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xngkgkB

 

 

제리가 방에 들어섰을 때 요슈아는 제리의 침대 위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자취방에 함께 들어섰다가 잠깐 제리가 음료를 사 온다는 사이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아마 침대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그만 한 번 눕고 나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생각한 제리는 겸연쩍게 웃으며 손에 들린 음료 캐리어를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따뜻한 캐모마일 티와 헤이즐넛 카푸치노. 두 향 섞이면 어지러울 법도 하건만 김이 새지 않는 것은 그 위에 플라스틱 뚜껑이 덮인 덕이다. 따끈한 온기만 제리의 한 손에 미약하게 남아있어, 제리는 스스로의 다른 손을 들어 제 손바닥에 부비며 손을 녹였다.
그러면서 눈길은 한편으로 요슈아를 살폈다. 연인의 모든 순간을 눈에 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땋아 내린 머리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따라 모로 기울어질 때에야 제리는 자신이 요슈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등의 불빛이 동그랗게 떨어지면 제리의 그림자가 옆으로 누운 요슈아의 뺨에 희미하게 지고 있는 것이다. 귀의 피어싱도 빼지 않고 잠든 요슈아의 긴 속눈썹이 역시 그의 뺨에 한 겹의 얕은 음영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보다는 이제 청년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는 얼굴이 다. 멀어진 유년을 떠올리며 제리는 잠깐 우울해지려던 것을 고개 저어 애써 떨쳐냈다.
그 대신 제리는 침대 옆에 앉았던 몸을 조금 더 가까이 해 요슈아의 옆 침대 맡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는 동안 요슈아는 잠시 소리 없이 뒤척이는 듯하더니 옆에 있는 제리의 손을 붙들었다. 제리는 순간 화들짝 놀라 호흡을 멈추고 요슈아가 하는 양을 물속에서 숨 참고 바라보듯 눈을 크게 뜬 채로 지켜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요슈아는 이내 "으음." 소리를 내더니 잡은 제리의 손을 아예 제 품으로 당겨 안는 것이다. 덩달아 요슈아가 있는 방향으로 끌어당겨진 제리의 몸도 "어어," 하는 사이 풀썩 침대 위로 누웠다. 제리가 당황한 사이 잠든 요슈아는 더듬더듬 팔을 뻗어 버릇처럼 제리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필요한 것을 찾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제리는 이제 자신 손이 아닌 제리 자신을 아예 끌어안아버린 요슈아의 품속에서 얼굴을 들까, 말까 마구 뒤흔들리는 것 같은 심장을 안고 고민했다.
연인이라는 게 이렇게 편안하고도 두근거리고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몇 초 뒤에야 제리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잠든 연인은 아주 어렸을 적 보았던 무구하고 어린 낯이 아닌 현실을 걸어가는 낯을 하고 있다. 현실. 그 단어를 떠올린 제리는 문득 그를 다시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요슈아와의 관계의 정의란 제리에게 있어 늪 같던 우울에서의 느리게 뻗어진 구원과도 같은 것이다. 제리는 내도록 스스로의 최악을 자신마저 용서할 수 없던 지난날을 안다. 그래도 옆에 있을게, 라는 말은 그렇다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요슈아에게 '과분하다'는 말을 하거든 그는 미간을 좁히며 그게 아니야, 라고 말하겠지만.
내게 너는 기적이야. 제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요슈아 쪽으로 돌리고 팔을 뻗어 요슈아가 그러고 있듯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숨결도 닿을 거리에서 가깝게 본 그의 낯은 이제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희미하게 웃고 있다. 내게 너는 기적이야, 요슈아. 제리는 발음하지 못하는 말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도무지 놓고 싶지가 않아서 그랬다.

 


그러고서 깜빡 잠에 든 것 같았다. 소년이었던 요슈아와 자신이 나오는 꿈을 꾼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렴풋이 어린 요슈아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것만 떠올랐는데 그 몽중이 얼마나 모호하냐면, 아예 그때의 요슈아가 지었던 표정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제리는 부스스 눈을 뜨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겨울 속에 잠을 뉘고 있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눈꺼풀을 완전히 들어 올렸을 때,


"깼어?"
"……아!"
"……그렇게 놀랄 건 없잖아."


제리가 탄성에 가까운 단음을 뱉으며 얼굴을 붉히자 요슈아가 그제야 제리를 품에서 조금 떨어뜨리며 불퉁한 소리를 냈다. "……나도 놀랐다고. 끌어안은 게 너일 줄은 몰랐어. 너 기다린다는 게 그만."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는 요슈아를 보고서 제리가 그제야 한 번 웃었다. 문득 생각이 나 음료를 놓아뒀던 책상을 돌아보면 종이 캐리어에 담긴 음료 두 잔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창문 밖은 아직 까맣고. "다 식었겠다." 제리가 말하자 요슈아가 다시 거리를 좁혀 그를 안으며 말했다. "뭐, 괜찮아." 그 말 한 마디에 제리는 가져온 따뜻한 음료에 대한 아쉬움을 놓아두기로 하고, 대신 눈을 깜빡였다.


"요슈아."
"응."
"잠버릇이야?"
"…뭐가?"
"누구 끌어안고 자는 거."
"……내가 너 말고 다른 누구 끌어안고 잔다는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요슈아가 퉁명하게 말했다가 도로 멋쩍게 웃는다. 미소를 보고서 제리도 따라 짧게 웃었다. "일어나 보면 베개든 인형이든 안고 있더라고. 그런데 네 방엔 네가 있으니까……" 요슈아는 그 부분에서 일부러 말을 끊어내며 슬쩍 미소를 짙게 입술 위로 올렸다. "널 안아야 했나보지." 제리의 얼굴이 파드득 다시 붉어졌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섭섭하게 말한다, 너…….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잊은 거지."


장난스럽게 붙인 뒷말에 제리의 얼굴이 아예 완전히 달아오르자 요슈아가 손을 뻗어 손등을 제리의 뺨에 댔다. 미지근한 손등 위로 뺨에 오른 열이 그대로 옮겨 붙는다.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은 요슈아가 품에서 다시 제리를 떨어뜨렸다. 둘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요슈아는 제리가 몸을 일으키자 맞은편에 있는 책상 위의 음료를 가져왔다. 양손에 들린 것 중 캐모마일 티는 제리의 것, 헤이즐넛 카푸치노는 요슈아의 것이다. 제리가 다시 조금 속상한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식어서 맛없지." 요슈아가 재차 "괜찮다니까." 말하고 나서는 표정이 풀리긴 했지만. 이제 둘은 따뜻하지 않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한 모금씩 음료를 마신다. 식은 차와 커피는 그래도 그런대로 향만은 제대로 남아 있어 맛이 나쁘지 않았다.


"나 꿈을 꿨어."

 

요슈아가 불현듯 말했다. 제리는 옆에 한 뼘 정도의 거리만 두고 앉은 요슈아를 돌아봤다. 달콤하고 쌉쌀한 헤이즐넛 향, 다 빠진 거품, 요슈아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제리를 보지 않고 꿈을 다시 더듬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 말고, 저번에 내 방에서 네가 잠들었을 때 말이야." 제리는 모호하나 그가 언제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요슈아의 집 거실 소파, 제리가 요슈아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을 때. 그때는 애초에 자신이 먼저 잠들었던 것 같아 멋쩍은 것은 덤이다.

요슈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앞에서…… 상처를 냈을 때 말이야."

"……."

"우리는 이제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제리는 눈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의 컵을 잡은 흰 손등에 힘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아직도 두려워……."

"……뭐가?"
"모르겠어."

 

최악을 이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최악까지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모르겠어, 라고 단정했으나 제리도 요슈아도 서로의 마음과 스스로의 마음을 알았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어둠 속에 갇혀 서로를 찾고. 제리는 눈을 깜빡이다가 식은 차를 다시 내려놓고 요슈아를 향해 몸을 틀었다. "요슈아." 제리가 부르면 그가 답한다. "응." 눈을 바라보며……
그 순간 제리는 자신이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해낸다. 꿈속에서 어린 네가 손을 뻗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웃고 있었다. 기실 너는 항상 내게,
제리는 팔을 들어 요슈아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므로 포옹은 가장 가까운 이별이라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가장 가까운 이별과 식은 차와 한 번 잠들었다 깨어나도 가지 않는 긴 겨울밤, 그래도.
네가 해줬던 말처럼.

 

"괜찮아."

"……."
"응. 괜찮아."

 

유년에서 지금까지 왔듯 우리는 앞으로도 함께 늙어가며 길을 걷겠지. 그 사실만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동시에 우리를 위로한다. 제리는 그의 어깻죽지에 이마를 대며 그럼에도 웃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리고 우리가 어두운 길 아닌 밝은 데를 향해 걸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랬다.
가만히 안겨 있던 요슈아는 마치 잠버릇처럼 제리와 같이 팔을 들어 제리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는다. 그 역시 고개를 제리의 목덜미에 묻으며, "맞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밤이 길어 둘은 다시 잠들려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제리의 방 침대는 조금 좁았기 때문에 함께 잠들려거든 아까처럼 두 사람이 안은 채 자거나 아주 붙어 자야 했다. 제리는 아까도 품에 안겨 잠들었으면서 괜히 쑥스러워 "미, 미안," 이나 연발하고, 요슈아는 슬쩍 웃으며 "이제 내 잠버릇 알지." 벌써부터 제리를 안을 준비를 한다. 서로의 체온이 뭉근하게 몸에 눌러 붙고, 그럼에도 긴장되기는커녕 편안하다는 감각이 먼저 들었다.
제리는 땋은 머리를 풀고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이불을 끌어올려 요슈아의 어깨 위로 덮어준다. 요슈아는 이불에 제리의 얼굴이 가려지는 게 싫어 손을 올려 제리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도록 조금 틈을 낸다. 시선이 마주치면 정해진 규칙처럼 웃는다.
우리 함께하자, 여전히 이렇게. 깨어지지 않는 꿈이 밤이 지나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잠든 이의 낯을 볼 때에,

@xngkgkB

 

 

요슈아는 거실 소파에 드는 볕을 본다. 정확히는 제리가 잠들어 있는 발치에 드는 햇볕이 어디까지를 밝히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겨울이긴 하나 유리창으로 가로막힌 찬바람은 들지 않고 햇빛만 유리를 투과하여 제리의 발끝을 비추고 있었다. TV도 틀지 않은 터라 아무 소음도 이 정적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제리처럼 잠들기라도 할 듯이.

진행하던 요슈아의 작곡도 끝냈고, 모처럼 일이 없는 한가롭고 따사로운 오후였다. 함께 맞은 휴일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며 고민하다 둘은 같이 소파에서 잠에 들었다. 일어나면 느지막한 대낮이어서 아연해졌건만, 늦은 아침을 먹고 난 뒤 제리는 몰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잠들었다. 요슈아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상체만 뉘어 잠든 제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바로 두었다. 혹여 자세가 불편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염려가 무색하게 제리는 좀체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조심스레 움직여 잠든 제리를 살짝 들었다. 이번에는 자신 무릎에 연인이 머리를 괼 수 있도록. 평소처럼 땋지 않고 있던 제리의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제리가 뒤척이거나 깨어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그럭저럭 편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처음에야 TV를 틀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금방 소리에 제리가 깰 것 같아 그마저도 켜지 못하고 그는 연인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따사로운 햇빛이 제리의 발치에서 무릎으로 올라가고, 길게 늘어진 창 모양의 네모난 볕이 마침내 얼굴까지 비출 적에 제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뒤척일 때에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에겐 더 이상 들킬 것이 없는데. 없나? 요슈아는 잠시 고민한다. 정말로 없나?

기실 숨기는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불안까지 온전히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바닥에 앉아 반대쪽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이따금 한 번 잃어버릴 뻔한 이를 본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얕게 눈가 아래로 그늘을 만드는데 그마저도 따뜻하다. 요슈아는 생각한다. 너는 모르겠지. 눈을 감는다.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무엇을?

 


깜빡 잠이 든 속에서 요슈아는 제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선잠이므로 어렴풋이 꿈임을 알고 있었으나 서 있는 뒷모습이 지나치게 위태로워 달려가 그 등을 끌어안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언젠가 본 것 같은 모습이다. 또 다른 요슈아가 제리와 마주보고 있다. 제리는 커터칼을 들고 요슈아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결단하듯이 스스로의 손목을 그었다. 날이 흰 팔목을 순식간에 긋고 지나가고, 붉게 그인 선 위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 곧 팔을 기울이면 떨어지는 핏줄기가 된다. 뚝뚝 떨어진다.
저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것이 익숙해졌다는 말. 속으로 무슨 말이건 삼켰다는 말.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다는 말. 이별 대신 계속 함께 있겠다는 말.

요슈아는 사실 그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무서워. 네가 어디론가 사라질까봐. 그런데 이 두려움이 너를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혼자 남겨질 나를 위한 것일까 봐 그게 더 끔찍한 것 같아. 너를 붙잡아 가두려는 것도 어쩌면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일 것이라고, 간신히 입을 떼지만 꿈속의 너는 답이 없다.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할 뿐이다. 입을 어물거리면서 모호한 발음으로, 그러면 나는 선명한 핏물을 보면서…….
요슈아는 그래서 깨달았다. 사실 나약한 건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인정하고 나면 꿈은 세찬 바람으로 답한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자상을 입히듯 몸을 스치고 지나가고 멀어지는 등을 보면서 요슈아는 겨우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가지 마. 가지 마, 제리.
그때에 그를 꿈에서 끄집어내는 또 다른 목소리가 하나 있다.

 

요슈아…….

 

그 순간 요슈아는 눈을 뜬다.


잠에서 깨어났다.
요슈아, 불렀던 목소리 탓에―그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꿈의 여파로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마구 두리번거린다. 어느덧 바깥에 내리쬐는 햇볕은 붉게 변했고, 서서히 노을로 변해가는 도중이다. 아래를 보면 제리는 자신 무릎을 베개 삼아 그대로 소파에 잠든 채인 모습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요슈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로 내쉰다. 한숨처럼 호흡이 흩어진다. 시계를 확인하면 막 졸기 시작한 때로부터 한 시간 남짓 지났다. 어쨌든 제대로 든 잠은 아니었다.
낮잠으로 무거워진 몸 그러나 제리가 제 무릎에 있었으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요슈아는 그래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손을 들어 가만히 제리의 어깨를 토닥이는 편을 택했다.
세상모르고 잠든 이의 머리카락이 뺨이며 소파 팔걸이에 흐트러졌다. 이제 제리의 상반신을 무겁게 덮는 주황빛의 햇빛은 그럼에도 검은 머리카락을 은빛으로 잠시 착각할 듯 눈부시게 반짝이게 만들었다. 요슈아는 햇빛에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아예 눈을 감았다. 어떤 눈부신 순간. 제리와 함께 있는 순간들이 모두 이렇다면 몹시 섭섭할 것이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면 너를 소리로만 더듬어야 할 테니까. 요슈아는 눈꺼풀에 내려앉는 햇볕의 온기를 느끼면서 다시 느지막이 눈을 떴다.
그때에 제리의 작은 입술에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슈아."


요슈아는 정적 속에 내버려진 것처럼 깊게 침묵했다. 제리가 한 번 더 웅얼거렸다.

 

"…요슈아."

아마 자신을 잠에서 깨운 목소리도 제리의 것이리라. 몽중에서 자신을 부른다는 것이 가슴 뻐근하게 흡족했으나 동시에 꿈속에서조차 불안에 휩싸여있는 것은 아닐지. 이미 함께 나아가기로 했었으나 혼재하는 감정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슈아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뺨에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준다. "있잖아……." 눈을 감은 제리가 꿈속의 자신에게 하는 듯한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를 토닥이던 손이 공중에서 멎는다. 요슈아는 잠자코 제리의 말을 기다린다.


"나……."
"……."
"네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좋아…."

왜 사랑은 이다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가.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요슈아는 잠들기 전 자신이 속으로 했던 말을 복기한다.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내가 널 잃을까봐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내가 네 앞에서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결국 사랑이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다고 요슈아는 생각한다. 네가 좋아. 그런 말을 들어도 해갈되지 않는 깊은 두려움이 있다고. 그것은 그리움의 형태와 지독하게 닮아서 제 옆에 있는 이의 존재를 확인하듯 끌어안듯 해야 겨우 잠잠해질 수 있는 종류였다.
그러나 나약해지면 어떠한가?
네가 있어서 나는 기꺼이 약해지고 동시에 강해진다. 나를 지키고 너를 지키는 나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 강해지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손을 잡고 곁에 있기로 했으므로.
요슈아는 숨을 느리게 들이켰다가 견디지 못하여 고개를 깊이 숙인다. 제리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면 감촉에 그가 금방 깨어난다. 제리가 작게 웃었다. "뭐야, 요슈아……." 제리가 웃기 때문에 요슈아도 함께 웃었다. 그의 등 뒤로 노을이 진다. "네가 너무 안 일어나서……."


