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의 구시대적 로맨티시즘
15번의 구시대적 로맨티시즘

@juststayus

 

 

Chapter 1. Mom, still I fool.

 

[JRTTAXXX, 텔로디오 히어링에 접속되었습니다. 설정해 둔 기상 시각에 맞추어 전원을 가동합니다.]

 

투명한 통유리창 너머로 이른 새벽이 고개를 들고, 매일 오전 8시에 정확하게 전원이 켜지는 AI 서비스가 하나둘씩 집안을 밝혔다. 아침을 알리는 푸른 햇빛이 고층 빌딩 사이로 가뿐히 지나쳐 가는 운송 포드의 형태를 그리며, 방 안의 그림자가 차지하고 있던 영역을 침범했다. 자연이 기계를 깨우고, 기계는 다시 주인과 그 주인이 가진 다른 귀속품들을 깨웠다. 젊은 여자 한 명이 혼자 살기에 터무니없이 큰 방, 그 중앙을 차지하는 킹사이즈 침대 위 베개에 제리는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앓는 소리가 베개 안쪽으로 먹혀들어 갔다.

 

"잠 좀 자자. 다 꺼, 그냥."

[JRTTAXXX, 해당 명령은 출근에 지장이 갈 수 있으며─]

"에이, 진짜."

 

제리는 반쯤 포기하고 눌려서 벌게진 이마를 문지르면서 일어섰다. 홀로 있을 때, 남들과 부대끼고 있을 때를 확실하게 나누는 그로서는 매일 맞이하는 아침 햇살이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암막 커튼을 설치하는 계획까지 고려해 보았으니, 그것으로 제리의 심정은 말을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리가 새벽의 끝자락을 어찌 생각하든 간에, 그는 사회인이었다. 제리를 조롱하듯 벽면을 따라 움직이는 역동적인 디지털 아트워크가 짹짹거리면서 노래하는 새들을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모습을 털 하나하나까지 보여 주었다. AI 어시스턴트인 'JU'의 원한다면 자막을 영상 아래에 띄울 수 있다는 말도 들렸다. 제리는 JU에게 대답하는 대신 시시각각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맞은편 고층 빌딩 쪽 대형 디스플레이를 힐끗 보았다. 오늘도 똑같은 음악, 비슷한 음표의 행렬이 틀어졌다. 그곳은 제리가 사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큰 빌딩이자,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CPR 방송국이었다. 송신탑마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뻗어 있어 마치 타국의 관광지 같기도 했다.

제리는 허공에 오른손을 몇 번 움직여서, 이동식 테이블 위의 생수를 들이마시며 그 광경을 빤히 구경했다. 투명한 창가를 통과하고, 제리의 귓가로 음표들은 자기 몸체를 구겨 넣었다. 언젠가부터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 의미 모를 똑같은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필수적인 루틴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오늘도. 제리에 맞춰 사용자화된 조명이 느릿느릿 옅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JU가 보고 겸 질문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JRTTAXXX?]

"아니? 이 조명이 이상한 거야. 그것보다 매번 아이디 전부 부르지 말랬잖아."

[JR, 확인.]

"왜 호칭만 매번 초기화되는데…?"

 

제리는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끝으로 정적이 생기겠거니 기대한 제리의 마음을 배반하듯 JU는 다시 질문했다. [해당 조명의 구매일은 금일로부터 일주일 전입니다. 고장 여부는 JR이 직접 체크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CPR의 음악 때문인가요?] 그는 참 사소한 지점에서 질린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가령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JU, JU, JU. 아무튼 전부 이 어시스턴트가 문제인 듯했다.
사실 제리는 JU가 썩 싫지도 않았다. 그것이 없는 이상 제리가 사는 집은 단숨에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뇌리에 스치는 어떤 감각을 인정하다 못해 의미를 부여하고 명명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계속 묵묵부답으로 침묵하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제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실 소파 등받이를 막 지나칠 참에, 침실 온도 조정 디스플레이에 줄곧 자리 잡고 있던 JU는 어느새 장소를 옮겼다. 목표는 전자레인지 내부였다. JU가 마침내 모습을 감추자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는 잠시 양옆으로 주변을 살폈다.

 

"포기했나?"

 

중얼거리는 모습에서는 주인으로서의 기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지능에 기반하여 맞붙으면 제 쪽이 질 미래가 뻔히 보이는 싸움인데. 제리는 안심하며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쓸어내리고, 잠시간 깊게 자유를 만끽한 뒤 반쯤 감긴 눈으로 부엌 안쪽에 갔다. 어제 저녁 먹다 남은 토스트가 멀쩡해 보였다.

그는 뒤돌아 선반과 냉장고 내부를 살폈다. 내친김에 꼼꼼히 둘러보면서, 몇 가지 잼과 향신료, 친구들이 뭐라도 먹으라며 주고 간 선물 겸 디저트를 제외하면 보관해 둔 것도 그다지 없었다. 제리는 깊게 한숨짓고는, 금방 지워버렸다. 어차피 매일 반복되는 아침이었다. 부지런히, 든든하게. 광고가 권장하는 대로 먹으려는 욕심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유리병에 담긴 잼 종류를 훑으면서 하나를 대충 집었다. 카야 잼이었다. 뚜껑을 열고, 한쪽 면에 얼추 바른 다음 전자레인지 앞으로 갔다. 그때였다. 녀석이 말을 걸었다. 태연스럽게.

 

[JRTTAXXX, 지금 바로 텔로디오 히어링에 접속하시면.]

 

제리가 전자레인지를 열었다가 그대로 쾅 닫았다. 반사신경이나 다름없이 10번 가까이 전원 종료 버튼을 꾹꾹, 거의 난타하듯 눌러댄 그의 노력은 무색했다. 30초 동안 접시에 담긴 토스트는 360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노릇하게 데워졌고, 제리는 따뜻한 토스트와 아주 완벽한 어시스트를 수행해 준 JU를 곁에 두고서 아침을 보내야만 했다. 이 도시에 몸 담근 제리가 보내는 아침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23세기, 라이버 레코드 국가 관리국의 후원 아래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특별한 지원과 서비스가 제공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혁신 중에는 대형 광고 디스플레이 속 찬사에 의하자면, '완벽한─개인─맞춤─통합형 AI 어시스턴트'라며 현재 제리의 1순위 골칫거리도 포함되었다. 지원받을 자격은 대체로 무작위 추첨이라는 변덕스러움 아래에 정해졌으나, 선택된 이들은 집단적 익명성 속에서 서로를 추측해 냈다. 그들은 예외를 두지 않고, 전원 '감히 소시민 신분으로' 음악에 몸 담그지 않는 자들, 선율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시민들이었다. 이들 국가가 내세우고 있는─영혼이 존재하는 한,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음표로써 정점에 도달해 소멸해야 한다─이념과는 별개로 말이다.
제리는 상술한 조건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는 라이버 레코드의 수도, 말라 니트로의 끝자락에 애매하게 위치하는 회사 사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일상으로 하루하루 살아왔노라 확언할 수 있었다. TV 앞에 앉아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데에 시간 낭비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며, 삶이 지루하다며 늘어놓기에는 즐거운 순간들도 나름 적당히 존재했다. 물론, 술자리에서 큰소리쳐가며 자신이 겪어 온 화려한 여가생활을 자랑하기에도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번지르르한 물기 있는 낭만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주진 못했다.

다만 그는 종종 궁금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매일 아침 지루하게 거니는 출근길에는 언제 출발하든 늘 10분은 족히 기다려야만 하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바로 옆에는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랗고 거대한 방송국 'CPR'이 존재했는데, 그 방송국 외벽엔 광활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공중에 겹겹이 쌓여 입체적인 그래픽으로 정기적 음악 방송을 내보내고는 했다. 언제 한번 제리는 가상 들밭 장치를 켜 둔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건너가면서, 그의 정수리 위로 울려 퍼지는 토크쇼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음악 경연 대회 우승자에 대한 추측, 혹은 팝 차트 1위 가수를 겨냥한 신랄한 비평, 매일 재생하지만 도통 이름 모를 음악들이 주를 이루었다.

제리가 밟고 있는 지면 위에서는 음악이야말로 권력과 동의어다. 가진 자가 비명을 지르면 시대정신을 꿰뚫는 록이었고, 배곯은 자가 기타를 치면 공산주의 교리를 지닌 이데올로기 찬양가……. 애당초 후자의 사례는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체념이 순응으로 뒤바뀌었다는 인과라면 모를까, 그저 모두가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래를 듣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음악 청취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대중성은 기울어져 있었다. 그가 살아가면서, 정부에게 반항하며 이러한 음악은 근본부터 괴상하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겠는가. 제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음악이 송출되면 일제히 머리를 들고서 따라부르거나 홀린 듯이 멍하니 송신탑만을 바라보게 되니까. 제리 또한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거나, 혹은 불가피하게 투항한 몇 주 뒤에 CPR의 디스플레이 안에 출현해 출연진들과 똑같은 멜로디를 따라 부르면서—아니면 기쁘게 연주하면서—열의에 찬 미소를 짓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자면 속이 끊임없이 울렁거렸다. 뭔가가 크게 잘못된 기분이 들었고, 신체 내부에 들어찬 톱니바퀴, 신체를 가동하게 시키는 중심축이 고장 나서 불안정하게 삐걱거리는 듯해서.
음악이라고는 제리와 아무 인연도 없을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루는 크나큰 부분이 수차례 짓밟히고 모욕당하고 얽매이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차라리 그들의 몰상식한 이치와 반강제적으로 부여받는 삶의 원동력을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이 음악은 듣기 좋다고. 썩 들을 만도 하다고. 그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나약한 힘으로는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이번에 새롭게 당선된 T 의원의 신곡 속에는 신시사이저와 트럼펫 베이스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교묘하게 BPM을 빠르게 늘려서 엉성한 연주 실력을 덮으려는 듯했지만, 그 초라한 음색은 어찌 감출 방도가 없었다. 안 그래도 수다와 경적으로 가득 찬 교차로 거리는 매우 고지식한 록스타의 철없는 술주정에 가깝게 변했다. 그런데도 모두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그 음악을 음미하듯이 들었다. 아니면 취향이 아니라는 듯이 아예 푹 숙인 채 외면하며 걸었다.

제리는 그저 사람들의 옆모습이 전부 스쳐 지나갈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디스플레이는 다른 채널을 틀어 주었다. 어느 한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애매한 처지였다. 모든 게 확고해진 시대에서조차 위태롭게, 지푸라기가 비틀비틀 흔들리듯이.

