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ngkgkB
요슈아는 거실 소파에 드는 볕을 본다. 정확히는 제리가 잠들어 있는 발치에 드는 햇볕이 어디까지를 밝히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겨울이긴 하나 유리창으로 가로막힌 찬바람은 들지 않고 햇빛만 유리를 투과하여 제리의 발끝을 비추고 있었다. TV도 틀지 않은 터라 아무 소음도 이 정적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제리처럼 잠들기라도 할 듯이.
진행하던 요슈아의 작곡도 끝냈고, 모처럼 일이 없는 한가롭고 따사로운 오후였다. 함께 맞은 휴일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며 고민하다 둘은 같이 소파에서 잠에 들었다. 일어나면 느지막한 대낮이어서 아연해졌건만, 늦은 아침을 먹고 난 뒤 제리는 몰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잠들었다. 요슈아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상체만 뉘어 잠든 제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바로 두었다. 혹여 자세가 불편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염려가 무색하게 제리는 좀체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조심스레 움직여 잠든 제리를 살짝 들었다. 이번에는 자신 무릎에 연인이 머리를 괼 수 있도록. 평소처럼 땋지 않고 있던 제리의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제리가 뒤척이거나 깨어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그럭저럭 편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처음에야 TV를 틀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금방 소리에 제리가 깰 것 같아 그마저도 켜지 못하고 그는 연인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따사로운 햇빛이 제리의 발치에서 무릎으로 올라가고, 길게 늘어진 창 모양의 네모난 볕이 마침내 얼굴까지 비출 적에 제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뒤척일 때에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에겐 더 이상 들킬 것이 없는데. 없나? 요슈아는 잠시 고민한다. 정말로 없나?
기실 숨기는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불안까지 온전히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바닥에 앉아 반대쪽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이따금 한 번 잃어버릴 뻔한 이를 본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얕게 눈가 아래로 그늘을 만드는데 그마저도 따뜻하다. 요슈아는 생각한다. 너는 모르겠지. 눈을 감는다.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무엇을?
깜빡 잠이 든 속에서 요슈아는 제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선잠이므로 어렴풋이 꿈임을 알고 있었으나 서 있는 뒷모습이 지나치게 위태로워 달려가 그 등을 끌어안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언젠가 본 것 같은 모습이다. 또 다른 요슈아가 제리와 마주보고 있다. 제리는 커터칼을 들고 요슈아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결단하듯이 스스로의 손목을 그었다. 날이 흰 팔목을 순식간에 긋고 지나가고, 붉게 그인 선 위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 곧 팔을 기울이면 떨어지는 핏줄기가 된다. 뚝뚝 떨어진다.
저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것이 익숙해졌다는 말. 속으로 무슨 말이건 삼켰다는 말.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다는 말. 이별 대신 계속 함께 있겠다는 말.
요슈아는 사실 그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무서워. 네가 어디론가 사라질까봐. 그런데 이 두려움이 너를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혼자 남겨질 나를 위한 것일까 봐 그게 더 끔찍한 것 같아. 너를 붙잡아 가두려는 것도 어쩌면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일 것이라고, 간신히 입을 떼지만 꿈속의 너는 답이 없다.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할 뿐이다. 입을 어물거리면서 모호한 발음으로, 그러면 나는 선명한 핏물을 보면서…….
요슈아는 그래서 깨달았다. 사실 나약한 건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인정하고 나면 꿈은 세찬 바람으로 답한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자상을 입히듯 몸을 스치고 지나가고 멀어지는 등을 보면서 요슈아는 겨우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가지 마. 가지 마, 제리.
그때에 그를 꿈에서 끄집어내는 또 다른 목소리가 하나 있다.
요슈아…….
그 순간 요슈아는 눈을 뜬다.
잠에서 깨어났다.
요슈아, 불렀던 목소리 탓에―그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꿈의 여파로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마구 두리번거린다. 어느덧 바깥에 내리쬐는 햇볕은 붉게 변했고, 서서히 노을로 변해가는 도중이다. 아래를 보면 제리는 자신 무릎을 베개 삼아 그대로 소파에 잠든 채인 모습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요슈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로 내쉰다. 한숨처럼 호흡이 흩어진다. 시계를 확인하면 막 졸기 시작한 때로부터 한 시간 남짓 지났다. 어쨌든 제대로 든 잠은 아니었다.
낮잠으로 무거워진 몸 그러나 제리가 제 무릎에 있었으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요슈아는 그래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손을 들어 가만히 제리의 어깨를 토닥이는 편을 택했다.
세상모르고 잠든 이의 머리카락이 뺨이며 소파 팔걸이에 흐트러졌다. 이제 제리의 상반신을 무겁게 덮는 주황빛의 햇빛은 그럼에도 검은 머리카락을 은빛으로 잠시 착각할 듯 눈부시게 반짝이게 만들었다. 요슈아는 햇빛에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아예 눈을 감았다. 어떤 눈부신 순간. 제리와 함께 있는 순간들이 모두 이렇다면 몹시 섭섭할 것이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면 너를 소리로만 더듬어야 할 테니까. 요슈아는 눈꺼풀에 내려앉는 햇볕의 온기를 느끼면서 다시 느지막이 눈을 떴다.
그때에 제리의 작은 입술에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슈아."
요슈아는 정적 속에 내버려진 것처럼 깊게 침묵했다. 제리가 한 번 더 웅얼거렸다.
"…요슈아."
아마 자신을 잠에서 깨운 목소리도 제리의 것이리라. 몽중에서 자신을 부른다는 것이 가슴 뻐근하게 흡족했으나 동시에 꿈속에서조차 불안에 휩싸여있는 것은 아닐지. 이미 함께 나아가기로 했었으나 혼재하는 감정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슈아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뺨에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준다. "있잖아……." 눈을 감은 제리가 꿈속의 자신에게 하는 듯한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를 토닥이던 손이 공중에서 멎는다. 요슈아는 잠자코 제리의 말을 기다린다.
"나……."
"……."
"네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좋아…."
왜 사랑은 이다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가.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요슈아는 잠들기 전 자신이 속으로 했던 말을 복기한다. 너는 정말로 모를 거야…… 내가 널 잃을까봐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내가 네 앞에서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결국 사랑이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다고 요슈아는 생각한다. 네가 좋아. 그런 말을 들어도 해갈되지 않는 깊은 두려움이 있다고. 그것은 그리움의 형태와 지독하게 닮아서 제 옆에 있는 이의 존재를 확인하듯 끌어안듯 해야 겨우 잠잠해질 수 있는 종류였다.
그러나 나약해지면 어떠한가?
네가 있어서 나는 기꺼이 약해지고 동시에 강해진다. 나를 지키고 너를 지키는 나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 강해지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손을 잡고 곁에 있기로 했으므로.
요슈아는 숨을 느리게 들이켰다가 견디지 못하여 고개를 깊이 숙인다. 제리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면 감촉에 그가 금방 깨어난다. 제리가 작게 웃었다. "뭐야, 요슈아……." 제리가 웃기 때문에 요슈아도 함께 웃었다. 그의 등 뒤로 노을이 진다. "네가 너무 안 일어나서……."
"보고 싶었어."
요슈아는 새삼스레 고백한다 보고 싶었다. 네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이 짧은 동안에도 무척 그리웠다.
제리가 환하게 웃었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꿈은 없으니 우리는 우리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테다. 제리가 잠에서 이제야말로 깬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응,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