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웨이 하이드리머
애니웨이 하이드리머

@juststayus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한 도시에는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번화한 도시의 거리와, 도로 양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이 보였다. 한 핫도그 푸드 트럭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그 냄새가 길 양쪽 인도를 따라 늘어선 수십 개의 다른 노점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와 섞였다. 차들은 계속 경적을 쉴 새 없이 울려댔고, 혼잡한 도로는 브레이크와 액셀을 반복하며 충돌을 간신히 피해대는 이들로 가득 찼다. 높은 고층 빌딩이 번화한 거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아래에는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상점들이 눈에 띄기를 간절히 바라는 광고처럼 밝게 번쩍였다. 최신 유행 팝송이 옷가게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울려 퍼졌다. 거리에는 버스킹을 하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그 정신없는 길거리 사이, 눈에 띄는 골목 하나가 있었다. 골목 안쪽에서 팝송과 어울리지 않는 록 밴드 음악―설명하자면 길지만 너바나부터 시작해서 핑크 플로이드, 도이즈까지 쉴 새 없이 말이다―이 물 흐르듯 계속 흘러나왔다. 소리의 출처는 방음 하나는 더럽게 안 되는 셰어 하우스였다. 건물 외관은 분홍색, 파란색, 녹색의 다양한 색조의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고 곳곳에 녹이 슬어 있었다. 타일 몇 개가 없는 옥상 때문에 햇빛이 투과되어, 거실에 기다란 조명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공용 거실에는 누런색 테이블 조명과 낡은 빈티지 가구들로 가득했다. 거실 가운데에 떡하니 놓인 붉은색 천 소재 소파가 있었고, 책과 잡지가 쌓여 있는 커피 테이블 위에 오래된 레코드 플레이어가 소음의 원인 같았다. 소파에서 잠든 회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가 움찔대다가, 얼굴 위에 올려둔 잡지를 끙 소리 내며 내렸다. 잠이 덜 깨 눈을 끔뻑대는 모습에서 아직 졸음기가 보였다. 남자는 충전을 까먹은 탓에 배터리가 육 퍼센트 남은 핸드폰을 비척비척 들었다. 그중 하나 있는 음성 사서함을 틀었다.

 

[요슈아, 너 진짜로 관둘 거냐? 이거 보면 연락해라. 꼭이다]
[네가 아니고 우리의 브레챠잖아 확실히 책임지라고]

 

익숙하게 귀를 건드리는 목소리는 분명 마츠의 목소리였다. 그는 별다른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핸드폰 전원을 꺼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요슈아는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용 거실의 왼쪽에는 주방이 있고, 중앙에는 묵직한 오크 테이블이 있었다. 으음. 낮게 웅얼거리며 요슈아가 일어나 주방 냉장고 앞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비닐 랩으로 감싸 놓은 토스트와 베이컨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2인분 같은 양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비몽사몽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욕실로 향해 이를 닦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의 회색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친 푸들의 털처럼 복슬복슬했다. 요슈아는 머리를 이리저리 손으로 다듬어 보다가,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아, 나왔구나."
"응? 제리, 언제 깼… 아니, 나간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방금 깼는걸."


제리는 여전히 부스스한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보며 전자레인지에서 노릇노릇하게 데워진 토스트와 베이컨을 꺼내 오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제리의 말이 사실인지 정말로 제리는 잠옷을 입은 상태였다. 요슈아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손잡이에 걸어둔 뒤 제리의 앞에 걸어오며 말했다.

"요리가 있길래 당연히 네가 해놓고 간 줄 알았어. 아니었구나."
"아, 예약 딜리버리시켰지. 골목 앞에 브런치 가게 생겼더라……. 삼일 정도 먹어보고 괜찮으면 계속하려고."
"에, 진짜 좋잖아. 그야 우리 둘 다 바쁘고."

제리는 요슈아 것을 꺼낸 다음 자기 것까지 데운 뒤에 자리에 앉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앉을 때까지 포크를 들지 않고 있다가, 제리가 앉고 나서야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서야 손을 움직였다. 식기가 접시와 닿으며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유로운―적어도 둘은 그렇지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에―식사가 이루어졌다. 요슈아가 먼저 식사 평을 말했다. 이거 괜찮다, 좋네! 제리도 맞장구쳤다. 응, 그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별 거 없는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 요슈아가 베이컨 한 입을 찍은 포크를 입에 넣으며 아침 날씨를 말하듯 태연하게 말했다.

"있지, 오늘 새 프로듀서가 소속사로 온대."
"……아. 그렇구나."
"음악은 못 하겠지만…… 클라이맥스와는 계약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응. 밴드는 그만두더라도 당분간 다른 활동은 해야 할 것 같네. 라디오라든가, 그런 것들."

제리는 그의 입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말을 실제로 듣자 기분이 묘했다. 바뀌는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토스트 한 조각을 작게 베어 물며 고개를 숙였다. 미소는 나오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결정된 사안은 아니었다. 아니, 맞던가? 제리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킬 수 없어 그저 흐트러진 채로 사고하기 바빴다. 요슈아는 일전의 사건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일을 반복했다. 식은땀과 붉은 방울을 토해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그는 제리가 싫다면 음악을 관두겠다 선언했지만, 제리는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저 그를 안아 어떻게든 잡을 수밖에 없었다. 천재. 그 수식어는 요슈아의 껍질을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의 내면을 더욱 약하고 뭉그러지게 했다. 그가 서서히 나약해져 갈 동안 제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옆에 머물러 주는 게 전부였다. 요슈아는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실제로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겨울 새벽에 일은 닥쳤다.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처럼 고요하고 별일 없이 흘러가던 하루였다. 제리는 여느 때와 같이 들뜬 요슈아의 목소리와 따뜻한 손의 온기를 느꼈다. 시부야역의 혼잡한 거리는 요슈아의 불안을 충분히 숨겨주었던 걸까. 이제 와 제리가 생각해 본들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의 집에서 나올 때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리는 오 분 정도 걷다가 다시 뒤로 돌아 골목길을 해쳐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무거운 발걸음이 낯설었다. 현관으로부터 열 걸음 안팎의 거리를 남겨 두었을 순간, 그는 문에 달린 손잡이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손대서는 안 될 뜨거운 납덩이처럼. 그는 추를 단 듯이 묵직한 구두 굽을 애써 땅바닥에서 떼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손잡이에 스페어 키를 꽂아 넣고 돌렸다. 천천히, 천천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언젠가 한 번 목도하였던 날카로운 파편들과 그가 평소 부르는 음보다도 좀 더 얇고 약한 신음.

제리가 현관 복도를 소리 없이 걸었다. 의도치 않은 고요한 방문은 요슈아의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찰나에 끝났다. 제리는 가늘게 베어진 손목의 상처에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졌다. 본능은 의식적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요슈아가 고통에 찌푸리던 미간의 힘을 단숨에 풀고 제리를 보았다. 서서히 새파래지는 안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웠다. 거꾸로 뒤집힌 노트북과, 엎어진 채로 바닥을 기어가며 천천히 덮는 커피. 요슈아가 무어라고 설명하려는 찰나 제리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방향에 마음을 맡기기로 했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그 방향에. 못의 울퉁불퉁한 단면이 단단한 나무를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한 번 깨어지면 모든 게 쉬웠다. 제리는 달싹거리는 입으로 내뱉었다.

 

"네가 이렇게 아프다면, 음악…… 그만두면 안 돼?"

 

연인의 기대를 배신한 것은 누구였는지 알 턱이 없었다. 제리도, 요슈아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이것이 최선이리라 당시에 생각하였다.

