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도바의 탑에서 중력을 보다
코르도바의 탑에서 중력을 보다

@juststayus

 

 

제리가 마침내 고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것은 골목길 가장 아래에 있을 때였다.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요슈아가 서 있었다. 목에는 조금 전에 샀던 비즈 목걸이가 걸려 있는 채였고 왼손 검지에는 각각 하나씩 사서 맞춘 얇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 중앙에는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요슈아의 것은 노란 오팔이었고 제리의 것은 검은 스피넬이었다. 가게 주인인 젊은 남자가 영어를 하지 못해 가방 속에 넣어둔 스페인어 사전을 꺼내야 하나 갈팡질팡했던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 요슈아가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번역기를 곁들인 것으로 위기는 얼추 넘어갔다.

가게 주인이 계산을 하는 동안 그는 제리에게 이대로라면 몇 개 국어까지 할 수 있으려나, 하고 농담 삼아 속닥거렸다. 제리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5개 국어도 거뜬히 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배우는 건 판다 사장님의 정보 갱신에 무리가 올 거라면서 농담을 받아치기만 했다. 된다고 하면 무리해서라도 배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무리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스케쥴 사이로 어찌어찌 잡은 여행이었다. 제리는 그가 이왕이면 이 7박 8일 내내 일도 잊을 정도로 푹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돌아간다면 자기가 걱정하더라도 그 혹독한 스케쥴을 감행할 터였다. 그렇다면 쉴 때 확실하게 쉬는 것이 좋았다.

제리의 바람대로 요슈아는 간만의 휴식에 꽤 들뜬 듯했다. 입꼬리는 귀에 걸릴 듯 올라갔고 눈썹은 보기 좋게 휘어져 있었다. 제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관찰했다. 그가 모자를 잠시 벗고 요슈아를 향해 외쳤다.

 

"저번에도 그렇고, 요슈아는 항상 나 혼자만 찍더라."

"에—그야 매번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부탁하기도 좀 그렇고, 나는 찍어둔 사진을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으니까."

"그러면 나는 무슨 사진을 보고 재미를 찾으라고. 안 되겠어, 이제부터 나도 막 찍어야지."

"아하하! 항상 포즈라도 취하고 있어야겠네."

 

요슈아는 카메라를 내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리는 속으로 그것이 어떤 음이었을지 가늠해 보았다. 고민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박자가 비슷한 브레이브 차일드의 몇몇 곡들을 대입해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그것이 어떤 음인지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창 고점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달리 말해 가장 기억하고픈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억은 제리가 생각한 나름의 음을 가지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틀렸다고 해도 생각한 대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것은 꽤 중요한 차이였다. 제리는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가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요슈아는 반대였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두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나란히 서게 됐다. 요슈아는 지근거리에 있는 제리의 옆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멀뚱히 있는 손을 맞잡아 오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그가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어떻게?"

"계속 번갈아 찍어주다가, 탑 위에서 같이 찍는 걸로. 뭔가 기념비적이고 좋지 않아?"

 

카메라를 집어넣은 요슈아가 남은 한 손으로 V 자를 그렸다.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카락이 부스스 흐트러졌다. 길고 얇은 머리칼들이 제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제리가 잡고 있던 왼손에 속으로 힘이 더 들어갔다. 손가락 뼈마디가 살짝 당겨지면서 손톱이 손바닥을 눌렀다. 투명한 흔적이 남았다. 그는 오른팔을 요슈아의 이마 쪽으로 뻗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의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가볍게 스친 이마 온도는 삼십육 도쯤. 아니, 그것보다 살짝 더 따뜻했던 것 같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브레챠의 요슈아 군."

"에엑—너무 갑작스럽잖아, 거리감!"

 

요슈아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볼을 부풀렸다. 볼 안쪽에 공기가 차올랐다. 그러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 그것도 나름 듣기 좋으니까. 열심히 힘내서 가 볼까요, 요슈아의 제리 양."

"네 거야?"

"싫어?"

"으응, 좋아서."

 

제리가 대답하자 요슈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리 한쪽에 무게를 실으며 돌아선 그의 뒷모습이 문득 작게 느껴졌다. 어린아이 같기도 했고 캔버스 위에 어설프게 그려진 실루엣 같기도 했다. 건물 뒤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찌푸리면서, 제리는 그의 흔들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걸으며 제리는 손바닥을 펼쳤다. 내려다보자 누르면서 났던 자국이 흐려진 게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흔적처럼 오늘의 대화도, 그의 표정도 기억에서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윽고 고개를 도리질하고 들었다. 저 위쪽에 있는 칼라오라 탑이 보였다. 그곳에서 찍을 사진 한 장으로 이 모든 순간이 박제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고점을…… 느끼며 걸었다. 코르도바의 열기가 더웠다.