오늘 도착한 출근길 속 횡단보도 앞에서도, 그는 언제나처럼 멍했다. 흔들리는 일이 변함없다는 말은 꽤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다마는. 평소 어깨 기장을 넘는 머리를 늘어트린 채 다니던 제리는 오늘따라 별안간 양쪽 옆머리를 잡고 한 가닥, 한 가닥 조금씩 낮게 땋았다. 두 개로 땋아서 묶은 양 갈래가 어색하기는커녕 익숙했다. 그러나 이따금 생기는 변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제리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횡단보도 쪽으로 향하면서, 늘 챙기는 오버 이어 헤드셋을 가방에서 꺼내 목에 걸쳤다. 바깥소리를 차단하는 용도일 뿐 실제로 남들처럼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이따금 JU의 자동 추천 재킹에 따라 맞춰지는 라디오 채널 속 사연 읽기 정도가 그의 청취 목록의 전부였다. 귀를 완전히 덮는 하우징, 소음들은 군중의 시선 속으로 삼켜졌다. 샛노란 형광등 불빛이 하우징 패드 가장자리에서부터 켜졌다. JU가 채널 접속을 반겼다. 이미 정해진 채로 출력되는 접속 문구였다. 제리는 수천 번도 넘게 들었을. 그다음으로 내뱉는 말은 어느 라디오, 혹은 어느 장르에 접속하겠냐는 친절한 질문이었다. 간단하게 무시했다. 그러면 저절로 잠잠해졌으므로.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6-2-2, 주파수를 확인했습니다. 채널 진입을 시도합니다.]

"뭐?"

 

신호가 초록색으로 변한 지 2분이 지났을 참,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기 시작한 제리는 난생처음으로 겪는 JU의 안내 문구를 듣자마자 삼중 교차로 지점의 중앙에서 덥썩 헤드셋을 잡고 외쳤다. 당황한 나머지 끝 음이 이상한 음 이탈로 마무리될 정도였다. AI고 뭐고 내 개인 맞춤형이라며! 왜 내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구는데!? 헤드셋 내부에선 지직거리는 전파 방해음이 제리 귓가를 간지럽혔고, 갑작스레 사방이 울렁댔다. 급한 대로 횡단보도부터 건넌 다음 해결하려던 제리의 발목을 붙잡은 이는 다름 아닌 제리 자신이었다.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가쁜 숨이 심장을 그대로 꺼낸 듯 아프게 흘러나왔다. 그를 지나쳐가는 전파 같은 군중들 사이로 그가 본능적으로 어떤 단어를 입에 올렸다. 필사적으로 도움을 외치면서, 어린아이가 손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겹게 시도했다.

 

"요,"

 

미처 못 삼킨 토스트 한 조각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쉽사리 완성되지 않는 그 순간에.

 

"──찾았다."

 

제리로서는 알지 못할 그가 말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부분은 목을 빈틈없이 조인 초커. 품이 헐렁한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나머지 눈동자보다 그 아래의 웃음기가 더 또렷해 보였다. 모든 부분을 인식하기도 잠시 그는 무릎 꿇은 제리의 손목을 단숨에 끌어당기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첨예한 눈동자 사이로 제리 자기 자신이 보였다. 초면, 그것도 전혀 다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도플갱어를 만난 것만 같다는 이상한 괴리감과 낯선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그가 '괜찮아'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가 눈을 뜬 이유는, 그가 일어날 만큼 충분히 기절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달걀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가로세로 열다섯 걸음 정도가 최대인 방 안에는 각종 녹음 장치와 노트북 한 대가 보였고, 번잡스러운 테이블 위로 대용량 간식이나 간편식도 잔뜩 쌓인 상태였다. 간단히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개인이 사용하고 있는 방임을 직감했다. 그는 적어도 불청객으로서 취급받고 있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유는 이랬다. 빗장뼈 부근까지 덮어진 두꺼운 이불과 그 아래 푹신한 매트리스. 눈동자만 왼쪽으로 굴려 확인했을 때 보이는 무방비한 등 따위. 제리를 난장판 속에서 도와주었던 사람.

제리는 그의 신체를 이루는 선들이 하나같이 얇고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어,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낯에는 여린 유약함보다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뇌리를 스치는 경적이 지금까지 안쪽을 따끔하게 찌르는데, 안심하고 몸을 맡겼던 이유는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제리가 그렇게 판단하고서 감각을 되찾으려 몸을 움직였다. 침대가 삐걱거리자 그의 시선이 제리를 향했다. 정말로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으리라 굳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한가득 기쁨과 반가움, 종잡기 어려운 감정을 모아서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정작 제리의 뇌 속에서 그는 미지수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가당키나 한 것인 가, 이런 일들이?

 

"어, 그게."

 

그는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면서, 침대 앞에 놓아둔 의자를 한 손으로 끌어와 앉았다. 기쁨, 다음으로는 걱정이 담겼다. 눈썹이 아래로 휘었다.

 

"깼구나. 몸은 많이 괜찮아졌어? 열은 안 나겠지만, 아무래도 걱정돼서."

"괜찮은 것 같아."

 

제리는 그대로 끝까지 존칭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평소 먹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섭취하는 행위나 다름없게 다가왔다. 말이 혀끝에 붙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아랫입술을 더듬으면서, 결국 남자가 말하는 방식과 같게, 간결한 반말로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광경을 자세히 보면, 문득 데자뷔를 느꼈다. 이렇게 나의 대답과 반응을 기다리면서 아낌없이 친절을 드러내던 이가 주변에 있던가. 제리가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막상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무생물까지 범위를 넓혀 JU가 생각났다. 그는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면서 계속 생각, 또 생각만을 반복하고 싶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자를 볼 때마다 떠올랐다. 제리가 JU가 필요하다고 느낀 상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 JU가 절실하게 보고 싶었다. 그 형체도 무엇도 없는 인공지능이 불쑥 튀어나와 전부 이러한 맥락과 인과에 의해 발생한 사태라고,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면 혼란스러운 감정도 수월하게 마무리될 텐데.

 

"저기, 있잖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네가 궁금한 거라면,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서 뭐든."

"너는 누구야? 여긴 어디고, 무슨 일인지 혹시 날 알아?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처음 봐. 이전에 우리가 알던 사이였다면 알려 줬으면 좋겠어."

 

처음 질문은 조금 느렸고, 두 번째 질문은 약간 빨랐다. 마지막으로 갔을 땐 거의 속사포로 물었다. 제리의 말을 들은 그는 눈을 내리깔고, 긴 소매 셔츠로 가려진 손목을 쓸어내리면서 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밝은 어조로 다른 제안을 제리에게 건넸다. 우리 이럴까. 운을 띄우는 목소리는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부드럽고 섬세했다.

 

"나도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각자 하나씩 묻고 대답해 주는 걸로. 어때?"

 

그가 검지를 들고 제리의 양쪽 눈앞에 몇 센티미터쯤 들이밀었다. 초점이 흐릿하게 잡힌 검지 너머로 고개를 기울인 낯이 제리 시야를 가득 채웠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 가르마가 나뉘는 지점에서 반대 방향으로 삐져나온 얇은 세 가닥. 그곳에 신경을 쓰다 보면 역시나 종래엔 눈이 마주치게 됐다. 이상했다. 분명 색채 없는 회색임에도, 정면을 향해 똑바로 응시하면 제리는 그 두 눈동자에서 샛노란 네온사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제리는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도 만족스럽게 응, 하고 짧게 웃었다.

 

"그러네, 음. 우선 '내가 누군지'부터인가. 널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정도?"

 

그는 그리 말하면서 손가락을 접고 웃었다. 또 아까 제리에게 보였던 그 쓸쓸한 미소였다.

 

"라고는 해도, 실제로 이렇게 소개해야 할 상황이 오니까 예상은 했지만. 조금 슬프네."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와 정반대로 양손을 가만두질 못하는 그를 보면서, 제리는 자기 자신을 장악하는 기묘한 슬픔이 마치 그의 미소를 보고 전염된 것 같았다. 손끝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옮겨붙어서 자신도 모르는 깊은 안쪽까지 작은 입자들이 들어와, 제멋대로의 '소중함'을 논하는 이 남자에게 그럴 바엔 너를 더 소중히 여기면 안 되느냐고 다그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으니까. 아니, 디스플레이에 쉽게 검색하여 재생하듯이 뇌리에 한 장면이 어른거렸다. 행하지 않은 기억이 생각과 섞여서, 제리는 어쩐지 눈가가 따가웠다. 제리의 변화를 놓칠 리 없는 남자는 급하게 제리의 팔목을 잡고서 물었다.

 

"제리!? 너 괜찮아? 역시 어디가 아픈 건가, 큰일이네. 상비약을 챙겨 두지는 않았는데…. 저기, 조금만 참아 줄 수 있어? 여기 역 근처니까. 금방 약 사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 질문 남았어."

"어? 응?"

 

희미한 조명이 켜진 방 안에서 제리는 제 키만큼 몸을 일으켜 세웠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남자의 소매를 잡았다. 우습게도 그 힘은 미약했다. 제리는 그가─심지어 어린아이라도─마음만 먹으면 쉽게 뿌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마치 수갑이 채워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눈썹을 아래로 내리는 그가 눈길을 어디에도 고정하지 못한 채 곤란한 표정만 지었다.

그는 발을 움직이지도, 제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기다렸다. 침묵이 둘 사이를 메우는지 떨어트리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요슈아는 마치 침묵의 실체를 빚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제리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래, 그 참을성과 인내심. 바로 그 인내가 그의 자세에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제리는 되려 자신이 평정심을 잃어갔다. 무어라도 쏘아붙이면 된다. 떨쳐내고 모른 척하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입 바른 거짓말로 제리를 놓아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제리가 그를 붙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제리가 기나긴 고민 끝에 굳게 붙어 있던 두 입술을 뗐다.

 

"너도 나한테 질문하고 가."

"하지만…."

 

제리는 말없이 미미한 힘으로 옷자락을 당겼다. 그는 입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민했다가, 이 또한 하지 말라는 걱정을 들었던 기억이 나 그만두었다. 정작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걱정해 준 당사자는 불안한 낯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만. 끝내 제리가 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그가 얌전히 허리를 숙여서 눈높이를 맞췄다. 이 세계에 온 그가 제리에게 묻고 싶은 가장 첫 번째 질문이자 부탁은 이미 한참 전에 정해 두었다. 말만 꺼내면 되었다. 그가 자기 소매를 잡은 제리 손을 반대쪽 손으로 잠시 떨어트렸다가, 조금이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빠르게 겹쳐 잡았다. 제리는 토닥거리는 그의 손이 따듯해 어깨에 들어간 긴장이 풀렸다. 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든 나를 믿어 줄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부탁이었다. 그런 말을 뒤로하면서 남자는 아까 다 못 밝힌 신원부터 밝히겠다며 덧붙였다.