 

일은 생각 이외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요슈아는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에게 죄책감과 책임이 섞인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열 줄 이내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통보로 마무리 지었다. 판다 사장에게는 계약 상의 문제도 있으니 직접 찾아가야 했다. 사장실 안에서는 두꺼운 담배를 커다란 손에 쥐고 있는 판다가 요슈아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이건 계약 위반이다냐. 따로 대책은 생각해 둔 거냐? 홍보는 무뚝뚝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판다 사장은 수익만 내면 되는 거지? 그러면 방송 활동 같은 건 전부 참여할게. 공연은, 이번 활동에서 필참 공연은 전부 진행했으니까. 지장 없잖아."

 

홍보와 판다는 서로를 힐끗거렸다. 요슈아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다는 불이 붙은 담배 끝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 그와 몇 마디 말을 오갔다. 독대 면담 내내 요슈아는 눈가 아래 짙게 깔린 다크서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클라이맥스 레코드에 소속한 밴드에서 자진해 밴드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다들 음악을 집착적으로 사랑하니까. 그것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니까…….
요슈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마른 입술에 한숨을 묻혔다. 후회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숨소리였다. 복도 맞은편에서 투덜대며 걸어오던 츠유가 요슈아를 발견하고 반쯤 감긴 눈을 크게 떴다. 요슈아를 향해 오른손을 흔든 그를 본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오는 츠유를 향해 애써 들뜬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

 

"……유 군, 안녕! 어디 가?"
"아~ 판다가 불러서 잠깐 면담. 근데 요슈아, 안색 최악 아냐? 잠 못 잤어?"
"그… 런가? 조금 설쳤나 봐."
"분명 그렇다니까. 조심해. 우린 목이 생명이니까, 건강 관리는 필수라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츠유는 급하게 지나쳐 가는 요슈아를 보며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종종 안색이 안 좋을 때는 있었는데……. 오늘은 진짜 상태 엉망이네. 짧은 의문도 잠시 사장실에서 판다와 홍보가 다투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이크' 소리를 내며 서둘러 복도를 뛰어갔다. 복도의 코너 저편에서는 요슈아가 벽을 짚은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필시 이게 맞는 거라고 몇 번이나 새로이 다짐하며.

 

 

도피하듯이 떠나온―어쩌면 돌아온―미국에 둘은 아예 자리 잡았다. 음악과 관련된 물품은 기타 한 개를 빼고 전부 두고 왔다. 제리는 비행기 좌석에 등을 붙이고 앉아 창밖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요슈아에게 음악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충동적으로 내뱉었을 때 보았던 그의 표정이 제리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제리가 반투명한 창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직면할 용기가 있다면 진즉 요슈아를 향해 전부 충동이었노라 말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제리가 그 문을 두드리기에는 여전히도 겁이 났다. 먼지를 닦아내도 쌓이는 창고 구석의 골동품을 언젠가부터 손대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꺼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처럼. 요슈아가 제리를 마주 보았을 때 미소 짓지 않을 일말의 가능성에 관하여 생각하다가 제리는 의자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안으로 말려 들어간 어깨가 욱신거렸다. 요슈아는 천천히 맺혀가는 한 줌의 불안감이 더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빠르게 구한 셰어 하우스를 정돈하여 이삿짐을 전부 넣어놓자 둘이 살기에는 어느 한 명이 부족한 것처럼 텅 비었고, 셋이 살기에는 둘만의 물건이나 향기가 가득했다. 결국 둘은 조금 비싼 집값을 그대로 부담하기로 했다. 요슈아가 브레이브 차일드 멤버와 만날 일은 아예 없었다. 어느 날은 연락이 오거나 음성 사서함이 남겨져 있었지만, 요슈아는 자신의 상처투성이 손목을 덮었던 것마냥 핸드폰도 뒤집어서 덮어두었다. 제리는 아래를 향한 화면에 그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을 피했다. 두 명의 도피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밤. 새벽에 나온 제리는 부엌으로 향해 물을 따랐다. 미적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그는 한 손으로 머그잔 손잡이를 붙잡은 채 거실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풍경이라고 누군들 생각하 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세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그 한기에 짧게 한숨 쉬고서 구석에 놓은 기타 케이스를 곁눈질로 보았다.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케이스 앞에 섰다. 케이스에는 여러 모양의 방수 스티커와 기스 난 흔적이 눈에 띄었다. J 알파벳 스티커 두 개가 딱 달라 붙어 있어 제리가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자기가 웃은 게 놀라운 나머지 입을 가렸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더니 머그잔을 내려놓고 케이스 지퍼를 조용하게 당겼다. 검은 케이스 안에는 요슈아가 제리와 함께 보낸 어린시절부터 쓰던 어쿠스틱 기타가 있었다. 요슈아는 제리가 묻지 않았는데도 마치 해명하듯 이유를 천자락 덧대듯 먼저 말했다. 이건…… 너와의 추억이 더 깊은 물건이니까.
제리는 낡아서 상하기 직전인 기타 줄과 나뭇결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파 앞 테이블로 걸어가 스탠드를 켰다. 어두컴컴한 거실을 독차지한 제리의 숨결이 부드럽게 새벽 공기를 타고 흘렀다. 노란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 볼펜을 들어서 장 볼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꾹꾹 눌러쓰는 손에는 힘이 담겼다. 요슈아가 그 목록을 보게 되는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요슈아는 예약 딜리버리에 맞춰 배달 된 브런치를 먹고, '플레처'라는 새 프로듀서의 오더에 따라 몇몇 방송 스케쥴을 나가고, 다시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제리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늘었다. 더 이상 밴드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요슈아의 발걸음이 들리자 제리는 급하게 케이스 앞에서 물러나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더 일찍 온 것 같아. 제리의 말에 요슈아가 등 뒤에 마련한 작은 꽃다발을 건넸다. 시야를 뒤덮는 하얀 장미의 행렬과, 그에 뒤따르는 짙은 꽃향기.

"이게 뭐야?"
"요즘 직장에서 고생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위로할 수 없으려나~ 싶었거든. 기뻐?"
"당연히 기쁘지! 고마워…… 바쁠 텐데."

제리가 자연스레 살구색으로 물드는 볼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요슈아는 언제나 갑작스러운 선물이나 이벤트를 좋아했다. 제리가 예상치 못한 채로 눈썹을 위로 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과 힘이 느슨하게 빠진 푸슬거리는 웃음소리가 좋았다. 요슈아는 제리가 꽃다발을 품에 가득 안아 든 모습을 보다가 두 팔을 벌렸다. 제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응?"
"착한 남자친구를 안아줄 기회 줄게."
"기회 포기하면 어떻게 돼?"
"그러면…… 착한 남자친구가 슬퍼하겠지."

제리는 웃으면서 꽃다발을 한 팔로 든 채, 그 상태로 요슈아를 끌어안았다. 그가 지금 옆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빠른 심장 고동이 꽃다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렸다. 요슈아는 팔을 좀 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제리의 머리카락이 요슈아의 목덜미에 문대어졌다. 좋아? 응, 좋아. 요슈아의 짤막한 물음에 제리 또한 한 단어로 답했다. 불안을 애정으로 숨겨 덮은 온기가 유난스럽게 뜨거웠다. 요슈아는 작은 허밍조차도 하지 않았다. 꽃다발의 장미가 두 사람의 품 안에서 조금씩 형태를 뭉그러트렸다. 꽃잎 수십 장이 겹쳐져 만들어진 장미조차도 쉽게 형태를 잃어가는데 사람은 심장 한 개를 가지고 어떻게 이리도 올곧은 척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요슈아는 왼손 약지에 자리한 은빛 반지에, 빠진 타일의 자리에서 설탕 가루처럼 내려와 쪼아대는 빛결을 제리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노래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에 안심했고, 실망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요슈아의 목소리 끝이 피아노 건반을 약하게 누르듯 미세하게 떨렸다. 제리는 자기 등을 누르는 손결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휩쓸렸다. 하지만, 또 한 번 충동이 너를 상처받게 하면 어떡하지. 건넬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피를 대본 적도 없는 입술 끝에서 철 맛이 났다. 새하얀 와이셔츠가 구겨졌다.