"보고 싶었어."


요슈아는 새삼스레 고백한다 보고 싶었다. 네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이 짧은 동안에도 무척 그리웠다.
제리가 환하게 웃었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꿈은 없으니 우리는 우리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테다. 제리가 잠에서 이제야말로 깬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응, 나도."

제리가 아프다
제리가 아프다

@ijeongsoga

 

 

제리가 아프다.


요슈아, 나 감기 걸렸어. 많이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나을 때까지는 데이트 금지. 옮을 수도 있으니까 절대, 절대로 찾아오면 안 돼?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문장의 나열에 요슈아가 눈을 천천히 키웠다. 제리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이 생소하게 다가와 놀란 감정 반,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는 제리의 당부에 갑작스레 걱정이 치솟는 마음 반. 아무래도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을 감당하지 못한 건지 몸 관리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가슴 속 갑갑함에 안절부절못하듯 입술을 깨물었다가, 그것이 하얗게 물드는 감각에 작은 탄식과 함께 깨문 입술을 놓고. 답답하다는 듯 옅은 인상을 쓴 요슈아가 휴대폰의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열나지는 않아? 물 많이 마셔. 몸도 따뜻하게 해.


정돈되지 않아 다급하면서도 다정한 말들이 제리와의 채팅방에 쌓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제리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괜찮다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음에도 단호한 마지막 문장에 요슈아는 차마 제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제리가 그리 원한다면 꼭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나 없어도 괜찮아?


그래서, 그래서 보낼 수 있는 솔직한 물음이었다. 제리의 당부인 만큼 꼭 지켜주고 싶었기에 재차 확인받고 싶었다. 괜찮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바랐지만, 그녀가 제게 어리광을 부려주길 바랐지만 정말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 대답해도 요슈아는 상처를 받을 생각도, 불만을 얹을 생각도 없었다.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제리가 요슈아는 필요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믿음이 굳게 존재했다.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부터 차오르는 불안은 휴대폰 너머로 듣는 제리의 목소리만 있다면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답장이 온다면 요슈아는 제리에게 달려가는 대신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제리에게서 돌아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초록색의 말풍선 옆에 '읽음'이라는 두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 끌어올리고 끌어올려 길게 만들어 놓았던 요슈아의 심지가 급속도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달랠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불안과 걱정은 점점 증폭되었다.
피곤해서 잠들었을지도 몰라. 아니, 괜찮다고 안심시켜놓고 쓰러진 거라면?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한다. 요슈아가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자꾸만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지극히 요슈아의 기준이었지만, 한참, 한참을 기다려도 발신인의 이름에 제리가 표기되는 일은 없었다.
기다리던 도중 띠링, 하고 울리는 경쾌한 소리에 우스울 정도로 급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요슈아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길어지는 공백과 번잡한 생각에 복잡해진 머리를 그가 좌우로 흔들어 털었다.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요슈아가 코트에 제 몸을 꿰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마스크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제리를 믿고 있다는 마음과는 별개의 판단이었다. 결국 다급하게 열렸다가 지지해주는 이 없이 혼자 닫히는 현관문은 복도 너머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제리가 많이 아프지 않다 그랬어. 우리는 서로 솔직해지기로 약속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한 다짐 탓에 시작은 느렸지만, 걸음은 점차 조급해져 이제는 달리는 정도로 빨라졌다. 달리는 와중에도 연락 하나 없는 상황에 느긋하게 걷기란 쉽지 않았다.
제리와 함께 걸으며 구경했던 풍경은 눈길을 줄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쳤다.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하며 들렀던 자그마한 카페를 지날 때도, 음식을 먹으며 제리가 눈을 빛냈던 고급스러운 식당을 지날 때도 추억을 회상하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걱정에 요슈아의 숨만 점차 가빠졌다.
마스크를 쓴 탓인지 평소보다 호흡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잠시 멈춰섰을 때는 정신없이 찾은 약국에서 온갖 것을 쓸어 담느라 숨을 가다듬을 틈이 없었다. 물건이 잔뜩 담겨 늘어진 비닐봉지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어느새 도달한 제리의 현관 앞 복도를 부산스럽게 울렸다. 들이켰다 내쉬는 숨은 마스크에 갇혀 갑갑했다.
결국 더운 공기를 빼내려 요슈아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잔뜩 채우는 느낌은 달가웠으나 그 속에 제리의 향이 섞여있지 않음에 이상한 결핍을 느꼈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거슬려 그가 열도 식힐 겸 제 앞머리를 성의 없이 쓸어 넘겼다.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요슈아가 큰 한숨을 뱉었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지나쳐 온 풍경은 바라보지도 않았던 회색의 눈동자가 이제는 정지한 채로 익숙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이름난 보컬리스트라는 제 신분 탓에 자주 들르게 되었던 밀회의 장소이자, 저를 그토록 걱정케 했던 사람이 머무는 곳.
드디어 제리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들떴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게 정말로 들뜬 게 맞긴 한 건지. 요슈아가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을 애써 감추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탓인지, 제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요슈아의 얼굴에는 미묘한 초조함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불안함에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기다리던 요슈아의 귀에 언뜻 느릿하게 끌리는 발소리가 잡혔다. 그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챈 요슈아가 밀려들어 오는 안도감과 반가움에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무심코 "제리," 라는 이름을 입에 담아버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자신의 것과 유사한, 반가움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요슈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잠결이었으나 당혹스러움도 가득 담겨 있었다.


오지 말라 그랬는데 왜 왔어. 옮는다 그랬잖아….


언뜻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정말로 저가 없어도 괜찮냐 물은 메시지에 제리는 체면치레로라도 정말 괜찮다고 대답했을 거라는 걸.


내가 정말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 해줬잖아. …불안해서 그랬어.


그 탓에 요슈아는 잔뜩 기가 죽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른하면서도 잠겨있는 제리의 목소리가 걱정스러워 요슈아는 더욱 조심스러우면서도 작은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제리보다 크고 번듯했던 몸은 위축이라도 된 것처럼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아픈 사람은 제리였는데도,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요슈아였다.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제리가 아, 하는 탄식을 뱉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모습이 연상된 탓인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한 탓인지. 천천히 옮겨지는 제리의 발소리는 점점 현관으로 가까워졌다.


혹시 쓰러진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랬어. 약도 많이 사 왔는데, 잠깐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


요슈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콩,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에 이마를 맞댄 그가 속삭였다. 두꺼운 문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제리는 바로 제 앞에 서 있었다.


…따뜻한 녹차도 사 왔어. 이거라도 전해주고 싶어.


쐐기를 박듯 중얼거렸다. 제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움직여 부스럭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지라 틀림없이 들렸을 것이다.
너머에서부터는 안 되는데, 하는 잠깐의 망설임이 들려왔다.


제리, 나… 추워.


그 짧은 한마디를 마침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었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에서 한 발짝 멀어져 그것이 열리는 틈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요슈아가 제 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생기자 망설임 없이 제리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제리는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얼굴도 마스크로 가린지라 전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요슈아는 가까이서 그녀를 간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고 여겨, 안심한 듯한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당장이라도 제리를 품에 안고 보고 싶었다, 많이 걱정했다, 몸은 괜찮냐 잔뜩 제 감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무어라 그랬는지, 약은 챙겨 먹었는지. 묻고 싶은 것도 한가득이었다. 모든 걸 그녀를 제 품에 가둬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요슈아가 그런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제리를 단숨에 안으려다, 현관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자신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틀어박히는 그녀의 모습에 품을 따뜻하게 채우려던 요슈아의 행동은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당황한 요슈아가 그녀를 쫓으려다 철컥. 다시 문이 잠기는 소리에 몸을 굳혔다. 몇 초를 정지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역시, 멋대로 찾아오는 건 싫었을까? 그녀가 제 연락을 보지 않았을 때처럼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눈을 깜빡이는 것을 포함하여 굳어있던 요슈아의 모든 행동이 이완됐다. 다시 제리를 쫓아 잠겨버린 방문 앞에 조심스레 앉은 그가 문에 몸을 기댔다.
최대한 가까이 제리와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너한테 연락하자마자 잠깐 잠들어서, 그랬어.

나야말로,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 …많이 아파?
으응, 괜찮다고 말했잖아.


모두 얼굴을 마주하고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기에 미련이 남았다. 요슈아가 문틈을 툭, 툭 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떻게 보면 긁는 것도 같아 보였다. 다만, 그런 애절한 모습과는 달리 요슈아는 왜 자신과 눈을 마주쳐 이야기해주지 않는지 제리에게 굳이 따져 물으려 하지 않았다.
괜찮으니 절대 찾아오지 말라던 제리의 당부를 독단적으로 듣지 않아 자그마한 죄책감이 피어오른 탓과, 제게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은 그녀의 배려가 눈에 훤히 보인 탓.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대신 요슈아는 바스락 소음을 내는 비닐봉지를 끌어안았다. 그 안에서 여러 약들이 뒤섞여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새어 나갔다. 그녀만의 의사라도 된 것처럼 하나하나 아픈 곳을 들어주고, 손수 약을 먹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약과 함께 사 온 따뜻한 녹차 탓에 그의 품은 순식간에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


제리.
…응.
나도, 마스크 있어. …부족할까 봐 더 사 오기도 했어.


그 온기는 오히려 결핍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현관보다 얇은 문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도 감질나 요슈아가 이제는 습관처럼 저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마치 제리와 서로의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것만 착각이 들었다.


안 옮을 거야. 그러니까,


보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제리의 불규칙적인, 열기가 서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요슈아의 숨소리도 그녀의 것과 맞추어 들이쉬고, 내쉬었다. 성급했다.


…안아주는 거 정도는 허락해줄래?


현관에서의 부탁과 동일했다. 요슈아의 말이 끝을 맺고, 머지않아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경첩이 맞물려 움직인다. 닫혀 있던 얇은 벽이 다시 한번 열린다.
열리는 틈 사이로 요슈아를 향해 아릿하게 웃고 있는 제리의 얼굴이 보인다.

비밀 데이트를 할 때처럼, 발간 얼굴의 전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요슈아가 망설임없이 제리를 끌어안았다.
부족했던 체향이 폐부에 들이찼다.

melting nights
melting nights

@mochacreamsoda

 

 

길고 길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진다. 으레 단절의 순간에는 아쉬움을 느껴야 할 터인데. 제리는 아쉬움도 서운함도 아닌 사랑을 느꼈다. 요슈아의 눈동자가, 그 다정하고도 엷은 색채가 제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독점욕과 소유욕, 온갖 감정들이 도사리는 세계 안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란 바로 배려와 애정이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아. 네가 원하지 않는 건 나도 원치 않으니까. 언젠가의 문장들을 떠올리고, 제리는 다시 한번 요슈아를 껴안은 채 입술을 부비적거렸다.


"제리……."
"……요슈, 아……."
"응, 제리."


좋아해. 참았던 호흡을 터뜨리는 것처럼 필사적인 연정이었다. 혹은 닫혀 있던 꽃망울의 만개 같은 찬연함이었다. 잠시 그런 제리를 망연히 내려다보던 요슈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 가운데 한 가지만이 확실했다.

그야말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런 말 하는 건 반칙이야……."


무어라 답하기도 전 화인 같은 입맞춤이 쏟아진다. 제리는 다시금 요슈아와 숨을 공유한다.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사이사이마다 그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제리의 모든 생마다 요슈아가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도리어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나날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그에게 계속 힘이 될 수 있기를. 그와 평생토록 함께할 수 있기를.

 

그가,

변함없이 평온하기를.

 

하와의 기도는 지상의 아담에게 숨결을 불어넣는다. 같은 개수의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 어느 세계에서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고립되지 않을 테지만 동시에 신과 같은 절대자의 존재 없이도 그곳에 실존할 것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의 윤곽만은 선연했다. 제리는 칠야의 지속일지언정 요슈아를 온전히 그려낼 수 있을 터였으니까.

 

오롯한 사랑 속, 불멸의 연인들은 걸음을 이어 나간다.

 

밤이 녹아내린다 한들 그 일렁임을 넘어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Prism
Prism

@xngkgkB

 

 

제리가 요슈아의 저택에서 돌아왔을 때, 제리는 스스로 황제 폐하나 황후며 후궁들이 자신을 찾느라 난리가 나 있으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을 뒤늦게 했으나 염려가 무색하게 황궁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정확히는 다른 소동으로 인해 제리의 행방에 대해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다는 것이 더 들어맞겠다. 제리가 겸연쩍게 황궁으로 들어서면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법의 범위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자가 왔대. 은둔해 있던 저명한 음악가라도 되나? 아니 음악가보다는 '평론'을 하는 쪽에 더 가깝다나봐. 제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하이델을 떠올렸다.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요슈아에게 그의 음악이 백색이어 아무 색도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던 노인. 요슈아의 절망을 가장 먼저 발견한. 제리는 조심스럽게 하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황녀님. ……폐하께서 아침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며 몹시 염려하셨습니다."
"그렇잖아도… 그에 대해서는 폐하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구요. 그나저나, 말씀하시던 것이 있던 듯한데……."
"아, '평론가'에 대해서 말입니까? 방금 입궁하셨습니다. 언질도 없이 들러 황실마마님들께서 모두 놀라워하는 중입니다."

평론가. 기실 안단테에 마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음악가는 수두룩했지만―그러므로 요슈아조차 뛰어난 실력이 아니었다면 이 시대에 한 줄조차 긋지 못하고 '그런대로 먹고 사는 음악가' 정도로 남았을 것이었다― 아그네스 투르니에 여신의 가호를 받은 음악이 자아내는 마법의 범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세간은 음악을 평가한다 하여 이들을 '평론가'라고 불렀는데, 칭명이 있는 것조차 무색하게끔 거의 존재를 내보이지 않는 그들은 그러므로 마법과 음악의 효용을 위하여 안단테 제국에 매우 귀한 존재였다. 투르니에 콩쿠르에 초청받은 심사위원들도 거의 평론가가 되기 위해 다른 길로 음악과 마법을 공부하는 데 매진해 있는 사람들인 것을 보면 말 다 한 것이다.
어째서 하이델,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평론가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제리는 스스로 의문한다. 음악을 듣고 이를 심상으로 표현해내는 기이한 노인. 다만 요슈아를 위로했던 것과는 별개로 하이델이 왜 그런 식으로 요슈아의 음악을 평했는지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제리는 차마 짚어낼 수 없었다. 더 솔직하게는, 하이델에게 원망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다나요?"

궁금증이 요슈아를 대신하는 원망을 이겼다. 제리가 묻자 하인들은 일제히 알현실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금쯤 폐하를 알현하고 계실 것입니다."
"요슈아님을 찾는 듯도 하던데……."

제리는 황궁 한쪽에 마련된 알현실로 가는 백금으로 빛나는 복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는 몰랐지만 하인들 사이에서 소문 자자한 '아랫사람에게도 지나치리만큼 겸손한 막내 황녀'답게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던 제리는 마침 그곳에서 나오던 황제와 하이델을 마주쳤다. 제리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폐하, 오전에는 잠시 황궁 바깥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윤허 없이 출궁한 점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 황제는 자비로운 목소리로 "고개를 들거라. 정찬에 참석하지 않아 걱정하였단다." 하며 막내딸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둘의 옆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지킨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쨌든 황제와 외부인의 앞이었으므로 제리는 요슈아에 대해 당장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격식 차린 대화를 마쳤다. 황제는 하이델을 돌아보며 "이리 서 계시도록 기다리게 하여 송구합니다." 궁내에서 거의 보지 못한 공손한 태도로 노인을 대했다. 하이델은 나직한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말하더니 지팡이로 툭 다시 바닥을 짚었다. 제리가 황제의 앞에서 노인을 슬그머니 눈짓하자 황제가 그제야 하이델에 대해 소개했다.

 

"아, 이분은 하이델님. 이국에서 온 '평론가'시란다. 이번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심사를 맡기도 하셨지."

"그렇군요……." 이미 아는 내용이었지만 제리는 인내심 있게 그 말을 듣는다.

"요슈, …궁정의 대음악가를 찾아오셨으나 너도 알다시피 헛걸음이 되셨어."

"헛걸음까진 아니지요." 하이델이 황제의 말에 인자하게 웃었다. "이리 황녀님도 뵈옵고."

 

제리는 그 말이 인사를 요하는 것인 줄로 알고 눈 보이지 않을 것이나 일단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이델은 제리가 인사한 것이 마치 보이는 것처럼 한 손을 허공에 두고 달래는 듯이 손을 낮게 휘적거렸다. "황녀님." 노인이 말했다.

