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o_somi
이불 밖으로 머리칼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머리칼의 출처로 보이는, 유난히 불룩한 자리 옆에 앉았다. 둥글게 모양이 잡힌 그것은 꼭 초콜릿이 들어간 마시멜로를 닮아 있었다. 그럼 제리는 초콜릿이겠네. 내부에 파묻힌 사람의 정체를 아는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오는 상상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불룩한 것은 좌우로 움직이더니 불쑥 이불을 빠져나온다.
"뭐하는 거야, 요슈아."
"제리 머리가 동그랗길래 보고 있었어. 어릴 적에도 이렇게 동그랬던가?"
어릴 적에? …모르겠네. 사람 머리는 다 동그랗지 않아? 제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는 웃는다. 글쎄, 한 번 만져볼래? 머리를 기꺼이 내밀면 반사적으로 올라간 손은 잠시 허공을 떠돈다. 손이 사뿐히 얹어지더니 형태를 따라 느리게 더듬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응, 요슈아도 동글동글한데…. 그러다 말이 끊긴다. 제리는 어느새 머리를 반쯤 쓰다듬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선을 올려 본 낯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나는 손길을 적당히 누리다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진다.
"제리, 계속 쓰다듬을 거야? 머리가 마음에 든다면 물론 나는 기쁘지만."
"…아, 아니! 얼른 들어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놀라서 손을 떼는 제리를 보면서 웃으면, 제리는 놀리지 말라는 듯 입을 작게 내밀면서도 이불을 들어올려 주었다. 반겨주는 손짓은 꼭 어릴 적 같다. 우리의 비밀 요새에서도 제리는 늘 내게 입구를 열어 주며 저렇게 손짓하곤 했다. 어서 와, 요슈아. 그러면 나는 기꺼이 작은 손을 맞잡고 작은 요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작은 공간도 함께라면 충분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나는 그때처럼 이불 속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옮겨 제리에게로 붙어 누웠다. 작고,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 너와 나는 어릴 적과 다르지 않은 우리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어떤 포근함이 여전히.
긴장이 풀리는 따스함 속에서 녹아든 초콜릿처럼 우리는 몸을 밀착하고 서로에게 기댔다.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슨함이 이불 속을 떠돌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대어 눈을 깜빡이기를 한참. 나는 문득 이불의 모난 구석에 뭉친 솜을 부드럽게 풀기 시작했다. 주무르듯이 쥐었다 펴는 손길이 눈에 띄었는지 제리가 그것을 바라보더니, 반대쪽 구석을 잡아 솜을 풀었다. 뭉친 솜이 조금씩 퍼질수록 우리의 작은 요새는 더 느슨하고 둥근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모든 게 충분히 풀어졌다고 느껴질 무렵,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눈을 마주친 우리는 조금 웃었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할 것 없이 이불을 나란히 잡아당긴다. 최선을 다해 무뎌진 마음이 머리 위를 덮으면 환한 어둠이 내린다. 우리만의 작은 밤이 온다.
…가끔 생각해…. 요슈아랑 함께라면 이렇게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비밀기지에서 지냈을 때처럼?
그때는 그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그랬지. 거기에서 과자도 먹었잖아. 부스러기를 잔뜩 흘리는 바람에 혼은 났지만.
그래도 맛있었어.
응, 나도 좋아했어.
과자는 주로 통에 담긴 작은 비스킷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물처럼 비밀 요새에 넣어두고 나누어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과 같이 소꿉놀이나 비밀스러운 첩보 장난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저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기만 해도 모든 게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우리만의 시간이었으니까. 그럴 때 늘 무얼 하고 있었더라. 나는 손끝을 매만지다가 제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제리.
왜 그래?
우리 손 잡을까?
갑자기?
싫어?
작고 둥근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제리가 잠시 몸을 움찔했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망설이는지 고개가 반대로 기울어졌다. 의아해 눈동자를 굴리면 답이 돌아온다. 요즘 손이 까칠해져서 잡으면 불편할 거야. 해답을 알게 된 나는 제리의 거부를 수긍한다.
그렇구나.
…요슈아,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응, 그냥. 나는 제리랑 손을 잡고 싶은데 못 잡으니까 아쉬워져서….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잖아! 외치고 싶은 표정을 알아보기는 쉽다. 나는 조금 더 불쌍한 사람처럼 눈매를 내리고 제리를 바라보았다. 안 돼? 제리는 입술을 이리저리 옴싹거린다. 바라보는 시선이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리…. 시무룩하게 내려가는 내 입매. 그리고 그런 표정을 제리는 잘 견디지 못한다. 치사한 방법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소매를 조심스럽게 쥐었을 때 제리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제리의 설명대로 조금은 까칠하게 느껴지는 손끝이 손깍지에 파고든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에 느껴지는 서로 다른 체온의 감각이 좋았다. 뭉근하게 온도가 뒤섞이는 순간이면 그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밝게 웃고 만다. 제리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감는다.
