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jeongsoga
제리가 아프다.
요슈아, 나 감기 걸렸어. 많이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나을 때까지는 데이트 금지. 옮을 수도 있으니까 절대, 절대로 찾아오면 안 돼?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문장의 나열에 요슈아가 눈을 천천히 키웠다. 제리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이 생소하게 다가와 놀란 감정 반,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는 제리의 당부에 갑작스레 걱정이 치솟는 마음 반. 아무래도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을 감당하지 못한 건지 몸 관리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가슴 속 갑갑함에 안절부절못하듯 입술을 깨물었다가, 그것이 하얗게 물드는 감각에 작은 탄식과 함께 깨문 입술을 놓고. 답답하다는 듯 옅은 인상을 쓴 요슈아가 휴대폰의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열나지는 않아? 물 많이 마셔. 몸도 따뜻하게 해.
정돈되지 않아 다급하면서도 다정한 말들이 제리와의 채팅방에 쌓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제리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괜찮다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음에도 단호한 마지막 문장에 요슈아는 차마 제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제리가 그리 원한다면 꼭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나 없어도 괜찮아?
그래서, 그래서 보낼 수 있는 솔직한 물음이었다. 제리의 당부인 만큼 꼭 지켜주고 싶었기에 재차 확인받고 싶었다. 괜찮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바랐지만, 그녀가 제게 어리광을 부려주길 바랐지만 정말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 대답해도 요슈아는 상처를 받을 생각도, 불만을 얹을 생각도 없었다.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제리가 요슈아는 필요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믿음이 굳게 존재했다.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부터 차오르는 불안은 휴대폰 너머로 듣는 제리의 목소리만 있다면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답장이 온다면 요슈아는 제리에게 달려가는 대신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제리에게서 돌아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초록색의 말풍선 옆에 '읽음'이라는 두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 끌어올리고 끌어올려 길게 만들어 놓았던 요슈아의 심지가 급속도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달랠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불안과 걱정은 점점 증폭되었다.
피곤해서 잠들었을지도 몰라. 아니, 괜찮다고 안심시켜놓고 쓰러진 거라면?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한다. 요슈아가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자꾸만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지극히 요슈아의 기준이었지만, 한참, 한참을 기다려도 발신인의 이름에 제리가 표기되는 일은 없었다.
기다리던 도중 띠링, 하고 울리는 경쾌한 소리에 우스울 정도로 급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요슈아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길어지는 공백과 번잡한 생각에 복잡해진 머리를 그가 좌우로 흔들어 털었다.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요슈아가 코트에 제 몸을 꿰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마스크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제리를 믿고 있다는 마음과는 별개의 판단이었다. 결국 다급하게 열렸다가 지지해주는 이 없이 혼자 닫히는 현관문은 복도 너머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제리가 많이 아프지 않다 그랬어. 우리는 서로 솔직해지기로 약속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한 다짐 탓에 시작은 느렸지만, 걸음은 점차 조급해져 이제는 달리는 정도로 빨라졌다. 달리는 와중에도 연락 하나 없는 상황에 느긋하게 걷기란 쉽지 않았다.
제리와 함께 걸으며 구경했던 풍경은 눈길을 줄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쳤다.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하며 들렀던 자그마한 카페를 지날 때도, 음식을 먹으며 제리가 눈을 빛냈던 고급스러운 식당을 지날 때도 추억을 회상하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걱정에 요슈아의 숨만 점차 가빠졌다.
마스크를 쓴 탓인지 평소보다 호흡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잠시 멈춰섰을 때는 정신없이 찾은 약국에서 온갖 것을 쓸어 담느라 숨을 가다듬을 틈이 없었다. 물건이 잔뜩 담겨 늘어진 비닐봉지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어느새 도달한 제리의 현관 앞 복도를 부산스럽게 울렸다. 들이켰다 내쉬는 숨은 마스크에 갇혀 갑갑했다.
결국 더운 공기를 빼내려 요슈아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잔뜩 채우는 느낌은 달가웠으나 그 속에 제리의 향이 섞여있지 않음에 이상한 결핍을 느꼈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거슬려 그가 열도 식힐 겸 제 앞머리를 성의 없이 쓸어 넘겼다.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요슈아가 큰 한숨을 뱉었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지나쳐 온 풍경은 바라보지도 않았던 회색의 눈동자가 이제는 정지한 채로 익숙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이름난 보컬리스트라는 제 신분 탓에 자주 들르게 되었던 밀회의 장소이자, 저를 그토록 걱정케 했던 사람이 머무는 곳.
드디어 제리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들떴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게 정말로 들뜬 게 맞긴 한 건지. 요슈아가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을 애써 감추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탓인지, 제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요슈아의 얼굴에는 미묘한 초조함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불안함에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기다리던 요슈아의 귀에 언뜻 느릿하게 끌리는 발소리가 잡혔다. 그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챈 요슈아가 밀려들어 오는 안도감과 반가움에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무심코 "제리," 라는 이름을 입에 담아버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자신의 것과 유사한, 반가움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요슈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잠결이었으나 당혹스러움도 가득 담겨 있었다.