 

"요슈아님을 만나고 오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제리의 눈이 커졌다. "맞나보군요." 제리가 말이 없자 하이델이 미미하게 웃었다. 제리는 불현듯 하얀 하프시코드를 편안하게 연주하며 지금 작곡한 곡이야. 말하던 요슈아를 떠올렸다. 노인이 이어 말한다. "황녀님께 하얀 음계가 묻어 있어 알았습니다. 그분의 연주를 듣고 오셨군요." 더욱이 놀란 황제는 옆에서 "그게 정말이냐, 딸아." 물을 뿐이다. 제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음계. 제리는 그제야 침착하게 하이델에게 물을 수 있었다.

 

"요슈아에게… 그의 음악에 아무 색도 없는 듯이 보인다고 하셨다 들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그가 궁정 음악가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그 영향인 듯하던데……."

"아."

 

하이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제리는 눈을 들어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노인이 다음으로 낸 말은 그러나 전혀 별개의 것처럼 들렸다.

 

"혹 황녀님, 그가 황녀님께 헌정하는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오셨습니까?"

"……네?"

 

지금 작곡한 곡이야. 울음 탓에 발간 눈가로 요슈아는 그렇게만 말했을 뿐 제게 헌정하는 곡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요슈아가 바치는 곡이라니,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바치는 곡이 제게 있다니, 그럴 수가! 제리는 도리질을 치며 "아뇨, 아닙니다……. 그냥 연주를 듣고 왔어요," 답했다. 하이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지팡이를 매만졌다.

 

"요슈아님이 제 말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자신 음악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그분께서는 언젠가 그 깨달음에 닿아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공허한 것을 깨닫고 그 다음부터 채울 수 있으니까요. 빈 채로 있다면 사람은 결국 망가질 뿐입니다. 하여 저는 요슈아님의 연주를 듣고 아름답지만 껍데기뿐이어 어느 것으로든 더럽혀질 수 있는 백색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안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것이지요."

"……."

"황녀님, 이것을 보십시오."

 

하이델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삼각기둥 모양의 거울 혹은 유리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제리에게 아주 주려는 듯이 그가 그 물건을 든 채로 있기에 제리는 망설이다 그것을 건네받았다. "이게 뭔가요?" 묻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노인은 인자하고 나직하게 웃었다.

 

"일종의 평론 도구입니다. 제가 평가하는 음악의 색은 이것으로부터 비롯된답니다. 저는 물론 이것 없이도 음악의 색을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으나, 황녀님은 그러지 못한다 들었으므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게요……?"

"황녀님, 요슈아님을 사랑하시지요."

 

이 말에 옆에서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어깨를 움찔 떨고 노인과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제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황제의 기침 소리는 더 커졌다. 노인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요슈아님께 한 번 더 연주를 해 달라고 청해보시지요. 제가 보기에, 요슈아님의 공허를 채울 방도는 황녀님께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하이델은 그 말을 남기고 기침을 하던 황제와 제리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지팡이를 짚고 유유히 황궁을 떠나갔다. 제리는 그 자리에 남아 노인이 들려준 작은 삼각의 '평론 도구'를 들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의아해할 뿐이다.

 

 

일주일 뒤 요슈아가 입궁을 요청했다. 황제는 어쩐지 조금 불퉁한 태도로 그의 입궁을 윤허했다. 요슈아는 황제의 영 마뜩찮은 얼굴을 보고서 의아해하다가도 허리 숙여 깊이 사죄의 인사를 했다. 요는 한사코 내려두겠다 했던 궁정 대음악가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황제는 그 청에 기뻐했으나 그것도 잠시, 마침 알현실에 제리가 들어왔을 때에 자네 막내 황녀를 어찌 생각하나? 하는 질문을 던져 두 사람을 당황케 했다. 아바마마! 폐하, 가 아니라 어릴 때 쓰던 호칭으로 제리가 황급히 아버지를 부르자 황제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결국 웃으며 볼일이 끝났으면 가 보라, 찬바람 쌩쌩 부는 답을 내렸다.
요슈아는 황궁을 나가기 전 익숙하게 제리의 황녀궁에 들렀다. 일전의 저택에서의 대화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요슈아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으나 제리가 어쩐지 서먹하고 어색하게 대하는 바람에 둘의 거리는 다소 애매해졌다. 제리는 쭈뼛쭈뼛 머뭇거리다 요슈아에게 묻는다.

"오늘도 연주해줄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요슈아는 요슈아대로 그때 한 입맞춤이 역시 문제였나, 생각하다가 괜히 쑥스러워져 얼른 들고 온 악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그가 활과 현의 상태를 보고 잠시 조율을 하느라 선 채로 머물러 있으면 제리는 품에서 슬쩍 하이델이 주었던 물건을 꺼내본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유리 삼각기둥. 요슈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연주를 시작한다.

바이올린 선율이 부드럽게 흐른다.
제리는 그 흐름에 여느 때와 같이 홀린 듯 눈을 감았다가, 아차 싶어 다시 눈을 떴다. 요슈아 역시 선율에 몸을 맡기고 활을 현 위로 미끄러뜨리며 연주하고 있었다. 노래의 마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리는 그 연주로부터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련하고 따뜻한 곡조, 제리는 손을 뻗어 요슈아 쪽으로 하이델이 주었던 삼각기둥을 조심스럽게 가져다댔다.
그 순간 제리는 기둥 한 면의 유리 너머로 요슈아에게서 흰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다. 유리를 투과한 환한 빛은 이윽고 다른 마주보는 면의 유리에 다시 투과되더니 온통 어지러울 만큼 달콤한 천연색의 환상으로 변한다. 거기에는 제리가 있다. 웃음 짓는 제리, 즐겁게 이야기하는 제리, 소파에 앉은 요슈아의 앞에 무릎 꿇듯 바닥에 앉은 제리, 눈물을 흘리는 제리, 그리고 흰 빛이 요슈아의 손으로 변하더니 울고 있는 제리의 모습에 뻗친다. 뺨을 어루만져 닦아주고 이내 끌어당기며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있다. 제리는 너무 놀라 물건을 떨어뜨렸다.

"제리?"

음악이 끊겼다.

"제리, 왜 그래?"
"너, 너 방금 나한테……"
"응?"
"사,"

제리는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얼굴을 감쌌다.

"사랑한다고……."
"……."

 

요슈아는 고개를 내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앉으며 제리가 떨어뜨린 것을 보았다. 제리는 이름을 몰랐으나 요슈아는 이미 음악과 마도에 대한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프리즘. '막 평론을 시작한 평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음악의 빛을 투과하여 그 연주가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연주하고 있는 것인지 보여줄 수 있는 마법 도구였다. 저런 걸 제리가 어떻게? 어디서? 영문을 몰랐던 요슈아의 얼굴도 천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 제리,"
미끄러뜨린 활, 현과 활의 줄이 마찰하며 내는 음, 제리에게 들려주었던 연주는 모두 같은 마음을 담고 있었다. 단 하나의 고백이다.

제리가 손가락 사이로 눈을 들었다. "요슈아," 저택에서 울며 서로를 보았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슈아가 제리의 앞에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있었다. 낮은 자세로 겸허하게 너를 올려다본다. 꼭 고해할 때의 자세 같다.

할 수 있는 말이야 많았다. 이걸 어디서 구했어, 혹시 평론가를 만났다면 하이델, 그 사람이야? 너는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어? 나는……. 그러나 수많은 물음 중에서 요슈아는 하나의 문장을 움켜쥐기로 했다.

 

"제리."

 

눈이 마주친다. 완연한 가을의 하늘이 푸르다. 흰 대리석으로 된 궁의 바닥에까지 파랗게 하늘이 비친다. 제리는 손을 느리게 미끄러지듯 무릎 위로 내렸다. 요슈아가 말했다. "저번에…… 대답을 제대로 안 한 것 같아서." 네가 좋아. 음악이 없어도. 네게서 음악이 영영 사라져버린대도.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요슈아는 잊을 수 없는 말마디를 되새겨본다. 그리고 백색으로 환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사랑해."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그 말에 답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영영 그럴 것이라고. 나는 네 오른편에 선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왼편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공허라도 사실은 함께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원히 빈 껍데기여도, 아무 빛도 없어도, 설령 내가 음악으로만 남는다고 해도.

제리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서러움이 아닌 벅찬 환희 탓이었다. 요슈아도 그것을 알아서 그는 무릎에 놓인 제리의 손을 덮고서 처음처럼, 조심스럽게, 턱을 올리고 한 손으로는 제리의 뺨을 감싸 당긴다. 제리는 기꺼이 당겨진다. 아주 가깝게.

환한 키스.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안단테의 막내 황녀와 궁정의 대음악가의 국혼은 그 다음 해 봄에 성대하게 열렸다. 안단테의 악사들이 사랑, 사랑을 노래하는 가운데 제리와 요슈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된다. 안단테의 모든 음악가들이 노래했다.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엔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나의 짧은 생은 그녀에게로 망명해가는 음악일 뿐이어서……¹ 박정대,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 中, 시집 『아무르 기타』 수록.

백색 음악
백색 음악

@xngkgkB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그날 날이 몹시 맑았다. 제리가 복기하기를, 아무 이변도 없는 날이었다. 물론 제리는 음악가가 아니었으므로 안단테 제국의 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으나 그저 직감 상으로는 그러했다. 요슈아가 위대한 궁정 최고 음악가의 지위에서 물러나겠노라 일종의 은퇴 선언 혹은 사직서를 내어둔 것이 자신을 찾아온 바로 그날이었음을 그래서 제리는 매우 믿기 어려웠다.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제리. 그는 안단테의 막내 황녀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친우처럼 이름을 부른다. 실제로 요슈아는 황궁 내 제리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궁정 최고 음악가의 표정을 제리는 보지 못했다. 그 이전에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비유인지 아닌지 모를 전해들은 말을 발음하는 그 뜻도 알지 못했다. 감히 누가, 도대체 어떻게, 그에게 음악에 대해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아그네스¹ 박정대의 시집 『아무르 기타』 에 수록된 시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에 등장하는 이름. 성 역시 출처를 밝히기 위해 붙인 것. 영감을 받은 시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의 짧은 生은 그녀에게로 망명해 가는 음악일 뿐이어서 //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엔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투르니에가 음악이라는 것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신계에서 인간계로 음악을 가지고 내려와 인간에게 주었다고 전해져 모든 악사가 신의 권능을 빌려 행사할 수 있는 안단테 제국에서, 몇 세기를 건너 가장 뛰어난 혹은 위대한 음악가로 꼽히는 요슈아에게. 안단테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명실상부 안단테의 가장 높은 데 있는 음악가, 단 한 명도 가보지 못한 경지에 올라 있는 그에게.
어지러운 이명 속에서 요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대답해줘. 이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리는 입을 뻐끔거렸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요슈아가 물었다.

나는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나, 는, 음악, 없이, 쓸모없는, 사람……. 제리는 요슈아의 말을 어절마다 득득 긁듯 마디마디 별개의 말처럼 발음해본다. 쓸모없는 사람. 제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잦았다. 마지막 후궁인 어머니, 막내 황녀. 애매한 지위에 있음에 적당하고 모호한 사랑을 받고 그럼에도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 때때로 스스로가 무언가를 소모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거리의 악사들과 궁정의 음악가들, 그리고 요슈아를 볼 때마다 그 결핍에 대한 실감은 더욱 커졌으므로 제리는 초조감을 갖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해야만 했다. 한데 그 순간 요슈아는 가장 초라한 데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쓸모없는 사람이야. 요슈아. 제리는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지금에 와서도 후회하는 일이다. 자신이 감히 그를 재단할 수 없으리라는 괜한 판단으로 그를 상처 입혔다는 원망이 갈 데 없이 제 속을 긁어냈다. 그리고 언젠가의 기억이 있다. 푸르른 황궁의 정원, 여름의 녹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잦게 잡힐 때였다. 열넷, 변성기가 막 오기 시작한 목소리로 요슈아가 나지막이 말한다. 황녀님, 제리는 바이올린 현을 만지고 있는 요슈아의 손에서 그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보시면 조율하는 데 집중이 잘 안 되어요.
……바…
바?
……반말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 시절에도 이 아름다운 정원에는 오롯이 자신과 요슈아뿐이었건만,

제리.
……응.
내 연주가 그만큼 좋아?
가장 빛나.
그래?
모든 궁정 악사들, 음악가들, 거리의 사람들이 내는 것까지 합해서.
응.
정말로 가장 좋아. 여러 빛을 내는 것 같아. 온통 황홀해.
 
그렇게 말했던 때 있었건만.
제리는 떠나가던 스물셋의 요슈아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푸르른 십대의 여름에서 서늘한 지금의 가을로 돌아오는 것이다.
너는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신화가 있다. 제리는 이카루스라는 이름의 날개를 단 신화 속의 인물을 생각한다. 이카루스는 오만으로 인해 공중에서 날개를 잃은 채로 추락하였으나 요슈아와 그가 닮은 점은 오로지 빛나는 높은 데 있었다는 점이었다. 음악과 요슈아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제리조차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했던 질문에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제리는 그 순간 머뭇거렸다. 요슈아는 제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서 한 번 풀썩 웃어버리고, 사직서를 낸 것도 모자라 그 다음날에는 정말로 황제의 앞에서 일방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물러가버렸다. 제리가 모르는 데서 그는 스스로 추락해버린 것이다.
왜? 제리는 더듬어 복기해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요슈아는 그날 이후 더 이상 황궁에 나타나지 않고 따라서 제리와 마주칠 일도 요원했다. 그리고 제리는 그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절하리만치 손을 뻗고 싶다고 그것은 하나의 결심이었다.
황궁 안에서 엄선된 음악가들이 펼치고 있을 바람에 실려 오는 음악은 요슈아의 것처럼 반짝이지 않는다. 제리는 정원의 의자에서 일어나 발을 옮긴다. 고개를 돌리면, 다시 숨 막히는 황궁 안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다. 여기에 음악은 어디 있나. 제리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네 것만이 음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되었는데.


거리의 초보 악사들은 아그네스 투르니에를 칭송하며 부른다, '나의 짧은 생은 그에게로 망명해 가는 음악일 뿐이요,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에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나의 짧은 생은 그에게로 망명해 가는 음악일 뿐이요. 때로 제리는 그 오래된 가사가 신을 향한 찬미뿐만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사랑 같기도 하다 생각했다. 사랑.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감히 시기할 수도 없는 경외를 두르고 흑백의 소년은 황실에 나타났다. 단 한 명도 가보지 못한 경지에 그가 올라 있었다. 고작 여섯 살에 작곡한 소나타로 불구였던 사람을 완벽하게 치유하고, 열한 살에는 나라의 모든 악기에 통달했으며, 열셋에는 최연소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안단테에서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명실상부 안단테의 가장 높은 데 있는 음악가. 타고나기를 음악에 재능이 없이 태어났던 황실 마지막 후궁의 딸 황녀 제리가 그를 보고 경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래가 없는 황궁 안에서 유일하게 생긴 어린 동갑내기 둘은 한쪽이 천재이고 한쪽은 재능이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금세 친해졌다.
명령이 아니면 굳이 요슈아는 음악을 '낭비'하지 않았으나 제리의 앞에서는 달랐다. 제리는 명령하는 법을 잘 몰랐고, 요슈아는 황녀임에도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 제리의 곁에서 가장 편안해했다. 제리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여서, 궁정에 있는 수많은 이들 중 요슈아를 몹시 자주 곁에 두는 것은 그가 황궁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 사람이라면 웬만하면 아는 사실이 되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서로를 연모할지도 모른다 수군대던 소문 역시 사실에 가까웠을 수도 있겠다. 제리는 그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사람이라 믿었으므로. 그것은 찬미와도 비슷했고 사랑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실 내에 소문이 돌면 그를 잠재워야겠다는 걱정 이전에 제리는 한편으로 요슈아에게서 자신의 마음에 대한 답을 들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미약하고 조심스러운 나의 첫사랑. 답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슈아가 그렇게 휑하니 황실에서 나가버리지만 않았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한순간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자각하게끔 망가뜨렸는가.
제리는 그날 저녁 황실의 구성원들이 모두 모인 만찬 자리에서 조금 이르게 자리를 떴다. 저녁식사 와중에도 요슈아의 이야기가 테이블 위로 올랐기 때문이었다. 황후의 입에서 나온 그 애, 왜 그만뒀대요? 하는 말에 아버지인 황제가 묵직하게 고개를 흔들면 그나마 제리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둘째 황자와 황녀가 제리를 흘긋 돌아보는 것이다. 너 뭐 아는 거 없어? 그 애랑 친했잖아. 동생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황태자가 그렇게 물으면 황제를 비롯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모두의 시선이 제리에게로 꽂혔다. 황후가 짐짓 관심 없는 척 립 스테이크의 살을 발라내며 말했다.
 
