것을 집었다. 줄기차게 떠들던 소녀가 남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웩'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 이 작은 해프닝에서부터 시작된 어떠한 사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쿄로 돌아갈 때까지 이 젊은 연인이 제리가 빌린 세기의 명작 필름을 보는 일은 없었다.

 

 

어깨를 붙잡았던 요슈아의 오른손에 힘이 빠졌다. 그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평화로운 길거리에 근심거리 하나를 더했다. 계산 같은 건 좀 더 빨리 끝내고 옆에 있는 게 맞는 건데. 내면에서 과장된 자기책임이 몽글거리는 물방울처럼 맺혀 뚝뚝 흘렀다. 쾌청한 날씨가 더더욱 그의 울적한 기분을 심화시켰다. 아까는 미안하다며 제리의 품에 머리칼을 비볐다. 일전에 일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 클럽이었었나. 제리는 시끄러운 EDM과 형형색색의 칵테일, 끈덕지게 달라붙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낚아챈 연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제리는 맥락을 벗어나는 생각을 느긋하게 뱉어주었다.


"요슈아는 강아지 같아."
"……갑자기?"
"하는 생각이 다 보여서."

 

맞춰볼게……. 지금도 자책 중이지? 제리의 말에 요슈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연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들키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영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제리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조용히 젊은 연인의 어깨를 도닥였다. 요슈아는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뗀 채, 걸으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너는 늘 내 탓을 안 하네."
"탓할 일이 없는데 왜 탓해? 그게 이상한 거야."

 

제리가 정말로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요슈아는 헛기침하며 재킷을 고쳐 입었다. 물론 이번 LA 행 정도는 내키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공기를 맨 피부로 느끼자마자 기껏 열심히 다듬고 쌓은 목마가 힘없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익숙해지지 않는 우울감과 탈력감은 높은 곳을 한없이 동경하도록 만들었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도 마음은 다잡아 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하얀 꽃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 것은 향수병을 악화시켰지만, 일시적인 기운만큼은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괴로웠던 이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극히 잘 알았으니, 용기를 내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제리의 처방 자체가 요슈아였다. 원망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있다면…….

탁. 두 볼이 잡힌다. 제리는 이따금 그가 정신을 차리려면 따끔하게 말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다 잔을 쥐었던 손바닥은 서늘한 한기가 살짝 감돌았다.


"이렇게 자기 탓하기 금지, 말했었지?"

 

요슈아의 동공이 단번에 수축했다가 다시 팽창했다. 그는 끄덕여지지 않는 고개를 양손 안에서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제리는 자기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내리는 팔뚝을 슬그머니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흉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요슈아의 축 처진 낯빛도 활력을 되찾아갔는지 금세 얼굴이 펴져 있었다. 그럼 집에 가면 네가 대여했다는 영화나 볼까,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들뜬 걸음이 보도블록을 흥겹게 밟아갔다. 제리 옆에서 허밍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트로이메라이의 간주 부분이었다. 제리는 박자에 맞지 않는 걸음걸이를 일부러 반 박자 늦췄다가 다시 걸었다. 유키를 대신한 드럼 소리였다. 기타나 베이스는 대신할 수 없으려나, 제리는 이따금 했던 생각을 또다시 해보았다. 만약 나도 음악을 했으면 어땠으려나. 세간에서 감동적이라 말하는 비긴어게인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됐으려나.
물론 비긴어게인도 중간에 보다가 잠들었다.

 

 

아담한 크기의 별장은 석 달 정도 머무르기엔 딱 좋은 조건이었다. 중간에 좋아했던 단골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렸다가 마켓에 다녀오느라, 둘은 시간이 꽤 지나고서 도착했다. 양손에 가득한 짐을 현관 앞에서 잠깐 내려놓았다. 요슈아가 잠깐 업무 통화를 받을 동안, 제리가 문을 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요슈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땀방울이 턱선에 송글송글 맺혔다. 제리는 아예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핸드백에 있는 짐을 닥치는 대로 열어 보았다. 립밤, 여분 머리끈, 핸드폰, 손거울, 지갑……. 있을 법한 귀중품은 다 나왔지만 딱 하나의 행방은 묘연했다. 제리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공중에 뜬 듯이 나른한 인상을 하던 그가 적잖게 당황한 얼굴을 지었다. 왜, 전적이 있잖는가. 스카이다이빙이라도 했었을 때마냥.

