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어린왕자
장미와 어린왕자

@mochacreamsoda

유일이라는 단어에 관해 생각해 봤어

 

 

늦겨울과 초봄의 사이 쌓였던 눈이 녹으면 길가에서도 푸른 녹음이 피어오른다. 급히 달려온 것이 뻔한 낯으로 숨을 몰아쉬던 요슈아는 제리를 마주하고서야 활짝 웃었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은 고작 반이 보였는데, 그 정도로도 제리는 요슈아의 웃음을 찬란하다고 생각하였다. 산책하러 가자, 제리. 마지막 눈 구경이야. 이제 곧 봄이니까. 다소 느닷없는 말이었음에도 그의 소꿉친구는 외투를 챙겨 입고 나왔다. 마지막, 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아니. 기실 제리는 어떤 이유로든 요슈아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어 보이는 그라면 더더욱.

함께 걷는 길에는 사람이 적었다. 너랑 데이트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어느 하루 장난스레 으스대던 요슈아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는 끊임없이 제리에게 말을 걸었다. 밴드 맴버들에 관하여. 준비하고 있는 앨범에 관하여. 노래와 겨울과 봄과 세계에 관하여. 듣기 좋은 미성은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다른 온도를 가지고 근처를 유영해서, 제리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요슈아에게는 본디 다소 뜬금없는 면모가 존재했다. 천재라는 미명을 가진 이들이 늘 그렇듯, 독특하다 형언할 만한 구석이었다. 그리고 하늘 아래 요슈아의 그런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를 꼽으라면 이는 분명 제리일 것이라서. 의아함은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았다. 이 모든 발걸음이 끝난 뒤에는 얘기해줄 테니까. 왜 그렇게 급히 뛰어왔는지,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뭔지, 너의 뺨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음을 너도 알고 있는지.

왜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는지.

 

"제리."

 

자주 들르는 공원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야 요슈아는 제리를 불러세웠다. 자리에 멈추어 서는 요슈아를 따라 제리는 시선을 올린다. 어렸을 적 함부로 붙잡았던 손은 이제 와 비어 있었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애정이 깊어졌다 한들 두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다만 소꿉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그 전부를 자행할 수는 없다고……. 그런 걸,
누가,
누가 정했어?


"제리, 좋아해."

 

요슈아의 고백은 근사한 레스토랑도 멋진 명소도 아닌 두 사람에게 퍽 익숙한 공원에서 이루어졌다. 즉시 답하지 못했던 까닭이란 그가 너무나도 행복하게 미소했기 때문이다. 붙잡힌 손에서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체온이 느껴졌고 그래서, 제리는 조금 망연해졌다. 제리라고 어째서 이 손끝을 맞잡고 싶지 않았겠는가. 수를 세지 못할 밤의 상처가 아로새겨진 피부. 조금은 창백한 혈색. 그럼에도 따스한, 이, 감각…….
요슈아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 본다면, 그를 아끼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렇기에 겁을 냈다. 이 불가항력의 애정이 언젠가 그를 상처 입힐까 두려워했다. 우리는 아닐 거라고 단언할 수 없잖아. 사랑에도 끝이 있다는데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그렇다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올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직접 겪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명제들이었다. 요슈아 역시 마찬가지라고만 여겼다. 제리가 떨리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요슈아……."
"네가 뭘 걱정하는 건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몸을 허물어뜨리려던 불안은 그 나직한 음성에 잦아드는 풍랑처럼 사그라든다. 나를 잃을까 무서운 거지, 제리. 우리는 둘 다 고슴도치 같은 사람이니까. 욕심을 부리다가 상처 입고 멀어질 바에는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을 거라고……. 영영 헤어지는 것만은 싫다고.
그의 표현이 정확하다. 요슈아와 제리는 언제나 가시를 세우고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둘의 가시는 안을 향해 있었다는 점이다. 타인을 아프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습관. 통증으로부터 유리되기에는 너무도 상냥한 이들이었다.
제리는 요슈아를 올려다본다. 흔들림 없이 확고한 눈동자가 좋아서. 이런 순간조차도, 그를 아끼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괜찮아. 떠나지 않아."

"……."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소꿉친구야. 너와 내가 함께 보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언제 찾아올지 모를 이별을 걱정하느라 지금의 감정을 속이는 건, 너무 아쉽지 않아? 요슈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다. 만약 그의 말간 얼굴에 망설임이 얼룩져 있었더라면 제리는 불안을 거두지 못했을 터다. 그러나,
요슈아는 티끌만 한 그늘 하나 없이 제리를 마주했다. 제리는 요슈아를 안다. 그가 아무런 걱정도 않고 이런 말을 할 인물이 아님을 안다. 필시 끊임없는 생각을, 생각을 거듭했겠지. 수많은 가능성을 가늠하다가 그러고도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제리가 있는 곳으로.


그러니까 제리는…….
요슈아의 전력을 외면하는 법 따위 몰랐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
"더는 무서워하고만 있을 수가 없잖아."

세계 제일의 겁쟁이인 두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보다 용기 있는 이들이다. 제리가 웃었다. 요슈아와 꼭 닮은 꼴의 웃음이었다. 정반대의 서로가 가장 닮아 있는 아이러니. 그 차이와 그 공통을 사랑하였다.

 

"나도 좋아해, 요슈아……."


아주 오래도록 감춰 왔던 문장을 입에 담으면 저도 모르게 행복해진다. 괜찮겠지.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괜찮지 않은 새벽마저도 함께 걸어왔으니까. 괜찮지 못하더라도 서로가 있다면 괜찮을 수 있다. 꼭 모든 순간마다 강해야 하는 건 아닌걸. 요슈아가 제리에게, 제리가 요슈아에게 알려준 하나. 그러므로 그가 내딛은 한 발짝은 분명 무용하지 않을 터였다.
길거리에서 손을 잡는 일이 이렇게나 낯설구나. 그동안은 아무 이유도 없이 손가락을 얽은 채 걷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간지러운 기분을 구태여 외면하지 않는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차가웠던 손끝에 온기가 도는 듯했다. 두 사람의 걸음 뒤로 눈이 녹았다. 다시 한번 봄이 온다면 그에는 꽃이 피겠지.
그래, 꽃이 핀다.
지더라도 다시 피어날 꽃이다.


외롭지 않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