 

제리가 요슈아와의 여행을 계획한 것은 지난가을부터로, 꽤 오래전부터였다. 의식하지 못했건만 그리도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서바이벌이 세 번째에 다다를 시기, 브레이브 차일드가 클라이맥스 레코드에 합류한 날도 새삼스러울 정도로 옛날이었다. 아직도 요슈아는 그들과 처음 만난 때가 엊그제 같다고 자주 회상했다. 그런 시간에 따라 제리도 요슈아도 의식하지 못한 부분에서 많이 변했다.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나지막이 부르는 서로의 이름 정도였다. 시간이라는 것은 묘하게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흘러가고 있는 순간엔 보이지 않는다. 느낄 수도 없다. 그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뇌리를 스치듯 겨우 네 개의 숫자로, 하루의 정해진 요일로, 또는 한 조각의 순간 따위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하는 것이다. 야속하게도 혹은 느닷없이.

그 한 조각의 순간은 가령 이런 것이었다. 지난 시즌 마지막 공연이었다. 제리는 관중석 멀리서 요슈아를 보고 있었다. 요슈아는 무대 위에서 온전히 한 사람이 될 줄 아는 남자였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머리카락은 반짝였고, 박수와 함성 사이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날것 그대로였다.

 

"모두들, 정말 고마워."

 

그는 외쳤다. 천장을 뚫는 음향의 잔상이 귓가에서 흩어지기 전에 그는 한 번 더 외쳤다.

 

"정말로, 이 자리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그 외침에는 예전과 다르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제리는 수백 명의 낯선 얼굴들 속에서 입술을 조용히 움직였다.

 

"나도 고마워, 요슈아."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리는 불현듯 생각했다. 이 모든 과거와 기대와 감정 앞에서 자신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감사에 답해야 한다고.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계획은 그 하나의 프레임에서 피어났다. 딱히 거창하거나 대단하지도 않았다. 사실상 사소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이유가 된다는 점이었다.

행선지를 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선택지는 이미 넘칠 만큼 많았다. 파리, 리우데자네이루, 도쿄, 로스앤젤레스까지. 제리는 하얀 종이 위에 도시 이름들을 적고, 하나씩 엑스를 그었다. 여러 번 가 봤으니까 이번엔 다른 곳을 가 보고 싶어. 로스앤젤레스에 엑스가 그어졌다. 축제 기간이 막 지났지. 파리에 엑스가 그어졌다. 휴가를 보내기에는 너무 번잡스럽지. 리우데자네이루에도 엑스가 그어졌다. 그런 식으로 신중하면서도 어딘가 무심하게 엑스 자를 치던 끝에 마지막 이름이 남았다. 코르도바.

제리는 펼쳐둔 지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그는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볼펜으로 코르도바 이름 위를 빙글빙글 여러 번 돌렸다. 선은 원을 이루고 원은 반복되었다. 마치 확신을 새기는 행위 같았다. 볼펜을 내려놓고 제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결정의 흔적을 카메라 앱으로 찍었다. 그다음 라인 앱을 켰다. 화면 상단에 고정된 요슈아의 이름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이제 막 연습 중, 이라고 적힌 미리 보기가 보였다. 제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고 서두를 떼면 좋을는지. 고민하던 끝에 시작을 이렇게 냈다.

 

[연습 힘내]

[그리고 여행 가자]

[(사진)]

 

몇 초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가 떴다. 바로 답장이 왔다. 딱 한 글자였다.

 

[에]

 

 

지난 몇 달간 요슈아는 내내 들떠 있었다. 서바이벌이 끝나는 대로 가게 될 여행 덕분이었다. 서바이벌이 이어지는 한동안은 시간이 나는 대로 제리와 계획을 짰다. 판다 사장에게 양해를 구해 스케쥴을 조정하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요슈아는 그렇게 계획을 짜는 일 자체가 즐거웠다.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은 백지에 또박또박 글자를 채워 넣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오선보에 음표를 그리는 행위와도 엇비슷했다. 그렇게 한창 계획을 짜는 와중 그가 제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그 많은 도시 중에 코르도바였냐고. 제리는 수줍게 대답했다.

 

"꽃의 도시라잖아. 요슈아가 좋아할 것 같았어."

 

그 말을 꺼낸 제리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끝을 살짝 늘인 것도 계산된 것 같았다. 그 순간 요슈아의 얼굴이 묘하게 멍해졌다. 피식 웃는 소리가 난 것은 몇 초 후였다. 아니,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더듬거리는 느낌이 곁들어져 있었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꼭 안에 감춘 낯부끄러움을 숨기려고 하는 표정. 그런데도 새어 나오고 있는 표정. 자신의 표정이 어색하다는 사실을 알기는 아는지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꽃이라니, 뭔가 느낌이 이상해."

"왜?"

 

제리의 말은 물음보다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에 가까웠다.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왜냐니."

 

요슈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꽃의 도시'라는 걸 보고 날 생각했다는 거잖아. 그건 어쩐지…… 엄청 부끄러워진다고 해야 하나."

