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jeongsoga
요슈아가 아프다.
감기 걸렸어, 와 함께 도착한 울먹거리는 이모티콘.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대체 뭐라고, 무슨 정신으로 요슈아의 집까지 달려간 건지 모르겠다. 노을이 곁드는 현관에 잔뜩 헐떡이며 다다랐을 때가 돼서야 제리는 자신이 양손 한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 안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있었다. 해열제부터 시작해 편의점에서 사 온 죽, 이치고모찌, 푸딩, 곤약 젤리 등 달콤한 간식거리까지. 혹 갈증 나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구매한 자그마한 이온 음료도 하얀 봉지에 보란 듯이 자리했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음에도 살뜰하게 챙겨야 할 건 전부 챙긴 것 같아 제리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결코 귀찮음과 같은 감정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려는 의도 반, 오랫동안 외롭게 혼자 앓고 있던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의도 반. 근심이 그득한 가슴이 답답해 입술을 문 그가 익숙한 듯 조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선명한 벨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반응하는 기척은 없었다. 누군가, 그러니까, 요슈아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라든가, 반가운 듯 제리라고 부르는 목소리와 같은 것들이 집안에서 들려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한 번 더 벨을 눌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는 어째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픈가? 대답할 기운도 없나? 그저 자고 있는 건데, 괜히 내가 야단스럽게 구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일순 제리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연기처럼 뭉게뭉게 불어나는 사고를 저지할 새도 없이 제리가 무거운 봉지를 팔에 낀 채 예비 열쇠를 꺼냈다. 항상 요슈아가 문을 열어주었기에 자주 써보지는 않았지만, 나름 능숙한 솜씨로 열쇠를 끼워 돌리자 문은 별 저항 없이 철컥. 부드럽게 열렸다.
제리는 그 안으로 자연스레 발을 옮겼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노을이 비추는, 불이 켜지지 않은 요슈아의 자취방은 퍽 밝은 편이었다. 혹시 몰라 요슈아, 하고 그를 부르는 제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숨길 수 없는 불안이 서려 있었다. 한참-고작 2초였지만-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탓이었다.
결국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와 함께 요슈아의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은 것과는 달리, 그것을 돌려 미는 행동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방문이 열리며 틈을 만들어내자마자 자그마한 기침 소리가 제리에게 들렸다.
콜록, 콜록. 마르고 갈라지는 기침에 놀라 눈을 키운 것도 잠시, 곧 마주하게 된 그의 발간 얼굴에 제리가 조급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요슈아와 눈을 맞추려 그 앞에 주저앉듯 몸을 낮추었다. 동시에 내용물이 가득 차 있던 비닐봉지가 손에서부터 흘러내려 바닥을 굴렀다. 약이며 간식들이 제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요란하게 나뒹굴었지만 그의 시선은 수척한 요슈아의 얼굴에서부터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요슈아. 제리가 입에 담는 단어는 음절이며 단어의 형태며 언제나의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 내재되어 있는 감정 하나만큼은 달랐다. 걱정을 넘어선 근심, 반가움보다는 가련함이 우러나오는 목소리. 한편으로는 괜찮냐 묻는 것 같은 따뜻함도 담겨 있었다.
붉다 못해 새빨간 얼굴에 제리가 요슈아의 이마에 오른손을 대었다. 부드럽게 손등에 닿아오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뜨겁다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와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던 찰나 줄곧 대답이 없던 요슈아가 멀어지는 손을 붙잡고 다시 그것으로 제 볼을 감싸게 하였다. 자그맣게 시원하다며 중얼거리고, 손바닥에 입술을 붙인 채 입을 맞추듯 비벼오는 것은 덤이었다.
…요슈아, 괜찮아?
그리 묻자 으응,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낸 요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리의 질문에 부정을 표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부려오는 어리광이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작은 안도감이 깃들다가도, 제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요슈아의 행동은 무언가 미심쩍었다. 제리가 천천히 요슈아의 볼을 쓸어주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저만이 볼 수 있는 그의 어리광은 오히려 좋다면 좋았다. 다만, 걱정해주는 내가 보고 싶어서, 잔뜩 어리광을 부린 뒤 사랑받고 싶어서, 라는 핑계로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열이야 온기가 가득한 이불에 꼭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오르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진위를 가리기 위해 요슈아와 눈을 맞추었다.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는, 자신의 것과 닮은 잿빛의 눈은 천진하게 웃었지만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고,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열기는 도저히 연기라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제리가 의심을 믿음으로 뒤바꾸었다. 설령 정말 연기였다 할지라도, 요슈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약도 아직이겠네.