여태 폐하께서 궁정 음악가와 황녀 저하의 추문을 듣고도 묵과하셨던 것은 혹여 황실과의 연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만한 재능이며 힘이 또 없었지요.
…….
아니면 폐하, 요슈아, 그 자만큼이나 기능을 하는 음악가가 현 안단테에 있단 말입니까?
황후마마,
그래, 없지.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앞에 놓인 스테이크는 아직 반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제리는 식욕을 완전히 잃었다. 시선을 떨어뜨리면 반질반질한 접시와 테이블 위로 희미하게 제리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황제는 몹시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요슈아가 황실과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맺으면 좋으리라고 판단했건만…… 갑자기 궁정에 나오는 것이며 음악을 그만두겠다고까지 할 줄은 몰랐어.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했다구요?
 
제리가 황제의 말에 놀라 식기를 떨어뜨리며 말을 잘랐다. 예의를 지키지 못 해? 황태자가 황제와 황후를 대신해 제리를 꾸짖었다. 제리는 금방 고개를 다시 떨어뜨렸으나 바들바들 떨리는 손은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괜찮다는 뜻으로 태자와 제리를 향해 한 번 손짓해 보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래, 갑자기 모든 걸 그만두겠다고 말하니 나 역시 당황스럽더구나. 재고해 보라 몇 번을 말했지만 결국 다들 아는 대로 뜨고 말았다.
……네.
이변이라면 요슈아가 참가한 아그네스 투르니에 여신의 콩쿠르가 그 직전이었다는 것인데……, 거기에서 실수를 하거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들은 바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때에 그를 그렇게 둔 원인이 있지 않나 짐작할 뿐이다.
…….
그러고 보니 황궁에 있던 그 애의 짐을 하인들이 뺐는지 모르겠구나. 악기들이 워낙에 자잘하게 많을진대.
 
아버지―황제는 침묵하며 골똘한 얼굴이었다. 그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궁정의 나아가 시대의 대 음악가를 잃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찾다가 포기한 모양이었으므로, 제리는 마지막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폐, 폐하. ……제가 요슈아의 짐을 정리하면 안 될까요?
아무리 그 애와 막역했다 한들 황녀 신분에 체통 없이 무슨 하인들이나 하는 일을 하겠다고 그러니.

이번에는 언니인 둘째 황녀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핀잔을 줄 셈은 아니었고 오히려 제리를 염려하는 투였으나 제리는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그런 건 그냥 맡기면 된단다. 어쨌든 안단테엔 여전히 그 애 말고도 위대한 음악가가 차고 넘치잖니. 안 그래요, 아바마마? 양쪽을 달래듯 하는 말에 황제의 진중하던 얼굴도 다소 누그러졌다. 제리는 자신이 배다른 오라비인 근엄한 황태자와도 이렇듯 사람을 어르고 달래는 데 능숙한 부드러운 둘째 황녀와도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념이 이어질 뻔 했으나 이내 황제의 그래, 네가 할 일이 아니다. 결론을 내리는 말 뒤로 금방 다른 화제가 올라온다. 제리는 입맛이 없어져 식기를 내려두고 결례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새벽 제리는 저녁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 이르게 깼다. 황녀궁 안의 요리사에게 무엇이라도 가져다 달라고 겸연쩍게 요청하려 침상에서 일어났다가 몇몇 하인들이 열을 지어 포장한 악기 따위를 가져가 황궁 밖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광장에서는 이제 시시각각 계절 변해가는 서느런 아침을 알리며 일찍이 깬 아이들이 요슈아가 어릴 적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벗이여 취생몽사 몽생취사라는 말을 이제야 알았는데 그대는 먼저 떠났는가.² 곽은영 <추도―모리스 호텔 19> 中, 시집 『관목들』 수록. 노랫말을 들으면서 어린아이들이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쓸쓸한 곡이라 생각했으나 먼저 떠났는가, 후렴의 가사가 화음으로 이어질 때에 번득 결심을 했다. 그를 구하고 싶다는 결심을 다시. 자신이 모르는 데에서 추락해버린 요슈아에게 처절하리만치 손을 뻗고 싶다고.
벗이여 그대는 먼저 떠났는가, 떠났는가…. 악기를 이고 지고 가져가는 하인들의 뒤를 노래가 좇았다. 사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리는 주린 배도 잊고 숄을 걸친 뒤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곧바로 달려 나갔다. 그들 뒤를 쫓기 위해서였다.


음악가들의 저택은 대개 그들이 작곡한 '결계의 음악'으로 둘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보호의 목적이기도 했지만 곧잘 '보이지 않는 것'이 또 다른 계급적 위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통은 후자의 이유로 궁정에 든 음악가들은 더욱이 겹겹의 결계를 두른 저택에 살았다. 요슈아의 저택 역시 이에 반하는 예는 아니었기 때문에, 제리가 따라간 하인들은 보이지 않는 결계 앞에 멈춰 섰다. 동이 막 트고 있는 중이었다.
하인들 중에서도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선두에 선 하급 음악가가 하모니카로 간단히 몇 음계를 부르면 흰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인 요슈아가 나온다. 피로한 낯을 보니 잠들었다 나온 것 같았다. 제리는 요슈아를 보고서 하인들의 뒤로 바짝 붙어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다가 자신의 앞에서와 달리 잔뜩 찌푸린 신경질적인 낯을 보고서 손을 멈추었다. "이미 황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을 텐데." 요슈아가 잠긴 목소리를 냈다. 선두의 하인은 고개를 꾸벅 숙인다.

"해당 사안은 폐하께서 정식으로 윤허하셨습니다. 저희는 궁정 방에 맡긴 요슈아님의 악기들을 가져다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런가."
"언제든 돌아오면 반길 테니 언질을 달라는 말도 함께 하셨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요슈아가 단박에 그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기색에 제리는 요슈아로부터 뒤로 물러날 뻔 했던 자신 발걸음을 도로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놓고 가도록 해." 요슈아는 피로한 스스로의 눈두덩을 문지르며 저택의 결계를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비로소 온전히 저택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요슈아의 거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리는 줄지은 하인의 뒤에 서서 황궁 정원에서 연주를 들려주던 다정한 요슈아를 떠올렸다. 저택은 커다랬으나 그만큼 황량했다. 관리가 되는 것 같긴 했으나 그뿐, 생활감이라곤 없는 쓸쓸한 곳. 취생몽사 몽생취사라는 말을 이제야 알았는데 그대는 먼저 떠났는가. 소위 말한다면 그런 노래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유령 저택 같은 느낌이었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로 등을 돌려 걸어가는 요슈아. 악기를 들고 휘적휘적 저택 안쪽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따라 제리도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알고 있던 요슈아는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거기에 있었다. 요슈아는 하인들이 악기를 들고 집 안을 활보하든 말든 그저 무던하고 싸늘한 낯으로 홀의 소파에 앉았다가, 하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제리를 보고서 잠시 망연한 얼굴을 했다. 제리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입을 어물거렸다가, "안녕, 요슈아." 그런 맹한 인사나 건넬 뿐이다.

"황녀님, 아니, ……제리, 네가 여기 왜."
"이들을 따라왔어."
 
제리가 조금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하인들이 날 숨겨준 것은 아니고, …내가 무작정 따라온 거니까 화를 낼 거라면 내게 화내도… 괜찮아." 그 말에 아연했던 요슈아의 낯은 역시 제리처럼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줄을 몰라 멍청해졌다가,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마는 것이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내. ……잘 왔어."

그의 새벽 달빛 닮은 머리칼이 요슈아가 고개를 숙인 대로 앞으로 쏠리면 제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요슈아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아래에서 빼꼼 위를 올려다보면 시선이 겨우 마주친다. 요슈아가 못 당하겠다는 듯 짧게 웃었다가 한숨을 뱉었다. "이럴 거면 언젠가 제대로 초대를 해 줄걸 그랬어."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그제야 안도한 것처럼 따라 웃는다. 요슈아의 웃음을 봤기 때문일 테다.

"이런 데서 혼자 지내는 거야?"
"……궁정에서 지내지 않을 때는."
"부모님은?"
"수도에 안 계셔. 사실상 스승님이 내 재능을 발견한 순간부터 떨어져 있었으니 남에 가깝지.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겐 하나도 슬픈 얘기 아니니까." 요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제리는 남에 가깝지, 라는 말에 눈을 서글프게 내리깔았다가 요슈아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요슈아."
 
제리는 그 순간에 물었다. 유령 같은 저택 안 홀에서, 카펫 위로 쪼그려 앉아 무릎을 둘러 안은 채로. 새벽을 닮은 청년, 여전한 첫사랑의 낯을 올려다보며.

"왜…… 떠났어?"
"……."
"그 말은 무슨 뜻이었어?"
 
내 음악에는 색이 없대.
제리는 말하고 싶었다. 내가 말한 네 음악 빛난다는 말은 네게 닿지 않았어? 나는 네 음악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였어? 나는 네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 싶었고 네 피아노 곁에 앉아 내내 눈을 감고서 몸을 나직하게 흔드는 관객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나 요슈아의 앞에서 그 모든 말은 차마 나오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요슈아가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요슈아는 손을 들어 낯을 마른세수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어렵게 입을 떼었다.

"하이델."
"……?"
"한 청중이 있었어, 제리."

하이델. 모르는 이름을 뱉은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그네스 투르니에 여신의 이름을 딴 투르니에 콩쿠르는 5년에 한 번 가을 중에 열린다. 여름이 다 가고 바람이 그 온도를 달리할 때 열리는 콩쿠르의 개최 장소는 매번 바뀌었다. 안단테 제국의 어디에도 음악이 닿지 않는 곳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여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안단테의 초대 황제 아그네스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다. 요슈아는 열일곱에 이미 수도 근방에서 열렸던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대상을 받은 바 있었다. 이번은 그가 성년인 때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는 콩쿠르인 만큼 개최 장소가 국경 근처의 오지에 있는 작은 극장이었음에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참가자들 모두에게 본인의 역량으로 구현해낸 결계를 치는 것은 자유였기 때문에, 요슈아는 바이올린 활을 들어 가벼운 음계만을 연주하여 얇은 막을 두르고 무대 뒤를 누볐다. 한 번도 오지 않은 연주 장소를 먼저 익숙한 환경으로 만들려는 연유였다. 참가자며 심사위원이며 일찍부터 줄을 선 관객들, 모두가 저녁식사를 하러 간 시간이라 무대 뒤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는데 보이는 인영이 있었다. 요슈아는 백발 성하여 희고 체구 작은 노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 심사위원 중에는 이국에서 온 전설적인 음악가가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이미 눈이 멀었으나 귀만큼은 그토록 정확한, 그리고 모든 참가자들에게 독특한 심사평을 내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참가자들의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누구십니까?

요슈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제야 노인이 몸을 느리게 돌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제 모습 보일 리 없었다. 요슈아는 문득 자신을 마주하고도 '음악의 대가 요슈아'로서 저를 대하지 않는 이를 제리를 제외하고 처음 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노인은 차분하고 기이한 태도로 일관했다.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하이델이라고 하네. 그대는 누군가?
……요슈아입니다.
아. 자네가 그.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은 익숙함에서 비롯된 오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이델의 눈 감은 낯이 아는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요슈아는 방금 느꼈던 '자신을 모르는 이의 여상한 태도'가 그에게서 사라질 줄로 알았다. 노인은 자네의 소문이야 많이 들었네. 라 말한 다음, 의외의 대사를 읊는다.

그대의 음악이 특별히 기대되지는 않지만, 그 빛은 어떨지 궁금하군.
……예?
심사위원이라면 더욱이 누군가를 특별한 대우로 바라보지 않아야 하지 않겠나. 후자는 그저 궁금증일세.
예, …한데 그, '빛'이라 하심은.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걸세.

이해하지 못할 걸세. 자신이 음악에 관해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 이도 요슈아에게는 처음이었다. 오기보다는 묵음의 욕망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음악이 요슈아의 전부였으므로 그랬다. 하이델은 다시 몸을 돌려 지팡이로 바닥을 짚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인사처럼 말했다. 나중에 봅세. 궁금증이야 자연히 채워질 터이니.
그날 요슈아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기실 자신의 음악을 칭송하는 이들만이 황궁이며 뭇 안단테에 가득했건만, 심지어는 자신을 부러 격상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벗으로 곁에 두는 제리마저도 그러했으나 이 노인은 다르다. 어쩌면 요슈아 자신의 음악이 '어떤 것'인지 혹은 어떤 것에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렇다면 요슈아는 그저 천재 음악가로서만 남았던―요슈아는 이를 '그쳤던'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공허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음악이 음악 아닌 무언가로 승화하여 정의될 수 있다면…….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다. 투르니에 콩쿠르가 시작되는 것이다. 요슈아의 차례는 피날레가 예정되듯 맨 마지막 순서로 밀렸다. 요슈아는 길어지는 콩쿠르 가운데 심사가 이루어지는 위원석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저 그런 아마추어들의 연주들도 하이델은 몹시 집중하여 듣고 '자네의 음악에는 한 곳으로 뻗어나가는 길이 있네.', '작곡 자체에는 미숙한 면이 있지만 곧고 뜨거운 불꽃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는군.' 따위의 심상을 말하는 첨언도 잊지 않았다. 요슈아는 어느 때보다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으로 노인을 보다 제 손을 주물렀다.
마지막 순서, 요슈아가 무대 위에 오르자 관객들은 열광한다. 박수에 화답하듯 요슈아는 무대 중앙에서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같은 무대에 섰던 음악가들도 요슈아의 연주를 듣기 위해 무대 뒤쪽에서 앞을 다투어 앉거나 지근거리에 서있었다. 요슈아는 무대를 새삼스레 둘러본다.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고 낡았으나 잘 닦인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는 새하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심사위원석에 떨어지는 조명도 흐릿해지고 오롯이 요슈아와 피아노에만 동그랗게 선명하고 밝은 빛이 비춰진다. 한 사람의 숨소리마저 몰아쉰다면 크게 들릴 법한 정적이 지난 뒤, 그는 마침내 피아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연주가 시작됐다.
선율은 미려하고 유유하게 흐른다. 모두가 요슈아의 손이 자아내는 곡조에 눈을 감고 미소를 짓거나 눈물을 흘린다. 긴장을 풀리고 연주하는 그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완벽이 거기에 있었다. 소박하나 아름답게 시작한 악곡은 마지막이 되어 황홀한 화려함으로 끝났다. 웅장하기까지 한 막바지에 이르러서 요슈아는 고양된 몸짓으로 팔을 크게 움직이며 건반을 쉴 새 없이 눌러 곡을 이어가다 아쉬우리만치 알맞아 정확한 데에서 끝을 냈다. 삼 초의 정적, 그 다음으로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관객석에서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와 요슈아, 요슈아, 요슈아! 요란한 연호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요슈아는 조명으로 밝아지는 심사위원석만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완벽한 연주였다. 그러니 이제 보상을 바라는 개처럼.
하이델은 맨 끝에 앉아 있었다. 차례대로 위원들이 극찬을 보낸다. 요슈아는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이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낸 말에 여타 칭송은 고사하고 그만 굳고 말았다.
 
잘 들었습니다.
…….
백색이군요. 어떤 것이라도 가져다 놓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색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의 말에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하이델의 말은 앞선 연주자들에게 보낸 애정 어린 조언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조롱도 질시도 없었으나 그저 차갑고 엄중했다. 요슈아는 그 중에도 당신이 이해한 바가 있을 거라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매달리고 싶었다. 하이델은 그러나 거기에서 말을 마쳤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럼에도 의미 없는 대상을 요슈아가 수상한 뒤 투르니에 콩쿠르는 막을 내렸다.
기대가 이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요슈아는 가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토록 가지고 싶은 것을 둔 적도 한 번 없었다. 극장에 모인 모두가 해산하고 요슈아를 비롯한 수도에서 온 음악가들도 마차를 타고 수도로 다시 향해야 하는 시점, 요슈아는 이국으로 떠나는 하이델을 붙잡았다. 선생님. 눈 먼 노인은 새하얀 외투를 입고서 요슈아에게 팔을 붙들린 채 그를 올려다봤다. 백색. 그것은 결국 색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눈이 보이는 요슈아는 다만 그 색깔을 보고서도 괴로워졌다.

누구인가? 왜 그러는가?
선생님, 제 연주…….
아, ……그대로군.
 
요슈아를 알아본 노인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언제 어디라도 떠날 수 있을 듯한 기이한 분위기는 어제와 매한가지였다. 요슈아는 불현듯 두려워졌다. 내가 정녕 이 사람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음악을 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그래서 내 이름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음악의 부속품으로만 남는다면 어떡하지. 선생님……. 말끝을 흐린 요슈아가 매달리듯 물었다. 숨이 턱턱 받쳤다.
 
제 연주에 대한 감상…… 더 들려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감상? …이미 해주었지 않나.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네.

