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STAN DON’T PANIC
BABY STAN DON’T PANIC

@juststayus

괴상 이상 현상 비디오 중독자들 前 편: Panic singer

 

 

"'클로즈업할 준비가 되었어요, 드밀 씨'¹ 선셋 대로(1950). 빌리 와일더의 영화로, 잊혀진 무성 영화 여배우의 광기와 실패한 각본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거론된다. 는 꼭 내 귀로 듣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사실, 제리 네가 잠들 거 알고 있었어."


제리가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팔짱을 낀 채로 푸념하듯 말했다. 맹세컨대 제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잠들 생각이 없었다. 장르 태그에 로맨스 한 번 붙었다 하면 스태프 롤에 비척비척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 손꼽히는 위상이 있어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요슈아는 잠시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가 다시 날카로운 은색 눈으로 메뉴를 훑어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동안이나 제리와 재잘거리다 잠들었던 것이 자그마치 이 주 하고도 사흘 전 일이었다. 당분간 사무소도 긴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고 미루고 미루던 것을 해치울 차례였다. 둘에게는 두 번째 고향이라도 불러도 손색없을 캘리포니아의 낭만, 이방인 대부분이 꿈꾸는 기회의 도시. 여행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각자가 홀로 채우던 시간을 석 달이나마 같이 있는 시간으로 상쇄시키고 싶다'라는 다소 기운 넘치는 이유였다. 공항에서 맞이하는 번잡한 출국 수속은 낭만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정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40대 남자가 수하물을 착각해 들고 가려고 하는 걸 제리가 먼저 발견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입에 맞지 않은 기내식까지 합하여 좋은 것이 별로 없었으나, 막상 발을 딛고 고개를 어렵사리 들면 지중해의 바람이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따스한 기운이 맨 피부에 오롯이 닿아서야 겨우 그곳에 다시 오게 됐다는 걸 느꼈다. 처음엔 제법 번지르르하게 입고 다녔던 요슈아가 서서히 홈웨어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확실하게 거리를 커다란 구처럼 뭉쳐 다니는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외관은 눈에 띄었다.

코팅된 페이지를 넘기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하얗고, 앞으로 몸을 숙이자 보드랍고 덥수룩한 곱슬머리가 살랑거렸다. 빈티지 전문 샵에서 43달러에 주고 산 빈티지 가죽 재킷은 허리를 완전히 덮었다. 어디 그뿐만인가. 짙은 워싱을 한 데님이 그의 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소맷단 부분이 닳은 채였다. 시티즌 오브 휴머니티의 1980 에디션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테이블 아래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엎드린 채 아쉬움을 토로하는 제리의 구두를 장난스럽게 툭툭 건들고 있었다. 제리는 커다란 스크린에 억지로 화질이 늘려진 흑백 멜로 영화를 되새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알면 왜 안 깨웠어."

 

요슈아의 두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갔다가 제리의 물음에 메뉴판 모서리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음. 그는 몇 초간의 짧고도 긴 시간 동안 고민을 이어가며 길게 소리를 내뺐다. 유키가 드럼 스틱을 두세 번 두드릴 수 있을 정도 간격.


"네가 너무 잘 자니까, 그만."

"…내가 그렇게 잘 잤어?"
"뭐어, 괜찮아. 나는 또 봐도 돼."

 

그는 스스럼없이 거짓 하나 안 보태고,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으며 가벼이 대답했다. 처음엔 느슨한 자세에서 똑바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던 고개가 서서히 요슈아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툭.' 체구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에게 완전히 기대었을 때 볼 수 있는 가르마. 양쪽 볼이 달뜨게 만드는 기억. 제리가 못 살아, 라며 요슈아의 손등을 약하게 꼬집었다. 어렸을 적부터 서로의 영화 취향 같은 사소한 호불호는 진즉 알고 있었다. 요슈아가 엄살을 부리며 한술 더 떴다.


"로맨틱한 대사는 제리의 자장가 같은 거니까."
"……그만 놀려!"


기어코 제리가 소심하게 요슈아의 발목을 약한 힘으로 건드리고 나서야 요슈아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쿡쿡대는 소리까지는 막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주크박스서 익숙한 밴드 수록곡이 흘러나왔다. 분주한 대도시 한가운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과거의 타임캡슐 같은 전형적 아메리칸 24/7 다이너 간판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WELCOME'이라는 일곱 글자의 간판에 전구 달린 줄이 가장자리에 얽혀 있었다. 그 위쪽을 차지한 햇빛은 하릴없이 무더위를 생산해 내며 얼룩 묻은 창문을 빛냈다. 색이 바랜 분홍과 파란색의 오묘한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는 벽은 짓궂은 청소년들의 낙서로 가득 찼다. 제리가 SNS에서 보기로는, 가본 적 없는 이들마저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향수를 느낀다고도 했다. 그러나 향수를 느끼기엔 영 만만치 않지 않은가?
다이너 내부에선 튀김 기름과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한 부스에 앉은 노부부는 마지막 파이 조각을 두고 다투고 있었고, 카운터 쪽 바에 앉은 소년소녀들은 서로 킥킥거리며 속삭였다.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피곤해 보이는 웨이트리스는 달걀과 베이컨 접시를 테이블로 나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간색과 흰색 체크무늬 식탁보, 크롬 바 스툴, 구석에 50년대 로큰롤을 틀어주는 주크박스까지!―물론 전부 구식, 중고, 사용감 넘치는 이백 퍼센트 카피 디자인 인테리어―주방 저 안쪽에서부터, 베이컨이 구워지며 작은 구슬을 쏟듯 지글거리는 소리와 플라스틱 그릇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가 뒤섞여 끊임없이 배경 소음으로 들렸다. 리놀륨 바닥은 긁히고 얼룩져 있어 종종 할 일 없이 배회하는 웨이트리스가 걸레질해도 상태가 비슷했다. 뭐 이런 것도 낭만이라면 낭만일지도 모르겠다.

