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stayus
느지막한 가을의 오후였다. 창밖의 풍경이 파도 없는 해변의 물결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부드럽고 기울어진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깊숙이 밀려들어와, 빛의 파장을 한 겹 한 겹 섬세하게 포개 놓은 듯했다. 거실의 공기는 언젠가 익숙히 읽었던 오래된 책장처럼 온화하고 나른한 냄새를 품고 있었다. 계절이 주는 느릿한 흐름에 몸을 맡기면, 몸을 뒤척거리는 사소한 움직임 하나조차도 마치 커다란 일이라도 성취한 듯한 기분이 들어버리는 그런 오후였다.
특히 오늘처럼 오랫동안 기다려온 휴일에는 더욱 그러했다. 요슈아는 제리의 무릎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는 무심하게 눈을 깜박이며 제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손끝의 감촉은 더없이 부드럽고 익숙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째 요슈아는 늘 강아지하고 붙어 있는 것 같네."
요슈아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얼굴을 올리며 눈을 떴다. 그는 커다란 갈색 레트리버와 하나의 덩어리처럼 밀착되어 있었다. 살집 두텁고 눈꺼풀이 무겁게 쳐진 개는 요슈아의 호흡 리듬에 맞춰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요슈아는 자신이 숨을 쉴 때마다 배 위에서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개의 체온과 숨결을 조용히 즐기고 있었다.
문득 그는 털빛이 짙은 갈색 레트리버를 보며 자신이 너무 창백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의문을 품었다. 온통 하얗기만 한 자신과는 달리, 나무와 비슷한 색을 품은 레트리버 때문에 그의 주변을 흐르는 희끄무레한 기운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는 제리의 질문을 들은 척 만 척하며 고개를 조금 더 깊숙이 제리의 품속으로 파묻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몸집 큰 레트리버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그리고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제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몽글몽글하게 엉켜 있는, 사람과 커다란 개가 뒤섞인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한 가지 생각에 서서히 잠겼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풍경이 되었을까, 하고.
하늘 한가운데를 두 사람이 함께 낙하했던 날을 기점으로 우연히 제리는 한 여자와 안면을 텄다. 그날 그들의 뒤편에서 줄을 서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호주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휴식차 일본에 몇 달 동안 머물기로 하였다고 했다.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발을 디딘 제리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제이 팝을 꽤 즐겨 들어 그날 요슈아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긴 머리의 소심한 그 여자는 제리에게 사인을 대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요슈아에게 사인 하나를 받아와 건넸다. 평소 제리였다면 그대로 인사를 나눈 채 헤어졌을 인연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는 유독 변덕을 부리고 싶었고 원래 자신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그는 사인을 받고 뒤돌아가려는 여자를 붙잡았다. 제리가 K와 알게 된 사연은 그랬다. 그는 종종 K와 브레이브 차일드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요슈아의 음악에 관해서, 요슈아와 전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의 길고 긴 감상을 듣는 것은 제리로서도 생경한 체험이었다. K는 고민거리 하나 없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감상을 들으면서, 제리는 같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다. 요슈아는 언제인가 한 번 그와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 제리는 시간이 되면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K는 귀국 일주일 전까지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바쁜 사람이었다. 제리는 그의 얼굴이 약간 가물가물해질 때쯤 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혹시 개 한 마리를 며칠간 맡아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그 메시지 이후로 연달아 여러 메시지가 더 날아왔다. '버트'라는 이름의 세 살짜리 레트리버는 꽤 온순한 성격—일단 K는 그렇게 주장했다—이었고 다른 레트리버들과 다르게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것을 더욱 즐긴다고 말했다. 잠시 맡는 동안 크게 말썽 피울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귀국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집주인과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당장에 버트만이라도 다른 곳에 머물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는 사람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린 것이라고 그는 절절하게 설명했다. 제리는 잠시 고민했다가 수락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혼자 살거니와 서너 일 정도면 그리 부담이 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K와 만나지 못한 요슈아가 꽤 아쉬워했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 번 맡기고 다시 돌려보내는 상황에서 그와의 약속을 잡아 볼 수도 있었다. 제리는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서 자신이 맡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버트가 제리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전해 들은 말대로 버트는 정말 순한 아이였다. 성을 내지도 않았고 더럭 놀랄 만큼 자주 짖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온순하여, 제리가 잠시간 걱정할 정도였다. 버트에게 사료를 주고 나면 버트는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몇 입 먹다가 제리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털로 이루어진 몸뚱어리를 제리의 팔에 비볐다. 그 모습이 어쩐지 둘이서만 있을 때 제리에게 달라붙는 요슈아를 연상시켰다. 때마침 요슈아도 휴식기였겠다, 그는 별다른 지체 없이 요슈아를 집에 초대했다. 요슈아는 K보다 K가 키우는 개와 먼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버트를 보자마자 화색이 되어 현관에서부터 코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상기된 얼굴이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가 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팔로 살살 안았다. 그러자 그의 하얀 후드에 갈색 털이 보란 듯이 묻었다. 그는 자신의 후드와 제리를 번갈아 보면서 벌써 이만큼이나 묻었다며 자랑하듯 웃었다. 버트를 데리고 거실 소파로 향한 두 사람은 아이의 느릿한 걸음에 맞추어 여유롭게 낮을 보냈다.
