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 구조 요청, Mayday!
S.O.S 구조 요청, Mayday!

@juststayus

 

 

두 사람의 눈앞에는 온통 펼쳐진 은빛 세계가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에서 쏟아지는 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는 서릿발이 늘어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았다. 창문 밖으로 하얀 눈이 계속해서 내린다. 함께 몰아쳐 오는 강한 바람이 자꾸만 돌진하는 새처럼 몸을 부딪친다. 덜컹대는 유리창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자, 그는 추위에 한껏 붉어진 귓불을 잡아 만지작거렸다. 무척이나 불편하고, 동시에 아름답기 짝이 없는 풍경과 날씨다. 문이 굳게 닫힌 산장의 벽지는 하얗게 칠해져 있고, 천장 중앙에 설치된 연노란색 조명 불빛이 겨우 산장을 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 위에 깔린 두툼한 붉은색 융단마저도 덮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손끝이 어는 기분이 들었다.
요슈아는 제 가슴 속 시리게 다가오는 고동마저도 애써 무시한 채 옆의 소녀에게 담요의 넓은 면적을 더 건넸다. 눈을 닮은 하얀색 솜털 담요의 보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리는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하며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감사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상냥함은 노력이었으며, 다정함은 천성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제리는 요슈아의 그런 다정함에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리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읽는다. 지금부터 3박 4일간 단독-서바이벌이다냐. 알아서 잘 살아 남으라냐. 쓰레기. 판다 보냄. 천하의 요슈아에게도 식은땀이 흐를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제리, 정말 미안! 설마 판다 사장이 단독 서바이벌 같은 걸 생각했을 줄은!"
"…3박 4일, 요슈아랑 나랑…. 이 허허벌판 겨울 산장에서 살아남는 거야?"
"……응."

 

이번 하계휴가. 판다 사장이 각 밴드의 보컬리스트들에게 포상이라며 건네준 여행권이, 이러한 목적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란 소리다. 요슈아의 머릿속에서 지금쯤 호화롭게 일등석에서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을 판다 사장이 그려졌다. 평소 사장이 무슨 짓을 벌여도 즐겁게 넘어갔던 그가 처음으로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제리를……. 황당한 마음이 급경사를 그리는 산줄기처럼 기울어졌다.


벌써 6번째 서바이벌을 성공적으로 끝낸 클라이맥스 레코드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독특한 운영 방식은 가히 사람들에게 여러 말을 듣고는 했으나, 소속 밴드들 또한 이번에도 전력을 다해 다시 한번 신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판다 사장이 판다걸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내로 들어왔다. 스태프 전원과 직원, 밴드 멤버들까지 포함해 한껏 장식되어 이전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방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벽에 장식된 현수막에는 POP 글씨체로 'Climax Record'가 적혀 있었고, 바닥에는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진 풍선들이 보였다. 식탁보를 깐 테이블에 술과 음료가 잔뜩 배치되어, 이미 술이 들어간 이들의 입에선 흥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이 들어오자 일동들이 건배를 위해 중앙으로 모였다.
그의 입에서 여러 말―밴드 『Veronica』의 보컬인 모모치의 당시 기억으로는 굉장히 지루하고, 따분했고, 썩어빠진―들이 흘러나오고 마침내 건배를 알리는 팔이 위로 올라갔다. 클라이맥스 레코드 만세!
흔해 빠진 건배사가 끝나고 요슈아는 캔에 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왜 자기는 늘 콜라냐며 따지는 에이대시의 말에 웃고 있던 도중, 판다가 보컬리스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이, 쓰레기들. 이번에도 폐기처분되지 않아서 다행이겠다냐. 그런 너희 쓰레기들을 위해 이 상냥한 사장인 내가 하나를 베풀겠다냐. 판다는 그리 말하며 그들의 앞으로 홍보를 불러들여 무언가를 건네게 했다. 티켓과 사이즈가 엇비슷해 보였다. 요슈아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뭘까, 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야에 닿은 맨 처음 글자는 '3박 4일 휴가'라는 글자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변했다.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에게도 시선을 주자, 츠유가 티켓을 흔들며 묻고 있었다.