요슈아는 메뉴를 결정하고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제리로서는 꽤 오랜만에 듣는 그의 영어였다. 그는 능숙하게 페이지 곳곳을 가리켰다. 고개를 숙여 끄덕이는 웨이트리스의 명찰에는 '에이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요슈아는 마지막까지 주문한 뒤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제리를 바라보았다. 제리가 엎드린 몸을 일으켜 그냥 아이스 티 한 잔만 달라고 하려던 순간 이미 웨이트리스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기…"

 

순진무구한 낯이 되돌아보았다. 제리는 뺨을 긁으며 말했다.

 

"제 아이스 티도 한 잔 주시겠어요."

 

그제야 웨이트리스가 놀란 듯이 매니큐어가 발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었나? 동양인 커플이 24시간 다이너의 구석 부스에 와서 아이스 티를 주문하는 게? 제리 또한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고 웨이트리스의 어색한 자백으로 종결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일행분께서 손님 것까지 전부 시키신 줄 알고……. 제리는 그 말을 듣고 눈알을 굴렸다. 저 멀리 주방으로 도망친 웨이트리스의 리본이 자꾸 생각났다. 빨간색. 지금 제 눈앞에서 웨이트리스가 얼버무린 말끝을 짐작하고 있는 요슈아의 얼굴과 비슷한 색. 제리는 복수의 때가 왔다는 걸 눈치챘다.


"괜찮아. 요슈아의 한 끼가 남들 두 끼 정도의 양이라는 것도 난 귀엽다고 생각해. 모르는 사람은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 놀릴 거면 멋있다는 쪽이 좋은데 말이야."

 

대꾸하는 투에서는 작은 불만이 드러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꿉친구였다. 요슈아는 자신의 그런 반응이 더더욱 멋있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고 있을까. 제리는 요슈아를 보며 느리게 미소 짓고는 아까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 숙소 근처 길목에서 발견한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고전 영화 수 편을 대여했다는 말. 심야에 영화관에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들어가 둘만 남은 걸 확인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재개봉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그럴 일은 없었다.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백 가지 재미 중 한 개를 느끼지 못해도 남은 99개가 있었다. 제리가 방문한 그 비디오 대여점은 OTT 플랫폼에도 나오지 않는 수백 개에 다다른 고전의 늪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격도 의심 갈 정도로 싸거나 비싸지 않고 적당한 값을 불렀다. 제리는 미래도 예상치 못한 채, 요슈아와 즐길 수 있을 법한 비디오들을 골라 집었었다. 제리가 재잘대며 요슈아에게 닳고 닳은 제목들을 나열하며 소개했다.


"혹시 모르잖아?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제리가 말하는 도중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려진 크림소다가 테이블 위에 나왔다. 중간에 하트 모양으로 구부러진 분홍 빨대에 입술을 대고 쭉 빨았다. 제리는 속으로 일반 빨대가 편했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면에선 지극히도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녀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요슈아는 어느새 턱을 괴고 제리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영감을 얻는다면 그건 그 영화를 본 네 감상에서일 거야. 내 음악은 사랑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으니까."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각은 있는 걸까. 단어 끝마디마다 녹아 있는 애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리는 자신도 모르게 연인보다는 데빌즈의 자세에 서게 되었다.


"...이런 게 귀엽다고 하는 거야."
"에?! 세일즈 포인트를 전혀 모르겠어. 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네에."


제리가 한 번 더 소다를 빨아들였다. 톡 쏘는 탄산이 목 안쪽을 자극했다. 요슈아가 '정말……'이라며 불만족스럽다는 양 음료 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제리에게까지 닿았다.

 

나른한 오후의 온기가 둘을 감쌌을 때쯤 식사가 끝났다. 스크램블은 설익었고, 베이컨은 기름기가 심했다. 10달러 한두 장을 꺼내 요슈아가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그동안 제리는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다짐했다. 뭐든 좋지만, 이왕이면 이곳에는 다신 오지 말자고. 아마 요슈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은식기 옆에 놔둔 스마트폰과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계산을 마치고 제리의 곁으로 돌아오려는 그 순간, 낡은 바닥 타일 틈새에 제리의 부츠 앞코가 걸렸다. 5cm의 굽이 있는 부츠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제리를 바닥으로 이끌었다. 곱게 양쪽으로 땋은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향했다. 그가 놀라 소파 끄트머리를 억세게 잡고 겨우 중심축을 바로 세웠다. 다행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탱할 수 있었다. 요슈아가 급히 달려와 그를 챙겼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여기 타일 바닥 때문에 그런가 봐. 괜찮아, 나가자."