 

"내 이름은 요슈아야."

 

이름을 말하면서 '요슈아'는 한 차례 뜸을 들였다. 마치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중대한 비밀처럼. 그는 지금까지 두 눈만 깜빡거리는 제리를 보고 그럴 만도 하다면서, 제리의 오른손을 뒤집었다. 그런 다음 자기 검지를 세워서 제리의 손바닥을 캔버스 삼아 어떤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각 문자가 형태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하며 마침내 'ヨシュア'로 마무리 지으면서 제리가 그 철자를 '요슈아'로 인식하는 순간, 제리는 자신이 알아들을 리가 없는 언어로 계속 그와 소통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그렇게 살아왔기에 의문점을 못 느꼈던 것처럼. 제리가 시험이라도 하듯 '요슈아'라고 숨죽여 발음했다. 단순한 호명 한 번에 요슈아의 몸 안쪽에서 형언 불가능한 감정이 꿈틀댔다. 그가 애써 버릇으로 자리 잡은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제리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요슈아, 하고 여러 차례 반복해 보더니 그쪽을 응시했다.

 

"역시 우리, 예전에."

 

제리가 의문을 토로하려던 순간에, 요슈아는 그 전에 보여 줄 게 있다며 제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불쑥 일어나 선 채로 등을 낮추고서 어지럽게 짐이 늘어트려진 원목 테이블 서랍 아래로 긴 팔을 넣고 휘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먼지 쌓인 스탠드가 덜컹거릴 정도로 어수선하게 움직이고서야 가까스로 찾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에 들린 오버 이어 헤드셋을 보고서 놀라 흠칫거렸다. 그것은 제리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분신을 능숙하게 서랍을 닫고, 빙그르르 돌려서 전원을 켰다. LED 패널이 빠른 속력으로 활성화되어 순식간에 번쩍였다.

 

"그건 또 어떻게?"

 

요슈아는 아무것도 들지 않아 비어 있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반쯤 눈꼬리를 접은 채로 쿡쿡 웃었다. 제리의 당혹스러운 반응을 진즉 예상했었다. 그가 당황한 이유를 근본부터 늘어놓자면 끝도 없었으나, 가타부타 서론은 전부 생략하고서라도 지금 놀란 지점은 딱 하나였다. 제리는 그 오버 이어 헤드셋에 JU를 내장하면서부터, 오직 제리와 제리 본인이 직접 승인한 이에게만 관리자 권한을 부여하도록 설정해 두었다. 제리가 기억하기에는 본인만이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슈아는 태연한 낯으로 제리 앞으로 다시금 돌아와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JU는 관리자 권한을 확인했다는 짤막한 승인 문구 다음으로 요슈아의 조작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는 요슈아의 손바닥 안에서 시시각각 패드 화면을 조정하는 JU를 보면서 입만 뻐금거렸다. 그야말로, 주인 자격을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제리는 억울했다. 요슈아는 그런 제리를 힐끔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아직 신원을 밝히는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혹은 6-2-2."

 

하우징 패드가 허무해하는 제리의 양쪽 귀를 안정적으로 덮었다. 그는 작은 백색소음이 차단되는 효과와 동시에 채널로 접속을 시도한다는 JU의 이어지는 안내 음성을 들었다. 주파수 6-2-2로 연결된다는 알림이었다. 청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 시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에 방해받고 있어, 제리는 그 소리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기 시야를 가득 채운 요슈아가, 양쪽 입꼬리에 검지를 갖다 대며 쭉 올리는 모습이 낯익었다. 기대가 커질수록 아래로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입꼬리의 가여운 표정. 그러다 기대하던 바를 이루고 나면 한없이 기뻐하며 올라가는 입꼬리. 본 적이 있다. 상상이 아니라 재현이었다. 제리를 관통하듯 요슈아가 한쪽 손을 떼고, 공중을 간지럽힐 정도로 조심스럽게 제리의 뺨에 손을 댔다. 이마가 닿을 듯한 지근거리까지 다가갔는데도 제리는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불편하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머뭇거리면서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댔다. 그는 요슈아가 나른한 숨을 뱉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숨엔 안도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제리는 멋대로 짐작했다. 요슈아가 속삭였다.

 

"난 항상 이 채널 속에 있을 거야, 따라 해 봐. 두려워하지 말고 오선보를 그리듯이."

"6, 2, 2?"

 

제리는 침묵했다.

왜 나는 네가 이렇게 차분하게 건네는 말에 안심될까.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게 되는 걸까.

 

한 번 터트리고 나면 작은 틈새 하나까지도 전부 합쳐져서 전부 나오게 되리라. 그건 비단 요슈아를 향한 마음뿐만은 아닐 거라고, 그는 짧게 쌓은 견식으로나마 확신했다. 한편으로 요슈아는 자신을 향한 제리의 눈길을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응. 잘했어. 그렇게 하면, 우린 어디 있든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라디오는 일방적이었다. 제리가 사연이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요슈아는 일방향으로 자기 이야기만을 전달해야 했고, 제리는 그가 하는 말을 일일이 섭취하면서 그의 정체를 계속 고찰해야 할 것이다. 제리에게는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하다못해 적어도 요슈아가 어째서 열망에 찬 시선으로 제리를 바라보는지, 짧은 시간 동안 제리가 질문할 때마다 쓸쓸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알려 주어야만 수지타산이 맞았다. 아니, 전부 핑계라고 해도 좋았다. 제리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요슈아의 파편을 하나라도 더 얻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 자신도 그가 느끼는 욕망이 억지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적어도 후회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지닌 채로. 요슈아가 일어서면서 슬슬 제리를 내보내려고 하자, 그는 뒤에 서서 일어나 대뜸 질문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기억해야 해? 날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으로는 부족해."

 

그러자 그는 일어난 제리를 향해 반쯤 뒤돌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기억해 줄래."

 

때마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자동 보호막이 정확한 순간에 걷혔다. 저물어가는 석양빛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흩트려 놓은 방 안으로 침투하자 요슈아 또한 노을에 감염되듯 젖어 들어갔다. 그의 표정이 역광에 의해 제리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쩐지 제리는 그가 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슈아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리 널 진심으로 애정하고 있는, 너의 *인간*적인 친구라고."



Chapter 2. Give me the Love, and, Gasoline!

 

제리는 꿈에서 깨어나도 깨지 못한 감각이 이러하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다. 그는 종일 몽롱했다. 사내에 배치된 각각의 지정석엔 터치패드 형식 모니터가 지급되었다. 조금만 가만히 있어도 근무 태만을 경고하는 기능이 장착된 모니터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불독이 침을 뚝뚝 흘리면서 매섭게 짖는 소리' 따위로. 잠결에 빠지거나 공상으로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매일 들어오는 방송국에 관한 민원 안건을 눈알이 충혈되도록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있었다. 제리나 제리의 회사에만 내려진 업무만은 아니었다. 말라니트로 내의 중소기업은 대체로 CPR 산하에 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제리가 이런 감각을 업무 도중에 느껴야 할 사유는 마땅히 없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불독 세 마리가 한꺼번에 짖으면서, 소방차와 경찰차, 구급차까지 모조리 불러낸 다음 온갖 종류의 밴드와 고대에 멸종한 짐승이 울부짖는 괴성을 풀 데시벨로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목을 뒤로 젖힌 채 한 남자만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직장이었다. 주변 직장 동료들마저 그가 제발 스크린을 터치하기를 바라면서 힐끔거렸다. 보다 못한 옆 옆자리, 표독스럽기로 사내에 소문이 깔린 S가 혀를 차며 제리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제리 씨?"

 

제리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제리 씨!"

"……라디오 자주 들으세요?"

 

S가 돌발 질문에 말문이 막혔고, 타 직원들은 평소 평가가 썩 좋지 않았던 S가 물먹었다는 점에만 집중했다. 정작 질문자인 제리는 S에게 정말로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서 질문했는데, 답변은커녕 미쳤냐는 말과 함께 반강제적으로 점심시간 이전에 반차를 쓰게 되었다. 그는 한적한 거리를 거닐면서 평일 이른 오후 시간대는 이런 건가, 하고 시시한 감상을 품었다. 그 시간대에 귀가하는 일도 처음이기는 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갑작스레 기진맥진해져 로퍼도 벗지 않은 채로 현관 신발장과 복도를 구분하는 턱에 털썩 주저앉아 상념에 빠졌다. 두 무릎을 굽혀서 그 사이로 턱을 꾹 눌렀다. 사방이 가로막히도록 만들어낸 작은 공간 속, 작게 뱉어낸 한숨은 따듯해서 우습게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제리가 요슈아에게 헤드셋을 돌려받은 그날, 그는 제리의 품 안에 요청한 적도 없는 물품들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속사포로 설명하며 안겨 주었다.

이건 네가 좋아하는 과자고, 이 재킷은 너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서 샀던 거니까 입고 가고, 저건 혹시 모르니까 호신용 스프레이로 들고 가고, 아! 이건 우리 둘이 같이 골랐던 건데 보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재촉하려고 주는 용도는 절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줄게, 그리고 또 어쩌고저쩌고….

구구절절한 물품 목록 늘어놓기 끝에, 제리 양손 안에 빈틈이 없어 더는 들고 갈 물건이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는 만족스러워하면서 제리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물어보고 싶었던 그였지만, 바깥에 이미 세워져 있던 차 한 대가 그의 이목을 확 낚아챘다. 번호판이 부착되어 있지 않은 낡은 택시였다. 제리는 탑승하면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툭툭 두드리고 있는 흑발의 남성은 척 보기에도 요슈아와 또래일 만큼 젊었다. 또한 그 옆 조수석에도 자홍색도 갈색도 아닌 그 어중간한 밝은 머리칼의 젊은 남성이 한 명 더 탑승한 채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의도적으로 제리의 시선을 피했다. 제리의 품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물품들이 제리의 몸을 건드리자, 그는 가까스로 물어봐야 할 질문이 산더미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는 이미 닫힌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는 요슈아에게 급히 외쳤다. 이 사람들은 누구고, 도대체 *인간*적이라는 건 무슨 의미냐고.

하지만 요슈아는 '내 친구들이니까, 제리에게도 친구이려나' 같은 엉뚱한 대답을 끝으로 잠자코 고요해졌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요슈아를 바라보면서 제리는 착잡한 마음을 이루 감추지 못하고, 애꿎은 안전벨트만 손톱으로 갉작거렸다. 거짓말과 침묵 중에 더 무거운 추는 어느 쪽에 매달아야 할까. 제리는 문득 그 무게를 쟀다.