 

요슈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부끄러움이 흔적처럼 얼굴 가장 자리서부터 퍼져나갔다. 그 작은 떨림을 제리가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 난 걸 어떡해? 요슈아는 엄청 부드럽고, 상냥하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슈아는 손을 휘저으며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막으려 했다. 고개를 자꾸 흔들었다.

 

"우와, 진짜 그만! 부끄러워! 항복할게."

 

 

코르도바의 태양은 대충 쏟아지고 있었다. 빛이 무심하게 내리쬐었고 그 아래 모든 사물은 녹아내릴 것처럼 아지랑이와 함께 출렁였다. 일전에 둘이 함께 갔던 마드리드의 더위는 코르도바의 그것에 비하면 겨울의 첫눈 같은 것이었다. 습기는 낮고 기온은 높다. 뜨거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목구멍에 자욱한 뜨거움이 끈적하게 남았다. 매운 공기가 얼굴과 목덜미를 핥고 다녔다. 흩날리는 열기가 마치 새 부리가 뺨을 쪼는 듯했다.

두 사람은 탑승 게이트를 지나 택시로 향했다. 캐리어 바퀴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울림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는 흥얼거리고 있던 노래를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사는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코르도바의 더위는요. 간격을 두고. 피부로 먼저 오는 게 아니라 숨으로 먼저 느끼게 된다고 하더랍니다. 목소리는 거칠었다. 모래바람을 머금은 사내의 목소리 같았다. 요슈아와 제리는 설핏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도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을, 두 사람은 깨달았다. 차창을 열 때마다 말라붙은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의도 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스읍. 폐가 부푸는 순간마다 바람이 몸속에 쌓여가곤 했다. 제리가 그 더위를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혀를 입천장에 살짝 붙인 채로.

 

"덥다."

 

요슈아가 조용히 중얼대며 핸드폰 화면을 켜고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타자 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에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엑. 요슈아는 작게 외치더니 화면을 제리 쪽으로 내밀었다.

 

"이것 봐, 최고 기온이 37도래!"

 

제리는 그 아래 1.9mm라고 적힌 강우량을 보고 더 놀랐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얼빠진 사람들처럼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먼저 화면에서 눈길을 뗀 것은 제리였다. 그는 땋은 머리카락을 멋쩍게 빙글빙글 돌리며 이야기했다.

 

"내가 본의 아니게 요슈아를 서바이벌에 다시 밀어 넣고 있는 건가?"

 

요슈아가 마른 기침 소리와 함께 호쾌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홍조가 맺혀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무릎에 내려놓고 제리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게, 여기 판다 사장이 있었네. 내 귀여운 제리는 어디 갔담."

 

제리가 아야, 하고 짧게 엄살을 피웠다. 그가 요슈아를 불퉁한 표정으로 노려보았으나 그닥 효능은 없었다. 요슈아는 그 표정이 더 재미있는 듯 손끝에 힘을 더해 얼굴의 곡선을 그대로 당겼다. 눌리고, 늘어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장난감보다 간단한 패턴이다. 얼마 안 가 그가 제리를 풀어주었다. 제리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뺨을 문지르면서 요슈아를 슬몃슬몃 바라보았다. 그는 웃음이 날락말락 하는 것을 겨우 참았다. 더위가 어느새 가신 기분이었다.

택시가 호텔 근처 다리에 멈춰 섰다. 턱 끝에 땀 몇 방울을 흘리며 둘은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바퀴 소리가 다시 울렸다. 메스키타 사원이 건너편에 있었다. 먼 거리에서 보면 건너는 다리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펼쳐진 사원과 탑, 근처의 모든 건물들이 하나처럼 보였다. 흰빛을 띠는 상아와 꿀 빛의 사암을 섞어 만들었다고 했다. 도시는 그 전체가 색이 바랜 조각상 같았다. 요슈아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와, 하고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는 캐리어를 다리의 구석진 곳에 얼추 세워두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SD카드도 바꾸어 놓았으니 용량 문제도 걱정 없어! 문득 제리의 머릿속에서 요슈아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며 말한 것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에도 셔터 음과 내내 함께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리가 요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질문했다.

 

"잘 찍혀져?"

"응! 카메라 컨디션도 절호조. 제리도 찍어 줄까?"

"나? 나는 뭐…… 괜찮아. 나중에 다른 곳에서 같이 찍지, 뭐."

 

제리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요슈아가 아쉽다는 듯 카메라 옆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침울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억지로 찍지는 않는 것이 요슈아다웠다. 그런 점이 제리가 그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즐거운 일이라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재미라면 억지로 하지 않는 부분. 제리는 요슈아의 소맷부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면 갈까."

"응."

 

 

호텔 로비를 빠져나온 순간부터 그들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코르도바로 여행을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그 꽃의 골목길이었다. 사계절 내내 꽃이 피는 이곳 날씨에 알맞았지만 동시에 이름이 투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리가 그것을 이야기하자 요슈아가 제리도 그렇게 생각했냐며 키득거렸다.