 

문제는 통증이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휘청거리다가 겨우 일어난 제리의 어깨를 누군가가 제대로 치고 지나갔다. 제리가 반사적으로 사과를 뱉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흉흉한 인상의 남자는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으르렁거렸다. 그의 모습에서 언뜻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제리를 거칠게 내려다보면서 혀를 찼다. 요슈아가 제리의 오른쪽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이 애한테 무슨……"

 

이왕 타국에 왔으니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리가 요슈아의 팔을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요슈아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 짜증이 섞여 미간에 주름이 잡힌 상태였다. 그는 예의 없는 괴인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한테도 화를 되돌리는 사람이었다. 좋은 것만 겪게 해주고 싶은데, 그리 생각하며 요슈아는 제리가 그냥 가자고 재촉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슈아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제리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짐짓 대형견처럼 느껴져 쓰다듬을 뻔했다. 생각을 뒤로하고 발이 먼저 움직였다. 벨이 달린 문을 향해 몸을 돌려 나갔다. 요슈아는 석연치 못한 듯 뒤쪽을 자꾸 쳐다보았지만, 이미 따지기엔 멀리 갔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홀로 남은 남자는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남루한 운동화를 신은 발치에 은색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손이 그것을 집었다. 줄기차게 떠들던 소녀가 남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웩'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 이 작은 해프닝에서부터 시작된 어떠한 사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쿄로 돌아갈 때까지 이 젊은 연인이 제리가 빌린 세기의 명작 필름을 보는 일은 없었다.

 

 

어깨를 붙잡았던 요슈아의 오른손에 힘이 빠졌다. 그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평화로운 길거리에 근심거리 하나를 더했다. 계산 같은 건 좀 더 빨리 끝내고 옆에 있는 게 맞는 건데. 내면에서 과장된 자기책임이 몽글거리는 물방울처럼 맺혀 뚝뚝 흘렀다. 쾌청한 날씨가 더더욱 그의 울적한 기분을 심화시켰다. 아까는 미안하다며 제리의 품에 머리칼을 비볐다. 일전에 일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 클럽이었었나. 제리는 시끄러운 EDM과 형형색색의 칵테일, 끈덕지게 달라붙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낚아챈 연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제리는 맥락을 벗어나는 생각을 느긋하게 뱉어주었다.


"요슈아는 강아지 같아."
"……갑자기?"
"하는 생각이 다 보여서."

 

맞춰볼게……. 지금도 자책 중이지? 제리의 말에 요슈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연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들키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영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제리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조용히 젊은 연인의 어깨를 도닥였다. 요슈아는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뗀 채, 걸으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너는 늘 내 탓을 안 하네."
"탓할 일이 없는데 왜 탓해? 그게 이상한 거야."

 

제리가 정말로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요슈아는 헛기침하며 재킷을 고쳐 입었다. 물론 이번 LA 행 정도는 내키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공기를 맨 피부로 느끼자마자 기껏 열심히 다듬고 쌓은 목마가 힘없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익숙해지지 않는 우울감과 탈력감은 높은 곳을 한없이 동경하도록 만들었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도 마음은 다잡아 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하얀 꽃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 것은 향수병을 악화시켰지만, 일시적인 기운만큼은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괴로웠던 이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극히 잘 알았으니, 용기를 내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제리의 처방 자체가 요슈아였다. 원망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있다면…….

탁. 두 볼이 잡힌다. 제리는 이따금 그가 정신을 차리려면 따끔하게 말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다 잔을 쥐었던 손바닥은 서늘한 한기가 살짝 감돌았다.


"이렇게 자기 탓하기 금지, 말했었지?"

 

요슈아의 동공이 단번에 수축했다가 다시 팽창했다. 그는 끄덕여지지 않는 고개를 양손 안에서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제리는 자기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내리는 팔뚝을 슬그머니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흉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요슈아의 축 처진 낯빛도 활력을 되찾아갔는지 금세 얼굴이 펴져 있었다. 그럼 집에 가면 네가 대여했다는 영화나 볼까,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들뜬 걸음이 보도블록을 흥겹게 밟아갔다. 제리 옆에서 허밍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트로이메라이의 간주 부분이었다. 제리는 박자에 맞지 않는 걸음걸이를 일부러 반 박자 늦췄다가 다시 걸었다. 유키를 대신한 드럼 소리였다. 기타나 베이스는 대신할 수 없으려나, 제리는 이따금 했던 생각을 또다시 해보았다. 만약 나도 음악을 했으면 어땠으려나. 세간에서 감동적이라 말하는 비긴어게인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됐으려나.
물론 비긴어게인도 중간에 보다가 잠들었다.

