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웨이 하이드리머
애니웨이 하이드리머

@juststayus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한 도시에는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번화한 도시의 거리와, 도로 양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이 보였다. 한 핫도그 푸드 트럭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그 냄새가 길 양쪽 인도를 따라 늘어선 수십 개의 다른 노점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와 섞였다. 차들은 계속 경적을 쉴 새 없이 울려댔고, 혼잡한 도로는 브레이크와 액셀을 반복하며 충돌을 간신히 피해대는 이들로 가득 찼다. 높은 고층 빌딩이 번화한 거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아래에는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상점들이 눈에 띄기를 간절히 바라는 광고처럼 밝게 번쩍였다. 최신 유행 팝송이 옷가게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울려 퍼졌다. 거리에는 버스킹을 하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그 정신없는 길거리 사이, 눈에 띄는 골목 하나가 있었다. 골목 안쪽에서 팝송과 어울리지 않는 록 밴드 음악―설명하자면 길지만 너바나부터 시작해서 핑크 플로이드, 도이즈까지 쉴 새 없이 말이다―이 물 흐르듯 계속 흘러나왔다. 소리의 출처는 방음 하나는 더럽게 안 되는 셰어 하우스였다. 건물 외관은 분홍색, 파란색, 녹색의 다양한 색조의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고 곳곳에 녹이 슬어 있었다. 타일 몇 개가 없는 옥상 때문에 햇빛이 투과되어, 거실에 기다란 조명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공용 거실에는 누런색 테이블 조명과 낡은 빈티지 가구들로 가득했다. 거실 가운데에 떡하니 놓인 붉은색 천 소재 소파가 있었고, 책과 잡지가 쌓여 있는 커피 테이블 위에 오래된 레코드 플레이어가 소음의 원인 같았다. 소파에서 잠든 회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가 움찔대다가, 얼굴 위에 올려둔 잡지를 끙 소리 내며 내렸다. 잠이 덜 깨 눈을 끔뻑대는 모습에서 아직 졸음기가 보였다. 남자는 충전을 까먹은 탓에 배터리가 육 퍼센트 남은 핸드폰을 비척비척 들었다. 그중 하나 있는 음성 사서함을 틀었다.

 

[요슈아, 너 진짜로 관둘 거냐? 이거 보면 연락해라. 꼭이다]
[네가 아니고 우리의 브레챠잖아 확실히 책임지라고]

 

익숙하게 귀를 건드리는 목소리는 분명 마츠의 목소리였다. 그는 별다른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핸드폰 전원을 꺼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요슈아는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용 거실의 왼쪽에는 주방이 있고, 중앙에는 묵직한 오크 테이블이 있었다. 으음. 낮게 웅얼거리며 요슈아가 일어나 주방 냉장고 앞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비닐 랩으로 감싸 놓은 토스트와 베이컨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2인분 같은 양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비몽사몽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욕실로 향해 이를 닦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의 회색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친 푸들의 털처럼 복슬복슬했다. 요슈아는 머리를 이리저리 손으로 다듬어 보다가,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아, 나왔구나."
"응? 제리, 언제 깼… 아니, 나간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방금 깼는걸."


제리는 여전히 부스스한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보며 전자레인지에서 노릇노릇하게 데워진 토스트와 베이컨을 꺼내 오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제리의 말이 사실인지 정말로 제리는 잠옷을 입은 상태였다. 요슈아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손잡이에 걸어둔 뒤 제리의 앞에 걸어오며 말했다.

"요리가 있길래 당연히 네가 해놓고 간 줄 알았어. 아니었구나."
"아, 예약 딜리버리시켰지. 골목 앞에 브런치 가게 생겼더라……. 삼일 정도 먹어보고 괜찮으면 계속하려고."
"에, 진짜 좋잖아. 그야 우리 둘 다 바쁘고."

제리는 요슈아 것을 꺼낸 다음 자기 것까지 데운 뒤에 자리에 앉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앉을 때까지 포크를 들지 않고 있다가, 제리가 앉고 나서야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서야 손을 움직였다. 식기가 접시와 닿으며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유로운―적어도 둘은 그렇지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에―식사가 이루어졌다. 요슈아가 먼저 식사 평을 말했다. 이거 괜찮다, 좋네! 제리도 맞장구쳤다. 응, 그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별 거 없는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 요슈아가 베이컨 한 입을 찍은 포크를 입에 넣으며 아침 날씨를 말하듯 태연하게 말했다.

"있지, 오늘 새 프로듀서가 소속사로 온대."
"……아. 그렇구나."
"음악은 못 하겠지만…… 클라이맥스와는 계약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응. 밴드는 그만두더라도 당분간 다른 활동은 해야 할 것 같네. 라디오라든가, 그런 것들."

제리는 그의 입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말을 실제로 듣자 기분이 묘했다. 바뀌는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토스트 한 조각을 작게 베어 물며 고개를 숙였다. 미소는 나오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결정된 사안은 아니었다. 아니, 맞던가? 제리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킬 수 없어 그저 흐트러진 채로 사고하기 바빴다. 요슈아는 일전의 사건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일을 반복했다. 식은땀과 붉은 방울을 토해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그는 제리가 싫다면 음악을 관두겠다 선언했지만, 제리는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저 그를 안아 어떻게든 잡을 수밖에 없었다. 천재. 그 수식어는 요슈아의 껍질을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의 내면을 더욱 약하고 뭉그러지게 했다. 그가 서서히 나약해져 갈 동안 제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옆에 머물러 주는 게 전부였다. 요슈아는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실제로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겨울 새벽에 일은 닥쳤다.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처럼 고요하고 별일 없이 흘러가던 하루였다. 제리는 여느 때와 같이 들뜬 요슈아의 목소리와 따뜻한 손의 온기를 느꼈다. 시부야역의 혼잡한 거리는 요슈아의 불안을 충분히 숨겨주었던 걸까. 이제 와 제리가 생각해 본들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의 집에서 나올 때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리는 오 분 정도 걷다가 다시 뒤로 돌아 골목길을 해쳐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무거운 발걸음이 낯설었다. 현관으로부터 열 걸음 안팎의 거리를 남겨 두었을 순간, 그는 문에 달린 손잡이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손대서는 안 될 뜨거운 납덩이처럼. 그는 추를 단 듯이 묵직한 구두 굽을 애써 땅바닥에서 떼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손잡이에 스페어 키를 꽂아 넣고 돌렸다. 천천히, 천천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언젠가 한 번 목도하였던 날카로운 파편들과 그가 평소 부르는 음보다도 좀 더 얇고 약한 신음.

제리가 현관 복도를 소리 없이 걸었다. 의도치 않은 고요한 방문은 요슈아의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찰나에 끝났다. 제리는 가늘게 베어진 손목의 상처에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졌다. 본능은 의식적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요슈아가 고통에 찌푸리던 미간의 힘을 단숨에 풀고 제리를 보았다. 서서히 새파래지는 안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웠다. 거꾸로 뒤집힌 노트북과, 엎어진 채로 바닥을 기어가며 천천히 덮는 커피. 요슈아가 무어라고 설명하려는 찰나 제리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방향에 마음을 맡기기로 했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그 방향에. 못의 울퉁불퉁한 단면이 단단한 나무를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한 번 깨어지면 모든 게 쉬웠다. 제리는 달싹거리는 입으로 내뱉었다.

 

"네가 이렇게 아프다면, 음악…… 그만두면 안 돼?"

 

연인의 기대를 배신한 것은 누구였는지 알 턱이 없었다. 제리도, 요슈아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이것이 최선이리라 당시에 생각하였다.

 

일은 생각 이외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요슈아는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에게 죄책감과 책임이 섞인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열 줄 이내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통보로 마무리 지었다. 판다 사장에게는 계약 상의 문제도 있으니 직접 찾아가야 했다. 사장실 안에서는 두꺼운 담배를 커다란 손에 쥐고 있는 판다가 요슈아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이건 계약 위반이다냐. 따로 대책은 생각해 둔 거냐? 홍보는 무뚝뚝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판다 사장은 수익만 내면 되는 거지? 그러면 방송 활동 같은 건 전부 참여할게. 공연은, 이번 활동에서 필참 공연은 전부 진행했으니까. 지장 없잖아."

 

홍보와 판다는 서로를 힐끗거렸다. 요슈아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다는 불이 붙은 담배 끝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 그와 몇 마디 말을 오갔다. 독대 면담 내내 요슈아는 눈가 아래 짙게 깔린 다크서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클라이맥스 레코드에 소속한 밴드에서 자진해 밴드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다들 음악을 집착적으로 사랑하니까. 그것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니까…….
요슈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마른 입술에 한숨을 묻혔다. 후회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숨소리였다. 복도 맞은편에서 투덜대며 걸어오던 츠유가 요슈아를 발견하고 반쯤 감긴 눈을 크게 떴다. 요슈아를 향해 오른손을 흔든 그를 본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오는 츠유를 향해 애써 들뜬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

 

"……유 군, 안녕! 어디 가?"
"아~ 판다가 불러서 잠깐 면담. 근데 요슈아, 안색 최악 아냐? 잠 못 잤어?"
"그… 런가? 조금 설쳤나 봐."
"분명 그렇다니까. 조심해. 우린 목이 생명이니까, 건강 관리는 필수라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츠유는 급하게 지나쳐 가는 요슈아를 보며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종종 안색이 안 좋을 때는 있었는데……. 오늘은 진짜 상태 엉망이네. 짧은 의문도 잠시 사장실에서 판다와 홍보가 다투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이크' 소리를 내며 서둘러 복도를 뛰어갔다. 복도의 코너 저편에서는 요슈아가 벽을 짚은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필시 이게 맞는 거라고 몇 번이나 새로이 다짐하며.

 

 

도피하듯이 떠나온―어쩌면 돌아온―미국에 둘은 아예 자리 잡았다. 음악과 관련된 물품은 기타 한 개를 빼고 전부 두고 왔다. 제리는 비행기 좌석에 등을 붙이고 앉아 창밖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요슈아에게 음악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충동적으로 내뱉었을 때 보았던 그의 표정이 제리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제리가 반투명한 창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직면할 용기가 있다면 진즉 요슈아를 향해 전부 충동이었노라 말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제리가 그 문을 두드리기에는 여전히도 겁이 났다. 먼지를 닦아내도 쌓이는 창고 구석의 골동품을 언젠가부터 손대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꺼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처럼. 요슈아가 제리를 마주 보았을 때 미소 짓지 않을 일말의 가능성에 관하여 생각하다가 제리는 의자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안으로 말려 들어간 어깨가 욱신거렸다. 요슈아는 천천히 맺혀가는 한 줌의 불안감이 더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빠르게 구한 셰어 하우스를 정돈하여 이삿짐을 전부 넣어놓자 둘이 살기에는 어느 한 명이 부족한 것처럼 텅 비었고, 셋이 살기에는 둘만의 물건이나 향기가 가득했다. 결국 둘은 조금 비싼 집값을 그대로 부담하기로 했다. 요슈아가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와 만날 일은 아예 없었다. 어느 날은 연락이 오거나 음성 사서함이 남겨져 있었지만, 요슈아는 자신의 상처투성이 손목을 덮었던 것마냥 핸드폰도 뒤집어서 덮어두었다. 제리는 아래를 향한 화면에 그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을 피했다. 두 명의 도피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밤. 새벽에 나온 제리는 부엌으로 향해 물을 따랐다. 미적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그는 한 손으로 머그잔 손잡이를 붙잡은 채 거실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풍경이라고 누군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세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그 한기에 짧게 한숨 쉬고서 구석에 놓은 기타 케이스를 곁눈질로 보았다.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케이스 앞에 섰다. 케이스에는 여러 모양의 방수 스티커와 기스 난 흔적이 눈에 띄었다. J 알파벳 스티커 두 개가 딱 달라 붙어 있어 제리가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자기가 웃은 게 놀라운 나머지 입을 가렸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더니 머그잔을 내려놓고 케이스 지퍼를 조용하게 당겼다. 검은 케이스 안에는 요슈아가 제리와 함께 보낸 어린시절부터 쓰던 어쿠스틱 기타가 있었다. 요슈아는 제리가 묻지 않았는데도 마치 해명하듯 이유를 천자락 덧대듯 먼저 말했다. 이건…… 너와의 추억이 더 깊은 물건이니까.
제리는 낡아서 상하기 직전인 기타 줄과 나뭇결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파 앞 테이블로 걸어가 스탠드를 켰다. 어두컴컴한 거실을 독차지한 제리의 숨결이 부드럽게 새벽 공기를 타고 흘렀다. 노란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 볼펜을 들어서 장 볼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꾹꾹 눌러쓰는 손에는 힘이 담겼다. 요슈아가 그 목록을 보게 되는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요슈아는 예약 딜리버리에 맞춰 배달 된 브런치를 먹고, '플레처'라는 새 프로듀서의 오더에 따라 몇몇 방송 스케쥴을 나가고, 다시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제리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늘었다. 더 이상 밴드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요슈아의 발걸음이 들리자 제리는 급하게 케이스 앞에서 물러나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더 일찍 온 것 같아. 제리의 말에 요슈아가 등 뒤에 마련한 작은 꽃다발을 건넸다. 시야를 뒤덮는 하얀 장미의 행렬과, 그에 뒤따르는 짙은 꽃향기.

"이게 뭐야?"
"요즘 직장에서 고생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위로할 수 없으려나~ 싶었거든. 기뻐?"
"당연히 기쁘지! 고마워…… 바쁠 텐데."

제리가 자연스레 살구색으로 물드는 볼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요슈아는 언제나 갑작스러운 선물이나 이벤트를 좋아했다. 제리가 예상치 못한 채로 눈썹을 위로 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과 힘이 느슨하게 빠진 푸슬거리는 웃음소리가 좋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꽃다발을 품에 가득 안아 든 모습을 보다가 두 팔을 벌렸다. 제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응?"
"착한 남자친구를 안아줄 기회 줄게."
"기회 포기하면 어떻게 돼?"
"그러면…… 착한 남자친구가 슬퍼하겠지."

제리는 웃으면서 꽃다발을 한 팔로 든 채, 그 상태로 요슈아를 끌어안았다. 그가 지금 옆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빠른 심장 고동이 꽃다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렸다. 요슈아는 팔을 좀 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제리의 머리카락이 요슈아의 목덜미에 문대어졌다. 좋아? 응, 좋아. 요슈아의 짤막한 물음에 제리 또한 한 단어로 답했다. 불안을 애정으로 숨겨 덮은 온기가 유난스럽게 뜨거웠다. 요슈아는 작은 허밍조차도 하지 않았다. 꽃다발의 장미가 두 사람의 품 안에서 조금씩 형태를 뭉그러트렸다. 꽃잎 수십 장이 겹쳐져 만들어진 장미조차도 쉽게 형태를 잃어가는데 사람은 심장 한 개를 가지고 어떻게 이리도 올곧은 척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요슈아는 왼손 약지에 자리한 은빛 반지에, 빠진 타일의 자리에서 설탕 가루처럼 내려와 쪼아대는 빛결을 제리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노래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에 안심했고, 실망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요슈아의 목소리 끝이 피아노 건반을 약하게 누르듯 미세하게 떨렸다. 제리는 자기 등을 누르는 손결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휩쓸렸다. 하지만, 또 한 번 충동이 너를 상처받게 하면 어떡하지. 건넬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피를 대본 적도 없는 입술 끝에서 철 맛이 났다. 새하얀 와이셔츠가 구겨졌다.

 


"요슈아. 혹시 놀러 나가지 않을래?"
"엇, 응? 진짜?"
"오늘은 스케쥴 없다고 해서. 바쁘면 괜찮아."
"아냐! 안 바빠! 진짜로 하나도 안 바쁘……!"

 

방문을 두드린 뒤 반쯤 열어 고개를 빼꼼 내민 제리에게 요슈아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잡지를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발목과 목선이 훤히 드러나는 편한 복장이었다. 방문을 다시 닫으려는 제리를 붙잡기 위해 벌떡 일어나 손잡이를 움켜쥐려던 그는 발을 헛디디고는 얼마 되지 않는 방문과 침대 사이를 앞뒤로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문 끝에 발을 찧었다. 아…… 아야…. 요슈아가 관성적으로 침대에 다시 앉아 발을 감쌌다. 제리는 요슈아를 닮은 이불 위로 다이빙하듯 앉은 그를 보며 웃었다. 요슈아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거 진짜 아프다구."
"알아, 알아. 귀여워서 그랬어."


제리는 아예 방문을 열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요슈아는 자연스럽게 침대 중앙에 붙어 있는 제 몸을 왼편으로 조금 옮겼다. 제리는 넉넉하게 자리가 남은 오른쪽에 앉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에 우리 본격적인 데이트는 많이 못 한 것 같아서. 같이 보내는 시간은 늘었는데, 그렇지. 요슈아는 이불 위에 얹은 제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손마디 사이를 파고들어, 위로 깍지 끼었다. 회색 홍채에 살결의 색깔이 겹쳐서 오묘한 색상이 담긴 채로 변했다. 제리는 그의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그렇네……. 우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첫 데이트도 아니고."
"요슈아, 무리하는 거 아니지?"
"무슨! 그럴 리가. 애초에 너랑 함께 있는 건데 무리일 리가 없잖아."

음악을 그만두었다고 한들 요슈아는 대부분 여전했다. 활기찬 목소리로 이런저런 것을 내뱉으며 손등을 문지르던 요슈아는 이내 일어났다.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나갈까, 데이트하러. 제리는 아직 땋지 않은 머리카락이 앞을 간지럽히는 듯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일어섰다. 그래. 두 사람은 조금씩 맞지 않는 미묘한 기류를 조금씩 좁혀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요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면서 바지 주머니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플레처로부터의 전화였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요슈아가 전화를 받았다. 받지 않고 싶었지만.
허무맹랑한 말과 함께 어쨌든 긴급한 스케쥴이니 빨리 오라는 소리가 쾅쾅 귓가를 때렸다. 요슈아는 어떻게든 그것을 캔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등 뒤에서 제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핸드폰을 든 손을 허리 아래로 내리며 등을 돌렸다. 제리가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채로 서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머리를 홱홱 저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무어라 뻐끔거리며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가 봐. 둘만이 있을 때 사용하는 일본어 발음은 선명하게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로맨스 소설의 도입부는 아니었다.

 

플레처의 부름에 요슈아는 라디오 녹음 현장에 들어섰다. 아직 온 에어 버튼이 켜지기 전이었다. 겉옷을 챙겨 입던 그는 다행스럽게도―새 프로듀서이자 어린 예술가를 무시하는 남자의 기준서―얼마 걸리지 않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플레처는 요슈아를 보자마자 거만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지 않고 손가락을 계속 두드렸다. 요슈아는 촬영장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따끔거리는 손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플레처는 그의 상태를 위아래로 훑고서는, 쯧쯧대며 혀를 찼다. 그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남자의 지시에 따라 녹음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스탠바이가 몇십 초 뒤에 이루어지고, 요슈아는 급히 통지받은 탓에 외우지 못한 오프닝 멘트를 적당히 따라 했다. 라디오 MC는 요슈아를 소개하며 한없이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방긋거렸다.
MC의 진행은 물 흐르듯 진행되어 갑자기 찾아온 요슈아도 무리 없이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요슈아는 라디오에 들어온 사연을 읽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역할이면 끝이었다. 아까부터 그의 속이 좋지 않았다. 사연은 다양했다.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신청한 부드러운 발라드, 길 가다가 도둑을 만났는데 가까스로 도움을 받아 그 행인을 꼭 찾고 싶다는 이가 신청한 댄스곡, 그런 사소하고도 동시에 큰 사연들을 요슈아가 흔들림 없이 읽었다. 그러다 한 사연 카드를 건네받은 순간 그가 멈췄다. 한 뮤지션의 사연이었다. MC가 요슈아 씨, 라고 세 번쯤 부르고 나서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아, 응, 응……. 사연 읽을게. 20살 C 씨의 사연입니다.
요슈아의 낯빛은 사연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어두워져 갔다. 흔한 뮤지션의 고난이었다. 너무나도 음악을 하고 싶지만, 재능이 없어 주변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언제나 음악을 향해 가 있다. 그러한 젊은 예술가들이 할 법한 보편적인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요슈아가 사연을 읽는 사이사이마다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따금 자신과 비슷한 문장이 나오고는 하면, 비어 있는 왼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눌렀다. 상처로 가는 습관적인 도피가 잦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끊어 내며 겨우 사연을 끝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신청 곡을 보자마자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MC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청 곡에는 브레이브 차일드의 곡명이 쓰여 있었다. 게스트가 출연한 때에 그 게스트의 노래가 있는 사연을 꼽는 건, 지극히도 당연하고 잦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C라고 칭해진 누군가에게서부터 책망받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떠올리고 써내렸을 곡 제목이었다. 그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은 힘겹게 내뱉어진 제리의 목소리였다. 그는 제리가 줄 이어폰을 꽂고 MP3 플레이어에 그의 노래를 담아 듣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 좋다며, 왜 좋은지, 가사는 또 어떤지 하나하나 상냥하게 읊조리며 말해주던 때였다.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간지럽히면 제리는 요슈아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한 소절을 불러달라 청했다. 그러면 요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목을 가다듬고 한 소절씩 불러나가기 시작했다. 상냥하게 허공을 두드리는 음계는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꽃봉오리처럼 피어났다. 제리는 요슈아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색깔의 꽃을 사랑했다. 요슈아는 제리가 포기한 꽃내음과, 자기가 놓은 꽃잎의 모양을 느지막이 기억해 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추억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일은 아니었다.
MC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그가 녹음실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플레처를 포함해 조정실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시선이 요슈아에게로 향했다. 그가 각종 회전 다이얼과 믹싱 콘솔 쪽을 눈으로 훑더니, 녹음실 안으로 송출되는 마이크 버튼을 OFF로 바꾸었다. 플레처가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이제 그만 둘 거야."
"뭘 그만둬?"
"날…… 속이는 거."

 

요슈아는 옷깃 맨 위까지 전부 잠가둔 단추 한두 개를 풀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음악을 관둔 요슈아라니, 계속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속으로 단언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다시 마음을 바로잡은 것만으로 요란하게 가슴이 뛰면 안 되었다. 플레처는 그가 어떤 연유에서 이렇게 심경을 바꾸었는지 대충 짐작했다. 그는 수익을 창출하는 엔터테이너에게 어떤 야심이나 자아를 바라는 성정이 아니었다. 플레처는 한숨 쉬며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며, 다시 녹음실 안으로 들어가라 명했다. 하지만 요슈아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이였다. 제 선택이 틀릴까 두려움을 동반한 고양감에 떨었으며,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 더욱 쉽고 가슴이 뛰었다. 요슈아의 모든 세포가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붉게 물든 손등뼈와 귓불이 익어갔다. 스튜디오 녹음실 안쪽 MC는 이제 참견하기도 지친 듯 요슈아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밴드 한 번에 실패, 두 번에는 포기, 세 번에는 뭐지. 그런 타이틀을 얻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건 지금 눈을 감고 MC의 옆에 앉아 신청 곡을 틀어달라 말하면 언젠가 보게 될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그것만큼은 정말로 싫었다. 요슈아는 꿈쩍도 하지 않는 늙은 프로듀서에게 그는 무력감을 느끼는 대신 떨리지만 단언하듯 말했다.

 

"역시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돼."

 

요슈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양손으로 이마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를 감싼 그는 한 번 길게 마른세수하고서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창문 바깥에서 들리는 달고 쓰던 소음들이 전부 요슈아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창문과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슈아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렇게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불안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그의 구두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도 몸 안의 모든 것이 움직이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부조리할수록 빛나는 불빛은 매섭게 그를 비추었다. 플레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침음을 냈다. 플레처는 품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길고 가는 궐련 끝에 붙은 불꽃이 반딧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플레처는 필터를 입에 머금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담배를 입술 사이에서 꺼낸 뒤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래서…… 도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요슈아는 플레처의 질문에 걸음을 주춤거렸다가, 이내 확신이 담긴 어투로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음악을 할 거야."

 

플레처는 프로듀싱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댔다. 라디오 MC가 엉성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계속 진행하냐는 물음을 제스쳐로 보냈다. 플레처는 구두로 바닥을 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스튜디오 녹음실에 전달되는 마이크 버튼이 다시 한번 OFF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요슈아를 향해 말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투였다.

 

"넌 지금 네가 얼마나 애처럼 구는지 몰라……. 너 같은 놈들을 내가 잘 알지. 지금 당장은 시시한 감정에 휘둘리다가, 나중에 와서 다시 받아달라고 할걸."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요슈아는 한순간에 정점을 찍은 감정을 다스렸다. 짧은 남자의 말을 몇 번 되새겼다. 화만 내서는 언제까지고 그대로였다. 하고 싶은 말들을 가다듬어 정제된 언어로 내뱉었다. 그 시시한 감정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거야. 그러니까 바뀌는 건 없어. 요슈아는 그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돌아서 왔는지 생각했다. 주변에서 그를 칭하던 수많은 호칭이나, 유명세에 휩쓸려 본인이 정말 특별하다고 자부했다. 기다란 실로 만들어진 원형의 길을 계속 돌며 답을 찾았다. 애초부터 길은 그의 옆에 바로 나 있었는데. 붉어진 눈가를 마구 비빈 뒤, 플레처의 대답을 듣지 않고 요슈아가 먼저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 조용해진 스튜디오는 애써 끌어 올린 분주함마저도 사라진 상태였다.

 

요슈아는 셰어 하우스에 급하게 들렸다. 빗방울이 세게 그를 때렸다. 점점 빗발이 거세져 추위가 초겨울에 비슷해질 정도였다. 벅차오르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건가. 담벼락 너머 고양이 우는 소리부터 시작해 어린아이의 떼 쓰는 소리, 풀잎들이 바르작거리는 소리, 물웅덩이를 밟는 단촐한 신사의 첨벙이는 발소리, 모든 게 요슈아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스튜디오의 볼륨 버튼을 최대치로 올린 듯한 감각이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요슈아는 젖은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떨리는 손이 계속 헛손질하며 열쇠 구멍에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딱 맞게 들어갔다.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풍경이 반겼다. 똑같은 집안의 풍경인데도 불구하고 이전부터 계속 오묘하게 느껴지던 한기가 사라진 것마냥 온화했다. 마룻바닥을 신발로 밟아서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 케이스를 집어 등에 메었다. 그리운 묵직함이었다. 노래를 부른지는 반년이 넘었고, 기타를 친 지는……. 요슈아의 기억으로는 가늠이 가지 않는 세월이었다. 이따금 소타와 반주 리듬을 맞추기 위해 꺼내 와 합주해 본 것 빼고는.