그곳까지 오는 내내 지나간 수많은 거리와 골목에는 저마다의 꽃들이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느 꽃집 주인은 두 사람이 무척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인다며 장미 두 송이를 선물해 주었다. 내킨다면 꽃다발도 보고 가라는 식이었다. 제리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골목길에 가면서 제리는 자신의 장미를 요슈아에게 건네주었다. 요슈아의 곁에 있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런 이유였다. 꽃집을 지나치면서는 반지 한 쌍을 샀다.

마침내 골목길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양옆으로 찌그러진 철문들, 녹슨 간판들이 보였다. 그곳에서 제리는 벽돌 틈새로 무성히 자란 들꽃들과 간판마다 위에 걸쳐 둔 파란 화분들을 보았다. 그 화분 안에는 넝쿨 진 장미가 보였다. 한꺼번에 터져 나온 과일 껍질 같은, 지나치게 색채를 띤 생기로운 파편들이었다. 그 광경 앞에서 제리는 잠시 멈칫했다. 불현듯 어느 하나의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자신도, 요슈아도 목적지 없이 갑작스럽게 어떤 고점에 도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아니, 도달은 했으나 그렇다 하여서 해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 상태.

어찌 되었든 간에 그것은 이상했다. 낯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몸에 딱 맞는 감각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착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거기—그리고 여기—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고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고점의 감각은 단 하나—퍽 쓸데없고 시시한 것에서 당신을 느끼는 것이었다. 사소한 습관. 화분 위를 지나가며 느끼는 고요, 반지 하나를 손가락에 끼울 때 느껴지는 그 미미한 무게와 차가움 같은 것.

카메라 셔터 소리는 그때 울렸다.

 

 

양쪽으로 솟은 하얀 회벽들은 하늘을 가르듯 서 있었다. 벽 사이의 간격은 어른 두 사람만 지나가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벽 위로는 눈에 띄게 파란 화분들이 칸칸이 걸려 있었고 그 화분들 속에서는 넝쿨 진 장미가 벽을 따라 흐드러지게 뻗어나갔다. 꽃은 빨갛고도 선명했다. 벽이 흰색이라 더더욱 도드라졌다. 그곳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좁은 정원처럼 느껴졌다.

숨이 약간 막히는 듯하면서도 꽃의 향기가 코끝을 맴돌며 모든 걸 덮어 버렸다. 제리는 발끝이 간지러웠다. 바람이라도 불어 꽃잎들이 흩날리는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짝 말린 잎 조각들이 발에 스친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 또한 멈춘 듯했다. 아니면 꽃 냄새에 모든 소리가 가려졌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갑자기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알록달록한 꽃이 시간을 그냥 흘러가게 두지 않았다. 그 느릿느릿한 시간 속에서 제리는 요슈아에게 말을 걸었다.

 

"닮았어."

"응? 뭐가?"

"요슈아랑, 여기."

 

너와 있으면 나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뒷말은 삼켰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말이 있었다. 혹은 전달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는 말이 있었다. 요슈아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자신이 쥔 장미 두 송이를 들고 제리 앞에 섰다. 그리고 마치 풋풋한 고교생을 연기하는 것처럼 두 손을 내밀어 제리의 앞으로 장미를 들이밀었다. 달큰거리는 냄새가 제리의 콧속을 훅 맴돌았다. 놀란 그가 관자놀이에서 땀 한 방울을 흘리며 물었다.

 

"에, 요슈아, 뭐 해?"

 

요슈아가 장미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 눈엔 네가 훨씬 더 닮았지만, 자꾸 날 닮았다고 하니까. 그러면 꽃을 닮은 요슈아 군이 주는 장미도, 제리 양은 받아주실 건가~ 해서."

"그게 뭐야……."

 

제리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웃음소리를 냈다. 눈길은 웃음과는 상관 없이 요슈아의 손끝에 가 있었다. 제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장미 두 송이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잠깐 요슈아와 스친 순간, 제리는 문득 그를 끌어안고 장미와 시트러스 향이 섞인 그의 냄새는 어떨지 맡아 보고 싶어졌다. 그의 머리칼. 그의 어깨. 그의 체온과 냄새. 장미와 시트러스, 댓잎처럼 쌉싸름한 향. 그 자체를 맡고, 보고, 만지는 것.

사람이 많으므로 그것은 나중을 생각하며 참기로 했다. 그의 품이 아닌 두 손의 장미로 만족하기로 했다. 제리가 장미를 받아드는 그 순간, 지나가던 행인들이 휙,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제야 제리와 요슈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백처럼 보일까?"

 

요슈아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더 높았다.

 

"……어…… 얼른 나가자!"

 

풋내기를 벗어나지 못한 둘.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벼운 웃음소리와 만발한 꽃들의 향기 속에서 제리와 요슈아는 황급하게 자리를 떴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과 식은땀이 확실한 물증으로 남아 있었다. 공기 중에 흐르는 장미 향이 그들을 따라서 움직였다.