 

 

아담한 크기의 별장은 석 달 정도 머무르기엔 딱 좋은 조건이었다. 중간에 좋아했던 단골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렸다가 마켓에 다녀오느라, 둘은 시간이 꽤 지나고서 도착했다. 양손에 가득한 짐을 현관 앞에서 잠깐 내려놓았다. 요슈아가 잠깐 업무 통화를 받을 동안, 제리가 문을 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요슈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땀방울이 턱선에 송글송글 맺혔다. 제리는 아예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핸드백에 있는 짐을 닥치는 대로 열어 보았다. 립밤, 여분 머리끈, 핸드폰, 손거울, 지갑……. 있을 법한 귀중품은 다 나왔지만 딱 하나의 행방은 묘연했다. 제리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공중에 뜬 듯이 나른한 인상을 하던 그가 적잖게 당황한 얼굴을 지었다. 왜, 전적이 있잖는가. 스카이다이빙이라도 했었을 때마냥.

 

"……나 집 열쇠 잃어버렸어."

 

요슈아가 곧장 통화를 끊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제리의 짐을 핸드백에 넣어주고서, 자기 품에서 스페어 키를 꺼냈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스페어 키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기실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도 아니었지만, 본능에서부터 따라오는 감이 있는 법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거실이 그들을 맞이했다. 로맨스 영화 보다가 좀 졸았다고 장르를 스릴러로 바꾸면 어떡해……. 제리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스크림처럼.

 

 

 

괴상 이상 현상 비디오 중독자들 後 편: Panic Lover

 

 

 

스릴러나 호러 무비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심호흡이 필요하던가? 그리고 올바른 추론 능력과, 끝없는 망상을 멈추기 정도. 요슈아는 제리부터 급하게 제 쪽으로 당겼다. 제리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요슈아의 눈꺼풀이 맥없이 흔들렸다. 새하얀 머리카락으로 덮여져 있는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이 폭발한 것처럼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충동적인 감정이 몰아닥쳤다. 잔향으로 남아 있는 매캐한 담배 냄새와, 진득하게 남겨진 발자국. 이건 판다 사장이 했다기엔 도를 지나친 수위였다. 애시당초 저번의 일이 있고 나서는, 요슈아도 판다 사장에게 휴가 스케쥴을 아예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그는 제리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제대로 이쪽을 봐줘, 제리."
"……응."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집요하고 똑바르게 응시했다. 요슈아는 자신보다도 제리의 상태를 챙기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다. 제리는 자신의 양 팔뚝을 잡은 손의 진동이 느껴져, 조심스럽게 그것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둘 다 맥박을 느낄 수 있도록 손목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빠르고, 거칠었다. 느리게 숨을 뱉었다가 삼켰다. 가까스로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맥박이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알았어……. 응, 안 떨어질게."


책장은 옆으로 눕혀져 있었고, 내용물이 뒤집힌 보물 상자처럼 쏟아져 나왔다. 카펫 위에는 책, 액자 등이 깨진 도자기 조각과 함께 뒤섞여 흩어져 있었다. 램프는 전구가 깨지고 받침대가 찌그러진 채 바닥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침실이나 부엌, 다른 방은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문을 연 흔적조차 없었다. 제리는 거실을 살피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수십 편에 다다르는 고전 명작 영화 비디오가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다. 요슈아 또한 이외의 것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조금 어지럽혀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축에는 꼈을까…….


"저기, 제리……. 잠깐만 들어가 있을래? 이것들은 내가 치우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다칠 수도 있고."


요슈아는 일부러 불안을 감추려는 듯 웃었다. 태연자약한 척하려고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제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푹 떨궜다. 역시 LA에 오는 게 아니었어. 이런 이상한 일이나 당하고. 진즉 열다섯의 성장통은 지나간 줄 알았는데 전부 오만에 불과했다고 제리는 자책했다. 걸쳐 입은 베스트 아래 셔츠 안쪽, 그 안에 든 가슴이 지나치게 떨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려서 그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손등 위로 툭툭 작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깨끗하고 투명한 색채가 손등의 살결을 흐렸다. 안개 낀 생각으로 덧없이 머릿속이 채워져 갔다. 우울은 급진적으로 다가와 그를 괴롭혔다. 그대로 놔두면 몇십 번이고 고층 빌딩을 바라보던 열다섯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요슈아가 급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자기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청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 요슈아. 괜찮아?"
"그걸 물어보고 싶은 건 나야……!"


제리가 자기 손목에 칼날을 댔을 때와 비슷한 불안함이 그를 덮쳤다. 음악보다도 소중한 그였다. 털끝이라도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 없이 몇 번이고 끝을 생각했던 열다섯의 제리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그는 단 하루도 어떠한 아쉬움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하루라도 더 빨리 곁에 있었다면 그를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다. 제리의 붉은 눈가가 사정없이 깜빡거렸다. 요슈아가 힘을 줄수록 가죽 재킷이 더 탄탄하게 당겨졌다. 그 매끄러운 감촉에 제리는 머뭇거리며 손을 올렸다. 요슈아는 고개를 들고 물기 어린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리의 사고가 온통 요슈아에게로 향했다. 그는 말 중간마다 숨을 멈추면서도 할 말을 전부 했다.