 

"언제, 어디 있든 만날 수 있다고 했지."

 

제리는 가벼운 짐을 검은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는 제리가 혹여 그 숫자를 잊을까 봐 여러 번 복기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JU는 그가 현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집 안에 있는 가구 중 디스플레이가 있는 어디든 그 존재를 옮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리가 JU를 소리 높여 불렀다. 침실 방향에서 짧고 경쾌한 버튼음이 울렸다. 제리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JU는 벽면 디스플레이에 찡그린 표정—이라 하기엔 그저 제리가 아스키아트를 보고 적당히 추정했을—이 떠 있는 채로 제리와 맞닥뜨렸다. 제리는 어쩐지 요슈아와 묘하게 짓궂은 면에서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떠올렸다가, 고개를 양옆으로 휘젓고 엎드렸다. 침대 아래로는 흘러내린 이불 탓에 그림자가 드리워 어둠만이 가득했다. 제리가 잠시 고개를 빼내고 심호흡했다가, 한 번에 상체를 숙이면서 팔을 쭉 뻗었다.

 

"됐다!"

 

제리는 자기가 얻어낸 수확물이자 어린 시절 앨범을 천장 위로 쭉 뻗으면서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다가도 본인이 외친 말이 요슈아가 보였던 행동과 꽤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닮은 구석이 계속 생기는 건지 알 방도가 없었다. 제리는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멋쩍게 웃는 소리를 냈다. 하하. 그러다 품 안에 앨범을 꼭 쥐고서 그대로 다시 소파로 향했다. 제법 묵직한 양장본 앨범은 먼지가 가득 차 있었다. JU가 물었다.

 

[JR, 또 다른 관리자가 해당 앨범 속에 등장한다는 가설을 세웠나요?]

 

제리는 앨범 표지를 펼치자마자 그의 질문에 위쪽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요슈아가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떠올렸다. 제리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면서 JU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JU는 자신에게 등록된 데이터로는 JR이 직접 요슈아를 제2 관리자로 등록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고 짤막하게나마 답변했다. 제리는 우선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JU의 질문에도 답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 사람하고 지냈던 기억이 나…. 난 분명 여기에서만 자랐는데."

 

그는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코팅된 사진을 넘겼다. 어느 사진에서도 요슈아를 떠올릴 흔적은 마땅찮았다. 제아무리 절대적으로 똑같이, 평등하게 흐르는 시간이란 불손한 상상에 가까우며, 예상대로만 자라는 이가 없다지만 사진 속에 있는 이들 중 요슈아일 가능성이 보이는 자는 없었다. 제리는 결국 힘이 빠져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JU가 어느새 자리를 옮겼다. 장소는 그의 왼쪽,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입구 사이로 몸체가 반쯤 빠져나온 헤드셋 패드였다. 제리는 고민하다가 그 헤드셋을 쥐고 목에 걸쳤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JU가 빠르게 전원을 가동하면서, 제리의 의사를 간접적으로나마 물었다.

 

[원한다면 라디오 채널 연결을 돕겠습니다. 주파수를 맞춰 주세요.]

 

그는 언제나 묻는 쪽은 JU여도, 결국 자신이 유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억지로 부득불 이행하는 느낌보다는 수작임을 알면서도 사랑스러워 당해 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최근에 제리는 낯선 이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한 번 더 느낀 적이 있었다. 어떤 연결고리가 살짝 맞춰지려는 순간, 헤드셋 내부에서 전파가 지직거리면서 그를 재촉했다. 제리는 초조하면서도 기대를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주파수는 6-2-2."

 

JU는 확인했다는 안내를 다음으로 빠르게 라디오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번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라디오 채널 체크가 금세 이루어졌다. 제리는 눈을 감았다. 처음 들린 소리는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자그마한 소리였다. 집중하지 않고 싫증만 낸다면 아무도 그 소리를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얼마 안 가 익숙하고도 깔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이곳은 브레이브. 6-2-2. 지금 이걸 듣고 있다면, 내 *인간*적인 친구가 내 말을 믿어줬다는 거겠지?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야.]

 

제리는 무어라도 좋으니 똑바로 그를 향해 말하고 싶었지만, 라디오라는 점에서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요슈아가 잇는 말을 그대로 들었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나에게 들려주지 않을래? 나도 이곳에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능숙한 라디오 진행자처럼 그는 제리가 요청치도 않은 추천곡을 재생하기 시작했는데, 제리가 길거리에서 자주 듣는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솔직히 말해 제리는 음악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방송국 아래를 스쳐 지나가면서 드리우는 그림자는 매일 그를 소음 안으로 씹어 삼켰고, 그는 그럴수록 더욱 JU에게 주변 소음을 차단해 달라는 명령의 강도를 높였다. 횡단보도는 흑과 백이 나누어져 있어 그가 걸으면서 어느 한 색을 밟고, 다시 다른 색을 밟으면서 그 행동을 매 순간 반복할 때마다 그를 질타했다. 어느 한 곳에 속하지 못한 그는 나쁘다고, 옳지 못한 대중이라고. 대중성에 굴복하든, 확고한 이념을 가지든 무엇 하나 온전하게 지니기는커녕 높게 쌓아 올린 빌딩들 사이로 몸을 숨기고 애써 괜찮은 척 살아왔다. 그런데도 요슈아가 들려주는 그 노래는 그런 애매한 제리마저도 간절함이 묻어나는 이처럼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아 어느 한 곳이 울컥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리는 이 곡의 내용을 이해할 리가 없었는데, 전부 이해가 되었으니까. 마치 제가 겪은 일처럼.

 

[──이렇게 첫 곡은 끝이야. 아마 절대로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아, 너무 자신만만했나? 하핫.]

 

요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떻게 웃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곡은 <そばにいて>라는 곡인데, 어떨 때 썼던 곡이냐면그런 적 있어? 솔직해지면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상대가 있는 기분. 그런데도 솔직해지고 싶고, 하지만, 그래서 숨기고 싶어서어떻게든 감추고 싶은 마음.]

 

그는 요슈아가 조심스레 선물상자에서 꺼내듯이 하나둘씩 내뱉는 단어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자신이 경험해 온 기억 안에 녹인 다음 대입해 보았다. 그러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불쑥 자세를 바꿔, 아예 누운 상태에서 몸을 살짝 좁은 소파 안에 전부 구겨 넣었다. 체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양모 털로 뒤덮인 소파. 제아무리 부드럽고 따듯해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분은 내지 못 하리라. 뺨을 비비적거려 봤자일 텐데, 자기 귀를 덮은 헤드셋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하나에 제리는 요슈아가 제 위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라디오로밖에, 일방향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그에게 이러한 기분을 느껴본들 환상 속의 노스텔지어에 불과했다. 제리는 요슈아를 알면 알수록 닿고 싶었고, 모르면 모를수록 불안했으며, 자신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할수록 불안한 기쁨에 시달렸다. 딱 들어맞는 방법론이 있다면 그리 해결하고 싶을 정도로. 제리는 충동을 참았다.

 

"알 것 같아, 그 기분."

 

제리는 요슈아가 듣지 못할 대답을 하면서 서서히 눈이 감기는 감각을 느꼈다. 따스한 햇볕이 유독 셌고, 강했다. 요슈아도 지금, 이 햇볕 아래에서 라디오를 녹음하고 있는 것일까. 이 라디오는 나만을 위한 거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통화가 아니라. 제리가 의문을 깊이 파고들수록 의문점은 깊어져만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제리는 요슈아의 꿈을 꾸게 되리란 짐작이 들었다. 숨결이 점점 차분하게 잦아들었다.

 

 

"그럼, 안녕. 너의 *인간*적인 친구가."

 

마침내 제리만을 위한 아홉 번째 라디오가 종료되었다.

마이크에서 멀어진 요슈아는 참아왔던 숨을 거칠게 토해내면서 가쁘게 호흡했다. 고개가 아래로 기울어지고, 테이블로 상체가 고꾸라지면서 정수리가 부딪쳤다. 바로 전, 그가 보안관 무리에게 쫓기면서 그의 오른팔 어깨 부분을 향해 쏜 테이저건이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혈관 내부에서 전류가 찌릿찌릿하게 흐르는 감각이 들었다. 요슈아는 쓰라린 어깨 부분을 억세게 문지르듯 응급처치만 시도했다. 그가 말하는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이란 이런 때였다. 이 정도의 거짓말만큼은 돌아와서도 아마 용서해 주지 않으려나. 요슈아는 혼잣말로 조소를 섞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알고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가 이렇게 된 꼴을 목격하면, 또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낯빛으로 자기 자신이 더 괴로워하리란 사실을.

그는 가까스로 테이블 앞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몸을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일으켜 세웠다. 이번이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예정은 없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백 팩에 홀로그램 레코드와 전파 방해기, 라디오 녹음기, 테이저건 등을 전부 챙겼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수많은 물품과 계획 용지들이 널브러진 채로 요슈아의 마지막 순간을 기리고 있었다. 그는 나가기 전, 아지트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한 다음 제 옷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당겨 짧게 입 맞췄다. 제리가 미약한 힘으로 붙잡았던 그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몇 달간이나 상주했던 아지트 바깥으로 나왔다.

그 단순한 문장을 순탄한 과정이라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아슬아슬하게 회전하는 시선의 방향을 가로세로 직경 30cm 네온사인 간판에 맞췄다. 간판 형태가 울렁거렸다. 가솔린을 섞은 칵테일처럼? 전자칩을 삽입한 교통 안내 로봇처럼, 혹은 그 무엇도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감성에 맞춘, 참으로 한심하고 너저분한 주파수와 같은 것처럼.

 

"하, 흡."

 

나오자마자 피부 아래 기이하리만치 뜨겁게 맥동하는 혈관의 감각이 느껴졌다. 요슈아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소란스럽게 떠드는 군중의 발소리와 빗발치는 시위 함성 사이로, 신음을 삼켰다. 아. 정신을 잃으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그가 안간힘을 다해 겨우 발끝에 힘을 주었다. 재킷 안에서 급히 약통을 꺼내 입 안으로 넣었다. 약의 씁쓸한 고무 맛이 한동안 목구멍 안을 감돌더니, 점차 고통을 가라앉히게 했다. 이윽고 뇌 안쪽에서 울리던 이상한 초음파 소리도 멎었다. 요슈아는 단 한 개밖에 남지 않은 '중독─음성─해체제'를 내려다보면서 느리게 한숨지었다. 마지막 한 개만큼은 제리를 위해 아껴 두어야 했다. 요슈아는 흐린 눈동자를 비비면서, 무슨 연유로 두 사람이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회상했다. 전부 처음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처음 이 세계에 도달했던 때, 두 사람은 모두 기억이 온전한 상태였다. 그곳에 온 인과를 어림잡아 짐작해 보자면 두 사람이 함께 들었던 구식 라디오 속 한 채널—622—의 멘트 때문이었다.