 

골목길을 쭉 따라 걸어 모퉁이를 돌자 어수선한 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장은 낮은 말소리와 타는 냄새로 출렁였다. 한 발 들어서자 과일 더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밟혔다. 빨갛고 노랗기도, 주홍빛을 띠기도 했다. 붉은빛이 선명한 석류가 벌어진 입처럼 쩍 벌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저마다 다른 색과 크기로 나부끼는 천들이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그 천들은 이방인을 압도하는 동시에 그들을 초대하는 것처럼 은근히 맞이하는 듯했다. 그곳을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결국 제리와 요슈아는 장신구 가게에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요슈아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장난스럽게 흉내를 내기도 했다. 목걸이의 비즈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리는 조용히 웃으며 요슈아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시장 뒤편, 줄지어 있던 꽃의 골목길이었다. 색색의 꽃들 사이로 좁다랗게 나 있는 길의 양옆에는 작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낮은 담장들이 이웃의 허물까지 애써 숨기지 못한 채 삐죽 서 있었다. 그 안쪽의 작은 집에서 온갖 소음이 나고 있었다. 제리가 말했다.

 

"요슈아, 이리 와 봐."

 

두 사람은 소리의 근원을 찾아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소음이 아닌 냄새가 길잡이 역할을 했다. 비가 갓 지나간 여름처럼 축축한 공기 속에서 장미 향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동물의 젖은 털에서 나는 냄새가 가늘게 솟아올랐다.

냄새에 이끌려 도달한 곳은 대문이 열린 어느 집의 작은 안뜰이었다. 거기에서는 물줄기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초록빛 풀들이 서로 가깝게 엉켜 자란 중심에 강아지 대여섯 마리가 있었다. 발톱을 바닥에 긁으며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물방울들이 젖은 털 사이로 반짝였고 바닥에는 뿌려진 물이 얇게 고여 흘렀다. 요슈아는 제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강아지 목욕 중인가 봐."

 

제리는 그의 말을 듣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안뜰 한쪽에서 주근깨가 난 여자가 호스를 쥔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똑바르고 선명했다. 제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이며 지나던 길이었다는 짧은 변명을 남기려 했다. 그러나 여자의 응답은 예상보다 더 간단했다.

 

"아녜요, 잠깐 구경하실래요?"

 

시간이 지나 그날의 일을 떠올릴 때면, 제리는 항상 같은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 코르도바는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는 도시라고.

두 사람이 안뜰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강아지 몇 마리가 물줄기를 쫓아 하늘로 뛰는 풍경이었다. 털에 엉겨 붙은 비눗방울, 눈가에 매달린 거품, 입 주변까지 포개져 있는 비누의 잔해. 꼬리를 바쁘게 흔들거리며 그 아이들은 젖은 코끝을 킁킁댔다. 냄새의 근원을 찾는 듯했다. 그러다 강아지들 모두가 동시에 멈춰 섰다. 방황하던 눈빛들이, 마치 신호라도 받은 양 어느 한 곳에 박혔다. 눈을 크게 뜬 요슈아를 향해서.

순식간이었다. 강아지들이 요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열에 찬 아이들의 숨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당황한 요슈아가 손을 마구 내젓다가 뒤로 넘어갔다. 그의 등은 곧 눅눅한 땅에 닿았다. 시원한 흙냄새가 콧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강아지들은 요슈아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뺨을 핥거나 배 위로 올라타는 둥 온갖 방식으로 달려들었다. 하나둘, 셋, 그리고 대여섯. 강아지 무리가 요슈아를 에워쌌다. 어디서 깜빡 떨어진 거품 덩어리가 그의 머리에도 달라붙었다. 강아지들은 무겁지 않았으나 그만큼 움직임이 날쌨다. 요슈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팔을 허우적거려도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 와중에도 제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손에 쥔 카메라로 요슈아를 찍으면서—약속대로 말이다—서 있었다. 흰 거품이 온몸을 뒤덮은 요슈아와 흰 거품에 엉긴 털을 찰랑거리며 그를 집요하게 감싸는 강아지 떼들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한 형제 같았다. 제리가 계속 사진을 찍자 요슈아가 비명을 질렀다. 퍽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줘, 제리—이!"

"미안, 안 돼."

 

제리의 손끝을 따라 카메라 셔터가 움직였다. 강아지들이 짖었다. 찰칵. 컹. 소리가 겹쳤다.

 

"그 강아지들이 널 선택했는걸."

"못됐어!"

 

여자 또한 그 광경이 즐거웠는지 제리의 옆에 서서 한참 웃었다. 요슈아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듣다가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서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그 아이의 뺨을 문질렀다. 바보. 요슈아가 입 모양으로 말하며 헥헥거리는 강아지의 털을 쓸어내렸다.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가 외쳤다.

 

"그 아이는 테리예요."