이제는 눈 멀고 나이든 선진의 텃세라고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음악가들에게 해준 조언과 심상에 대한 이야기로 보거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이델이 천천히 요슈아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자네의 연주가 단순히 '수준급'으로만 말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네. 그러나 자네, 그저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그 부분을 짚은 것일세. 물론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가장 뛰어난 혹은 위대한 안단테의 천재 음악가로 불리는 그는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지 않느냐 묻는 하이델의 말에 그를 붙들 힘을 잃는다.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보지 못하는 노인은 후배 음악가를 뒤에 남겨두고서 자신의 나라로 지팡이를 짚고 떠나갔다.
요슈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제국 수도의 마차를 탄 귀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돌아온 이후 요슈아는 하이델에 대해 조사해봤으나 그가 정말로 전 대륙의 예술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데 있어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이는 결국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그에게 있어 어떤 가치가 요슈아의 음악을 인정받게 만들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요슈아는 당연한 수순처럼 절망했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줄 수 없다면 음악을 할 필요가 있는가. 위대하다는 이름으로 남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저갱 같은 고독은 거기에 있었다. 누구도 음악이 아닌 자신을 보려 하지 않아서 요슈아는 그토록 외로웠다. 그러나 여기까지 제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그 말에 선뜻 아니라는 대답을 하지 못한 제리에게조차 이를 고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요슈아는 동이 트는 하늘을 등지고 소파에 앉아 제리의 앞에서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어 가렸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랬다.


요슈아의 색 없는 음악, 꺼냈던 알 수 없는 말의 근원 혹은 실체를 제리는 잠자코 듣는다. 요슈아가 하이델의 이름을 꺼내고 난 다음 말끝을 흐리기에 그 흐려지는 끄트머리마저도 잡아 올리듯이 귀 기울이며. 이제 황궁에서 온 하인들은 악기를 전부 옮겨 놓고 요슈아와 제리에게 쭈뼛쭈뼛 인사를 건네고서 저택을 나간다. 요슈아는 그들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정적에 잠긴 채 거기 앉아 있었다. 제리는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린 것을 느꼈으나 요슈아의 옆에 앉거나 하물며 그의 곁을 떠나려 일어나지는 않았다. 한참 뒤에야 요슈아가 고개를 들며 간신히 웃었다. "바보 같지?" 이해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혹은 의미 없이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음악을 계속하고 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고,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음악 안의 '음악과 다른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요슈아는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리는 그가 무엇을 더러 바보 같다고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몰두하거나 존재를 지울만한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슈아와 같은 사람, 사람이기 때문이다.
묻고 싶은 말이 여전했다. 내가 말한 네 음악 빛난다는 말은 네게 닿지 않았어? 나는 네 음악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였어? 나는 네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 싶었고 네 피아노 곁에 앉아 내내 눈을 감고서 몸을 나직하게 흔드는 관객이 되고 싶었는데. 너의 짙은 외로움은 어디에서 자라나며, 우리에게 어떤 말이 더 이상 남아 있는 건지. 너는 너를 이해할 수도 있었던 가능성 하나를 가지고 있던 그 사람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이토록 자신을 깎아내야 하는 건지.
그러나 제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대신 마침내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바깥은 해가 뜨고 맑은 가을 아침이 되었다. 외로운 새벽이 떠나고 아이들이 황궁 앞의 광장에서 벗이여 그대가 떠났는지 묻는 가사의 노래를 할 만큼 벅적한 때가 된 것이다. 햇빛이 열린 커다란 창을 통해 늘어지고 요슈아의 슬리퍼 신은 엄지발가락에 그림자와 볕의 경계가 닿았다. 제리는 묻지 못하는 말들 사이를 헤매듯 앉은 그의 앞에 섰다. 바깥에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제리는 노래를 듣고 그만 애잔한 웃음을 머금는다.

"요슈아."
"……응."
"들려?"
"뭐가?"
"바깥에."

요슈아가 끝내 손에서 얼굴을 든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로 고개를 돌린다. 제리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뛰노는 아이들은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안단테의 엄연한 국민들 중 하나, 아이들이 노랫말의 뜻도 모르고 노래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노래도 할 수 없었네. 그러나 침묵이 악기처럼 울릴 때, 노래는 그리움의 상처로부터 돋아나는 달빛의 새살, 바람이 없어도 저 홀로 나부끼는 깃발이라는 것을, 나의 기타는 아네, 다섯 개의 검에 베어진 심장을 지닌 나의 기타는 아네, 자신의 상처가 노래임을, 상처받은 한 마리의 고통, 하나의 심장이 노래의 유일한 근원임을…….³ 박정대, <그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中,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수록.

"요슈아."
"……."
"정말로 상처가 노래야?"

제리가 말했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허투루 거스르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타까운 미소를 머금고서. 요슈아는 외로움을 생각한다. 그리고 울고 싶어진다. 그리고 요슈아가 느끼기에 그것은 제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네 심장이 노래의 근원이라면……, 네가 음악의 근원이라면 나는 네 노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도 사랑하는 게 되겠지."
"……."
"하지만 네가 네 스스로가 음악 없이는 쓸모없는 사람이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무척 슬펐어.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어."
"제리."
"미안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볕처럼 쏟아지면 제리는 소파에 앉은 요슈아의 무릎을 향해 무너지듯 바닥에 앉는다. 제리의 이마가 요슈아의 무릎에 툭 닿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얼굴을 손에 묻으며 제리의 앞에서 그러고 싶었던 것처럼.

"네가 좋아. 음악이 없어도. 네게서 음악이 영영 사라져버린대도."

처절하고 고요한 고백이 백색으로 내려앉는다. 다섯 자루의 검에 찔리지도 않은 심장이 그럼에도 피를 쏟아내듯 아파왔다. 제리가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물기 그렁한 눈자위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요슈아는 다시 울고 싶어졌다가, 제리의 그 다음 말에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는 재능이 없어, 요슈아."
"제리."
"나는 재능이 없지만, 하이델의… 네 음악이 백색이고 아무 빛 없다는 말은 결국 네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냐?"
"……."
"그러면, 그러면……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내가 말한 네 음악 빛난다는 말이 네게 닿지 않았어도. 내가 네 음악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대도. 네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 싶었고 네 피아노 곁에 앉아 내내 눈을 감고서 몸을 나직하게 흔드는 관객이 되고 싶었음은 변치 않기 때문에. 너의 짙은 외로움이 계속해서 자라나고 우리에게 어떤 말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대도.
엄지발가락에 닿았던 볕이 조금 더 길어져 그새 무릎 꿇듯 앉은 제리의 낯을 환하게 비췄다. 요슈아는 잡은 제리의 손목을 느리게 당겼다. 제리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자세로 당겨지고 이내 요슈아의 손아귀에 뒷머리가 쓸어내려졌다가, 그의 호흡이 뺨에 닿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햇빛처럼 긴 입맞춤. 요슈아가 끝내 울고 있었다.


한참 둘은 아주 어린 아이들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코를 훌쩍이며 이어진 요슈아의 말에 제리는 똑같이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침부터 없어진 막내 황녀 때문에 난리가 났을 황궁은 영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대신 제리는 하인들이 옮겨놓은 악기들을 흘끔 보고서 요슈아에게 말했다. "악기 많다." 요슈아가 젖은 얼굴로 웃었다.
 
"예전처럼 연주, …해주면 안 돼?"
"아무거나?"
"뭐든."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하프시코드 앞으로 다가간다. 문득 그의 등, 구겨진 나이트가운에 비쳐오는 햇빛을 보는데 제리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순전한 백색이라고 생각했다. 백색의 음악이라고 요슈아의 것을 표현한다면 자신은 저 색깔을 그에게 건네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S.O.S 구조 요청, Mayday!
S.O.S 구조 요청, Mayday!

@juststayus

 

 

두 사람의 눈앞에는 온통 펼쳐진 은빛 세계가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에서 쏟아지는 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는 서릿발이 늘어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았다. 창문 밖으로 하얀 눈이 계속해서 내린다. 함께 몰아쳐 오는 강한 바람이 자꾸만 돌진하는 새처럼 몸을 부딪친다. 덜컹대는 유리창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자, 그는 추위에 한껏 붉어진 귓불을 잡아 만지작거렸다. 무척이나 불편하고, 동시에 아름답기 짝이 없는 풍경과 날씨다. 문이 굳게 닫힌 산장의 벽지는 하얗게 칠해져 있고, 천장 중앙에 설치된 연노란색 조명 불빛이 겨우 산장을 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 위에 깔린 두툼한 붉은색 융단마저도 덮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손끝이 어는 기분이 들었다.
요슈아는 제 가슴 속 시리게 다가오는 고동마저도 애써 무시한 채 옆의 소녀에게 담요의 넓은 면적을 더 건넸다. 눈을 닮은 하얀색 솜털 담요의 보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리는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하며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감사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상냥함은 노력이었으며, 다정함은 천성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제리는 요슈아의 그런 다정함에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리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읽는다. 지금부터 3박 4일간 단독-서바이벌이다냐. 알아서 잘 살아 남으라냐. 쓰레기. 판다 보냄. 천하의 요슈아에게도 식은땀이 흐를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제리, 정말 미안! 설마 판다 사장이 단독 서바이벌 같은 걸 생각했을 줄은!"
"…3박 4일, 요슈아랑 나랑…. 이 허허벌판 겨울 산장에서 살아남는 거야?"
"……응."

 

이번 하계휴가. 판다 사장이 각 밴드의 보컬리스트들에게 포상이라며 건네준 여행권이, 이러한 목적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란 소리다. 요슈아의 머릿속에서 지금쯤 호화롭게 일등석에서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을 판다 사장이 그려졌다. 평소 사장이 무슨 짓을 벌여도 즐겁게 넘어갔던 그가 처음으로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제리를……. 황당한 마음이 급경사를 그리는 산줄기처럼 기울어졌다.


벌써 6번째 서바이벌을 성공적으로 끝낸 클라이맥스 레코드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독특한 운영 방식은 가히 사람들에게 여러 말을 듣고는 했으나, 소속 밴드들 또한 이번에도 전력을 다해 다시 한번 신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판다 사장이 판다걸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내로 들어왔다. 스태프 전원과 직원, 밴드 멤버들까지 포함해 한껏 장식되어 이전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방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벽에 장식된 현수막에는 POP 글씨체로 'Climax Record'가 적혀 있었고, 바닥에는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진 풍선들이 보였다. 식탁보를 깐 테이블에 술과 음료가 잔뜩 배치되어, 이미 술이 들어간 이들의 입에선 흥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이 들어오자 일동들이 건배를 위해 중앙으로 모였다.
그의 입에서 여러 말―밴드 『Veronica』의 보컬인 모모치의 당시 기억으로는 굉장히 지루하고, 따분했고, 썩어빠진―들이 흘러나오고 마침내 건배를 알리는 팔이 위로 올라갔다. 클라이맥스 레코드 만세!
흔해 빠진 건배사가 끝나고 요슈아는 캔에 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왜 자기는 늘 콜라냐며 따지는 에이대시의 말에 웃고 있던 도중, 판다가 보컬리스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이, 쓰레기들. 이번에도 폐기처분되지 않아서 다행이겠다냐. 그런 너희 쓰레기들을 위해 이 상냥한 사장인 내가 하나를 베풀겠다냐. 판다는 그리 말하며 그들의 앞으로 홍보를 불러들여 무언가를 건네게 했다. 티켓과 사이즈가 엇비슷해 보였다. 요슈아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뭘까, 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야에 닿은 맨 처음 글자는 '3박 4일 휴가'라는 글자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변했다.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에게도 시선을 주자, 츠유가 티켓을 흔들며 묻고 있었다.

"저기, 이거 도대체 뭐야? 너무 그럴듯해서 현실감 오히려 안 나는데―"
"말을 꼭 해줘야 안다냐? 수고한 쓰레기들에게 주는 포상 휴가다냐!"
"우왓, 뭐야. 토치오토메 농장이 있는 곳?! 최고잖아!"

각자 떠날 위치는 다른 듯했으나, 모두가 똑같은 기간의 여행권을 받은 건 확실했다. 요슈아는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제리를 떠올리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눈이 수없이 쌓인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기로 유명한 삿포로 쪽의 산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판다가 기겁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한 번 꽉 안아주고 나서 급하게 로비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한없이 가벼워져 구름 위를 누르듯 움직였다. 스마트폰 너머로 익숙한 수신음이 가면 얼마 안 있어, 그를 무엇보다 기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요슈아의 목소리가 둥글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높아지기도 했다. 수락을 받아낸 요슈아는 그 이후로도 조금 더 대화하다가 제리가 통화를 끊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통화는 늘 서로가 먼저 끊길 기다리다가 어느 한쪽이 웃어서 따라 웃는 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기대감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입술을 혼자서 놀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JR 도쿄역부터 신 하코다테역까지는 신칸센 하야부사로 약 4시간 반. 그리고 다시 특급 슈퍼호토쿠를 타면 3시간 반. 비행기로 가려던 둘의 생각을 깔끔하게 접어버리듯, 결항으로 인해 요슈아는 급하게 사장에게 연락해야 했다. 예상이라도 한 것마냥 이미 신칸센 기차표를 구해두었다는 판다 사장의 말에는 의아함이 컸지만, 바로 옆에서 걱정하고 있는 제리의 옆모습을 보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어졌다. 사장이 구해준 표를 이용해 기차 내 자리에 안착했다. 창가 자리 쪽에 앉은 제리는 양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칼이 차창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그가 요슈아를 끌어당겨 같은 풍경을 공유했다. 녹음이 가득한 산, 맑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눈이 빗줄기처럼 창을 건들고, 새하얀 순수가 얇은 창 하나를 두고 제리의 손가락과 맞닿았다. 차창을 흐르는 경치가 그렇게 차례대로 바뀌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에 제 손을 자연스레 겹치고서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 붙어 있는 채로, 각자의 흑과 백을 바꿔 입은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하나의 체스판 같았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완전해질 수 없는 것처럼.

"이제 경치 말고 나도 봐줘."
"요슈아, 질투하는 거야? 자연한테?"

제리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속닥이는 요슈아에게 제리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서 장난스레 물었다. 이따금 제리는 이런 식으로 장난기가 발동하고는 해서, 요슈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는 건 덤이었다. 검은 코트를 느슨하게 걸친 요슈아가 그를 안고 잠든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장장 약 여덟 시간을 달려 도착한 삿포로의 풍경은 지친 마음과 몸마저 전부 노곤하게 만들 정도로 순수한 빛이 가득했다. 비행기를 연착시킬 정도의 날씨 덕분에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털 부츠를 반쯤 덮는 두께의 눈이 바닥에 쌓여 뭉쳐 있었다. 제리는 속으로 요슈아가 눈밭에 누우면, 잠깐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다. 많이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산장이니까.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칠 것 같으면 단 한두 마디로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은 제 인생에 그밖에 없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서. 요슈아는 부드러운 손을 그에게 건넸다. 매서운 추위가 손길이 닿자마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산장으로 향하며 오르는 느긋한 경사의 비탈길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양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쌓인 눈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가지 잎에 남은 약간의 새싹이 마지막 힘을 짜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땅을 덮는 하얀 융단 위에는 고개를 높게 쳐들어도 그 끝이 가늠이 가지 않는 나무가 제리의 시선을 끌었다. 언젠가 저런 나무 위에 올라가면 어떨까? 제리의 중얼거림에 요슈아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분명 자유로운 기분이 들지 않을까……나. 올라가 본 적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한눈에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슴이 상쾌해지는걸."
"그럼 그때가 오면, 같이 올라갈게."
"……너는 늘, 당연하다는 듯이 날 벅차게 만드는 말을 해주네…. 그래서 가끔은 정말 꿈같아."

두 사람의 가까이에 있던 나무가 때마침 바람결에 잎을 흔들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입에서 나오는 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산이라고는 했지만, 분명 정상. 요슈아, 그리고 브레이브 차일드가 언젠가 닿을 정상까지 올라갈 때마저도 제리가 곁에 있어 줄 것이라는 나른하고도 기쁜 확신이 들었다. 나도. 제리의 입에서 간결하고도 무거운 대답이 나오고서 얼마 안 가 산장 하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로그하우스 풍의 목조 저택에 가까운 산장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로 이루어진 1층이 그들을 반겼다. 벽을 둘러싼 거대한 유리 창문과 고풍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곁들어져 한껏 분위기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굉음과도 같은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응, 갇혀버렸네……."
"…정말, 정말로 미안해. 설마 판다 사장이 애인하고 함께 있을 때도 이럴 줄은…."
"으응,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했지? 어쨌든 사장……님도 어느 정도 예상하셨던 거라면, 엄청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고. 쓰여 있는 대로 3박 4일만 버티면 나갈 수 있겠지!"