 

"……나 집 열쇠 잃어버렸어."

 

요슈아가 곧장 통화를 끊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제리의 짐을 핸드백에 넣어주고서, 자기 품에서 스페어 키를 꺼냈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스페어 키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기실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도 아니었지만, 본능에서부터 따라오는 감이 있는 법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거실이 그들을 맞이했다. 로맨스 영화 보다가 좀 졸았다고 장르를 스릴러로 바꾸면 어떡해……. 제리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스크림처럼.

 

 

 

괴상 이상 현상 비디오 중독자들 後 편: Panic Lover

 

 

 

스릴러나 호러 무비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심호흡이 필요하던가? 그리고 올바른 추론 능력과, 끝없는 망상을 멈추기 정도. 요슈아는 제리부터 급하게 제 쪽으로 당겼다. 제리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요슈아의 눈꺼풀이 맥없이 흔들렸다. 새하얀 머리카락으로 덮여져 있는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이 폭발한 것처럼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충동적인 감정이 몰아닥쳤다. 잔향으로 남아 있는 매캐한 담배 냄새와, 진득하게 남겨진 발자국. 이건 판다 사장이 했다기엔 도를 지나친 수위였다. 애시당초 저번의 일이 있고 나서는, 요슈아도 판다 사장에게 휴가 스케쥴을 아예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그는 제리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제대로 이쪽을 봐줘, 제리."
"……응."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집요하고 똑바르게 응시했다. 요슈아는 자신보다도 제리의 상태를 챙기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다. 제리는 자신의 양 팔뚝을 잡은 손의 진동이 느껴져, 조심스럽게 그것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둘 다 맥박을 느낄 수 있도록 손목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빠르고, 거칠었다. 느리게 숨을 뱉었다가 삼켰다. 가까스로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맥박이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알았어……. 응, 안 떨어질게."


책장은 옆으로 눕혀져 있었고, 내용물이 뒤집힌 보물 상자처럼 쏟아져 나왔다. 카펫 위에는 책, 액자 등이 깨진 도자기 조각과 함께 뒤섞여 흩어져 있었다. 램프는 전구가 깨지고 받침대가 찌그러진 채 바닥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침실이나 부엌, 다른 방은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문을 연 흔적조차 없었다. 제리는 거실을 살피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수십 편에 다다르는 고전 명작 영화 비디오가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다. 요슈아 또한 이외의 것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조금 어지럽혀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축에는 꼈을까…….


"저기, 제리……. 잠깐만 들어가 있을래? 이것들은 내가 치우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다칠 수도 있고."


요슈아는 일부러 불안을 감추려는 듯 웃었다. 태연자약한 척하려고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제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푹 떨궜다. 역시 LA에 오는 게 아니었어. 이런 이상한 일이나 당하고. 진즉 열다섯의 성장통은 지나간 줄 알았는데 전부 오만에 불과했다고 제리는 자책했다. 걸쳐 입은 베스트 아래 셔츠 안쪽, 그 안에 든 가슴이 지나치게 떨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려서 그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손등 위로 툭툭 작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깨끗하고 투명한 색채가 손등의 살결을 흐렸다. 안개 낀 생각으로 덧없이 머릿속이 채워져 갔다. 우울은 급진적으로 다가와 그를 괴롭혔다. 그대로 놔두면 몇십 번이고 고층 빌딩을 바라보던 열다섯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요슈아가 급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자기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청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 요슈아. 괜찮아?"
"그걸 물어보고 싶은 건 나야……!"


제리가 자기 손목에 칼날을 댔을 때와 비슷한 불안함이 그를 덮쳤다. 음악보다도 소중한 그였다. 털끝이라도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 없이 몇 번이고 끝을 생각했던 열다섯의 제리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그는 단 하루도 어떠한 아쉬움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하루라도 더 빨리 곁에 있었다면 그를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다. 제리의 붉은 눈가가 사정없이 깜빡거렸다. 요슈아가 힘을 줄수록 가죽 재킷이 더 탄탄하게 당겨졌다. 그 매끄러운 감촉에 제리는 머뭇거리며 손을 올렸다. 요슈아는 고개를 들고 물기 어린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리의 사고가 온통 요슈아에게로 향했다. 그는 말 중간마다 숨을 멈추면서도 할 말을 전부 했다.