"레트리버치고 정말 순하네, 조용하고."
"나는 미리 말을 들었는데도 놀랐다니까. 산책도 잘 안 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햇볕 있는 곳에라도 있도록 해 주고 있어."
"헤에, 제리랑 닮은 구석이 있네."
"……."
제리가 요슈아를 장난스럽게 째려보았다. 요슈아는 키득거리며 두 다리를 뻗고 앉은 제리의 무릎 위에 누웠다. 창가 쪽에서 어슬렁거리던 버트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요슈아 쪽으로 걸어와 슬그머니 따라 누웠다. 그 광경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아이의 걸음 하나, 몸짓 하나가 배부르고 게으른 듯했기 때문이다. 요슈아의 배가 들썩거릴 때마다 버트는 코를 킁킁거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느슨하게 누워 있었다.
몇십 분 정도 지났을까, 요슈아가 제리의 손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K 씨는 브레챠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고 했지?"
"응, 애초에 그래서 친해진 거니까. 그건 왜?"
"집에서 자주 들었다면 버트도 익숙하지 않을까 싶어서."
요슈아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두 팔로 기지개를 켜고 제리를 향해 물었다.
"저번에 두고 간 기타, 아직 있지?"
"응. 저쪽 방에."
제리는 복도의 침실 옆방을 가리켰다. 요슈아는 제리에게 잠깐 여기 있어 보라고 한 다음 방에 들어가 통기타를 꺼내왔다.
"연주해 주게?"
"익숙한 노래를 들으면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기타는 여전히 빛바랜 구석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는 제리의 옆에 앉아 자리를 잡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천천히 무릎 위에 악기를 올려놓고, 손가락이 익숙하고 능숙하게 줄 위를 오르내렸다. 기타의 차가운 금속 현이 따뜻한 체온의 일부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가 짓궂은 눈빛으로 힐끗 제리를 바라봤다.
"오늘 관객은 제리 말고도 한 명 더 있네. 한 마리라고 해야 하나?"
짧은 말 한마디가 오래 머물며 공기를 간지럽혔다. 제리는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한동안 그 따뜻한 손길에 의지해 있다가 곧 제 갈 길을 가듯 느긋이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움직였다. 목적지는 이미 결정이라도 된 듯 망설임은 없었다. 요슈아의 무릎 위, 당연하다는 듯 두 앞발을 떡하니 올리고 엎드리는 아이의 나른하고 게으른 자태가 두 사람의 입꼬리를 내려가지 않게 했다.
요슈아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천천히 첫 줄을 튕겨냈다. 그의 가늘게 뻗은 손가락은 기타 줄의 저항마저 다정하게 달래는 연인의 손처럼 움직였다. 첫 음이 공중에 떨림을 그리며 흩어지자 마치 오랜 숨을 내쉬는 듯, 정갈한 마음을 펼쳐 보이는 듯한 소리가 방안 가득 서서히 번져나갔다. 길게 늘어뜨린 새하얀 머리칼은 요슈아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흐릿한 그림자처럼 얼굴을 타고 내렸다가 그가 섬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고 나른한 오후를 녹여낸 것처럼 흔들렸다.
소리를 겹쳐나갈수록 마음의 깊은 곳에 머무르던 감정들이 점점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감고 음악이 이끄는 대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온전히 선율에 자신을 맡겼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음률은 깊고 진득했다. 버트는 검은 코를 찡긋거리며 앞발을 앞으로 밀었다. 요슈아가 입은 바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침내 마지막 음표가 소멸할 때, 요슈아는 천천히 눈을 뜨고 여운이 남은 기타 줄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투르게 남겨져 있었고 방 안은 고요함 사이로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음악이 제 흔적을 끝까지 남기려는 듯 잔잔한 흐름이 남아있었다. 요슈아가 기타를 옆으로 치우고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어떠셨어요, 버트 씨?"
당연히 되돌아오는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멍'하고 짖은 짧은소리였다. 요슈아는 그마저도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제리는 전혀 다른 두 색깔과 종으로 뒤섞인 눈앞의 풍경에서 느릿하고 연약하게 흐르는 반짝임을 보았다. 그것은 손을 뻗어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흩어질 듯해서 제리는 자신도 모르게 요슈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소 짓고 있던 요슈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내 연주에 뭔가 문제 있었어?"
"아, 전혀……. 너무 좋았어. 그냥, 뭐라고 해야 하지……."
제리가 요슈아의 어깨를 잡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풍경 속에 그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자 물 밀려오듯 모든 단촐한 생각들이 하나로 뭉쳐져 제리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제리가 중얼거리듯 혹은 읊조리듯 말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늘 겉으로 티가 나는 것 같아서."
요슈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몇 초 뒤 장난기를 담아 퉁명스럽게 답했다.
"에, 그 '아이들'에 나도 포함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왕이면 사람을 좋아하는 '멋진 남자친구'인 편이 좋은데 말이지."
웃음이 뒤섞였고, 실내의 온도는 따뜻했다. 익숙지 않은 숨소리가 그들의 풍경에 들어왔어도 여전히 그들은 똑같이 웃고 있었다. 제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