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Sec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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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ngkgkB

 


겨울의 눈 아래에 덮이는 비밀이 있다. 오로지 그 계절에만 숨길 수 있는 차가운 금기. 그런 것들은 대개가 시간에 둘러싸이는 몹시 사소한 것들이어서, 요슈아는 비밀을 마치 무게와 온도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대하듯 했다. 겨울이 오면 시체처럼 그것들을 파묻는 시늉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슈아가 아직 어릴 적, 소꿉친구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하얗게 쌓인 눈의 아래를 파고들면 부드러운 갈색의 흙과 함께 엉킨 지층이 나온다. 요슈아는 그 부분이 나올 때까지 한참, 손이 발개질 정도로 눈 아래를 파헤쳤다. 이내 피부 표면이 따가워질 정도에 이르자 요슈아는 손을 털어내고 눈과 흙이 묻지 않은 손바닥 아래쪽으로 눈을 꾹꾹 문질렀다.
작은 마을에서도 더 외진 곳,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언덕 위의 집은 늘 사람이 자주 오지 않았다. 언덕이라고 해도 그것보다는 조금 더 높아서, 마을에서는 요슈아의 집이 있는 지대를 작은 산이나 봉우리 따위로 부르기도 했다. 가족과 요슈아는 언제나 거기를 '언덕'이라고 불렀지만. 여름에는 집 앞에 있는 작은 밭과 뒤편에 있는 산 때문에 노인들이 버섯이나 약초를 캐겠다고 바구니를 이고 오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 지금 같은 겨울은 미끄러지기 쉬운 언덕에 누구도 오지 않았다. 요슈아의 하나뿐인 가족조차도 겨울에는 웬만하면 언덕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며 앓는 소리를 했는데, 정작 그의 가족은 언덕을 조심조심 내려가 근처에 있는 작은 식료품점으로 늘 향했다. 그런 그가 언덕에서 길게 미끄러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날부터는 어땠던가. 요슈아는 조용히 입김을 불며 언덕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발간 시야, 흰 눈 사이로 점점이 찍혀있는 사람들.

언덕 위, 요슈아의 집이 아니더라도 마을은 규모 자체가 아주 작았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도도 아니고, 그 집의 누가 바람이 났다더라, 누가 어떻게 됐다더라 하는 대소사까지 일정 비밀 없이 공개되고 까발려지기 일쑤였다. 이런 마을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야, 어른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언덕에 사니까 겨울철에는 비밀을 숨길 수도 있지. 봄이 오면 전부 녹아서 그것도 들통 나겠지만. 조곤조곤, 속삭이던 가족은 다행스럽게도 겨울의 눈이 조금 그쳤을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을 어른들은 요슈아를 대신해서 한 사람의 시신을 가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조심조심, 넘어지지 않게. 요슈아는 잰걸음으로 언덕을 따라 내려가며 생각했다. 둘만의 비밀은 이제 혼자만의 비밀로. 누구도 알지 못할 완벽한 범죄로. 겨울녘 동안 녹지 않을 은밀함으로.

언덕에 혼자 남은 요슈아는 그날 이후 스스로 고립되길 택했다. 언덕 아래 몇몇 집에서 요슈아에게 겨울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렴, 하는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전부 거절했다. 어차피 그들이 떨어져 살던 가족과 제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고작 그 나이에도.

마을의 중앙에는 그나마 가장 큰 건물인 영주의 저택이 자리했다. 바깥에선 총을 들다 못해 전투기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귀족이란 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 저택이 마을에서 가장 크기는 했다. 그를 중심으로 주택가들이 산재했고, 염소의 우유를 짜거나 텃밭에서 딴 과일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옆에 붙어 있었다. 마을의 주변부는 예부터 이 오래된 영지의 농노로 살아온 이들의 밭 따위가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여름철에는 아이들이 밭고랑을 건너다니며 뛰어놀고 노래를 불렀지만 겨울, 눈이 오는 날에는 특히 미끄러워 사람이 적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저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영주님의 저택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았으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검은 저택'이라 부르며 이 마을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던 아주 오래된 저택이며,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으나 유령이 종종 나오거나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는 숲과 가까이 있어 들어가 굳이 살림을 살려는 사람도 없어 처치 곤란인 장소라 했다. 실제로 요슈아 역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검은 저택에서 사람이 나오거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다.

그러니까, 어린 요슈아의 시선이 닿은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렇게 눈이 올 때는 그 저택 앞에 있는 사람이라 해봤자 밭 주변 먼 데까지 상태를 살피러 나온 농부들밖에 없을 텐데. 실루엣은 농부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가늘기 그지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이 눈발에 가볍게 나풀거리는 소녀의 뒷모습이 시렸다. 키가 어느 정도, 그러니까 어렸음에도 또래보다 큰 요슈아만큼은 컸으나 나이 들지 않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나이 들지 않았다'는 느낌보다는 '어른이 아니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하여간에 저런 아이를 이 근처에서 본 적은 없었다. 그 비슷한 아이조차도 없었고. 애초에 이 마을에 요슈아가 알 만한 또래의 아이들은 얼굴을 다 외우고 있는 터였다. 눈을 깜빡이던 요슈아는 다시 한 번 손바닥 밑의 둥그런 살로 눈을 문질렀다. 문지르고 봐도, 눈이 아니라 사람. 그는 언 밭과 밭 사이를 질량 없는 걸음으로 걸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어쩌면 저 소녀는 춤을 추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요슈아는 실없이 생각했다. 눈 아래를 파던 손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대신 요슈아는 하나의 검은 얼룩 같은 아이가 저택 앞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니는 걸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정말로 한참이고. 눈이 쌓이고 쌓여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아래에 묻는 동안, 내내.