"저기, 이거 도대체 뭐야? 너무 그럴듯해서 현실감 오히려 안 나는데―"
"말을 꼭 해줘야 안다냐? 수고한 쓰레기들에게 주는 포상 휴가다냐!"
"우왓, 뭐야. 토치오토메 농장이 있는 곳?! 최고잖아!"

각자 떠날 위치는 다른 듯했으나, 모두가 똑같은 기간의 여행권을 받은 건 확실했다. 요슈아는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제리를 떠올리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눈이 수없이 쌓인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기로 유명한 삿포로 쪽의 산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판다가 기겁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한 번 꽉 안아주고 나서 급하게 로비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한없이 가벼워져 구름 위를 누르듯 움직였다. 스마트폰 너머로 익숙한 수신음이 가면 얼마 안 있어, 그를 무엇보다 기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요슈아의 목소리가 둥글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높아지기도 했다. 수락을 받아낸 요슈아는 그 이후로도 조금 더 대화하다가 제리가 통화를 끊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통화는 늘 서로가 먼저 끊길 기다리다가 어느 한쪽이 웃어서 따라 웃는 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기대감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입술을 혼자서 놀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JR 도쿄역부터 신 하코다테역까지는 신칸센 하야부사로 약 4시간 반. 그리고 다시 특급 슈퍼호토쿠를 타면 3시간 반. 비행기로 가려던 둘의 생각을 깔끔하게 접어버리듯, 결항으로 인해 요슈아는 급하게 사장에게 연락해야 했다. 예상이라도 한 것마냥 이미 신칸센 기차표를 구해두었다는 판다 사장의 말에는 의아함이 컸지만, 바로 옆에서 걱정하고 있는 제리의 옆모습을 보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어졌다. 사장이 구해준 표를 이용해 기차 내 자리에 안착했다. 창가 자리 쪽에 앉은 제리는 양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칼이 차창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그가 요슈아를 끌어당겨 같은 풍경을 공유했다. 녹음이 가득한 산, 맑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눈이 빗줄기처럼 창을 건들고, 새하얀 순수가 얇은 창 하나를 두고 제리의 손가락과 맞닿았다. 차창을 흐르는 경치가 그렇게 차례대로 바뀌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에 제 손을 자연스레 겹치고서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 붙어 있는 채로, 각자의 흑과 백을 바꿔 입은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하나의 체스판 같았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완전해질 수 없는 것처럼.

"이제 경치 말고 나도 봐줘."
"요슈아, 질투하는 거야? 자연한테?"

제리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속닥이는 요슈아에게 제리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서 장난스레 물었다. 이따금 제리는 이런 식으로 장난기가 발동하고는 해서, 요슈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는 건 덤이었다. 검은 코트를 느슨하게 걸친 요슈아가 그를 안고 잠든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장장 약 여덟 시간을 달려 도착한 삿포로의 풍경은 지친 마음과 몸마저 전부 노곤하게 만들 정도로 순수한 빛이 가득했다. 비행기를 연착시킬 정도의 날씨 덕분에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털 부츠를 반쯤 덮는 두께의 눈이 바닥에 쌓여 뭉쳐 있었다. 제리는 속으로 요슈아가 눈밭에 누우면, 잠깐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다. 많이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산장이니까.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칠 것 같으면 단 한두 마디로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은 제 인생에 그밖에 없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서. 요슈아는 부드러운 손을 그에게 건넸다. 매서운 추위가 손길이 닿자마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산장으로 향하며 오르는 느긋한 경사의 비탈길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양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쌓인 눈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가지 잎에 남은 약간의 새싹이 마지막 힘을 짜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땅을 덮는 하얀 융단 위에는 고개를 높게 쳐들어도 그 끝이 가늠이 가지 않는 나무가 제리의 시선을 끌었다. 언젠가 저런 나무 위에 올라가면 어떨까? 제리의 중얼거림에 요슈아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분명 자유로운 기분이 들지 않을까……나. 올라가 본 적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한눈에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슴이 상쾌해지는걸."
"그럼 그때가 오면, 같이 올라갈게."
"……너는 늘, 당연하다는 듯이 날 벅차게 만드는 말을 해주네…. 그래서 가끔은 정말 꿈같아."