"나도 참…… 하하…. 바보 같다니까, 진짜…"


스스로도 영 황당한 사고 흐름에 요슈아의 입에서 바람 빠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플레처의 말대로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가 아무 일도 없던 척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해서,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는 일을 해도 되었다. 혹은 다른 방송에 나와서 브레이브 차일드 시절 있었던 유쾌한 일화를 풀어내며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시즌의 계약 기간을 두루뭉술하게 채울 수도 있었다.
그날을 떠올렸다. 현관 복도 가장자리를 돌아서서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며 체념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던 제리의 목소리를.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해놓고서 피하려는 자신이 나약하고 한심해서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헛웃음 끝에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요슈아가 기타 케이스의 줄을 꽉 잡고, 빗발치는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쏟아지는 빗방울로 인해 한참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요슈아가 셰어 하우스로 들어서기 이전 단 몇 분의 차이였다. 그런데 이미 충분히 거리는 일사불란한 수준의 차이가 눈으로 보기에도 훤히 났다. 무채색의 우산들이 부딪치며 흑백 콜라주를 이루는 듯했다. 피곤함에 찌든 다크서클을 주체 삼아 움직이는 이들의 발걸음은 지나가는 순간만 모아 담아도 긴 나날을 그렸다. 요슈아는 숨을 헐떡이며 거리 중앙으로 향하며 인파 사이를 헤쳤다. 낡은 부츠가 길바닥의 물웅덩이 사이로 튀어나오고, 얇은 자켓 하나만을 간신히 걸친 와이셔츠가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낡은 페도라 모자로 눈을 가려 보이는 풍경은 오로지 한산하게 옹기종기 낀 채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다리뿐이었다. 쇼핑 거리의 끝에서 보이는 포장도로에선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 사이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젖은 포장도로에 눈부시게 밝게 반사되어 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매서운 칼날에 스치는 것처럼 힘겨웠다.
매연에 목이 타들어 가는 듯이 따끔거렸다. 모자의 챙 아래로 머리카락을 집어넣은 후 시야를 어지럽히는 물방울만 간신히 닦아냈다. 그럴 때면 잠깐 멈춘 요슈아는 네온 불빛으로 빛나는 간판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행인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가 멈춰선 탓에 뒤에서 걷던 누군가가 기타 케이스 윗동에 부딪혔다. What the…. 요슈아는 뒤에서 욕설을 읊조리는 이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움직여 지나갔다. 저 너머의 도로 신호등이 붉은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는 순간, 마침내 요슈아는 발을 거리 중앙에 붙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하늘은 도저히 맑아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굽 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기타 케이스를 두드리는 빗방울이 그를 재촉하는 듯했다. 그는 젖은 콘크리트 냄새를 마시며 호흡을 정돈했다.
어릴 적에는 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때라 해 보았자 제리와 함께 했던 짧은 시절이었다. 이따금 서로가 사는 도시에 놀러 가면 귀신같이 하늘은 어둠을 그리며 비를 쏟아냈다. 요슈아는 제리에게 우비를 입히고, 밖으로 꼭 나갔다. 반투명한 우비는 아래 입은 옷의 실루엣을 대부분 그대로 보여줬다. 둘이 사는 세상은 현실이었기에 로맨틱한 배경 음악이나, 갑자기 몇십 명이 도로로 달려들어 플래시몹 댄스를 선보이는 일은 없었다. 즐거운 일도 딱히 없었다. 그래도 어깨를 감싸는 차갑고 한기 서린 일정한 감촉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레어서 발을 맞추고 놀았다. 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옛날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필시 과거가 노스텔지어로 덧씌워져 아름답게 보이기만 하는 탓은 아니었다.
요슈아는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를 두리번거리고, 거리 중앙에 정해진 간격으로 배치된 나무와 그 아래 벤치를 쳐다보았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벤치에 우비를 입은 채 잠시 시간을 죽이는 이들에게 요슈아는 관심 외의 인물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탓에, 더더욱. 그는 잠시 떨리는 손마디를 느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차가운 호흡, 귀에 전해져 오는 고동 소리.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에 빗방울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한가득 맺혔다. 노래를 부르지 않은지도 반 년이 넘게 지났다.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사방에 노이즈가 껴 시야가 흐려지려는 순간, 요슈아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아 과거를 더듬었다. 그의 지나온 나날 속 존재했던 제리의 모든 흔적을. 그러자 잠시나마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호흡이 마침내 진정됐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길가에 내려놓고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꺼내자 그의 눈동자가 수축하였다가 돌아왔다. 음악을 그만두기로 한 뒤에, 요슈아는 일부러 기를 쓰고 기타를 쳐다보지 않았다. 기타리스트는 따로 있었지만, 음악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인다면 다시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먼지가 쌓여 있어야 할 기타였다. 결심한 이후로는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으니까.
마모된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기타는 그 확신을 배신했다. 기타 표면 나뭇결의 부드러운 촉감이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은 것 같았다. 현은 반짝이는 금속 프렛 위에 단단히 조여진 새 제품이었다. 요슈아의 마스크 안에서 땀과 흘러 들어간 빗방울이 섞였다. 그는 그것을 손질할 수 있는 유일한 이를 생각해냈다.

 

"너는 항상 날 봐주고 있었구나."

 

요슈아가 마른 웃음과 함께 자조했다. 목소리가 흐렸다. 정작 당사자는 듣지 못할 혼잣말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흔들리던 한 점의 망설임까지도 전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타를 메고, 심호흡한 뒤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건 전부 너를 위한 거겠지.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에서 몸을 일으켜 화음을 빠르게 조율한 뒤 마스크를 벗고 목을 가다듬었다. 쓰고 있던 모자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양에 가까운 회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 어린아이처럼 순정을 잃지 않은 눈동자. 그를 구성하는 모든 상냥한 순수함의 증명. 아주 일부만이 그를 눈치채고 소곤댔지만, 그 광경은 요슈아의 신경 밖이었다. 그는 터질 듯이 요란한 심장을 입 밖으로 꺼내야만 했다.

 

작고 재잘대는 듯한 목소리가 가사를 읊조리듯이 노래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에서 진동하는 줄 하나하나를 다시 한번 느꼈다. 선이 얇으면서도 강한 음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 한두 명이 그를 주목했다. 몇몇 걸음걸이가 슬로우 모션을 걸듯 느려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에 줄을 튕기는 손가락은 계속 미끄러지고, 오랫동안 손대지 않아 녹슨 동작에 연주는 엉성했다. 거리를 울리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예전을 그리워하는 입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음이 거칠고 생생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지. 제리. 입과 손이 저절로 움직여.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짓에 따라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가, 뒤로 젖혀졌다. 빗방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튕겨 나왔다. 높게 찌르는 음과 함께 요슈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사람들의 위에서 끊임없이 내리던 비가 한두 줄기씩 주춤댔다. 이것이 드라마라면 분명 최종화. 이것이 영화라면 분명 클라이 맥스. 이것이 노래라면 마지막의 브릿지 부분……. 우스운 비유를 머릿속에 품은 요슈아의 머리 위로 회색빛 세상에 균열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 조금 전까지 햇빛을 가렸던 뭉게구름과 그림자 사이로 태양이 소심하게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었다. 푸른 조각이 퍼즐을 맞추듯 재배열되어가고, 회색빛으로 생기를 잃었던 거리 위로 조금씩 햇살이 내리쬐며 따스한 빛깔로 물들었다. 무거운 커튼 뒤의 세룰리안을 드러내는 것처럼 푸른 결점들이 줄무늬를 이루었다. 이슬비는 부드러운 안개처럼 옅어지다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완전히 증발하여 도시 전체를 비추었다. 마침내 거리를 가득 덮던 어둠이 물러나자 눈을 질끈 감은 채 필사적으로 음을 내뱉던 요슈아도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아주 짧은 순간 숨을 멈췄다.

활기찬 옷차림이나 페인트 얼룩이 묻은 너덜너덜한 셔츠를 입고, 누군가는 직장으로 달려가면서도 그를 향해 계속 힐끗거리고, 일부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는 커피를 든 채 그를 가리키고 수다를 떨었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부터, 누군가는 핸드폰을 꺼내 요슈아를 피사체 삼아 영상을 찍고 있었다. 전부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순간이었다. 낯선 이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누군가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그 순간. 입이 벌어지면서 구름을 삼킨 듯 가슴이 둥글게 팽창하는 듯했다. 주춤대던 목소리는 턱이 사방이 기울어질 때마다 서서히 웃음기를 머금었다. 새벽 한 시에 오선보의 음표를 찢어내던 순간 밀려오던 파도를 기억했다. 입술을 깨물면 나오던 피의 철 맛을 기억했다. 사랑하는 것을 깨워 쫓아내던 때를 기억했다. 제리가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듯 더욱 그을음을 떠올렸다. 아팠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빛난다는 걸.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석양을 기다리며 서서히 주황빛을 끌고 오는 태양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크게 기타 줄을 튕기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단숨에 내뱉어 끝을 맺었다. 거리를 뚫는 높은음이 갈무리되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벅찬 심장을 진정시키려 호흡했다. 몇 초 동안 거리가 조용했다. 그러다 박수 세례가 나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느끼자마자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요슈아는 이제야 그 쓰라리고 상처 깊었던 기억을 입 맞추어 떠나보내게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제리는 파토 난 약속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들어온 업무 처리 요청에 한숨을 쉬며 자책 섞인 미련을 한창 곱씹었다. 차라리 일하는 편이 좋았다. 바쁘면 괜한 생각에 깊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두세 시간 정도 일한 뒤에 보고를 마친 그는 집 앞 현관에 서서 스페어 키를 꺼냈다. 예기치 못하게 쏟아진 비 탓에 제리는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다. 집에 들어가면 곧장 욕실로 향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실 불이 전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제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불쑥 확인했다. 요슈아가 참여한 라디오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먼 시각이었다. 그는 설마 싶은 마음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거의 똑같이 축축하게 젖은 요슈아가 그의 방문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제리의 인영을 보고 나아가는 걸 멈췄다.


"제리."
"요, 요슈아? 무슨 일이야?"
"…저기, 들어 봐. 꼭 들어줘야 해."

 

그는 요슈아의 필사적인 말에 고개를 어렵사리 끄덕이며 긍정했다. 젖은 몸체가 거슬렸지만, 그것보다도 몸도 약한 그가 쫄딱 젖은 모습이 신경 쓰였다. 그는 제리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남겨 두고 정지했다. 창밖에는 이십 분 전 그친―멀고 먼 제리의 근무처는 야속하게도 편도로 사십 분 정도 걸렸다―비로 인해 밝은 햇빛을 드러냈다. 제리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에 이별을 고할 수 있는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요슈아는 전혀 제리가 생각지도 못한 문장으로 운을 띄웠다.

 

"다시는 음악 안 한다고, 너와 약속했던 거 있잖아."

 

요슈아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고민하는 듯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뻐끔, 입이 한번 작게 열렸다가 다물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천천히 창문 너머로 먼 곳을 바라보듯 움직였다. 그 눈매가 무언가 그리운 풍경을 가늠하는 것처럼 가로로 길게 가늘어졌다. 입술의 틈새가 벌어졌다. 그리고 쓰게 웃는 미소를 제리에게 건넸다.

 

"―미안해. 거짓말이 되어버렸어."

 

제리는 그의 얼굴에 잠시 어두컴컴한 후회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기타 케이스의 줄을 질끈 쥐는 요슈아의 손등에 핏줄이 강하게 드러났다. 한쪽 입꼬리만을 엉성하게 올려 만든 미소는 한없이 무너질 것처럼 가파르고 조급했다. 거짓은 아니었지만, 태연함 또한 없었다. 빗방울에 젖은 눈꺼풀이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진한 검은색을 띤 채 깜빡거리며 떨었다. 흠뻑 물든 와이셔츠 아래가 초라하게 맨살을 내비쳤다.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마음을. 이 고동을. 이 감정을. 요슈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심정을 제리에게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소녀의 뭉그러진 심장 모양처럼. 호밀밭을 헤매는 순수의 끝처럼. 그 비 오는 거리에서 반년도 넘는 시간 만에 입을 열어 노래한 순간, 젖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관성을 따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제리가 먼저 말문을 텄다.

 

"요슈아?"

 

침을 삼켰다. 본능을 삼켰다. 마음을 삼켰다. 고개를 든 요슈아가 호소하듯 와이셔츠의 가슴께 부분을 꽉 잡고 무너질 것처럼 토해냈다. 한 줌의 작고 낮은음이 아주 느리게 재생되었다. 제리는 그 음을 듣기 위해 앞으로 발걸음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리며 움직였다.

 

"이러고 싶지 않았어. 정말로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런데도 노래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알아, 내가 바보 같다는걸."

 

제리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그는 부드러운 연인의 손짓에 뺨을 기대었다. 차갑고 축축한 뺨은 지나치게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요슈아의 은빛 눈동자에 새겨진 상흔이 반짝거리며, 그에서부터 작게 여위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여윔이 그를 감쌌다. 제리는 음표가 뾰족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요슈아의 살은 무척 여려서 그것을 끌어안았을 때 한없이 상처 입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요슈아가 안고자 하는 건 언제나 오선보에 찍히는 검은 잉크 자국들이었다. 접촉의 순간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요슈아의 붉은 눈가를 제리가 쳐다보았다.
제리와 시선이 부닥치는 찰나에 요슈아가 그의 손목을 두 손 사이로 밀어 넣고, 약한 힘을 주었다. 차가운 셔츠 소매가 제리의 손목에 닿아 마구 비벼졌다. 제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를 둥근 눈으로 응시했다. 요슈아와 제리는 서로를 한순간도 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증오나 경멸만이 사람을 해치고 찢는 감정은 아니었다. 가끔 누군가의 다정함은 슬픔과 공존하였다. 요슈아의 말에 이번엔 제리가 할 말을 찾는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그의 앞에서만 서면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헤매는 미아가 되는 기분이었다. 망설임을 감싸 한 문장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넌 늘 아파하잖아…."
"네 탓이라고 생각해? 이번에도?"
"아니야. 알아. 전부 다."
"플레처가 그랬어. 내가 지금 시시한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고."

 

요슈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복부가 팽창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하늘을 가린 먹구름 때문에 멎지 않는 습기를 입안으로 강하게 집어넣는 듯한 동작이었다. 플레처를 입에 올리는 잠깐의 억양이 거세졌다. 제리는 그 프로듀서가 설마 거기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놀란 탓에 손목 근처의 혈관에 긴장이 도사려,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요슈아는 눈치를 챈 채로 힘을 느슨하게 하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내가 정말로 혐오스러운 건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였어. 어떤 마음으로 네가 내게 음악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한 건지…… 잘 아니까. 제리 네가 안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요슈아는 미약하고 나약한 심정에 몸을 맡겼다. 한 발자국 멀어진 걸음은 두 발자국 떨어지고, 세 발자국에 다다랐다. 거리가 멀어지는 한순간마다 요슈아의 몸이 느리게 흐트러졌다. 제리는 그로 인해 축축해진 자기 손목 부근과 요슈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요슈아가 들뜬 목소리로 읊어주었던 수많은 보컬리스트가 생각났다. 폴 매카트리, 존 레논, 프레디 머큐리, 로저 달트리…. 그가 되고자 바랐던 이들을. 입을 다문 채 요슈아의 눈동자를 마주 보려고 제리는 애를 썼다. 고개 숙인 요슈아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리. 나는 네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어서 선택한 거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그래서 그냥 내키는 대로 해버렸어. 플레처의 말이고 나발이고, 전부 무시하고. 거리로 나가서. 기타 하나를 들고…… 계속 노래했어. 요슈아는 날카롭게 정제되지 않은 자신의 날것을 천천히 약한 껍질로 덮었다. 핏방울에 그을어진 흉터가 따끔거렸지만, 불손한 생각보다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관해 전해주고 싶었다. 요슈아의 젖은 머리카락이 그가 고개를 흔들면서 헝클어졌다. 멀어졌던 세 걸음을 그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깨달았어."
"……뭐를?"
"네가 내 음악을 들어주는 게 좋아. 내가 널 생각하며 노래 부르는 게 좋아. 널 위해 음악을 만드는 게 좋아. 노래하는 날 사랑해 주는 네가 좋아."

그 보컬리스트는 마침내 정면을 똑바로 본 채 자신의 연인에게 고해했다.

 

"이게 나의 본망이야.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 있어 줘."

 

제리는 더할 나위 없이 수줍고 고양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가 노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확신했다. 제리의 대답 또한 정해져 있었다. 당연하지. 끌어안은 품이 지독하게 따뜻해서 요슈아는 얼굴을 한참 동안 묻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일어났을 때 요슈아는 이미 예견된 야단법석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핸드폰 화면에 미친 듯이 쌓이는 플레처로부터의 부재중 통화나, 가까운 지인으로부터의 안부 문자. 더 나아가 밴드 시절 팬이었던 이들이 보내는 기다란 팬레터들. 그는 미리보기로 띄워진 것만 읽어도 날밤을 샐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투명한 핸드폰 케이스를 위로 한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공용 거실에는 이미 제리가 먼저 나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흠뻑 젖고 돌아온 덕분에 요슈아가 에취, 하고 짧게 기침했다. 몸이 으슬으슬하니 몇 초 고민해 보지 않아도 감기였다. 열이 오르지 않았으니 며칠 안 가 사라질 듯한 정도였다. 빳빳하게 마른 흰 티셔츠를 입고서도 몸을 떠는 걸 본 제리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괜찮아? 역시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이 정도는 괜찮아. 너는 날 너무 애처럼 보는 면이 있어. 제리도 알지?"
"애 맞다구. 내 속만 썩이고."
"알았어. 용서해 주세요, 누나."

 

요슈아는 언제 풀 죽었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제리는 어느새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린 요슈아를 빤히 보다가, '콩' 소리가 나게 이마에 한 대 딱밤을 때렸다. 요슈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 제리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서 잠깐 말이 없다가 본론을 꺼냈다. 정말로 괜찮겠냐고. 요슈아는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아래로 향해 양쪽 허리를 짚었다. 솔직히 말해……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반년 동안이나 플레처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당분간 메이저 진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지도. 거기까지 말한 그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살짝 굽어 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태의 심각성을 읊던 모습은 어디 가고,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도 후회 안 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지금까지도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에 제리가 눈을 크게 떴다. 멍하니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셰어 하우스의 바깥에서는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주택 거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새가 재잘대듯 사방을 비추는 햇볕은 따뜻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요슈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리는 자신이 그에게 해준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요슈아는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별빛과 햇빛의 조각이 동시에 가득하게 차 있어, 그의 앞에 어둠이 한두 개 생긴들 다른 빛이 작고 무거운 고동을 울리며 맥박했다. 그러니 그의 유성이 꺼질 일은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는 봄의 따스함에 몸을 기울였다. 제리는 별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제리의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가 요슈아의 손목을 끌어당겨 잡았다.

 

"다시 후회하게 된다면, 내가 잡아줄게."

 

요슈아는 반대쪽 손으로 그의 팔뚝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제대로 잡아주어야 해. 제리는 산들바람이 입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잘게 미소 지었다. 잠깐 나갔다 올래? 저번에 우리…… 결국 못 나갔잖아. 요슈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아이가 세우듯 놀러 나갈 계획을 세울 동안, 플레처는 도저히 전화를 받지 않는 요슈아로 인해 이마를 짚고 히스테릭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모자를 쓰고, 혹시 몰라 평소 입는 옷과는 조금 다르게 입었다. 가끔 입는 검은 터틀넥 위로 링 목걸이와 하얀 단추형 자켓, 굽 없는 샌들. 제리는 쇄골이 드러나는 널찍한 품의 검은 투피스 원피스를 입은 채 나갔다. 요슈아는 핸드폰을 들고 나가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나가 제리를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떤 봄의 순간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기쁘기도 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먼저 현관을 나서 제리가 나온 뒤에 문을 닫았다. 요슈아는 간질거리는 속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꺼낼지 한참 고민하고는, 웃음기가 담긴 어투로 물었다.

 

"기타 말이야."
"아."
"그거, 전부 네가 손질해 주던 거… 맞지?"
"……내 입으로 말하면 부끄러워."

 

요슈아는 볼에 홍조를 띤 채 한껏 올라간 어깨를 감추지 않았다. 헛기침을 하며 제리의 손을 마주 잡고 이어 말했다.

 

"그걸 발견했을 때, 확신했던 것 같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노래하지 못할 거라고. ……네 덕분이야."
"나랑 반대네. 난, 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야."

 

제리는 조곤조곤 설명하며 품 안에서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 요슈아의 앞에 건넸다. 요슈아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포스트잇을 건네받았다. 살 목록: 마스킹 테이프, 핑거보드 관리용 오일, 새 기타 줄. 그가 더듬더듬 목록을 읽으면서 점점 환해지는 요슈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힘을 주어 엮은 손마디를 건드렸다. 음악의 음 자도 모르는 제리는 트러스 로드를 조정하던 도중 손가락을 베이는 일도 잦았다. 요슈아는 보컬리스트인데도 불구하고 언젠가 다시 노래하게 된다면 그 기타를 가장 처음 먼저 손대리라는 무의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매일 새벽이나, 제리가 퇴근한 뒤 요슈아가 보이지 않으면 그는 곧장 기타를 꺼내 먼지를 닦았다. 전체적으로 교체할 때가 되면 그렇게 도구를 사 와서 손을 보았다. 처음 한두 번은 기타 꼴이 엉망으로 변하기도 했다. 괜한 일은 한 건 아닌가 싶다가도 눈을 감으면 아주 어린 시절 간단한 즉석 연주와 함께 허밍하듯 들려준 옛 노래의 순간들이 둥실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그와 똑같은 색으로 세상을 보는데도, 함께 하는 순간 세상의 색깔이 몇 배는 다채로워졌다.

 

두 사람은 다양각색의 주택이 늘어진 브라운 스톤을 지나 브루클린 하이츠에 다다르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이스트강을 가로지르는 브루클린 브릿지가 하늘과 물 사이에 매달린 거대한 거미줄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케이블과 타워를 따라 황금빛 조명이 반짝이고, 아래를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파도처럼 행렬을 따라 이어졌다. 다른 관광객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감탄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작은 렌즈에 아름다운 금빛 물결을 담았다. 왼편으로 불이 꺼진 맨해튼 다운타운과 발아래 멀리 펼쳐진 부두가 대조를 이루었다. 온통 하얀 요슈아마저도 밤의 눈부시고도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혀 별빛만이 겨우 밝게 빛났다. 녹색 조명의 레이디 리버티 뒤로는 각기 다른 높이의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르듯 키를 자랑했다.
검은 하늘에 자수가 새겨지듯이 알알이 콕콕 박힌 금색이 반지처럼 반짝였다. 제리는 입을 벌리며 요슈아를 보았다. 요슈아도 그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에 차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밤바람이 자켓 안쪽을 파고들어 오는 감촉을 즐기며, 오른손으로 브루클린 브릿지를 가리듯 허공에 뻗었다. 그리고 건물을 손에 쥐듯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스쳐 지나가던 한기 서린 바람이 손아귀에 갇혔다가 빠져나오면서 정말로 별빛이 담겼다 사라진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짓을 보고 똑같이 따라했다. 낭만이라 하기에는 제법 유치했고, 유치하다 하기에는 깨나 설득력 있었다. 그는 제리가 자신을 따라하는 걸 보고 느리게 웃었다.

 

"어때."
"요슈아가 담은 것보다 조금 덜 담았어."
"그럼 내가 이긴 거네, 신난다! 소원 하나 들어 줘."
"으응? 이거 내기였어?"

 

요슈아는 얇은 입꼬리를 양옆으로 얄궂게 끌어올렸다. 당연하지. 제리가 울타리에 양쪽 팔꿈치를 올린 채 등을 굽히고서 요슈아를 응시했다. 그래, 소원이 뭔데? 그는 단조롭게, 하지만 조금은 기대한 목소리로 요슈아의 소원을 기다렸다. 요슈아는 히죽거리다가 이내 그를 끌어당겨 안고서는,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해 줘. 제리가 놀란 듯이 요슈아의 등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당연하고 사소한 소원이었다. 그 말은 억만 번도 더 넘게 말해 줄 수 있는 말인데. 그럼 억만 번 넘게 말해주면 되겠네, 좋다. 제리는 요슈아의 품에서 바스락대며 먼지를 터는 듯한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요슈아가 목덜미가 간지럽다며 장난스레 입을 벌려 엄살을 부렸다. 검고 노란빛 가운데 강 위로 형형색깔의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이보다 더 환한 빛은 두 번 다시 없을 정도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강렬한 색채였다. 붉은색 폭죽이 가장 먼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고, 그 다음은 초록. 그 다음은 노랑. 그 다음은 파랑……. 다섯 번째 폭죽이 어둠을 밝히는 찰나에 요슈아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제리가 덥썩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눈높이를 맞췄다. 요슈아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를 응시했다. 시야에 오롯이 그만 담기는 거리였다. 제리는 자신의 두 손에 깍지를 끼고, 더없이 명백하고 확실한 말을 건넸다. 언젠가의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말을.
요슈아는 둥글게 벌어졌다가 가로로 찢어지고, 다시 타원을 그리며 마지막에 입술을 삐죽 내미는 제리의 입을 보았다. 폭죽 소리에 제리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들리지 않아도 괜찮았기에……. 요슈아는 연인의 품에 가두어진 목덜미에 닿는 손결을 주름 하나까지도 기억하려고 애썼다. 영원에 가까운 순간으로 남았으면 하였다. 레이디 리버티가 밤의 몽환경처럼 반짝였다. 수백 수천 개의 창문 조명.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빛. 멀리서 보면 그것들의 모임은 밤을 가로지르는 점묘. 분명 지금 그와 마주 보는 이 순간도 누군가에겐 점 한 개가 되어 커다란 그림의 한 부분이 되겠지. 요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제리도 따라 웃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게 사랑하고 싶다. 그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움직였다. 입술이 맞닿아 숨이 가로막혔다. 여전히 온기가 가득했다. 불꽃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둘이 살기에는 넓고, 셋이 살기엔 좁은 집. 남은 공간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기로 결심한 아마도, 그랬어야 할, 처음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기타와 피아노가 다시 들어섰다. 전부 떼어냈던 포스터들이 다시 벽에 붙여졌다. 요슈아의 밴드 시절 음반 CD들이 차곡차곡 책장과 선반 안을 채웠다. 조금씩 빈 곳을 지워나갔다. 요슈아는 문득 생각했다. 제리와 그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우연인지, 필연인지에 대해. 사실 그가 어째서 제리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요슈아 본인조차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일순간의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제리가 연인으로 보인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별 끝의 미래가 상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슈아는 제리와 헤어지게 되어도 쭉 함께할 수 있으리란 묘한 확신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제리의 입술에 더 이상 입 맞출 수 없더라도, 제리가 내는 심장 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없는 위치가 되더라도.
어릴 때부터 잡아온 손은 여전히 비슷한 크기 차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키도 얼추 비슷했다. 그 외에 식사량부터 하는 일, 대부분 요소는 늘 그랬듯 정반대를 가리켰다. 인테리어 취향도 아마 조금은. 제리는 액자에 걸어둘 사진을 요슈아와 함께 고르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이거 내가 너무 이상하게 나오는데!"
"왜? 전부 다 엄~청 귀여운데……. 앗, 이것도!"
"그건 진짜 찐빵같이 나왔잖아."
"그래서 귀여운 거라니까."

 

요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가리킨 사진에는 아침을 먹다가 요슈아가 불러 고개를 든 제리가 피사체로 담겨 있었다. 제리는 조금 투덜거리며 요슈아가 짚은 사진 왼쪽에 있는 걸 선정했다. 이번엔 요슈아가 한참 졸다가 깨어나 눈이 반쯤 부은 상태로 소파에 드러누운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요슈아의 턱과 귀 끝이 살짝씩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돼! 왜 안 되는데? 아니, 그게. 너무…… 아무튼 안 돼. 요슈아는 논리가 턱없이 부족한 주장을 펼치며 손사래 쳤다. 하나하나 짚어갈 때마다 추억이 이슬처럼 송골송골 맺혀 물컵 하나를 꽉 채우다 못해 흘러넘칠 것처럼 합쳐졌다. 일이 해결되니 풀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꾸며두고…… 다시 돌아가는 거야?

"음, 뭐 그렇지. 나중에 투어 올 수도 있으니까."
"에에."
"그리고 라멘 먹고 싶은걸."
"이유가 단순해."

 

요슈아가 입을 가린 채 쿡쿡대며 웃었다. 둘 옆에는 잔뜩 짐이 실린 캐리어가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여전히 기타가 든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상의 끝에 그것을 두고 가기로 하였다.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 기타를 한 번 더 다시 보도록. 그리고 마음을 다잡도록. 결심은 공존을 통해 자리 잡았다.

그가 즉석 버스킹―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설프게 시작한―을 한 뒤로 판다 사장으로부터 미친 듯한 연락이 쏟아졌다. 음악을 안 하겠다고 해서 열 받지만 어떻게든 돈 버는 거 도와주었더니 은혜를 웬수로 갚는다, 뭐다… 그러다가 영상 플랫폼에 올라간 그의 영상이 몇백만 조회수를 찍자 군말 없이 다시 음악 활동이나 하라며 대충 마무리 지었다. 요슈아는 애초부터 판다 사장은 걱정거리에서 논외였다며 가볍게 말했다. 문제는…….

 

"정말…… 미안! 정말로 할 말이 없어, 미안해! 다들, 내가 책임지고 한 대, 아니, 백 대씩 맞을게!"
"아니아니, 우리 세 명이라고? 삼백 대 맞을 자신 있어?"
"요슈아는 각오를 하고 말한 거니까, 맛츠. 우리도 기대대로 해주지 않으면 안 돼."
"……아니, 보통 거기서 각오를 말하냐고…?"