그래도……. 한껏 쳐진 요슈아의 눈썹을 본 제리가 오른손 검지를 뻗어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가 이렇게 자책하거나, 혼자서 멈춰있을 때면 제리는 그에게 다가와 이끌어주듯 손을 내밀었다. 제리가 눈을 둥글게 말고 웃었다. 그리고 요슈아랑 같이 산장 조난이라니, 솔직히 조금 재밌어져 버렸고. 그 실없는 농담에 그는 당황한 채로 무어라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분명 너도 무서울 텐데, 겁날 텐데. 내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겠지. 그의 손가락이 얼굴 앞에 머무르고 있는 제리의 손을 끌어왔다. 손끝이 얼어 차가웠다. 요슈아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천천히 엄지로 쓸었다. 제 얼마 안 되는 온기라도 전부 전해주고 싶다는 듯. 부드러운 피부가 한 번 닿고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네 손, 차갑구나."

……응, 그러게. 조금 춥네. 그러면서 제리는 그의 머리를 요슈아의 어깨에 얹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그의 입김이 요슈아의 귓가에 갈고리처럼 걸렸고, 간지러운 듯한 달콤한 감각이 요슈아의 온몸을 달렸다. 요슈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이 붙어 있는 살갗 아래 세포 하나하나에 신경이 집중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그는 제리의 검은 머리카락을 얇은 손가락으로 솎아댔다. 혈관이 도드라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검은 실타래 사이를 헤치듯 움직인다. 지금,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연인에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리고 싶진 않았다. 요슈아의 귓불이 단번에 홧홧하게 타올랐다. 벽난로 안 장작이 그를 놀리듯 불씨 튀기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를 부드럽게 껴안는 데까지만 머물기로 했다. 요슈아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리는 품 안에서 고개를 좀 더 안쪽으로 움직였다. 아아. 나는 정말 바보야, 바보……. 손등이 추위를 모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제리의 말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일단은 보컬리스트들끼리 있을 때보다는 덜 각박한 환경이었다. 산장 너머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꽉 채워진 스낵바, 동날 일 없을 듯한 수많은 장작 등이 그것을 증명했다. 물론 자연적인 추위와 고난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산장에 갖춰진 온방 장치는 죄다 먹통이었고, 이불과 벽난로의 열기 등으로 겨우 그것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제리의 허리에 털 담요를 가지런히 묶은 요슈아가 잠시 롤케이크 같다며 웃었다. 분명 보컬리스트 애들하고 있었을 때는 온종일 시끌벅적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들하고 같이 왔다면 난장판이 되어서 정말 조난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무언가가 시선에 들어와 다급하게 제리를 불렀다.

"뭔데?"

제리가 그리 물으며 요슈아의 근거리로 다가오자 온갖 서적과 레코드판으로 가득한 책장이 단번에 그를 압도했다. 8090 명반을 모아둔 것부터 시작해서 각종 음악 관련 책들은 먼지 낀 것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책장 바로 앞에는 광이 날 정도로 빛나는 축음기가 먹이를 기다리듯 나팔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요슈아가 눈을 빛내며 자신이 LA 시절 동경했던 밴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제리에게 설명했다. 제리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로 가득했다. 여기 혹시, 판다 사장의 사유지 같은 걸까……. 그렇다면 신기하네! 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리가 축음기를 쓸었다.

"어차피 갇힌 거, 네 노래가 듣고 싶다고 하면 욕심이려나?"

그 말을 들은 요슈아가 고민도 안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 우리는 조난객이니까 조금 멋대로 구는 건 괜찮겠지? 장난스러움이 가득한 말이 끝나자마자 요슈아가 아래에서 3번째 정도 위치한 책장 안쪽에서 레코드 하나를 꺼냈다. 재생용 바늘 아래에 레코드판을 끼워 넣으면 익숙한 반주가 산장 전체를 덮었다. 요슈아가 허밍을 하며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제리 또한 그것이 LA서 자주 요슈아가 부르던 노래임을 기억해냈다. 알파벳이 모이고, 단어가 모여, 노래가 된다. 작은 모임이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요슈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줄곧 그리워하던 풍경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건 색달랐다. 소파에 앉아, 손가락을 튕기며 박자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주변이 뙤약볕처럼 타오르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태양이 제리와 요슈아의 살갗을 찍어누르고, 땀이 흐르는데도 둘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마음에 온종일 들뜨게 하던 그때로. 아아. 정말 너는 나의 매 순간에 존재하는구나. 제리도 요슈아도 그리 생각했다.

그의 노래가 끝나고서 제리는 옅은 손뼉을 쳤다. 그는 설마 그 노래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며 머쓱하게 뺨을 문질렀다. 소파에 누워 기대듯 앉은 요슈아의 옆에 앉은 그가 담요 반절을 그의 무릎 위에 덮었다. 요슈아는 고맙다고 답하며 이것저것 추억을 늘어놓다가, 한참 말이 없는 제리를 보고 걱정스레 눈썹을 움직였다. 괜찮냐고 묻는 그에게 제리가 작게 대답했다.

"요슈아,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괜스레 더 걱정되어서."

그의 말에 요슈아가 급하게 손사래 쳤다. 아, 아냐 아냐! 정말로! 제리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약하게 튼 요슈아는 그 상태로 감정을 담아,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게 말했다.

"네가 말해줬잖아, 자책하지 말라고. 어려운 일도, 기쁜 일도 함께 나누면 괜찮을 거라고. 맨 처음에는 확실히 많이 당황하긴 했지만……. 네가 있다고 생각하니 괜찮더라. 신기하게도 말이야."

마음이 담긴 글자는 서로의 존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당장 그 말에 제리는 진심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불안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건네든 요슈아는 늘 그렇듯 웃어주겠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밤하늘에 수를 놓는 수많은 나무 위 눈들이 시야에 걸렸다. 서리가 낀 창문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던 요슈아의 어깨를 제리가 톡 건드렸다. 눈앞에 들이 밀어지는 단 향이 그의 비강을 자극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였어? 놀란 그에게 제리는 잠이 깼다며 말하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코코아, 타 왔어."
"아……! 고마워. 따뜻하다."

요슈아가 그것을 받아들며 푸스스 웃었다. 제리는 뺨을 쪼이는 누군가의 따스한 열기와 담요 안쪽으로 파고드는 추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계속 머무르는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원치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느긋한 건 좋지만, 그와는 별개로 쉽게 답답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신기하게도 누구보다 자유를 쫓으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정착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슈아의 옆모습을 보면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 않냐는 생각이 자신의 안쪽에서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제리는 진심을 전하는 데에 있어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도 네가 있어서, 이런 눈밭도 괜찮은 것 같아."

툭 튀어나오는 본심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요슈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간질거리는 심정을 어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어휘를 나열하여 재배치하고, 뒤섞어도 나오는 말은 가장 직설적이고 간단한 것이었다. 제리의 곱게 묶은 머리는 어느새 풀은 채로 허리를 간지럽혔다. 요슈아의 시선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부터, 손, 어깨, 얼굴로 천천히 올라왔다. 1초, 2초, 3초. 그리고 이윽고 그의 입술이 다급하게 열렸다.

"……정말로. 기뻐…. 그리고 정말 미안해! 사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뭐랄까, 제리 너랑 있으면……. 이런 산속의 산장 안의 풍경도 계속된다면 좋겠다고. 무심코 그런 생각 해버렸거든. 이런 말까지는 역시 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진심이니까.”

볼을 붉히고, 망설이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먼저 선수 쳐 버리는 요슈아를 바라보며 제리가 뺨을 긁었다. 그는 자신의 것과, 요슈아가 들고 있는 반도 안 마신 코코아 잔을 앗아가 부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요슈아의 붕 뜬 목소리가 제리의 귓가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해서 머물렀다. 눈앞의 사람이 나눠주었던 온기가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두 손을 뻗어 양 뺨 위에 얹었다.

"바보."

요슈아의 손이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과 함께 제리의 손등 위로 똑같이 얹어졌다. 너도, 나도. 우리 둘 다 바보네. 아하하……. 숨결이, 마음이 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뜬 숨이 겹쳐졌다. 몇 번을 짧게 마주했다가,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서 깊게 파고들었다. 제리의 허리가 요슈아의 손에 의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추위 따위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들이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귓불도, 손가락 마디도, 뺨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말하는 요슈아의 어깨를 약하게 툭 치고서, 제리는 곁눈질로 바깥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창 너머로 내리는 눈이 마치 설탕 가루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 향이 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리 느꼈으므로.


다행히 예상대로 4일째 되는 아침, 구조대가 찾아왔다. 구조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 요슈아가 대놓고 '거기 뒤쪽에, 홍보잖아'라고 말했지만 무시당했다. 역시나 산장은 판다 사장의 것인 듯했다. 둘은 산 아래로 내려와 겨우 밴에 탑승했다. 둘이 아무래도 첫 번째 구조―라고 쓰고 서바이벌이 끝난 뒤 수습하는 단계―대상이었던 건지, 차의 크기에 비해 아직 둘밖에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홍보가 한숨을 푹푹 쉬며 재밌었냐고 물었다. 예상했던 낯빛과 다르게 멀쩡해 보이는 둘 때문이었다. 제리와 요슈아는 서로를 보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웃음은 일상 중 하나였다.

"응, 무척 즐거웠어."

요슈아와 제리가 동시에 그리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못마땅하진 않다는 듯 따뜻한 보리차를 건넸다. 우리 둘 다 서로가 구조대이자 안심할 수 있는 존재.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마음 앞에서는 그 어떤 뜨거운 것도 설산처럼 차가웠고, 그 어떤 차가운 것도 벽난로의 장작처럼 뜨거웠다. 요슈아는 남은 한 손으로 제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틈새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깍지를 꼈다. 제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당연한 순서를 밟듯 머리를 기댔다. 그 위로 요슈아의 고개가 떨어졌다. 긴장이 풀리고 추위가 녹기 시작하니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정신을 차리면, 이번에는 반드시 판다 사장에게 한마디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두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을 태운 밴 뒤로 새하얀 설산이 멀어졌다. 잘 가, 메이데이. 세 번 반복할 필요는 없어.

요슈아가 아프다
요슈아가 아프다

@ijeongsoga

 

 

요슈아가 아프다.
감기 걸렸어, 와 함께 도착한 울먹거리는 이모티콘.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대체 뭐라고, 무슨 정신으로 요슈아의 집까지 달려간 건지 모르겠다. 노을이 곁드는 현관에 잔뜩 헐떡이며 다다랐을 때가 돼서야 제리는 자신이 양손 한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 안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있었다. 해열제부터 시작해 편의점에서 사 온 죽, 이치고모찌, 푸딩, 곤약 젤리 등 달콤한 간식거리까지. 혹 갈증 나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구매한 자그마한 이온 음료도 하얀 봉지에 보란 듯이 자리했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음에도 살뜰하게 챙겨야 할 건 전부 챙긴 것 같아 제리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결코 귀찮음과 같은 감정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려는 의도 반, 오랫동안 외롭게 혼자 앓고 있던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의도 반. 근심이 그득한 가슴이 답답해 입술을 문 그가 익숙한 듯 조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선명한 벨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반응하는 기척은 없었다. 누군가, 그러니까, 요슈아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라든가, 반가운 듯 제리라고 부르는 목소리와 같은 것들이 집안에서 들려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한 번 더 벨을 눌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는 어째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픈가? 대답할 기운도 없나? 그저 자고 있는 건데, 괜히 내가 야단스럽게 구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일순 제리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연기처럼 뭉게뭉게 불어나는 사고를 저지할 새도 없이 제리가 무거운 봉지를 팔에 낀 채 예비 열쇠를 꺼냈다. 항상 요슈아가 문을 열어주었기에 자주 써보지는 않았지만, 나름 능숙한 솜씨로 열쇠를 끼워 돌리자 문은 별 저항 없이 철컥. 부드럽게 열렸다.
제리는 그 안으로 자연스레 발을 옮겼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노을이 비추는, 불이 켜지지 않은 요슈아의 자취방은 퍽 밝은 편이었다. 혹시 몰라 요슈아, 하고 그를 부르는 제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숨길 수 없는 불안이 서려 있었다. 한참-고작 2초였지만-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탓이었다.
결국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와 함께 요슈아의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은 것과는 달리, 그것을 돌려 미는 행동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방문이 열리며 틈을 만들어내자마자 자그마한 기침 소리가 제리에게 들렸다.
콜록, 콜록. 마르고 갈라지는 기침에 놀라 눈을 키운 것도 잠시, 곧 마주하게 된 그의 발간 얼굴에 제리가 조급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요슈아와 눈을 맞추려 그 앞에 주저앉듯 몸을 낮추었다. 동시에 내용물이 가득 차 있던 비닐봉지가 손에서부터 흘러내려 바닥을 굴렀다. 약이며 간식들이 제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요란하게 나뒹굴었지만 그의 시선은 수척한 요슈아의 얼굴에서부터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요슈아. 제리가 입에 담는 단어는 음절이며 단어의 형태며 언제나의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 내재되어 있는 감정 하나만큼은 달랐다. 걱정을 넘어선 근심, 반가움보다는 가련함이 우러나오는 목소리. 한편으로는 괜찮냐 묻는 것 같은 따뜻함도 담겨 있었다.
붉다 못해 새빨간 얼굴에 제리가 요슈아의 이마에 오른손을 대었다. 부드럽게 손등에 닿아오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뜨겁다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와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던 찰나 줄곧 대답이 없던 요슈아가 멀어지는 손을 붙잡고 다시 그것으로 제 볼을 감싸게 하였다. 자그맣게 시원하다며 중얼거리고, 손바닥에 입술을 붙인 채 입을 맞추듯 비벼오는 것은 덤이었다.

 

…요슈아, 괜찮아?

 

그리 묻자 으응,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낸 요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리의 질문에 부정을 표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부려오는 어리광이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작은 안도감이 깃들다가도, 제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요슈아의 행동은 무언가 미심쩍었다. 제리가 천천히 요슈아의 볼을 쓸어주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저만이 볼 수 있는 그의 어리광은 오히려 좋다면 좋았다. 다만, 걱정해주는 내가 보고 싶어서, 잔뜩 어리광을 부린 뒤 사랑받고 싶어서, 라는 핑계로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열이야 온기가 가득한 이불에 꼭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오르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진위를 가리기 위해 요슈아와 눈을 맞추었다.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는, 자신의 것과 닮은 잿빛의 눈은 천진하게 웃었지만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고,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열기는 도저히 연기라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제리가 의심을 믿음으로 뒤바꾸었다. 설령 정말 연기였다 할지라도, 요슈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약도 아직이겠네.

 

이것저것을 물어도 요슈아는 말끝을 늘이기만 하였다. 말이며 행동이며 모든 것이 굼뜨기만 해 답답할 만도 하건만 제리는 얌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아무것도 먹지도, 하지도 않았다는 응답이 되돌아왔다.

정말 내가 오기까지 기다리기만 한 건가? 금방 심각해진 제리가 간단한 해열제라도 먼저 먹이려 잊혀 있던 비닐봉지를 왼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른손은 요슈아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라 차마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툭, 하고 손에 닿는 것은 의외로 비닐이 아니라 딱딱한 병이었다. 액상 해열제라는 라벨이 버젓이 붙어있는 병. 단번에 잡혔다면 좋았겠지만 건드림과 동시에 데구르르 굴러 더 먼 곳으로 가버린 해열제는 움직이지 않고서는 잡을만한 거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잠깐만. 작게 요슈아에게 속삭인 제리가 그의 볼에서부터 손을 떨어트렸다. 멀어지는 손이 아쉬운 듯 제리에게 꽂히는 요슈아의 시선은 퍽 노골적이었다.
몸을 일으켜 해열제를 찾은 김에 바닥에서 쿨링 패치며 이온 음료며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가득 갖고 요슈아의 곁으로 돌아온 제리가 이번에는 침대맡에 앉았다.
해열제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일어날 수 있어? 말을 맺음과 동시에 달콤씁슬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병을 요슈아에게 건넸다. 그는 제 앞에 뻗어진 제리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불 덩어리와 함께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제리가 빨리 열부터 내리자며 약병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받으라는 신호였으나, 어째서인지 요슈아는 손을 들기는커녕 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약을 가지러 가기 위해 멀리 떨어졌을 때처럼, 빤히 제리의 눈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 먹여주면 안 돼?