"LA에 온 건…… 우리 둘 다 마주해야만 하는 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상처받는 모습 같은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무리하게 데려왔다면 정말 미안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게 해 줘."


그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덮인 이마를 맞대었다.

 

"나는 네 힘든 모습이 제일 슬퍼. 널 정말, 정말 좋아하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그러니까, 원망할 거라면 차라리 나를 향해줘."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건 누군가의 악의보다도 선의다. 제리는 문득 그런 감상을 받았다. 바보처럼 두 사람 모두 눈두덩이가 한없이 부을 예정이었다. 제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간단한 증명을 조금씩 다시 되새겼다. 눈가를 억세게 문질러 눈물을 닦아낸 뒤 요슈아에게도 똑같이 행했다. 탄성을 내지르는 걸 무시하고 일부러 더 강하게 꾹꾹 눌렀다. 요슈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리를 쳐다보자 그는 비뚜름하게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네 탓 안 해."
"하지만……!"

 

조급하게 말을 꺼내는 요슈아에게 제리는 스스럼없이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내 탓도 안 할게."


그걸로 됐지. 짐짓 잠에서 막 일어난 듯한 스타일이 된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그가 정리해 주려 손을 뻗었다. 요슈아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푹 숙여 제리가 손을 움직이기 쉽게 만들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란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요슈아는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듯 바닥을 뚫어지도록 내려다보며 입술을 두드리다가, 서서히 미소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만 몰아붙였다가 더 힘들게 만들었을까. 그런 가정은 아무 의미 없었다. 지금 제 머리를 건드리는 그 손길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처음 만날 때 보여주었던 그 따스함이 아직도 변치 않았다.² 트로이메라이 오마주 / 最初に会えた時見せていた笑顔今もまだ変わらないままで

 

 

"애초에 그런 가게가 없다고?"
"에, 응. 4번가는 웬만해선 새 가게가 안 들어와. 아, 물론 네가 거짓말한다는 뜻이 아니야! 절대로!"

"……해명 안 해도 알고 있었는데. 해명하니까 수상해."
"역시 너야! 알아주는 구…… 아니! 그렇게 결론이 나면 안 돼…!"

 

요슈아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진정되고 거실을 정리한 뒤, 어지럽혀진 선반을 차곡차곡 다시 채우자 한적한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어플로 스마트 맵을 켜서 대여점 이름까지 넣어봤으나 지도에 뜨지 않았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상황이 영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슈아는 마지막 남은 책 한 권을 선반에 끼워 넣고 먼지를 털고 나서, 제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혹시 무슨 영화들이었는지 기억해? 타이틀이라든가, 특징들이라든가.”


제리는 쿠션을 끌어안은 왼팔에 힘을 주었다. 남은 오른손으로는 따가운 눈에 얼음을 문지르고 있었다. 다이너에서의 요슈아처럼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조용히 고민했다.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로맨스를."
"……잘 거면서."


제리는 괘씸한 명예훼손―대충 사실적시에 의한 연인을 부끄럽게 만든 죄인 것이다―에 대답하지 않고 제 눈을 문지르던 얼음을 버린 뒤, 얼음 보틀에서 하나를 더 꺼내 요슈아의 부은 눈가에 냅다 갖다 댔다. 요슈아가 차갑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아예 편하게 앉아 가만히 손길을 받았다. 제리는 정확한 타이틀들을 나열했다. 로마의 휴일, 시티 나이트, 레베카, 싸이코, 카사블랑카…. 이외 16개의 작품 이름이 그의 입에서 더 나왔다. 몇몇 개는 플랫폼에 고스란히 있긴 하지만 비디오를 대여해서 보는 재미도 있으니 겸사겸사 같이 값을 냈었다. 요슈아는 이미 본 것들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요슈아, 생각보다 영화 좋아하는구나."
"헤에, 당연한걸. 그러니까 심야에 그 번거로운 짓을 하며 극장에 걸린 걸 보고 오는 거 아니겠어."

 

선글라스에 두꺼운 옷, 일행이 아닌 척 따로 들어와 각자 앉고, 상영이 시작된 후에 아무도 없으면 그제야 붙어 앉기. 그리고 나올 땐 다시 떨어졌다가 집에 가는 길에 노곤한 상태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기. 그것도 하나의 낭만인가 생각했다. 물론 소꿉친구를 놀리기 좋아하는 요슈아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뭐어. 사실은 영화에 집중하는 네 옆모습을 보는 게 더 즐거울지도."
"……일부러 부끄러운 소리 하는 거지?"
"아하하……. 당연하지. 그래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잖아."³ 카사블랑카(1942). 마이클 커티즈 감독. 영화 내에서 주인공 릭에게 한때 연인이었던 일자가 반복적으로 내뱉는 대사. 원문은 "Here's looking at you."

 

제리는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그게 한 영화의 대사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짓궂게 치켜 올라간 그의 눈썹과 장난스럽게 내리깐 목소리 톤이 어떤 패러디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리가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아 진짜 차가워, 제리…….