 

 

여전히 요슈아가 어리던 날의 일. 미세하게 쌓이고 찔끔찔끔 녹던 눈이 요슈아의 무릎 위까지 쌓이게 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후의 이야기다. 폭설은 전조 없이 요슈아와 언덕의 집을 덮쳤고, 요슈아는 겨울마다 가족이 했던 일을 떠올리며 찬장에 남아있던 쓰지 못하게 된 종이와 천을 한 장 한 장 세밀하게 창문에 펴 발랐다. 그래봤자 작고 초라한 집의 추위는 조금도 가시지 않아서 양손을 문지르며 슬슬 불을 더 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즈음이다. 덜컹, 소리가 들려 요슈아는 잠시 빳빳하게 힘주었던 턱을 굳혔다. 지붕에 올라왔던 눈이 아래로 한 번에 떨어졌나? 덜컹. 소리는 문간에서 났다. 이내 덜컹거리던 소음이 가라앉으면 그 위를 작은 마찰음이 더했다. 똑똑똑. 눈발 외에는 찾을 손님이 없는 언덕 위의 작은 집. 이제는 그만이 혼자 사는. 요슈아는 숨을 죽이고 몸을 일으켰다. 채 붙이지 못한 천이 나직하게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창문의 틈을 만들고 늘어졌다. 요슈아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답이 없는 와중에도 요슈아는 알 수 없는 호기심, 혹은 떨림에 의해 한 발자국씩 문에 다가서고 있었다. 자박자박 바닥을 밟는 소리가 문 앞의 사람에게도 들렸을까. 모자이크 형식의 유리로 된, 그리고 테두리를 어두운 금색의 철로 덧댄 문에는 손님의 실루엣이 비추었다. 눈에 가득 담기는 몸체는 흐려져 있었는데, 요슈아는 불현듯 일주일 전 자신이 아래의 밭에서 보았던 소녀를 떠올렸다.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 순간 쓸데없이 가슴이 두근거린 건 왜였는지. 요슈아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세요."

 

요슈아는 어느덧 청년과 소년의 사이, 변성기가 끝날 즈음의 그럼에도 어린 시기에 있다. 더럭 낮은 목소리의 끄트머리가 옅게 떨렸다. 두 번의 물음 끝에 드디어 손님이 답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뜻밖의 나직하고도 낭랑한 목소리였다.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요슈아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한참 실루엣을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문을 열어보았다.
마주한 이는 '그' 소녀였다. 요슈아가 마을에서 보지 못한 자신 또래의 여자아이. 검은 저택의 앞에 있던. 춥지도 않은지 소녀는 잠옷이나 실내복으로 쓸 법한 하얀 홑겹의 원피스에 아무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안녕."

 

눈이 마주치자 이름도 모르는 그가 웃었다. 뒤쪽에서 눈이 하염없이 흩날렸다. 두 사람은 거기서 처음 서로의 눈을 들여다봤다. 핏기 아주 없지 않았으나 눈보라에 사람이 묻혀도 모를 날씨였던지라 소녀의 유난한 창백한 얼굴은 꼭 눈에 파묻혔다가 막 나온 것처럼 새하얬고 누구도 밟지 않은 것처럼 티끌 하나 없었다. 요슈아는 문득 그 뺨에 손을 대 제 손자국을 내고 싶다는 미묘한 충동마저 느꼈다. 잠깐의 붉은색이라도 남을까, 저 눈 위에는. 그 자국은 얼마나 오래 표면 위에 있다가 비밀로 사라질까. 마을의 모든 것이 눈에 먹히거나 비밀이 되기 좋을 때, 가장 높고 누구도 찾지 않는 눈 속의 비밀, 작은 성전.

요슈아는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놔 버렸으니 이쪽도 말을 놔도 될 성 싶었다. 그는 일부러 퉁명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날아서."

"날아?"

"어. 날아서."

"날개가 있어?"


여전히 그가 웃었다. 농담처럼.


"아니. 안에 들어가도 돼?"

"아."

 

요슈아는 단마디를 내뱉으며 자신의 뒤쪽을 돌아보았다. 집.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이었던, 이제는 혼자 남은 집. 작지만 거실과 작은 주방, 그리고 그나마 가족이 살아계실 적 작은 난로를 구해 조금 더 따뜻해진 침실, 작은 욕실만이 있는. 요슈아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보금자리가 부끄럽다고 느꼈다. 차갑고 엉망인 곳에 정말로 들어오고 싶을까.

 

"방이 더러운데."

"음, 괜찮아."

"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야?"

 

침입은 언제나 달갑지 않았다. 소녀의 앞에서 요슈아는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데의 이질감이 더 심했다. 그 질문에 소녀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네가 날 초대해서."

"내가?"

"날 보고 있었잖아."

 

요슈아는 다시 한 번 일주일 전에 보았던 언덕 아래의 정경을 떠올렸다. 눈이 쌓인 밭, 잔뜩 언 길에 춤추듯 걸어가던 뒷모습. 눈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다시 헤집어 봐도 눈이 마주친 적은 결코 없었다. 소녀가 말갛게 혹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지?"

"어떻게 알았어?"