이것저것을 물어도 요슈아는 말끝을 늘이기만 하였다. 말이며 행동이며 모든 것이 굼뜨기만 해 답답할 만도 하건만 제리는 얌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아무것도 먹지도, 하지도 않았다는 응답이 되돌아왔다.
정말 내가 오기까지 기다리기만 한 건가? 금방 심각해진 제리가 간단한 해열제라도 먼저 먹이려 잊혀 있던 비닐봉지를 왼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른손은 요슈아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라 차마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툭, 하고 손에 닿는 것은 의외로 비닐이 아니라 딱딱한 병이었다. 액상 해열제라는 라벨이 버젓이 붙어있는 병. 단번에 잡혔다면 좋았겠지만 건드림과 동시에 데구르르 굴러 더 먼 곳으로 가버린 해열제는 움직이지 않고서는 잡을만한 거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잠깐만. 작게 요슈아에게 속삭인 제리가 그의 볼에서부터 손을 떨어트렸다. 멀어지는 손이 아쉬운 듯 제리에게 꽂히는 요슈아의 시선은 퍽 노골적이었다.
몸을 일으켜 해열제를 찾은 김에 바닥에서 쿨링 패치며 이온 음료며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가득 갖고 요슈아의 곁으로 돌아온 제리가 이번에는 침대맡에 앉았다.
해열제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일어날 수 있어? 말을 맺음과 동시에 달콤씁슬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병을 요슈아에게 건넸다. 그는 제 앞에 뻗어진 제리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불 덩어리와 함께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제리가 빨리 열부터 내리자며 약병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받으라는 신호였으나, 어째서인지 요슈아는 손을 들기는커녕 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약을 가지러 가기 위해 멀리 떨어졌을 때처럼, 빤히 제리의 눈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 먹여주면 안 돼?
의아해 고개를 기울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들려온 요슈아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목소리였다기보다는 칭얼거림에 가까웠다.
거절을 말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결국 "이번만이야?"라고 덧붙인 제리가 얌전히 입을 벌린 요슈아에게 해열제를 먹여주었다. 열 때문에 땀은 또 어찌나 흘렸을지. 이온 음료도 조금이나마 마시게 하고, 이마에는 쿨링 패치까지 붙여 주었다. 약이 쓰다며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작은 젤리도 덩달아 입에 넣어주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오물오물. 얌전히 제리가 주는 것들을 전부 받아먹은 요슈아가 또다시 비치적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열이 너무 높아 어지러웠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래 앉아있는 것보다 편하게 누워있는 편이 휴식하기에는 훨씬 나았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던 제리의 시선이 요슈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리는 모습은 정말로 어린 고양이 같아 제리가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어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파란 쿨링 패치가 깔끔하게 앞머리로 가려졌다.
그 다정한 손길에 요슈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곧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꿈질거리며 침대의 한쪽으로 붙은 그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가벼운 수신호는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픈 사람을 외롭게 두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옆에 누워주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평소보다 더 애처로운 눈으로 저를 바라봐주는데 어느 누가 이런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어리광을 들어주는 것은 이번만이라는 제 말마따나 제리가 조심스레 요슈아의 곁에 누웠다. 몸을 옆으로 돌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이렇게 옆에 있어 주니까, 좋다….
작은 속삭임이 제리의 귀를 간질였다. 열감에 시야가 흐릿한 건지, 몽롱한 건지. 열심히 이것저것 먹였음에도 잠이 덜 깬 것일 수도 있겠다. 잠들 때까지 어디 가지 말아 줘. 요슈아가 웅얼거리듯 덧붙였다.
그 말에 제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디 가지 않겠다는 듯.
…나, 추우니까 안아줬으면 좋겠어.