있지, 제리.
응, 요슈아.
나는 제리가 이런 사람이라서 좋아.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사실을 설명하는 것뿐인데도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이런 게 사랑한다는 감정일 거라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제리와 있을 때는.
두근거리는 소리는 사실 선율 같아, 제리.
그래서 너랑 함께 있으면 늘 음악을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세상에서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네 곁에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너와 나이기에 서로의 심장 소리가 되어 완전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온전한 어둠이 온다.
우리는 켜놓은 등을 모두 끄고 침대에 파묻혔다. 새까만 공간에서는 서로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아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체온뿐이었다. 제리의, 약간은 불규칙한 숨소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듯했다. 나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낸다.
제리, 자?
…아니, 아직 안 자.
언제 잘 거야?
요슈아는?
제리가 잠들면.
난 요슈아가 잠들면 자려고 했는데.
뭐야, 그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대어 키득거리며 웃었다. 큰일이네, 둘 다 못 자겠다. 먼저 자, 요슈아. 그렇지만 아직 졸리지 않은걸. 난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해. 상대의 손을 쥔 팔을 침대에 떨어뜨린 채로 잔잔하게 손을 흔든다. 특별한 것 없이 흘러가는 대화가 어둠을 넘어가고 있었다. 옅게 들어오는 달빛과 거리의 네온사인도 닿지 않는 자리. 평소라면 조금은 답답할 정도로 덮인 이불이 오늘은 하나도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조차 둘만의 공간처럼 소담하게 여겨진 덕이다. 나는 제리에게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면, 제리도 나를 따라 몸을 돌린다. 우리는 마침내 서로를 마주보며 누워 있다.
이러고 있으니까 하나도 안 보여.
그래? 나는 제리가 보이는 것 같아. 지금 눈을 내리깔고 있지?
그쪽에 빛이 들어와? 제리는 아마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여기도 어두워. 나는 웃는다. 제리가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분명 보지 못하겠지만.
마음으로 보면 볼 수 있어.
벌거벗은 왕 이야기야?
응, 하지만 이건 진짜야.
아, 지금 요슈아 웃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제리도 마음의 눈이 생긴 모양이네….
시시하고 즐거운 잡담이 한참 이어졌다. 유명한 동화를 처음 읽었던 때의 기억과 감상, 요즘의 생각, 일상에 대한 단상 따위가 두서없이 오가고 다시 흩어졌다. 나는 그 모든 대화를 하면서 제리의 표정을 손끝으로 훑듯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한 번씩 제리가 지을 법한 표정을 말하면 제리는 그게 제법 신기한지 목소리 끝을 올리고 제 낯을 몇 번 더듬는 것 같았다. 내 얼굴도 만져 봐도 되는데. 제리는 잠시 조용하다가 조심스럽게 손끝을 내 뺨에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느리게, 실수로라도 눈을 만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처럼 더듬기 시작했다. 약간은 까슬까슬하고 말랑한 감각이 얼굴을 가볍게 누르고 지나갔다. 간단한 문답이 오갔다. 입매를 내리고 있네. 눈은 웃고 있어? 응, 맞아. 코는 찡그리고 있고…. 응, 이러니까 알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제리는 충분히 낯을 파악하더니 금방 손을 내렸다. 아쉬운 이별 끝에 우리는 다시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점차 대답이 느려지고 끝내 조용해질 때까지.
어둠 속이기에 더 쉬운 일들도 있다. 대화가 끊겼을 무렵에 나는 졸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팔을 제리의 몸 위로 올린 건 어느새 숨소리가 새근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즈음이었다. 으응, 올리는 동시에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잠시 들썩였으나 제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숙인 이마를 맞대면 곤히 숨을 내쉬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따스한 선율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을 음악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대답할 사람은 잠에 든 지 오래였으므로 나는 그 말을 구태여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 감상만은 계속 내 속에 내버려두고 싶었다. 꺼내지 않아 의미가 되는 말들이 있어서. 제리는 곧 몸을 조금 뒤척이더니 나를 흉내내듯 팔을 내 몸 위로 올렸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꼭 완벽한 것만 같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어둠의 순간이 밀려오고, 나는 그제야 눈을 감고 아마도 이곳에만 있을 평온을 누렸다. 수마가 온전히 나를 잠식할 때까지. 맞닿은 곳의 온기를 줄곧 상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