"초대해줄 거지?"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소녀는 다시 제가 할 말을 입에 담았다. 초대해줄 거지? 어긋나는 대화 속에서도 요슈아는 자신의 언어와 소녀의 언어가 비슷한 온도를 지니고 있다는, 미세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막연한 고독의 무게였다. 눈처럼 희고 비밀처럼 검은.

요슈아는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긍정을 신호로 소녀는 굳은 듯 서 있었던 몸을 움직여 요슈아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피부에 와 닿는 화한 냉기가 요슈아를 잠시 망설이게 했다. 그는 열린 문을 닫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침실의 문을 열었다. 낡은 침대에 소녀는 거리끼지 않고, 그러나 조심스럽게 앉았다. 어쩐지 반가웠다. 아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곳에 사람이 온 게 얼마만인지, 에 대한 감격이라고 생각했다. 요슈아는 침착한 척 덤덤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제리."

"제리?"

 

소녀, 제리가 말했다.

 

"응, 제리. 너는?"

"아, ……나는 요슈아."

"요슈아."

 

막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제리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요슈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의 옆얼굴을 훑었다 시선을 떼었다.

 

"요슈아라고 해도 돼?"

 

제리가 미소를 지으며 묻고, 요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제리는 그날 요슈아에 대해서 많은 걸 묻지 않았다. 제리가 묻지 않았기에 요슈아도 그러지 않았다. 둘은 다만 앉아서 오래도록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의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를 듣기도 했고, 간혹 눈이나 마을의 길목, 언 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위가 얼마나 미끄럽고 위태로운지, 눈이 한참 쌓이면 밖으로 나가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눈 아래에 간혹 아이들이 물건을 떨어뜨리곤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도. 그러는 동안 제리의 얼었던 몸은 차근차근 녹아 온도를 되찾았다. 돌아온 온도는 어쩐지 요슈아의 것보다 조금 낮았지만, 서늘한 살갗이 요슈아는 영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 내도록 마을에는 눈이 내렸고, 요슈아는 제리의 앞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꾸벅꾸벅 감기는 눈을 애써 비벼가며 떴다.

창을 툭툭 때리던 눈 소리가 사라진 건 새벽녘 동이 터올 즈음이었다. 혼곤한 피로 속에서 헤매던 요슈아를 제리가 불렀다.

 

"요슈아."

"응?"

"나 이만 가볼게."

"어…… 더 있어도 돼."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요슈아가 말했지만, 몸을 일으킨 제리는 요슈아를 돌아보곤 가만 고개를 저었다. 투명하리만치 빛나는 검은 눈에 제가 고스란히 비추어졌다. 차가운 몸이었는데도 제 옆에서 떨어진 순간 요슈아는 지독한 추위를 느꼈다. 그런데도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자꾸 눈이 감겼다. 스르륵, 눈꺼풀이 아래로 떨어질 때 제리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잘 자, 요슈아. 그 건조하고 차가우면서 다정한 목소리.

요슈아는 꿈 녘에서 자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주름진 손을 느꼈다. 죽어버린 그의 보호자였다. 그는 요슈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울고 있었다. 불쌍해라, 불쌍해, 말하는 그에게 왜 울어요.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이 목소리도 눈도 먹어버린 것처럼 암담했다. 정신은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하고 가족의 목소리는 유일하게 먹히지 않은 귀에 자신을 새기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내 잠 속에서 정신은 하나로 모아지고, 그 순간 요슈아는 익숙한 어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을 들었다. 눈처럼 고요하게 내려앉는 다정함. 이렇게 말하는.

잘 자, 요슈아.

아, 그 매끄럽고 티 묻지 않은 살결이 제 머리칼을 쓸어주는 마지막 감촉.

 

 

꿈을 꾸고 일어난 하얀 날부터 요슈아는 눈이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주 오래도록.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면서 막막한 그리움보다 확실한 기다림에 익숙해진 요슈아는 좀 더 자랐다. 산지에 만연한 흰빛은 한동안 눈이 오지 않는 나날을 거쳐 서서히 물로 녹았고, 그로부터 사흘 뒤 언덕 아래에서 들려온 날카롭고 새된 비명이 하나의 비밀을 건져 올렸다. 폭설 탓에 학교는 일주일 내리 휴교였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이런 촌동네에 가까운 영지에서 귀족도 아닌 평민의 아이로 태어났으므로 구태여 학문을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아이들은 종종 학교를 빼먹곤 했다. 바깥세상에는 이미 자본가가 혁명을 일으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모호해졌다지만, 그것은 요슈아가 살고 있는 강촌 영지에서는 썩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눈이 녹는 동안 밖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시체를 발견했다고 마을에는 금세 소문이 돌았다. 영주님의 저택에서 고작 한 블록 너머에 사는 성당의 웨이드 신부님이더라, 그분께서 온몸에서 피를 뿜은 채로 죽어 있었더라, 아니더라, 목이 꺾여서 그 사이로 피가 질질 새고 있었더라, 이런 소문이 하염없이 도는 걸 요슈아는 조심스레 언덕 아래 가게에 찾아갔던 날 알게 되었다. 그 집에는 아내 하나와 어린 딸이 살고 있다며, 안타깝게 됐다는 말을 연신 하던 가게 주인. 마을의 누가 죽었든 요슈아는 식료품점의 주인이 제 가족이 죽었을 때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를 더 떠올렸다. 잘 죽었지, 지 식솔도 데리고 가지 그랬누, 혀를 쯧쯧 차며 내뱉던 뭉근한 악의. 요슈아는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먹을거리를 품에 안고 언덕을 올라오며, 자신이 들른 가게의 주인이나 마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요슈아는 잠시 멈춰 서서 하늘로 흰 입김을 뿜어냈다. 가족이 듣는다면 미운 생각을 한다고 할 테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줄 가족도, 가족도 더는 요슈아의 곁에 없다. 언덕 위에는 오로지 소년 혼자. 눈이 내리지 않으면 그 제리조차 찾아오지 않은, 외딴 섬처럼….