점점 요구의 크기가 커졌지만 제리는 큰 저항 없이 요슈아를 품에 안았다.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끌어안고, 더운 숨을 들이켰다 뱉어 부러 간지럽히는 요슈아에게 싫은 소리 하나도 뱉지 않았다. 몸은 조금 움츠러들지언정, 그가 안락하게 잠이 들 때까지 등허리를 토닥여주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요슈아의 눈이 감겼다 뜨이며 긴 속눈썹이 제리의 맨 살갗에 닿는 것도 언뜻 느껴졌다. 어느새 노을이 다 진 방에는 빛 하나, 소리 하나 스며들지 않아 고요했지만, 딱 하나. 서로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탓에, 살아있음을 알리는 심장 소리가 선명히 고막을 파고들었다.
고즈넉한 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파장이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요슈아의 등을 다독이는 손은 느려진 지 오래였음에도 그의 눈은 여전히 더디게 깜빡이기만 할 뿐 가만히 감겨있지만은 않았다. 끌어안은 몸에서 열이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는데도 졸음이 그득했던 요슈아의 목소리와는 달리 행동은 전혀 그러지 않으니 결국 제리가 잠이 오지 않냐 묻자,
키스해주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돌아오는 대답에 언뜻 몸을 굳혔던 것도 같다. 요슈아가 제리의 목덜미에 묻었던 고개를 고쳐 베고는 제리를 바라보았다. 간절하고도 애절하고, 힘없이 풀려 자극적인 눈.
언제 보아도 참 예뻤다. 그 색에 홀려, 제리가 옆으로 안고 있던 몸을 굴려 요슈아를 바르게 눕혔다. 자신은 그 위에 올라탄 채였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건지 요슈아가 상기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순수한 미소였다. 그에 호응하듯 제리가 고개를 내리자, 이번에는 그가 손을 뻗어 제리의 볼을 감싸기도 하였다. 흘러내리는 옆머리는 귓가로 넘겨주어, 자그마한 입술을 머금기 쉽게 만들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자 애써 넘겼던 머리카락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것을 신경 쓸 틈은 없는지, 요슈아는 혀를 내어 조심스레 제리의 입술을 핥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조심스레 깨물기도 하였다. 어설프게나마 혀를 섞으려 드는 제리가 사랑스러워, 무심코 목을 울려 웃는 소리를 그가 내기도 하였다.
취한 것 같았다. 점차 고갈되는 호흡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키스를 할 때면 항상 그랬다. 숨을 쉬는 법을 까먹어, 물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마냥 부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우울이 아니라, 안식에 빠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기에 열이 날 리가 없었는데도 정신은 점점 몽롱해져 갔다. 조금이나마 고여있는 둘 사이의 산소를 먹으려 입을 조급하게 벌리면 다시 다물지 못하게 요슈아가 제리의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겹치던 찰나, 아, 하는 짧은 탄식에 놀란 그가 닿아있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 틈에 숙였던 고개를 든 제리가 다시 입을 맞추지 못하게 요슈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급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산소의 양은 성급하게 뛰어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작게 미안해, 사과한 요슈아가 제리를 끌어안았다. 말소리며 행동이며 지독하게도 느려 잠결임을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피곤함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어조였다.
요슈아는 제리가 숨을 고르기 편하게 하려는 듯 자신을 재우려던 그 손길을 모방하여 등을 쓸어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제리가 어리광을 부리듯 요슈아의 품에 고개를 비볐지만, 그 행동은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토닥, 토닥. 움직이던 손은 금세 정지, 열기 서린 숨은 규칙적으로 호흡.
설마, 싶어 제리가 고개를 들자마자, 제 등에 얹혀 있던 요슈아의 손에 힘이 빠져 주르륵 침대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으응, 하는 잠꼬대와 같은 소리가 굳게 감겨있는 요슈아의 눈과 함께 제리를 맞이했다.
약속을 지켰다고 해야 할지. 키스를 마친 요슈아는 순식간에 오른 열에 피로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빤히 그린 듯 잠든 요슈아를 바라보다, 쿡쿡 웃으며 그를 품에 가득 안은 제리가 요슈아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더 길게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같잖은 미련이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제리는 요슈아에게 잘 자라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내가 너의 손을 잡을 때면 우울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너도 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안식의 바다에 아늑하게 잠겼으면 좋겠기에.
아침이 밝아와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곁에 머물며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