 


"요슈아. 혹시 놀러 나가지 않을래?"
"엇, 응? 진짜?"
"오늘은 스케쥴 없다고 해서. 바쁘면 괜찮아."
"아냐! 안 바빠! 진짜로 하나도 안 바쁘……!"

 

방문을 두드린 뒤 반쯤 열어 고개를 빼꼼 내민 제리에게 요슈아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잡지를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발목과 목선이 훤히 드러나는 편한 복장이었다. 방문을 다시 닫으려는 제리를 붙잡기 위해 벌떡 일어나 손잡이를 움켜쥐려던 그는 발을 헛디디고는 얼마 되지 않는 방문과 침대 사이를 앞뒤로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문 끝에 발을 찧었다. 아…… 아야…. 요슈아가 관성적으로 침대에 다시 앉아 발을 감쌌다. 제리는 요슈아를 닮은 이불 위로 다이빙하듯 앉은 그를 보며 웃었다. 요슈아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거 진짜 아프다구."
"알아, 알아. 귀여워서 그랬어."


제리는 아예 방문을 열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요슈아는 자연스럽게 침대 중앙에 붙어 있는 제 몸을 왼편으로 조금 옮겼다. 제리는 넉넉하게 자리가 남은 오른쪽에 앉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에 우리 본격적인 데이트는 많이 못 한 것 같아서. 같이 보내는 시간은 늘었는데, 그렇지. 요슈아는 이불 위에 얹은 제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손마디 사이를 파고들어, 위로 깍지 끼었다. 회색 홍채에 살결의 색깔이 겹쳐서 오묘한 색상이 담긴 채로 변했다. 제리는 그의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그렇네……. 우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첫 데이트도 아니고."
"요슈아, 무리하는 거 아니지?"
"무슨! 그럴 리가. 애초에 너랑 함께 있는 건데 무리일 리가 없잖아."

음악을 그만두었다고 한들 요슈아는 대부분 여전했다. 활기찬 목소리로 이런저런 것을 내뱉으며 손등을 문지르던 요슈아는 이내 일어났다.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나갈까, 데이트하러. 제리는 아직 땋지 않은 머리카락이 앞을 간지럽히는 듯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일어섰다. 그래. 두 사람은 조금씩 맞지 않는 미묘한 기류를 조금씩 좁혀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요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면서 바지 주머니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플레처로부터의 전화였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요슈아가 전화를 받았다. 받지 않고 싶었지만.
허무맹랑한 말과 함께 어쨌든 긴급한 스케쥴이니 빨리 오라는 소리가 쾅쾅 귓가를 때렸다. 요슈아는 어떻게든 그것을 캔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등 뒤에서 제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핸드폰을 든 손을 허리 아래로 내리며 등을 돌렸다. 제리가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채로 서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머리를 홱홱 저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무어라 뻐끔거리며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가 봐. 둘만이 있을 때 사용하는 일본어 발음은 선명하게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로맨스 소설의 도입부는 아니었다.

 

플레처의 부름에 요슈아는 라디오 녹음 현장에 들어섰다. 아직 온 에어 버튼이 켜지기 전이었다. 겉옷을 챙겨 입던 그는 다행스럽게도―새 프로듀서이자 어린 예술가를 무시하는 남자의 기준서―얼마 걸리지 않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플레처는 요슈아를 보자마자 거만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지 않고 손가락을 계속 두드렸다. 요슈아는 촬영장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따끔거리는 손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플레처는 그의 상태를 위아래로 훑고서는, 쯧쯧대며 혀를 찼다. 그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남자의 지시에 따라 녹음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스탠바이가 몇십 초 뒤에 이루어지고, 요슈아는 급히 통지받은 탓에 외우지 못한 오프닝 멘트를 적당히 따라 했다. 라디오 MC는 요슈아를 소개하며 한없이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방긋거렸다.
MC의 진행은 물 흐르듯 진행되어 갑자기 찾아온 요슈아도 무리 없이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요슈아는 라디오에 들어온 사연을 읽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역할이면 끝이었다. 아까부터 그의 속이 좋지 않았다. 사연은 다양했다.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신청한 부드러운 발라드, 길 가다가 도둑을 만났는데 가까스로 도움을 받아 그 행인을 꼭 찾고 싶다는 이가 신청한 댄스곡, 그런 사소하고도 동시에 큰 사연들을 요슈아가 흔들림 없이 읽었다. 그러다 한 사연 카드를 건네받은 순간 그가 멈췄다. 한 뮤지션의 사연이었다. MC가 요슈아 씨, 라고 세 번쯤 부르고 나서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아, 응, 응……. 사연 읽을게. 20살 C 씨의 사연입니다.
요슈아의 낯빛은 사연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어두워져 갔다. 흔한 뮤지션의 고난이었다. 너무나도 음악을 하고 싶지만, 재능이 없어 주변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언제나 음악을 향해 가 있다. 그러한 젊은 예술가들이 할 법한 보편적인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요슈아가 사연을 읽는 사이사이마다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따금 자신과 비슷한 문장이 나오고는 하면, 비어 있는 왼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눌렀다. 상처로 가는 습관적인 도피가 잦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끊어 내며 겨우 사연을 끝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신청 곡을 보자마자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MC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청 곡에는 브레이브 차일드의 곡명이 쓰여 있었다. 게스트가 출연한 때에 그 게스트의 노래가 있는 사연을 꼽는 건, 지극히도 당연하고 잦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C라고 칭해진 누군가에게서부터 책망받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떠올리고 써내렸을 곡 제목이었다. 그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은 힘겹게 내뱉어진 제리의 목소리였다. 그는 제리가 줄 이어폰을 꽂고 MPC 플레이어에 그의 노래를 담아 듣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 좋다며, 왜 좋은지, 가사는 또 어떤지 하나하나 상냥하게 읊조리며 말해주던 때였다.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간지럽히면 제리는 요슈아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한 소절을 불러달라 청했다. 그러면 요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목을 가다듬고 한 소절씩 불러나가기 시작했다. 상냥하게 허공을 두드리는 음계는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꽃봉오리처럼 피어났다. 제리는 요슈아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색깔의 꽃을 사랑했다. 요슈아는 제리가 포기한 꽃내음과, 자기가 놓은 꽃잎의 모양을 느지막이 기억해 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추억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일은 아니었다.
MC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그가 녹음실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플레처를 포함해 조정실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시선이 요슈아에게로 향했다. 그가 각종 회전 다이얼과 믹싱 콘솔 쪽을 눈으로 훑더니, 녹음실 안으로 송출되는 마이크 버튼을 OFF로 바꾸었다. 플레처가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이제 그만 둘 거야."
"뭘 그만둬?"
"날…… 속이는 거."

 

요슈아는 옷깃 맨 위까지 전부 잠가둔 단추 한두 개를 풀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음악을 관둔 요슈아라니, 계속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속으로 단언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다시 마음을 바로잡은 것만으로 요란하게 가슴이 뛰면 안 되었다. 플레처는 그가 어떤 연유에서 이렇게 심경을 바꾸었는지 대충 짐작했다. 그는 수익을 창출하는 엔터테이너에게 어떤 야심이나 자아를 바라는 성정이 아니었다. 플레처는 한숨 쉬며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며, 다시 녹음실 안으로 들어가라 명했다. 하지만 요슈아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이였다. 제 선택이 틀릴까 두려움을 동반한 고양감에 떨었으며,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 더욱 쉽고 가슴이 뛰었다. 요슈아의 모든 세포가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붉게 물든 손등뼈와 귓불이 익어갔다. 스튜디오 녹음실 안쪽 MC는 이제 참견하기도 지친 듯 요슈아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밴드 한 번에 실패, 두 번에는 포기, 세 번에는 뭐지. 그런 타이틀을 얻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건 지금 눈을 감고 MC의 옆에 앉아 신청 곡을 틀어달라 말하면 언젠가 보게 될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그것만큼은 정말로 싫었다. 요슈아는 꿈쩍도 하지 않는 늙은 프로듀서에게 그는 무력감을 느끼는 대신 떨리지만 단언하듯 말했다.