 

요슈아는 브레이브 차일드 단체 채팅방에 공항 사진 한 개를 보낸 뒤 물음표가 가득 올라온 메시지에 데빌즈 이모티콘까지 전송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날 일본에 도착해 세 사람과 대면했다. 요슈아는 제대로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제리와 함께 그들 앞에 섰다. 언제나 그렇듯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합주실 안을 거처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의자에 앉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변만 살폈다. 요슈아가 사과하는 순간마다 고개를 같이 푹 숙이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하고 싶은 걸 확신할 수 없어서 너희들에게 계속 폐를 끼쳤어. 상담해봤자, 분명 이상한 취급 받고 끝날 거라고 생각해서……. 그의 말에 의자 팔걸이에 팔을 기댄 마츠가 요슈아에게 머리를 들어보라는 듯 딱, 핑거 스냅을 쳤다. 요슈아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흔들며 정면을 쳐다보는 일순간에 이마에 강렬한 타격이 닥쳤다. 요슈아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양손으로 이마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소타와 제리가 허둥대며 아파하는 그를 바라볼 동안, 마츠는 오른손을 털며 콧방귀를 뀌었다.

 

"뭘 멋대로 착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냥 한 대 때리고 싶었어."
"양아치 같아, 맛츠."
"나름대로 애정 표현인 거지. 후후…."

 

제리는 유키의 말대로 그들이 이미 요슈아를 용서했다는 걸 느꼈다. 동시에 기뻤다. 이렇게 좋은 이들이 요슈아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요슈아 또한 그 사실을 느꼈는지 투명한 눈물이 살짝 맺힌―사실 너무나도 강력한 딱밤에 아픈 나머지 그런 것도 조금은 있었으나―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신기할 만큼 주변 이들을 미소로 끝맺게 만드는 요슈아가, 제리는 부러우면서도 좋았다. 누군가가 제리에게 언젠가부터 사랑을 느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가 건네는 미소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었을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그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은 순간은.

 

 

"들어갈게요……?"

 

몇 개월이 지났다. 제리는 아무도 듣지 않을 인사를 건네며 합주실 출입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이전에 요슈아에게 건네받은 스페어 키를 가방에 다시 넣고, 발을 안으로 넣었다. 몇 개월 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들락거려도 되는 건지 여러 번 물었다. 양, 양심이 있지……. 제리의 자책과는 별개로 멤버 전원이 흔쾌히 수락했지만, 여전히 외부인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발을 들여놓고 나서도 그러하였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한 걸음걸이로 돌아다니며 주변을 구경했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는 멤버들이 연습을 끝내고 잠깐 쉬고 있을 때 들렸거나, 혹은 시간이 남아돌 때 요슈아가 불러서 아주 잠시 이야기하고 돌아간 정도였으니까. 영 어색한 건 다름이 없었다.

 

"…익숙해지겠지, 뭐."

 

결국 체념하듯 혼잣말을 내뱉고, 제리는 합주실을 두리번댔다. 조명이 어둑한 방 안에는 가운데에 대형 연주 공간이 있고, 흡음재로 처리된 벽 쪽에 칸칸이 진열된 장비들이 보였다. 외장형 프리 앰프, 리버브 유닛, 딜레이 모듈……. 그는 요슈아가 들뜬 말투로 하나하나 속사포로 알려주는 걸 이름만 간신히 외웠다. 요슈아는 음악을 정말로 사랑했다. 과거형은 잘못된 설명이었다. 그는 정말로 음악을 사랑한다……. 제리가 문을 전부 닫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앉을 생각은 뇌리에 미치지도 못한 듯 합주실 내를 서성거렸다. 탁자 위에 얼기설기 놓인 음악 잡지와 장식용으로 붙여놓은 포스터 또한 눈에 띄었다. 곳곳에 기묘하게 탄 호일 냄새가 노르스름하게 났다. 제리는 앰프 연결 케이블을 들었다 놔보기도 하고, 드럼 앞에 앉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처럼 누런색을 띠는 화려한 포스터들을 구경하며 요슈아를 기다렸다. 손목에 걸친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면서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문이 열렸다. 제리에게는 익숙한 이의 인영이 서서히 드리웠다. 그는 사랑해 마지 않는 목소리로 연인의 이름 두 글자를 입에 올렸다. 애정을 한데 꾹꾹 눌러 담아서. 제리가 포스터나 장비를 둘러보다가 합주실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에 제리는 그 모습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환히 웃었다. 그 미소는 분명 가장 소중한 이와 닮아 있었다.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변치 않을.

BABY STAN DON’T PANIC
BABY STAN DON’T PANIC

@juststayus

괴상 이상 현상 비디오 중독자들 前 편: Panic singer

 

 

"'클로즈업할 준비가 되었어요, 드밀 씨'¹ 선셋 대로(1950). 빌리 와일더의 영화로, 잊혀진 무성 영화 여배우의 광기와 실패한 각본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거론된다. 는 꼭 내 귀로 듣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사실, 제리 네가 잠들 거 알고 있었어."


제리가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팔짱을 낀 채로 푸념하듯 말했다. 맹세컨대 제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잠들 생각이 없었다. 장르 태그에 로맨스 한 번 붙었다 하면 스태프 롤에 비척비척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 손꼽히는 위상이 있어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요슈아는 잠시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가 다시 날카로운 은색 눈으로 메뉴를 훑어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동안이나 제리와 재잘거리다 잠들었던 것이 자그마치 이 주 하고도 사흘 전 일이었다. 당분간 사무소도 긴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고 미루고 미루던 것을 해치울 차례였다. 둘에게는 두 번째 고향이라도 불러도 손색없을 캘리포니아의 낭만, 이방인 대부분이 꿈꾸는 기회의 도시. 여행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각자가 홀로 채우던 시간을 석 달이나마 같이 있는 시간으로 상쇄시키고 싶다'라는 다소 기운 넘치는 이유였다. 공항에서 맞이하는 번잡한 출국 수속은 낭만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정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40대 남자가 수하물을 착각해 들고 가려고 하는 걸 제리가 먼저 발견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입에 맞지 않은 기내식까지 합하여 좋은 것이 별로 없었으나, 막상 발을 딛고 고개를 어렵사리 들면 지중해의 바람이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따스한 기운이 맨 피부에 오롯이 닿아서야 겨우 그곳에 다시 오게 됐다는 걸 느꼈다. 처음엔 제법 번지르르하게 입고 다녔던 요슈아가 서서히 홈웨어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확실하게 거리를 커다란 구처럼 뭉쳐 다니는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외관은 눈에 띄었다.

코팅된 페이지를 넘기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하얗고, 앞으로 몸을 숙이자 보드랍고 덥수룩한 곱슬머리가 살랑거렸다. 빈티지 전문 샵에서 43달러에 주고 산 빈티지 가죽 재킷은 허리를 완전히 덮었다. 어디 그뿐만인가. 짙은 워싱을 한 데님이 그의 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소맷단 부분이 닳은 채였다. 시티즌 오브 휴머니티의 1980 에디션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테이블 아래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엎드린 채 아쉬움을 토로하는 제리의 구두를 장난스럽게 툭툭 건들고 있었다. 제리는 커다란 스크린에 억지로 화질이 늘려진 흑백 멜로 영화를 되새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알면 왜 안 깨웠어."

 

요슈아의 두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갔다가 제리의 물음에 메뉴판 모서리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음. 그는 몇 초간의 짧고도 긴 시간 동안 고민을 이어가며 길게 소리를 내뺐다. 유키가 드럼 스틱을 두세 번 두드릴 수 있을 정도 간격.


"네가 너무 잘 자니까, 그만."

"…내가 그렇게 잘 잤어?"
"뭐어, 괜찮아. 나는 또 봐도 돼."

 

그는 스스럼없이 거짓 하나 안 보태고,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으며 가벼이 대답했다. 처음엔 느슨한 자세에서 똑바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던 고개가 서서히 요슈아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툭.' 체구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에게 완전히 기대었을 때 볼 수 있는 가르마. 양쪽 볼이 달뜨게 만드는 기억. 제리가 못 살아, 라며 요슈아의 손등을 약하게 꼬집었다. 어렸을 적부터 서로의 영화 취향 같은 사소한 호불호는 진즉 알고 있었다. 요슈아가 엄살을 부리며 한술 더 떴다.


"로맨틱한 대사는 제리의 자장가 같은 거니까."
"……그만 놀려!"


기어코 제리가 소심하게 요슈아의 발목을 약한 힘으로 건드리고 나서야 요슈아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쿡쿡대는 소리까지는 막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주크박스서 익숙한 밴드 수록곡이 흘러나왔다. 분주한 대도시 한가운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과거의 타임캡슐 같은 전형적 아메리칸 24/7 다이너 간판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WELCOME'이라는 일곱 글자의 간판에 전구 달린 줄이 가장자리에 얽혀 있었다. 그 위쪽을 차지한 햇빛은 하릴없이 무더위를 생산해 내며 얼룩 묻은 창문을 빛냈다. 색이 바랜 분홍과 파란색의 오묘한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는 벽은 짓궂은 청소년들의 낙서로 가득 찼다. 제리가 SNS에서 보기로는, 가본 적 없는 이들마저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향수를 느낀다고도 했다. 그러나 향수를 느끼기엔 영 만만치 않지 않은가?
다이너 내부에선 튀김 기름과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한 부스에 앉은 노부부는 마지막 파이 조각을 두고 다투고 있었고, 카운터 쪽 바에 앉은 소년소녀들은 서로 킥킥거리며 속삭였다.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피곤해 보이는 웨이트리스는 달걀과 베이컨 접시를 테이블로 나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간색과 흰색 체크무늬 식탁보, 크롬 바 스툴, 구석에 50년대 로큰롤을 틀어주는 주크박스까지!―물론 전부 구식, 중고, 사용감 넘치는 이백 퍼센트 카피 디자인 인테리어―주방 저 안쪽에서부터, 베이컨이 구워지며 작은 구슬을 쏟듯 지글거리는 소리와 플라스틱 그릇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가 뒤섞여 끊임없이 배경 소음으로 들렸다. 리놀륨 바닥은 긁히고 얼룩져 있어 종종 할 일 없이 배회하는 웨이트리스가 걸레질해도 상태가 비슷했다. 뭐 이런 것도 낭만이라면 낭만일지도 모르겠다.

요슈아는 메뉴를 결정하고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제리로서는 꽤 오랜만에 듣는 그의 영어였다. 그는 능숙하게 페이지 곳곳을 가리켰다. 고개를 숙여 끄덕이는 웨이트리스의 명찰에는 '에이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요슈아는 마지막까지 주문한 뒤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제리를 바라보았다. 제리가 엎드린 몸을 일으켜 그냥 아이스 티 한 잔만 달라고 하려던 순간 이미 웨이트리스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기…"

 

순진무구한 낯이 되돌아보았다. 제리는 뺨을 긁으며 말했다.

 

"제 아이스 티도 한 잔 주시겠어요."

 

그제야 웨이트리스가 놀란 듯이 매니큐어가 발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었나? 동양인 커플이 24시간 다이너의 구석 부스에 와서 아이스 티를 주문하는 게? 제리 또한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고 웨이트리스의 어색한 자백으로 종결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일행분께서 손님 것까지 전부 시키신 줄 알고……. 제리는 그 말을 듣고 눈알을 굴렸다. 저 멀리 주방으로 도망친 웨이트리스의 리본이 자꾸 생각났다. 빨간색. 지금 제 눈앞에서 웨이트리스가 얼버무린 말끝을 짐작하고 있는 요슈아의 얼굴과 비슷한 색. 제리는 복수의 때가 왔다는 걸 눈치챘다.


"괜찮아. 요슈아의 한 끼가 남들 두 끼 정도의 양이라는 것도 난 귀엽다고 생각해. 모르는 사람은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 놀릴 거면 멋있다는 쪽이 좋은데 말이야."

 

대꾸하는 투에서는 작은 불만이 드러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꿉친구였다. 요슈아는 자신의 그런 반응이 더더욱 멋있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고 있을까. 제리는 요슈아를 보며 느리게 미소 짓고는 아까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 숙소 근처 길목에서 발견한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고전 영화 수 편을 대여했다는 말. 심야에 영화관에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들어가 둘만 남은 걸 확인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재개봉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그럴 일은 없었다.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백 가지 재미 중 한 개를 느끼지 못해도 남은 99개가 있었다. 제리가 방문한 그 비디오 대여점은 OTT 플랫폼에도 나오지 않는 수백 개에 다다른 고전의 늪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격도 의심 갈 정도로 싸거나 비싸지 않고 적당한 값을 불렀다. 제리는 미래도 예상치 못한 채, 요슈아와 즐길 수 있을 법한 비디오들을 골라 집었었다. 제리가 재잘대며 요슈아에게 닳고 닳은 제목들을 나열하며 소개했다.


"혹시 모르잖아?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제리가 말하는 도중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려진 크림소다가 테이블 위에 나왔다. 중간에 하트 모양으로 구부러진 분홍 빨대에 입술을 대고 쭉 빨았다. 제리는 속으로 일반 빨대가 편했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면에선 지극히도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녀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요슈아는 어느새 턱을 괴고 제리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영감을 얻는다면 그건 그 영화를 본 네 감상에서일 거야. 내 음악은 사랑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으니까."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각은 있는 걸까. 단어 끝마디마다 녹아 있는 애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리는 자신도 모르게 연인보다는 데빌즈의 자세에 서게 되었다.


"...이런 게 귀엽다고 하는 거야."
"에?! 세일즈 포인트를 전혀 모르겠어. 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네에."


제리가 한 번 더 소다를 빨아들였다. 톡 쏘는 탄산이 목 안쪽을 자극했다. 요슈아가 '정말……'이라며 불만족스럽다는 양 음료 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제리에게까지 닿았다.

 

나른한 오후의 온기가 둘을 감쌌을 때쯤 식사가 끝났다. 스크램블은 설익었고, 베이컨은 기름기가 심했다. 10달러 한두 장을 꺼내 요슈아가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그동안 제리는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다짐했다. 뭐든 좋지만, 이왕이면 이곳에는 다신 오지 말자고. 아마 요슈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은식기 옆에 놔둔 스마트폰과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계산을 마치고 제리의 곁으로 돌아오려는 그 순간, 낡은 바닥 타일 틈새에 제리의 부츠 앞코가 걸렸다. 5cm의 굽이 있는 부츠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제리를 바닥으로 이끌었다. 곱게 양쪽으로 땋은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향했다. 그가 놀라 소파 끄트머리를 억세게 잡고 겨우 중심축을 바로 세웠다. 다행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탱할 수 있었다. 요슈아가 급히 달려와 그를 챙겼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여기 타일 바닥 때문에 그런가 봐. 괜찮아, 나가자."

 

문제는 통증이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휘청거리다가 겨우 일어난 제리의 어깨를 누군가가 제대로 치고 지나갔다. 제리가 반사적으로 사과를 뱉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흉흉한 인상의 남자는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으르렁거렸다. 그의 모습에서 언뜻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제리를 거칠게 내려다보면서 혀를 찼다. 요슈아가 제리의 오른쪽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이 애한테 무슨……"

 

이왕 타국에 왔으니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리가 요슈아의 팔을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요슈아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 짜증이 섞여 미간에 주름이 잡힌 상태였다. 그는 예의 없는 괴인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한테도 화를 되돌리는 사람이었다. 좋은 것만 겪게 해주고 싶은데, 그리 생각하며 요슈아는 제리가 그냥 가자고 재촉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슈아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제리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짐짓 대형견처럼 느껴져 쓰다듬을 뻔했다. 생각을 뒤로하고 발이 먼저 움직였다. 벨이 달린 문을 향해 몸을 돌려 나갔다. 요슈아는 석연치 못한 듯 뒤쪽을 자꾸 쳐다보았지만, 이미 따지기엔 멀리 갔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홀로 남은 남자는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남루한 운동화를 신은 발치에 은색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손이 그것을 집었다. 줄기차게 떠들던 소녀가 남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웩'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 이 작은 해프닝에서부터 시작된 어떠한 사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쿄로 돌아갈 때까지 이 젊은 연인이 제리가 빌린 세기의 명작 필름을 보는 일은 없었다.

 

 

어깨를 붙잡았던 요슈아의 오른손에 힘이 빠졌다. 그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평화로운 길거리에 근심거리 하나를 더했다. 계산 같은 건 좀 더 빨리 끝내고 옆에 있는 게 맞는 건데. 내면에서 과장된 자기책임이 몽글거리는 물방울처럼 맺혀 뚝뚝 흘렀다. 쾌청한 날씨가 더더욱 그의 울적한 기분을 심화시켰다. 아까는 미안하다며 제리의 품에 머리칼을 비볐다. 일전에 일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 클럽이었었나. 제리는 시끄러운 EDM과 형형색색의 칵테일, 끈덕지게 달라붙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낚아챈 연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제리는 맥락을 벗어나는 생각을 느긋하게 뱉어주었다.


"요슈아는 강아지 같아."
"……갑자기?"
"하는 생각이 다 보여서."

 

맞춰볼게……. 지금도 자책 중이지? 제리의 말에 요슈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연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들키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영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제리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조용히 젊은 연인의 어깨를 도닥였다. 요슈아는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뗀 채, 걸으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너는 늘 내 탓을 안 하네."
"탓할 일이 없는데 왜 탓해? 그게 이상한 거야."

 

제리가 정말로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요슈아는 헛기침하며 재킷을 고쳐 입었다. 물론 이번 LA 행 정도는 내키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공기를 맨 피부로 느끼자마자 기껏 열심히 다듬고 쌓은 목마가 힘없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익숙해지지 않는 우울감과 탈력감은 높은 곳을 한없이 동경하도록 만들었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도 마음은 다잡아 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하얀 꽃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 것은 향수병을 악화시켰지만, 일시적인 기운만큼은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괴로웠던 이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극히 잘 알았으니, 용기를 내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제리의 처방 자체가 요슈아였다. 원망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있다면…….

탁. 두 볼이 잡힌다. 제리는 이따금 그가 정신을 차리려면 따끔하게 말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다 잔을 쥐었던 손바닥은 서늘한 한기가 살짝 감돌았다.


"이렇게 자기 탓하기 금지, 말했었지?"

 

요슈아의 동공이 단번에 수축했다가 다시 팽창했다. 그는 끄덕여지지 않는 고개를 양손 안에서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제리는 자기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내리는 팔뚝을 슬그머니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흉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요슈아의 축 처진 낯빛도 활력을 되찾아갔는지 금세 얼굴이 펴져 있었다. 그럼 집에 가면 네가 대여했다는 영화나 볼까,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들뜬 걸음이 보도블록을 흥겹게 밟아갔다. 제리 옆에서 허밍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트로이메라이의 간주 부분이었다. 제리는 박자에 맞지 않는 걸음걸이를 일부러 반 박자 늦췄다가 다시 걸었다. 유키를 대신한 드럼 소리였다. 기타나 베이스는 대신할 수 없으려나, 제리는 이따금 했던 생각을 또다시 해보았다. 만약 나도 음악을 했으면 어땠으려나. 세간에서 감동적이라 말하는 비긴어게인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됐으려나.
물론 비긴어게인도 중간에 보다가 잠들었다.

 

 

아담한 크기의 별장은 석 달 정도 머무르기엔 딱 좋은 조건이었다. 중간에 좋아했던 단골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렸다가 마켓에 다녀오느라, 둘은 시간이 꽤 지나고서 도착했다. 양손에 가득한 짐을 현관 앞에서 잠깐 내려놓았다. 요슈아가 잠깐 업무 통화를 받을 동안, 제리가 문을 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요슈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땀방울이 턱선에 송글송글 맺혔다. 제리는 아예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핸드백에 있는 짐을 닥치는 대로 열어 보았다. 립밤, 여분 머리끈, 핸드폰, 손거울, 지갑……. 있을 법한 귀중품은 다 나왔지만 딱 하나의 행방은 묘연했다. 제리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공중에 뜬 듯이 나른한 인상을 하던 그가 적잖게 당황한 얼굴을 지었다. 왜, 전적이 있잖는가. 스카이다이빙이라도 했었을 때마냥.

 

"……나 집 열쇠 잃어버렸어."

 

요슈아가 곧장 통화를 끊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제리의 짐을 핸드백에 넣어주고서, 자기 품에서 스페어 키를 꺼냈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스페어 키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기실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도 아니었지만, 본능에서부터 따라오는 감이 있는 법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거실이 그들을 맞이했다. 로맨스 영화 보다가 좀 졸았다고 장르를 스릴러로 바꾸면 어떡해……. 제리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스크림처럼.

 

 

 

괴상 이상 현상 비디오 중독자들 後 편: Panic Lover

 

 

 

스릴러나 호러 무비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심호흡이 필요하던가? 그리고 올바른 추론 능력과, 끝없는 망상을 멈추기 정도. 요슈아는 제리부터 급하게 제 쪽으로 당겼다. 제리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요슈아의 눈꺼풀이 맥없이 흔들렸다. 새하얀 머리카락으로 덮여져 있는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이 폭발한 것처럼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충동적인 감정이 몰아닥쳤다. 잔향으로 남아 있는 매캐한 담배 냄새와, 진득하게 남겨진 발자국. 이건 판다 사장이 했다기엔 도를 지나친 수위였다. 애시당초 저번의 일이 있고 나서는, 요슈아도 판다 사장에게 휴가 스케쥴을 아예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그는 제리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제대로 이쪽을 봐줘, 제리."
"……응."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집요하고 똑바르게 응시했다. 요슈아는 자신보다도 제리의 상태를 챙기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다. 제리는 자신의 양 팔뚝을 잡은 손의 진동이 느껴져, 조심스럽게 그것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둘 다 맥박을 느낄 수 있도록 손목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빠르고, 거칠었다. 느리게 숨을 뱉었다가 삼켰다. 가까스로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맥박이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알았어……. 응, 안 떨어질게."


책장은 옆으로 눕혀져 있었고, 내용물이 뒤집힌 보물 상자처럼 쏟아져 나왔다. 카펫 위에는 책, 액자 등이 깨진 도자기 조각과 함께 뒤섞여 흩어져 있었다. 램프는 전구가 깨지고 받침대가 찌그러진 채 바닥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침실이나 부엌, 다른 방은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문을 연 흔적조차 없었다. 제리는 거실을 살피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수십 편에 다다르는 고전 명작 영화 비디오가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다. 요슈아 또한 이외의 것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조금 어지럽혀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축에는 꼈을까…….


"저기, 제리……. 잠깐만 들어가 있을래? 이것들은 내가 치우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다칠 수도 있고."


요슈아는 일부러 불안을 감추려는 듯 웃었다. 태연자약한 척하려고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제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푹 떨궜다. 역시 LA에 오는 게 아니었어. 이런 이상한 일이나 당하고. 진즉 열다섯의 성장통은 지나간 줄 알았는데 전부 오만에 불과했다고 제리는 자책했다. 걸쳐 입은 베스트 아래 셔츠 안쪽, 그 안에 든 가슴이 지나치게 떨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려서 그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손등 위로 툭툭 작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깨끗하고 투명한 색채가 손등의 살결을 흐렸다. 안개 낀 생각으로 덧없이 머릿속이 채워져 갔다. 우울은 급진적으로 다가와 그를 괴롭혔다. 그대로 놔두면 몇십 번이고 고층 빌딩을 바라보던 열다섯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요슈아가 급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자기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청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 요슈아. 괜찮아?"
"그걸 물어보고 싶은 건 나야……!"


제리가 자기 손목에 칼날을 댔을 때와 비슷한 불안함이 그를 덮쳤다. 음악보다도 소중한 그였다. 털끝이라도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 없이 몇 번이고 끝을 생각했던 열다섯의 제리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그는 단 하루도 어떠한 아쉬움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하루라도 더 빨리 곁에 있었다면 그를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다. 제리의 붉은 눈가가 사정없이 깜빡거렸다. 요슈아가 힘을 줄수록 가죽 재킷이 더 탄탄하게 당겨졌다. 그 매끄러운 감촉에 제리는 머뭇거리며 손을 올렸다. 요슈아는 고개를 들고 물기 어린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리의 사고가 온통 요슈아에게로 향했다. 그는 말 중간마다 숨을 멈추면서도 할 말을 전부 했다.


"LA에 온 건…… 우리 둘 다 마주해야만 하는 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상처받는 모습 같은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무리하게 데려왔다면 정말 미안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게 해 줘."


그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덮인 이마를 맞대었다.

 

"나는 네 힘든 모습이 제일 슬퍼. 널 정말, 정말 좋아하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그러니까, 원망할 거라면 차라리 나를 향해줘."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건 누군가의 악의보다도 선의다. 제리는 문득 그런 감상을 받았다. 바보처럼 두 사람 모두 눈두덩이가 한없이 부을 예정이었다. 제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간단한 증명을 조금씩 다시 되새겼다. 눈가를 억세게 문질러 눈물을 닦아낸 뒤 요슈아에게도 똑같이 행했다. 탄성을 내지르는 걸 무시하고 일부러 더 강하게 꾹꾹 눌렀다. 요슈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리를 쳐다보자 그는 비뚜름하게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네 탓 안 해."
"하지만……!"

 

조급하게 말을 꺼내는 요슈아에게 제리는 스스럼없이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내 탓도 안 할게."


그걸로 됐지. 짐짓 잠에서 막 일어난 듯한 스타일이 된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그가 정리해 주려 손을 뻗었다. 요슈아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푹 숙여 제리가 손을 움직이기 쉽게 만들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란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요슈아는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듯 바닥을 뚫어지도록 내려다보며 입술을 두드리다가, 서서히 미소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만 몰아붙였다가 더 힘들게 만들었을까. 그런 가정은 아무 의미 없었다. 지금 제 머리를 건드리는 그 손길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처음 만날 때 보여주었던 그 따스함이 아직도 변치 않았다.² 트로이메라이 오마주 / 最初に会えた時見せていた笑顔今もまだ変わらないままで

 

 

"애초에 그런 가게가 없다고?"
"에, 응. 4번가는 웬만해선 새 가게가 안 들어와. 아, 물론 네가 거짓말한다는 뜻이 아니야! 절대로!"

"……해명 안 해도 알고 있었는데. 해명하니까 수상해."
"역시 너야! 알아주는 구…… 아니! 그렇게 결론이 나면 안 돼…!"

 

요슈아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진정되고 거실을 정리한 뒤, 어지럽혀진 선반을 차곡차곡 다시 채우자 한적한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어플로 스마트 맵을 켜서 대여점 이름까지 넣어봤으나 지도에 뜨지 않았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상황이 영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슈아는 마지막 남은 책 한 권을 선반에 끼워 넣고 먼지를 털고 나서, 제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혹시 무슨 영화들이었는지 기억해? 타이틀이라든가, 특징들이라든가.”


제리는 쿠션을 끌어안은 왼팔에 힘을 주었다. 남은 오른손으로는 따가운 눈에 얼음을 문지르고 있었다. 다이너에서의 요슈아처럼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조용히 고민했다.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로맨스를."
"……잘 거면서."


제리는 괘씸한 명예훼손―대충 사실적시에 의한 연인을 부끄럽게 만든 죄인 것이다―에 대답하지 않고 제 눈을 문지르던 얼음을 버린 뒤, 얼음 보틀에서 하나를 더 꺼내 요슈아의 부은 눈가에 냅다 갖다 댔다. 요슈아가 차갑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아예 편하게 앉아 가만히 손길을 받았다. 제리는 정확한 타이틀들을 나열했다. 로마의 휴일, 시티 나이트, 레베카, 싸이코, 카사블랑카…. 이외 16개의 작품 이름이 그의 입에서 더 나왔다. 몇몇 개는 플랫폼에 고스란히 있긴 하지만 비디오를 대여해서 보는 재미도 있으니 겸사겸사 같이 값을 냈었다. 요슈아는 이미 본 것들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요슈아, 생각보다 영화 좋아하는구나."
"헤에, 당연한걸. 그러니까 심야에 그 번거로운 짓을 하며 극장에 걸린 걸 보고 오는 거 아니겠어."

 

선글라스에 두꺼운 옷, 일행이 아닌 척 따로 들어와 각자 앉고, 상영이 시작된 후에 아무도 없으면 그제야 붙어 앉기. 그리고 나올 땐 다시 떨어졌다가 집에 가는 길에 노곤한 상태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기. 그것도 하나의 낭만인가 생각했다. 물론 소꿉친구를 놀리기 좋아하는 요슈아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뭐어. 사실은 영화에 집중하는 네 옆모습을 보는 게 더 즐거울지도."
"……일부러 부끄러운 소리 하는 거지?"
"아하하……. 당연하지. 그래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잖아."³ 카사블랑카(1942). 마이클 커티즈 감독. 영화 내에서 주인공 릭에게 한때 연인이었던 일자가 반복적으로 내뱉는 대사. 원문은 "Here's looking at you."

