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ngkgkB
제리가 방에 들어섰을 때 요슈아는 제리의 침대 위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자취방에 함께 들어섰다가 잠깐 제리가 음료를 사 온다는 사이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아마 침대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그만 한 번 눕고 나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생각한 제리는 겸연쩍게 웃으며 손에 들린 음료 캐리어를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따뜻한 캐모마일 티와 헤이즐넛 카푸치노. 두 향 섞이면 어지러울 법도 하건만 김이 새지 않는 것은 그 위에 플라스틱 뚜껑이 덮인 덕이다. 따끈한 온기만 제리의 한 손에 미약하게 남아있어, 제리는 스스로의 다른 손을 들어 제 손바닥에 부비며 손을 녹였다.
그러면서 눈길은 한편으로 요슈아를 살폈다. 연인의 모든 순간을 눈에 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땋아 내린 머리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따라 모로 기울어질 때에야 제리는 자신이 요슈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등의 불빛이 동그랗게 떨어지면 제리의 그림자가 옆으로 누운 요슈아의 뺨에 희미하게 지고 있는 것이다. 귀의 피어싱도 빼지 않고 잠든 요슈아의 긴 속눈썹이 역시 그의 뺨에 한 겹의 얕은 음영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보다는 이제 청년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는 얼굴이 다. 멀어진 유년을 떠올리며 제리는 잠깐 우울해지려던 것을 고개 저어 애써 떨쳐냈다.
그 대신 제리는 침대 옆에 앉았던 몸을 조금 더 가까이 해 요슈아의 옆 침대 맡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는 동안 요슈아는 잠시 소리 없이 뒤척이는 듯하더니 옆에 있는 제리의 손을 붙들었다. 제리는 순간 화들짝 놀라 호흡을 멈추고 요슈아가 하는 양을 물속에서 숨 참고 바라보듯 눈을 크게 뜬 채로 지켜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요슈아는 이내 "으음." 소리를 내더니 잡은 제리의 손을 아예 제 품으로 당겨 안는 것이다. 덩달아 요슈아가 있는 방향으로 끌어당겨진 제리의 몸도 "어어," 하는 사이 풀썩 침대 위로 누웠다. 제리가 당황한 사이 잠든 요슈아는 더듬더듬 팔을 뻗어 버릇처럼 제리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필요한 것을 찾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제리는 이제 자신 손이 아닌 제리 자신을 아예 끌어안아버린 요슈아의 품속에서 얼굴을 들까, 말까 마구 뒤흔들리는 것 같은 심장을 안고 고민했다.
연인이라는 게 이렇게 편안하고도 두근거리고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몇 초 뒤에야 제리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잠든 연인은 아주 어렸을 적 보았던 무구하고 어린 낯이 아닌 현실을 걸어가는 낯을 하고 있다. 현실. 그 단어를 떠올린 제리는 문득 그를 다시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요슈아와의 관계의 정의란 제리에게 있어 늪 같던 우울에서의 느리게 뻗어진 구원과도 같은 것이다. 제리는 내도록 스스로의 최악을 자신마저 용서할 수 없던 지난날을 안다. 그래도 옆에 있을게, 라는 말은 그렇다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요슈아에게 '과분하다'는 말을 하거든 그는 미간을 좁히며 그게 아니야, 라고 말하겠지만.
내게 너는 기적이야. 제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요슈아 쪽으로 돌리고 팔을 뻗어 요슈아가 그러고 있듯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숨결도 닿을 거리에서 가깝게 본 그의 낯은 이제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희미하게 웃고 있다. 내게 너는 기적이야, 요슈아. 제리는 발음하지 못하는 말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도무지 놓고 싶지가 않아서 그랬다.
그러고서 깜빡 잠에 든 것 같았다. 소년이었던 요슈아와 자신이 나오는 꿈을 꾼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렴풋이 어린 요슈아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것만 떠올랐는데 그 몽중이 얼마나 모호하냐면, 아예 그때의 요슈아가 지었던 표정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제리는 부스스 눈을 뜨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겨울 속에 잠을 뉘고 있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눈꺼풀을 완전히 들어 올렸을 때,
"깼어?"
"……아!"
"……그렇게 놀랄 건 없잖아."
제리가 탄성에 가까운 단음을 뱉으며 얼굴을 붉히자 요슈아가 그제야 제리를 품에서 조금 떨어뜨리며 불퉁한 소리를 냈다. "……나도 놀랐다고. 끌어안은 게 너일 줄은 몰랐어. 너 기다린다는 게 그만."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는 요슈아를 보고서 제리가 그제야 한 번 웃었다. 문득 생각이 나 음료를 놓아뒀던 책상을 돌아보면 종이 캐리어에 담긴 음료 두 잔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창문 밖은 아직 까맣고. "다 식었겠다." 제리가 말하자 요슈아가 다시 거리를 좁혀 그를 안으며 말했다. "뭐, 괜찮아." 그 말 한 마디에 제리는 가져온 따뜻한 음료에 대한 아쉬움을 놓아두기로 하고, 대신 눈을 깜빡였다.