 

요슈아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작게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테리, 저기 양 갈래로 땋은 여자애가 내 여자친구인데. 남자친구가 이렇게 곤경에 처했는데 구해주질 않아. 나빴지."

 

카메라로 요슈아를 찍던 제리가 그제야 요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말이 퍽 사랑스럽기도 했고, 놀릴 만큼 놀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슈아와 테리가 동시에 제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주변에 다른 강아지들이 꼬리를 쫑긋대며 요슈아의 뺨과 손을 핥았다. 제리는 구해주고 싶다가도 그 광경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와 비슷한 눈빛으로 제리를 바라보며 요슈아가 말했다.

 

"응? 어떻게 생각해, 테리."

"테리한테 말 거는 거야. 나한테 말하는 거야?"

"그을—쎄."

 

요슈아가 볼을 부풀렸다가 바람을 뺐다. 제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요슈아가 겨우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강아지들은 여전히 그의 발치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리가 수건을 꺼내 요슈아의 뺨과 손을 닦아주면서 여자에게 말했다.

 

"고마웠어요, 가 볼게요."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제가 더 고맙죠. 잘 가요."

 

여자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원래의 행선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아무래도 감기에 걸릴 것 같다며 장난 같은 엄살을 부렸다.

 

"만약에 걸리면 내가 딱 붙어서 간호해 줄게."

"진짜? 그러면 꼭 걸려야겠네."

"무슨 소리야, 정말."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난 후 조금 더 걸어서 칼라오라 탑에 도착했다. 우뚝 선 칼라오라 탑의 건너편에는 로마교를 사이에 두고 메스키타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별다른 특징 없이 높이 세워진 성벽과도 같은 모양새였는데, 안에 그려진 커다란 역사화가 요슈아의 시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4.5유로짜리 입장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기에 그 가치가 꽤 커 보였다. 안쪽의 다른 구석에도 전시관이 있었다. 요슈아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재미있는 듯 제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통유리창 앞에 서서 전시물을 구경하는 그의 모습을 보느라 정작 제리는 그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감상을 물을 때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요슈아는 제리에게 물으면서도 자신이 제일 좋았던 것이 있었다며, 지나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걸음새가 어느덧 코르도바에 익숙해진 사람 같았다.

요슈아가 멈춰 선 곳은 작은 미니어처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 있는 작은 메스키타가 노란빛을 내며 수백 개의 기둥 속에서 눈을 현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리는 기둥의 줄무늬를 따라 세다가 눈이 빠질 것 같다는 생각에 시선을 뗐다. 하품하며 눈을 깜빡이자 졸음 섞인 눈물 한 방울이 나왔다. 전시 곳곳을 둘러보면서도 실상 제리는 크게 감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요슈아의 동그란 이마, 놀라움에 가득 차서 벌어지는 얇은 입술과 커다래지는 눈동자, 이방인들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목소리에 쫑긋거리는 귀 따위를 보느라 바빴던 탓이 컸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따져 보자면 요슈아가 본능적으로 감탄하는 것에 제리가 혀를 내둘렀던 적이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멋있다, 확실히 남다르다, 라는 감상은 들었음에도 그 이상으로 생각이 진전된 적은 없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 표현하려고 해도 두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아서 곤란할 때가 잦았다. 아름답다는 것에 아름답다는 말을, 좋았던 것에 좋다는 말 외에 무엇을 더 표현할 수 있을까. 제리에게는 언어를 잃은 생물로 회귀하려는 본성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어가 물살을 타고 올라가듯 끝과 처음을 연결 지으려는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언어와 동떨어지려도 그럴 수 없는 보컬리스트였다.

요슈아는 멍하니 서 있는 제리를 또 다른 미니어처 앞으로 끌어당겼다. 제리의 입에서 순간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슈아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 하면서 그건 무슨 소리야, 하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제리는 제 입술을 문지르며 발개진 볼을 애써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보여줘. 요슈아가 제일 좋았던 거. 그는 그렇게 말을 돌렸다. 우회하는 마음까지도 알아차린 듯 요슈아가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입꼬리로 그리는 호선이 제리에게는 익숙한 선이었다. 그는 제리의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자신 앞의 통유리창을 가리켰다.

 

"여기 봐."

 

제리가 요슈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사흔 옆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발을 씻는 남자의 미니어처가 있었다. 분수대는 뾰족한 육각형 형태인 데 반해 남자의 발가락은 둥글게 닳아 있었다. 미니어처 전시대 옆에는 그것이 기도 전 신자로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드리기 위한 의식 행위 중 하나라 쓰여 있었다. 그는 아주 작은 발가락의 아주 작은 흠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발을 씻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닳고 닳아 생긴 흠집은 필시 칼라오라 탑이 성벽에서 전시관으로 변해버린 이후부터 쭉 세워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요슈아는 제리에게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흠집이 날 정도로 오래도록 씻은 걸까, 생각하면 그게 존경스러워져."