 

제리는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그게 한 영화의 대사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짓궂게 치켜 올라간 그의 눈썹과 장난스럽게 내리깐 목소리 톤이 어떤 패러디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리가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아 진짜 차가워, 제리…….


쉴 틈 없이 일이 닥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경찰이 신고와 관련해서 찾아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네가 먼저 말하라는 식으로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척 보기에도 모범적인 나라의 공무원은 아니었다. 제리는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땋아 묶으며, 해결되지 않은 일은 뒤로 하고 요슈아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요슈아가 현관문을 열자 대화 소리가 거실 소파까지 다 울려 퍼졌다. 녹슨 경찰 배지를 엉성하게 찬 남자가 콧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친구분께서 비디오를 대여하셨다. 그런데 키를 잃어버린 뒤에 돌아왔더니 그 비디오들만 몽땅 사라졌다 이 말이지요."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관은 뒤쪽에서 담배를 꺼내는 다른 남자에게 그것 좀 꺼내 보라고 외쳤다. 그동안 남자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요새 그런 신고가 많이 들어오긴 합니다. 요슈아는 피어싱을 낀 귓불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쪽의 남자가 앞으로 걸어와 요슈아에게 파일첩 페이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빼곡하게 이름과 날짜, 주소지가 정리된 한 차트였다.


"이게?"
"비슷한 일로 신고한 신고자 목록이에요."


그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는 이내 손을 떼고 팔짱을 끼고서 그들의 설명을 기다렸다. 설명보다 호구조사가 먼저 올 줄은 몰랐지만. 남자는 헛기침하며 왁스를 왕창 발라 넘긴 머리를 쓸어 올리고, 파일첩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런 다음 볼펜을 딸깍대며 요슈아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여행하러 오신 겁니까?"
"네, 석 달 정도."
"두 분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요슈아는 고개를 돌려 제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리는 어느새 헤어 스타일을 전부 정돈한 상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슈아가 얼굴을 숙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밴드 보컬이고, 제 애인은……. 그는 제리가 그랬듯 말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직장인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질문은 그걸로 끝인 듯 남자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요슈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만 겪은 일이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도 전부 겪어보았다면 해결은 빠를 터였다. 경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요슈아와 거실 안쪽에 있는 제리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제리에게 닿자 요슈아가 처음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남자가 팔짱을 끼자 거칠게 다루어진 경찰복이 안쪽으로 구겨졌다.


"무슨 영화 같은 일이긴 합니다만, 가수 양반도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머무를 곳에 도둑이 들었는데……. 열쇠는 제대로 바꿔 놓았지만."

"아니, 뭐. 맥거핀⁴ 이야기에 동기를 부여하고서 구체적 설명 없이 퇴장하는 장치. 앨프레드 히치콕: "It's always called the thing that the characters on the screen worry about but the audience don't care." "보통 '영화상의 인물들은 걱정하지만 관객들은 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죠" 이라는 거죠."
"……네?"
"그럼 이만."


남자는 대충 한 번 더 신경 쓰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다른 두 경찰을 데리고 다른 곳을 향해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오래간만에 황당하다는 감정을 느꼈는지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멍하니 그곳만 바라보았다. 흡사 모모치가 늑대무리에 쫓겼을 때 문을 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을 때처럼…. 이곳에 온 뒤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영화라는 매체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말, 지극히 아무 공권력 없는 개인으로서―수많은 데빌즈를 불러 조사해 달라고 할 것 또한 아니지 않는가―그가 열쇠를 바꾼 것이 최고의 조치였다. 그리고 창문에 도난 방지용 락을 달아두는 정도. 제리는 방금 대화를 전부 들었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 다 끝난 거지, 라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만약 여기서 요슈아가 추리, 서스펜스, 스릴러,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져 오는 활약 극 장르의 주인공이었다면,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들을 전부 포기하고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리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 지금껏 일어났던 그 모든 이상한 일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요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현관문도 닫지 않은 상태에서 제리의 양쪽 허리를 잡고 그대로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훌쩍 높아지는 시야에 제리가 놀란 나머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조금 전 대화에서 이렇게나 기쁠 만한 일이 있었나? 열심히 그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이 나오는 건 없었다. 노란색 리본이 눈에 띄는 하얀 투피스 원피스가 갑작스러운 활공에 정신없이 흔들렸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별장 마당에 핀 아카시아 꽃향기가 슬그머니 들어와 코를 간지럽혔다. 바람이 따스했다. 제리의 놀란 심장이 겨우 가라앉자, 그는 요슈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가닥가닥 공중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 사이에 자신을 닮은 새하얀 브릿지. 조심스레 마음을 엮어 전해보려고 했으나, 요슈아는 터져 나오는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대로 뱉었다.


"있지. 제리! 나, 너를 정말 좋아해!"
"가, 가,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원래는 예약해 둔 크루즈가 있었단 말이야. 거기에서 프러포즈를 할까, 생각했어. 지금 바지 주머니에 반지도 있고."

"저기, 저기. 정보량이 너무 많아……."


제리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애정에 기쁜 건지 놀란 건지 구분할 틈도 없었다. 그저 요슈아가 자신을 떨어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고서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벅차오르는 가슴속을 간지럽히는 이름 모를 낯선 충동. 가장 단순하고 널리 알려진 다섯 음절의 말을 몇 번이고 입에 올리고 싶었다. 사랑해. ​愛してる。 그 말은 어쩜 그리도 지독하게 상대만을 바라보게 되는 문장인가. 요슈아는 흰색 실크 셔츠가 구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채 제리를 좀 더 가깝게 안았다. 제리는 부끄러운 기색이 덜해진 듯했다. 갑작스럽고 무겁게, 늘 배로 돌려주는 애정은 그의 주특기였으니까. 이 정도 시간이면 그래도 빠르게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좋아한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아서. 아아, 나는 정말 글러 먹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느꼈어. 나도 참 바보지. 웬 이상한 일도 당하고, 무드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에서. 계획한 것까지 전부 말해버렸네."


요슈아의 볼이 뙤약볕에 쬔 것처럼 아주 빨갛게 붉어졌다.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도, 몇 번을 보아도 머릿속에서 재생하게 되었다. 몸을 움직였다. 귓불에 무거울 정도로 매달린 링 귀걸이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의 어린아이 같은 고백에 어떻게 답장해야 할까, 기쁜 고민에 휩싸였다. 제리는 연인이기 이전에 친구였고, 친구이기 이전에 소중한 조력자였으며, 조력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 진즉 그만둔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나침반의 끝처럼 날카롭게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둥글게 깎았다.


"그럼 우리 둘 다 글러 먹은 사람이야."

 

잠깐 내려줘. 제리의 말에 요슈아가 팔의 힘을 조금씩 늦춰 아래로 내려보냈다. 마룻바닥에 닿는 맨발이 부드럽게 안착했다. 그는 손을 떼고 뒷짐을 지었다. 요슈아는 그제야 수줍은 듯이 볼을 긁었다. 제리와 닮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가 봐, 응. 그래서 기뻐. 너는?"

"응, 나도 그래서 기뻐."

 

말과 다르게 제리는 그대로 빙글, 등을 돌려 가방을 챙겼다. 요슈아가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돌아보는 제리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리는 아침 식사 메뉴를 묻듯 가볍게 바람을 훑으며 대꾸했다.


"크루즈는 언제인데?"

 

계절마저도 요슈아를 닮아 따스한 나날. 제리는 드문드문 끊기는 생각을 삼켰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던 나날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손을 뻗었다. 앞으로도 종종 이해할 수 없고 끝없이 괴로운 일이 생길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곁에 그가 있다면, 제리 또한 요슈아의 말대로 아무렴 괜찮을 것 같았다.

 

"……돌아가는 전날?"


제리는 한껏 기대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한 아주 간단명료한 말로 그 기대를 보여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높은 음표들이 표류하여 하나의 마디를 만들었다. 청년의 웃음이 스타카토를 그리듯 경쾌한 울림으로 내세워졌다. 견고히 쌓은 목마가 한 층 더 세워졌다. 요슈아의 마른 손이 제리를 끌어당기면 뒤꿈치가 들렸다가 다시 바닥과 맞부딪혔다. 젊은 음악가는 노련한 박제사처럼 행복에 바늘을 꽂아 넣었다. 퇴색되지 않도록, 언제 꺼내 보아도 미소가 배어 나올 정도로 좋도록 열을 가해 굳혔다. 영원을 쫓는 무리를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수풀의 풀 내음과 하늘을 헤집어놓는 주름진 새하얀 비단들. 손에 닿는 맨살과 실크의 경계선.
카메라는 두 사람의 작디작은 틈을 클로즈업했다. 아주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가 바람에 맨살 솜털이 정처 없이 간들거리는 풍경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마지막 장면이 가까워지자 줄곧 틀어지던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에 흐르는 재즈가 끊겼다. 그리고 피아노 단독의 무비 스코어로 대체되었다. 필름이 끊겼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청년은 이것이 어떤 누군가가 보는 영화나 만화, 드라마, 혹은 그 외의 매체여도 가장 행복한 이는 본인이라고 느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별장으로 돌아온 제리는 품 안에 한가득 간직한 기념품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건 브레챠 멤버들 거, 이건 요슈아, 이건 친구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여유롭게. 귀에 낀 블루투스 이어폰을 등 뒤로 지나가던 요슈아가 뺐다. 제리가 돌아보았을 땐 이미 요슈아의 귀를 막고 있었다. 제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감상을 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야. 어때."
"누군지 몰라도 노래를 너무 잘하네."


요슈아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녹음한 것을 다시 듣는 건 어떤 기분인지. 제리는 알 방도가 없었다. 음치인 본인의 노래를 그닥 녹음할 마음도 없었고. 볼륨을 크게 해 놓았는지라 단단히 틀어막았음에도 아주 작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에 와 서로가 아니라면 별로 듣지 못한 일본어 가사였다. 신곡도 반응 좋아서 다행이야, 정말. 요슈아는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나 주변 이들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모두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 요슈아의 칭찬은 제리에게 있어 제리를 칭찬하는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요슈아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마치 전 세계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나중에 시엘 군한테 한 번 들려나 볼까?"
"응? 여기 계셔?"
"연락해 봐야 알겠는걸~ 여기야 원체 넓은 나라고 말이야. 지금은 자겠지……."


제리는 널따란 소파에 앉아 있는 요슈아를 보더니 자신도 그 옆에 착석했다. 그리고 쿡 찔렀다.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이야말로 진짜 영화 보는 건 어때.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으니까."

 

데굴데굴 눈동자가 위쪽으로 굴러갔다. 시계의 시침은 밤 12시 10분을 가리켰다. 자기엔 아쉬웠으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달이 뜬 새벽을 즐겁게 보내기엔 베스트 초이스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자며 말한 그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서는 양손에 갖가지 간식거리를 들고 왔다. 프레첼 스낵, 하겐다즈, 팝콘……. 제리는 아마도 5분의 4 정도는 전부 요슈아가 먹겠거니 싶으면서도 얌전하게 제리의 손에 쥐어진 스푼을 받았다. 불을 끄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스크린의 세상이었다. 브레이브 차일드의 공연 영상, 최신 뉴스, OTT 플랫폼의 최신 유행 드라마. 작은 직사각형 속 세계는 그 너머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오락거리다. 제리는 리모콘을 조작해 세상이 칭송하는 로맨스를 재생했다. 잔잔한 OST와 함께 수수한 화장기가 감도는 여주인공이 나타났다. 반짝거리는 필름 효과, 덧없는 인생. 끝을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을 담은 이야기. 제리는 여태 그랬듯 그런 이야기에 익숙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에 들린 프레첼 스낵 한 개를 빼냈다. 가루가 치마폭에 떨어져 그것을 털어냈다. 자? 이불 아래 보이지 않는 이에게 속삭이듯 작고 섬세한 목소리가 제리의 귀를 간지럽혔다. 제리는 비몽사몽한 정신에도 느슨하게 답했다.


"……아니…."

 

뮤지컬 영화였는지 여주인공이 노래를 시작했다. 파란 미니 드레스 천 자락을 휘날리며, 보랏빛으로 보정된 하늘빛에 반사되는 구두부터 클로즈업해 그의 얼굴까지 훑었다. 영화를 트는 순간 그들의 이야기는 대사나 장면으로 처리된다. 그러니 요슈아가 고개를 기울여 그림자가 드리운 눈동자를 집요하게 살폈다.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 그렇게 약속하며 줄곧 바라본 눈. 요슈아는 제리가 늘 로맨스만 틀었다 하면 눈을 감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 서리는 기대와 떨림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 갔다.


"나, 네가 로맨스 영화만 보면……. 늘 잠드는 이유를 알았어."


제리는 부스스한 상대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영화의 소리가 커졌다. 땅바닥을 밟고 구두를 두드리며 춤을 추는 두 남녀. 치아를 드러내며 웃을 때 움푹 팬 보조개의 사랑스러움을 알고 있었다.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기쁨에도 익숙했다. 요슈아가 제리의 이마에 입 맞출 때마다 간지러움이 필요 이상으로 쏟아졌다. 물음에 느리게 답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까."

 

결국 영화는 실재를 연기하는 장르이다. 그러니 이미 가지고 있는 현실의 열화판이 아무리 좋아봤자 현실에는 빗댈 수 없다. 그러니 제리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의 클라이맥스 씬을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이다. 눈을 깜빡거리던 여주인공이 한참 말을 곱씹다가 웃음을 흘렸다. 기뻐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이다. 분명 처음 앉을 때는 소파가 넓었으나, 여주인공이 웃음을 참으려 느릿하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면적이 좁아지는 듯했다. 남주인공이 소파 윗동을 잡고 아예 옆에 들러붙어 몸을 구기고 누웠다.


"정답이야?"
"말해야 알겠어."
"응, 난 누구 씨의 말대로 귀여운 쪽이라 어쩔 수 없어. 그래서…… 맞아?"


여기서 OST가 흘러나오고, 직사각형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갔다. 그는 뺨을 쓰다듬으며 부닥치는 살결에 신경을 집중했다. 뼈가 도드라지는 얇은 목선에 머리를 기대기 전 두 눈을 응시했다. 서로의 눈에 완전히 상대가 담겼다. 하얀 모래가루가 떨어지듯 그의 홍채서 작은 반짝임이 끊임없이 빛났다. 여주인공은 연인이 못 견딜 정도로 사랑스러워, 그 답지 않게 두 뺨을 붙잡고 예고도 하지 않은 채 입 맞추었다. 그의 낯짝이 한없이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푸슬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이야. 그러니 내 대답도 정해져 있겠지.


"정답인가 봐."

그는 잘 웃고서도 뭔가 남았다는 것처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미 다 풀어헤쳐진 여주인공의 머리를 그가 쓸어 올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가볍게 떨어지는 온기를 쫓아가듯 틈새가 좁혀졌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야.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 둘은 눈부신 하늘 아래서 키스하거든. 그는 그의 의도를 늦게나마 알아차렸다. 강아지가 아니라 순 여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스태프 롤이 올라가기 전에 다시 한번 키스해줘."


하지만 뻔한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하얀 카사블랑카니까.

 

……스태프 롤 시간이 다가왔다.

 

 

여주인공 Jerry 

남주인공 Joshua 

감사한 이 You

Merry Christmas, Mr. Lawrence
Merry Christmas, Mr. Lawrence

@abcdefg11

 

성탄 전후, 연말은 어려운 계절이다.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그들이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길 바라며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를수록 내 안에서 이중적인 감정이 커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미소짓고 모두가 소중한 사람과 행복 속에서 특별한 나날임을 만끽한다. 나또한 그런 사람들의 일원이 되어 이야기하고, 웃는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환호받고 환영받는 내가 사실은 그들의 기분을 망칠 만한 사람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게. 축제를 망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클수록 나는 더 위축되고 더 대범해지며 더 위태로운 하는 기분 속에 놓인다.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고 어디까지 잘 숨기고 있는지 숨 막히는 외줄타기. 


"요슈아, 고생했어! 와 줘서 고마워. 메리 크리스마스!"

"응, 나야말로 초대해 줘서 고마웠어. 메리 크리스마스."

 

그러나 다행히 올해 연말도 무사히 보낸 것 같다.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활기로 가득차 있고, 조명과 불빛이 만드는 빛 아래서 환히 반짝인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다. 그들이 눈치채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안에 있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드러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안도 속에서 나도 비로소 진심으로 미소짓는다. 그리고 배웅 나온 사람이 집 안으로 도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문이 단단히 잠기는 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몸을 돌린다. 차를 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거리를 걸어다니는 건 더 고역이라 순순히 하얀 택시에 몸을 맡긴다. 

 

차창 밖으로 흰 눈이 엄지손톱만치 커다랗게 펑펑 쏟아진다. 

그리워할 사람이 없어야 정상일 텐데, 존재하고 마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오게 됐을까, 나에게는 분에 넘치고 자격도 없는 일일 텐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져서는 안 될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꾹꾹 누르기만 하는 나에게 이해자… 신뢰자 같은건 없어야 마땅할 터다. 그런데도 마치 괜찮다는 것처럼, 그 이상의 이유를 상상할 수도 없게끔 그런 사람이 곁에 있어 왔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이 일이 주는 기적을 생각한다. 성탄(聖誕)도 거룩도 믿지는 않지만 그런 게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해 주는 우리의 사건을, 만남을 생각한다. 생각은 흐르고 흐르다 보면 다시 그리움으로 가 닿는다. 그 그리움은 바다 같은 것이라 끝이 없다. 나는 바다처럼 그 아이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여 그리움에 수몰된 채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투박한 문자 창 위로 보잘것 없는 단어들을 써 내린다. 

 

「제리.」 

 

…사랑하는 이름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 옆으로 단어들을 덧붙인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스노우 크리스마스야. 너랑 같이 눈길을 걸으면 좋을 텐데 생각해. 생각으로 끝내야만 한다는 점에 안심하는 나를…」 

 

글로도, 손가락으로도, 마음으로도 망설이고 마는 나. 여전히 이래도 괜찮은가 의문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그런 나를 상대는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믿어 준다. 


「네가 용서해주리라 믿어서, 많은 간절함 끝에 그럴 수 있게 돼서, 기뻐.」 

 

그렇다면 나는 고마워와 좋아해 중에 어떤 것을 말해야 올바를까? 나는 아직도 나의 감정에 제대로 이름붙이는 법을 모른다. 
그렇지만, 제리라면 내가 둘 중 어떤 단어를 고르더라도, 혹은 둘 중 어떤 단어도 고르지 못하더라도, 이 문장들 속에서, 핸드폰 화면 너머 조금 먼 곳에서 내가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은지 알아줄 걸 알기에…. 
앎과 믿음이 주는 평온함 속에서 나는 짧게 세 단어를 더한다. 

 

「좋아해.」 

 

둘 중 어느 쪽일지 정하지 못하겠다면, 더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걸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들어서. 
이 욕심 또한 부디 용서해 주기를.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한참 지나 쌓인 눈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할 때여도, 내가 조심스럽게 "오늘은 다른 사람들에겐 무엇도 아닌 날일 테니까, 그 거리 사이를 함께 걸어주지 않을래," 라고 손 내밀었을 때에 그또한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기를. 
그래서 우리가 모두가 축복하는 날에서 조금 동떨어진 하루일지라도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웃고, 행복해하고, 특별한 나날을 만끽해도 되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MID-DREAM NIGHT
MID-DREAM NIGHT

@mochacreamsoda

 

 

어린왕자는 장미를 사랑한다 그 간단한 명제를 부정할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미는 어린왕자의 유일이었고 수많은 장미꽃 사이에서도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으므로 모두가 어린왕자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장미가 또한 어린왕자를 사랑했다 믿는다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 찾아줄 때까지 찾아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그러나 이는 맹목이지 맹종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간결하고 명료한, 애정, 그러니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장미와 어린왕자
장미와 어린왕자

@mochacreamsoda

유일이라는 단어에 관해 생각해 봤어

 

 

늦겨울과 초봄의 사이 쌓였던 눈이 녹으면 길가에서도 푸른 녹음이 피어오른다. 급히 달려온 것이 뻔한 낯으로 숨을 몰아쉬던 요슈아는 제리를 마주하고서야 활짝 웃었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은 고작 반이 보였는데, 그 정도로도 제리는 요슈아의 웃음을 찬란하다고 생각하였다. 산책하러 가자, 제리. 마지막 눈 구경이야. 이제 곧 봄이니까. 다소 느닷없는 말이었음에도 그의 소꿉친구는 외투를 챙겨 입고 나왔다. 마지막, 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아니. 기실 제리는 어떤 이유로든 요슈아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어 보이는 그라면 더더욱.

함께 걷는 길에는 사람이 적었다. 너랑 데이트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어느 하루 장난스레 으스대던 요슈아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는 끊임없이 제리에게 말을 걸었다. 밴드 맴버들에 관하여. 준비하고 있는 앨범에 관하여. 노래와 겨울과 봄과 세계에 관하여. 듣기 좋은 미성은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다른 온도를 가지고 근처를 유영해서, 제리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요슈아에게는 본디 다소 뜬금없는 면모가 존재했다. 천재라는 미명을 가진 이들이 늘 그렇듯, 독특하다 형언할 만한 구석이었다. 그리고 하늘 아래 요슈아의 그런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를 꼽으라면 이는 분명 제리일 것이라서. 의아함은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았다. 이 모든 발걸음이 끝난 뒤에는 얘기해줄 테니까. 왜 그렇게 급히 뛰어왔는지,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뭔지, 너의 뺨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음을 너도 알고 있는지.

왜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는지.

 

"제리."

 

자주 들르는 공원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야 요슈아는 제리를 불러세웠다. 자리에 멈추어 서는 요슈아를 따라 제리는 시선을 올린다. 어렸을 적 함부로 붙잡았던 손은 이제 와 비어 있었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애정이 깊어졌다 한들 두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다만 소꿉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그 전부를 자행할 수는 없다고……. 그런 걸,
누가,
누가 정했어?


"제리, 좋아해."

 

요슈아의 고백은 근사한 레스토랑도 멋진 명소도 아닌 두 사람에게 퍽 익숙한 공원에서 이루어졌다. 즉시 답하지 못했던 까닭이란 그가 너무나도 행복하게 미소했기 때문이다. 붙잡힌 손에서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체온이 느껴졌고 그래서, 제리는 조금 망연해졌다. 제리라고 어째서 이 손끝을 맞잡고 싶지 않았겠는가. 수를 세지 못할 밤의 상처가 아로새겨진 피부. 조금은 창백한 혈색. 그럼에도 따스한, 이, 감각…….
요슈아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 본다면, 그를 아끼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렇기에 겁을 냈다. 이 불가항력의 애정이 언젠가 그를 상처 입힐까 두려워했다. 우리는 아닐 거라고 단언할 수 없잖아. 사랑에도 끝이 있다는데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그렇다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올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직접 겪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명제들이었다. 요슈아 역시 마찬가지라고만 여겼다. 제리가 떨리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요슈아……."
"네가 뭘 걱정하는 건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몸을 허물어뜨리려던 불안은 그 나직한 음성에 잦아드는 풍랑처럼 사그라든다. 나를 잃을까 무서운 거지, 제리. 우리는 둘 다 고슴도치 같은 사람이니까. 욕심을 부리다가 상처 입고 멀어질 바에는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을 거라고……. 영영 헤어지는 것만은 싫다고.
그의 표현이 정확하다. 요슈아와 제리는 언제나 가시를 세우고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둘의 가시는 안을 향해 있었다는 점이다. 타인을 아프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습관. 통증으로부터 유리되기에는 너무도 상냥한 이들이었다.
제리는 요슈아를 올려다본다. 흔들림 없이 확고한 눈동자가 좋아서. 이런 순간조차도, 그를 아끼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괜찮아. 떠나지 않아."

"……."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소꿉친구야. 너와 내가 함께 보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언제 찾아올지 모를 이별을 걱정하느라 지금의 감정을 속이는 건, 너무 아쉽지 않아? 요슈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다. 만약 그의 말간 얼굴에 망설임이 얼룩져 있었더라면 제리는 불안을 거두지 못했을 터다. 그러나,
요슈아는 티끌만 한 그늘 하나 없이 제리를 마주했다. 제리는 요슈아를 안다. 그가 아무런 걱정도 않고 이런 말을 할 인물이 아님을 안다. 필시 끊임없는 생각을, 생각을 거듭했겠지. 수많은 가능성을 가늠하다가 그러고도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제리가 있는 곳으로.


그러니까 제리는…….
요슈아의 전력을 외면하는 법 따위 몰랐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
"더는 무서워하고만 있을 수가 없잖아."

세계 제일의 겁쟁이인 두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보다 용기 있는 이들이다. 제리가 웃었다. 요슈아와 꼭 닮은 꼴의 웃음이었다. 정반대의 서로가 가장 닮아 있는 아이러니. 그 차이와 그 공통을 사랑하였다.

 

"나도 좋아해, 요슈아……."


아주 오래도록 감춰 왔던 문장을 입에 담으면 저도 모르게 행복해진다. 괜찮겠지.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괜찮지 않은 새벽마저도 함께 걸어왔으니까. 괜찮지 못하더라도 서로가 있다면 괜찮을 수 있다. 꼭 모든 순간마다 강해야 하는 건 아닌걸. 요슈아가 제리에게, 제리가 요슈아에게 알려준 하나. 그러므로 그가 내딛은 한 발짝은 분명 무용하지 않을 터였다.
길거리에서 손을 잡는 일이 이렇게나 낯설구나. 그동안은 아무 이유도 없이 손가락을 얽은 채 걷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간지러운 기분을 구태여 외면하지 않는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차가웠던 손끝에 온기가 도는 듯했다. 두 사람의 걸음 뒤로 눈이 녹았다. 다시 한번 봄이 온다면 그에는 꽃이 피겠지.
그래, 꽃이 핀다.
지더라도 다시 피어날 꽃이다.


외롭지 않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반전한 중력의 끝에
반전한 중력의 끝에

@PENETRANTFORA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꿈을 그린다면, 꿈은 꿈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같은 차이점. 괴리가 얼마나 큰지도 머리에 착실에 새겨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해하며 깨달은 거리를 수치화하게 되었다. 도에서 높은 도에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단번에 올리지 못하는 거리. 손바닥이 찢어져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과거에 그린 꿈과 현재의 현실이었다. 손에 더 힘을 주지 못하고 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맥없는 소리가 났다. 창백하고 작은 비명이 공간의 크기를 한정하고 있었다. 커다란 장소에 고립되어 있음이 달팽이관을 돌았다. 입술을 물면 경계선에서 벗어나 완벽한 현실로 돌아왔다. 떨리는 팔을 올려보면 벌어진 살 사이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손목에서 아래로 떨어지지만, 바닥은 젖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중간을 감쌌다. 요슈아의 창백한 숨이 살갗 안을 파고들었다. 손바닥은 피로 흠뻑 젖었다. 서서히 피가 멎는 동안 요슈아는 자신의 상처를 관망했다. 스스로 의지로 몸에 상처를 내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답답한 육체 안을 활발하게 휘젓는 액체의 색을 확인한 게 전부였고, 답답하더라도 이것을 유지하고 싶다는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는 끈적한 혈액을 강하게 붙들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리… 무의식 속에 꺼낸 이름이었다. 혀에 가장 깊게 남은 단어. 곧 그의 얼굴의 형체를 그려낼 수 있었다. 이유는 당장 찾을 수 없었지만, 요슈아는 그가 간절했다. 진동하는 손이 멈추지 않았고 느린 호흡은 심장이 열 번 뛸 때마다 뱉었다. 좁은 간격의 심장 소리가 선명해서 귀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제리가 옆에 있다고 해서 밴드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피가 바로 멎지도 않고, 해결될 상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요슈아는 고통을 통해 삶을 갈망하는 동시에 제리가 곁에 있어주길 원했다. 제리의 밝은 눈을 마주봄으로써, 옆에서 내쉬는 숨을 들음으로써, 손을 잡지 않아도 밀착한 온도에서 삶이 충족되는 사람처럼. 만나지 않은 시간에도 가끔 그를 떠올렸지만, 이만큼 원한 적이 있던가. 요슈아는 찬찬히 첫만남부터 시간을 되짚었다. 그리고 제리의 시선이 향해있는 곳을 떠올렸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끝으로 강하게 내려치는 음을 친애했다. 손목에는 빨간 색이 흘러도 생동감은 없었고, 제리가 친애하던 음은 이 손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제리에게 이것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꿈과 현실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꿈은 모든 개념을 부숴 존재하는 반면 현실에는 중력부터 강하게 끌어서 피가 결국엔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도시에 있는 제리와는 거리가 있어서 얼굴을 마주볼 날도 제대로 마련하기 어려웠다. 같은 마음이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답답하게 감정을 간직하기보다도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치기 어린 충동보단 옛날부터 쌓아온 감정의 결론이었다.

