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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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ngkgkB

 

 

제리가 요슈아의 저택에서 돌아왔을 때, 제리는 스스로 황제 폐하나 황후며 후궁들이 자신을 찾느라 난리가 나 있으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을 뒤늦게 했으나 염려가 무색하게 황궁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정확히는 다른 소동으로 인해 제리의 행방에 대해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다는 것이 더 들어맞겠다. 제리가 겸연쩍게 황궁으로 들어서면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법의 범위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자가 왔대. 은둔해 있던 저명한 음악가라도 되나? 아니 음악가보다는 '평론'을 하는 쪽에 더 가깝다나봐. 제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하이델을 떠올렸다.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요슈아에게 그의 음악이 백색이어 아무 색도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던 노인. 요슈아의 절망을 가장 먼저 발견한. 제리는 조심스럽게 하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황녀님. ……폐하께서 아침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며 몹시 염려하셨습니다."
"그렇잖아도… 그에 대해서는 폐하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구요. 그나저나, 말씀하시던 것이 있던 듯한데……."
"아, '평론가'에 대해서 말입니까? 방금 입궁하셨습니다. 언질도 없이 들러 황실마마님들께서 모두 놀라워하는 중입니다."

평론가. 기실 안단테에 마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음악가는 수두룩했지만―그러므로 요슈아조차 뛰어난 실력이 아니었다면 이 시대에 한 줄조차 긋지 못하고 '그런대로 먹고 사는 음악가' 정도로 남았을 것이었다― 아그네스 투르니에 여신의 가호를 받은 음악이 자아내는 마법의 범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세간은 음악을 평가한다 하여 이들을 '평론가'라고 불렀는데, 칭명이 있는 것조차 무색하게끔 거의 존재를 내보이지 않는 그들은 그러므로 마법과 음악의 효용을 위하여 안단테 제국에 매우 귀한 존재였다. 투르니에 콩쿠르에 초청받은 심사위원들도 거의 평론가가 되기 위해 다른 길로 음악과 마법을 공부하는 데 매진해 있는 사람들인 것을 보면 말 다 한 것이다.
어째서 하이델,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평론가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제리는 스스로 의문한다. 음악을 듣고 이를 심상으로 표현해내는 기이한 노인. 다만 요슈아를 위로했던 것과는 별개로 하이델이 왜 그런 식으로 요슈아의 음악을 평했는지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제리는 차마 짚어낼 수 없었다. 더 솔직하게는, 하이델에게 원망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다나요?"

궁금증이 요슈아를 대신하는 원망을 이겼다. 제리가 묻자 하인들은 일제히 알현실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금쯤 폐하를 알현하고 계실 것입니다."
"요슈아님을 찾는 듯도 하던데……."

제리는 황궁 한쪽에 마련된 알현실로 가는 백금으로 빛나는 복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는 몰랐지만 하인들 사이에서 소문 자자한 '아랫사람에게도 지나치리만큼 겸손한 막내 황녀'답게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던 제리는 마침 그곳에서 나오던 황제와 하이델을 마주쳤다. 제리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폐하, 오전에는 잠시 황궁 바깥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윤허 없이 출궁한 점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 황제는 자비로운 목소리로 "고개를 들거라. 정찬에 참석하지 않아 걱정하였단다." 하며 막내딸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둘의 옆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지킨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쨌든 황제와 외부인의 앞이었으므로 제리는 요슈아에 대해 당장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격식 차린 대화를 마쳤다. 황제는 하이델을 돌아보며 "이리 서 계시도록 기다리게 하여 송구합니다." 궁내에서 거의 보지 못한 공손한 태도로 노인을 대했다. 하이델은 나직한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말하더니 지팡이로 툭 다시 바닥을 짚었다. 제리가 황제의 앞에서 노인을 슬그머니 눈짓하자 황제가 그제야 하이델에 대해 소개했다.

 

"아, 이분은 하이델님. 이국에서 온 '평론가'시란다. 이번 투르니에 콩쿠르에서 심사를 맡기도 하셨지."

"그렇군요……." 이미 아는 내용이었지만 제리는 인내심 있게 그 말을 듣는다.

"요슈, …궁정의 대음악가를 찾아오셨으나 너도 알다시피 헛걸음이 되셨어."

"헛걸음까진 아니지요." 하이델이 황제의 말에 인자하게 웃었다. "이리 황녀님도 뵈옵고."

 

제리는 그 말이 인사를 요하는 것인 줄로 알고 눈 보이지 않을 것이나 일단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이델은 제리가 인사한 것이 마치 보이는 것처럼 한 손을 허공에 두고 달래는 듯이 손을 낮게 휘적거렸다. "황녀님." 노인이 말했다.