 

상처가 있으신가요? 인연을 강하게 하고 싶으신가요? 있을 곳이 필요하신가요. 그렇다면, 그런 익명의 청취자 중 한 분께 특별한 기회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침대 위에서 하릴없이 느긋하게 다리를 겹친 채로 누운 둘은 팟캐스트 화면과 서로를 번갈아보았다. 제리의 눈썹보다 요슈아의 눈썹이 훨씬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제리는 그런 남자친구의 엉뚱한 소망을 거절하기엔 너무나 심지가 약한 여자친구인지라,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슈아는 두 주먹을 모으고 기뻐하면서 제리를 끌어안은 다음에, 짤막하게 사연을 적어 보냈다. 사연의 내용은 둘이 함께—대체로 요슈아 혼자—적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에 언제나 음악이 있었는데, 이번에 잊지 못할 기억을 하나 만들고 싶어요. 이번에도 음악과 관련된 기억으로 말이죠 이하생략, 구구절절하게 제리를 향한 자랑의 메시지 열다섯 줄. 팟캐스트 진행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보낸 사연을 실시간으로 읽었다. 잘 들었다는 예의상의 말이 서두로 시작되었다. 형식적으로 이어지는 위로나 칭찬이 이어지고, 남자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가락 마디를 꺾는 소리를 두어 번 냈다. 그다음 마무리 문구를 이런 식으로 장식했다.

 

커튼콜이 다가오면, 두 사람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익명의 청취자, 당신이 사랑하는 아주 *인간*적인 음악으로요.

 

"아마도 그거 같지."

 

제리가 말했다.

 

"잊, 잊지 못할 추억이긴 하지 않아?"

 

요슈아가 애써 긍정적으로 말했다. 제리가 가늘게 눈을 떴다. 요슈아는 멋쩍게 웃다가 미안하다는 말만 몇십 번을 반복했다.
물론, 그들은 이곳에 머무르는 주민도 아니었으며 명백하리만치 이방인 그 자체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제리에게 자꾸만 요슈아는 눈길이 갔다. 그 시선 안에 내포된 성분엔 단순한 걱정이 차지한 총량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본의 아니게도 이곳은 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했듯 쉬이 잊지 못할 장소였다. 다르게 말해 제리와 요슈아가 지금이 아니라면 절대로 체험하지 못할 공간이란 뜻이기도 했다. 그가 제리를 불안에 처하게 했던 수많은 상황을 복기하면서, 그가 제리를 안심시켜주지 못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소망도 존재했다. 공중을 빠르게 회전하는 운송 포드를 보면서 제리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정작 제리 본인은 요슈아가 이곳을 꽤 즐기고 싶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별말을 안 하기로 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때부터 모든 일이 꼬였던 것도 같다. 정확히 말해서 라이버 레코드 수도, 말라니트로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제리! 이것 봐."

"에 3,604가지 맛이 동시에 나는 아이스크림이라고?"

"신기하지 않아? 먹어보고 싶지 않아?"

"요슈아 그냥 먹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데."

 

제법 즐거웠다고 요슈아는 자부했다. 톡 쏘면서도 달콤하고, 강렬한 핫소스와 치즈가 섞여서 초콜릿 베이스를 크림치즈로 녹이는 동시에 피스타치오가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며 알 수 없는 12번째 은하의 물에서 추출한 고당도 크림의 경험도 경험이지만(사실 요슈아는 이때 이후로 아직도 미각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공간 속에 지내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는 느낌과 현실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 적당히 이 세계를 즐기는 순간은 두 사람을 이솝우화의 주인공처럼 만들어버렸다. '안전한 위험'. 딱 거기까지의 경계선. 매일 반복되는 껍데기 같은 일상을 탈피했다는 전제를 두고서, 나름의 안정감과 함께 지낸다. 상처를 회복 중인 두 사람은 단내에 쉽게 흔들렸다. 실상 어른이든 아이든 흔들림은 누구에게라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중요한 점은 선택된 이들이 요슈아와 제리, 둘이라는 점이었다. 세계의 오선보가 그들을 가파르게 지나쳐서 지금껏 기억으로 쌓아온 페이지들마저 지나쳤다.

요슈아는 그들이 잠시 머무르려고 임대한 집 안 거실에 나오자마자 머그잔을 깨트렸다. 믿기지 않는 말에 그가 손을 떨었다. 손목 부근 자상으로 새겨진 흉터가 욱신거렸다. 제리는 창밖 너머 거대한 디스플레이 속 어지러운 불협화음에 잠시 귀 기울이더니, 요슈아를 힐끔 보면서 자신이 한 말이 평범하다고 굳게 믿고서 재확인했다.

말이 어떻게 음표가 되는가. 음표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음악은 어떻게

 

"별로 괜찮지 않아? 여기서 계속 이렇게 지내도."

 

타인을 잊게 하는가.

 

 

제리와 다르게 도시 전역에 송출되는 음악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던 요슈아는, 몇 주 뒤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게 클라이맥스 레코드 본사 회의실 중앙에 뜬금없이 돌아왔다. 회의를 진행하던 다른 보컬들과 홍보가 주변을 멍한 표정으로 둘러보는 요슈아를 동시다발적으로 응시했다. 에이대시 혼자서만 한눈을 판 채 더블 치즈 더블 패티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먹다가 뒤늦게서야 그를 발견하고, 냅다 소리부터 지르고 보았다.

 

"에, 에에엥──?! 요슈슈? 언제부터 닌자 자리마저 뺏은 거?! 베로니카 포지션 배틀 위험한 거 아냐?"

 

양상추가 테이블 위로 후드득 자유낙하를 했다. 요슈아는 그 양상추가 마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채로 돌아온 자신을 보는 듯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 속 수다가 그가 방금까지 머무르고 있던 세계 속 시끄러운 소리와 겹쳐서 그의 뇌리를 강렬하게 주먹으로 내려치듯 울려 퍼졌다. 다른 보컬들의 목소리가 그토록 거슬린 적은 난생처음인지라 도무지 자신을 주체할 수조차 없었다.

 

"아하하하. 무슨 소리야? 지금 아무것도 없다가 뚝 생겼다고, 안 보였어? 하 하하…."

"제, 제리가."

 

벌떡 일어서면서 퉁명스럽게 말하는 모모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야의 불분명함이 그가 느끼는 절망을 입증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은 없다. 그래서 요슈아라는 인간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죽고 싶을 만큼 노력했다. 아니, 죽지 않기 위해 내일을 오늘로, 오늘을 어제로 만드는 연습을 하루하루 해 오면서 살아왔다. 요슈아가 여태까지 해 온 노력은 가장 친애하는 소꿉친구이자 애인이 건넨 미숙하고, 또 그와 비슷한 온정 때문이었는데도.

 

"제리가 아직 거기 있는데."

 

요슈아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이내 한 줄기로 뭉쳐 흘러내렸다. 보컬리스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그가 장난으로 벌이고 있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청년은 다시 소년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 예상치 못한 이별에 떨었다.

 

진정한 요슈아는 언제나 그랬듯 제리와 마찬가지로 굳게 신뢰하고 있는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들에게 해당 사건에 관해서 침착하게 설명하면서 상담했다. 처음엔 농담으로 안 마츠가 웃으면서 연기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가, 요슈아의 눈동자를 보고 진담임을 깨달았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유키가 한 번 더 그 팟캐스트를 들어보는 건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동일한 시각에,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와 같이. 이번엔 다른 사연을 보내서.
다행스럽게도 유키의 제안은 들어맞았다. 처음 말라니트로 중심부로 들어서자마자 마츠와 소타는 방송국 송신소 쪽에서 거침없이 루프 되는 찢어질 듯한 음악에 귀를 틀어막았다. 저게 문제 아니냐고, 저게?! 요슈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더욱 거칠고 난잡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속에서 마츠는 거의 공연장에서 외치듯이—어차피 시민 대부분은 헤드셋을 착용했거나 그 음악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소리쳤다. 그는 마츠가 한 말과 제리가 그간 보인 여러 정황을 돌이켜 보았다. 해답은 예상외로 가까이 있었다. 요슈아는 검지로 입술을 툭툭 건드리다가 시야를 위로 올렸다. 창공을 침범한 거대한 송신탑 쪽, 괴성에 가까운 음악에도 태연한 시민들을 보면서 요슈아가 드디어 정답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불쑥 내렸다. 멤버들이 없었으면 이곳에 다시 오지도 못했으리란 생각까지 미쳤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내 주변엔 다정한 사람밖에 없구나. 갑작스레 감명에 젖은 요슈아가 횡단보도를 대기하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을 덥썩 끌어안고 고맙다며 마음 깊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츠가 땀 한 방울을 턱 끝에 매단 채, 요슈아의 등을 어물쩍 두드리면서 대답했다.

 

"어엉, 어. 그래. 근데 요슈아, 넌 네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냐?"

 

요슈아는 약 기운이 가신 상태에서 회상을 멈췄다. 그날 이후로 얼마나 부단하게 노력했던가. 클라이맥스 레코드, 브레이브 차일드, 나아가 요슈아와 LA, 그 모든 일을 잊어버린 것까지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제리가 제리 자신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은 순간, 요슈아의 마음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조해졌다. 그린 듯이 다른 둘이었다. 한데도 서로의 삶은 무척이나 닮은 꼴로 자라나서, 이젠 서로를 가장 이해하는 이가 본인임을 인지하고 있다. 요슈아는 이전에도 그랬듯 그와 극적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아무리 비정상적이고 혼돈에 빠져 있어,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막막해도 그는 제리가 곁을 지켜준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만 피트가 넘는 고도에서 추락하는 기상천외한 체험도, 며칠 내내 폭설 속의 산장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는 조난 생활도. 심지어 아픈 상처를 지워 준다며 속살대는 빗방울을 외면하고 상대를 진심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까짓거 못할 게 뭔가. 이 부조리한 세계를 지배하는 불평등하고 엉망진창인 음악을 종료시키고, 도시 전역을 자신의 음악으로 뒤덮어버리는 기행 정도야 쉬울 것이다.

 

"널 정말 좋아하니까."