 

"보고 싶다."


천천히 일어나서 싱크대에서 물로 팔을 깨끗이 씻어냈다. 속이 울렁거리는 이유는 현실과 꿈이 충동하고 있어서였다.

반전되는 중력의 시작
반전되는 중력의 시작

@PENETRANTFORA

 


오랜만에 만난 요슈아의 얼굴은 여전했다. 변화가 없다는 건 언제나 봤던 요슈아이면서 제리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요슈아 자체라는 뜻이었다. 서로 발견하자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갔고, 함께 벤치에 앉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짧은 계절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모호한 날씨가 이어졌다. 먼저 그간 만나지 못했던 주된 원인인 중학교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에는 친구들, 선생님에 대한 것. 정보라기엔 부족하지만,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 초등학교의 졸업식을 마치고 계절이 지나더라도 바래지 않은 색이 이곳에 존재했다. 제리는 음악에 대해서도 물었다. 요슈아는 제리와 달리 음악을 좋아하고 재능도 충만했다. 요슈아는 기다렸다는 듯 작곡한 노래를 휴대폰에 담아왔다며 꺼냈고, 이어폰을 하나씩 꼈다. 눈으로 별것 없는 사인을 맞추자 요슈아는 재생을 시작했다.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며 들리는 부드러운 선율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제리는 눈을 감고 요슈아가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긴 손가락이 짚어나가는 세상은 제리가 사랑하는 것 중 하나였다. 요슈아의 전부가 담겨있는 것 같아 제리는 넘치는 심장의 고동도 듣지 못한 채 집중했다. 경쾌한 끝의 찰나, 제리는 세상의 침묵을 들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고, 제리는 그의 눈동자에 들어간, 투명하게 빛나는 자신의 눈까지 포착했다. 요슈아는 밝은 미소로 보답했다. 제리가 솔직하고 느낀 그대로의 감각을 쏟아내고 있자 올라가는 입과 휘말리는 눈 끝이 계절의 모든 게 녹아내린 것 같았다. 옷 위에 카디건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는 어색한 계절조차도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초점이 그에게 맞춰졌다. 세상이 커다랗게 한 바퀴를 돌아 정착하여 마침내 마주한 기분. 한 번 번졌던 미소가 표정에 배어 제리에게는 요슈아가 계속 웃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저물며 두 사람은 일어났고 요슈아는 제리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다음에 또 보자."

 

공백에 비해 만남은 짧았다. 가끔 전화나 라인을 한다고 해도 얼굴을 마주하고 옆에서 온도를 나누는 것은 달랐다. 손을 흔드는 동작도 느리게 하면 시간이 더 늦어질까 천천히 움직였다.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아쉬워서 발을 못 떼고 있었더니 마음이 통한 것처럼 요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한 번 더 손을 흔들고 제리는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멀리서도 보인 미소가 아른거렸다. 제리에게 라인으로 요슈아의 음악이 도착했다. 그가 알고 있는 요슈아지만, 그에게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웃는 모습이 어딘가 달라졌다. 노래를 틀고 만나지 못했던 시간의 길이를 생각했고, 침대에 누운 자신의 발끝이 침대의 끝자락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화는 늘 제리에게도 작용했고, 요슈아는 제리의 중력을 바꿨다. 그러나 요슈아에게 이것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요슈아의 중력도 파괴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제리가 좋아하는 미소가 변할 수도 있었다. 제리는 지금의 거리가 좋았다. 친구와 친구, 시간이 되면 만나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음악에 대해 묻는 적당한 관계. 그러나 중력을 되돌리지는 못할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보는 가장 첫 번째이자 아름다운 풍경
우리가 함께 보는 가장 첫 번째이자 아름다운 풍경

@abcdefg11



눈이 아릴 정도의 하양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가쁜 숨을 하얗게 내쉬자 들이마실 공기가 희박한 것이 느껴졌다.
어떤 포켓몬도, 어떤 식물도 살기 어려운 극지대. 그 이름답게 이곳은 돌아봐도 돌아봐도 오로지 눈, 눈이 만든 새하얀 언덕, 그리고 우리가 그 언덕길을 오르며 함께 만든 발자국 뿐이었다. 자신은 평소 포켓몬들과 함께 많은 곳을 다녀왔지만 제리는 어떨까, 돌아본 제리는 아니나 다를까 조금 벅찬 듯 숨이 가빴지만 시선이 마주치자 응? 하는 시선을 던지면서도 엷게 미소지었다. 잡아도 괜찮다며 손을 건넨 건 그래서였다.

가슴이 미어지는 표정이었다. 제리의 얼굴은 늘.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마음을 정했다. 세상의 이름이 적힌 글자들과 생김새, 너비, 지형에 대한 그림을 볼 때마다 심장 한 켠이 고요히 박동을 전했다. 저곳으로 가 보고 싶다, 지도 속 실제의 장소에는 무엇이 있는지 두 눈으로 보고 싶다, 타인이 전하는 말과 묘사가 아니라 내가 듣고 느끼는 경험을 원한다. 마음 속 목소리는 분명했고 따르는 것은 어렵 지 않았다. 든든한 동료들도 함께였으니까.
어려운 것은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두고 가는 일이었다.

어쩌면 말로나마 권해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함께 가지 않을래, 나는 너랑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거절당한다면? 제리는 가고 싶은 곳 같은 건 그다지 없는 듯했고 그래서 그 애의 일상은 평온함에 둘러싸여 있었다. 머무르는 장소에서 아무 일 없더라도 스스로 불안을 감지하고 느껴버리는 나와 달리 색채에 둘러싸인 환경, 풍경. 내가 제리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미안해"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 "꼭 그래야만 해?" 같은 답이 나와 버린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터였다.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듣는 의문이나 거절을. 이건 오로지 내 문제였다. 나라는 인간의 속성의 문제.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어서 마을에서 나오는 시간을 더 앞당겨 버렸다. 도망치듯 뒤로한 마을에서 제리가 말한 "기다릴게"도 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비겁하게.
그렇지만 돌아오는 것도 결국 나였지. 당연했다. 나는 이 애를….
나는 이 애와….

함께 가주지 않겠느냐고 말한 직후 향한 곳이 어떤 색채도 없는 극지방인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우리를. 그리하여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어떤 색채도 없고, 추위 뿐인 곳에서도 정말로 괜찮겠냐고, 나와 함께해 줄 거란 게 맞냐고.

그리고 내가 내민 손을 제리는 그 어떤 의문도 거절도 내밀지 않고 잡는다. 단단하게. 그 어떤 색과 풍경이 펼쳐지더라도 자신의 마음은 진실로 한결같은 거라는 의지를 담아.
미어진 마음에 충만이 눈보라처럼 불어온다. 하얗지만 반짝거리며, 서늘하지만 홀릴 수밖에 없게.
잡은 손을 단단히 마주 잡고 제리와 나란히 서 꿈에 그리던 말을 담아 본다.

"나와 함께해 줘서 고마워."

여기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담겼는지 너라면 알아줄까.

"너와 함께하고 있어서 기뻐."

통상적인 말 하나를 뱉지 못해서 수많은 지역을 헤메고 그곳에서 다른 기쁨을 찾으려 해보고 짧은 기쁨 속에서 나의 문제를 잊으려고 했던 비열함을 용서해 줄까.
아마…… 이 애라면 그래줄 것이다.

하여 잡은 손을 놓치는 법 없이, 놓치는 상상 따위는 결단코 하지 않으며, 끝없이 펼쳐진 이 하양처럼 끝없이 함께하는 미래를 손 안에 함께 쥐고서 걸어간다.
걸어가는 눈앞에 언덕길이 내리막길로 변하며 엷은 주홍빛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이 풍경은, 틀림없이…….

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xngkgkB

 

 

제리가 방에 들어섰을 때 요슈아는 제리의 침대 위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자취방에 함께 들어섰다가 잠깐 제리가 음료를 사 온다는 사이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아마 침대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그만 한 번 눕고 나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생각한 제리는 겸연쩍게 웃으며 손에 들린 음료 캐리어를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따뜻한 캐모마일 티와 헤이즐넛 카푸치노. 두 향 섞이면 어지러울 법도 하건만 김이 새지 않는 것은 그 위에 플라스틱 뚜껑이 덮인 덕이다. 따끈한 온기만 제리의 한 손에 미약하게 남아있어, 제리는 스스로의 다른 손을 들어 제 손바닥에 부비며 손을 녹였다.
그러면서 눈길은 한편으로 요슈아를 살폈다. 연인의 모든 순간을 눈에 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땋아 내린 머리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따라 모로 기울어질 때에야 제리는 자신이 요슈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등의 불빛이 동그랗게 떨어지면 제리의 그림자가 옆으로 누운 요슈아의 뺨에 희미하게 지고 있는 것이다. 귀의 피어싱도 빼지 않고 잠든 요슈아의 긴 속눈썹이 역시 그의 뺨에 한 겹의 얕은 음영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보다는 이제 청년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는 얼굴이 다. 멀어진 유년을 떠올리며 제리는 잠깐 우울해지려던 것을 고개 저어 애써 떨쳐냈다.
그 대신 제리는 침대 옆에 앉았던 몸을 조금 더 가까이 해 요슈아의 옆 침대 맡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는 동안 요슈아는 잠시 소리 없이 뒤척이는 듯하더니 옆에 있는 제리의 손을 붙들었다. 제리는 순간 화들짝 놀라 호흡을 멈추고 요슈아가 하는 양을 물속에서 숨 참고 바라보듯 눈을 크게 뜬 채로 지켜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요슈아는 이내 "으음." 소리를 내더니 잡은 제리의 손을 아예 제 품으로 당겨 안는 것이다. 덩달아 요슈아가 있는 방향으로 끌어당겨진 제리의 몸도 "어어," 하는 사이 풀썩 침대 위로 누웠다. 제리가 당황한 사이 잠든 요슈아는 더듬더듬 팔을 뻗어 버릇처럼 제리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필요한 것을 찾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제리는 이제 자신 손이 아닌 제리 자신을 아예 끌어안아버린 요슈아의 품속에서 얼굴을 들까, 말까 마구 뒤흔들리는 것 같은 심장을 안고 고민했다.
연인이라는 게 이렇게 편안하고도 두근거리고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몇 초 뒤에야 제리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잠든 연인은 아주 어렸을 적 보았던 무구하고 어린 낯이 아닌 현실을 걸어가는 낯을 하고 있다. 현실. 그 단어를 떠올린 제리는 문득 그를 다시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요슈아와의 관계의 정의란 제리에게 있어 늪 같던 우울에서의 느리게 뻗어진 구원과도 같은 것이다. 제리는 내도록 스스로의 최악을 자신마저 용서할 수 없던 지난날을 안다. 그래도 옆에 있을게, 라는 말은 그렇다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요슈아에게 '과분하다'는 말을 하거든 그는 미간을 좁히며 그게 아니야, 라고 말하겠지만.
내게 너는 기적이야. 제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요슈아 쪽으로 돌리고 팔을 뻗어 요슈아가 그러고 있듯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숨결도 닿을 거리에서 가깝게 본 그의 낯은 이제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희미하게 웃고 있다. 내게 너는 기적이야, 요슈아. 제리는 발음하지 못하는 말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도무지 놓고 싶지가 않아서 그랬다.

 


그러고서 깜빡 잠에 든 것 같았다. 소년이었던 요슈아와 자신이 나오는 꿈을 꾼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렴풋이 어린 요슈아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것만 떠올랐는데 그 몽중이 얼마나 모호하냐면, 아예 그때의 요슈아가 지었던 표정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제리는 부스스 눈을 뜨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겨울 속에 잠을 뉘고 있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눈꺼풀을 완전히 들어 올렸을 때,


"깼어?"
"……아!"
"……그렇게 놀랄 건 없잖아."


제리가 탄성에 가까운 단음을 뱉으며 얼굴을 붉히자 요슈아가 그제야 제리를 품에서 조금 떨어뜨리며 불퉁한 소리를 냈다. "……나도 놀랐다고. 끌어안은 게 너일 줄은 몰랐어. 너 기다린다는 게 그만."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는 요슈아를 보고서 제리가 그제야 한 번 웃었다. 문득 생각이 나 음료를 놓아뒀던 책상을 돌아보면 종이 캐리어에 담긴 음료 두 잔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창문 밖은 아직 까맣고. "다 식었겠다." 제리가 말하자 요슈아가 다시 거리를 좁혀 그를 안으며 말했다. "뭐, 괜찮아." 그 말 한 마디에 제리는 가져온 따뜻한 음료에 대한 아쉬움을 놓아두기로 하고, 대신 눈을 깜빡였다.


"요슈아."
"응."
"잠버릇이야?"
"…뭐가?"
"누구 끌어안고 자는 거."
"……내가 너 말고 다른 누구 끌어안고 잔다는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요슈아가 퉁명하게 말했다가 도로 멋쩍게 웃는다. 미소를 보고서 제리도 따라 짧게 웃었다. "일어나 보면 베개든 인형이든 안고 있더라고. 그런데 네 방엔 네가 있으니까……" 요슈아는 그 부분에서 일부러 말을 끊어내며 슬쩍 미소를 짙게 입술 위로 올렸다. "널 안아야 했나보지." 제리의 얼굴이 파드득 다시 붉어졌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섭섭하게 말한다, 너…….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잊은 거지."


장난스럽게 붙인 뒷말에 제리의 얼굴이 아예 완전히 달아오르자 요슈아가 손을 뻗어 손등을 제리의 뺨에 댔다. 미지근한 손등 위로 뺨에 오른 열이 그대로 옮겨 붙는다.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은 요슈아가 품에서 다시 제리를 떨어뜨렸다. 둘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요슈아는 제리가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에 있는 책상 위의 음료를 가져왔다. 양손에 들린 것 중 캐모마일 티는 제리의 것, 헤이즐넛 카푸치노는 요슈아의 것이다. 제리가 다시 조금 속상한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식어서 맛없지." 요슈아가 재차 "괜찮다니까." 말하고 나서는 표정이 풀리긴 했지만. 이제 둘은 따뜻하지 않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한 모금씩 음료를 마신다. 식은 차와 커피는 그래도 그런대로 향만은 제대로 남아 있어 맛이 나쁘지 않았다.


"나 꿈을 꿨어."

 

요슈아가 불현듯 말했다. 제리는 옆에 한 뼘 정도의 거리만 두고 앉은 요슈아를 돌아봤다. 달콤하고 쌉쌀한 헤이즐넛 향, 다 빠진 거품, 요슈아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제리를 보지 않고 꿈을 다시 더듬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 말고, 저번에 내 방에서 네가 잠들었을 때 말이야." 제리는 모호하나 그가 언제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요슈아의 집 거실 소파, 제리가 요슈아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을 때. 그때는 애초에 자신이 먼저 잠들었던 것 같아 멋쩍은 것은 덤이다.

요슈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앞에서…… 상처를 냈을 때 말이야."

"……."

"우리는 이제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제리는 눈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의 컵을 잡은 흰 손등에 힘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아직도 두려워……."

"……뭐가?"
"모르겠어."

 

최악을 이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최악까지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모르겠어, 라고 단정했으나 제리도 요슈아도 서로의 마음과 스스로의 마음을 알았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어둠 속에 갇혀 서로를 찾고. 제리는 눈을 깜빡이다가 식은 차를 다시 내려놓고 요슈아를 향해 몸을 틀었다. "요슈아." 제리가 부르면 그가 답한다. "응." 눈을 바라보며……
그 순간 제리는 자신이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해낸다. 꿈속에서 어린 네가 손을 뻗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웃고 있었다. 기실 너는 항상 내게,
제리는 팔을 들어 요슈아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므로 포옹은 가장 가까운 이별이라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가장 가까운 이별과 식은 차와 한 번 잠들었다 깨어나도 가지 않는 긴 겨울밤, 그래도.
네가 해줬던 말처럼.

 

"괜찮아."

"……."
"응. 괜찮아."

 

유년에서 지금까지 왔듯 우리는 앞으로도 함께 늙어가며 길을 걷겠지. 그 사실만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동시에 우리를 위로한다. 제리는 그의 어깻죽지에 이마를 대며 그럼에도 웃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리고 우리가 어두운 길 아닌 밝은 데를 향해 걸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랬다.
가만히 안겨 있던 요슈아는 마치 잠버릇처럼 제리와 같이 팔을 들어 제리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는다. 그 역시 고개를 제리의 목덜미에 묻으며, "맞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밤이 길어 둘은 다시 잠들려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제리의 방 침대는 조금 좁았기 때문에 함께 잠들려거든 아까처럼 두 사람이 안은 채 자거나 아주 붙어 자야 했다. 제리는 아까도 품에 안겨 잠들었으면서 괜히 쑥스러워 "미, 미안," 이나 연발하고, 요슈아는 슬쩍 웃으며 "이제 내 잠버릇 알지." 벌써부터 제리를 안을 준비를 한다. 서로의 체온이 뭉근하게 몸에 눌러 붙고, 그럼에도 긴장되기는커녕 편안하다는 감각이 먼저 들었다.
제리는 땋은 머리를 풀고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이불을 끌어올려 요슈아의 어깨 위로 덮어준다. 요슈아는 이불에 제리의 얼굴이 가려지는 게 싫어 손을 올려 제리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도록 조금 틈을 낸다. 시선이 마주치면 정해진 규칙처럼 웃는다.
우리 함께하자, 여전히 이렇게. 깨어지지 않는 꿈이 밤이 지나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xngkgkB

 

 

요슈아는 거실 소파에 드는 볕을 본다. 정확히는 제리가 잠들어 있는 발치에 드는 햇볕이 어디까지를 밝히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겨울이긴 하나 유리창으로 가로막힌 찬바람은 들지 않고 햇빛만 유리를 투과하여 제리의 발끝을 비추고 있었다. TV도 틀지 않은 터라 아무 소음도 이 정적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제리처럼 잠들기라도 할 듯이.

진행하던 요슈아의 작곡도 끝냈고, 모처럼 일이 없는 한가롭고 따사로운 오후였다. 함께 맞은 휴일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며 고민하다 둘은 같이 소파에서 잠에 들었다. 일어나면 느지막한 대낮이어서 아연해졌건만, 늦은 아침을 먹고 난 뒤 제리는 몰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잠들었다. 요슈아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상체만 뉘어 잠든 제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바로 두었다. 혹여 자세가 불편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염려가 무색하게 제리는 좀체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조심스레 움직여 잠든 제리를 살짝 들었다. 이번에는 자신 무릎에 연인이 머리를 괼 수 있도록. 평소처럼 땋지 않고 있던 제리의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제리가 뒤척이거나 깨어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그럭저럭 편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처음에야 TV를 틀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금방 소리에 제리가 깰 것 같아 그마저도 켜지 못하고 그는 연인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따사로운 햇빛이 제리의 발치에서 무릎으로 올라가고, 길게 늘어진 창 모양의 네모난 볕이 마침내 얼굴까지 비출 적에 제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뒤척일 때에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에겐 더 이상 들킬 것이 없는데. 없나? 요슈아는 잠시 고민한다. 정말로 없나?

기실 숨기는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불안까지 온전히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바닥에 앉아 반대쪽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이따금 한 번 잃어버릴 뻔한 이를 본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얕게 눈가 아래로 그늘을 만드는데 그마저도 따뜻하다. 요슈아는 생각한다. 너는 모르겠지. 눈을 감는다.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무엇을?

 


깜빡 잠이 든 속에서 요슈아는 제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선잠이므로 어렴풋이 꿈임을 알고 있었으나 서 있는 뒷모습이 지나치게 위태로워 달려가 그 등을 끌어안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언젠가 본 것 같은 모습이다. 또 다른 요슈아가 제리와 마주보고 있다. 제리는 커터칼을 들고 요슈아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결단하듯이 스스로의 손목을 그었다. 날이 흰 팔목을 순식간에 긋고 지나가고, 붉게 그인 선 위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 곧 팔을 기울이면 떨어지는 핏줄기가 된다. 뚝뚝 떨어진다.
저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것이 익숙해졌다는 말. 속으로 무슨 말이건 삼켰다는 말.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다는 말. 이별 대신 계속 함께 있겠다는 말.

요슈아는 사실 그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무서워. 네가 어디론가 사라질까봐. 그런데 이 두려움이 너를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혼자 남겨질 나를 위한 것일까 봐 그게 더 끔찍한 것 같아. 너를 붙잡아 가두려는 것도 어쩌면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일 것이라고, 간신히 입을 떼지만 꿈속의 너는 답이 없다.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할 뿐이다. 입을 어물거리면서 모호한 발음으로, 그러면 나는 선명한 핏물을 보면서…….
요슈아는 그래서 깨달았다. 사실 나약한 건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인정하고 나면 꿈은 세찬 바람으로 답한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자상을 입히듯 몸을 스치고 지나가고 멀어지는 등을 보면서 요슈아는 겨우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가지 마. 가지 마, 제리.
그때에 그를 꿈에서 끄집어내는 또 다른 목소리가 하나 있다.

 

요슈아…….

 

그 순간 요슈아는 눈을 뜬다.


잠에서 깨어났다.
요슈아, 불렀던 목소리 탓에―그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꿈의 여파로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마구 두리번거린다. 어느덧 바깥에 내리쬐는 햇볕은 붉게 변했고, 서서히 노을로 변해가는 도중이다. 아래를 보면 제리는 자신 무릎을 베개 삼아 그대로 소파에 잠든 채인 모습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요슈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로 내쉰다. 한숨처럼 호흡이 흩어진다. 시계를 확인하면 막 졸기 시작한 때로부터 한 시간 남짓 지났다. 어쨌든 제대로 든 잠은 아니었다.
낮잠으로 무거워진 몸 그러나 제리가 제 무릎에 있었으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요슈아는 그래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손을 들어 가만히 제리의 어깨를 토닥이는 편을 택했다.
세상모르고 잠든 이의 머리카락이 뺨이며 소파 팔걸이에 흐트러졌다. 이제 제리의 상반신을 무겁게 덮는 주황빛의 햇빛은 그럼에도 검은 머리카락을 은빛으로 잠시 착각할 듯 눈부시게 반짝이게 만들었다. 요슈아는 햇빛에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아예 눈을 감았다. 어떤 눈부신 순간. 제리와 함께 있는 순간들이 모두 이렇다면 몹시 섭섭할 것이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면 너를 소리로만 더듬어야 할 테니까. 요슈아는 눈꺼풀에 내려앉는 햇볕의 온기를 느끼면서 다시 느지막이 눈을 떴다.
그때에 제리의 작은 입술에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슈아."


요슈아는 정적 속에 내버려진 것처럼 깊게 침묵했다. 제리가 한 번 더 웅얼거렸다.

 

"…요슈아."

아마 자신을 잠에서 깨운 목소리도 제리의 것이리라. 몽중에서 자신을 부른다는 것이 가슴 뻐근하게 흡족했으나 동시에 꿈속에서조차 불안에 휩싸여있는 것은 아닐지. 이미 함께 나아가기로 했었으나 혼재하는 감정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슈아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뺨에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준다. "있잖아……." 눈을 감은 제리가 꿈속의 자신에게 하는 듯한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를 토닥이던 손이 공중에서 멎는다. 요슈아는 잠자코 제리의 말을 기다린다.


"나……."
"……."
"네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좋아…."

왜 사랑은 이다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가.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요슈아는 잠들기 전 자신이 속으로 했던 말을 복기한다.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내가 널 잃을까봐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내가 네 앞에서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결국 사랑이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다고 요슈아는 생각한다. 네가 좋아. 그런 말을 들어도 해갈되지 않는 깊은 두려움이 있다고. 그것은 그리움의 형태와 지독하게 닮아서 제 옆에 있는 이의 존재를 확인하듯 끌어안듯 해야 겨우 잠잠해질 수 있는 종류였다.
그러나 나약해지면 어떠한가?
네가 있어서 나는 기꺼이 약해지고 동시에 강해진다. 나를 지키고 너를 지키는 나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 강해지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손을 잡고 곁에 있기로 했으므로.
요슈아는 숨을 느리게 들이켰다가 견디지 못하여 고개를 깊이 숙인다. 제리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면 감촉에 그가 금방 깨어난다. 제리가 작게 웃었다. "뭐야, 요슈아……." 제리가 웃기 때문에 요슈아도 함께 웃었다. 그의 등 뒤로 노을이 진다. "네가 너무 안 일어나서……."


"보고 싶었어."


요슈아는 새삼스레 고백한다 보고 싶었다. 네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이 짧은 동안에도 무척 그리웠다.
제리가 환하게 웃었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꿈은 없으니 우리는 우리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테다. 제리가 잠에서 이제야말로 깬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응, 나도."

제리가 아프다
제리가 아프다

@ijeongsoga

 

 

제리가 아프다.


요슈아, 나 감기 걸렸어. 많이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나을 때까지는 데이트 금지. 옮을 수도 있으니까 절대, 절대로 찾아오면 안 돼?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문장의 나열에 요슈아가 눈을 천천히 키웠다. 제리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이 생소하게 다가와 놀란 감정 반,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는 제리의 당부에 갑작스레 걱정이 치솟는 마음 반. 아무래도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을 감당하지 못한 건지 몸 관리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가슴 속 갑갑함에 안절부절못하듯 입술을 깨물었다가, 그것이 하얗게 물드는 감각에 작은 탄식과 함께 깨문 입술을 놓고. 답답하다는 듯 옅은 인상을 쓴 요슈아가 휴대폰의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열나지는 않아? 물 많이 마셔. 몸도 따뜻하게 해.


정돈되지 않아 다급하면서도 다정한 말들이 제리와의 채팅방에 쌓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제리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괜찮다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음에도 단호한 마지막 문장에 요슈아는 차마 제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제리가 그리 원한다면 꼭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나 없어도 괜찮아?


그래서, 그래서 보낼 수 있는 솔직한 물음이었다. 제리의 당부인 만큼 꼭 지켜주고 싶었기에 재차 확인받고 싶었다. 괜찮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바랐지만, 그녀가 제게 어리광을 부려주길 바랐지만 정말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 대답해도 요슈아는 상처를 받을 생각도, 불만을 얹을 생각도 없었다.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제리가 요슈아는 필요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믿음이 굳게 존재했다.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부터 차오르는 불안은 휴대폰 너머로 듣는 제리의 목소리만 있다면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답장이 온다면 요슈아는 제리에게 달려가는 대신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제리에게서 돌아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초록색의 말풍선 옆에 '읽음'이라는 두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 끌어올리고 끌어올려 길게 만들어 놓았던 요슈아의 심지가 급속도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달랠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불안과 걱정은 점점 증폭되었다.
피곤해서 잠들었을지도 몰라. 아니, 괜찮다고 안심시켜놓고 쓰러진 거라면?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한다. 요슈아가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자꾸만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지극히 요슈아의 기준이었지만, 한참, 한참을 기다려도 발신인의 이름에 제리가 표기되는 일은 없었다.
기다리던 도중 띠링, 하고 울리는 경쾌한 소리에 우스울 정도로 급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요슈아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길어지는 공백과 번잡한 생각에 복잡해진 머리를 그가 좌우로 흔들어 털었다.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요슈아가 코트에 제 몸을 꿰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마스크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제리를 믿고 있다는 마음과는 별개의 판단이었다. 결국 다급하게 열렸다가 지지해주는 이 없이 혼자 닫히는 현관문은 복도 너머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제리가 많이 아프지 않다 그랬어. 우리는 서로 솔직해지기로 약속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한 다짐 탓에 시작은 느렸지만, 걸음은 점차 조급해져 이제는 달리는 정도로 빨라졌다. 달리는 와중에도 연락 하나 없는 상황에 느긋하게 걷기란 쉽지 않았다.
제리와 함께 걸으며 구경했던 풍경은 눈길을 줄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쳤다.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하며 들렀던 자그마한 카페를 지날 때도, 음식을 먹으며 제리가 눈을 빛냈던 고급스러운 식당을 지날 때도 추억을 회상하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걱정에 요슈아의 숨만 점차 가빠졌다.
마스크를 쓴 탓인지 평소보다 호흡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잠시 멈춰섰을 때는 정신없이 찾은 약국에서 온갖 것을 쓸어 담느라 숨을 가다듬을 틈이 없었다. 물건이 잔뜩 담겨 늘어진 비닐봉지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어느새 도달한 제리의 현관 앞 복도를 부산스럽게 울렸다. 들이켰다 내쉬는 숨은 마스크에 갇혀 갑갑했다.
결국 더운 공기를 빼내려 요슈아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잔뜩 채우는 느낌은 달가웠으나 그 속에 제리의 향이 섞여있지 않음에 이상한 결핍을 느꼈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거슬려 그가 열도 식힐 겸 제 앞머리를 성의 없이 쓸어 넘겼다.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요슈아가 큰 한숨을 뱉었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지나쳐 온 풍경은 바라보지도 않았던 회색의 눈동자가 이제는 정지한 채로 익숙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이름난 보컬리스트라는 제 신분 탓에 자주 들르게 되었던 밀회의 장소이자, 저를 그토록 걱정케 했던 사람이 머무는 곳.
드디어 제리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들떴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게 정말로 들뜬 게 맞긴 한 건지. 요슈아가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을 애써 감추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탓인지, 제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요슈아의 얼굴에는 미묘한 초조함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불안함에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기다리던 요슈아의 귀에 언뜻 느릿하게 끌리는 발소리가 잡혔다. 그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챈 요슈아가 밀려들어 오는 안도감과 반가움에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무심코 "제리," 라는 이름을 입에 담아버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자신의 것과 유사한, 반가움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요슈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잠결이었으나 당혹스러움도 가득 담겨 있었다.