 

"역시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돼."

 

요슈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양손으로 이마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를 감싼 그는 한 번 길게 마른세수하고서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창문 바깥에서 들리는 달고 쓰던 소음들이 전부 요슈아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창문과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슈아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렇게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불안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그의 구두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도 몸 안의 모든 것이 움직이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부조리할수록 빛나는 불빛은 매섭게 그를 비추었다. 플레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침음을 냈다. 플레처는 품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길고 가는 궐련 끝에 붙은 불꽃이 반딧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플레처는 필터를 입에 머금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담배를 입술 사이에서 꺼낸 뒤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래서…… 도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요슈아는 플레처의 질문에 걸음을 주춤거렸다가, 이내 확신이 담긴 어투로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음악을 할 거야."

 

플레처는 프로듀싱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댔다. 라디오 MC가 엉성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계속 진행하냐는 물음을 제스쳐로 보냈다. 플레처는 구두로 바닥을 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스튜디오 녹음실에 전달되는 마이크 버튼이 다시 한번 OFF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요슈아를 향해 말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투였다.

 

"넌 지금 네가 얼마나 애처럼 구는지 몰라……. 너 같은 놈들을 내가 잘 알지. 지금 당장은 시시한 감정에 휘둘리다가, 나중에 와서 다시 받아달라고 할걸."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요슈아는 한순간에 정점을 찍은 감정을 다스렸다. 짧은 남자의 말을 몇 번 되새겼다. 화만 내서는 언제까지고 그대로였다. 하고 싶은 말들을 가다듬어 정제된 언어로 내뱉었다. 그 시시한 감정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거야. 그러니까 바뀌는 건 없어. 요슈아는 그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돌아서 왔는지 생각했다. 주변에서 그를 칭하던 수많은 호칭이나, 유명세에 휩쓸려 본인이 정말 특별하다고 자부했다. 기다란 실로 만들어진 원형의 길을 계속 돌며 답을 찾았다. 애초부터 길은 그의 옆에 바로 나 있었는데. 붉어진 눈가를 마구 비빈 뒤, 플레처의 대답을 듣지 않고 요슈아가 먼저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 조용해진 스튜디오는 애써 끌어 올린 분주함마저도 사라진 상태였다.

 

요슈아는 셰어 하우스에 급하게 들렸다. 빗방울이 세게 그를 때렸다. 점점 빗발이 거세져 추위가 초겨울에 비슷해질 정도였다. 벅차오르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건가. 담벼락 너머 고양이 우는 소리부터 시작해 어린아이의 떼 쓰는 소리, 풀잎들이 바르작거리는 소리, 물웅덩이를 밟는 단촐한 신사의 첨벙이는 발소리, 모든 게 요슈아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스튜디오의 볼륨 버튼을 최대치로 올린 듯한 감각이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요슈아는 젖은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떨리는 손이 계속 헛손질하며 열쇠 구멍에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딱 맞게 들어갔다.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풍경이 반겼다. 똑같은 집안의 풍경인데도 불구하고 이전부터 계속 오묘하게 느껴지던 한기가 사라진 것마냥 온화했다. 마룻바닥을 신발로 밟아서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 케이스를 집어 등에 메었다. 그리운 묵직함이었다. 노래를 부른지는 반년이 넘었고, 기타를 친 지는……. 요슈아의 기억으로는 가늠이 가지 않는 세월이었다. 이따금 소타와 반주 리듬을 맞추기 위해 꺼내 와 합주해 본 것 빼고는.


"나도 참…… 하하…. 바보 같다니까, 진짜…"


스스로도 영 황당한 사고 흐름에 요슈아의 입에서 바람 빠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플레처의 말대로 돌아서서 스튜디오로 가 아무 일도 없던 척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해서,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는 일을 해도 되었다. 혹은 다른 방송에 나와서 브레이브 차일드 시절 있었던 유쾌한 일화를 풀어내며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시즌의 계약 기간을 두루뭉술하게 채울 수도 있었다.
그날을 떠올렸다. 현관 복도 가장자리를 돌아서서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며 체념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던 제리의 목소리를.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해놓고서 피하려는 자신이 나약하고 한심해서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헛웃음 끝에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요슈아가 기타 케이스의 줄을 꽉 잡고, 빗발치는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쏟아지는 빗방울로 인해 한참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요슈아가 셰어 하우스로 들어서기 이전 단 몇 분의 차이였다. 그런데 이미 충분히 거리는 일사불란한 수준의 차이가 눈으로 보기에도 훤히 났다. 무채색의 우산들이 부딪치며 흑백 콜라주를 이루는 듯했다. 피곤함에 찌든 다크서클을 주체 삼아 움직이는 이들의 발걸음은 지나가는 순간만 모아 담아도 긴 나날을 그렸다. 요슈아는 숨을 헐떡이며 거리 중앙으로 향하며 인파 사이를 헤쳤다. 낡은 부츠가 길바닥의 물웅덩이 사이로 튀어나오고, 얇은 자켓 하나만을 간신히 걸친 와이셔츠가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낡은 페도라 모자로 눈을 가려 보이는 풍경은 오로지 한산하게 옹기종기 낀 채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다리뿐이었다. 쇼핑 거리의 끝에서 보이는 포장도로에선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 사이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젖은 포장도로에 눈부시게 밝게 반사되어 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매서운 칼날에 스치는 것처럼 힘겨웠다.
매연에 목이 타들어 가는 듯이 따끔거렸다. 모자의 챙 아래로 머리카락을 집어넣은 후 시야를 어지럽히는 물방울만 간신히 닦아냈다. 그럴 때면 잠깐 멈춘 요슈아는 네온 불빛으로 빛나는 간판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행인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가 멈춰선 탓에 뒤에서 걷던 누군가가 기타 케이스 윗동에 부딪혔다. What the…. 요슈아는 뒤에서 욕설을 읊조리는 이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움직여 지나갔다. 저 너머의 도로 신호등이 붉은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는 순간, 마침내 요슈아는 발을 거리 중앙에 붙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하늘은 도저히 맑아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굽 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기타 케이스를 두드리는 빗방울이 그를 재촉하는 듯했다. 그는 젖은 콘크리트 냄새를 마시며 호흡을 정돈했다.
어릴 적에는 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때라 해 보았자 제리와 함께 했던 짧은 시절이었다. 이따금 서로가 사는 도시에 놀러 가면 귀신같이 하늘은 어둠을 그리며 비를 쏟아냈다. 요슈아는 제리에게 우비를 입히고, 밖으로 꼭 나갔다. 반투명한 우비는 아래 입은 옷의 실루엣을 대부분 그대로 보여줬다. 둘이 사는 세상은 현실이었기에 로맨틱한 배경 음악이나, 갑자기 몇십 명이 도로로 달려들어 플래시몹 댄스를 선보이는 일은 없었다. 즐거운 일도 딱히 없었다. 그래도 어깨를 감싸는 차갑고 한기 서린 일정한 감촉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레어서 발을 맞추고 놀았다. 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옛날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필시 과거가 노스텔지어로 덧씌워져 아름답게 보이기만 하는 탓은 아니었다.
요슈아는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를 두리번거리고, 거리 중앙에 정해진 간격으로 배치된 나무와 그 아래 벤치를 쳐다보았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벤치에 우비를 입은 채 잠시 시간을 죽이는 이들에게 요슈아는 관심 외의 인물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탓에, 더더욱. 그는 잠시 떨리는 손마디를 느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차가운 호흡, 귀에 전해져 오는 고동 소리.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에 빗방울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한가득 맺혔다. 노래를 부르지 않은지도 반 년이 넘게 지났다.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사방에 노이즈가 껴 시야가 흐려지려는 순간, 요슈아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아 과거를 더듬었다. 그의 지나온 나날 속 존재했던 제리의 모든 흔적을. 그러자 잠시나마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호흡이 마침내 진정됐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길가에 내려놓고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꺼내자 그의 눈동자가 수축하였다가 돌아왔다. 음악을 그만두기로 한 뒤에, 요슈아는 일부러 기를 쓰고 기타를 쳐다보지 않았다. 기타리스트는 따로 있었지만, 음악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인다면 다시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먼지가 쌓여 있어야 할 기타였다. 결심한 이후로는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으니까.
마모된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기타는 그 확신을 배신했다. 기타 표면 나뭇결의 부드러운 촉감이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은 것 같았다. 현은 반짝이는 금속 프렛 위에 단단히 조여진 새 제품이었다. 요슈아의 마스크 안에서 땀과 흘러 들어간 빗방울이 섞였다. 그는 그것을 손질할 수 있는 유일한 이를 생각해냈다.