 

"요슈아님을 만나고 오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제리의 눈이 커졌다. "맞나보군요." 제리가 말이 없자 하이델이 미미하게 웃었다. 제리는 불현듯 하얀 하프시코드를 편안하게 연주하며 지금 작곡한 곡이야. 말하던 요슈아를 떠올렸다. 노인이 이어 말한다. "황녀님께 하얀 음계가 묻어 있어 알았습니다. 그분의 연주를 듣고 오셨군요." 더욱이 놀란 황제는 옆에서 "그게 정말이냐, 딸아." 물을 뿐이다. 제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음계. 제리는 그제야 침착하게 하이델에게 물을 수 있었다.

 

"요슈아에게… 그의 음악에 아무 색도 없는 듯이 보인다고 하셨다 들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그가 궁정 음악가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그 영향인 듯하던데……."

"아."

 

하이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제리는 눈을 들어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노인이 다음으로 낸 말은 그러나 전혀 별개의 것처럼 들렸다.

 

"혹 황녀님, 그가 황녀님께 헌정하는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오셨습니까?"

"……네?"

 

지금 작곡한 곡이야. 울음 탓에 발간 눈가로 요슈아는 그렇게만 말했을 뿐 제게 헌정하는 곡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요슈아가 바치는 곡이라니,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바치는 곡이 제게 있다니, 그럴 수가! 제리는 도리질을 치며 "아뇨, 아닙니다……. 그냥 연주를 듣고 왔어요," 답했다. 하이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지팡이를 매만졌다.

 

"요슈아님이 제 말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자신 음악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그분께서는 언젠가 그 깨달음에 닿아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공허한 것을 깨닫고 그 다음부터 채울 수 있으니까요. 빈 채로 있다면 사람은 결국 망가질 뿐입니다. 하여 저는 요슈아님의 연주를 듣고 아름답지만 껍데기뿐이어 어느 것으로든 더럽혀질 수 있는 백색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안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것이지요."

"……."

"황녀님, 이것을 보십시오."

 

하이델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삼각기둥 모양의 거울 혹은 유리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제리에게 아주 주려는 듯이 그가 그 물건을 든 채로 있기에 제리는 망설이다 그것을 건네받았다. "이게 뭔가요?" 묻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노인은 인자하고 나직하게 웃었다.

 

"일종의 평론 도구입니다. 제가 평가하는 음악의 색은 이것으로부터 비롯된답니다. 저는 물론 이것 없이도 음악의 색을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으나, 황녀님은 그러지 못한다 들었으므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게요……?"

"황녀님, 요슈아님을 사랑하시지요."

 

이 말에 옆에서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어깨를 움찔 떨고 노인과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제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황제의 기침 소리는 더 커졌다. 노인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요슈아님께 한 번 더 연주를 해 달라고 청해보시지요. 제가 보기에, 요슈아님의 공허를 채울 방도는 황녀님께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하이델은 그 말을 남기고 기침을 하던 황제와 제리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지팡이를 짚고 유유히 황궁을 떠나갔다. 제리는 그 자리에 남아 노인이 들려준 작은 삼각의 '평론 도구'를 들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의아해할 뿐이다.

 

 

일주일 뒤 요슈아가 입궁을 요청했다. 황제는 어쩐지 조금 불퉁한 태도로 그의 입궁을 윤허했다. 요슈아는 황제의 영 마뜩찮은 얼굴을 보고서 의아해하다가도 허리 숙여 깊이 사죄의 인사를 했다. 요는 한사코 내려두겠다 했던 궁정 대음악가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황제는 그 청에 기뻐했으나 그것도 잠시, 마침 알현실에 제리가 들어왔을 때에 자네 막내 황녀를 어찌 생각하나? 하는 질문을 던져 두 사람을 당황케 했다. 아바마마! 폐하, 가 아니라 어릴 때 쓰던 호칭으로 제리가 황급히 아버지를 부르자 황제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결국 웃으며 볼일이 끝났으면 가 보라, 찬바람 쌩쌩 부는 답을 내렸다.
요슈아는 황궁을 나가기 전 익숙하게 제리의 황녀궁에 들렀다. 일전의 저택에서의 대화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요슈아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으나 제리가 어쩐지 서먹하고 어색하게 대하는 바람에 둘의 거리는 다소 애매해졌다. 제리는 쭈뼛쭈뼛 머뭇거리다 요슈아에게 묻는다.