"LA에 온 건…… 우리 둘 다 마주해야만 하는 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상처받는 모습 같은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무리하게 데려왔다면 정말 미안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게 해 줘."


그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덮인 이마를 맞대었다.

 

"나는 네 힘든 모습이 제일 슬퍼. 널 정말, 정말 좋아하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그러니까, 원망할 거라면 차라리 나를 향해줘."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건 누군가의 악의보다도 선의다. 제리는 문득 그런 감상을 받았다. 바보처럼 두 사람 모두 눈두덩이가 한없이 부을 예정이었다. 제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간단한 증명을 조금씩 다시 되새겼다. 눈가를 억세게 문질러 눈물을 닦아낸 뒤 요슈아에게도 똑같이 행했다. 탄성을 내지르는 걸 무시하고 일부러 더 강하게 꾹꾹 눌렀다. 요슈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리를 쳐다보자 그는 비뚜름하게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네 탓 안 해."
"하지만……!"

 

조급하게 말을 꺼내는 요슈아에게 제리는 스스럼없이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내 탓도 안 할게."


그걸로 됐지. 짐짓 잠에서 막 일어난 듯한 스타일이 된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그가 정리해 주려 손을 뻗었다. 요슈아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푹 숙여 제리가 손을 움직이기 쉽게 만들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란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요슈아는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듯 바닥을 뚫어지도록 내려다보며 입술을 두드리다가, 서서히 미소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만 몰아붙였다가 더 힘들게 만들었을까. 그런 가정은 아무 의미 없었다. 지금 제 머리를 건드리는 그 손길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처음 만날 때 보여주었던 그 따스함이 아직도 변치 않았다.² 트로이메라이 오마주 / 最初に会えた時見せていた笑顔今もまだ変わらないままで

 

 

"애초에 그런 가게가 없다고?"
"에, 응. 4번가는 웬만해선 새 가게가 안 들어와. 아, 물론 네가 거짓말한다는 뜻이 아니야! 절대로!"

"……해명 안 해도 알고 있었는데. 해명하니까 수상해."
"역시 너야! 알아주는 구…… 아니! 그렇게 결론이 나면 안 돼…!"

 

요슈아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진정되고 거실을 정리한 뒤, 어지럽혀진 선반을 차곡차곡 다시 채우자 한적한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어플로 스마트 맵을 켜서 대여점 이름까지 넣어봤으나 지도에 뜨지 않았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상황이 영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슈아는 마지막 남은 책 한 권을 선반에 끼워 넣고 먼지를 털고 나서, 제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혹시 무슨 영화들이었는지 기억해? 타이틀이라든가, 특징들이라든가.”


제리는 쿠션을 끌어안은 왼팔에 힘을 주었다. 남은 오른손으로는 따가운 눈에 얼음을 문지르고 있었다. 다이너에서의 요슈아처럼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조용히 고민했다.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로맨스를."
"……잘 거면서."


제리는 괘씸한 명예훼손―대충 사실적시에 의한 연인을 부끄럽게 만든 죄인 것이다―에 대답하지 않고 제 눈을 문지르던 얼음을 버린 뒤, 얼음 보틀에서 하나를 더 꺼내 요슈아의 부은 눈가에 냅다 갖다 댔다. 요슈아가 차갑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아예 편하게 앉아 가만히 손길을 받았다. 제리는 정확한 타이틀들을 나열했다. 로마의 휴일, 시티 나이트, 레베카, 싸이코, 카사블랑카…. 이외 16개의 작품 이름이 그의 입에서 더 나왔다. 몇몇 개는 플랫폼에 고스란히 있긴 하지만 비디오를 대여해서 보는 재미도 있으니 겸사겸사 같이 값을 냈었다. 요슈아는 이미 본 것들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요슈아, 생각보다 영화 좋아하는구나."
"헤에, 당연한걸. 그러니까 심야에 그 번거로운 짓을 하며 극장에 걸린 걸 보고 오는 거 아니겠어."