 

"너는 항상 날 봐주고 있었구나."

 

요슈아가 마른 웃음과 함께 자조했다. 목소리가 흐렸다. 정작 당사자는 듣지 못할 혼잣말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흔들리던 한 점의 망설임까지도 전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타를 메고, 심호흡한 뒤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건 전부 너를 위한 거겠지.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에서 몸을 일으켜 화음을 빠르게 조율한 뒤 마스크를 벗고 목을 가다듬었다. 쓰고 있던 모자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양에 가까운 회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 어린아이처럼 순정을 잃지 않은 눈동자. 그를 구성하는 모든 상냥한 순수함의 증명. 아주 일부만이 그를 눈치채고 소곤댔지만, 그 광경은 요슈아의 신경 밖이었다. 그는 터질 듯이 요란한 심장을 입 밖으로 꺼내야만 했다.

 

작고 재잘대는 듯한 목소리가 가사를 읊조리듯이 노래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에서 진동하는 줄 하나하나를 다시 한번 느꼈다. 선이 얇으면서도 강한 음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 한두 명이 그를 주목했다. 몇몇 걸음걸이가 슬로우 모션을 걸듯 느려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에 줄을 튕기는 손가락은 계속 미끄러지고, 오랫동안 손대지 않아 녹슨 동작에 연주는 엉성했다. 거리를 울리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예전을 그리워하는 입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음이 거칠고 생생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지. 제리. 입과 손이 저절로 움직여.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짓에 따라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가, 뒤로 젖혀졌다. 빗방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튕겨 나왔다. 높게 찌르는 음과 함께 요슈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사람들의 위에서 끊임없이 내리던 비가 한두 줄기씩 주춤댔다. 이것이 드라마라면 분명 최종화. 이것이 영화라면 분명 클라이 맥스. 이것이 노래라면 마지막의 브릿지 부분……. 우스운 비유를 머릿속에 품은 요슈아의 머리 위로 회색빛 세상에 균열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 조금 전까지 햇빛을 가렸던 뭉게구름과 그림자 사이로 태양이 소심하게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었다. 푸른 조각이 퍼즐을 맞추듯 재배열되어가고, 회색빛으로 생기를 잃었던 거리 위로 조금씩 햇살이 내리쬐며 따스한 빛깔로 물들었다. 무거운 커튼 뒤의 세룰리안을 드러내는 것처럼 푸른 결점들이 줄무늬를 이루었다. 이슬비는 부드러운 안개처럼 옅어지다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완전히 증발하여 도시 전체를 비추었다. 마침내 거리를 가득 덮던 어둠이 물러나자 눈을 질끈 감은 채 필사적으로 음을 내뱉던 요슈아도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아주 짧은 순간 숨을 멈췄다.

활기찬 옷차림이나 페인트 얼룩이 묻은 너덜너덜한 셔츠를 입고, 누군가는 직장으로 달려가면서도 그를 향해 계속 힐끗거리고, 일부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는 커피를 든 채 그를 가리키고 수다를 떨었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부터, 누군가는 핸드폰을 꺼내 요슈아를 피사체 삼아 영상을 찍고 있었다. 전부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순간이었다. 낯선 이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누군가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그 순간. 입이 벌어지면서 구름을 삼킨 듯 가슴이 둥글게 팽창하는 듯했다. 주춤대던 목소리는 턱이 사방이 기울어질 때마다 서서히 웃음기를 머금었다. 새벽 한 시에 오선보의 음표를 찢어내던 순간 밀려오던 파도를 기억했다. 입술을 깨물면 나오던 피의 철 맛을 기억했다. 사랑하는 것을 깨워 쫓아내던 때를 기억했다. 제리가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듯 더욱 그을음을 떠올렸다. 아팠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빛난다는 걸.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석양을 기다리며 서서히 주황빛을 끌고 오는 태양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크게 기타 줄을 튕기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단숨에 내뱉어 끝을 맺었다. 거리를 뚫는 높은음이 갈무리되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벅찬 심장을 진정시키려 호흡했다. 몇 초 동안 거리가 조용했다. 그러다 박수 세례가 나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느끼자마자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요슈아는 이제야 그 쓰라리고 상처 깊었던 기억을 입 맞추어 떠나보내게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제리는 파토 난 약속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들어온 업무 처리 요청에 한숨을 쉬며 자책 섞인 미련을 한창 곱씹었다. 차라리 일하는 편이 좋았다. 바쁘면 괜한 생각에 깊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두세 시간 정도 일한 뒤에 보고를 마친 그는 집 앞 현관에 서서 스페어 키를 꺼냈다. 예기치 못하게 쏟아진 비 탓에 제리는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다. 집에 들어가면 곧장 욕실로 향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실 불이 전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제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불쑥 확인했다. 요슈아가 참여한 라디오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먼 시각이었다. 그는 설마 싶은 마음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거의 똑같이 축축하게 젖은 요슈아가 그의 방문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제리의 인영을 보고 나아가는 걸 멈췄다.


"제리."
"요, 요슈아? 무슨 일이야?"
"…저기, 들어 봐. 꼭 들어줘야 해."

 

그는 요슈아의 필사적인 말에 고개를 어렵사리 끄덕이며 긍정했다. 젖은 몸체가 거슬렸지만, 그것보다도 몸도 약한 그가 쫄딱 젖은 모습이 신경 쓰였다. 그는 제리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남겨 두고 정지했다. 창밖에는 이십 분 전 그친―멀고 먼 제리의 근무처는 야속하게도 편도로 사십 분 정도 걸렸다―비로 인해 밝은 햇빛을 드러냈다. 제리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에 이별을 고할 수 있는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요슈아는 전혀 제리가 생각지도 못한 문장으로 운을 띄웠다.

 

"다시는 음악 안 한다고, 너와 약속했던 거 있잖아."

 

요슈아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고민하는 듯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뻐끔, 입이 한번 작게 열렸다가 다물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천천히 창문 너머로 먼 곳을 바라보듯 움직였다. 그 눈매가 무언가 그리운 풍경을 가늠하는 것처럼 가로로 길게 가늘어졌다. 입술의 틈새가 벌어졌다. 그리고 쓰게 웃는 미소를 제리에게 건넸다.

 

"―미안해. 거짓말이 되어버렸어."