"요슈아."
"응."
"잠버릇이야?"
"…뭐가?"
"누구 끌어안고 자는 거."
"……내가 너 말고 다른 누구 끌어안고 잔다는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요슈아가 퉁명하게 말했다가 도로 멋쩍게 웃는다. 미소를 보고서 제리도 따라 짧게 웃었다. "일어나 보면 베개든 인형이든 안고 있더라고. 그런데 네 방엔 네가 있으니까……" 요슈아는 그 부분에서 일부러 말을 끊어내며 슬쩍 미소를 짙게 입술 위로 올렸다. "널 안아야 했나보지." 제리의 얼굴이 파드득 다시 붉어졌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섭섭하게 말한다, 너…….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잊은 거지."
장난스럽게 붙인 뒷말에 제리의 얼굴이 아예 완전히 달아오르자 요슈아가 손을 뻗어 손등을 제리의 뺨에 댔다. 미지근한 손등 위로 뺨에 오른 열이 그대로 옮겨 붙는다.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은 요슈아가 품에서 다시 제리를 떨어뜨렸다. 둘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요슈아는 제리가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에 있는 책상 위의 음료를 가져왔다. 양손에 들린 것 중 캐모마일 티는 제리의 것, 헤이즐넛 카푸치노는 요슈아의 것이다. 제리가 다시 조금 속상한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식어서 맛없지." 요슈아가 재차 "괜찮다니까." 말하고 나서는 표정이 풀리긴 했지만. 이제 둘은 따뜻하지 않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한 모금씩 음료를 마신다. 식은 차와 커피는 그래도 그런대로 향만은 제대로 남아 있어 맛이 나쁘지 않았다.
"나 꿈을 꿨어."
요슈아가 불현듯 말했다. 제리는 옆에 한 뼘 정도의 거리만 두고 앉은 요슈아를 돌아봤다. 달콤하고 쌉쌀한 헤이즐넛 향, 다 빠진 거품, 요슈아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제리를 보지 않고 꿈을 다시 더듬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 말고, 저번에 내 방에서 네가 잠들었을 때 말이야." 제리는 모호하나 그가 언제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요슈아의 집 거실 소파, 제리가 요슈아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을 때. 그때는 애초에 자신이 먼저 잠들었던 것 같아 멋쩍은 것은 덤이다.
요슈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앞에서…… 상처를 냈을 때 말이야."
"……."
"우리는 이제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제리는 눈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의 컵을 잡은 흰 손등에 힘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아직도 두려워……."
"……뭐가?"
"모르겠어."
최악을 이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최악까지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모르겠어, 라고 단정했으나 제리도 요슈아도 서로의 마음과 스스로의 마음을 알았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어둠 속에 갇혀 서로를 찾고. 제리는 눈을 깜빡이다가 식은 차를 다시 내려놓고 요슈아를 향해 몸을 틀었다. "요슈아." 제리가 부르면 그가 답한다. "응." 눈을 바라보며……
그 순간 제리는 자신이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해낸다. 꿈속에서 어린 네가 손을 뻗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웃고 있었다. 기실 너는 항상 내게,
제리는 팔을 들어 요슈아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므로 포옹은 가장 가까운 이별이라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가장 가까운 이별과 식은 차와 한 번 잠들었다 깨어나도 가지 않는 긴 겨울밤, 그래도.
네가 해줬던 말처럼.
"괜찮아."
"……."
"응. 괜찮아."
유년에서 지금까지 왔듯 우리는 앞으로도 함께 늙어가며 길을 걷겠지. 그 사실만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동시에 우리를 위로한다. 제리는 그의 어깻죽지에 이마를 대며 그럼에도 웃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리고 우리가 어두운 길 아닌 밝은 데를 향해 걸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랬다.
가만히 안겨 있던 요슈아는 마치 잠버릇처럼 제리와 같이 팔을 들어 제리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는다. 그 역시 고개를 제리의 목덜미에 묻으며, "맞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밤이 길어 둘은 다시 잠들려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제리의 방 침대는 조금 좁았기 때문에 함께 잠들려거든 아까처럼 두 사람이 안은 채 자거나 아주 붙어 자야 했다. 제리는 아까도 품에 안겨 잠들었으면서 괜히 쑥스러워 "미, 미안," 이나 연발하고, 요슈아는 슬쩍 웃으며 "이제 내 잠버릇 알지." 벌써부터 제리를 안을 준비를 한다. 서로의 체온이 뭉근하게 몸에 눌러 붙고, 그럼에도 긴장되기는커녕 편안하다는 감각이 먼저 들었다.
제리는 땋은 머리를 풀고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이불을 끌어올려 요슈아의 어깨 위로 덮어준다. 요슈아는 이불에 제리의 얼굴이 가려지는 게 싫어 손을 올려 제리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도록 조금 틈을 낸다. 시선이 마주치면 정해진 규칙처럼 웃는다.
우리 함께하자, 여전히 이렇게. 깨어지지 않는 꿈이 밤이 지나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