똑똑.

그러나 희게 갈라지는 물거품처럼 눈이 둥글게 사라져가는 밤에, 소녀는 다시 요슈아의 집 문을 두들겼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요슈아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제 발이 꼬이는 것도 모르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달려간 요슈아가 문을 열면, 제리가 거기에 있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다는 듯이 말간 얼굴이었다. 여전히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모슬린 잠옷.

 

"제리."

 

저도 모르게 벅찬 숨이 내뱉어졌다. 제리가 웃었다. 집 안쪽에서 났던 제 넘어지는 소리를 제리가 들은 것 같아 요슈아는 조금 맥없이 혹은 한심하게 웃었다. 제리가 말했다.

 

"들어가게 해줘."

"들어와."


대화는 짧고 건조했다. 그 차가운 공기에도 요슈아의 가슴께는 가쁘게 뛰고 있었다. 허락의 말과 함께 제리가 요슈아의 품 안으로 눈처럼 다가와 안겼기 때문에,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옅은 체온이나 숨결 같은 것들이, 어쩐지 외딴 섬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찾아냈을 때처럼 기껍고 정겨웠다. 요슈아는 긴 세월 동안 안는 법을 잊었던 사람처럼 팔을 엉성하게 제리의 등에 휘감았다.

있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왜 늘 외로울까. 누구도 나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비밀처럼 여기에 있는데.

그날 요슈아와 제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이야기를 눈처럼 쌓았다. 요슈아는 마을에 관한 이야기와 돌아가신 보호자, 식료품점의 주인과 영지 안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 라고 속닥일 때 제리는 그저 얕은 숨을 가만히 들이켰다. 어쩌면 그래서 외로웠을까,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서. 이제는 자신을 돌보아주던 이도 세상에 없어서. 이야기는 버겁지 않은 무게로 쌓여 두 사람을 덮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슈아는 오래 전에 읽었던 동화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개와 함께 눈이 오는 날 멋진 동상 앞에서 아름다움 속에 파묻혀 얼어 죽어가는 소년. 네로는 죽어갈 때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단다, 라고 조곤히 이야기하던 가족의 목소리. 이제 요슈아는 제리를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겨울마다 나타나는 제리에게 언젠가 요슈아는 우리 친구야? 라고 물었고, 제리는 웃으며 그럼 아니야? 라고 한 적 있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그리움에 휩싸여 요슈아는 조심스레 손끝을 매만졌다. 이불을 덮고 마주 본 채로 누워있는, 가까운 시야였다. 손길을 거절하지 않으며 제리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글쎄. 난 많은 곳에서 왔어…."

"많은 곳?"

"네가 알지 못하는 많은 곳에 있었거든. 하나라고 말해주기 어려워."

"나는 이 영지 마을밖에 모르는데."

"알아. 너는 아주 어리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리의 웃는 얼굴은 다섯 살 배기 어린 여자애처럼 보이다가도 아주 나이 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질감. 요슈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너는?"

"나는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그러므로 미지에서 내게로 온, 나의 유일한 앎.

느린 숨을 내뱉고 요슈아는 눈을 뜨지 않는 제리에게 맞춰 제 눈 위에 눈꺼풀을 눌렀다. 피곤하지 않았지만 편안했다. 요슈아는 감은 눈 아래에서 오래도록 소녀인 제리를, 여자인 제리를, 아주 나이가 들고 늙은 제리를 그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뭐든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아."

 

요슈아의 나직한 말을 끝으로 제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요슈아와 제리가 느끼고 있는 마음이 같다는 것이었다.

사락사락 쌓이는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다만 차가운 손을 맞잡은 채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는 제리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요슈아는 제 목에 걸린 낯선 은색 목걸이를 발견했는데, 그것의 출처는 제리가 옆자리에 남긴 쪽지를 보고서 알 수 있었다. 「선물이야.」 짧은 문장보다도 텅 비고 외로운 이불의 옆을 바라보며 요슈아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에 대해 오래 곱씹었고, 그 감정에 느리게 잠식되었다. 네가 보고 싶어. 서툴고 앳된 문장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눈 아래에 파묻혔던 비밀을 요슈아가 발개진 손으로 파헤쳐 찾아냈을 때처럼, 차갑고 경이로운 감각. 요슈아는 이제 오래 전 죽은 가족이 아니라 제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묘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기뻤다. 잔잔한 기쁨 사이에서 요슈아는 느리게 눈을 감고 제리가 누워 있었을 이불 한쪽을 구겨 끌어안았다. 이대로라면 얼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 흐려지는 이미지가 꼭 아름다움처럼 느껴질 것 같아. 동화 속의 한 구절처럼.

