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kae_Cheers
'찬란한 빛줄기 속, 무구히 숨쉬는 네 곁에서 나 또한 사랑을 지저귈 수 있기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검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의아함에 웃음이 새어나온다. 생기가 없는 인형 같은 얼굴은 언뜻 무표정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연인인 나는 그녀가 드물게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어렵지 않았다. 나와 똑 닮은 잿빛이 섞인 검은 머리카락이 우아한 절제미를 자아내어 무심코 머리카락을 쥔 손에 소리 내며 입을 맞췄다. 작게 입을 벌렸으나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그녀는 이내 가만히 몸을 돌려 나와 눈도 안 마주친다. 나에게 보여주는 뒷모습 가운데 붉게 물든 귀를 발견한 나는 우리 둘뿐인데도 부끄러운지 물었다.
"……나는 오늘 브레챠가 앨범 화보를 찍는다 해서 일행인 내가 실수하진 않을까 모든 게 조심스러웠는데 촬영이 끝나자마자 막무가내로 옷을 갈아입혀서 놀랐어."
확실히 지금 눈앞의 제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가슴도 많이 파여 있고 색감도 밝아서 그녀가 고를 만한 취향은 아니었다. 바람을 담은 듯이 질감이 고운 청색 드레스는 다소 화려한 느낌이었지만 가슴팍 위로 덧댄 검은 프릴과 허리 뒤로 호선을 그리는 검은 리본이 차분한 인상을 더하여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그녀와 잘 어울렸다. 애써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직접 고른 의미가 있었다. 물론 제리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노출이 지나친 거 같아. 아무리 나랑 요슈아 밖에 없다지만 이건 좀 부끄러워."
고개를 홱 돌리며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마다 새까만 머리카락 위로 장식된 순백의 리본이 조금씩 흔들리는 광경은 마치 그녀의 말을 공감해주는 것처럼 와닿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걸 알고 있음에도 제리는 짙은 속눈썹을 수시로 깜빡이며 어색해한다. 나는 딴청을 피우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귀여운 건데.'
제리는 자신의 모습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게 얼마나 엉뚱한 소리인지도 모르고. 검은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는 불가능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란 모순적인 의미를 지닌 파랑 장미를 연상시켜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남들은 좀처럼 제리의 표정 변화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마 지금도 다른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제리가 화가 난 거라고 지레짐작할 것이다. 오직 나만이 알아보고 헤아려주는 연인의 모습은, 함께할 때마다 마찬가지로 연인의 특권이었다.
치마를 매만지며 초조해하는 제리를 향해 나는 속마음을 바깥으로 내보이는 대신 자그마한 귓가에 저음을 속삭여 화제를 돌리는 걸 택했다.
"괜찮아. 오늘은 브레챠의 화보 촬영 날이기도 하지만 단둘이서 뒤풀이를 하는 날이기도 하거든."
"……그래서 오늘 멤버들을 먼저 퇴근시킨 거야?"
"그런 셈이지. 멤버들과는 이번 헤드라이너에 발표한 두 곡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지만 아직 제리랑은 못 했으니까."
동그랗게 눈을 뜬 제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위로 씰룩 움직였다. 기쁘고 설렌다는 의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신없었으면서 이제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입을 보기 전부터 두 뺨이 싱그럽게 상기되어 있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런 꾸밈없는 그녀를 어째서 못 알아채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갑자기 왼쪽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영문 모를 미운 통증이 번져 갔는데 아픔은 익숙한 터라 담담히 받아들인 나는 말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얇은 허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다른 손으로 가녀린 손을 마주잡으니 프릴과 같은 검은색의 장갑 감촉이 기분 좋았다.
"비밀과 신록 사이로 부는 바람의 네 노래 감상을 듣고 싶어."
두 노래 모두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 제리한테 먼저 들려주었다. 애초부터 제리와 함께한 나날을 그리며 쓴 인생이고 사랑이었다. 내 마음을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자 진심은 겁쟁이인 나로서 노래뿐이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내뱉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밀의 가사 중 요슈아는 나와의 관계를 작은 거짓의 조각으로 인해 바람 속 깊이 현혹되어 함께 헤매인다고 적었잖아. 그런데 나는 거기서 길을 잃어 원망하기보다는 요슈아와 같이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째서?"
마음을 굳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까지 자신이 한심해서, 과거 때문에 정상적인 일상을 보낼 수 없다고 제 탓을 돌리며 제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후회가 이따금 나를 괴롭혔는데…… 도리어 제리는 나와의 관계를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깜깜한 칠흑 위로 투명한 초점이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비밀의 제목과 가사처럼 우리에겐 함께 떠안은 비밀이 있어. 하지만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서로가 사랑이 뭔지도 몰라서 그런 거잖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
"그리고…… 우리가 깊은 바람 속에서 헤맨 덕에 신록이 반짝이는 바람의 곁에 닿을 수 있던 거니까 괜찮아. 요슈아가 나 말고 필요없다는 독백에서 기꺼이 그래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들었어."
수줍은 듯이 고운 미소를 머금은 제리의 눈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고개를 돌렸다가는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열기를 금세 들키고 말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내 마음을 들쑤시는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달콤한 감각으로 나도 모르게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자 애틋한 온기가 천천히 가슴 쪽으로 퍼져간다. 이 넘쳐흐르는 연심을 옮겼으면 하여, 나는 충동적으로 허리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얼굴의 각도를 틀어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달뜬 숨을 들이키는 서로의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리고 나는 머지않아 고백할 진심을 고이 삼켰다.
'응…… 훗날 함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할게. 사랑해. 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