 

제리는 그의 얼굴에 잠시 어두컴컴한 후회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기타 케이스의 줄을 질끈 쥐는 요슈아의 손등에 핏줄이 강하게 드러났다. 한쪽 입꼬리만을 엉성하게 올려 만든 미소는 한없이 무너질 것처럼 가파르고 조급했다. 거짓은 아니었지만, 태연함 또한 없었다. 빗방울에 젖은 눈꺼풀이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진한 검은색을 띤 채 깜빡거리며 떨었다. 흠뻑 물든 와이셔츠 아래가 초라하게 맨살을 내비쳤다.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마음을. 이 고동을. 이 감정을. 요슈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심정을 제리에게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소녀의 뭉그러진 심장 모양처럼. 호밀밭을 헤매는 순수의 끝처럼. 그 비 오는 거리에서 반년도 넘는 시간 만에 입을 열어 노래한 순간, 젖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관성을 따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제리가 먼저 말문을 텄다.

 

"요슈아?"

 

침을 삼켰다. 본능을 삼켰다. 마음을 삼켰다. 고개를 든 요슈아가 호소하듯 와이셔츠의 가슴께 부분을 꽉 잡고 무너질 것처럼 토해냈다. 한 줌의 작고 낮은음이 아주 느리게 재생되었다. 제리는 그 음을 듣기 위해 앞으로 발걸음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리며 움직였다.

 

"이러고 싶지 않았어. 정말로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런데도 노래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알아, 내가 바보 같다는걸."

 

제리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그는 부드러운 연인의 손짓에 뺨을 기대었다. 차갑고 축축한 뺨은 지나치게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요슈아의 은빛 눈동자에 새겨진 상흔이 반짝거리며, 그에서부터 작게 여위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여윔이 그를 감쌌다. 제리는 음표가 뾰족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요슈아의 살은 무척 여려서 그것을 끌어안았을 때 한없이 상처 입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요슈아가 안고자 하는 건 언제나 오선보에 찍히는 검은 잉크 자국들이었다. 접촉의 순간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요슈아의 붉은 눈가를 제리가 쳐다보았다.
제리와 시선이 부닥치는 찰나에 요슈아가 그의 손목을 두 손 사이로 밀어 넣고, 약한 힘을 주었다. 차가운 셔츠 소매가 제리의 손목에 닿아 마구 비벼졌다. 제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를 둥근 눈으로 응시했다. 요슈아와 제리는 서로를 한순간도 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증오나 경멸만이 사람을 해치고 찢는 감정은 아니었다. 가끔 누군가의 다정함은 슬픔과 공존하였다. 요슈아의 말에 이번엔 제리가 할 말을 찾는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그의 앞에서만 서면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헤매는 미아가 되는 기분이었다. 망설임을 감싸 한 문장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넌 늘 아파하잖아…."
"네 탓이라고 생각해? 이번에도?"
"아니야. 알아. 전부 다."
"플레처가 그랬어. 내가 지금 시시한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고."

 

요슈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복부가 팽창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하늘을 가린 먹구름 때문에 멎지 않는 습기를 입안으로 강하게 집어넣는 듯한 동작이었다. 플레처를 입에 올리는 잠깐의 억양이 거세졌다. 제리는 그 프로듀서가 설마 거기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놀란 탓에 손목 근처의 혈관에 긴장이 도사려,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요슈아는 눈치를 챈 채로 힘을 느슨하게 하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내가 정말로 혐오스러운 건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였어. 어떤 마음으로 네가 내게 음악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한 건지…… 잘 아니까. 제리 네가 안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요슈아는 미약하고 나약한 심정에 몸을 맡겼다. 한 발자국 멀어진 걸음은 두 발자국 떨어지고, 세 발자국에 다다랐다. 거리가 멀어지는 한순간마다 요슈아의 몸이 느리게 흐트러졌다. 제리는 그로 인해 축축해진 자기 손목 부근과 요슈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요슈아가 들뜬 목소리로 읊어주었던 수많은 보컬리스트가 생각났다. 폴 매카트리, 존 레논, 프레디 머큐리, 로저 달트리…. 그가 되고자 바랐던 이들을. 입을 다문 채 요슈아의 눈동자를 마주 보려고 제리는 애를 썼다. 고개 숙인 요슈아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리. 나는 네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어서 선택한 거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그래서 그냥 내키는 대로 해버렸어. 플레처의 말이고 나발이고, 전부 무시하고. 거리로 나가서. 기타 하나를 들고…… 계속 노래했어. 요슈아는 날카롭게 정제되지 않은 자신의 날것을 천천히 약한 껍질로 덮었다. 핏방울에 그을어진 흉터가 따끔거렸지만, 불손한 생각보다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관해 전해주고 싶었다. 요슈아의 젖은 머리카락이 그가 고개를 흔들면서 헝클어졌다. 멀어졌던 세 걸음을 그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깨달았어."
"……뭐를?"
"네가 내 음악을 들어주는 게 좋아. 내가 널 생각하며 노래 부르는 게 좋아. 널 위해 음악을 만드는 게 좋아. 노래하는 날 사랑해 주는 네가 좋아."

그 보컬리스트는 마침내 정면을 똑바로 본 채 자신의 연인에게 고해했다.

 

"이게 나의 본망이야.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 있어 줘."

 

제리는 더할 나위 없이 수줍고 고양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가 노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확신했다. 제리의 대답 또한 정해져 있었다. 당연하지. 끌어안은 품이 지독하게 따뜻해서 요슈아는 얼굴을 한참 동안 묻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일어났을 때 요슈아는 이미 예견된 야단법석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핸드폰 화면에 미친 듯이 쌓이는 플레처로부터의 부재중 통화나, 가까운 지인으로부터의 안부 문자. 더 나아가 밴드 시절 팬이었던 이들이 보내는 기다란 팬레터들. 그는 미리보기로 띄워진 것만 읽어도 날밤을 샐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투명한 핸드폰 케이스를 위로 한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공용 거실에는 이미 제리가 먼저 나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흠뻑 젖고 돌아온 덕분에 요슈아가 에취, 하고 짧게 기침했다. 몸이 으슬으슬하니 몇 초 고민해 보지 않아도 감기였다. 열이 오르지 않았으니 며칠 안 가 사라질 듯한 정도였다. 빳빳하게 마른 흰 티셔츠를 입고서도 몸을 떠는 걸 본 제리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괜찮아? 역시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이 정도는 괜찮아. 너는 날 너무 애처럼 보는 면이 있어. 제리도 알지?"
"애 맞다구. 내 속만 썩이고."
"알았어. 용서해 주세요, 누나."

 

요슈아는 언제 풀 죽었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제리는 어느새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린 요슈아를 빤히 보다가, '콩' 소리가 나게 이마에 한 대 딱밤을 때렸다. 요슈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 제리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서 잠깐 말이 없다가 본론을 꺼냈다. 정말로 괜찮겠냐고. 요슈아는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아래로 향해 양쪽 허리를 짚었다. 솔직히 말해……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반년 동안이나 플레처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당분간 메이저 진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지도. 거기까지 말한 그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살짝 굽어 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태의 심각성을 읊던 모습은 어디 가고,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도 후회 안 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지금까지도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에 제리가 눈을 크게 떴다. 멍하니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셰어 하우스의 바깥에서는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주택 거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새가 재잘대듯 사방을 비추는 햇볕은 따뜻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요슈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리는 자신이 그에게 해준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요슈아는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별빛과 햇빛의 조각이 동시에 가득하게 차 있어, 그의 앞에 어둠이 한두 개 생긴들 다른 빛이 작고 무거운 고동을 울리며 맥박했다. 그러니 그의 유성이 꺼질 일은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는 봄의 따스함에 몸을 기울였다. 제리는 별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제리의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가 요슈아의 손목을 끌어당겨 잡았다.

 

"다시 후회하게 된다면, 내가 잡아줄게."