 

선글라스에 두꺼운 옷, 일행이 아닌 척 따로 들어와 각자 앉고, 상영이 시작된 후에 아무도 없으면 그제야 붙어 앉기. 그리고 나올 땐 다시 떨어졌다가 집에 가는 길에 노곤한 상태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기. 그것도 하나의 낭만인가 생각했다. 물론 소꿉친구를 놀리기 좋아하는 요슈아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뭐어. 사실은 영화에 집중하는 네 옆모습을 보는 게 더 즐거울지도."
"……일부러 부끄러운 소리 하는 거지?"
"아하하……. 당연하지. 그래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잖아."³ 카사블랑카(1942). 마이클 커티즈 감독. 영화 내에서 주인공 릭에게 한때 연인이었던 일자가 반복적으로 내뱉는 대사. 원문은 "Here's looking at you."

 

제리는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그게 한 영화의 대사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짓궂게 치켜 올라간 그의 눈썹과 장난스럽게 내리깐 목소리 톤이 어떤 패러디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리가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아 진짜 차가워, 제리…….


쉴 틈 없이 일이 닥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경찰이 신고와 관련해서 찾아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네가 먼저 말하라는 식으로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척 보기에도 모범적인 나라의 공무원은 아니었다. 제리는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땋아 묶으며, 해결되지 않은 일은 뒤로 하고 요슈아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요슈아가 현관문을 열자 대화 소리가 거실 소파까지 다 울려 퍼졌다. 녹슨 경찰 배지를 엉성하게 찬 남자가 콧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친구분께서 비디오를 대여하셨다. 그런데 키를 잃어버린 뒤에 돌아왔더니 그 비디오들만 몽땅 사라졌다 이 말이지요."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관은 뒤쪽에서 담배를 꺼내는 다른 남자에게 그것 좀 꺼내 보라고 외쳤다. 그동안 남자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요새 그런 신고가 많이 들어오긴 합니다. 요슈아는 피어싱을 낀 귓불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쪽의 남자가 앞으로 걸어와 요슈아에게 파일첩 페이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빼곡하게 이름과 날짜, 주소지가 정리된 한 차트였다.


"이게?"
"비슷한 일로 신고한 신고자 목록이에요."


그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는 이내 손을 떼고 팔짱을 끼고서 그들의 설명을 기다렸다. 설명보다 호구조사가 먼저 올 줄은 몰랐지만. 남자는 헛기침하며 왁스를 왕창 발라 넘긴 머리를 쓸어 올리고, 파일첩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런 다음 볼펜을 딸깍대며 요슈아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여행하러 오신 겁니까?"
"네, 석 달 정도."
"두 분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요슈아는 고개를 돌려 제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리는 어느새 헤어 스타일을 전부 정돈한 상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슈아가 얼굴을 숙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밴드 보컬이고, 제 애인은……. 그는 제리가 그랬듯 말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직장인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질문은 그걸로 끝인 듯 남자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요슈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만 겪은 일이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도 전부 겪어보았다면 해결은 빠를 터였다. 경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요슈아와 거실 안쪽에 있는 제리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제리에게 닿자 요슈아가 처음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남자가 팔짱을 끼자 거칠게 다루어진 경찰복이 안쪽으로 구겨졌다.


"무슨 영화 같은 일이긴 합니다만, 가수 양반도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머무를 곳에 도둑이 들었는데……. 열쇠는 제대로 바꿔 놓았지만."

"아니, 뭐. 맥거핀⁴ 이야기에 동기를 부여하고서 구체적 설명 없이 퇴장하는 장치. 앨프레드 히치콕: "It's always called the thing that the characters on the screen worry about but the audience don't care." "보통 '영화상의 인물들은 걱정하지만 관객들은 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죠" 이라는 거죠."
"……네?"
"그럼 이만."