쉴 틈 없이 일이 닥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경찰이 신고와 관련해서 찾아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네가 먼저 말하라는 식으로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척 보기에도 모범적인 나라의 공무원은 아니었다. 제리는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땋아 묶으며, 해결되지 않은 일은 뒤로 하고 요슈아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요슈아가 현관문을 열자 대화 소리가 거실 소파까지 다 울려 퍼졌다. 녹슨 경찰 배지를 엉성하게 찬 남자가 콧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친구분께서 비디오를 대여하셨다. 그런데 키를 잃어버린 뒤에 돌아왔더니 그 비디오들만 몽땅 사라졌다 이 말이지요."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관은 뒤쪽에서 담배를 꺼내는 다른 남자에게 그것 좀 꺼내 보라고 외쳤다. 그동안 남자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요새 그런 신고가 많이 들어오긴 합니다. 요슈아는 피어싱을 낀 귓불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쪽의 남자가 앞으로 걸어와 요슈아에게 파일첩 페이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빼곡하게 이름과 날짜, 주소지가 정리된 한 차트였다.


"이게?"
"비슷한 일로 신고한 신고자 목록이에요."


그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는 이내 손을 떼고 팔짱을 끼고서 그들의 설명을 기다렸다. 설명보다 호구조사가 먼저 올 줄은 몰랐지만. 남자는 헛기침하며 왁스를 왕창 발라 넘긴 머리를 쓸어 올리고, 파일첩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런 다음 볼펜을 딸깍대며 요슈아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여행하러 오신 겁니까?"
"네, 석 달 정도."
"두 분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요슈아는 고개를 돌려 제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리는 어느새 헤어 스타일을 전부 정돈한 상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슈아가 얼굴을 숙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밴드 보컬이고, 제 애인은……. 그는 제리가 그랬듯 말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직장인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질문은 그걸로 끝인 듯 남자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요슈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만 겪은 일이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도 전부 겪어보았다면 해결은 빠를 터였다. 경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요슈아와 거실 안쪽에 있는 제리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제리에게 닿자 요슈아가 처음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남자가 팔짱을 끼자 거칠게 다루어진 경찰복이 안쪽으로 구겨졌다.


"무슨 영화 같은 일이긴 합니다만, 가수 양반도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머무를 곳에 도둑이 들었는데……. 열쇠는 제대로 바꿔 놓았지만."

"아니, 뭐. 맥거핀⁴ 이야기에 동기를 부여하고서 구체적 설명 없이 퇴장하는 장치. 앨프레드 히치콕: "It's always called the thing that the characters on the screen worry about but the audience don't care." "보통 '영화상의 인물들은 걱정하지만 관객들은 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죠" 이라는 거죠."
"……네?"
"그럼 이만."


남자는 대충 한 번 더 신경 쓰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다른 두 경찰을 데리고 다른 곳을 향해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오래간만에 황당하다는 감정을 느꼈는지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멍하니 그곳만 바라보았다. 흡사 모모치가 늑대무리에 쫓겼을 때 문을 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을 때처럼…. 이곳에 온 뒤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영화라는 매체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말, 지극히 아무 공권력 없는 개인으로서―수많은 데빌즈를 불러 조사해 달라고 할 것 또한 아니지 않는가―그가 열쇠를 바꾼 것이 최고의 조치였다. 그리고 창문에 도난 방지용 락을 달아두는 정도. 제리는 방금 대화를 전부 들었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 다 끝난 거지, 라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만약 여기서 요슈아가 추리, 서스펜스, 스릴러,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져 오는 활약 극 장르의 주인공이었다면,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들을 전부 포기하고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리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 지금껏 일어났던 그 모든 이상한 일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요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현관문도 닫지 않은 상태에서 제리의 양쪽 허리를 잡고 그대로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훌쩍 높아지는 시야에 제리가 놀란 나머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조금 전 대화에서 이렇게나 기쁠 만한 일이 있었나? 열심히 그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이 나오는 건 없었다. 노란색 리본이 눈에 띄는 하얀 투피스 원피스가 갑작스러운 활공에 정신없이 흔들렸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별장 마당에 핀 아카시아 꽃향기가 슬그머니 들어와 코를 간지럽혔다. 바람이 따스했다. 제리의 놀란 심장이 겨우 가라앉자, 그는 요슈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가닥가닥 공중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 사이에 자신을 닮은 새하얀 브릿지. 조심스레 마음을 엮어 전해보려고 했으나, 요슈아는 터져 나오는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대로 뱉었다.


"있지. 제리! 나, 너를 정말 좋아해!"
"가, 가,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원래는 예약해 둔 크루즈가 있었단 말이야. 거기에서 프러포즈를 할까, 생각했어. 지금 바지 주머니에 반지도 있고."

"저기, 저기. 정보량이 너무 많아……."