 

의아해 고개를 기울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들려온 요슈아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목소리였다기보다는 칭얼거림에 가까웠다.
거절을 말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결국 "이번만이야?"라고 덧붙인 제리가 얌전히 입을 벌린 요슈아에게 해열제를 먹여주었다. 열 때문에 땀은 또 어찌나 흘렸을지. 이온 음료도 조금이나마 마시게 하고, 이마에는 쿨링 패치까지 붙여 주었다. 약이 쓰다며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작은 젤리도 덩달아 입에 넣어주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오물오물. 얌전히 제리가 주는 것들을 전부 받아먹은 요슈아가 또다시 비치적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열이 너무 높아 어지러웠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래 앉아있는 것보다 편하게 누워있는 편이 휴식하기에는 훨씬 나았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던 제리의 시선이 요슈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리는 모습은 정말로 어린 고양이 같아 제리가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어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파란 쿨링 패치가 깔끔하게 앞머리로 가려졌다.
그 다정한 손길에 요슈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곧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꿈질거리며 침대의 한쪽으로 붙은 그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가벼운 수신호는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픈 사람을 외롭게 두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옆에 누워주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평소보다 더 애처로운 눈으로 저를 바라봐주는데 어느 누가 이런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어리광을 들어주는 것은 이번만이라는 제 말마따나 제리가 조심스레 요슈아의 곁에 누웠다. 몸을 옆으로 돌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이렇게 옆에 있어 주니까, 좋다….

 

작은 속삭임이 제리의 귀를 간질였다. 열감에 시야가 흐릿한 건지, 몽롱한 건지. 열심히 이것저것 먹였음에도 잠이 덜 깬 것일 수도 있겠다. 잠들 때까지 어디 가지 말아 줘. 요슈아가 웅얼거리듯 덧붙였다.
그 말에 제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디 가지 않겠다는 듯.

 

…나, 추우니까 안아줬으면 좋겠어.

 

점점 요구의 크기가 커졌지만 제리는 큰 저항 없이 요슈아를 품에 안았다.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끌어안고, 더운 숨을 들이켰다 뱉어 부러 간지럽히는 요슈아에게 싫은 소리 하나도 뱉지 않았다. 몸은 조금 움츠러들지언정, 그가 안락하게 잠이 들 때까지 등허리를 토닥여주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요슈아의 눈이 감겼다 뜨이며 긴 속눈썹이 제리의 맨 살갗에 닿는 것도 언뜻 느껴졌다. 어느새 노을이 다 진 방에는 빛 하나, 소리 하나 스며들지 않아 고요했지만, 딱 하나. 서로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탓에, 살아있음을 알리는 심장 소리가 선명히 고막을 파고들었다.

고즈넉한 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파장이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요슈아의 등을 다독이는 손은 느려진 지 오래였음에도 그의 눈은 여전히 더디게 깜빡이기만 할 뿐 가만히 감겨있지만은 않았다. 끌어안은 몸에서 열이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는데도 졸음이 그득했던 요슈아의 목소리와는 달리 행동은 전혀 그러지 않으니 결국 제리가 잠이 오지 않냐 묻자,

 

키스해주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돌아오는 대답에 언뜻 몸을 굳혔던 것도 같다. 요슈아가 제리의 목덜미에 묻었던 고개를 고쳐 베고는 제리를 바라보았다. 간절하고도 애절하고, 힘없이 풀려 자극적인 눈.

언제 보아도 참 예뻤다. 그 색에 홀려, 제리가 옆으로 안고 있던 몸을 굴려 요슈아를 바르게 눕혔다. 자신은 그 위에 올라탄 채였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건지 요슈아가 상기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순수한 미소였다. 그에 호응하듯 제리가 고개를 내리자, 이번에는 그가 손을 뻗어 제리의 볼을 감싸기도 하였다. 흘러내리는 옆머리는 귓가로 넘겨주어, 자그마한 입술을 머금기 쉽게 만들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자 애써 넘겼던 머리카락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것을 신경 쓸 틈은 없는지, 요슈아는 혀를 내어 조심스레 제리의 입술을 핥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조심스레 깨물기도 하였다. 어설프게나마 혀를 섞으려 드는 제리가 사랑스러워, 무심코 목을 울려 웃는 소리를 그가 내기도 하였다.
취한 것 같았다. 점차 고갈되는 호흡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키스를 할 때면 항상 그랬다. 숨을 쉬는 법을 까먹어, 물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마냥 부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우울이 아니라, 안식에 빠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기에 열이 날 리가 없었는데도 정신은 점점 몽롱해져 갔다. 조금이나마 고여있는 둘 사이의 산소를 먹으려 입을 조급하게 벌리면 다시 다물지 못하게 요슈아가 제리의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겹치던 찰나, 아, 하는 짧은 탄식에 놀란 그가 닿아있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 틈에 숙였던 고개를 든 제리가 다시 입을 맞추지 못하게 요슈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급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산소의 양은 성급하게 뛰어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작게 미안해, 사과한 요슈아가 제리를 끌어안았다. 말소리며 행동이며 지독하게도 느려 잠결임을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피곤함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어조였다.
요슈아는 제리가 숨을 고르기 편하게 하려는 듯 자신을 재우려던 그 손길을 모방하여 등을 쓸어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제리가 어리광을 부리듯 요슈아의 품에 고개를 비볐지만, 그 행동은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토닥, 토닥. 움직이던 손은 금세 정지, 열기 서린 숨은 규칙적으로 호흡.
설마, 싶어 제리가 고개를 들자마자, 제 등에 얹혀 있던 요슈아의 손에 힘이 빠져 주르륵 침대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으응, 하는 잠꼬대와 같은 소리가 굳게 감겨있는 요슈아의 눈과 함께 제리를 맞이했다.
약속을 지켰다고 해야 할지. 키스를 마친 요슈아는 순식간에 오른 열에 피로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빤히 그린 듯 잠든 요슈아를 바라보다, 쿡쿡 웃으며 그를 품에 가득 안은 제리가 요슈아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더 길게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같잖은 미련이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제리는 요슈아에게 잘 자라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내가 너의 손을 잡을 때면 우울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너도 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안식의 바다에 아늑하게 잠겼으면 좋겠기에.
아침이 밝아와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곁에 머물며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었으니까.

night flight
night flight

@mochacreamsoda

멸망을 멈춰세우는 가장 연약한 것

 


호흡을 따라 세계가 전율한다. 몸을 움츠리는 난류. 비틀대며 걸음을 뗀 남자가 머지않아 고개를 떨어뜨렸다. 건물의 파편들이 남자의 주변을 감싼 채 부유하고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이 초읽기에 들어간다.
수치는 이미 블랙 라이트를 지나쳤다. 지금 당장 폭주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비상등이 점멸하고 요원들은 적정 거리를 지킨 채 그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일본 내 가장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 남자. 범위를 넓혀 지구상에서 그와 견줄 법한 인물을 찾는대도 열 손가락이 미처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린다면…….
그럼에도 여즉 긴급 대피 지시가 떨어지지 않은 까닭이란 단 하나뿐이다. 아직이야? 오고 있대요. 빌어먹을, 하필 오늘 테스트가 있을 게 뭐냔 말이야. 나누어지는 속삭임이 초조했다. 흐린 시선이 주변을 헤엄친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기색이었다. 블랙아웃을 하염없이 헤매던 미아가 어떠한 단어를 중얼거렸을 적.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잔해를 남긴 폐허에 걸려 넘어질 듯 휘청이면서도 멈추지 않는 달음박질. 마침내 절박한 음성이 외친다.


"요슈아!"


창공의 공회전이 일순 정지했다.


어느 변화는 세상을 뒤집어놓기도 한다. 이능력의 발현과 소위 '센티넬'들의 등장은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며 언론을 뜨겁게 달궈 놓았다. 정부의 통제 아래 위험 분자로 취급되던 그들은 던전 브레이크와 크리처 웨이브를 겪은 사람들에 의해 180도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대중은 그들을 영웅이라 불렀다. 아무나 가지지 못하는 힘을 가진 이인異人. 인류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히어로! 일부는 그 라벨링에 기쁘게 순응하였고, 일부는 감탄고토의 태도를 지리멸렬하게 생각하였지만 눈앞에는 피하지 못할 위기가 존재하였다. 그렇게 대부분의 센티넬들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 아래 대對크리처 기구 <프라스타나 prasthana>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요슈아는 프라스타나 입단 당시부터 선풍적인 인기와 관심을 끈 인물이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나이임에도 감히 측정하지 못할 만큼의 힘을 가진 존재. 이능력을 측정하는 방법이란 으레 단순하다. 타인이 가진 능력의 수준을 가늠하는 이능력자에 의해 1차 검사를 받은 뒤, 2차적으로 실사용에 돌입한다. 잠재력과 별개로 얼마만큼을 직접 운용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이다. 1차 검사관, 블랑은 말했다. '그의 끝을 가늠하지 못하겠어요. 한계가 보이지 않아요.' 이후 돌입한 2차 검사에서 요슈아는 테스트용 건물과 그 일대를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형언하자면 그는 프라스타나 유일의 등급 불명 센티넬이 된 셈이다.
일본 전역을 통틀어 최초의 사건. 모두가 탐낼 법한 옆자리에는 이미 그가 지정해둔 가이드가 존재했다. 바란다면 더 능력 좋은 가이드를 붙여주겠다는 매니저의 말에도 요슈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기, 가이딩이란 센티넬과 가이드의 정신적 유대에도 영향을 받잖아?'
'음, 그렇죠.'
'그러니까 난 제리가 아니면 안 돼. 다른 가이드한테서 이만큼의 안정감은 어차피 못 느껴.'


과연,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의 파장은 완벽하리만치 잘 맞았다. 당장 S급 센티넬만 해도 좋은 관계의 S급 가이드가 아닌 이상 두세 명, 많으면 대여섯 명의 가이드들에게 둘러싸여 가이딩을 받는 판국이었다. 그럼에도 제리는 요슈아를 홀로 모두 감당해내었다. 요슈아가 범람하는 파도라면, 제리는 바닷물 스밀 별이었다. 요슈아가 폭풍이라면…… 제리는 그를 그러안을 하늘이었다. 아무도 두 사람의 파트너십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요슈아의 곁에는 늘 제리가 있었다.

센티넬과 가이드, 그런 관계를 떠나서.

너와 나는 우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우르릉, 지나친 에너지에 반응한 허공이 우레와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느릿한 속도로 눈을 깜박인다. 안개가 낀 것만 같아.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네 목소리가 들렸는데. 네가 온 것 같았는데……. 혹여나 자신이 그를 상처 입힐까 봐, 요슈아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만약 나로 인해 네가 다친다면 나는 영원토록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언젠가 건네었던 말에 제리는 그런 얘기 하지 마, 짐짓 혼을 내었으나 진심이었다.
제리를 지키기 위해 프라스타나에 들어왔다. 그가 안전한 세계에서 살아가길 바랐다.

그에게 위험이 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부름이 닿았음에도 요슈아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제리는 입술을 설핏 깨물었다. 이윽고 망설임이 부재하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삼십 미터, 이십오 미터, 이십 미터. 자칫하다간 요슈아의 호흡 하나로도 몸이 갈기갈기 찢길 텐데. 무모한 아집이었다. 제리……! 누군가 그를 불렀다. 차마 언성을 높이지 못한 속삭임. 곁을 지키던 소장이 손을 들어 그런 염려를 저지했다. 이제부터는 센티넬과 가이드, 두 사람만의 영역이다.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무형의 장막…….
제리는 다치는 일 없이 요슈아에게 도착한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둘을 응시했다. 무엇인가 말하는지 입술을 달싹이던 제리가 이내 요슈아를 끌어안았다. 작은 비명과 탄성이 울려 퍼진다. 폭주 직전, 센티넬이 인식하지 못한 외부적 자극은 촉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센티넬에게 가이드의 존재를 제대로 알린 후 자그마한 스킨십부터 시작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음에도.
요슈아, 괜찮아. 제리가 단언했다. 요슈아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손목의 흉터가 그 증거였다. 하루아침에 흘러넘치는 힘을 떠안아 버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제리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느꼈다.
그러나 어느 하루, 자신을 끌어안은 채 허공을 거닐던 요슈아를 떠올린다. 티끌 하나 없이 말간 얼굴. 잘게 떨리는 웃음.
'날씨 좋지, 제리? 즐거운 기분이야……!' 두근, 두근, 두근. 한껏 격앙된 심박음이 선연했다.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것은 제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제리는 용기를 내었다.


얇고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운율이 흐른다. 음이 붙여지지 않은 가사는 어떠한 시詩와도 같았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면, 꼭 노래가 아니어도 돼. 내 언어에 음악을 부여해주는 건 언제나 요슈아 너였으니까. 나의 문장이 너에게 소리가 되어 가 닿을 것을 알았다.
네가 나를 믿는 만큼, 나도 너를 믿을게.


기록되지 않을 사랑이 마침표를 찍으면,

요슈아는 눈을 뜬다.

ロストアンブレラ
ロストアンブレラ

@mochacreamsoda

 

 

비의 기척을 두려워하는 나날이었다

 

적막을 깨트리는 불협화음. 균형과 불균형의 사이에서 요슈아는 이따금 귀를 막았다. 누긋한 땅에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비명은 어디까지라도 그를 따라올 것만 같았다. 안 돼. 이걸론 부족해……. 더 좋은 곡이, 더 좋은 노래가 필요하다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음성을 낸다. 머릿속 떠오른 음율은 빗소리에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오선지 위 끄적이던 손이 아무렇게나 새카만 선을 그었다. 요슈아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끊이지 않는 두통. 비명을 지를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인다. ◼◼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도래하면…….

 

"요슈아."

"……."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깨를 감싸 안는다. 부드러운 체향과 온기 사이 눈꺼풀을 열자, 흑백의 세계 속 유일한 색채가 윤곽을 드러낸다. 낯익은 따스함이었다. 제리……. 온몸의 떨림을 숨기고 싶다고 생각한다. 제리의 앞에서까지 꼴사나운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멋지고, 밝은…… 상냥한 소꿉친구이고 싶었다. 요슈아는 여전히 자신의 유악함을 미워한다. 내가 더욱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싫증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함부로 저 자신을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너와 약속했으니까.

함께 나아지기로 했으니까, 우리.

증오가 호흡을 멎게 한다면,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역시나 사랑이다. 스스로를 싫어하는 것보다 제리를 좋아했다.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무게였다. 그러니 제리가 아끼는 요슈아 본인을 그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자그마한 손이 요슈아의 등을 쓸어내렸다. 머뭇거린 끝에, 요슈아는 제리에게 푹 기대고야 만다.

 

시간은 음악처럼 흐르고…… 상흔 위로 살이 차오른다.

 

"제리, 조금 더 안아줘……."

"응, 요슈아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이러고 있을게."

 

물결의 다정함을 깨달으면 장마가 두렵지 않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계절이다.

순결의 종막
순결의 종막

@mochacreamsoda

 

 

바다를 동경한다 어항 속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려도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 너를 생각해 거짓 없는 키스를 나누고 얽힌 손끝에 의지하면 한없이 유영하는 위로


엉망진창의 거미줄에 걸린 나비는 저항하지 않는다 보드라운 날개에 끌어안겨 호흡을 이어 나간다 쏟아지는 소나기에 핏방울이 씻겨내리고

 

마침내 구원받으면

 

모든 절망에 선행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어느덧,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아드레날린 정키 젠틀맨
아드레날린 정키 젠틀맨

@juststayus

 

 

1. Stand By…… Me?

 

부패한 마음과 선에서 해답을 찾은 날로부터 하루, 또 하루를 계속해서 지나갔다. 콘크리트에서 일어나는 열로 공기가 왜곡되어 보일 정도의 온도에 제리가 두 손을 펄럭거렸다. 덥다……. 자연스레 혼잣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었다. 제리가 주변을 곁눈질로 살피면, 스크램블 교차로의 사방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열기를 해소하고 있었다. 한여름 날씨에 양복을 빼입은 세일즈맨, 바람에 밑단이 흔들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 라무다 소다 병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는 어린 소년. 풍경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태양은 용서 없이 제리의 피부를 구울 듯이 쪼아댔다. 그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파랑이 되려면 얼마나 남았으려나.
그렇게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와중에 갑작스레 시야에 새하얀 것이 들이닥쳤다. 저쪽에서부터 경쾌하게 들려오는 구두굽 소리가 피아노 소리처럼 듣기 좋았다. 맞은편의 그가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제리를 마주했다. 그러자 금세 입가에 호선을 띄웠다. 하염없이 길게 느껴지기만 하던 신호가 어느새 파랑으로 물들었다. 하양, 검정. 다시 하양. 교차로라는 건 그와 그를 이상할 정도로 닮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자 교차로 중간에서 손이 맞닿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한 번쯤은 노래로 들어봤을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덥지? 얼른 들어가자."
"아냐, 괜찮아. 이제 좀 덜 더운 것 같아. 그런데… 연습 중인 거 아니었어?"
"몰래 빠져나왔지. 잠깐이면 괜찮을 거야. 자, 어서."