남자는 대충 한 번 더 신경 쓰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다른 두 경찰을 데리고 다른 곳을 향해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오래간만에 황당하다는 감정을 느꼈는지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멍하니 그곳만 바라보았다. 흡사 모모치가 늑대무리에 쫓겼을 때 문을 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을 때처럼…. 이곳에 온 뒤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영화라는 매체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말, 지극히 아무 공권력 없는 개인으로서―수많은 데빌즈를 불러 조사해 달라고 할 것 또한 아니지 않는가―그가 열쇠를 바꾼 것이 최고의 조치였다. 그리고 창문에 도난 방지용 락을 달아두는 정도. 제리는 방금 대화를 전부 들었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 다 끝난 거지, 라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만약 여기서 요슈아가 추리, 서스펜스, 스릴러,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져 오는 활약 극 장르의 주인공이었다면,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들을 전부 포기하고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리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 지금껏 일어났던 그 모든 이상한 일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요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현관문도 닫지 않은 상태에서 제리의 양쪽 허리를 잡고 그대로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훌쩍 높아지는 시야에 제리가 놀란 나머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조금 전 대화에서 이렇게나 기쁠 만한 일이 있었나? 열심히 그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이 나오는 건 없었다. 노란색 리본이 눈에 띄는 하얀 투피스 원피스가 갑작스러운 활공에 정신없이 흔들렸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별장 마당에 핀 아카시아 꽃향기가 슬그머니 들어와 코를 간지럽혔다. 바람이 따스했다. 제리의 놀란 심장이 겨우 가라앉자, 그는 요슈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가닥가닥 공중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 사이에 자신을 닮은 새하얀 브릿지. 조심스레 마음을 엮어 전해보려고 했으나, 요슈아는 터져 나오는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대로 뱉었다.


"있지. 제리! 나, 너를 정말 좋아해!"
"가, 가,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원래는 예약해 둔 크루즈가 있었단 말이야. 거기에서 프러포즈를 할까, 생각했어. 지금 바지 주머니에 반지도 있고."

"저기, 저기. 정보량이 너무 많아……."


제리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애정에 기쁜 건지 놀란 건지 구분할 틈도 없었다. 그저 요슈아가 자신을 떨어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고서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벅차오르는 가슴속을 간지럽히는 이름 모를 낯선 충동. 가장 단순하고 널리 알려진 다섯 음절의 말을 몇 번이고 입에 올리고 싶었다. 사랑해. ​愛してる。 그 말은 어쩜 그리도 지독하게 상대만을 바라보게 되는 문장인가. 요슈아는 흰색 실크 셔츠가 구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채 제리를 좀 더 가깝게 안았다. 제리는 부끄러운 기색이 덜해진 듯했다. 갑작스럽고 무겁게, 늘 배로 돌려주는 애정은 그의 주특기였으니까. 이 정도 시간이면 그래도 빠르게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좋아한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아서. 아아, 나는 정말 글러 먹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느꼈어. 나도 참 바보지. 웬 이상한 일도 당하고, 무드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에서. 계획한 것까지 전부 말해버렸네."


요슈아의 볼이 뙤약볕에 쬔 것처럼 아주 빨갛게 붉어졌다.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도, 몇 번을 보아도 머릿속에서 재생하게 되었다. 몸을 움직였다. 귓불에 무거울 정도로 매달린 링 귀걸이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의 어린아이 같은 고백에 어떻게 답장해야 할까, 기쁜 고민에 휩싸였다. 제리는 연인이기 이전에 친구였고, 친구이기 이전에 소중한 조력자였으며, 조력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 진즉 그만둔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나침반의 끝처럼 날카롭게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둥글게 깎았다.


"그럼 우리 둘 다 글러 먹은 사람이야."

 

잠깐 내려줘. 제리의 말에 요슈아가 팔의 힘을 조금씩 늦춰 아래로 내려보냈다. 마룻바닥에 닿는 맨발이 부드럽게 안착했다. 그는 손을 떼고 뒷짐을 지었다. 요슈아는 그제야 수줍은 듯이 볼을 긁었다. 제리와 닮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가 봐, 응. 그래서 기뻐. 너는?"

"응, 나도 그래서 기뻐."

 

말과 다르게 제리는 그대로 빙글, 등을 돌려 가방을 챙겼다. 요슈아가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돌아보는 제리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리는 아침 식사 메뉴를 묻듯 가볍게 바람을 훑으며 대꾸했다.