오지 말라 그랬는데 왜 왔어. 옮는다 그랬잖아….
언뜻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정말로 저가 없어도 괜찮냐 물은 메시지에 제리는 체면치레로라도 정말 괜찮다고 대답했을 거라는 걸.
내가 정말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 해줬잖아. …불안해서 그랬어.
그 탓에 요슈아는 잔뜩 기가 죽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른하면서도 잠겨있는 제리의 목소리가 걱정스러워 요슈아는 더욱 조심스러우면서도 작은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제리보다 크고 번듯했던 몸은 위축이라도 된 것처럼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아픈 사람은 제리였는데도,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요슈아였다.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제리가 아, 하는 탄식을 뱉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모습이 연상된 탓인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한 탓인지. 천천히 옮겨지는 제리의 발소리는 점점 현관으로 가까워졌다.
혹시 쓰러진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랬어. 약도 많이 사 왔는데, 잠깐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
요슈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콩,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에 이마를 맞댄 그가 속삭였다. 두꺼운 문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제리는 바로 제 앞에 서 있었다.
…따뜻한 녹차도 사 왔어. 이거라도 전해주고 싶어.
쐐기를 박듯 중얼거렸다. 제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움직여 부스럭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지라 틀림없이 들렸을 것이다.
너머에서부터는 안 되는데, 하는 잠깐의 망설임이 들려왔다.
제리, 나… 추워.
그 짧은 한마디를 마침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었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에서 한 발짝 멀어져 그것이 열리는 틈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요슈아가 제 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생기자 망설임 없이 제리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제리는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얼굴도 마스크로 가린지라 전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요슈아는 가까이서 그녀를 간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고 여겨, 안심한 듯한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당장이라도 제리를 품에 안고 보고 싶었다, 많이 걱정했다, 몸은 괜찮냐 잔뜩 제 감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무어라 그랬는지, 약은 챙겨 먹었는지. 묻고 싶은 것도 한가득이었다. 모든 걸 그녀를 제 품에 가둬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요슈아가 그런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제리를 단숨에 안으려다, 현관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자신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틀어박히는 그녀의 모습에 품을 따뜻하게 채우려던 요슈아의 행동은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당황한 요슈아가 그녀를 쫓으려다 철컥. 다시 문이 잠기는 소리에 몸을 굳혔다. 몇 초를 정지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역시, 멋대로 찾아오는 건 싫었을까? 그녀가 제 연락을 보지 않았을 때처럼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눈을 깜빡이는 것을 포함하여 굳어있던 요슈아의 모든 행동이 이완됐다. 다시 제리를 쫓아 잠겨버린 방문 앞에 조심스레 앉은 그가 문에 몸을 기댔다.
최대한 가까이 제리와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너한테 연락하자마자 잠깐 잠들어서, 그랬어.
나야말로,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 …많이 아파?
으응, 괜찮다고 말했잖아.
모두 얼굴을 마주하고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기에 미련이 남았다. 요슈아가 문틈을 툭, 툭 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떻게 보면 긁는 것도 같아 보였다. 다만, 그런 애절한 모습과는 달리 요슈아는 왜 자신과 눈을 마주쳐 이야기해주지 않는지 제리에게 굳이 따져 물으려 하지 않았다.
괜찮으니 절대 찾아오지 말라던 제리의 당부를 독단적으로 듣지 않아 자그마한 죄책감이 피어오른 탓과, 제게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은 그녀의 배려가 눈에 훤히 보인 탓.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대신 요슈아는 바스락 소음을 내는 비닐봉지를 끌어안았다. 그 안에서 여러 약들이 뒤섞여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새어 나갔다. 그녀만의 의사라도 된 것처럼 하나하나 아픈 곳을 들어주고, 손수 약을 먹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약과 함께 사 온 따뜻한 녹차 탓에 그의 품은 순식간에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
제리.
…응.
나도, 마스크 있어. …부족할까 봐 더 사 오기도 했어.
그 온기는 오히려 결핍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현관보다 얇은 문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도 감질나 요슈아가 이제는 습관처럼 저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마치 제리와 서로의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것만 착각이 들었다.
안 옮을 거야. 그러니까,
보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제리의 불규칙적인, 열기가 서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요슈아의 숨소리도 그녀의 것과 맞추어 들이쉬고, 내쉬었다. 성급했다.
…안아주는 거 정도는 허락해줄래?
현관에서의 부탁과 동일했다. 요슈아의 말이 끝을 맺고, 머지않아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경첩이 맞물려 움직인다. 닫혀 있던 얇은 벽이 다시 한번 열린다.
열리는 틈 사이로 요슈아를 향해 아릿하게 웃고 있는 제리의 얼굴이 보인다.
비밀 데이트를 할 때처럼, 발간 얼굴의 전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요슈아가 망설임없이 제리를 끌어안았다.
부족했던 체향이 폐부에 들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