응, 요슈아. 뾰족한 마음을 양옆으로 둥글게 감싼 듯한 이름은 입에 담기만 해도 미소가 나왔다.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손을 맞잡은 채 밴드 연습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슈아를 바라보던 제리는 잠시 머리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렁이 한 마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격하게 움직일수록 지렁이는 더욱 조급하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리의 잿빛 눈동자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지렁이의 눈이 제리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급하게 고개를 돌려, 요슈아의 손을 아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손바닥 사이로 끈적한 땀이 묻어났다. 둘 모두가 서로의 혈흔을 마주한 날. 솔직함으로 기댈 것이라 확신한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바뀐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조금씩 다시 한번 제리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2. 관념적인 아이덴티티, 나를 봐줘!

너 말이야. 내 집에 이거 두고 갔었어. 자. 제리가 더운 열기를 최신형 에어컨 앞에서 식히고 있자 요슈아가 작은 검은색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제리가 의아한 시선으로 받은 뒤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바뀌는 건 몇 초도 안 되어서였다. 그 변화에 요슈아가 작게 웃었다. 쇼핑백을 열어보면 들어있는 것은 LA에 있을 때 종종 타고는 했던, 손길이 묻어나는 롤러스케이트 슈즈다. 제리의 머리카락과 꼭 닮은 검정색. 먹을 묻힌 붓처럼 슬쩍 안쪽에 넣어둔 추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고무로 만든 슈즈를 신으면, 신발 바닥이 땅을 차고 앞으로 나아가고, 그 바닥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발가락을 떨게 했다. 뒤꿈치 부분까지 이어진 딱딱한 금속 소리가 달그락달그락 나는 것이 기분 좋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스커트의 밑단이 허벅지 위를 쓰다듬으며 바람결에 따라 뒤로 흘러갔다. 중심을 잃을 것 같을 때 제리의 것보다 조금 더 큰 손가락이 마디 마디를 파고들며 지탱해주곤 했다. 조금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유롭게 구름 따라 움직이던 날이 기억났다.

"나도 정리하다가 찾았는데 말이야. 옛날 생각도 나서 타자고 했다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급하게 사무소로 돌아갔던 거 기억나?"
"아. 생각났어! 그때구나? 새삼 이렇게 오래 지냈는데도 계속 새로운 추억이 생겨서 신기해."
"아하하. 그 말, 어쩐지 기분 좋네."

요슈아는 제 머리를 제리의 어깨에 기댄 채 롤러스케이트 슈즈를 만지작거렸다. 발견했을 당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당연히 LA 시절의 제리의 표정이다.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때도 너는……. 입 밖으로 구태여 내뱉지 않는 생각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세 관두었다. 이제 이런 식은 그만두기로 했잖아, 멍청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건드린 뒤 배어 나오는 비릿한 향 하나 없자 안심한 채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바닥이 헤진 롤러스케이트 슈즈. 그것을 탈 때만큼은 그때의 제리 또한 아무런 걱정 없어 보였다. 거짓이나 가면의 조각 하나 섞이지 않고 맑은 하늘 아래를 품은 것처럼. 요슈아가 다시금 그를 쳐다보았다.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제리의 얼굴이 그늘져 보인다고 감히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괜찮은 게 분명한데, 여전히 무언가가 느껴졌다. 약속한 날로부터 수많은 하루가 지나갔다. 제리의 상태가 부쩍 좋지 않다고 느낀 건 얼마 전부터였다. 보은. 그것이 요슈아라는 사람이 품은 본능 중 하나였다. 자신을 발견해주었던 그때처럼 보답이 되고 싶다는 마음. 여러 생각 끝에 요슈아가 먼저 운을 뗐다.

"저기, 있지. 저번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뭔가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렇다면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나한테 해준 것처럼, 나도 네게 의지가 되고 싶어."
"…나, 역시 조금 이상했으려나? 미안해. 나도 긴가민가해서 말을 못 했어. ……아, 옛날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정말 아니야!"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일순간 풍선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래로 휘어진 눈썹 따라 눈동자가 아래로 기울었다. 그러다가 입을 연 그는 마지막에서야 급하게 손사래치고,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조금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걸까, 서서 이야기하던 그가 풀썩 제리가 앉아 있는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제리의 어깨에 기대었다. 푸슬거리는 흰 머리카락이 제리의 목선을 간지럽혔다. 그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그렇다면, 응. 다행이다. 그리고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어째서? 그 말에 제리는 자신의 땋은 머리카락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무슨 기분일까? 뭐든지 쉽게 질려버리다가도 요슈아를 쫓아 좋아하고 있어. 서로 의지하고 있으면 무서울 건 없다고 생각해. 그런데, 요즘 따라 가끔…… 그런 기분이 들어."

뭔가에… 턱 막혀 있어서 조금만 더 하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뭘까. 계속 고민하고 있어.


3. Flyer, 그날 꿈꿨던 꿈이 바로 최고의 상승기류¹ Flyer, Chinozo

연습이 끝나고 돌아온 집 안의 기류가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음악 CD가 한가득 쌓인 모던한 디자인의 책장을 눈으로 훑었다.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덕분에 시원한 공기가 거실을 순환하고 있었다. 단순 그 이유로 차갑게 느껴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요슈아는 얇은 여름용 카디건을 벗고 바로 소파에 앉았다. 고개를 젖히고 편하게 앉아 있다가 아예 누워 버렸다. 어떻게 하면 그 녀석한테 도움이 될 수 있으려나……. 걱정 섞인 푸념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 뒤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우려하였던 감정은 아니었으니 그건 다행이지만, 막힌 기분이 든다는 건 요슈아 본인이 느끼던 감정에 가까웠다. 사방이 막혀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끈적한 타르들이 위에서부터 떨어져 바다에 잠식되어가듯 계속해서 쌓였다. 어느새 빠져나가려고 해도 팔다리를 질척하게 감싸왔다. 뻐끔.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물고기가 아가미로 호흡한다. 요슈아는 눈을 꾹 감았다가 조심스레 천천히 뜬 채, 이마를 오른팔로 짓누르고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얀 천장 중앙에서 조명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요슈아~ 너 뭔가 텐션 낮다?"
"에? 저, 정말? 그렇게 보여?"
"뭔가 고민 있으면 부담 없이 말하렴. 우리 네 명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공연하는 게, Devils들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잖아?"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앞으로도 다 같이 해주지 않으면 곤란한 건 내 쪽인걸!"

드럼 스틱을 내려둔 유키가 고개를 기울이며 요슈아의 당황한 대답에 웃었다. 그 옆에서 마츠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요슈아는 그제야 감추지 못한 당황을 식히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고뇌하는 듯 눈썹이 양옆에서 짓누르듯 구겨졌다. 옛날부터 쭉 함께했던 멤버의 컨디션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빠르게 파악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기겠어, 이 세 명을. 그렇게 생각하고 볼을 긁적거리며 나름 진지한 태도로 덧붙였다. 그럼 모두한테 질문 하나만 해도 되려나?
요슈아는 주어를 뺀 채 적당히 고민 중인 것을 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츠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연습은 잠시 중단된 상태였다. 한참을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소타가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익스트림 스포츠라든가! 갑작스레 나온 두 음절의 단어에 소타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몇 초 만에 유키와 마츠가 곧바로 소타의 말에 태클을 걸기 시작하자, 음표의 나열로 가득 채워지던 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운 수다 소리로 채워졌다. 그 구석에서 혼자 의자에 앉은 채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요슈아가 크게 탄성을 내뱉었다.

"될지도 몰라!"
"우, 우와! 갑자기 요슈아가 폭주했잖아! 될지도 모른다니…… 뭐가 된다는 건데?"

그 말에 요슈아가 한껏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마치 카나리아처럼 따스한 미소였다. 그러니까, 익스트림 스포츠!


4. Can you hear me?

격정적인 서바이벌 기간이 끝나고, 강화 합숙마저도 지나간 어느 날. 요슈아의 집에 제리가 데이트 삼아 찾아왔다. 요슈아가 제리의 풀어진 머리카락을 처음부터 다시 땋아주거나 가만히 침대에 누워 키득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요슈아가 마주 누운 제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부드러운 뺨이 누를 때마다 움푹 패였다. 제리는 한참 가만히 있어주다가 요슈아를 따라 똑같이 그를 건드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호수에 빗방울 한 두 방울이 떨어지듯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이 두 사람을 가만히 감싸고 있었다. 요슈아는 타이밍을 노리는 동물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심한 듯 운을 띄웠다. 저기, 제리. 이번 서바이벌도 무사히 끝났고, 너도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테니까… 이번 동계 휴일에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꿀꺽, 말을 마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퍽 잘 들렸다. 우리들…… 잠깐 LA로 돌아가지 않을래?
데이트라고 하면 서로의 집이 거의 반경 거리의 전부인 둘이었기에, 제리는 요슈아의 제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내나 유원지도 아닌 LA라니. 제리는 일전에 자신이 말했던 것을 그가 의식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네 상냥함이 너무 부드러워서, 조금씩 녹아 형체를 잃어갈 법한데도 오히려 공기를 끌어안고 점점 커진다. 그 마음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제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슈아는 대답 없는 정적에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 싫으면 물론 거절해도 돼! 그냥 둘이서 오랜만에 다녀오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가고 싶은 곳도 있고 해서! 강요같은 건 절대 안 할 테니까.
그런 말을 쭉쭉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제리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자신만 보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덧붙일 필요 없는데. 애초에 둘이서 가는 곳인데 어디든 안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살짝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던 몸을 바로 누웠다. 그런 뒤 똑바로 요슈아를 마주 본 채 웃으며 답했다. 왜 그렇게 당황해? 아하하. 당연하지, 요슈아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벌써부터 기대된다. 제리의 말에 요슈아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언제나 보여주는 그 표정이었다. 평소의 강도 높은 일정과 노력으로, 본인도 모르게 흐물거릴 때가 있는 표정에서 세상 무엇보다 기쁜 일이 생긴 듯이 바뀔 때.

"정말?! 아아, 어떡하지. 너무 기뻐……! 역시 너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

제리가 말릴 틈새도 없이 요슈아가 볼을 한껏 붉히며 그를 끌어안았다. 제리가 마주 안아줄 틈새조차 주지 않고 빈틈없이 채워졌다. 그런 와중에도 제대로 숨 쉴 공간 하나만큼은 무의식적으로 남겨두는 그 마음이 좋아서, 제리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웃었다. 응, 같이 가자. 단둘이서.


5. With Me, Ever Lasting

아니, 무리… 무리잖아, 이거. 덥썩 튀어나온 한 마디에 요슈아가 에, 하고 짧은 목소리를 냈다. 제리의 앞에는 보호용 고글을 쓴 안전요원이 간판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었다.
'The greatest thrill on earth! 13000 ft guarantee sky diving!' 스카이다이빙인 건 보기만 해도 아는데! 안내소의 천장에선 벽걸이용 모니터로 스카이다이빙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낙하산을 짊어지고 지상을 향해, 빠르게 낙하하고 있다. 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인조 날개를 펼친 새들이 예견된 추락을 위해 비상한다. 애초에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 가고 싶다는 곳이 여기였어? 요슈아는 제리의 말에 멋쩍게,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아서! 나도 한 번 해본 적 있거든, 엄청 옛날이라 다 까먹었지만. 씩씩하게 말하는 모습에 제리는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본능적인 걱정이 사각사각 뇌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본 요슈아는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제리의 귀에 속닥거렸다.

"꼭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있어. 그걸 보여주고 싶어서, 서프라이즈 겸…… 조금 제멋대로 데려와 버렸어. 미안! 나, 네가 싫어하는 짓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부담된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는 요슈아를 제리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낙하산을 짊어지고 서서히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하는 것도 얼마 안 가 고개를 홱홱 저으며 거절하려는 찰나, 요슈아의 팔이 제리의 시선에 들어왔다. 흉터가 사라지고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팔목은 전과는 달랐다. 그의 마음만큼이나 새하얀 피부가 선혈 자국 대신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네, 나…… 바보네. 너는 언제든 내 곁에 있어 줄 텐데…. 머릿속을 스치는 요슈아의 울음 섞인 말이 여름날 햇빛과 함께 녹아 들려왔다. 손목을 느리게 타고 흐르는 핏자국,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눈물과 빨강. 변하고 싶어. 아니, 변할게.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제리는 그것을 떠올렸다. 그 상냥함에는 도무지 고집을 피울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요슈아의 두 손을 맞잡았다. 대신 손은 꽉 잡고 있어 줘야 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둘은 천천히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긴 연수가 끊임없이 이어졌기에 벌써부터 둘은 조금 지쳐 있었다. 메인 패러슈트의 끈 네 개에 각각 달린 쇠고리를 가방 어깨끈에 연결하자, 찰칵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컨테이너의 가방에 달린 나머지 끈들도 전부 꽉 조인 뒤, 손목에 시계처럼 생긴 아날로그식 고도 측정기를 착용했다. 어느 정도 모양새가 갖추어지고 요슈아와 제리가 고글을 썼다. 안전요원의 말을 몇 번이고 새겨들으며, 제리가 낙하산을 펴는 연습을 몇 번 해본다. 요슈아는 대체 나에게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시간은 움직이고 마침내 둘이 비행기를 탔다. 프로펠러의 굉음이 고막을 찌르듯 강하게 울려 퍼졌다. 작은 비행기 안은 서로의 어깨가 딱 맞게 들어찰 정도로 좁았다. 고도가 서서히 올라가고 마침내 낙하지점인 고도 13,000피트에 들어서자 문 쪽에 서 있던 강사가 비행기의 문을 열어젖혔다. 소리치지 않으면 요슈아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폭음이 제리의 귓가를 때렸다. 요슈아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그저 조용히 제리의 손을 잡았다. 제리도 그의 손을 잡았다. 옆에서 강사의 외침이 순서에 따라 들려온다. Good Dive, lady and Gentleman. Ready, Set, Go.
네가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무엇인지, 그게 너무나도 궁금해서.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서 한 번 모든 생각은 잊고 뛰어보려고 해. 그리고 둘은 발을 뗀다.

 

 

6. 아드레날린 정키 젠틀맨!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서 둘은 나란히 낙하해 간다.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그저 지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예상보다도 훨씬 강렬한 풍압과 심장 소리에 온 청력이 예민해진다. 시각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약간의 변화조차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소리를 줍는 것처럼 반복한다. 바람의 포효, 이명, 기압의 변화. 질끈 감은 눈은 계속 뜨지 못한 채다. 제리, 나를 믿고, 눈을 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일순간에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양과 파랑. 눈에 비치는 풍경이 선이 되어가고 그 선들이 묶여 나간다. 몸이 느끼는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져, 곧 눈앞에 퍼지는 세계가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 중심에서 요슈아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맞잡은 손에 지금까지 보다도 더욱 다정하고 강한 힘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사이로 형언할 수 없는 푸른 빛이 아득하게 차올랐다. 손을 뻗어 낙하산을 펼치고, 천천히 부유감을 느끼며 지면으로 낙하했다. 쾌청한 햇빛이 두 사람의 착지를 축하하듯 더욱더 세게 쪼아댔다. 제리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실감이 안 나는 듯 요슈아를 올려다보았다. 땀방울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신선한 감각이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메인 패러슈트의 끈을 풀어주며 즐거웠다고 한참을 말하다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너おまえ는 내게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사람이야. 그걸 꼭 알려주고 싶었거든. 설령 네 앞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느껴지더라도, 같이 부수고 밀어내줄게. ……그 모든 일을 네가 있기에, 나는 사랑할 수 있어."

요슈아의 목소리는 남들보다는 좀 더 얇고 가늘어서 누군가는 금세라도 끊어질 것처럼 연약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제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그 아득한 풍경 자체가 아니라, 요슈아가 그렇게 말해주었기에. 그 풍경을 사랑하는 너あなた이기에 나도 그걸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야 제리는 계속 품어왔던 무언가의 의문이 풀렸다고 생각했다.

 

 

0. Stand By…… You!

똑같은 스크램블 교차로. 제리는 여전히 무더운 열기를 손부채질로 식힌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고 천천히 걸었다. 요슈아의 문자가 도착하는 알림음이 났다. 언제쯤 와? 마중 나갈게! 그의 목소리가 절로 들리는 듯했다. 제리는 교차로를 다 건넌 뒤 지금 도착했다고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의 끝자락에 익숙한 것이 닿는다. 열기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아스팔트 위를 배회한다. 제리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아지랑이. 제리는 쓰던 타자를 전부 지우고 다시 쓴 뒤 전송 버튼을 보냈다.

[잠깐만. 좀 더 걸려!]

메시지가 가고 나서 제리는 조심스레 다가가 지렁이를 살짝 집어, 흙 쪽으로 돌려보낸다. 그런 뒤 가방에서 생수병 하나를 꺼내 그 주변에 졸졸 뿌린다. 지렁이는 생기를 찾은 듯 젖은 흙과 대거리를 몇 번 하더니 그대로 파고 들어간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슬 웃고, 몸을 돌려 그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한다. 제리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