"크루즈는 언제인데?"

 

계절마저도 요슈아를 닮아 따스한 나날. 제리는 드문드문 끊기는 생각을 삼켰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던 나날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손을 뻗었다. 앞으로도 종종 이해할 수 없고 끝없이 괴로운 일이 생길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곁에 그가 있다면, 제리 또한 요슈아의 말대로 아무렴 괜찮을 것 같았다.

 

"……돌아가는 전날?"


제리는 한껏 기대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한 아주 간단명료한 말로 그 기대를 보여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높은 음표들이 표류하여 하나의 마디를 만들었다. 청년의 웃음이 스타카토를 그리듯 경쾌한 울림으로 내세워졌다. 견고히 쌓은 목마가 한 층 더 세워졌다. 요슈아의 마른 손이 제리를 끌어당기면 뒤꿈치가 들렸다가 다시 바닥과 맞부딪혔다. 젊은 음악가는 노련한 박제사처럼 행복에 바늘을 꽂아 넣었다. 퇴색되지 않도록, 언제 꺼내 보아도 미소가 배어 나올 정도로 좋도록 열을 가해 굳혔다. 영원을 쫓는 무리를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수풀의 풀 내음과 하늘을 헤집어놓는 주름진 새하얀 비단들. 손에 닿는 맨살과 실크의 경계선.
카메라는 두 사람의 작디작은 틈을 클로즈업했다. 아주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가 바람에 맨살 솜털이 정처 없이 간들거리는 풍경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마지막 장면이 가까워지자 줄곧 틀어지던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에 흐르는 재즈가 끊겼다. 그리고 피아노 단독의 무비 스코어로 대체되었다. 필름이 끊겼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청년은 이것이 어떤 누군가가 보는 영화나 만화, 드라마, 혹은 그 외의 매체여도 가장 행복한 이는 본인이라고 느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별장으로 돌아온 제리는 품 안에 한가득 간직한 기념품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건 브레챠 멤버들 거, 이건 요슈아, 이건 친구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여유롭게. 귀에 낀 블루투스 이어폰을 등 뒤로 지나가던 요슈아가 뺐다. 제리가 돌아보았을 땐 이미 요슈아의 귀를 막고 있었다. 제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감상을 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야. 어때."
"누군지 몰라도 노래를 너무 잘하네."


요슈아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녹음한 것을 다시 듣는 건 어떤 기분인지. 제리는 알 방도가 없었다. 음치인 본인의 노래를 그닥 녹음할 마음도 없었고. 볼륨을 크게 해 놓았는지라 단단히 틀어막았음에도 아주 작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에 와 서로가 아니라면 별로 듣지 못한 일본어 가사였다. 신곡도 반응 좋아서 다행이야, 정말. 요슈아는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나 주변 이들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모두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 요슈아의 칭찬은 제리에게 있어 제리를 칭찬하는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요슈아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마치 전 세계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나중에 시엘 군한테 한 번 들려나 볼까?"
"응? 여기 계셔?"
"연락해 봐야 알겠는걸~ 여기야 원체 넓은 나라고 말이야. 지금은 자겠지……."


제리는 널따란 소파에 앉아 있는 요슈아를 보더니 자신도 그 옆에 착석했다. 그리고 쿡 찔렀다.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이야말로 진짜 영화 보는 건 어때.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으니까."

 

데굴데굴 눈동자가 위쪽으로 굴러갔다. 시계의 시침은 밤 12시 10분을 가리켰다. 자기엔 아쉬웠으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달이 뜬 새벽을 즐겁게 보내기엔 베스트 초이스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자며 말한 그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서는 양손에 갖가지 간식거리를 들고 왔다. 프레첼 스낵, 하겐다즈, 팝콘……. 제리는 아마도 5분의 4 정도는 전부 요슈아가 먹겠거니 싶으면서도 얌전하게 제리의 손에 쥐어진 스푼을 받았다. 불을 끄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스크린의 세상이었다. 브레이브 차일드의 공연 영상, 최신 뉴스, OTT 플랫폼의 최신 유행 드라마. 작은 직사각형 속 세계는 그 너머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오락거리다. 제리는 리모콘을 조작해 세상이 칭송하는 로맨스를 재생했다. 잔잔한 OST와 함께 수수한 화장기가 감도는 여주인공이 나타났다. 반짝거리는 필름 효과, 덧없는 인생. 끝을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을 담은 이야기. 제리는 여태 그랬듯 그런 이야기에 익숙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에 들린 프레첼 스낵 한 개를 빼냈다. 가루가 치마폭에 떨어져 그것을 털어냈다. 자? 이불 아래 보이지 않는 이에게 속삭이듯 작고 섬세한 목소리가 제리의 귀를 간지럽혔다. 제리는 비몽사몽한 정신에도 느슨하게 답했다.