"오늘도 연주해줄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요슈아는 요슈아대로 그때 한 입맞춤이 역시 문제였나, 생각하다가 괜히 쑥스러워져 얼른 들고 온 악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그가 활과 현의 상태를 보고 잠시 조율을 하느라 선 채로 머물러 있으면 제리는 품에서 슬쩍 하이델이 주었던 물건을 꺼내본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유리 삼각기둥. 요슈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연주를 시작한다.

바이올린 선율이 부드럽게 흐른다.
제리는 그 흐름에 여느 때와 같이 홀린 듯 눈을 감았다가, 아차 싶어 다시 눈을 떴다. 요슈아 역시 선율에 몸을 맡기고 활을 현 위로 미끄러뜨리며 연주하고 있었다. 노래의 마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리는 그 연주로부터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련하고 따뜻한 곡조, 제리는 손을 뻗어 요슈아 쪽으로 하이델이 주었던 삼각기둥을 조심스럽게 가져다댔다.
그 순간 제리는 기둥 한 면의 유리 너머로 요슈아에게서 흰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다. 유리를 투과한 환한 빛은 이윽고 다른 마주보는 면의 유리에 다시 투과되더니 온통 어지러울 만큼 달콤한 천연색의 환상으로 변한다. 거기에는 제리가 있다. 웃음 짓는 제리, 즐겁게 이야기하는 제리, 소파에 앉은 요슈아의 앞에 무릎 꿇듯 바닥에 앉은 제리, 눈물을 흘리는 제리, 그리고 흰 빛이 요슈아의 손으로 변하더니 울고 있는 제리의 모습에 뻗친다. 뺨을 어루만져 닦아주고 이내 끌어당기며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있다. 제리는 너무 놀라 물건을 떨어뜨렸다.

"제리?"

음악이 끊겼다.

"제리, 왜 그래?"
"너, 너 방금 나한테……"
"응?"
"사,"

제리는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얼굴을 감쌌다.

"사랑한다고……."
"……."

 

요슈아는 고개를 내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앉으며 제리가 떨어뜨린 것을 보았다. 제리는 이름을 몰랐으나 요슈아는 이미 음악과 마도에 대한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프리즘. '막 평론을 시작한 평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음악의 빛을 투과하여 그 연주가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연주하고 있는 것인지 보여줄 수 있는 마법 도구였다. 저런 걸 제리가 어떻게? 어디서? 영문을 몰랐던 요슈아의 얼굴도 천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 제리,"
미끄러뜨린 활, 현과 활의 줄이 마찰하며 내는 음, 제리에게 들려주었던 연주는 모두 같은 마음을 담고 있었다. 단 하나의 고백이다.

제리가 손가락 사이로 눈을 들었다. "요슈아," 저택에서 울며 서로를 보았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슈아가 제리의 앞에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있었다. 낮은 자세로 겸허하게 너를 올려다본다. 꼭 고해할 때의 자세 같다.

할 수 있는 말이야 많았다. 이걸 어디서 구했어, 혹시 평론가를 만났다면 하이델, 그 사람이야? 너는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어? 나는……. 그러나 수많은 물음 중에서 요슈아는 하나의 문장을 움켜쥐기로 했다.

 

"제리."

 

눈이 마주친다. 완연한 가을의 하늘이 푸르다. 흰 대리석으로 된 궁의 바닥에까지 파랗게 하늘이 비친다. 제리는 손을 느리게 미끄러지듯 무릎 위로 내렸다. 요슈아가 말했다. "저번에…… 대답을 제대로 안 한 것 같아서." 네가 좋아. 음악이 없어도. 네게서 음악이 영영 사라져버린대도.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요슈아는 잊을 수 없는 말마디를 되새겨본다. 그리고 백색으로 환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사랑해."

 

내 옆에 남는 누군가가 되면 안 돼? 그 말에 답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영영 그럴 것이라고. 나는 네 오른편에 선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왼편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공허라도 사실은 함께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원히 빈 껍데기여도, 아무 빛도 없어도, 설령 내가 음악으로만 남는다고 해도.

제리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서러움이 아닌 벅찬 환희 탓이었다. 요슈아도 그것을 알아서 그는 무릎에 놓인 제리의 손을 덮고서 처음처럼, 조심스럽게, 턱을 올리고 한 손으로는 제리의 뺨을 감싸 당긴다. 제리는 기꺼이 당겨진다. 아주 가깝게.

환한 키스.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안단테의 막내 황녀와 궁정의 대음악가의 국혼은 그 다음 해 봄에 성대하게 열렸다. 안단테의 악사들이 사랑, 사랑을 노래하는 가운데 제리와 요슈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된다. 안단테의 모든 음악가들이 노래했다.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엔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나의 짧은 생은 그녀에게로 망명해가는 음악일 뿐이어서……¹ 박정대,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 中, 시집 『아무르 기타』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