그리고 또 여러 해가 흘렀다. 요슈아가 좀 더 자라기까지. 요슈아가 소꿉친구라고 생각했던 제리는 그 몇 해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리지 않게 될 때마다 동화의 구석을 깨뜨리고 나타나는 언어가 있다. 해마다 마을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요슈아의 가족이 늘 가던 '시드 꽃가게'의 여주인이 논밭 근처에서 피가 다 빨린 채 희게 질려 죽어 있었고, 어른들은 앞뒤를 분간할 줄 모르는 폭도처럼 한 단어를 떠들어댔다. 소문은 입에서 입, 언어에서 언어를 타고 느리게 미끄러져 몇 해를 마을 바깥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 얼마의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너끈히 들고 영지로 돌아온 요슈아의 귀에도 들어왔다.

흡혈귀의 짓이래. 꼭 흡혈귀가 그런 것처럼 목 옆에 두 개의 뚫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거야.

불현듯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박혔다. 언덕 아래에서 내려다보던 검은 무채의 소녀. 아무도 살지 않는 오래된 불길한 저택 앞에서 거닐던,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왔던, 들여보내 달라 조곤조곤 묻던 아이. 밤중의 차갑고 안락한 손길. 포근하게 쌓인 이불 같은 눈…. 마을 입구까지 오는 길목의 모든 눈이 사람의 발자국으로 녹아 있었다. 종례 시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났으니 밤에는 집 밖에 나가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요슈아는 어리지 않고 어른이지도 않은 사이에 서서 그 말들을 그저 듣고 흘리기만 했다.

제리가 다시 변함없는―혹은 딱 요슈아만큼만 자란 모습으로 찾아온 것은 요슈아가 영지에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의 밤이었다. 항시 입는 흰 옷에 핏자국을 선명하게 묻힌 채였다. 요슈아, 들어가게 해줘, 제리는 언제나처럼 이야기했다. 난로의 불이 타닥거리며 작은 소리로 타올라, 눈이 불꽃으로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처럼 처음 듣는 소리를 냈다.

요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제리를 집 안으로 들였다. 물에 따뜻하게 적신 수건을 가져와 피로 점철된 제리의 손을 닦아주면서도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제리가 먼저, 아주 오래된 날의 대화를 끌어오듯 조용하게 말을 꺼내기 전까지도.

 

"내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었지."

 

요슈아는 문득 직감에 대해 생각했다. 제리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나이가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 혹은 '어른이 아니라'는 직감. 그는 어른이 아니었다.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슈아."

"응."

"나, 봐줘…."


투명하리만치 안쪽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은빛 눈. 금속보다는 차라리 눈 내리기 직전의 하늘을 닮은. 마주침은 공간 안에 있는 서로를 느끼기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 요슈아는 제리의 존재를 무엇보다 명확하게 느꼈다. 제리가 피가 닦여 얕은 분홍색으로 흐려진 손을 뻗었다. 그가 가만히 뺨을 쓸어내린다. 실은 요슈아는 그 순간에, 자신의 뺨에 출처 모를 피가 묻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

"나, 뱀파이어야."

 

뱀파이어. 흡혈귀.

환상에서나 나올 법한 문장. 아주 오래 전, 잠이 오지 않는 어린 밤 요슈아는 가족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먼 나라의 피를 마시는 기괴한 백작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동화의 한 페이지를 열어 읽다가 사실 그것이 어른의 전유물이라는 걸 느꼈을 때의 불쾌함과 생경함. 그리고, 불온함과 설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요슈아는 자신 안에 이런 것이 있는지 몰랐다. 눈이 녹고 드러난 지층의 불결한 무늬처럼 요슈아는 울음을 참는다. 어쩌면 웃음을 참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요슈아가 제리의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지조차 않았다는 것이다.

요슈아는 오랜 친우이자 한시도 생각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동반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람을 죽였어?"

"목이 말랐어."

 

제리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애매하고 미비하게 웃고 있었다. 요슈아는 어떤 것들을 복기한다. 빼곡하게 채워졌다가 다시 비워지는 박동. 눈 위에 피를 흩뿌리며 죽어갔을, 가족의 시체를 운반하면서도 눈을 홉뜨던 남자. 뒤에서 주름지고 억센 손을 가진 외로운 등과 그 손을 잡은 아이를 흉보던 목소리. 그들의 시체가 눈 아래 묻혀 비밀이 되었다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요슈아는 환희를 느끼진 않았지만 슬프지도 않아서, 차라리 그 어떤 것도 관심 두고 싶지 않았고, 단지 목이 말랐다고 느린 동작으로 이야기하는 제리의 목마름에만 타는 듯 아팠다. 그는 바싹 마른 입안을 제 타액으로 적시고 말했다.

 

"그 사람들 우리 가족을 무시하던 사람이었어."

 

요슈아는 이 말을 하고서 자신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적개심으로 속 울렁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대한 염오. 아주 희미한 분노….

제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무섭지 않아?"

 

요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보다 어떤 명제를, 감정을, 마음을 확신했던 적이 없었다.

 

"안 무서워."

 

정말이지 무엇도 무섭지가 않았다. 너의 갈증과 부재 외에는, 어떤 것도.

두 사람은 한참이고 서로를 마주 보며 투명하고 흐릿한 눈동자 안에 서로의 모습을 박아 넣었다. 제리는 천천히 요슈아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입을 뗐다. "이제는 우리 집으로 갈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럼에도 이때를 고대해온 것 같은. 요슈아는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우리 집?"

"사람들이 부르는'검은 저택' 말이야."

"늘 궁금했어."

 

요슈아는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그러나 눈을 아주 감지는 않아서, 그의 가늘게 뜨인 시야에는 여전히 제리의 창백한 손이 남아 있다.