"……아니…."

 

뮤지컬 영화였는지 여주인공이 노래를 시작했다. 파란 미니 드레스 천 자락을 휘날리며, 보랏빛으로 보정된 하늘빛에 반사되는 구두부터 클로즈업해 그의 얼굴까지 훑었다. 영화를 트는 순간 그들의 이야기는 대사나 장면으로 처리된다. 그러니 요슈아가 고개를 기울여 그림자가 드리운 눈동자를 집요하게 살폈다.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 그렇게 약속하며 줄곧 바라본 눈. 요슈아는 제리가 늘 로맨스만 틀었다 하면 눈을 감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 서리는 기대와 떨림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 갔다.


"나, 네가 로맨스 영화만 보면……. 늘 잠드는 이유를 알았어."


제리는 부스스한 상대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영화의 소리가 커졌다. 땅바닥을 밟고 구두를 두드리며 춤을 추는 두 남녀. 치아를 드러내며 웃을 때 움푹 팬 보조개의 사랑스러움을 알고 있었다.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기쁨에도 익숙했다. 요슈아가 제리의 이마에 입 맞출 때마다 간지러움이 필요 이상으로 쏟아졌다. 물음에 느리게 답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까."

 

결국 영화는 실재를 연기하는 장르이다. 그러니 이미 가지고 있는 현실의 열화판이 아무리 좋아봤자 현실에는 빗댈 수 없다. 그러니 제리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의 클라이맥스 씬을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이다. 눈을 깜빡거리던 여주인공이 한참 말을 곱씹다가 웃음을 흘렸다. 기뻐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이다. 분명 처음 앉을 때는 소파가 넓었으나, 여주인공이 웃음을 참으려 느릿하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면적이 좁아지는 듯했다. 남주인공이 소파 윗동을 잡고 아예 옆에 들러붙어 몸을 구기고 누웠다.


"정답이야?"
"말해야 알겠어."
"응, 난 누구 씨의 말대로 귀여운 쪽이라 어쩔 수 없어. 그래서…… 맞아?"


여기서 OST가 흘러나오고, 직사각형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갔다. 그는 뺨을 쓰다듬으며 부닥치는 살결에 신경을 집중했다. 뼈가 도드라지는 얇은 목선에 머리를 기대기 전 두 눈을 응시했다. 서로의 눈에 완전히 상대가 담겼다. 하얀 모래가루가 떨어지듯 그의 홍채서 작은 반짝임이 끊임없이 빛났다. 여주인공은 연인이 못 견딜 정도로 사랑스러워, 그 답지 않게 두 뺨을 붙잡고 예고도 하지 않은 채 입 맞추었다. 그의 낯짝이 한없이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푸슬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이야. 그러니 내 대답도 정해져 있겠지.


"정답인가 봐."

그는 잘 웃고서도 뭔가 남았다는 것처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미 다 풀어헤쳐진 여주인공의 머리를 그가 쓸어 올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가볍게 떨어지는 온기를 쫓아가듯 틈새가 좁혀졌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야.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 둘은 눈부신 하늘 아래서 키스하거든. 그는 그의 의도를 늦게나마 알아차렸다. 강아지가 아니라 순 여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스태프 롤이 올라가기 전에 다시 한번 키스해줘."


하지만 뻔한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하얀 카사블랑카니까.

 

……스태프 롤 시간이 다가왔다.

 

 

여주인공 Jerry 

남주인공 Joshua 

감사한 이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