"계속 한 곳만 씻는데도?"

"그 점이 딱 좋은 부분이지."

 

요슈아는 검지를 허공에 치켜들며 후후,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새삼스러운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지금의 순간도 그랬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교해서 좋다는 소리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쭉 정지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존경스럽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적어도 제리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요슈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요상스러운 확신이 들었다. 그들은 발을 씻는 사내를 뒤로하고 탑의 정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요슈아를 따라 계단을 걸어올라가던 제리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그것에 안도했다. 요슈아와는 다른 이유였다. 자신만 줄곧 어딘가에서 멈춰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은 정상에 올랐다.

탑 꼭대기에 올랐을 때는 해가 막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다섯 시 반쯤 되었다. 계단을 지나가며 마주친 다른 한 쌍의 연인은 제리와 요슈아를 붙잡고 길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어렵잖게 안내를 도왔다. 길 안내를 끝내고 나서 다시 올라가려던 때에 연인은 말했다. 여섯 시까지는 꼭 보다 가라고. 그러면 풍경이 참 좋을 것이라고. 그들은 감사를 전했다. 조언대로 할 생각이었다.

탑 꼭대기에서는 다녀왔던 곳들과 다녀올 예정인 곳들이 한눈에 보였다. 아래서는 불지 않았던 바람이 훅 쏟아졌다. 로마교와 메스키타 사원이 한눈에 보였고, 다리를 건너 중앙으로 이동하는 여러 행렬을 마주했다. 꽃의 골목길은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있어 고개를 기웃거려야 볼 수 있었다. 제리가 요슈아와 함께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요슈아가 말했다.

 

"아, 아래에 자판기 있던데. 물이라도 사 올게."

"어? 목말라?"

"으응. 네가 그럴 것 같아서. 바람도 덥고 하니까, 다녀올게."

"그러면 같이 가자. 상관없어."

 

등을 돌리는 제리를 요슈아가 한사코 말렸다. 그는 아예 어깨를 잡고 제리를 난간 근처까지 쭉 밀어 보냈다. 제리가 어어, 하고 그대로 난간 앞까지 움직였다. 어깨를 잡은 손과 가까이 한 얼굴에서 순한 시트러스 향이 났다. 그 열기 속에서도 희미하게 퍼지는 냄새에 제리가 코를 움찔거렸다. 요슈아는 제리가 멈칫거린 것을 깨닫고 기회라 생각하였는지, 잽싸게 다녀오겠다며 잘 보고 있으라 선언했다. 제리가 그의 이름을 외쳤을 때는 이미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제리는 눈썹을 아래로 찡그렸다가 펴면서 정말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방심한 틈을 타 행동하는 것은 변하질 않는 요슈아의 특징이었다. 그런 요슈아도 요슈아였지만, 제리도 제리였다. 익숙해졌을 참에는 그가 재킷을 빌려줄까 물었을 때 그 대신 팔을 활짝 벌려 달라며 부탁하고는 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요슈아가 팔을 벌렸을 때는 그것이 너무나도 순진해 보여서, 하려고 했던 행동 대신 코를 꾹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제리는 그를 놀리는 것보다 그의 품에 안겨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그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때는 두 팔을 벌린 품에 몸을 가까이 붙이고 올곧게 펴져 있는 등을 쓸어내렸다.

요슈아는 잠시 당황하며 제리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못 말린다고 속삭이면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제리는 그의 손 아래서 머리카락이 더욱 부스스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자신의 검고 흰 머리카락이 그렇게 좋았던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전도였다. 요슈아가 제리를 끌어안는 순간 요슈아의 감정도 제리에게로 옮겨 갔던 것이다. 요슈아가 제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사랑스럽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리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제 와 제리는 타국의 풍경을 한눈에 보면서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낭만을 읊는 것이 서툴렀다. 그의 시선에 비치는 풍경은 현란한 색채를 띄고 있지만 동시에 순백색으로밖에 차 있지 않았다. 제리는 요슈아에게 수많은 색과 낭만을 배웠다. 그렇다면 요슈아는 제리를 통해 무엇을 전도 받았던가. 어떤 감정이 그에게로 옮겨 붙어버린 걸까. 서로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은 같아질 수 있을까. 제리는 묻고 싶었다. 너는 나를 통해서 무엇을 보고 있어?

 

"제리."