 

요슈아가 제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손쓸 도리 없는 *인간*적인 소년이다. 사랑에 맹목적이고, 그 맹목으로 인해 나약함을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나약함마저 사랑을 위해 드러낼 수 있었다. 그는 백 팩 안에 든 장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고개를 내밀어 거리에 있는 보안관과 경찰의 수를 눈대중으로 셌다. 계속해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 요슈아를 저지하기 위해 수가 늘어났었다.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테니, 지금 시기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더 제리가 이곳 음악에 노출된다면. 그땐 정말로. 요슈아가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었다. 부정적인 망상은 본능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요슈아는 그들의 눈을 피해 가야 할 곳으로 갔다.

 

그날 밤. 제리는 현관문 앞에서 뭔가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그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문 앞으로 갔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얇고 가느다란 상체가 제리를 향해 앞으로 기울어졌다. 회색 머리카락이 제리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낭만이라고는 다 죽은 여자, 이제 와 판타지를 기대하기엔 현실을 너무 잘 아는 여자. 그런 제리가 틀기만 하면 잠자리에 드는 로맨스 영화 속 몇 가지 클리셰가 있었다. 갑자기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집에 들이닥쳐서 하룻밤을 보내는 그런 이야기. 제리는 정말로 기대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

그 상황을 직접 겪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몇 번 당황하다가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겨우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제리의 품 안에 빠듯하게 들어온 이를 확인한 그는 두 번째로 놀랐다. 요슈아였다. 그것도 상처 입은 상태의.

 

 

Chapter 3. So What’s Your Plan, My AI?

 

"앗, 아야."

"조금만 참아. 거의 다 끝나가니까…"

 

요슈아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제리 혼자만 앉아 있던 소파 맞은편 좌식 테이블에 걸터앉아 그에게 치료받고 있었다. 난 바닥에 있어도 되는데, 하는 그를 제리가 만류하면서 앉힌 덕분이었다. 그는 제리가 이끄는 손길대로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와이셔츠를 벗기자 드러난 어깨에 입은 상처가 보였다. 제리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요슈아는 있지, 좀 더 자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

"…엣."

"응? 어, 어라.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주제넘었나?"

 

제리는 자기가 한 말을 곰곰이 검토했다가 또 한 번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단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약에 적신 거즈를 문대다가도 말문이 막혔다. 그 앞에만 있으면 제리는 본인이 알던 제리로 있다기보다, 본인이 모르는 제리를 자꾸만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하는 감각이 사뭇 낯설어서 모르는 약품을 건들 듯 흠칫거리다가도 적응하면 금세 빠져들어선, 구제 불능이라고 봐도 좋았다. 생각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비슷한 심정은 배가 되고 곱절이 되어 제리에게 돌아왔다. 요슈아 또한 덩달아 한 박자 뒤늦게 놀라더니, 양손을 홱홱 내저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시도하려고 했다. 제리가 치료하고 있는 오른팔 손등은 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왼쪽 손만.

 

"아니! 아닌데! 그건 아니야. 걱정해 줘서 기뻐. 오히려 엄청나게 두근거렸어."

 

제리는 약간 황망해졌다. 볼이 붉어졌다.

 

"저번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넌 나를 너무 좋은 사람처럼 여기는데."

 

요슈아는 제리가 누르는 손에 자기도 반대쪽 손을 겹쳤다. 체온이 겹쳐서 흐르자 조금 더 따듯해졌다. 제리는 슬쩍 요슈아 쪽으로 눈동자를 굴려서 그를 훔치듯이 살폈다. 요슈아 또한 제리를 훔쳐보았기에 둘은 동시에 동선이 겹쳤다. 머쓱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래로 슬금슬금 피하는 제리였지만, 그는 집요하게 각도를 바꾸어서 제리와 마주했다. 마침내 제리가 포기하고서 아예 홱 정면으로 요슈아를 바라보자 그가 만족스럽게 콧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잘 정돈된 손톱으로 제리의 손마디를 톡톡 건드리면서 말했다.

 

"실제로 그러니까."

 

제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을 부정하고 싶었고, 평온했던 제 삶을 수수께끼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린 요슈아에게 반박할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따라서 표현하자면 오히려 달가웠다. 하지만 제리가 가진 용기는 그러한 마음을 꺼내놓기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입을 벌리는 대신 행동으로 옮겼다. 거즈를 얹은 어깨에 붕대를 꼼꼼히 감고서, 천천히 테이핑했다. 제리는 과거 자신이 생겼던 상처보다도 지금 그를 치료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썼다. 딱 그만큼이 제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요슈아는 애써 노력해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보이는, 그가 내보이고자 하는 '최선'이 기뻐서 제리가 보지 못하도록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다음 실실 웃었다. 제리는 요슈아가 계획한 대로 그가 웃었단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마지막까지 치료를 마무리한 다음에서야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튼, 이제 치료 다 했어."

 

다만 아무리 용기 없는 자라도, 필요한 상황에서는 꼭 말을 꺼내게 되는 법이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등을 돌린 채 응급 상자를 소파 아래로 밀어 넣으면서, 문득 생각난 의문점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아 올랐다. 묻지 않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요슈아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짐을 챙기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다. 부스럭거리면서 재킷이 손끝을 스치는 소리가 마치 예리한 칼날이 제리의 피부를 베고 지나가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제리는 묻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꾹 눌러 담았고, 참아 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쳐와서 이토록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 웃옷을 걸칠 뿐인 행동으로 조급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그는 쭈그려 앉은 몸을 일으키면서 왼손으로 주먹을 쥔 채 꾹, 누르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이 보였다면 질문조차 못 했을 것이다.

 

"저기, 있잖아."

"응?"

"혹시, 요슈아는 날 위해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

 

실내에는 정적이 깊게 깔렸다. 그 순간 제리는 '망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단번에 속으로 차오르는 온갖 잡념을 무찌르려 안달복달 댔다. 그가 살면서 이렇게 당황한 적도 없었다. 요슈아는 정말 제리에서 최초란 최초는 전부 앗아가야 만족하는 걸까. 제리가 잠깐 생각했다. 지금 얼굴, 우습겠지? 엄청 뜨거운데!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귓불을 진정시키려 무어라도 말을 뱉어야겠단 생각에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아, 내, 내 말은. 그러니까, 멋대로 착각하는 거일 수도 있는데, 아 그게, 분명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는 생각하지만."

 

머릿속이 엉망이니 덩달아 몸도 어느 쪽 방향으로 향할지 정하질 못한 채 이리저리 움직여졌다. 요슈아가 당황한 낯으로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제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제리는 보이지 않는지 혼자서 소파 쪽으로 향했다. 요슈아가 보기에는 그는 이미 요슈아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는지라, 해명할 필요가 다분했다. 요슈아가 그에게 가까이 가던 참이었다.

 

"요슈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계속 신경 써 주고, 나를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는걸.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나만 보호받는 건 너무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제리는 양손을 꼼지락대면서 결국 자기가 가진 모든 패를 드러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고 있던 마음을 실토하고 나니 속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었다. 고작 한두 번 만난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제리는 그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주 오랜 시간 그리웠던 이를 만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매분 매초, 그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그는 제리에게 기억처럼 다가오는 상상을 그려내게 했다.
꿈을 꾸고는 했다.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서 얇은 이불을 같이 덮고, 같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면서 우스갯소리로 소원을 비는. 꿈에서도 제리는 꿈을 좇았다. 요슈아 또한 제리에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이한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하고 눈을 질끈 감은 제리는 계속 이어지는 침묵과 고요함에 다시 슬그머니 시야를 되돌렸다. 그러자 눈앞에는 그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눈높이를 맞춘 채, 제리의 뺨에 가까이 손을 뻗고서 고민하는 요슈아는,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미소 중에서 가장 순수하면서도 괴로운 듯한 것을 꺼내 보였다. 그러고선 이마를 제리의 목선에 가볍게 기댄 채 속삭였다.

 

"네 말들이야말로, 치사해. 그러면 내가 멋대로 짊어질 수가 없잖아."

 

그들은 서로를 차마 똑바로 직시할 수 없을 만큼, 거울조차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감정을 내핵 안에 품고 있었다. 그것은 터지지 않은 상태로 심장을 울리게 했다. 요슈아는 결심한 것처럼 제리의 머리카락을 몇 차례 쓰다듬다가 몸을 곧추세웠다. 제리는 저절로 그를 올려보아야만 했다. 또다시 그 눈빛이었다.

 

"치료 고마워, 네 덕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위험한 거야?"

"*인간*적인 거야."

 

제리는 도통 그 단어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제 손바닥에 적은 것이 요슈아의 이름을 적는 철자인 것도 알았으며, 그가 들려준 음악의 가사와 수없이 내뱉은 말의 뜻도 전부 이해했지만, 오로지 그 단어만큼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타지에 버려진 이방인으로서 제리를 존재하게 했다. 요슈아는 제리의 심정을 안다는 듯이 더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대신 다른 말로 물꼬를 텄다.

 

"내가 부탁했던 말 기억해?"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널 믿어 줄 수 있냐는 말."

 

제리는 기억 속을 더듬어서 대답했다.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백 팩을 챙기면서 물었다. 이번엔 그의 표정을 가리는 석양의 그늘진 감염은 물러난 뒤였다. 또한 요슈아만이 제리를 향해 말하는 라디오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요슈아는 제리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달라고, 그러면 전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하면. 믿어 줄 수 있어?"

 

제리가 머뭇거렸다. 언제나 그는 누군가가 하라는 방침대로 살아왔었다. 이번에도 요슈아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태평하게 진행될 일도 많은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싫었다. 제리 또한 결심했다. 결심의 형태는 양쪽으로 찍어낸 데칼코마니처럼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부턴 붓으로 색을 섞은 듯 달라지기 시작해 이내 제리와 요슈아가 다른 사람임을 입증했다. 제리가 지닌 회색 홍채와 요슈아가 지닌 회색 홍채는 비슷했다. 그럼에도 요슈아는 그 안에서 자신이 아니라 여리고, 서투르지만 노력하려는 한 소녀만을 발견했다.

 

"혼자 짊어지게 하기보다는 같이 책임지고 싶어. 믿고 싶으니까."