오지 말라 그랬는데 왜 왔어. 옮는다 그랬잖아….


언뜻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정말로 저가 없어도 괜찮냐 물은 메시지에 제리는 체면치레로라도 정말 괜찮다고 대답했을 거라는 걸.


내가 정말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 해줬잖아. …불안해서 그랬어.


그 탓에 요슈아는 잔뜩 기가 죽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른하면서도 잠겨있는 제리의 목소리가 걱정스러워 요슈아는 더욱 조심스러우면서도 작은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제리보다 크고 번듯했던 몸은 위축이라도 된 것처럼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아픈 사람은 제리였는데도,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요슈아였다.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제리가 아, 하는 탄식을 뱉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모습이 연상된 탓인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한 탓인지. 천천히 옮겨지는 제리의 발소리는 점점 현관으로 가까워졌다.


혹시 쓰러진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랬어. 약도 많이 사 왔는데, 잠깐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


요슈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콩,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에 이마를 맞댄 그가 속삭였다. 두꺼운 문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제리는 바로 제 앞에 서 있었다.


…따뜻한 녹차도 사 왔어. 이거라도 전해주고 싶어.


쐐기를 박듯 중얼거렸다. 제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움직여 부스럭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지라 틀림없이 들렸을 것이다.
너머에서부터는 안 되는데, 하는 잠깐의 망설임이 들려왔다.


제리, 나… 추워.


그 짧은 한마디를 마침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었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에서 한 발짝 멀어져 그것이 열리는 틈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요슈아가 제 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생기자 망설임 없이 제리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제리는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얼굴도 마스크로 가린지라 전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요슈아는 가까이서 그녀를 간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고 여겨, 안심한 듯한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당장이라도 제리를 품에 안고 보고 싶었다, 많이 걱정했다, 몸은 괜찮냐 잔뜩 제 감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무어라 그랬는지, 약은 챙겨 먹었는지. 묻고 싶은 것도 한가득이었다. 모든 걸 그녀를 제 품에 가둬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요슈아가 그런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제리를 단숨에 안으려다, 현관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자신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틀어박히는 그녀의 모습에 품을 따뜻하게 채우려던 요슈아의 행동은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당황한 요슈아가 그녀를 쫓으려다 철컥. 다시 문이 잠기는 소리에 몸을 굳혔다. 몇 초를 정지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역시, 멋대로 찾아오는 건 싫었을까? 그녀가 제 연락을 보지 않았을 때처럼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눈을 깜빡이는 것을 포함하여 굳어있던 요슈아의 모든 행동이 이완됐다. 다시 제리를 쫓아 잠겨버린 방문 앞에 조심스레 앉은 그가 문에 몸을 기댔다.
최대한 가까이 제리와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너한테 연락하자마자 잠깐 잠들어서, 그랬어.

나야말로,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 …많이 아파?
으응, 괜찮다고 말했잖아.


모두 얼굴을 마주하고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기에 미련이 남았다. 요슈아가 문틈을 툭, 툭 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떻게 보면 긁는 것도 같아 보였다. 다만, 그런 애절한 모습과는 달리 요슈아는 왜 자신과 눈을 마주쳐 이야기해주지 않는지 제리에게 굳이 따져 물으려 하지 않았다.
괜찮으니 절대 찾아오지 말라던 제리의 당부를 독단적으로 듣지 않아 자그마한 죄책감이 피어오른 탓과, 제게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은 그녀의 배려가 눈에 훤히 보인 탓.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대신 요슈아는 바스락 소음을 내는 비닐봉지를 끌어안았다. 그 안에서 여러 약들이 뒤섞여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새어 나갔다. 그녀만의 의사라도 된 것처럼 하나하나 아픈 곳을 들어주고, 손수 약을 먹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약과 함께 사 온 따뜻한 녹차 탓에 그의 품은 순식간에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


제리.
…응.
나도, 마스크 있어. …부족할까 봐 더 사 오기도 했어.


그 온기는 오히려 결핍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현관보다 얇은 문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도 감질나 요슈아가 이제는 습관처럼 저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마치 제리와 서로의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것만 착각이 들었다.


안 옮을 거야. 그러니까,


보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제리의 불규칙적인, 열기가 서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요슈아의 숨소리도 그녀의 것과 맞추어 들이쉬고, 내쉬었다. 성급했다.


…안아주는 거 정도는 허락해줄래?


현관에서의 부탁과 동일했다. 요슈아의 말이 끝을 맺고, 머지않아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경첩이 맞물려 움직인다. 닫혀 있던 얇은 벽이 다시 한번 열린다.
열리는 틈 사이로 요슈아를 향해 아릿하게 웃고 있는 제리의 얼굴이 보인다.

비밀 데이트를 할 때처럼, 발간 얼굴의 전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요슈아가 망설임없이 제리를 끌어안았다.
부족했던 체향이 폐부에 들이찼다.

melting nights
melting nights

@mochacreamsoda

 

 

길고 길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진다. 으레 단절의 순간에는 아쉬움을 느껴야 할 터인데. 제리는 아쉬움도 서운함도 아닌 사랑을 느꼈다. 요슈아의 눈동자가, 그 다정하고도 엷은 색채가 제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독점욕과 소유욕, 온갖 감정들이 도사리는 세계 안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란 바로 배려와 애정이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아. 네가 원하지 않는 건 나도 원치 않으니까. 언젠가의 문장들을 떠올리고, 제리는 다시 한번 요슈아를 껴안은 채 입술을 부비적거렸다.


"제리……."
"……요슈, 아……."
"응, 제리."


좋아해. 참았던 호흡을 터뜨리는 것처럼 필사적인 연정이었다. 혹은 닫혀 있던 꽃망울의 만개 같은 찬연함이었다. 잠시 그런 제리를 망연히 내려다보던 요슈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 가운데 한 가지만이 확실했다.

그야말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런 말 하는 건 반칙이야……."


무어라 답하기도 전 화인 같은 입맞춤이 쏟아진다. 제리는 다시금 요슈아와 숨을 공유한다.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사이사이마다 그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제리의 모든 생마다 요슈아가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도리어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나날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그에게 계속 힘이 될 수 있기를. 그와 평생토록 함께할 수 있기를.

 

그가,

변함없이 평온하기를.

 

하와의 기도는 지상의 아담에게 숨결을 불어넣는다. 같은 개수의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 어느 세계에서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고립되지 않을 테지만 동시에 신과 같은 절대자의 존재 없이도 그곳에 실존할 것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의 윤곽만은 선연했다. 제리는 칠야의 지속일지언정 요슈아를 온전히 그려낼 수 있을 터였으니까.

 

오롯한 사랑 속, 불멸의 연인들은 걸음을 이어 나간다.

 

밤이 녹아내린다 한들 그 일렁임을 넘어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Prism
Prism

@xngkgkB

 

 

제리가 요슈아의 저택에서 돌아왔을 때, 제리는 스스로 황제 폐하나 황후며 후궁들이 자신을 찾느라 난리가 나 있으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을 뒤늦게 했으나 염려가 무색하게 황궁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정확히는 다른 소동으로 인해 제리의 행방에 대해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다는 것이 더 들어맞겠다. 제리가 겸연쩍게 황궁으로 들어서면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법의 범위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자가 왔대. 은둔해 있던 저명한 음악가라도 되나? 아니 음악가보다는 '평론'을 하는 쪽에 더 가깝다나봐. 제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하이델을 떠올렸다.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요슈아에게 그의 음악이 백색이어 아무 색도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던 노인. 요슈아의 절망을 가장 먼저 발견한. 제리는 조심스럽게 하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황녀님. ……폐하께서 아침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며 몹시 염려하셨습니다."
"그렇잖아도… 그에 대해서는 폐하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구요. 그나저나, 말씀하시던 것이 있던 듯한데……."
"아, '평론가'에 대해서 말입니까? 방금 입궁하셨습니다. 언질도 없이 들러 황실마마님들께서 모두 놀라워하는 중입니다."

평론가. 기실 안단테에 마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음악가는 수두룩했지만―그러므로 요슈아조차 뛰어난 실력이 아니었다면 이 시대에 한 줄조차 긋지 못하고 '그런대로 먹고 사는 음악가' 정도로 남았을 것이었다― 아그네스 투르니에 여신의 가호를 받은 음악이 자아내는 마법의 범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세간은 음악을 평가한다 하여 이들을 '평론가'라고 불렀는데, 칭명이 있는 것조차 무색하게끔 거의 존재를 내보이지 않는 그들은 그러므로 마법과 음악의 효용을 위하여 안단테 제국에 매우 귀한 존재였다. 투르니에 콩쿠르에 초청받은 심사위원들도 거의 평론가가 되기 위해 다른 길로 음악과 마법을 공부하는 데 매진해 있는 사람들인 것을 보면 말 다 한 것이다.
어째서 하이델,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평론가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제리는 스스로 의문한다. 음악을 듣고 이를 심상으로 표현해내는 기이한 노인. 다만 요슈아를 위로했던 것과는 별개로 하이델이 왜 그런 식으로 요슈아의 음악을 평했는지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제리는 차마 짚어낼 수 없었다. 더 솔직하게는, 하이델에게 원망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다나요?"

궁금증이 요슈아를 대신하는 원망을 이겼다. 제리가 묻자 하인들은 일제히 알현실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금쯤 폐하를 알현하고 계실 것입니다."
"요슈아님을 찾는 듯도 하던데……."

제리는 황궁 한쪽에 마련된 알현실로 가는 백금으로 빛나는 복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는 몰랐지만 하인들 사이에서 소문 자자한 '아랫사람에게도 지나치리만큼 겸손한 막내 황녀'답게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던 제리는 마침 그곳에서 나오던 황제와 하이델을 마주쳤다. 제리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폐하, 오전에는 잠시 황궁 바깥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윤허 없이 출궁한 점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 황제는 자비로운 목소리로 "고개를 들거라. 정찬에 참석하지 않아 걱정하였단다." 하며 막내딸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둘의 옆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지킨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쨌든 황제와 외부인의 앞이었으므로 제리는 요슈아에 대해 당장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격식 차린 대화를 마쳤다. 황제는 하이델을 돌아보며 "이리 서 계시도록 기다리게 하여 송구합니다." 궁내에서 거의 보지 못한 공손한 태도로 노인을 대했다. 하이델은 나직한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말하더니 지팡이로 툭 다시 바닥을 짚었다. 제리가 황제의 앞에서 노인을 슬그머니 눈짓하자 황제가 그제야 하이델에 대해 소개했다.

 

"아, 이분은 하이델님. 이국에서 온 '평론가'시란다. 이번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심사를 맡기도 하셨지."

"그렇군요……." 이미 아는 내용이었지만 제리는 인내심 있게 그 말을 듣는다.

"요슈, …궁정의 대음악가를 찾아오셨으나 너도 알다시피 헛걸음이 되셨어."

"헛걸음까진 아니지요." 하이델이 황제의 말에 인자하게 웃었다. "이리 황녀님도 뵈옵고."

 

제리는 그 말이 인사를 요하는 것인 줄로 알고 눈 보이지 않을 것이나 일단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이델은 제리가 인사한 것이 마치 보이는 것처럼 한 손을 허공에 두고 달래는 듯이 손을 낮게 휘적거렸다. "황녀님." 노인이 말했다.

 

"요슈아님을 만나고 오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제리의 눈이 커졌다. "맞나보군요." 제리가 말이 없자 하이델이 미미하게 웃었다. 제리는 불현듯 하얀 하프시코드를 편안하게 연주하며 지금 작곡한 곡이야. 말하던 요슈아를 떠올렸다. 노인이 이어 말한다. "황녀님께 하얀 음계가 묻어 있어 알았습니다. 그분의 연주를 듣고 오셨군요." 더욱이 놀란 황제는 옆에서 "그게 정말이냐, 딸아." 물을 뿐이다. 제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음계. 제리는 그제야 침착하게 하이델에게 물을 수 있었다.

 

"요슈아에게… 그의 음악에 아무 색도 없는 듯이 보인다고 하셨다 들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그가 궁정 음악가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그 영향인 듯하던데……."

"아."

 

하이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제리는 눈을 들어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노인이 다음으로 낸 말은 그러나 전혀 별개의 것처럼 들렸다.

 

"혹 황녀님, 그가 황녀님께 헌정하는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오셨습니까?"

"……네?"

 

지금 작곡한 곡이야. 울음 탓에 발간 눈가로 요슈아는 그렇게만 말했을 뿐 제게 헌정하는 곡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요슈아가 바치는 곡이라니,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바치는 곡이 제게 있다니, 그럴 수가! 제리는 도리질을 치며 "아뇨, 아닙니다……. 그냥 연주를 듣고 왔어요," 답했다. 하이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지팡이를 매만졌다.

 

"요슈아님이 제 말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자신 음악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그분께서는 언젠가 그 깨달음에 닿아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공허한 것을 깨닫고 그 다음부터 채울 수 있으니까요. 빈 채로 있다면 사람은 결국 망가질 뿐입니다. 하여 저는 요슈아님의 연주를 듣고 아름답지만 껍데기뿐이어 어느 것으로든 더럽혀질 수 있는 백색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안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것이지요."

"……."

"황녀님, 이것을 보십시오."

 

하이델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삼각기둥 모양의 거울 혹은 유리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제리에게 아주 주려는 듯이 그가 그 물건을 든 채로 있기에 제리는 망설이다 그것을 건네받았다. "이게 뭔가요?" 묻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노인은 인자하고 나직하게 웃었다.

 

"일종의 평론 도구입니다. 제가 평가하는 음악의 색은 이것으로부터 비롯된답니다. 저는 물론 이것 없이도 음악의 색을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으나, 황녀님은 그러지 못한다 들었으므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게요……?"

"황녀님, 요슈아님을 사랑하시지요."

 

이 말에 옆에서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어깨를 움찔 떨고 노인과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제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황제의 기침 소리는 더 커졌다. 노인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요슈아님께 한 번 더 연주를 해 달라고 청해보시지요. 제가 보기에, 요슈아님의 공허를 채울 방도는 황녀님께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하이델은 그 말을 남기고 기침을 하던 황제와 제리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지팡이를 짚고 유유히 황궁을 떠나갔다. 제리는 그 자리에 남아 노인이 들려준 작은 삼각의 '평론 도구'를 들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의아해할 뿐이다.

 

 

일주일 뒤 요슈아가 입궁을 요청했다. 황제는 어쩐지 조금 불퉁한 태도로 그의 입궁을 윤허했다. 요슈아는 황제의 영 마뜩찮은 얼굴을 보고서 의아해하다가도 허리 숙여 깊이 사죄의 인사를 했다. 요는 한사코 내려두겠다 했던 궁정 대음악가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황제는 그 청에 기뻐했으나 그것도 잠시, 마침 알현실에 제리가 들어왔을 때에 자네 막내 황녀를 어찌 생각하나? 하는 질문을 던져 두 사람을 당황케 했다. 아바마마! 폐하, 가 아니라 어릴 때 쓰던 호칭으로 제리가 황급히 아버지를 부르자 황제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결국 웃으며 볼일이 끝났으면 가 보라, 찬바람 쌩쌩 부는 답을 내렸다.
요슈아는 황궁을 나가기 전 익숙하게 제리의 황녀궁에 들렀다. 일전의 저택에서의 대화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요슈아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으나 제리가 어쩐지 서먹하고 어색하게 대하는 바람에 둘의 거리는 다소 애매해졌다. 제리는 쭈뼛쭈뼛 머뭇거리다 요슈아에게 묻는다.

"오늘도 연주해줄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요슈아는 요슈아대로 그때 한 입맞춤이 역시 문제였나, 생각하다가 괜히 쑥스러워져 얼른 들고 온 악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그가 활과 현의 상태를 보고 잠시 조율을 하느라 선 채로 머물러 있으면 제리는 품에서 슬쩍 하이델이 주었던 물건을 꺼내본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유리 삼각기둥. 요슈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연주를 시작한다.

바이올린 선율이 부드럽게 흐른다.
제리는 그 흐름에 여느 때와 같이 홀린 듯 눈을 감았다가, 아차 싶어 다시 눈을 떴다. 요슈아 역시 선율에 몸을 맡기고 활을 현 위로 미끄러뜨리며 연주하고 있었다. 노래의 마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리는 그 연주로부터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련하고 따뜻한 곡조, 제리는 손을 뻗어 요슈아 쪽으로 하이델이 주었던 삼각기둥을 조심스럽게 가져다댔다.
그 순간 제리는 기둥 한 면의 유리 너머로 요슈아에게서 흰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다. 유리를 투과한 환한 빛은 이윽고 다른 마주보는 면의 유리에 다시 투과되더니 온통 어지러울 만큼 달콤한 천연색의 환상으로 변한다. 거기에는 제리가 있다. 웃음 짓는 제리, 즐겁게 이야기하는 제리, 소파에 앉은 요슈아의 앞에 무릎 꿇듯 바닥에 앉은 제리, 눈물을 흘리는 제리, 그리고 흰 빛이 요슈아의 손으로 변하더니 울고 있는 제리의 모습에 뻗친다. 뺨을 어루만져 닦아주고 이내 끌어당기며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있다. 제리는 너무 놀라 물건을 떨어뜨렸다.

"제리?"

음악이 끊겼다.

"제리, 왜 그래?"
"너, 너 방금 나한테……"
"응?"
"사,"

제리는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얼굴을 감쌌다.

"사랑한다고……."
"……."

 

요슈아는 고개를 내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앉으며 제리가 떨어뜨린 것을 보았다. 제리는 이름을 몰랐으나 요슈아는 이미 음악과 마도에 대한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프리즘. '막 평론을 시작한 평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음악의 빛을 투과하여 그 연주가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연주하고 있는 것인지 보여줄 수 있는 마법 도구였다. 저런 걸 제리가 어떻게? 어디서? 영문을 몰랐던 요슈아의 얼굴도 천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 제리,"
미끄러뜨린 활, 현과 활의 줄이 마찰하며 내는 음, 제리에게 들려주었던 연주는 모두 같은 마음을 담고 있었다. 단 하나의 고백이다.

제리가 손가락 사이로 눈을 들었다. "요슈아," 저택에서 울며 서로를 보았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슈아가 제리의 앞에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있었다. 낮은 자세로 겸허하게 너를 올려다본다. 꼭 고해할 때의 자세 같다.

할 수 있는 말이야 많았다. 이걸 어디서 구했어, 혹시 평론가를 만났다면 하이델, 그 사람이야? 너는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어? 나는……. 그러나 수많은 물음 중에서 요슈아는 하나의 문장을 움켜쥐기로 했다.

 

"제리."

 

눈이 마주친다. 완연한 가을의 하늘이 푸르다. 흰 대리석으로 된 궁의 바닥에까지 파랗게 하늘이 비친다. 제리는 손을 느리게 미끄러지듯 무릎 위로 내렸다. 요슈아가 말했다. "저번에…… 대답을 제대로 안 한 것 같아서." 네가 좋아. 음악이 없어도. 네게서 음악이 영영 사라져버린대도.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요슈아는 잊을 수 없는 말마디를 되새겨본다. 그리고 백색으로 환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사랑해."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그 말에 답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영영 그럴 것이라고. 나는 네 오른편에 선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왼편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공허라도 사실은 함께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원히 빈 껍데기여도, 아무 빛도 없어도, 설령 내가 음악으로만 남는다고 해도.

제리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서러움이 아닌 벅찬 환희 탓이었다. 요슈아도 그것을 알아서 그는 무릎에 놓인 제리의 손을 덮고서 처음처럼, 조심스럽게, 턱을 올리고 한 손으로는 제리의 뺨을 감싸 당긴다. 제리는 기꺼이 당겨진다. 아주 가깝게.

환한 키스.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안단테의 막내 황녀와 궁정의 대음악가의 국혼은 그 다음 해 봄에 성대하게 열렸다. 안단테의 악사들이 사랑, 사랑을 노래하는 가운데 제리와 요슈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된다. 안단테의 모든 음악가들이 노래했다.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엔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나의 짧은 생은 그녀에게로 망명해가는 음악일 뿐이어서……¹ 박정대,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 中, 시집 『아무르 기타』 수록.

백색 음악
백색 음악

@xngkgkB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그날 날이 몹시 맑았다. 제리가 복기하기를, 아무 이변도 없는 날이었다. 물론 제리는 음악가가 아니었으므로 안단테 제국의 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으나 그저 직감 상으로는 그러했다. 요슈아가 위대한 궁정 최고 음악가의 지위에서 물러나겠노라 일종의 은퇴 선언 혹은 사직서를 내어둔 것이 자신을 찾아온 바로 그날이었음을 그래서 제리는 매우 믿기 어려웠다.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제리. 그는 안단테의 막내 황녀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친우처럼 이름을 부른다. 실제로 요슈아는 황궁 내 제리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궁정 최고 음악가의 표정을 제리는 보지 못했다. 그 이전에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비유인지 아닌지 모를 전해들은 말을 발음하는 그 뜻도 알지 못했다. 감히 누가, 도대체 어떻게, 그에게 음악에 대해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아그네스¹ 박정대의 시집 『아무르 기타』 에 수록된 시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에 등장하는 이름. 성 역시 출처를 밝히기 위해 붙인 것. 영감을 받은 시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의 짧은 生은 그녀에게로 망명해 가는 음악일 뿐이어서 //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엔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투르니에가 음악이라는 것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신계에서 인간계로 음악을 가지고 내려와 인간에게 주었다고 전해져 모든 악사가 신의 권능을 빌려 행사할 수 있는 안단테 제국에서, 몇 세기를 건너 가장 뛰어난 혹은 위대한 음악가로 꼽히는 요슈아에게. 안단테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명실상부 안단테의 가장 높은 데 있는 음악가, 단 한 명도 가보지 못한 경지에 올라 있는 그에게.
어지러운 이명 속에서 요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대답해줘. 이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리는 입을 뻐끔거렸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요슈아가 물었다.

나는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나, 는, 음악, 없이, 쓸모없는, 사람……. 제리는 요슈아의 말을 어절마다 득득 긁듯 마디마디 별개의 말처럼 발음해본다. 쓸모없는 사람. 제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잦았다. 마지막 후궁인 어머니, 막내 황녀. 애매한 지위에 있음에 적당하고 모호한 사랑을 받고 그럼에도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 때때로 스스로가 무언가를 소모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거리의 악사들과 궁정의 음악가들, 그리고 요슈아를 볼 때마다 그 결핍에 대한 실감은 더욱 커졌으므로 제리는 초조감을 갖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해야만 했다. 한데 그 순간 요슈아는 가장 초라한 데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쓸모없는 사람이야. 요슈아. 제리는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지금에 와서도 후회하는 일이다. 자신이 감히 그를 재단할 수 없으리라는 괜한 판단으로 그를 상처 입혔다는 원망이 갈 데 없이 제 속을 긁어냈다. 그리고 언젠가의 기억이 있다. 푸르른 황궁의 정원, 여름의 녹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잦게 잡힐 때였다. 열넷, 변성기가 막 오기 시작한 목소리로 요슈아가 나지막이 말한다. 황녀님, 제리는 바이올린 현을 만지고 있는 요슈아의 손에서 그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보시면 조율하는 데 집중이 잘 안 되어요.
……바…
바?
……반말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 시절에도 이 아름다운 정원에는 오롯이 자신과 요슈아뿐이었건만,

제리.
……응.
내 연주가 그만큼 좋아?
가장 빛나.
그래?
모든 궁정 악사들, 음악가들, 거리의 사람들이 내는 것까지 합해서.
응.
정말로 가장 좋아. 여러 빛을 내는 것 같아. 온통 황홀해.
 
그렇게 말했던 때 있었건만.
제리는 떠나가던 스물셋의 요슈아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푸르른 십대의 여름에서 서늘한 지금의 가을로 돌아오는 것이다.
너는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신화가 있다. 제리는 이카루스라는 이름의 날개를 단 신화 속의 인물을 생각한다. 이카루스는 오만으로 인해 공중에서 날개를 잃은 채로 추락하였으나 요슈아와 그가 닮은 점은 오로지 빛나는 높은 데 있었다는 점이었다. 음악과 요슈아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제리조차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했던 질문에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제리는 그 순간 머뭇거렸다. 요슈아는 제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서 한 번 풀썩 웃어버리고, 사직서를 낸 것도 모자라 그 다음날에는 정말로 황제의 앞에서 일방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물러가버렸다. 제리가 모르는 데서 그는 스스로 추락해버린 것이다.
왜? 제리는 더듬어 복기해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요슈아는 그날 이후 더 이상 황궁에 나타나지 않고 따라서 제리와 마주칠 일도 요원했다. 그리고 제리는 그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절하리만치 손을 뻗고 싶다고 그것은 하나의 결심이었다.
황궁 안에서 엄선된 음악가들이 펼치고 있을 바람에 실려 오는 음악은 요슈아의 것처럼 반짝이지 않는다. 제리는 정원의 의자에서 일어나 발을 옮긴다. 고개를 돌리면, 다시 숨 막히는 황궁 안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다. 여기에 음악은 어디 있나. 제리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네 것만이 음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되었는데.


거리의 초보 악사들은 아그네스 투르니에를 칭송하며 부른다, '나의 짧은 생은 그에게로 망명해 가는 음악일 뿐이요,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에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나의 짧은 생은 그에게로 망명해 가는 음악일 뿐이요. 때로 제리는 그 오래된 가사가 신을 향한 찬미뿐만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사랑 같기도 하다 생각했다. 사랑.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감히 시기할 수도 없는 경외를 두르고 흑백의 소년은 황실에 나타났다. 단 한 명도 가보지 못한 경지에 그가 올라 있었다. 고작 여섯 살에 작곡한 소나타로 불구였던 사람을 완벽하게 치유하고, 열한 살에는 나라의 모든 악기에 통달했으며, 열셋에는 최연소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안단테에서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명실상부 안단테의 가장 높은 데 있는 음악가. 타고나기를 음악에 재능이 없이 태어났던 황실 마지막 후궁의 딸 황녀 제리가 그를 보고 경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래가 없는 황궁 안에서 유일하게 생긴 어린 동갑내기 둘은 한쪽이 천재이고 한쪽은 재능이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금세 친해졌다.
명령이 아니면 굳이 요슈아는 음악을 '낭비'하지 않았으나 제리의 앞에서는 달랐다. 제리는 명령하는 법을 잘 몰랐고, 요슈아는 황녀임에도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 제리의 곁에서 가장 편안해했다. 제리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여서, 궁정에 있는 수많은 이들 중 요슈아를 몹시 자주 곁에 두는 것은 그가 황궁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 사람이라면 웬만하면 아는 사실이 되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서로를 연모할지도 모른다 수군대던 소문 역시 사실에 가까웠을 수도 있겠다. 제리는 그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사람이라 믿었으므로. 그것은 찬미와도 비슷했고 사랑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실 내에 소문이 돌면 그를 잠재워야겠다는 걱정 이전에 제리는 한편으로 요슈아에게서 자신의 마음에 대한 답을 들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미약하고 조심스러운 나의 첫사랑. 답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슈아가 그렇게 휑하니 황실에서 나가버리지만 않았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한순간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자각하게끔 망가뜨렸는가.
제리는 그날 저녁 황실의 구성원들이 모두 모인 만찬 자리에서 조금 이르게 자리를 떴다. 저녁식사 와중에도 요슈아의 이야기가 테이블 위로 올랐기 때문이었다. 황후의 입에서 나온 그 애, 왜 그만뒀대요? 하는 말에 아버지인 황제가 묵직하게 고개를 흔들면 그나마 제리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둘째 황자와 황녀가 제리를 흘긋 돌아보는 것이다. 너 뭐 아는 거 없어? 그 애랑 친했잖아. 동생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황태자가 그렇게 물으면 황제를 비롯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모두의 시선이 제리에게로 꽂혔다. 황후가 짐짓 관심 없는 척 립 스테이크의 살을 발라내며 말했다.
 