두 사람의 가까이에 있던 나무가 때마침 바람결에 잎을 흔들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입에서 나오는 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산이라고는 했지만, 분명 정상. 요슈아, 그리고 브레이브 차일드가 언젠가 닿을 정상까지 올라갈 때마저도 제리가 곁에 있어 줄 것이라는 나른하고도 기쁜 확신이 들었다. 나도. 제리의 입에서 간결하고도 무거운 대답이 나오고서 얼마 안 가 산장 하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로그하우스 풍의 목조 저택에 가까운 산장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로 이루어진 1층이 그들을 반겼다. 벽을 둘러싼 거대한 유리 창문과 고풍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곁들어져 한껏 분위기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굉음과도 같은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응, 갇혀버렸네……."
"…정말, 정말로 미안해. 설마 판다 사장이 애인하고 함께 있을 때도 이럴 줄은…."
"으응,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했지? 어쨌든 사장……님도 어느 정도 예상하셨던 거라면, 엄청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고. 쓰여 있는 대로 3박 4일만 버티면 나갈 수 있겠지!"

그래도……. 한껏 쳐진 요슈아의 눈썹을 본 제리가 오른손 검지를 뻗어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가 이렇게 자책하거나, 혼자서 멈춰있을 때면 제리는 그에게 다가와 이끌어주듯 손을 내밀었다. 제리가 눈을 둥글게 말고 웃었다. 그리고 요슈아랑 같이 산장 조난이라니, 솔직히 조금 재밌어져 버렸고. 그 실없는 농담에 그는 당황한 채로 무어라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분명 너도 무서울 텐데, 겁날 텐데. 내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겠지. 그의 손가락이 얼굴 앞에 머무르고 있는 제리의 손을 끌어왔다. 손끝이 얼어 차가웠다. 요슈아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천천히 엄지로 쓸었다. 제 얼마 안 되는 온기라도 전부 전해주고 싶다는 듯. 부드러운 피부가 한 번 닿고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네 손, 차갑구나."

……응, 그러게. 조금 춥네. 그러면서 제리는 그의 머리를 요슈아의 어깨에 얹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그의 입김이 요슈아의 귓가에 갈고리처럼 걸렸고, 간지러운 듯한 달콤한 감각이 요슈아의 온몸을 달렸다. 요슈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이 붙어 있는 살갗 아래 세포 하나하나에 신경이 집중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그는 제리의 검은 머리카락을 얇은 손가락으로 솎아댔다. 혈관이 도드라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검은 실타래 사이를 헤치듯 움직인다. 지금,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연인에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리고 싶진 않았다. 요슈아의 귓불이 단번에 홧홧하게 타올랐다. 벽난로 안 장작이 그를 놀리듯 불씨 튀기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를 부드럽게 껴안는 데까지만 머물기로 했다. 요슈아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리는 품 안에서 고개를 좀 더 안쪽으로 움직였다. 아아. 나는 정말 바보야, 바보……. 손등이 추위를 모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제리의 말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일단은 보컬리스트들끼리 있을 때보다는 덜 각박한 환경이었다. 산장 너머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꽉 채워진 스낵바, 동날 일 없을 듯한 수많은 장작 등이 그것을 증명했다. 물론 자연적인 추위와 고난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산장에 갖춰진 온방 장치는 죄다 먹통이었고, 이불과 벽난로의 열기 등으로 겨우 그것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제리의 허리에 털 담요를 가지런히 묶은 요슈아가 잠시 롤케이크 같다며 웃었다. 분명 보컬리스트 애들하고 있었을 때는 온종일 시끌벅적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들하고 같이 왔다면 난장판이 되어서 정말 조난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무언가가 시선에 들어와 다급하게 제리를 불렀다.