 

세간은 그것을 반짝이는 아이덴티티라고 말한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과 목적을 간략하게 들었다. 소시민에 불과한 그로서는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 요슈아에게 '미쳤어'라고 세 번이나 말했다. 그러려나? 라고 짓궂게 대답한 그를 향해 다시 한번 복기한 횟수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었다.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음파를 송출하는 장소는 방송국의 송신소에 위치한 중심 송신탑이다. 멤버들—요슈아가 재빠르게 소개해준—이 방송국 내부로 잠입해 24시간 가동되는 부조정실 스튜디오의 스태프들을 제지하고, 제리는 요슈아가 건넨 모종의 자동 재생 홀로그램 레코드로 원래 끼워져 있던 레코드를 대신할 것. 그 사이에 요슈아는 송신탑에 있는 송신기를 조작해 홀로그램 레코드 속의 내용물을 도시 전역에 송신시키겠다는 소리였다. 요슈아는 구태여 제리가 혼란스러워할 만한 이야기는 건너뛰고 싶었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처럼 느껴져 입을 열었다. 지난 삶을 살아가며 계속 들어온 음침하고 꺼림칙한—무엇보다 요슈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수식을 붙일 생각 조차 안 했을—음악이 자기 뇌를 갉아 먹고 있었단 사실에 조금 비틀댔다. 현재까지도 제리는 제대로 믿기진 않았다. 그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나, 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슈아를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요슈아는 이때야말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면서, 설령 잘못되더라도 네 잘못이 아니라는 당부와 함께 알약 하나를 건넸다. 이게 무엇이냐는 제리의 말에, 그는 짧게 부탁했다.

 

"정말 나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신뢰하게 된다면 삼켜줘."

 

그가 더 물을 새도 없이 요슈아는 헬멧을 쓰고, 빠르게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송신소로 향했다. 점점 멀어지는 요슈아의 등을 바라보면서 제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Chapter 4. Time to call it a night, My Telomere.

 

"이쪽은 OK—그쪽은?"

"제대로 끼운 것 같아요. 이젠 요슈아가 말한 시각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쿵, 하고 유키와 마츠가 제압한 마지막 덩치가 바닥 아래로 포박되어 깔렸다. 제리는 여러 차례 자기가 제대로 레코드를 끼웠는지 확인했다. 레코드를 끼우자마자 핀이 켜지면서, 조작 화면에는 제리가 모르는 가수 명과 제목이 나열된 곡들이 차곡차곡 정렬된 플레이리스트가 보였다. 제리는 주변을 살피다가 곡명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중 제리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는 곡들이 몇 가지 존재했다. 그 곡들은 전부 요슈아가 그만의 라디오를 들려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소개하였던 노래 제목과 똑같았다. 제리는 그제야 요슈아가 어떤 행동을 하려는지 감이 잡혔다. 제리가 급하게 관계자들을 제압한 채로 대기 중인 멤버들을 향해 외쳤다.

 

"요슈아하고 연락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더는 듣는 쪽만으로는 안 됐다.

 

"정말 급해요."

 

귀에 헤드셋을 끼자마자, 헤드셋 가장자리에서부터 번쩍이는 네온 불빛이 들어왔다. 참 요란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잠시간 관리자 권한 부여와 함께 제리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면, 헤드셋은 제 주인을 반겼다. [JRTTAXXX, 텔로디오 히어링에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라는 재회의 인사말로. 어찌 감히 헤드셋 따위가 주인을 반긴단 표현을 운운할 수 있겠냐고 조롱하는 작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오버 이어 헤드셋의 이어 패드는 한동안 제리가 입력하는 조작도 무시한 채 요란한 아스키아트─우는 이모지, 기쁜 이모지의 바리에이션─를 반복적으로 띄우면서 통 말을 듣지 않았었다. 제리는 '그리움'이란 감정을 그것에게 부여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리는 JU가 요슈아와 닮았던 이유를 늦게나마 눈치챘다.

 

"내가 그렇게 설정한 거지? 너를… 개인 맞춤형이니까."

 

기억이 전부 제거됐어도 그리움은 여전했기에, 어떻게든 무의식중에 요슈아를 떠올려가면서 입력한 정보들 사이로 만들어진 그 어시스턴스는 제리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들이 알려 준 요슈아의 긴급 연락처로 통화를 시도했다. 제리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으면서 애써 울음을 참았다. 소음으로 막혀 있던 페이지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할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요슈아 또한 전화를 받았다. 그 너머로 인체 인식형 홀로그램이 지직거리며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조급하게 외쳤다.

 

"저기, 있잖아, 요슈아!"

"쉿. 들어봐."

 

순간 제리가 요슈아의 목소리에 따라 조용히 집중하면, 요슈아가 운전하면서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인간이 우는 소리와 더 비슷한 느낌이었다. 식스-투-투. 그러니까, 둘만의 암호를. 절대로 정확한 뜻을 알려 주지 않았던 그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투-투. 제리는 그걸 따라 읊으면서 되새김질했다. 그러다 요슈아와 제리가 이때까지 내뱉은 열두 번째 '식스'가 입술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쳤을 때, 송신탑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제리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검고 하얀 머리카락이 마천루를 가리면서 바람에 나부꼈다. '투'. 반사적으로 외치게 되는 신호.

 

"…응, 좋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인간*적인 친구네, 어쩐 일이야?"

 

그가 '식스'─'투' 사이 간격이 '투'─'투' 사이 간격보다 넓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한 번 더 신호를 입에 담고 나서였다. 정신을 흩뜨려 놓듯이 요슈아가 가느다란 미성으로 질문한 참이었다. 그는 해야 할 말을 정리하면서 답했다.

 

"요슈아, 있잖아. 돌아가면 네 노래를 전부 듣고 싶어. 이런 상황이 아니라, 제대로 둘이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요슈아는 그 부분에서 잠깐 웃었다. 망설임을 버린 채 또렷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곱씹었다. 어느새 코앞에는 송신탑이 보였다. 그는 헬멧을 가뿐히 벗고서, 백 팩을 맨 채 미리 계산해 둔 루트로 진입했다. 통화는 쭉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디오는 오늘까지겠네. 아쉽지만 종료 문구를 말해야 하려나…. 너도 외웠겠지만."

 

제리는 헤드셋 너머로 요슈아의 구두가 반자동식 계단을 빠르게 뛰어가는 발소리를 언뜻 들으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수신기 앞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현재까지는 평소 흘러나오는 음악을 송신하고 있는 송신기를 향해, 요슈아가 손을 뻗는 도중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뺨에 걸친 핸즈프리 이어폰이 그의 귓가에서 빠져나갔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이 일이 무사히 끝나면 전부 나한테 들려줄래? 나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난 요슈아야. 네 *인간*적인 친구고,"

 

혹은 6-2-2.

마지막으로 신원을 밝히는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암흑과도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몇 초 동안 이어진 정적 끝에, 누군가는 말을 꺼냈을지도 몰랐다. '밤이 이리 조용할 수 있던가.'

단숨에 시작을 알리는 음이 고요했던 빌딩 곳곳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슨 노래인지 알아보기 위해 하나둘씩 조명을 켜면서, 새벽녘에 찢어질 듯한 기타 리프를 듣든 말든 수면 상태에 접어들었던 그들이 이제는 바깥에 고개를 내밀어 송신탑을 주목했다. 정확히는 깊은 구석에서부터 이상하리만치 고양감을 끌어올리는, 낯선 감각을 주는 그 수상한 음악이 밟고 지나가는 오선보의 흐름을. 방송국 안에 있는 제리 또한 그 노래를 들었다.

별처럼 속속히 점점 켜져서, 조명으로 밝아가는 창밖을 멍하니 선 채 내다보는 제리를 향해 멤버들은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쳤다. 제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채 바깥으로 뜀박질했다. 시끄러운 경고음과 침입자를 색출하라는 성난 합성 음성이 그들을 가로막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붉은 조명이 시야를 방해해 정신없는 상태에서마저 요슈아 일행 쪽이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 외부 비상구가 거칠게 열렸다. 요슈아가 거칠게 호흡을 내뱉으면서 외쳤다.

 

"이쪽으로!"

 

멤버들은 처음 이동했던 차에 탔고, 요슈아는 제리 또한 그 안에 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제리는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오토바이를 끌고 온 요슈아의 뒷좌석에 탑승했다. 와중에 헛발질하는 그를 보면서 요슈아는 침착하게 행동해도 된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제리에게도 보였다. 송신탑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저 음악이, 이 세계를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원래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되돌아가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께름칙한 예감을. 제리는 요슈아의 허리를 양팔로 꽉 붙들고, 차를 뒤따라가는 요슈아의 등에 고개를 잠시 파묻었다가 들었다.

맞은편 공중 도로를 연결하는 시간은 훌쩍 지나, 지금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곳의 종착점은 맞은편 고층 빌딩과의 접점뿐이었다. 이대로 쭉 가면 그대로 자유낙하였다. 요슈아가 자신을 대입한, 에이대시가 떨어트린 햄버거 속 양상추처럼. 그 사실은 꿈에도 모를 제리는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언제나 현실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정답이라 여긴 채로 요슈아에게 외쳤다.

 

"요슈아! 정말… 뭐, 뭐야? 무슨 생각이야?!"

 

요슈아 또한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인지.

 

"네가 보기엔 어때?"

 

 

──이 세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점이라 정의 내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느 구역에서 음악이 가진 자유의 문제를 논하며 팻말을 높이 치켜들고, 그 반대 구역에선 테이저건을 충전하는 요원들이 옷매무새를 다듬는 미래도시. 그 안의 작은 점 두 개에 불과한 이들이 만든 이야기도 어느덧 커튼콜 장막을 올릴 시기에 점점 가까이 진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함께 해 준 익명의 청취자에게 전달해야 할 한 가지 법칙이 있다. 부디 귀를 기울여 유심히 들어주었으면 한다. 꽤 어려운 일이다. 이 법칙은 한 세계의 존재에 관한 예의이면서 격식이므로. 곧 있을 커튼콜 장막이 올라가면, 접고 있던 세 손가락을 위로 높이 치켜들어야 한다. 그리고 박자에 맞추어 스트레이트로 이어지는 숫자열을 본인만의 언어로 외칠 것. 단지 그뿐이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막이 내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빛바래지 않고 계속되리란 기대를 품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책장을 완전히 덮거나, 영사기가 더는 제 기능을 못 한 채 돌아가지 않거나, 게임기의 종료 버튼을 누르게 되는 이후가 오더라도.

수많은 청취자가 오갔고, 다양한 이들이 세계를 지나쳤다. 그 순간마다 위태롭게 지켜진 법칙 덕분에 두 주역을 포함해 이 세계는 내려오는 붉은 커튼의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눈부신 미래를 향해 흥분한 나머지 급박하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제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속한 회색빛 눈동자는 더 나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완전하고도 찬란한 신호 그 자체다. 그 신호가 제리를 향해서 이토록 숨 가쁘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밤을 밝히는 불빛들이 모인 이곳에서 오로지 너만이 보인다고. 소중한 사람이 지나가는 길을 쫓는 일이 맹목적으로 즐겁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나는, 몇 번이고, 어디까지고, 언제까지고, 어느 세계에서든.