여태 폐하께서 궁정 음악가와 황녀 저하의 추문을 듣고도 묵과하셨던 것은 혹여 황실과의 연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만한 재능이며 힘이 또 없었지요.
…….
아니면 폐하, 요슈아, 그 자만큼이나 기능을 하는 음악가가 현 안단테에 있단 말입니까?
황후마마,
그래, 없지.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앞에 놓인 스테이크는 아직 반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제리는 식욕을 완전히 잃었다. 시선을 떨어뜨리면 반질반질한 접시와 테이블 위로 희미하게 제리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황제는 몹시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요슈아가 황실과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맺으면 좋으리라고 판단했건만…… 갑자기 궁정에 나오는 것이며 음악을 그만두겠다고까지 할 줄은 몰랐어.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했다구요?
 
제리가 황제의 말에 놀라 식기를 떨어뜨리며 말을 잘랐다. 예의를 지키지 못 해? 황태자가 황제와 황후를 대신해 제리를 꾸짖었다. 제리는 금방 고개를 다시 떨어뜨렸으나 바들바들 떨리는 손은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괜찮다는 뜻으로 태자와 제리를 향해 한 번 손짓해 보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래, 갑자기 모든 걸 그만두겠다고 말하니 나 역시 당황스럽더구나. 재고해 보라 몇 번을 말했지만 결국 다들 아는 대로 뜨고 말았다.
……네.
이변이라면 요슈아가 참가한 아그네스 투르니에 여신의 콩쿠르가 그 직전이었다는 것인데……, 거기에서 실수를 하거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들은 바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때에 그를 그렇게 둔 원인이 있지 않나 짐작할 뿐이다.
…….
그러고 보니 황궁에 있던 그 애의 짐을 하인들이 뺐는지 모르겠구나. 악기들이 워낙에 자잘하게 많을진대.
 
아버지―황제는 침묵하며 골똘한 얼굴이었다. 그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궁정의 나아가 시대의 대 음악가를 잃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찾다가 포기한 모양이었으므로, 제리는 마지막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폐, 폐하. ……제가 요슈아의 짐을 정리하면 안 될까요?
아무리 그 애와 막역했다 한들 황녀 신분에 체통 없이 무슨 하인들이나 하는 일을 하겠다고 그러니.

이번에는 언니인 둘째 황녀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핀잔을 줄 셈은 아니었고 오히려 제리를 염려하는 투였으나 제리는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그런 건 그냥 맡기면 된단다. 어쨌든 안단테엔 여전히 그 애 말고도 위대한 음악가가 차고 넘치잖니. 안 그래요, 아바마마? 양쪽을 달래듯 하는 말에 황제의 진중하던 얼굴도 다소 누그러졌다. 제리는 자신이 배다른 오라비인 근엄한 황태자와도 이렇듯 사람을 어르고 달래는 데 능숙한 부드러운 둘째 황녀와도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념이 이어질 뻔 했으나 이내 황제의 그래, 네가 할 일이 아니다. 결론을 내리는 말 뒤로 금방 다른 화제가 올라온다. 제리는 입맛이 없어져 식기를 내려두고 결례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새벽 제리는 저녁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 이르게 깼다. 황녀궁 안의 요리사에게 무엇이라도 가져다 달라고 겸연쩍게 요청하려 침상에서 일어났다가 몇몇 하인들이 열을 지어 포장한 악기 따위를 가져가 황궁 밖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광장에서는 이제 시시각각 계절 변해가는 서느런 아침을 알리며 일찍이 깬 아이들이 요슈아가 어릴 적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벗이여 취생몽사 몽생취사라는 말을 이제야 알았는데 그대는 먼저 떠났는가.² 곽은영 <추도―모리스 호텔 19> 中, 시집 『관목들』 수록. 노랫말을 들으면서 어린아이들이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쓸쓸한 곡이라 생각했으나 먼저 떠났는가, 후렴의 가사가 화음으로 이어질 때에 번득 결심을 했다. 그를 구하고 싶다는 결심을 다시. 자신이 모르는 데에서 추락해버린 요슈아에게 처절하리만치 손을 뻗고 싶다고.
벗이여 그대는 먼저 떠났는가, 떠났는가…. 악기를 이고 지고 가져가는 하인들의 뒤를 노래가 좇았다. 사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리는 주린 배도 잊고 숄을 걸친 뒤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곧바로 달려 나갔다. 그들 뒤를 쫓기 위해서였다.


음악가들의 저택은 대개 그들이 작곡한 '결계의 음악'으로 둘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보호의 목적이기도 했지만 곧잘 '보이지 않는 것'이 또 다른 계급적 위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통은 후자의 이유로 궁정에 든 음악가들은 더욱이 겹겹의 결계를 두른 저택에 살았다. 요슈아의 저택 역시 이에 반하는 예는 아니었기 때문에, 제리가 따라간 하인들은 보이지 않는 결계 앞에 멈춰 섰다. 동이 막 트고 있는 중이었다.
하인들 중에서도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선두에 선 하급 음악가가 하모니카로 간단히 몇 음계를 부르면 흰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인 요슈아가 나온다. 피로한 낯을 보니 잠들었다 나온 것 같았다. 제리는 요슈아를 보고서 하인들의 뒤로 바짝 붙어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다가 자신의 앞에서와 달리 잔뜩 찌푸린 신경질적인 낯을 보고서 손을 멈추었다. "이미 황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을 텐데." 요슈아가 잠긴 목소리를 냈다. 선두의 하인은 고개를 꾸벅 숙인다.

"해당 사안은 폐하께서 정식으로 윤허하셨습니다. 저희는 궁정 방에 맡긴 요슈아님의 악기들을 가져다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런가."
"언제든 돌아오면 반길 테니 언질을 달라는 말도 함께 하셨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요슈아가 단박에 그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기색에 제리는 요슈아로부터 뒤로 물러날 뻔 했던 자신 발걸음을 도로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놓고 가도록 해." 요슈아는 피로한 스스로의 눈두덩을 문지르며 저택의 결계를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비로소 온전히 저택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요슈아의 거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리는 줄지은 하인의 뒤에 서서 황궁 정원에서 연주를 들려주던 다정한 요슈아를 떠올렸다. 저택은 커다랬으나 그만큼 황량했다. 관리가 되는 것 같긴 했으나 그뿐, 생활감이라곤 없는 쓸쓸한 곳. 취생몽사 몽생취사라는 말을 이제야 알았는데 그대는 먼저 떠났는가. 소위 말한다면 그런 노래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유령 저택 같은 느낌이었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로 등을 돌려 걸어가는 요슈아. 악기를 들고 휘적휘적 저택 안쪽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따라 제리도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알고 있던 요슈아는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거기에 있었다. 요슈아는 하인들이 악기를 들고 집 안을 활보하든 말든 그저 무던하고 싸늘한 낯으로 홀의 소파에 앉았다가, 하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제리를 보고서 잠시 망연한 얼굴을 했다. 제리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입을 어물거렸다가, "안녕, 요슈아." 그런 맹한 인사나 건넬 뿐이다.

"황녀님, 아니, ……제리, 네가 여기 왜."
"이들을 따라왔어."
 
제리가 조금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하인들이 날 숨겨준 것은 아니고, …내가 무작정 따라온 거니까 화를 낼 거라면 내게 화내도… 괜찮아." 그 말에 아연했던 요슈아의 낯은 역시 제리처럼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줄을 몰라 멍청해졌다가,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마는 것이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내. ……잘 왔어."

그의 새벽 달빛 닮은 머리칼이 요슈아가 고개를 숙인 대로 앞으로 쏠리면 제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요슈아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아래에서 빼꼼 위를 올려다보면 시선이 겨우 마주친다. 요슈아가 못 당하겠다는 듯 짧게 웃었다가 한숨을 뱉었다. "이럴 거면 언젠가 제대로 초대를 해 줄걸 그랬어."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그제야 안도한 것처럼 따라 웃는다. 요슈아의 웃음을 봤기 때문일 테다.

"이런 데서 혼자 지내는 거야?"
"……궁정에서 지내지 않을 때는."
"부모님은?"
"수도에 안 계셔. 사실상 스승님이 내 재능을 발견한 순간부터 떨어져 있었으니 남에 가깝지.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겐 하나도 슬픈 얘기 아니니까." 요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제리는 남에 가깝지, 라는 말에 눈을 서글프게 내리깔았다가 요슈아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요슈아."
 
제리는 그 순간에 물었다. 유령 같은 저택 안 홀에서, 카펫 위로 쪼그려 앉아 무릎을 둘러 안은 채로. 새벽을 닮은 청년, 여전한 첫사랑의 낯을 올려다보며.

"왜…… 떠났어?"
"……."
"그 말은 무슨 뜻이었어?"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제리는 말하고 싶었다. 내가 말한 네 음악 빛난다는 말은 네게 닿지 않았어? 나는 네 음악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였어? 나는 네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 싶었고 네 피아노 곁에 앉아 내내 눈을 감고서 몸을 나직하게 흔드는 관객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나 요슈아의 앞에서 그 모든 말은 차마 나오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요슈아가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요슈아는 손을 들어 낯을 마른세수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어렵게 입을 떼었다.

"하이델."
"……?"
"한 청중이 있었어, 제리."

하이델. 모르는 이름을 뱉은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그네스 투르니에 여신의 이름을 딴 투르니에 콩쿠르는 5년에 한 번 가을 중에 열린다. 여름이 다 가고 바람이 그 온도를 달리할 때 열리는 콩쿠르의 개최 장소는 매번 바뀌었다. 안단테 제국의 어디에도 음악이 닿지 않는 곳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여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안단테의 초대 황제 아그네스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다. 요슈아는 열일곱에 이미 수도 근방에서 열렸던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대상을 받은 바 있었다. 이번은 그가 성년인 때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는 콩쿠르인 만큼 개최 장소가 국경 근처의 오지에 있는 작은 극장이었음에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참가자들 모두에게 본인의 역량으로 구현해낸 결계를 치는 것은 자유였기 때문에, 요슈아는 바이올린 활을 들어 가벼운 음계만을 연주하여 얇은 막을 두르고 무대 뒤를 누볐다. 한 번도 오지 않은 연주 장소를 먼저 익숙한 환경으로 만들려는 연유였다. 참가자며 심사위원이며 일찍부터 줄을 선 관객들, 모두가 저녁식사를 하러 간 시간이라 무대 뒤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는데 보이는 인영이 있었다. 요슈아는 백발 성하여 희고 체구 작은 노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 심사위원 중에는 이국에서 온 전설적인 음악가가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이미 눈이 멀었으나 귀만큼은 그토록 정확한, 그리고 모든 참가자들에게 독특한 심사평을 내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참가자들의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누구십니까?

요슈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제야 노인이 몸을 느리게 돌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제 모습 보일 리 없었다. 요슈아는 문득 자신을 마주하고도 '음악의 대가 요슈아'로서 저를 대하지 않는 이를 제리를 제외하고 처음 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노인은 차분하고 기이한 태도로 일관했다.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하이델이라고 하네. 그대는 누군가?
……요슈아입니다.
아. 자네가 그.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은 익숙함에서 비롯된 오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이델의 눈 감은 낯이 아는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요슈아는 방금 느꼈던 '자신을 모르는 이의 여상한 태도'가 그에게서 사라질 줄로 알았다. 노인은 자네의 소문이야 많이 들었네. 라 말한 다음, 의외의 대사를 읊는다.

그대의 음악이 특별히 기대되지는 않지만, 그 빛은 어떨지 궁금하군.
……예?
심사위원이라면 더욱이 누군가를 특별한 대우로 바라보지 않아야 하지 않겠나. 후자는 그저 궁금증일세.
예, …한데 그, '빛'이라 하심은.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걸세.

이해하지 못할 걸세. 자신이 음악에 관해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 이도 요슈아에게는 처음이었다. 오기보다는 묵음의 욕망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음악이 요슈아의 전부였으므로 그랬다. 하이델은 다시 몸을 돌려 지팡이로 바닥을 짚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인사처럼 말했다. 나중에 봅세. 궁금증이야 자연히 채워질 터이니.
그날 요슈아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기실 자신의 음악을 칭송하는 이들만이 황궁이며 뭇 안단테에 가득했건만, 심지어는 자신을 부러 격상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벗으로 곁에 두는 제리마저도 그러했으나 이 노인은 다르다. 어쩌면 요슈아 자신의 음악이 '어떤 것'인지 혹은 어떤 것에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렇다면 요슈아는 그저 천재 음악가로서만 남았던―요슈아는 이를 '그쳤던'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공허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음악이 음악 아닌 무언가로 승화하여 정의될 수 있다면…….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다. 투르니에 콩쿠르가 시작되는 것이다. 요슈아의 차례는 피날레가 예정되듯 맨 마지막 순서로 밀렸다. 요슈아는 길어지는 콩쿠르 가운데 심사가 이루어지는 위원석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저 그런 아마추어들의 연주들도 하이델은 몹시 집중하여 듣고 '자네의 음악에는 한 곳으로 뻗어나가는 길이 있네.', '작곡 자체에는 미숙한 면이 있지만 곧고 뜨거운 불꽃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는군.' 따위의 심상을 말하는 첨언도 잊지 않았다. 요슈아는 어느 때보다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으로 노인을 보다 제 손을 주물렀다.
마지막 순서, 요슈아가 무대 위에 오르자 관객들은 열광한다. 박수에 화답하듯 요슈아는 무대 중앙에서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같은 무대에 섰던 음악가들도 요슈아의 연주를 듣기 위해 무대 뒤쪽에서 앞을 다투어 앉거나 지근거리에 서있었다. 요슈아는 무대를 새삼스레 둘러본다.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고 낡았으나 잘 닦인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는 새하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심사위원석에 떨어지는 조명도 흐릿해지고 오롯이 요슈아와 피아노에만 동그랗게 선명하고 밝은 빛이 비춰진다. 한 사람의 숨소리마저 몰아쉰다면 크게 들릴 법한 정적이 지난 뒤, 그는 마침내 피아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연주가 시작됐다.
선율은 미려하고 유유하게 흐른다. 모두가 요슈아의 손이 자아내는 곡조에 눈을 감고 미소를 짓거나 눈물을 흘린다. 긴장을 풀리고 연주하는 그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완벽이 거기에 있었다. 소박하나 아름답게 시작한 악곡은 마지막이 되어 황홀한 화려함으로 끝났다. 웅장하기까지 한 막바지에 이르러서 요슈아는 고양된 몸짓으로 팔을 크게 움직이며 건반을 쉴 새 없이 눌러 곡을 이어가다 아쉬우리만치 알맞아 정확한 데에서 끝을 냈다. 삼 초의 정적, 그 다음으로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관객석에서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와 요슈아, 요슈아, 요슈아! 요란한 연호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요슈아는 조명으로 밝아지는 심사위원석만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완벽한 연주였다. 그러니 이제 보상을 바라는 개처럼.
하이델은 맨 끝에 앉아 있었다. 차례대로 위원들이 극찬을 보낸다. 요슈아는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이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낸 말에 여타 칭송은 고사하고 그만 굳고 말았다.
 
잘 들었습니다.
…….
백색이군요. 어떤 것이라도 가져다 놓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색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의 말에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하이델의 말은 앞선 연주자들에게 보낸 애정 어린 조언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조롱도 질시도 없었으나 그저 차갑고 엄중했다. 요슈아는 그 중에도 당신이 이해한 바가 있을 거라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매달리고 싶었다. 하이델은 그러나 거기에서 말을 마쳤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럼에도 의미 없는 대상을 요슈아가 수상한 뒤 투르니에 콩쿠르는 막을 내렸다.
기대가 이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요슈아는 가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토록 가지고 싶은 것을 둔 적도 한 번 없었다. 극장에 모인 모두가 해산하고 요슈아를 비롯한 수도에서 온 음악가들도 마차를 타고 수도로 다시 향해야 하는 시점, 요슈아는 이국으로 떠나는 하이델을 붙잡았다. 선생님. 눈 먼 노인은 새하얀 외투를 입고서 요슈아에게 팔을 붙들린 채 그를 올려다봤다. 백색. 그것은 결국 색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눈이 보이는 요슈아는 다만 그 색깔을 보고서도 괴로워졌다.

누구인가? 왜 그러는가?
선생님, 제 연주…….
아, ……그대로군.
 
요슈아를 알아본 노인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언제 어디라도 떠날 수 있을 듯한 기이한 분위기는 어제와 매한가지였다. 요슈아는 불현듯 두려워졌다. 내가 정녕 이 사람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음악을 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그래서 내 이름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음악의 부속품으로만 남는다면 어떡하지. 선생님……. 말끝을 흐린 요슈아가 매달리듯 물었다. 숨이 턱턱 받쳤다.
 
제 연주에 대한 감상…… 더 들려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감상? …이미 해주었지 않나.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네.

이제는 눈 멀고 나이든 선진의 텃세라고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음악가들에게 해준 조언과 심상에 대한 이야기로 보거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이델이 천천히 요슈아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자네의 연주가 단순히 '수준급'으로만 말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네. 그러나 자네, 그저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그 부분을 짚은 것일세. 물론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가장 뛰어난 혹은 위대한 안단테의 천재 음악가로 불리는 그는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지 않느냐 묻는 하이델의 말에 그를 붙들 힘을 잃는다.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보지 못하는 노인은 후배 음악가를 뒤에 남겨두고서 자신의 나라로 지팡이를 짚고 떠나갔다.
요슈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제국 수도의 마차를 탄 귀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돌아온 이후 요슈아는 하이델에 대해 조사해봤으나 그가 정말로 전 대륙의 예술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데 있어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이는 결국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그에게 있어 어떤 가치가 요슈아의 음악을 인정받게 만들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요슈아는 당연한 수순처럼 절망했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줄 수 없다면 음악을 할 필요가 있는가. 위대하다는 이름으로 남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저갱 같은 고독은 거기에 있었다. 누구도 음악이 아닌 자신을 보려 하지 않아서 요슈아는 그토록 외로웠다. 그러나 여기까지 제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그 말에 선뜻 아니라는 대답을 하지 못한 제리에게조차 이를 고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요슈아는 동이 트는 하늘을 등지고 소파에 앉아 제리의 앞에서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어 가렸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랬다.


요슈아의 색 없는 음악, 꺼냈던 알 수 없는 말의 근원 혹은 실체를 제리는 잠자코 듣는다. 요슈아가 하이델의 이름을 꺼내고 난 다음 말끝을 흐리기에 그 흐려지는 끄트머리마저도 잡아 올리듯이 귀 기울이며. 이제 황궁에서 온 하인들은 악기를 전부 옮겨 놓고 요슈아와 제리에게 쭈뼛쭈뼛 인사를 건네고서 저택을 나간다. 요슈아는 그들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정적에 잠긴 채 거기 앉아 있었다. 제리는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린 것을 느꼈으나 요슈아의 옆에 앉거나 하물며 그의 곁을 떠나려 일어나지는 않았다. 한참 뒤에야 요슈아가 고개를 들며 간신히 웃었다. "바보 같지?" 이해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혹은 의미 없이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음악을 계속하고 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고,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음악 안의 '음악과 다른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요슈아는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리는 그가 무엇을 더러 바보 같다고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몰두하거나 존재를 지울만한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슈아와 같은 사람, 사람이기 때문이다.
묻고 싶은 말이 여전했다. 내가 말한 네 음악 빛난다는 말은 네게 닿지 않았어? 나는 네 음악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였어? 나는 네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 싶었고 네 피아노 곁에 앉아 내내 눈을 감고서 몸을 나직하게 흔드는 관객이 되고 싶었는데. 너의 짙은 외로움은 어디에서 자라나며, 우리에게 어떤 말이 더 이상 남아 있는 건지. 너는 너를 이해할 수도 있었던 가능성 하나를 가지고 있던 그 사람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이토록 자신을 깎아내야 하는 건지.
그러나 제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대신 마침내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바깥은 해가 뜨고 맑은 가을 아침이 되었다. 외로운 새벽이 떠나고 아이들이 황궁 앞의 광장에서 벗이여 그대가 떠났는지 묻는 가사의 노래를 할 만큼 벅적한 때가 된 것이다. 햇빛이 열린 커다란 창을 통해 늘어지고 요슈아의 슬리퍼 신은 엄지발가락에 그림자와 볕의 경계가 닿았다. 제리는 묻지 못하는 말들 사이를 헤매듯 앉은 그의 앞에 섰다. 바깥에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제리는 노래를 듣고 그만 애잔한 웃음을 머금는다.

"요슈아."
"……응."
"들려?"
"뭐가?"
"바깥에."

요슈아가 끝내 손에서 얼굴을 든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로 고개를 돌린다. 제리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뛰노는 아이들은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안단테의 엄연한 국민들 중 하나, 아이들이 노랫말의 뜻도 모르고 노래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노래도 할 수 없었네. 그러나 침묵이 악기처럼 울릴 때, 노래는 그리움의 상처로부터 돋아나는 달빛의 새살, 바람이 없어도 저 홀로 나부끼는 깃발이라는 것을, 나의 기타는 아네, 다섯 개의 검에 베어진 심장을 지닌 나의 기타는 아네, 자신의 상처가 노래임을, 상처받은 한 마리의 고통, 하나의 심장이 노래의 유일한 근원임을…….³ 박정대, <그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中,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수록.

"요슈아."
"……."
"정말로 상처가 노래야?"

제리가 말했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허투루 거스르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타까운 미소를 머금고서. 요슈아는 외로움을 생각한다. 그리고 울고 싶어진다. 그리고 요슈아가 느끼기에 그것은 제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네 심장이 노래의 근원이라면……, 네가 음악의 근원이라면 나는 네 노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도 사랑하는 게 되겠지."
"……."
"하지만 네가 네 스스로가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이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무척 슬펐어.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어."
"제리."
"미안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볕처럼 쏟아지면 제리는 소파에 앉은 요슈아의 무릎을 향해 무너지듯 바닥에 앉는다. 제리의 이마가 요슈아의 무릎에 툭 닿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얼굴을 손에 묻으며 제리의 앞에서 그러고 싶었던 것처럼.

"네가 좋아. 음악이 없어도. 네게서 음악이 영영 사라져버린대도."

처절하고 고요한 고백이 백색으로 내려앉는다. 다섯 자루의 검에 찔리지도 않은 심장이 그럼에도 피를 쏟아내듯 아파왔다. 제리가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물기 그렁한 눈자위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요슈아는 다시 울고 싶어졌다가, 제리의 그 다음 말에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는 재능이 없어, 요슈아."
"제리."
"나는 재능이 없지만, 하이델의… 네 음악이 백색이고 아무 빛 없다는 말은 결국 네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냐?"
"……."
"그러면, 그러면……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내가 말한 네 음악 빛난다는 말이 네게 닿지 않았어도. 내가 네 음악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대도. 네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 싶었고 네 피아노 곁에 앉아 내내 눈을 감고서 몸을 나직하게 흔드는 관객이 되고 싶었음은 변치 않기 때문에. 너의 짙은 외로움이 계속해서 자라나고 우리에게 어떤 말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대도.
엄지발가락에 닿았던 볕이 조금 더 길어져 그새 무릎 꿇듯 앉은 제리의 낯을 환하게 비췄다. 요슈아는 잡은 제리의 손목을 느리게 당겼다. 제리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자세로 당겨지고 이내 요슈아의 손아귀에 뒷머리가 쓸어내려졌다가, 그의 호흡이 뺨에 닿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햇빛처럼 긴 입맞춤. 요슈아가 끝내 울고 있었다.


한참 둘은 아주 어린 아이들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코를 훌쩍이며 이어진 요슈아의 말에 제리는 똑같이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침부터 없어진 막내 황녀 때문에 난리가 났을 황궁은 영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대신 제리는 하인들이 옮겨놓은 악기들을 흘끔 보고서 요슈아에게 말했다. "악기 많다." 요슈아가 젖은 얼굴로 웃었다.
 
"예전처럼 연주, …해주면 안 돼?"
"아무거나?"
"뭐든."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하프시코드 앞으로 다가간다. 문득 그의 등, 구겨진 나이트가운에 비쳐오는 햇빛을 보는데 제리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순전한 백색이라고 생각했다. 백색의 음악이라고 요슈아의 것을 표현한다면 자신은 저 색깔을 그에게 건네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S.O.S 구조 요청, Mayday!
S.O.S 구조 요청, Mayday!

@juststayus

 

 

두 사람의 눈앞에는 온통 펼쳐진 은빛 세계가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에서 쏟아지는 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는 서릿발이 늘어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았다. 창문 밖으로 하얀 눈이 계속해서 내린다. 함께 몰아쳐 오는 강한 바람이 자꾸만 돌진하는 새처럼 몸을 부딪친다. 덜컹대는 유리창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자, 그는 추위에 한껏 붉어진 귓불을 잡아 만지작거렸다. 무척이나 불편하고, 동시에 아름답기 짝이 없는 풍경과 날씨다. 문이 굳게 닫힌 산장의 벽지는 하얗게 칠해져 있고, 천장 중앙에 설치된 연노란색 조명 불빛이 겨우 산장을 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 위에 깔린 두툼한 붉은색 융단마저도 덮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손끝이 어는 기분이 들었다.
요슈아는 제 가슴 속 시리게 다가오는 고동마저도 애써 무시한 채 옆의 소녀에게 담요의 넓은 면적을 더 건넸다. 눈을 닮은 하얀색 솜털 담요의 보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리는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하며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감사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상냥함은 노력이었으며, 다정함은 천성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제리는 요슈아의 그런 다정함에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리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읽는다. 지금부터 3박 4일간 단독-서바이벌이다냐. 알아서 잘 살아 남으라냐. 쓰레기. 판다 보냄. 천하의 요슈아에게도 식은땀이 흐를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제리, 정말 미안! 설마 판다 사장이 단독 서바이벌 같은 걸 생각했을 줄은!"
"…3박 4일, 요슈아랑 나랑…. 이 허허벌판 겨울 산장에서 살아남는 거야?"
"……응."

 

이번 하계휴가. 판다 사장이 각 밴드의 보컬리스트들에게 포상이라며 건네준 여행권이, 이러한 목적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란 소리다. 요슈아의 머릿속에서 지금쯤 호화롭게 일등석에서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을 판다 사장이 그려졌다. 평소 사장이 무슨 짓을 벌여도 즐겁게 넘어갔던 그가 처음으로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제리를……. 황당한 마음이 급경사를 그리는 산줄기처럼 기울어졌다.