 

"네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일지."

"왜?"

 

제리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물었다.

 

"네가"

 

요슈아는 여기에서 잠시 망설인다. 눈꺼풀이 다시 들리면 무슨 환한 말을 먼저 들은 것처럼 제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외로울 것 같아서."

 

나는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나, 뱀파이어야. 그 말들을 들으면서 다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어둔 데 놓아둔 촛불처럼 희붐하게 몰아낸 제리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리하여 제리만이 알고 있는 세월을 짚어내고 싶다는 욕망. 처음 그를 보았을 때에 제리의 언어에서 느꼈던 막연한 고독을 그대로 밝힌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제리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웃었다. 처음으로 핏기가 도는 소녀의 뺨을 보며 요슈아는 마음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겹친 손을 떼지 않고서 요슈아는 말했다. "갈래." 그 다음 나온 말은 이 상황보다 더 원초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다.

 

"보고 싶어."

 

그냥 너를, 오래도록.

 

 

저녁이 깊어지면 밤이 된다. 요슈아가 제리를 '초대'했듯, 이번에는 제리가 요슈아를 초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요슈아와 제리는 손을 꼭 잡고 침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검은 저택으로. 인적은 몹시 드물어지고, 마을의 불빛도 멀리 어룽지는 희미한 무리로만 남아 요슈아는 그립지도 않은 마을을 자꾸만 돌아봤다. 멀리서 보는 영지만이 퍽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검은 저택의 안은 적요하고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아 마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거미줄이 바닷속에도 있을 수 있다면 이런 실내의 형태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제리는 작게 "어서 와." 라고 말했고, 요슈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리게 "초대해줘서 고마워." 라는 말을 했다. 이내 피로가 몰려와 제리가 2층에 있는 침실로 향했을 때는 요슈아도 함께였다.

 

"이쪽으로 와, 요슈아."

 

움직일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불을 덮고 누운 제리의 옆으로 요슈아는 꾸물거리며 들어와 함께 누웠다. 함께 눕는 것은 이제 하나도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다. 두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아닐지라도 두 존재가 나란히 이불을 채워, 이불 속은 하나의 공간과 세상으로 채워졌다. 내 세상. 더는 누구도 들어와 마주 보며 눕지 않았을 요슈아의 어린 세상. 몸 바깥으로 삐져나온 제리의 손을 요슈아는 잡아 쥐었다. 피로감이 아까까지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어째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까까지 제리가 피를 묻히고 집에 들어와 그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고백한 일은 다 아주 먼 일 같았다. 그것이 먼 일이든 가까운 일이든, 영지민들이 얼마가 죽어나가든 그에게는 이제 알 바 아닌 일이었지만. 요슈아는 제리의 손을 보드랍게 감싸 쥐면서 입을 열었다.

 

"제리."

"응, 요슈아."

"외롭지 않았어?"

"여기에서?"

"응."

 

제리는 그때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인데도 그 시선이 더욱 검고 곧게 닿는 것 같았다. 요슈아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윤곽이 흐리게 뭉개진 채 보이는 제리의 얼굴을 담으려고 애를 썼다. 제리는 그때에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요슈아의 목으로 뻗쳐왔다. 요슈아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어깨 한 번 떨지 않고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곧 가벼운 무게가 목에 걸려 기울어졌다. 목걸이는 우스꽝스럽게도 두 줄이 되었지만, 요슈아는 그것 때문에 웃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요슈아가 똑똑히 깨어 있을 때 그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준 제리는 이번에야말로 명확하게 웃었다. "선물이야. 돌아온 기념." 이라고.

 

"이제는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심장에 추가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둘은 함께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하릴없이 떨어지고 마는 포근한 잠기운 안에서 요슈아는 생각했다. 세상이 오래도록 우리가 원하는 모양으로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이 녹지 않고 계속해서 쌓여 있고, 동화책은 덮이지 않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반복한다면. 닳고 닳을 때까지 우리의 시절을 머금을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우리가 고정될 수 있도록 네 갈증을 나로 오래도록 채웠을 텐데….

 

 

요슈아의 열아홉 겨울이 지나간다. 스물과 함께 서서히 눈이 녹는 계절이 찾아 오고 있었다. 그 사이 마을에는 몇 건의 살인사건이 더 일어났다. 작은 영지, 누구든 서로를 알고 있는 지긋지긋하고 가까운 마을. 이후부터 요슈아는 검은 저택에서 종종 잠을 청했고, 꼬박 며칠을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제리와 함께할 때도 있었다. 물론 언덕 위 요슈아의 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주로 영지민들이 보지 않는 어둔 밤 둘은 검은 저택과 요슈아의 집 사이를 오가곤 했다. 그래도 요슈아가 더 오래 지내는 곳은 언덕 위 자신의 집보다는 제리의 저택이었다.

그즈음 마을 사람들은 작은 시장에 나오거나 먹을 것을 사기 위해 가게로 향하는 요슈아의 뒤통수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제리에게 보여주겠다며 낡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몇 권의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광기 어린 괴성을 내지르며 야수의 성으로 밀려오던 장면. 이상하게도 그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요슈아는 꼭 성 안에 갇힌 야수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실은 언제나 그랬던가.