너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찬 주파수라고.

 

"난… 너를."

 

갑작스레 어떤 파동을 느낀 제리는 감히 수식을 하나 덧붙이고 싶었다. 간혹 이런 순간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의미 모를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를 붙여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를 품는 순간 말이다. 제리가 밭은 숨을 뱉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요슈아의 허리를 잡은 왼쪽 손을 떼고서, 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무언가를 입 안에 단숨에 털어 넣고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요슈아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 정체를 보지 않았어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나의 *인간*적인 친구, 6-2-2. 나의, 요슈아라고 생각해."

 

그러므로 이 세계의 모든 음표를 지루한 불협화음이라 여길 수 있게 된 한 인간은, 비현실을 해답이라 외치는 그 찬란한 신호에 응답했다.

 

요슈아는 오토바이 핸들을 쥔 손에 일순 힘을 주었다. 손등 피부의 옅은 혈색에 생기가 돌 정도였다. 그가 머리를 아래로 숙이면서 작은 숨을 내뱉었다. 대가나 보답을 바라고 계획하며 시작한 일도 아니었거니와, 제리가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끝끝내 그가 품은 욕심이 미련으로 변하게 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주 일부, 반신반의하며 돌려받은 신호 하나에 그는 숨이 떨렸다. 제리. 수많은 파편이 모여서, 우리는….

그는 다음 말을 잇기엔─비단 그 말조차도 입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고 단발적인 사고로서 존재했지만─자신을 맹신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겁 많은 소년의 발걸음이 멈추면서, 바닥을 향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기를 반복했다. 제리는 그와 그 너머로 들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집중했다.

요슈아가 자기 허리를 감싼 제리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다섯 손가락 틈새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그들을 끊임없이 추격해 오는 이들이 뿜어대는 분노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이었다. 요슈아가 테이저건에 잘못 닿았을 때 손마디를 타고 흘렀던 전류하고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맥박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까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요슈아는 잠시간 자신의 오만에 대해 반성했다. 당장 처한 사태와 세계에서 벗어나고 나면 점차 해결될 수도 있지도 않을까, 했던.

요슈아야말로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 그 자체였으며, 정답에 도달할 의무를 지녔다.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도, 아지랑이 같은 '안전한 위험'의 불빛 사이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이 세계 속 제리가 더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절대로 놓으면 안 돼."

 

요슈아가 제리의 흔들리는 시선을 말로 붙들었다. 제리는 떨리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크나큰 결단이었다. 겹쳐 울리는 3단 사이렌과 웅성거림을 전부 무시할 정도로 강인한 사람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나섰더라면. 기쁨과 흥분, 그리고 동반되는 감정.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배덕감이 머리와 발끝을 타고 제리의 온몸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절대로 꿈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서히 고층 빌딩 앞으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풍경이 선처럼 그려질 때, 몸이 부유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아주 익숙한 음표들 사이로 천천히 빠져드는 몸, 두 사람을 빨아들이듯 품은 빛.

빛이 눈 부셨다. 지독할 정도로.

 

 

Chapter 5. You can listen to whatever kind of music creams your twinkie.

 

고막을 관통하는 열차 지나가는 소리에 제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몇 초 동안 그를 습격했다가, 이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는 사방팔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이곳이 어딘지 확인했다. JR 야마노테선. 시부야에서 하카타까지. 심심한 표정으로 핸드폰 속 출근 시간대를 확인하는 직장인과 테스트를 걱정하는 고교생의 안절부절못한 낯빛. 그 사이로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도 보이지 않는 한 인영을 찾으면서, 제리가 머리를 숙였다. 그의 옷차림이 어느새 평소 출근용으로 입는 와이셔츠와 카디건으로 변해 있었다. 눈썹 머리를 찌푸리고는, 카디건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안쪽 깊은 곳에 박힌 핸드폰을 찾았다. 그가 원래 쓰는 기종이었다. 능숙하게 1번을 누르고 기다렸다. 하지만 불안한 오랜 기다림 끝에 제리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었다. JU와는 전혀 다른 단조로운 기계음.
이럴 리가 없었다. 분명 두 사람은 손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제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팟캐스트를 켜고, 6-2-2로 채널을 맞춰 보았다. 그러나 현 채널은 현재 방송 중이지 않다는 녹음된 메시지가 경쾌한 배경음이 틀어지자, 제리의 등줄기로 오싹한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앞에 있는 자판기 숫자가 또다시 울렁대는 기분이었다. 제리는 그대로 힘이 빠져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요, 요슈아… 요슈아. 요슈아."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름을 불렀다. 완결지었다. 떠올렸다. 그런데 정작 그가 옆에 없었다. 제리가 핸드폰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상체를 푹 숙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보았다가 때마침 멀리서 땡땡거리는 소리와 함께 JR선 승차장으로 진입하는 지하철에 고개를 돌렸다. 제리만이 오직 그의 행방을 물었다.

 

"어디 있어?"

 

소음이 잦아들면서 승차장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열차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흰색 스니커즈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발짝씩 제리에게 다가섰다. 마침내, 제리의 코앞에 서자 앞코가 구겨졌다. 그가 시야에 맞추어 쪼그린 탓이었다. 제리는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앞이 깜깜해 순간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달콤한 카야 잼과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들어와 제리의 긴장을 녹였다.

 

"여기는 아침 식사 장소로 적절하진 않은걸."

 

여느 때보다 반가운 데자뷔와 함께한 채로 요슈아가 제리 앞에서 웃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는 제리에게 토스트를 물리면서. 따스한 햇볕이 젖은 눈가를 건드렸다. 놀란 제리는 애써 침착한 체할 겨를도 없이 떡하니 입술을 벌렸다.

 

"요슈아?"

"응, 네 요슈아."

"6-2-2?"

"널 아주 많이 좋아하는 소꿉친구 그리고 남자친구."

"정말, 정말 너 맞지?"

"그건 내 쪽이 하고 싶은 말인데! 바보, 얼마나 내가 널 걱정했는지나 알아? 네가 없을 때 정말이지…."

 

요슈아는 가뿐히 떨어지는 토스트를 맨손으로 잡으면서, 태연하게—하지만 왼손이 떨리는 걸 감추고서—웃으며 농담이 섞인 투정을 부리려 했다. 하지만 그다음 그럴 틈도 없이 제리가 강하게 양팔로 요슈아를 끌어안자 그마저도 실패했다. 아, 언제까지고 그는 소꿉친구에게 당하는 쪽이었다. 파급력이 너무 강한 걸 어떡하겠는가. 요슈아는 머뭇거리면서 더 이상 떨리지 않는 손으로, 훌쩍거리는 제리의 어깨부터 등을 토닥이듯이 쓸어내렸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듯이 기대자 지금까지 하지 못 한 것들을 충족시키듯 더 가까이 붙게 되었다. 요슈아는 쓰게 웃고는, 제리의 어깨를 살짝 떼어낸 다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를 달랬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커튼콜은 어떻게 끝맺음 지어야 할까.

 

"그러면, 제리. 나 부탁이 있어. 이번에야말로 들려줄래?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제리는 아직 감이 오지 않은 나머지 요슈아의 부탁에도 양쪽 눈을 깜빡거리면서 몸을 꼼지락대기만 했다. 요슈아는 토스트를 적당히 봉투 안에 넣어 두고,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지긋지긋한 자동차 매연과 각자 다른 음악을 듣는, 말 그대로 매캐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 속에서 요슈아는 제리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너를 괴롭히던 상처는 나았을까. 새로운 인연은 찾게 됐을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머무를 곳은 생겼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아, 전부 나한테 들려줄래? 나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많거든! 아, 그러려면 신원을 밝혀야 하려나? 일단은."

 

일축하여 제리 그 자체를. 제리라는 인간을 이루는 요소들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그렇기에 요슈아는 사랑스러운 그의 인간적인 친구의 뺨을 문지르면서, 못내 그리웠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환희에 찬 채로 덧붙였다.

 

"난 말이야. 정말 좋아하는 너를 언제나 듣고 싶고, 노래하고 싶은…."

 

 

시부야 스크램블의 교차로에서는 언제나 믹서기 속에서 갈리다 만 세계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1엔 동전이라도 더 벌고자 혈안이 된 소비의 상징은 거대한 쇼핑센터 형태로 중심부를 차지하고, 그 아래 빼곡히 들어선 간판들이 저마다 이목을 갈구하며 경쟁한다. 가게 곳곳 열린 문마다 고동치는 비트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길은 청취자, 청취자, 또 다른 청취자들로 가득 찬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호객과 광고음악은 신물이 날 지경이기에, 아스팔트 도로를 급하게 지나가는 군중은 저마다의 사운드트랙에 취해 지나갈 뿐이므로.

이들 몇몇은 플레이리스트 곡을 전환하면서 시시각각 바뀌는 대형 스크린을 향해 집중한다. 그러면, 립스틱을 붉게 칠한 광고의 여왕은 당찬 미소와 함께 올해를 빛낸 코스메틱을 소개할 것이고. 다음 주에는 유명 해외 록 밴드가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시부야 스크램블을 지나가리라는 희소식이 뜰 것이며….

그런 다음,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한 방의 클린치처럼—콘크리트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여 그라피티와 같은 샛노란 그라피티가 트랜지션된다. 실물보다 몇 배는 큰 앨범 커버가 그 위로 떨어지는 효과를 내는 것과 동시에, 스크린은 LP 축을 올리듯 음악을 재생시킨다. 관계자 몇몇을 제외하면 아무도 듣지 못 한 그 곡을. 왼편에서 빠르게 반대쪽으로 스크롤 되는 선동적인 헤드라인은, 그야말로 축제에서 들리는 축포나 다름없이.

 

LAPAN 장르를 개척한 천재 밴드, Brave Child! 금일 6월 22일 신 앨범 <TELOMERE> 본격 발매 개시!!

 

관심 없던 이들에게도 열망과 간절함을, 상냥해지는 법을 전달해 주는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그들만의 청취자를 생산해 냈다. 어쩌면 평생 마주치지 않을 사람임에도 떨리는 심정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어서, 그로 인해 조금은 지긋지긋한 거리를 올려다보았을 때 어느 한 명쯤은 반드시 '팬'이라고 외칠 수 있게 해 주어서.

하여, 익명의 청취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순간 또한 감사함을 담아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15번의 반복 끝에 되찾아온, 아주 인간적인 음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