벌써 6번째 서바이벌을 성공적으로 끝낸 클라이맥스 레코드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독특한 운영 방식은 가히 사람들에게 여러 말을 듣고는 했으나, 소속 밴드들 또한 이번에도 전력을 다해 다시 한번 신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판다 사장이 판다걸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내로 들어왔다. 스태프 전원과 직원, 밴드 멤버들까지 포함해 한껏 장식되어 이전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방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벽에 장식된 현수막에는 POP 글씨체로 'Climax Record'가 적혀 있었고, 바닥에는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진 풍선들이 보였다. 식탁보를 깐 테이블에 술과 음료가 잔뜩 배치되어, 이미 술이 들어간 이들의 입에선 흥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이 들어오자 일동들이 건배를 위해 중앙으로 모였다.
그의 입에서 여러 말―밴드 『Veronica』의 보컬인 모모치의 당시 기억으로는 굉장히 지루하고, 따분했고, 썩어빠진―들이 흘러나오고 마침내 건배를 알리는 팔이 위로 올라갔다. 클라이맥스 레코드 만세!
흔해 빠진 건배사가 끝나고 요슈아는 캔에 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왜 자기는 늘 콜라냐며 따지는 에이대시의 말에 웃고 있던 도중, 판다가 보컬리스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이, 쓰레기들. 이번에도 폐기처분되지 않아서 다행이겠다냐. 그런 너희 쓰레기들을 위해 이 상냥한 사장인 내가 하나를 베풀겠다냐. 판다는 그리 말하며 그들의 앞으로 홍보를 불러들여 무언가를 건네게 했다. 티켓과 사이즈가 엇비슷해 보였다. 요슈아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뭘까, 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야에 닿은 맨 처음 글자는 '3박 4일 휴가'라는 글자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변했다.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에게도 시선을 주자, 츠유가 티켓을 흔들며 묻고 있었다.

"저기, 이거 도대체 뭐야? 너무 그럴듯해서 현실감 오히려 안 나는데―"
"말을 꼭 해줘야 안다냐? 수고한 쓰레기들에게 주는 포상 휴가다냐!"
"우왓, 뭐야. 토치오토메 농장이 있는 곳?! 최고잖아!"

각자 떠날 위치는 다른 듯했으나, 모두가 똑같은 기간의 여행권을 받은 건 확실했다. 요슈아는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제리를 떠올리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눈이 수없이 쌓인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기로 유명한 삿포로 쪽의 산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판다가 기겁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한 번 꽉 안아주고 나서 급하게 로비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한없이 가벼워져 구름 위를 누르듯 움직였다. 스마트폰 너머로 익숙한 수신음이 가면 얼마 안 있어, 그를 무엇보다 기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요슈아의 목소리가 둥글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높아지기도 했다. 수락을 받아낸 요슈아는 그 이후로도 조금 더 대화하다가 제리가 통화를 끊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통화는 늘 서로가 먼저 끊길 기다리다가 어느 한쪽이 웃어서 따라 웃는 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기대감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입술을 혼자서 놀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JR 도쿄역부터 신 하코다테역까지는 신칸센 하야부사로 약 4시간 반. 그리고 다시 특급 슈퍼호토쿠를 타면 3시간 반. 비행기로 가려던 둘의 생각을 깔끔하게 접어버리듯, 결항으로 인해 요슈아는 급하게 사장에게 연락해야 했다. 예상이라도 한 것마냥 이미 신칸센 기차표를 구해두었다는 판다 사장의 말에는 의아함이 컸지만, 바로 옆에서 걱정하고 있는 제리의 옆모습을 보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어졌다. 사장이 구해준 표를 이용해 기차 내 자리에 안착했다. 창가 자리 쪽에 앉은 제리는 양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칼이 차창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그가 요슈아를 끌어당겨 같은 풍경을 공유했다. 녹음이 가득한 산, 맑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눈이 빗줄기처럼 창을 건들고, 새하얀 순수가 얇은 창 하나를 두고 제리의 손가락과 맞닿았다. 차창을 흐르는 경치가 그렇게 차례대로 바뀌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에 제 손을 자연스레 겹치고서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 붙어 있는 채로, 각자의 흑과 백을 바꿔 입은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하나의 체스판 같았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완전해질 수 없는 것처럼.

"이제 경치 말고 나도 봐줘."
"요슈아, 질투하는 거야? 자연한테?"

제리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속닥이는 요슈아에게 제리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서 장난스레 물었다. 이따금 제리는 이런 식으로 장난기가 발동하고는 해서, 요슈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는 건 덤이었다. 검은 코트를 느슨하게 걸친 요슈아가 그를 안고 잠든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장장 약 여덟 시간을 달려 도착한 삿포로의 풍경은 지친 마음과 몸마저 전부 노곤하게 만들 정도로 순수한 빛이 가득했다. 비행기를 연착시킬 정도의 날씨 덕분에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털 부츠를 반쯤 덮는 두께의 눈이 바닥에 쌓여 뭉쳐 있었다. 제리는 속으로 요슈아가 눈밭에 누우면, 잠깐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다. 많이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산장이니까.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칠 것 같으면 단 한두 마디로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은 제 인생에 그밖에 없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서. 요슈아는 부드러운 손을 그에게 건넸다. 매서운 추위가 손길이 닿자마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산장으로 향하며 오르는 느긋한 경사의 비탈길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양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쌓인 눈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가지 잎에 남은 약간의 새싹이 마지막 힘을 짜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땅을 덮는 하얀 융단 위에는 고개를 높게 쳐들어도 그 끝이 가늠이 가지 않는 나무가 제리의 시선을 끌었다. 언젠가 저런 나무 위에 올라가면 어떨까? 제리의 중얼거림에 요슈아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분명 자유로운 기분이 들지 않을까……나. 올라가 본 적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한눈에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슴이 상쾌해지는걸."
"그럼 그때가 오면, 같이 올라갈게."
"……너는 늘, 당연하다는 듯이 날 벅차게 만드는 말을 해주네…. 그래서 가끔은 정말 꿈같아."

두 사람의 가까이에 있던 나무가 때마침 바람결에 잎을 흔들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입에서 나오는 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산이라고는 했지만, 분명 정상. 요슈아, 그리고 브레이브 차일드가 언젠가 닿을 정상까지 올라갈 때마저도 제리가 곁에 있어 줄 것이라는 나른하고도 기쁜 확신이 들었다. 나도. 제리의 입에서 간결하고도 무거운 대답이 나오고서 얼마 안 가 산장 하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로그하우스 풍의 목조 저택에 가까운 산장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로 이루어진 1층이 그들을 반겼다. 벽을 둘러싼 거대한 유리 창문과 고풍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곁들어져 한껏 분위기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굉음과도 같은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응, 갇혀버렸네……."
"…정말, 정말로 미안해. 설마 판다 사장이 애인하고 함께 있을 때도 이럴 줄은…."
"으응,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했지? 어쨌든 사장……님도 어느 정도 예상하셨던 거라면, 엄청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고. 쓰여 있는 대로 3박 4일만 버티면 나갈 수 있겠지!"

그래도……. 한껏 쳐진 요슈아의 눈썹을 본 제리가 오른손 검지를 뻗어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가 이렇게 자책하거나, 혼자서 멈춰있을 때면 제리는 그에게 다가와 이끌어주듯 손을 내밀었다. 제리가 눈을 둥글게 말고 웃었다. 그리고 요슈아랑 같이 산장 조난이라니, 솔직히 조금 재밌어져 버렸고. 그 실없는 농담에 그는 당황한 채로 무어라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분명 너도 무서울 텐데, 겁날 텐데. 내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겠지. 그의 손가락이 얼굴 앞에 머무르고 있는 제리의 손을 끌어왔다. 손끝이 얼어 차가웠다. 요슈아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천천히 엄지로 쓸었다. 제 얼마 안 되는 온기라도 전부 전해주고 싶다는 듯. 부드러운 피부가 한 번 닿고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네 손, 차갑구나."

……응, 그러게. 조금 춥네. 그러면서 제리는 그의 머리를 요슈아의 어깨에 얹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그의 입김이 요슈아의 귓가에 갈고리처럼 걸렸고, 간지러운 듯한 달콤한 감각이 요슈아의 온몸을 달렸다. 요슈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이 붙어 있는 살갗 아래 세포 하나하나에 신경이 집중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그는 제리의 검은 머리카락을 얇은 손가락으로 솎아댔다. 혈관이 도드라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검은 실타래 사이를 헤치듯 움직인다. 지금,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연인에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리고 싶진 않았다. 요슈아의 귓불이 단번에 홧홧하게 타올랐다. 벽난로 안 장작이 그를 놀리듯 불씨 튀기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를 부드럽게 껴안는 데까지만 머물기로 했다. 요슈아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리는 품 안에서 고개를 좀 더 안쪽으로 움직였다. 아아. 나는 정말 바보야, 바보……. 손등이 추위를 모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제리의 말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일단은 보컬리스트들끼리 있을 때보다는 덜 각박한 환경이었다. 산장 너머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꽉 채워진 스낵바, 동날 일 없을 듯한 수많은 장작 등이 그것을 증명했다. 물론 자연적인 추위와 고난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산장에 갖춰진 온방 장치는 죄다 먹통이었고, 이불과 벽난로의 열기 등으로 겨우 그것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제리의 허리에 털 담요를 가지런히 묶은 요슈아가 잠시 롤케이크 같다며 웃었다. 분명 보컬리스트 애들하고 있었을 때는 온종일 시끌벅적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들하고 같이 왔다면 난장판이 되어서 정말 조난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무언가가 시선에 들어와 다급하게 제리를 불렀다.

"뭔데?"

제리가 그리 물으며 요슈아의 근거리로 다가오자 온갖 서적과 레코드판으로 가득한 책장이 단번에 그를 압도했다. 8090 명반을 모아둔 것부터 시작해서 각종 음악 관련 책들은 먼지 낀 것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책장 바로 앞에는 광이 날 정도로 빛나는 축음기가 먹이를 기다리듯 나팔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요슈아가 눈을 빛내며 자신이 LA 시절 동경했던 밴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제리에게 설명했다. 제리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로 가득했다. 여기 혹시, 판다 사장의 사유지 같은 걸까……. 그렇다면 신기하네! 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리가 축음기를 쓸었다.

"어차피 갇힌 거, 네 노래가 듣고 싶다고 하면 욕심이려나?"

그 말을 들은 요슈아가 고민도 안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 우리는 조난객이니까 조금 멋대로 구는 건 괜찮겠지? 장난스러움이 가득한 말이 끝나자마자 요슈아가 아래에서 3번째 정도 위치한 책장 안쪽에서 레코드 하나를 꺼냈다. 재생용 바늘 아래에 레코드판을 끼워 넣으면 익숙한 반주가 산장 전체를 덮었다. 요슈아가 허밍을 하며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제리 또한 그것이 LA서 자주 요슈아가 부르던 노래임을 기억해냈다. 알파벳이 모이고, 단어가 모여, 노래가 된다. 작은 모임이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요슈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줄곧 그리워하던 풍경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건 색달랐다. 소파에 앉아, 손가락을 튕기며 박자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주변이 뙤약볕처럼 타오르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태양이 제리와 요슈아의 살갗을 찍어누르고, 땀이 흐르는데도 둘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마음에 온종일 들뜨게 하던 그때로. 아아. 정말 너는 나의 매 순간에 존재하는구나. 제리도 요슈아도 그리 생각했다.

그의 노래가 끝나고서 제리는 옅은 손뼉을 쳤다. 그는 설마 그 노래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며 머쓱하게 뺨을 문질렀다. 소파에 누워 기대듯 앉은 요슈아의 옆에 앉은 그가 담요 반절을 그의 무릎 위에 덮었다. 요슈아는 고맙다고 답하며 이것저것 추억을 늘어놓다가, 한참 말이 없는 제리를 보고 걱정스레 눈썹을 움직였다. 괜찮냐고 묻는 그에게 제리가 작게 대답했다.

"요슈아,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괜스레 더 걱정되어서."

그의 말에 요슈아가 급하게 손사래 쳤다. 아, 아냐 아냐! 정말로! 제리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약하게 튼 요슈아는 그 상태로 감정을 담아,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게 말했다.

"네가 말해줬잖아, 자책하지 말라고. 어려운 일도, 기쁜 일도 함께 나누면 괜찮을 거라고. 맨 처음에는 확실히 많이 당황하긴 했지만……. 네가 있다고 생각하니 괜찮더라. 신기하게도 말이야."

마음이 담긴 글자는 서로의 존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당장 그 말에 제리는 진심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불안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건네든 요슈아는 늘 그렇듯 웃어주겠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밤하늘에 수를 놓는 수많은 나무 위 눈들이 시야에 걸렸다. 서리가 낀 창문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던 요슈아의 어깨를 제리가 톡 건드렸다. 눈앞에 들이 밀어지는 단 향이 그의 비강을 자극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였어? 놀란 그에게 제리는 잠이 깼다며 말하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코코아, 타 왔어."
"아……! 고마워. 따뜻하다."

요슈아가 그것을 받아들며 푸스스 웃었다. 제리는 뺨을 쪼이는 누군가의 따스한 열기와 담요 안쪽으로 파고드는 추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계속 머무르는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원치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느긋한 건 좋지만, 그와는 별개로 쉽게 답답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신기하게도 누구보다 자유를 쫓으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정착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슈아의 옆모습을 보면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 않냐는 생각이 자신의 안쪽에서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제리는 진심을 전하는 데에 있어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도 네가 있어서, 이런 눈밭도 괜찮은 것 같아."

툭 튀어나오는 본심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요슈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간질거리는 심정을 어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어휘를 나열하여 재배치하고, 뒤섞어도 나오는 말은 가장 직설적이고 간단한 것이었다. 제리의 곱게 묶은 머리는 어느새 풀은 채로 허리를 간지럽혔다. 요슈아의 시선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부터, 손, 어깨, 얼굴로 천천히 올라왔다. 1초, 2초, 3초. 그리고 이윽고 그의 입술이 다급하게 열렸다.

"……정말로. 기뻐…. 그리고 정말 미안해! 사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뭐랄까, 제리 너랑 있으면……. 이런 산속의 산장 안의 풍경도 계속된다면 좋겠다고. 무심코 그런 생각 해버렸거든. 이런 말까지는 역시 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진심이니까.”

볼을 붉히고, 망설이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먼저 선수 쳐 버리는 요슈아를 바라보며 제리가 뺨을 긁었다. 그는 자신의 것과, 요슈아가 들고 있는 반도 안 마신 코코아 잔을 앗아가 부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요슈아의 붕 뜬 목소리가 제리의 귓가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해서 머물렀다. 눈앞의 사람이 나눠주었던 온기가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두 손을 뻗어 양 뺨 위에 얹었다.

"바보."

요슈아의 손이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과 함께 제리의 손등 위로 똑같이 얹어졌다. 너도, 나도. 우리 둘 다 바보네. 아하하……. 숨결이, 마음이 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뜬 숨이 겹쳐졌다. 몇 번을 짧게 마주했다가,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서 깊게 파고들었다. 제리의 허리가 요슈아의 손에 의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추위 따위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들이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귓불도, 손가락 마디도, 뺨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말하는 요슈아의 어깨를 약하게 툭 치고서, 제리는 곁눈질로 바깥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창 너머로 내리는 눈이 마치 설탕 가루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 향이 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리 느꼈으므로.


다행히 예상대로 4일째 되는 아침, 구조대가 찾아왔다. 구조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 요슈아가 대놓고 '거기 뒤쪽에, 홍보잖아'라고 말했지만 무시당했다. 역시나 산장은 판다 사장의 것인 듯했다. 둘은 산 아래로 내려와 겨우 밴에 탑승했다. 둘이 아무래도 첫 번째 구조―라고 쓰고 서바이벌이 끝난 뒤 수습하는 단계―대상이었던 건지, 차의 크기에 비해 아직 둘밖에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홍보가 한숨을 푹푹 쉬며 재밌었냐고 물었다. 예상했던 낯빛과 다르게 멀쩡해 보이는 둘 때문이었다. 제리와 요슈아는 서로를 보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웃음은 일상 중 하나였다.

"응, 무척 즐거웠어."

요슈아와 제리가 동시에 그리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못마땅하진 않다는 듯 따뜻한 보리차를 건넸다. 우리 둘 다 서로가 구조대이자 안심할 수 있는 존재.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마음 앞에서는 그 어떤 뜨거운 것도 설산처럼 차가웠고, 그 어떤 차가운 것도 벽난로의 장작처럼 뜨거웠다. 요슈아는 남은 한 손으로 제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틈새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깍지를 꼈다. 제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당연한 순서를 밟듯 머리를 기댔다. 그 위로 요슈아의 고개가 떨어졌다. 긴장이 풀리고 추위가 녹기 시작하니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정신을 차리면, 이번에는 반드시 판다 사장에게 한마디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두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을 태운 밴 뒤로 새하얀 설산이 멀어졌다. 잘 가, 메이데이. 세 번 반복할 필요는 없어.

요슈아가 아프다
요슈아가 아프다

@ijeongsoga

 

 

요슈아가 아프다.
감기 걸렸어, 와 함께 도착한 울먹거리는 이모티콘.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대체 뭐라고, 무슨 정신으로 요슈아의 집까지 달려간 건지 모르겠다. 노을이 곁드는 현관에 잔뜩 헐떡이며 다다랐을 때가 돼서야 제리는 자신이 양손 한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 안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있었다. 해열제부터 시작해 편의점에서 사 온 죽, 이치고모찌, 푸딩, 곤약 젤리 등 달콤한 간식거리까지. 혹 갈증 나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구매한 자그마한 이온 음료도 하얀 봉지에 보란 듯이 자리했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음에도 살뜰하게 챙겨야 할 건 전부 챙긴 것 같아 제리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결코 귀찮음과 같은 감정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려는 의도 반, 오랫동안 외롭게 혼자 앓고 있던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의도 반. 근심이 그득한 가슴이 답답해 입술을 문 그가 익숙한 듯 조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선명한 벨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반응하는 기척은 없었다. 누군가, 그러니까, 요슈아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라든가, 반가운 듯 제리라고 부르는 목소리와 같은 것들이 집안에서 들려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한 번 더 벨을 눌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는 어째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픈가? 대답할 기운도 없나? 그저 자고 있는 건데, 괜히 내가 야단스럽게 구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일순 제리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연기처럼 뭉게뭉게 불어나는 사고를 저지할 새도 없이 제리가 무거운 봉지를 팔에 낀 채 예비 열쇠를 꺼냈다. 항상 요슈아가 문을 열어주었기에 자주 써보지는 않았지만, 나름 능숙한 솜씨로 열쇠를 끼워 돌리자 문은 별 저항 없이 철컥. 부드럽게 열렸다.
제리는 그 안으로 자연스레 발을 옮겼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노을이 비추는, 불이 켜지지 않은 요슈아의 자취방은 퍽 밝은 편이었다. 혹시 몰라 요슈아, 하고 그를 부르는 제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숨길 수 없는 불안이 서려 있었다. 한참-고작 2초였지만-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탓이었다.
결국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와 함께 요슈아의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은 것과는 달리, 그것을 돌려 미는 행동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방문이 열리며 틈을 만들어내자마자 자그마한 기침 소리가 제리에게 들렸다.
콜록, 콜록. 마르고 갈라지는 기침에 놀라 눈을 키운 것도 잠시, 곧 마주하게 된 그의 발간 얼굴에 제리가 조급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요슈아와 눈을 맞추려 그 앞에 주저앉듯 몸을 낮추었다. 동시에 내용물이 가득 차 있던 비닐봉지가 손에서부터 흘러내려 바닥을 굴렀다. 약이며 간식들이 제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요란하게 나뒹굴었지만 그의 시선은 수척한 요슈아의 얼굴에서부터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요슈아. 제리가 입에 담는 단어는 음절이며 단어의 형태며 언제나의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 내재되어 있는 감정 하나만큼은 달랐다. 걱정을 넘어선 근심, 반가움보다는 가련함이 우러나오는 목소리. 한편으로는 괜찮냐 묻는 것 같은 따뜻함도 담겨 있었다.
붉다 못해 새빨간 얼굴에 제리가 요슈아의 이마에 오른손을 대었다. 부드럽게 손등에 닿아오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뜨겁다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와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던 찰나 줄곧 대답이 없던 요슈아가 멀어지는 손을 붙잡고 다시 그것으로 제 볼을 감싸게 하였다. 자그맣게 시원하다며 중얼거리고, 손바닥에 입술을 붙인 채 입을 맞추듯 비벼오는 것은 덤이었다.

 

…요슈아, 괜찮아?

 

그리 묻자 으응,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낸 요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리의 질문에 부정을 표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부려오는 어리광이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작은 안도감이 깃들다가도, 제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요슈아의 행동은 무언가 미심쩍었다. 제리가 천천히 요슈아의 볼을 쓸어주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저만이 볼 수 있는 그의 어리광은 오히려 좋다면 좋았다. 다만, 걱정해주는 내가 보고 싶어서, 잔뜩 어리광을 부린 뒤 사랑받고 싶어서, 라는 핑계로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열이야 온기가 가득한 이불에 꼭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오르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진위를 가리기 위해 요슈아와 눈을 맞추었다.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는, 자신의 것과 닮은 잿빛의 눈은 천진하게 웃었지만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고,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열기는 도저히 연기라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제리가 의심을 믿음으로 뒤바꾸었다. 설령 정말 연기였다 할지라도, 요슈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약도 아직이겠네.

 

이것저것을 물어도 요슈아는 말끝을 늘이기만 하였다. 말이며 행동이며 모든 것이 굼뜨기만 해 답답할 만도 하건만 제리는 얌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아무것도 먹지도, 하지도 않았다는 응답이 되돌아왔다.

정말 내가 오기까지 기다리기만 한 건가? 금방 심각해진 제리가 간단한 해열제라도 먼저 먹이려 잊혀 있던 비닐봉지를 왼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른손은 요슈아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라 차마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툭, 하고 손에 닿는 것은 의외로 비닐이 아니라 딱딱한 병이었다. 액상 해열제라는 라벨이 버젓이 붙어있는 병. 단번에 잡혔다면 좋았겠지만 건드림과 동시에 데구르르 굴러 더 먼 곳으로 가버린 해열제는 움직이지 않고서는 잡을만한 거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잠깐만. 작게 요슈아에게 속삭인 제리가 그의 볼에서부터 손을 떨어트렸다. 멀어지는 손이 아쉬운 듯 제리에게 꽂히는 요슈아의 시선은 퍽 노골적이었다.
몸을 일으켜 해열제를 찾은 김에 바닥에서 쿨링 패치며 이온 음료며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가득 갖고 요슈아의 곁으로 돌아온 제리가 이번에는 침대맡에 앉았다.
해열제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일어날 수 있어? 말을 맺음과 동시에 달콤씁슬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병을 요슈아에게 건넸다. 그는 제 앞에 뻗어진 제리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불 덩어리와 함께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제리가 빨리 열부터 내리자며 약병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받으라는 신호였으나, 어째서인지 요슈아는 손을 들기는커녕 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약을 가지러 가기 위해 멀리 떨어졌을 때처럼, 빤히 제리의 눈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 먹여주면 안 돼?

 

의아해 고개를 기울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들려온 요슈아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목소리였다기보다는 칭얼거림에 가까웠다.
거절을 말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결국 "이번만이야?"라고 덧붙인 제리가 얌전히 입을 벌린 요슈아에게 해열제를 먹여주었다. 열 때문에 땀은 또 어찌나 흘렸을지. 이온 음료도 조금이나마 마시게 하고, 이마에는 쿨링 패치까지 붙여 주었다. 약이 쓰다며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작은 젤리도 덩달아 입에 넣어주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오물오물. 얌전히 제리가 주는 것들을 전부 받아먹은 요슈아가 또다시 비치적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열이 너무 높아 어지러웠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래 앉아있는 것보다 편하게 누워있는 편이 휴식하기에는 훨씬 나았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던 제리의 시선이 요슈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리는 모습은 정말로 어린 고양이 같아 제리가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어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파란 쿨링 패치가 깔끔하게 앞머리로 가려졌다.
그 다정한 손길에 요슈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곧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꿈질거리며 침대의 한쪽으로 붙은 그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가벼운 수신호는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픈 사람을 외롭게 두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옆에 누워주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평소보다 더 애처로운 눈으로 저를 바라봐주는데 어느 누가 이런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어리광을 들어주는 것은 이번만이라는 제 말마따나 제리가 조심스레 요슈아의 곁에 누웠다. 몸을 옆으로 돌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이렇게 옆에 있어 주니까, 좋다….

 

작은 속삭임이 제리의 귀를 간질였다. 열감에 시야가 흐릿한 건지, 몽롱한 건지. 열심히 이것저것 먹였음에도 잠이 덜 깬 것일 수도 있겠다. 잠들 때까지 어디 가지 말아 줘. 요슈아가 웅얼거리듯 덧붙였다.
그 말에 제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디 가지 않겠다는 듯.

 

…나, 추우니까 안아줬으면 좋겠어.

 

점점 요구의 크기가 커졌지만 제리는 큰 저항 없이 요슈아를 품에 안았다.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끌어안고, 더운 숨을 들이켰다 뱉어 부러 간지럽히는 요슈아에게 싫은 소리 하나도 뱉지 않았다. 몸은 조금 움츠러들지언정, 그가 안락하게 잠이 들 때까지 등허리를 토닥여주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요슈아의 눈이 감겼다 뜨이며 긴 속눈썹이 제리의 맨 살갗에 닿는 것도 언뜻 느껴졌다. 어느새 노을이 다 진 방에는 빛 하나, 소리 하나 스며들지 않아 고요했지만, 딱 하나. 서로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탓에, 살아있음을 알리는 심장 소리가 선명히 고막을 파고들었다.

고즈넉한 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파장이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요슈아의 등을 다독이는 손은 느려진 지 오래였음에도 그의 눈은 여전히 더디게 깜빡이기만 할 뿐 가만히 감겨있지만은 않았다. 끌어안은 몸에서 열이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는데도 졸음이 그득했던 요슈아의 목소리와는 달리 행동은 전혀 그러지 않으니 결국 제리가 잠이 오지 않냐 묻자,

 

키스해주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돌아오는 대답에 언뜻 몸을 굳혔던 것도 같다. 요슈아가 제리의 목덜미에 묻었던 고개를 고쳐 베고는 제리를 바라보았다. 간절하고도 애절하고, 힘없이 풀려 자극적인 눈.

언제 보아도 참 예뻤다. 그 색에 홀려, 제리가 옆으로 안고 있던 몸을 굴려 요슈아를 바르게 눕혔다. 자신은 그 위에 올라탄 채였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건지 요슈아가 상기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순수한 미소였다. 그에 호응하듯 제리가 고개를 내리자, 이번에는 그가 손을 뻗어 제리의 볼을 감싸기도 하였다. 흘러내리는 옆머리는 귓가로 넘겨주어, 자그마한 입술을 머금기 쉽게 만들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자 애써 넘겼던 머리카락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것을 신경 쓸 틈은 없는지, 요슈아는 혀를 내어 조심스레 제리의 입술을 핥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조심스레 깨물기도 하였다. 어설프게나마 혀를 섞으려 드는 제리가 사랑스러워, 무심코 목을 울려 웃는 소리를 그가 내기도 하였다.
취한 것 같았다. 점차 고갈되는 호흡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키스를 할 때면 항상 그랬다. 숨을 쉬는 법을 까먹어, 물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마냥 부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우울이 아니라, 안식에 빠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기에 열이 날 리가 없었는데도 정신은 점점 몽롱해져 갔다. 조금이나마 고여있는 둘 사이의 산소를 먹으려 입을 조급하게 벌리면 다시 다물지 못하게 요슈아가 제리의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겹치던 찰나, 아, 하는 짧은 탄식에 놀란 그가 닿아있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 틈에 숙였던 고개를 든 제리가 다시 입을 맞추지 못하게 요슈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급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산소의 양은 성급하게 뛰어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작게 미안해, 사과한 요슈아가 제리를 끌어안았다. 말소리며 행동이며 지독하게도 느려 잠결임을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피곤함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어조였다.
요슈아는 제리가 숨을 고르기 편하게 하려는 듯 자신을 재우려던 그 손길을 모방하여 등을 쓸어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제리가 어리광을 부리듯 요슈아의 품에 고개를 비볐지만, 그 행동은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토닥, 토닥. 움직이던 손은 금세 정지, 열기 서린 숨은 규칙적으로 호흡.
설마, 싶어 제리가 고개를 들자마자, 제 등에 얹혀 있던 요슈아의 손에 힘이 빠져 주르륵 침대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으응, 하는 잠꼬대와 같은 소리가 굳게 감겨있는 요슈아의 눈과 함께 제리를 맞이했다.
약속을 지켰다고 해야 할지. 키스를 마친 요슈아는 순식간에 오른 열에 피로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빤히 그린 듯 잠든 요슈아를 바라보다, 쿡쿡 웃으며 그를 품에 가득 안은 제리가 요슈아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더 길게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같잖은 미련이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제리는 요슈아에게 잘 자라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내가 너의 손을 잡을 때면 우울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너도 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안식의 바다에 아늑하게 잠겼으면 좋겠기에.
아침이 밝아와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곁에 머물며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