겨울의 눈 아래 비밀이 숨어있는 곳. 녹아 비밀이 드러날 때 그곳에는 꼭 검은 구정물이 튀고, 거리는 더러운 물로 어지러우며 밟는 곳마다 축축하게 젖는다. 호외요, 호외!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소식은 전쟁에서도 영지 안에서도 곧잘 들려 왔다. 녹은 눈이 마을을 점점 더 구정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제 발치에 붙는 눈빛만 봐도 그랬으니, 요슈아는 이제 어렵지 않게 그들이 저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류의 '의심'에서 비롯된 줄은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의 미지는 어느 날 마을의 목소리 큰 젊은 목수가 언덕을 오르고 요슈아의 집에 찾아오면서부터 어떤 확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인중과 턱에 거뭇거뭇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청년은 눈이 녹아가는 언덕 위를 올라와 요슈아의 집 문을 두드리곤 이것저것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요새는 어떻게 지내냐는 둥, 얼마 전에 다시 돌아온 것 같은데 사정은 어떠하냐는 둥, 누구도 요슈아에게 갖지 않는 관심을 구태여 떠먹이며. 그러나 그 가는 눈, 눈꺼풀과 속눈썹 사이에 숨겨진 혐오는 가시지 않고 요슈아를 짓눌렀다. 왜, 어째서, 무엇을 위해 속에서만 뭉근히 되씹던 고민은 청년의 다음 질문에 되새김질을 잠시 멈추었다.

 

"요새 밤에 밖에 돌아다니고 그러냐?"

"아뇨, 밤에는 왜요?" 요슈아는 제리의 차갑고 야윈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던 일을 떠올렸다.

"그냥. 돈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이유로."

"돈이 부족한데 왜 제가."

"너 말이야, 이젠 너희 집 어른도 안 계시고, 홀로 널 키우셨는데 남긴 재산도 그렇게 많으셨을 리가 없잖아. 솔직히 말해봐. 너, 예전 어릴 때 밤에 웨이드 신부님이나 시드 아줌마 본 적 있어?"

 

웨이드 신부, 시드 아주머니. 두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흡혈귀에 물려 죽은 시체의 이름이었으므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멍청한 표정으로 그의 낯을 무력히 보고만 있었을 테지만 요슈아의 세상은 그만큼 차근차근 넓어지고 기이하게 비틀린 채였다. 자신을 향해 오는 시선들이 어떤 모양을 가졌는지, 언어는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는 때. 마을은 끝까지 잔혹했다. 타인이 쉽게 오를 수 없는 언덕 위, 고작 그 언덕 위에 가족조차 없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외로움이 핍박받아야 할 이유였다면 요슈아는 자신의 보호자가 숨을 거뒀을 때 그의 관 옆에 함께 누워 다시는 눈뜨지 않았을 텐데. 다만 요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심증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므로 목수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으로 요슈아를 들여다보다가 '일단은 알았다'라 말하곤 언덕을 내려갔다. 잰걸음으로 걷는 그의 뒤편에서 요슈아는 끔찍한 피로를 느꼈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밤이면 제리가 찾아올 터였다. 아니라면 자신이 검은 저택으로 그를 찾아가거나. 그걸로 족했다. 모든 것이 그걸로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부류의 행운은 오래 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언덕 위를 바라보는 동안에는 더더욱. 밤중 언덕을 오르는 둘의 모습을 본 건 마을의 한 노인이 먼저였다. 그 노인은 흐리고 멍청한 눈으로 밤의 밀회를 유심히 보았고, 다음 날도 창 너머로 그 걸음을 마주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검은 저택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은 서로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로 둥글게 이동하고 서로를 연결해 결국 하나의 원이 만들어졌다. 그 원은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켰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숱한 살인사건이 저 기이한 소녀와 연관되어 있다는, 모순적이면서도 완벽한 가설을. 원은 언덕을 짓누르며 그것을 기어코 공동체의 밖으로 몰아내고 분노를 쌓았다.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들, 아이들과 노인들의 기묘한 얼굴, 제가 반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저마다 속닥이는 음성을 요슈아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어느 날엔 마을로 내려갔을 때에 영지에서 가장 덩치가 큰 또래의 남자애가 요슈아를 저녁 학교 뒤편으로 몰래 불러냈다. 뒤뜰에 발을 디디자마자 퍽, 하고 시야가 흔들렸다. 눈앞에 자신을 불러낸 남자애가 보였다. 맞은 얼굴의 고통은 그 다음이었다.

 

"너, 살인자랑 같이 지낸다면서?"

 

그가 시비를 걸어댔을 때에 요슈아는 자신의 턱밑까지 무언가가 쫓아왔음을 깨달았다. 폭력은 날 것으로 점차 요슈아를 향해 가까워져 선득선득 자신의 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슈아는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관짝에 실려 가던 가족처럼. 그토록 외롭고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식.

기어이 요슈아를 패대기친 장정이 언 땅 위로 침을 뱉었다. 그는 아주 불결한 것을 본 것처럼 짜증스러운 낯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검은 저택을 태우러 갈 거라고. 그게 있어서 이 마을에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라고."

"태운다고?"

"그래! 너, 거기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드나들지? 시체를 거기서 처리 하는 거지? 거기에 괴물과 함께 사는 거지!"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니라고!"