"뭔데?"

제리가 그리 물으며 요슈아의 근거리로 다가오자 온갖 서적과 레코드판으로 가득한 책장이 단번에 그를 압도했다. 8090 명반을 모아둔 것부터 시작해서 각종 음악 관련 책들은 먼지 낀 것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책장 바로 앞에는 광이 날 정도로 빛나는 축음기가 먹이를 기다리듯 나팔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요슈아가 눈을 빛내며 자신이 LA 시절 동경했던 밴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제리에게 설명했다. 제리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로 가득했다. 여기 혹시, 판다 사장의 사유지 같은 걸까……. 그렇다면 신기하네! 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리가 축음기를 쓸었다.

"어차피 갇힌 거, 네 노래가 듣고 싶다고 하면 욕심이려나?"

그 말을 들은 요슈아가 고민도 안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 우리는 조난객이니까 조금 멋대로 구는 건 괜찮겠지? 장난스러움이 가득한 말이 끝나자마자 요슈아가 아래에서 3번째 정도 위치한 책장 안쪽에서 레코드 하나를 꺼냈다. 재생용 바늘 아래에 레코드판을 끼워 넣으면 익숙한 반주가 산장 전체를 덮었다. 요슈아가 허밍을 하며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제리 또한 그것이 LA서 자주 요슈아가 부르던 노래임을 기억해냈다. 알파벳이 모이고, 단어가 모여, 노래가 된다. 작은 모임이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요슈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줄곧 그리워하던 풍경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건 색달랐다. 소파에 앉아, 손가락을 튕기며 박자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주변이 뙤약볕처럼 타오르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태양이 제리와 요슈아의 살갗을 찍어누르고, 땀이 흐르는데도 둘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마음에 온종일 들뜨게 하던 그때로. 아아. 정말 너는 나의 매 순간에 존재하는구나. 제리도 요슈아도 그리 생각했다.

그의 노래가 끝나고서 제리는 옅은 손뼉을 쳤다. 그는 설마 그 노래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며 머쓱하게 뺨을 문질렀다. 소파에 누워 기대듯 앉은 요슈아의 옆에 앉은 그가 담요 반절을 그의 무릎 위에 덮었다. 요슈아는 고맙다고 답하며 이것저것 추억을 늘어놓다가, 한참 말이 없는 제리를 보고 걱정스레 눈썹을 움직였다. 괜찮냐고 묻는 그에게 제리가 작게 대답했다.

"요슈아,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괜스레 더 걱정되어서."

그의 말에 요슈아가 급하게 손사래 쳤다. 아, 아냐 아냐! 정말로! 제리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약하게 튼 요슈아는 그 상태로 감정을 담아,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게 말했다.

"네가 말해줬잖아, 자책하지 말라고. 어려운 일도, 기쁜 일도 함께 나누면 괜찮을 거라고. 맨 처음에는 확실히 많이 당황하긴 했지만……. 네가 있다고 생각하니 괜찮더라. 신기하게도 말이야."

마음이 담긴 글자는 서로의 존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당장 그 말에 제리는 진심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불안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건네든 요슈아는 늘 그렇듯 웃어주겠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밤하늘에 수를 놓는 수많은 나무 위 눈들이 시야에 걸렸다. 서리가 낀 창문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던 요슈아의 어깨를 제리가 톡 건드렸다. 눈앞에 들이 밀어지는 단 향이 그의 비강을 자극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였어? 놀란 그에게 제리는 잠이 깼다며 말하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코코아, 타 왔어."
"아……! 고마워. 따뜻하다."