 

요슈아는 반대쪽 손으로 그의 팔뚝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제대로 잡아주어야 해. 제리는 산들바람이 입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잘게 미소 지었다. 잠깐 나갔다 올래? 저번에 우리…… 결국 못 나갔잖아. 요슈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아이가 세우듯 놀러 나갈 계획을 세울 동안, 플레처는 도저히 전화를 받지 않는 요슈아로 인해 이마를 짚고 히스테릭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모자를 쓰고, 혹시 몰라 평소 입는 옷과는 조금 다르게 입었다. 가끔 입는 검은 터틀넥 위로 링 목걸이와 하얀 단추형 자켓, 굽 없는 샌들. 제리는 쇄골이 드러나는 널찍한 품의 검은 투피스 원피스를 입은 채 나갔다. 요슈아는 핸드폰을 들고 나가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나가 제리를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떤 봄의 순간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기쁘기도 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먼저 현관을 나서 제리가 나온 뒤에 문을 닫았다. 요슈아는 간질거리는 속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꺼낼지 한참 고민하고는, 웃음기가 담긴 어투로 물었다.

 

"기타 말이야."
"아."
"그거, 전부 네가 손질해 주던 거… 맞지?"
"……내 입으로 말하면 부끄러워."

 

요슈아는 볼에 홍조를 띤 채 한껏 올라간 어깨를 감추지 않았다. 헛기침을 하며 제리의 손을 마주 잡고 이어 말했다.

 

"그걸 발견했을 때, 확신했던 것 같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노래하지 못할 거라고. ……네 덕분이야."
"나랑 반대네. 난, 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야."

 

제리는 조곤조곤 설명하며 품 안에서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 요슈아의 앞에 건넸다. 요슈아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포스트잇을 건네받았다. 살 목록: 마스킹 테이프, 핑거보드 관리용 오일, 새 기타 줄. 그가 더듬더듬 목록을 읽으면서 점점 환해지는 요슈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힘을 주어 엮은 손마디를 건드렸다. 음악의 음 자도 모르는 제리는 트러스 로드를 조정하던 도중 손가락을 베이는 일도 잦았다. 요슈아는 보컬리스트인데도 불구하고 언젠가 다시 노래하게 된다면 그 기타를 가장 처음 먼저 손대리라는 무의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매일 새벽이나, 제리가 퇴근한 뒤 요슈아가 보이지 않으면 그는 곧장 기타를 꺼내 먼지를 닦았다. 전체적으로 교체할 때가 되면 그렇게 도구를 사 와서 손을 보았다. 처음 한두 번은 기타 꼴이 엉망으로 변하기도 했다. 괜한 일은 한 건 아닌가 싶다가도 눈을 감으면 아주 어린 시절 간단한 즉석 연주와 함께 허밍하듯 들려준 옛 노래의 순간들이 둥실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그와 똑같은 색으로 세상을 보는데도, 함께 하는 순간 세상의 색깔이 몇 배는 다채로워졌다.

 

두 사람은 다양각색의 주택이 늘어진 브라운 스톤을 지나 브루클린 하이츠에 다다르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이스트강을 가로지르는 브루클린 브릿지가 하늘과 물 사이에 매달린 거대한 거미줄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케이블과 타워를 따라 황금빛 조명이 반짝이고, 아래를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파도처럼 행렬을 따라 이어졌다. 다른 관광객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감탄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작은 렌즈에 아름다운 금빛 물결을 담았다. 왼편으로 불이 꺼진 맨해튼 다운타운과 발아래 멀리 펼쳐진 부두가 대조를 이루었다. 온통 하얀 요슈아마저도 밤의 눈부시고도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혀 별빛만이 겨우 밝게 빛났다. 녹색 조명의 레이디 리버티 뒤로는 각기 다른 높이의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르듯 키를 자랑했다.
검은 하늘에 자수가 새겨지듯이 알알이 콕콕 박힌 금색이 반지처럼 반짝였다. 제리는 입을 벌리며 요슈아를 보았다. 요슈아도 그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에 차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밤바람이 자켓 안쪽을 파고들어 오는 감촉을 즐기며, 오른손으로 브루클린 브릿지를 가리듯 허공에 뻗었다. 그리고 건물을 손에 쥐듯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스쳐 지나가던 한기 서린 바람이 손아귀에 갇혔다가 빠져나오면서 정말로 별빛이 담겼다 사라진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짓을 보고 똑같이 따라했다. 낭만이라 하기에는 제법 유치했고, 유치하다 하기에는 깨나 설득력 있었다. 그는 제리가 자신을 따라하는 걸 보고 느리게 웃었다.

 

"어때."
"요슈아가 담은 것보다 조금 덜 담았어."
"그럼 내가 이긴 거네, 신난다! 소원 하나 들어 줘."
"으응? 이거 내기였어?"

 

요슈아는 얇은 입꼬리를 양옆으로 얄궂게 끌어올렸다. 당연하지. 제리가 울타리에 양쪽 팔꿈치를 올린 채 등을 굽히고서 요슈아를 응시했다. 그래, 소원이 뭔데? 그는 단조롭게, 하지만 조금은 기대한 목소리로 요슈아의 소원을 기다렸다. 요슈아는 히죽거리다가 이내 그를 끌어당겨 안고서는,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해 줘. 제리가 놀란 듯이 요슈아의 등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당연하고 사소한 소원이었다. 그 말은 억만 번도 더 넘게 말해 줄 수 있는 말인데. 그럼 억만 번 넘게 말해주면 되겠네, 좋다. 제리는 요슈아의 품에서 바스락대며 먼지를 터는 듯한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요슈아가 목덜미가 간지럽다며 장난스레 입을 벌려 엄살을 부렸다. 검고 노란빛 가운데 강 위로 형형색깔의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이보다 더 환한 빛은 두 번 다시 없을 정도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강렬한 색채였다. 붉은색 폭죽이 가장 먼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고, 그 다음은 초록. 그 다음은 노랑. 그 다음은 파랑……. 다섯 번째 폭죽이 어둠을 밝히는 찰나에 요슈아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제리가 덥썩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눈높이를 맞췄다. 요슈아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를 응시했다. 시야에 오롯이 그만 담기는 거리였다. 제리는 자신의 두 손에 깍지를 끼고, 더없이 명백하고 확실한 말을 건넸다. 언젠가의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말을.
요슈아는 둥글게 벌어졌다가 가로로 찢어지고, 다시 타원을 그리며 마지막에 입술을 삐죽 내미는 제리의 입을 보았다. 폭죽 소리에 제리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들리지 않아도 괜찮았기에……. 요슈아는 연인의 품에 가두어진 목덜미에 닿는 손결을 주름 하나까지도 기억하려고 애썼다. 영원에 가까운 순간으로 남았으면 하였다. 레이디 리버티가 밤의 몽환경처럼 반짝였다. 수백 수천 개의 창문 조명.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빛. 멀리서 보면 그것들의 모임은 밤을 가로지르는 점묘. 분명 지금 그와 마주 보는 이 순간도 누군가에겐 점 한 개가 되어 커다란 그림의 한 부분이 되겠지. 요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제리도 따라 웃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게 사랑하고 싶다. 그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움직였다. 입술이 맞닿아 숨이 가로막혔다. 여전히 온기가 가득했다. 불꽃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둘이 살기에는 넓고, 셋이 살기엔 좁은 집. 남은 공간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기로 결심한 아마도, 그랬어야 할, 처음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기타와 피아노가 다시 들어섰다. 전부 떼어냈던 포스터들이 다시 벽에 붙여졌다. 요슈아의 밴드 시절 음반 CD들이 차곡차곡 책장과 선반 안을 채웠다. 조금씩 빈 곳을 지워나갔다. 요슈아는 문득 생각했다. 제리와 그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우연인지, 필연인지에 대해. 사실 그가 어째서 제리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요슈아 본인조차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일순간의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제리가 연인으로 보인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별 끝의 미래가 상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슈아는 제리와 헤어지게 되어도 쭉 함께할 수 있으리란 묘한 확신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제리의 입술에 더 이상 입 맞출 수 없더라도, 제리가 내는 심장 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없는 위치가 되더라도.
어릴 때부터 잡아온 손은 여전히 비슷한 크기 차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키도 얼추 비슷했다. 그 외에 식사량부터 하는 일, 대부분 요소는 늘 그랬듯 정반대를 가리켰다. 인테리어 취향도 아마 조금은. 제리는 액자에 걸어둘 사진을 요슈아와 함께 고르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이거 내가 너무 이상하게 나오는데!"
"왜? 전부 다 엄~청 귀여운데……. 앗, 이것도!"
"그건 진짜 찐빵같이 나왔잖아."
"그래서 귀여운 거라니까."