제리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애정에 기쁜 건지 놀란 건지 구분할 틈도 없었다. 그저 요슈아가 자신을 떨어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고서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벅차오르는 가슴속을 간지럽히는 이름 모를 낯선 충동. 가장 단순하고 널리 알려진 다섯 음절의 말을 몇 번이고 입에 올리고 싶었다. 사랑해. ​愛してる。 그 말은 어쩜 그리도 지독하게 상대만을 바라보게 되는 문장인가. 요슈아는 흰색 실크 셔츠가 구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채 제리를 좀 더 가깝게 안았다. 제리는 부끄러운 기색이 덜해진 듯했다. 갑작스럽고 무겁게, 늘 배로 돌려주는 애정은 그의 주특기였으니까. 이 정도 시간이면 그래도 빠르게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좋아한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아서. 아아, 나는 정말 글러 먹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느꼈어. 나도 참 바보지. 웬 이상한 일도 당하고, 무드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에서. 계획한 것까지 전부 말해버렸네."


요슈아의 볼이 뙤약볕에 쬔 것처럼 아주 빨갛게 붉어졌다.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도, 몇 번을 보아도 머릿속에서 재생하게 되었다. 몸을 움직였다. 귓불에 무거울 정도로 매달린 링 귀걸이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의 어린아이 같은 고백에 어떻게 답장해야 할까, 기쁜 고민에 휩싸였다. 제리는 연인이기 이전에 친구였고, 친구이기 이전에 소중한 조력자였으며, 조력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 진즉 그만둔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나침반의 끝처럼 날카롭게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둥글게 깎았다.


"그럼 우리 둘 다 글러 먹은 사람이야."

 

잠깐 내려줘. 제리의 말에 요슈아가 팔의 힘을 조금씩 늦춰 아래로 내려보냈다. 마룻바닥에 닿는 맨발이 부드럽게 안착했다. 그는 손을 떼고 뒷짐을 지었다. 요슈아는 그제야 수줍은 듯이 볼을 긁었다. 제리와 닮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가 봐, 응. 그래서 기뻐. 너는?"

"응, 나도 그래서 기뻐."

 

말과 다르게 제리는 그대로 빙글, 등을 돌려 가방을 챙겼다. 요슈아가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돌아보는 제리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리는 아침 식사 메뉴를 묻듯 가볍게 바람을 훑으며 대꾸했다.


"크루즈는 언제인데?"

 

계절마저도 요슈아를 닮아 따스한 나날. 제리는 드문드문 끊기는 생각을 삼켰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던 나날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손을 뻗었다. 앞으로도 종종 이해할 수 없고 끝없이 괴로운 일이 생길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곁에 그가 있다면, 제리 또한 요슈아의 말대로 아무렴 괜찮을 것 같았다.

 

"……돌아가는 전날?"


제리는 한껏 기대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한 아주 간단명료한 말로 그 기대를 보여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높은 음표들이 표류하여 하나의 마디를 만들었다. 청년의 웃음이 스타카토를 그리듯 경쾌한 울림으로 내세워졌다. 견고히 쌓은 목마가 한 층 더 세워졌다. 요슈아의 마른 손이 제리를 끌어당기면 뒤꿈치가 들렸다가 다시 바닥과 맞부딪혔다. 젊은 음악가는 노련한 박제사처럼 행복에 바늘을 꽂아 넣었다. 퇴색되지 않도록, 언제 꺼내 보아도 미소가 배어 나올 정도로 좋도록 열을 가해 굳혔다. 영원을 쫓는 무리를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수풀의 풀 내음과 하늘을 헤집어놓는 주름진 새하얀 비단들. 손에 닿는 맨살과 실크의 경계선.
카메라는 두 사람의 작디작은 틈을 클로즈업했다. 아주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가 바람에 맨살 솜털이 정처 없이 간들거리는 풍경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마지막 장면이 가까워지자 줄곧 틀어지던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에 흐르는 재즈가 끊겼다. 그리고 피아노 단독의 무비 스코어로 대체되었다. 필름이 끊겼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청년은 이것이 어떤 누군가가 보는 영화나 만화, 드라마, 혹은 그 외의 매체여도 가장 행복한 이는 본인이라고 느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별장으로 돌아온 제리는 품 안에 한가득 간직한 기념품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건 브레챠 멤버들 거, 이건 요슈아, 이건 친구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여유롭게. 귀에 낀 블루투스 이어폰을 등 뒤로 지나가던 요슈아가 뺐다. 제리가 돌아보았을 땐 이미 요슈아의 귀를 막고 있었다. 제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감상을 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야. 어때."
"누군지 몰라도 노래를 너무 잘하네."


요슈아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녹음한 것을 다시 듣는 건 어떤 기분인지. 제리는 알 방도가 없었다. 음치인 본인의 노래를 그닥 녹음할 마음도 없었고. 볼륨을 크게 해 놓았는지라 단단히 틀어막았음에도 아주 작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에 와 서로가 아니라면 별로 듣지 못한 일본어 가사였다. 신곡도 반응 좋아서 다행이야, 정말. 요슈아는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나 주변 이들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모두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 요슈아의 칭찬은 제리에게 있어 제리를 칭찬하는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요슈아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마치 전 세계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나중에 시엘 군한테 한 번 들려나 볼까?"
"응? 여기 계셔?"
"연락해 봐야 알겠는걸~ 여기야 원체 넓은 나라고 말이야. 지금은 자겠지……."