요슈아가 그것을 받아들며 푸스스 웃었다. 제리는 뺨을 쪼이는 누군가의 따스한 열기와 담요 안쪽으로 파고드는 추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계속 머무르는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원치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느긋한 건 좋지만, 그와는 별개로 쉽게 답답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신기하게도 누구보다 자유를 쫓으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정착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슈아의 옆모습을 보면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 않냐는 생각이 자신의 안쪽에서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제리는 진심을 전하는 데에 있어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도 네가 있어서, 이런 눈밭도 괜찮은 것 같아."

툭 튀어나오는 본심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요슈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간질거리는 심정을 어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어휘를 나열하여 재배치하고, 뒤섞어도 나오는 말은 가장 직설적이고 간단한 것이었다. 제리의 곱게 묶은 머리는 어느새 풀은 채로 허리를 간지럽혔다. 요슈아의 시선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부터, 손, 어깨, 얼굴로 천천히 올라왔다. 1초, 2초, 3초. 그리고 이윽고 그의 입술이 다급하게 열렸다.

"……정말로. 기뻐…. 그리고 정말 미안해! 사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뭐랄까, 제리 너랑 있으면……. 이런 산속의 산장 안의 풍경도 계속된다면 좋겠다고. 무심코 그런 생각 해버렸거든. 이런 말까지는 역시 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진심이니까.”

볼을 붉히고, 망설이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먼저 선수 쳐 버리는 요슈아를 바라보며 제리가 뺨을 긁었다. 그는 자신의 것과, 요슈아가 들고 있는 반도 안 마신 코코아 잔을 앗아가 부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요슈아의 붕 뜬 목소리가 제리의 귓가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해서 머물렀다. 눈앞의 사람이 나눠주었던 온기가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두 손을 뻗어 양 뺨 위에 얹었다.

"바보."

요슈아의 손이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과 함께 제리의 손등 위로 똑같이 얹어졌다. 너도, 나도. 우리 둘 다 바보네. 아하하……. 숨결이, 마음이 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뜬 숨이 겹쳐졌다. 몇 번을 짧게 마주했다가,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서 깊게 파고들었다. 제리의 허리가 요슈아의 손에 의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추위 따위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들이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귓불도, 손가락 마디도, 뺨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말하는 요슈아의 어깨를 약하게 툭 치고서, 제리는 곁눈질로 바깥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창 너머로 내리는 눈이 마치 설탕 가루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 향이 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리 느꼈으므로.


다행히 예상대로 4일째 되는 아침, 구조대가 찾아왔다. 구조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 요슈아가 대놓고 '거기 뒤쪽에, 홍보잖아'라고 말했지만 무시당했다. 역시나 산장은 판다 사장의 것인 듯했다. 둘은 산 아래로 내려와 겨우 밴에 탑승했다. 둘이 아무래도 첫 번째 구조―라고 쓰고 서바이벌이 끝난 뒤 수습하는 단계―대상이었던 건지, 차의 크기에 비해 아직 둘밖에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홍보가 한숨을 푹푹 쉬며 재밌었냐고 물었다. 예상했던 낯빛과 다르게 멀쩡해 보이는 둘 때문이었다. 제리와 요슈아는 서로를 보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웃음은 일상 중 하나였다.

"응, 무척 즐거웠어."

요슈아와 제리가 동시에 그리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못마땅하진 않다는 듯 따뜻한 보리차를 건넸다. 우리 둘 다 서로가 구조대이자 안심할 수 있는 존재.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마음 앞에서는 그 어떤 뜨거운 것도 설산처럼 차가웠고, 그 어떤 차가운 것도 벽난로의 장작처럼 뜨거웠다. 요슈아는 남은 한 손으로 제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틈새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깍지를 꼈다. 제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당연한 순서를 밟듯 머리를 기댔다. 그 위로 요슈아의 고개가 떨어졌다. 긴장이 풀리고 추위가 녹기 시작하니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정신을 차리면, 이번에는 반드시 판다 사장에게 한마디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두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을 태운 밴 뒤로 새하얀 설산이 멀어졌다. 잘 가, 메이데이. 세 번 반복할 필요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