 

요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가리킨 사진에는 아침을 먹다가 요슈아가 불러 고개를 든 제리가 피사체로 담겨 있었다. 제리는 조금 투덜거리며 요슈아가 짚은 사진 왼쪽에 있는 걸 선정했다. 이번엔 요슈아가 한참 졸다가 깨어나 눈이 반쯤 부은 상태로 소파에 드러누운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요슈아의 턱과 귀 끝이 살짝씩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돼! 왜 안 되는데? 아니, 그게. 너무…… 아무튼 안 돼. 요슈아는 논리가 턱없이 부족한 주장을 펼치며 손사래 쳤다. 하나하나 짚어갈 때마다 추억이 이슬처럼 송골송골 맺혀 물컵 하나를 꽉 채우다 못해 흘러넘칠 것처럼 합쳐졌다. 일이 해결되니 풀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꾸며두고…… 다시 돌아가는 거야?

"음, 뭐 그렇지. 나중에 투어 올 수도 있으니까."
"에에."
"그리고 라멘 먹고 싶은걸."
"이유가 단순해."

 

요슈아가 입을 가린 채 쿡쿡대며 웃었다. 둘 옆에는 잔뜩 짐이 실린 캐리어가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여전히 기타가 든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상의 끝에 그것을 두고 가기로 하였다.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 기타를 한 번 더 다시 보도록. 그리고 마음을 다잡도록. 결심은 공존을 통해 자리 잡았다.

그가 즉석 버스킹―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설프게 시작한―을 한 뒤로 판다 사장으로부터 미친 듯한 연락이 쏟아졌다. 음악을 안 하겠다고 해서 열 받지만 어떻게든 돈 버는 거 도와주었더니 은혜를 웬수로 갚는다, 뭐다… 그러다가 영상 플랫폼에 올라간 그의 영상이 몇백만 조회수를 찍자 군말 없이 다시 음악 활동이나 하라며 대충 마무리 지었다. 요슈아는 애초부터 판다 사장은 걱정거리에서 논외였다며 가볍게 말했다. 문제는…….

 

"정말…… 미안! 정말로 할 말이 없어, 미안해! 다들, 내가 책임지고 한 대, 아니, 백 대씩 맞을게!"
"아니아니, 우리 세 명이라고? 삼백 대 맞을 자신 있어?"
"요슈아는 각오를 하고 말한 거니까, 맛츠. 우리도 기대대로 해주지 않으면 안 돼."
"……아니, 보통 거기서 각오를 말하냐고…?"

 

요슈아는 브레이브 차일드 단체 채팅방에 공항 사진 한 개를 보낸 뒤 물음표가 가득 올라온 메시지에 데빌즈 이모티콘까지 전송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날 일본에 도착해 세 사람과 대면했다. 요슈아는 제대로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제리와 함께 그들 앞에 섰다. 언제나 그렇듯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합주실 안을 거처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의자에 앉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변만 살폈다. 요슈아가 사과하는 순간마다 고개를 같이 푹 숙이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하고 싶은 걸 확신할 수 없어서 너희들에게 계속 폐를 끼쳤어. 상담해봤자, 분명 이상한 취급 받고 끝날 거라고 생각해서……. 그의 말에 의자 팔걸이에 팔을 기댄 마츠가 요슈아에게 머리를 들어보라는 듯 딱, 핑거 스냅을 쳤다. 요슈아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흔들며 정면을 쳐다보는 일순간에 이마에 강렬한 타격이 닥쳤다. 요슈아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양손으로 이마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소타와 제리가 허둥대며 아파하는 그를 바라볼 동안, 마츠는 오른손을 털며 콧방귀를 뀌었다.

 

"뭘 멋대로 착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냥 한 대 때리고 싶었어."
"양아치 같아, 맛츠."
"나름대로 애정 표현인 거지. 후후…."

 

제리는 유키의 말대로 그들이 이미 요슈아를 용서했다는 걸 느꼈다. 동시에 기뻤다. 이렇게 좋은 이들이 요슈아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요슈아 또한 그 사실을 느꼈는지 투명한 눈물이 살짝 맺힌―사실 너무나도 강력한 딱밤에 아픈 나머지 그런 것도 조금은 있었으나―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신기할 만큼 주변 이들을 미소로 끝맺게 만드는 요슈아가, 제리는 부러우면서도 좋았다. 누군가가 제리에게 언젠가부터 사랑을 느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가 건네는 미소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었을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그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은 순간은.

 

 

"들어갈게요……?"

 

몇 개월이 지났다. 제리는 아무도 듣지 않을 인사를 건네며 합주실 출입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이전에 요슈아에게 건네받은 스페어 키를 가방에 다시 넣고, 발을 안으로 넣었다. 몇 개월 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들락거려도 되는 건지 여러 번 물었다. 양, 양심이 있지……. 제리의 자책과는 별개로 멤버 전원이 흔쾌히 수락했지만, 여전히 외부인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발을 들여놓고 나서도 그러하였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한 걸음걸이로 돌아다니며 주변을 구경했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는 멤버들이 연습을 끝내고 잠깐 쉬고 있을 때 들렸거나, 혹은 시간이 남아돌 때 요슈아가 불러서 아주 잠시 이야기하고 돌아간 정도였으니까. 영 어색한 건 다름이 없었다.

 

"…익숙해지겠지, 뭐."

 

결국 체념하듯 혼잣말을 내뱉고, 제리는 합주실을 두리번댔다. 조명이 어둑한 방 안에는 가운데에 대형 연주 공간이 있고, 흡음재로 처리된 벽 쪽에 칸칸이 진열된 장비들이 보였다. 외장형 프리 앰프, 리버브 유닛, 딜레이 모듈……. 그는 요슈아가 들뜬 말투로 하나하나 속사포로 알려주는 걸 이름만 간신히 외웠다. 요슈아는 음악을 정말로 사랑했다. 과거형은 잘못된 설명이었다. 그는 정말로 음악을 사랑한다……. 제리가 문을 전부 닫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앉을 생각은 뇌리에 미치지도 못한 듯 합주실 내를 서성거렸다. 탁자 위에 얼기설기 놓인 음악 잡지와 장식용으로 붙여놓은 포스터 또한 눈에 띄었다. 곳곳에 기묘하게 탄 호일 냄새가 노르스름하게 났다. 제리는 앰프 연결 케이블을 들었다 놔보기도 하고, 드럼 앞에 앉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처럼 누런색을 띠는 화려한 포스터들을 구경하며 요슈아를 기다렸다. 손목에 걸친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면서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문이 열렸다. 제리에게는 익숙한 이의 인영이 서서히 드리웠다. 그는 사랑해 마지 않는 목소리로 연인의 이름 두 글자를 입에 올렸다. 애정을 한데 꾹꾹 눌러 담아서. 제리가 포스터나 장비를 둘러보다가 합주실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에 제리는 그 모습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환히 웃었다. 그 미소는 분명 가장 소중한 이와 닮아 있었다.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변치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