제리는 널따란 소파에 앉아 있는 요슈아를 보더니 자신도 그 옆에 착석했다. 그리고 쿡 찔렀다.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이야말로 진짜 영화 보는 건 어때.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으니까."

 

데굴데굴 눈동자가 위쪽으로 굴러갔다. 시계의 시침은 밤 12시 10분을 가리켰다. 자기엔 아쉬웠으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달이 뜬 새벽을 즐겁게 보내기엔 베스트 초이스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자며 말한 그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서는 양손에 갖가지 간식거리를 들고 왔다. 프레첼 스낵, 하겐다즈, 팝콘……. 제리는 아마도 5분의 4 정도는 전부 요슈아가 먹겠거니 싶으면서도 얌전하게 제리의 손에 쥐어진 스푼을 받았다. 불을 끄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스크린의 세상이었다. 브레이브 차일드의 공연 영상, 최신 뉴스, OTT 플랫폼의 최신 유행 드라마. 작은 직사각형 속 세계는 그 너머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오락거리다. 제리는 리모콘을 조작해 세상이 칭송하는 로맨스를 재생했다. 잔잔한 OST와 함께 수수한 화장기가 감도는 여주인공이 나타났다. 반짝거리는 필름 효과, 덧없는 인생. 끝을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을 담은 이야기. 제리는 여태 그랬듯 그런 이야기에 익숙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에 들린 프레첼 스낵 한 개를 빼냈다. 가루가 치마폭에 떨어져 그것을 털어냈다. 자? 이불 아래 보이지 않는 이에게 속삭이듯 작고 섬세한 목소리가 제리의 귀를 간지럽혔다. 제리는 비몽사몽한 정신에도 느슨하게 답했다.


"……아니…."

 

뮤지컬 영화였는지 여주인공이 노래를 시작했다. 파란 미니 드레스 천 자락을 휘날리며, 보랏빛으로 보정된 하늘빛에 반사되는 구두부터 클로즈업해 그의 얼굴까지 훑었다. 영화를 트는 순간 그들의 이야기는 대사나 장면으로 처리된다. 그러니 요슈아가 고개를 기울여 그림자가 드리운 눈동자를 집요하게 살폈다.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 그렇게 약속하며 줄곧 바라본 눈. 요슈아는 제리가 늘 로맨스만 틀었다 하면 눈을 감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 서리는 기대와 떨림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 갔다.


"나, 네가 로맨스 영화만 보면……. 늘 잠드는 이유를 알았어."


제리는 부스스한 상대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영화의 소리가 커졌다. 땅바닥을 밟고 구두를 두드리며 춤을 추는 두 남녀. 치아를 드러내며 웃을 때 움푹 팬 보조개의 사랑스러움을 알고 있었다.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기쁨에도 익숙했다. 요슈아가 제리의 이마에 입 맞출 때마다 간지러움이 필요 이상으로 쏟아졌다. 물음에 느리게 답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까."

 

결국 영화는 실재를 연기하는 장르이다. 그러니 이미 가지고 있는 현실의 열화판이 아무리 좋아봤자 현실에는 빗댈 수 없다. 그러니 제리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의 클라이맥스 씬을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이다. 눈을 깜빡거리던 여주인공이 한참 말을 곱씹다가 웃음을 흘렸다. 기뻐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이다. 분명 처음 앉을 때는 소파가 넓었으나, 여주인공이 웃음을 참으려 느릿하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면적이 좁아지는 듯했다. 남주인공이 소파 윗동을 잡고 아예 옆에 들러붙어 몸을 구기고 누웠다.


"정답이야?"
"말해야 알겠어."
"응, 난 누구 씨의 말대로 귀여운 쪽이라 어쩔 수 없어. 그래서…… 맞아?"


여기서 OST가 흘러나오고, 직사각형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갔다. 그는 뺨을 쓰다듬으며 부닥치는 살결에 신경을 집중했다. 뼈가 도드라지는 얇은 목선에 머리를 기대기 전 두 눈을 응시했다. 서로의 눈에 완전히 상대가 담겼다. 하얀 모래가루가 떨어지듯 그의 홍채서 작은 반짝임이 끊임없이 빛났다. 여주인공은 연인이 못 견딜 정도로 사랑스러워, 그 답지 않게 두 뺨을 붙잡고 예고도 하지 않은 채 입 맞추었다. 그의 낯짝이 한없이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푸슬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이야. 그러니 내 대답도 정해져 있겠지.


"정답인가 봐."

그는 잘 웃고서도 뭔가 남았다는 것처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미 다 풀어헤쳐진 여주인공의 머리를 그가 쓸어 올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가볍게 떨어지는 온기를 쫓아가듯 틈새가 좁혀졌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야.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 둘은 눈부신 하늘 아래서 키스하거든. 그는 그의 의도를 늦게나마 알아차렸다. 강아지가 아니라 순 여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스태프 롤이 올라가기 전에 다시 한번 키스해줘."


하지만 뻔한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하얀 카사블랑카니까.

 

……스태프 롤 시간이 다가왔다.

 

 

여주인공 Jerry 

남주인공 Joshua 

감사한 이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