 

난생 처음으로 분개하여 고함을 지르며 요슈아는 엎어졌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새끼가 날 죽이려고 해, 이제는!" 언제 폭력을 행사했냐는 듯 남자는 겁에 질려 금세 골목으로 달아났다. 요슈아는 찬바람 부는 학교 뒤의 공터에 주먹을 파르라니 쥔 채로 오래 서 있었다. 외롭고 적요하여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식. 그렇다면 제리는 어떨까. 요슈아는 오래도록 검은 저택에 유령처럼 홀로 있었을 소녀이자 여자이자 제리, 그저 제리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자신 스스로보다도 제리가 더 염려되는 마음이 속에서 출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기세등등하게 지키고 있는 마을과 검은 저택 사이 길목을 지날 수 없어 둘은 요슈아의 집에서 마주 앉았다. 발갛게 붓다 못해 멍든 뺨을 제리는 밤에야 마주했다. 그는 요슈아의 앞에서야말로 드물게 웃지 않는 표정을 하고서 고요히 물었다.

 

"누가 그랬어?"

 

요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중요치 않다는 뜻이었는지.

 

"제리,"

 

다만 불렀을 뿐이다. 제리는 그의 뺨을 고집스럽게 바라보다 "응,"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요슈아가 웃었다. 다시 한 번 소녀를 호명하면서. 검은 저택, 살인자가 있는 곳, 괴물의 거처, 불길한 곳을 태워버릴 것이라고 소리치던 소년의 우악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제리."

"응."

"우리 도망칠까."

"도망?"

"네가 갔던 많은 곳에 나도 데려가줘."

 

눈 쌓인 아름다움 앞에서 그것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얼어서 죽어가는 동화. 횃불을 치켜든 채 야수의 성으로 몰려오는 화난 마을 사람들. 죽음과 분노는 마주하는 순간 요슈아는 자꾸 동화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져, 그게 꼭 제리와의 이별을 말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제리의 손을 쥐었다. 눈처럼 차가운 손. 아래로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올 즈음엔,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그럴까…."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완벽한 결말이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수런거리는 마음. 그러나 이것이 네게 향함을 이제는 알아. 동화의 한 페이지를 열어 읽다가 사실 그것이 어른의 전유물이라는 걸 느꼈을 때의 불쾌함과 생경함. 그리고, 불온함과 설렘. 여긴 언제까지나 문장과 소설의 안쪽이라, 네가 욕망하는 만큼 그 서사를 맛봐도 된다는 끔찍하고 찬란한 허락. 이곳은 더 이상 아이의 영롱한 세상이 아님에도, 이토록 벅찬 행복이….

 

 

언덕을 내려가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분명 요슈아의 가족은 이곳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죽어갔는데. 아래서 봐도 낮게만 비치는 언덕과 그 위의 작은 집을 보면서 요슈아는 웃지 않았다, 아니다, 조금 웃었다.

사람들이 우우 발소리를 내며 횃불을 들고 검은 저택으로 향한다. 그 빛이 아주 예전 요슈아가 제리의 저택으로 처음 향할 때에 돌아보았던 마을의 먼 불빛처럼 어룽지고 있었다. 둘은 통상적으로 상인들이 마차를 끌고 드나드는 입구가 아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입구 반대쪽의 검은 숲으로 향한다. 품이 큰 요슈아의 옷을 걸치고서 한참 달리다가 제리는 작게 말했다. 목말라. 스스로의 입매를 쓰다듬는 그의 손끝을 보고서 무거운 짐 가방을 메고 있던 요슈아는 마을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길목 앞에서 가만히 멈춰 서서는 제 손목을 감싼 천을 걷었다. 이토록 역동하는 맥박. 모든 피가 너로 인해 흘러가는 듯한 기이한 착각 속에서,

제리가 울 것처럼 말했다. 그에게는 죽음이 몹시 쉬웠을 것이고, 숱한 살해를 거쳐 왔을 텐데도 겨울 하늘 같은 눈동자에는 첫 두려움처럼 물기가 고였다. 너를 해치고 싶지 않다고, 무슨 선고처럼 하는 말이었는데도 이토록 달다.

 

"내가 널, 널 죽일지도 몰라…."

 

그런 환희 속에서, 요슈아가 대답했다. 별빛이 요슈아의 머리칼 위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네 갈증을 온전히 나로 적실 수 있다면.

제리는 떠는 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가, 오래 망설이다가, 마침내 요슈아의 드러난 깨끗한 팔목에 이를 박았다. 혹은 요슈아가 제리에게 저를 내어주었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고통은 기쁨과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 그러던가. 타오르는 환희 속에서, 요슈아는 자신이 초라하게 얼어 죽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바닥에 점점이 핏자국이 떨어졌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작은 성전으로 향하며 분노를 외칠 텐데, 막상 열어젖힌 그 문 안의 야수는 도망치고 없을 때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할까. 적어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게. 멋대로 문장을 씹고 맛보던 자들의 눈길에서 벗어나, 그들은….

 

 

동이 트고 눈이 녹았다.

겨울의 눈 아래에 덮이는 비밀이 있다. 오로지 그 계절에만 숨길 수 있는 차가운 금기. 그런 것들은 대개가 시간에 둘러싸이는 몹시 사소한 것들이어서, 눈이 사라지고 나면 부드러운 흙 위에 비밀의 행방은 남지 않고 흩어진다. 아침, 영지 밖으로 벗어나는 골목 어귀에 찍혀있던 발자국 두 쌍과 핏자국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의해 흐리게 지워졌다. 그리고 모든 눈이 녹은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소문과 이야기 혹은 눈으로 빚은 순백의 동화 같은 문장 한 줄이 나돌 뿐이었다. 외로운 두 사람, 두 존재가 있었노라. 비로소 함께였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