 

그때 마침 요슈아가 그를 불렀다. 제리가 난간에서 손을 뗐다. 뒤를 돌아보았다. 친숙한 얼굴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제리가 미소 짓자 요슈아도 반사적으로 따라 웃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요슈아의 셔츠 깃이 바람에 날려 펄럭거렸다. 그 소리가 소라게 안쪽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한 듯도 했다. 잘 찾아보면 이 세상은 비슷한 것들뿐인데,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받을 일도 없을 터인데, 어째서 항상 그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욱죄여 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까. 제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몽롱한 감각에 취해 있었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요슈아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정도 거리는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제리는 듣고 있었다. 요란하게 뛰고 있는 요슈아의 심장 박동을. 어쩌면 자신의 것도 저렇게 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생각하면서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요슈아의 심장 쪽에 대었다. 요슈아가 잠시 움찔거렸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리는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을 가만히 느꼈다. 이윽고 고민했다. 잠시 후 머리를 기댔다. 닿을 수 있는 곳곳마다 그의 박동이 전해졌다. 흉내 낼 수 없는 진동이었다. 확실하게 살아있는 그 박자를 손으로 기억했다. 기억을 안에 담듯 쓸어내렸다. 그것은 꽤 기분 좋은 감각이라 제리는 오래도록 취해 있고 싶다고 느꼈다. 머리를 기대었다. 요슈아는 별다른 말 없이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질문으로 말을 이었다.

 

"위에서 보는 풍경은 뭔가 좀 달랐어?"

 

질문이 공중으로 부유하더니 제리의 귀 바로 옆에 멈췄다. 묻는 어투는 아주 가벼웠지만 질문 자체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제리는 대답하기 전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요슈아의 심장이 뛰는 박자에 맞추어서. 그가 눈을 깜빡거렸다.

 

"응……. 엄청 다르던데. 아래에서 보는 느낌이랑 많이 차이 나더라."

 

요슈아가 질문을 더했다. 더 작은 목소리로.

 

"헤에,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

 

제리가 팔짱을 꼈다. 손끝으로 팔뚝을 꾹꾹 눌렀다. 자국이 희미하게 피부에 남았다. 금방 사라질 흔적이지만 기억 속에서 똑같은 느낌을 떠올릴 만큼 선명한 것이었다.

 

"그러게. 말로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려나. 나는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니까, 두루뭉술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걸."

"괜찮아, 그편이 좋아. 아니면……. 그래. 이런 방식은 어때?"

 

요슈아가 제리의 두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떼어냈다. 몸을 난간 쪽으로 돌렸다. 제리 또한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가 본 것은 바람이었다. 정확히는 바람에 흔들려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켜질락 말락 했다. 구름은 제 모습을 감추면서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두 사람을 감싸는 공기는 점점 더 쌀쌀해져 갔다. 여름의 끄트머리는 그랬다. 조용하지만 어쩐지 차갑고 무거웠다. 머지않아 모두가 떠나갈 준비를 할 것 같은 계절이었다. 요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로 난간 너머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는 성당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렴풋한 십자가 첨탑이 보였다.

 

"나, 가사를 쓸 때 항상 전체보다는 부분을 관찰해서 쓰거든. 지금도 이곳 전부를 보고 있기보다는 저 성당을 쭉 보고 있었어. 아까 지나온 곳이잖아."

 

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리의 어깨를 감싸안고 마저 말했다.

 

"아래서는 그렇게 뾰족해 보였던 게, 어두워질수록 흐릿해져서 말이지.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밤이 더 상냥하게 느껴지는구나—싶은, 그런 느낌. 이런 방식이면 쉽지 않을까? 작은 부분만 보기."

"……응, 그거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제리가 한참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둑해지는 하늘은 너무 넓고 아득해서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수많은 건물은 제각각 다른 불빛을 내고 있어서 어느 곳에 시선을 두면 좋을지 모르겠다. 작은 부분, 아주 미세한 부분. 작은 손안에 잡힐 정도로 조그마한 부분. 그것을 찾느라 시선이 계속 방황했다. 우왕좌왕하던 시선이 멈춘 것은 그들이 지나온 어느 한 곳에서였다. 제리는 요슈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난간 쪽으로 가까이 붙으라는 신호였다. 요슈아가 제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약간은 아슬아슬하게, 약간은 위험하게. 난간에 상체를 기울인 채 제리는 요슈아가 했던 것처럼 어느 곳을 가리켰다. 그가 따라 보았다. 그곳은 꽃의 골목길이었다. 위에서 보니 꽃들이 점처럼 보였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 색색의 프릴들이 얽히고설킨 풍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벽을 타고 올라온 장미 넝쿨이 위에서는 작은 미로의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장미는 피어났다기보다 산뜻하게 뿌려진 듯 보였다. 사실상 어둠에 잠겨 대다수의 꽃은 모습을 감추었고 몇몇 꽃들만 선명히 보였는데, 그마저도 넝쿨 옆에 켜진 노란 등불 덕분에 보인 것이라 언뜻 보면 알알이 박힌 전구 같았다. 제리는 난간에 기댄 채 말했다.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까 저곳을 걸었을 때 있잖아.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어."

"작아지는 기분?"

"왜, 넝쿨이 거의 벽 끝까지 자라 있었잖아. 쭉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내가 어영부영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달까."

 

요슈아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너다운 감상이네,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계속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제리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의 앞머리가 잠시 눈을 찔렀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눈앞의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느꼈던 감상이 더욱 확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미적지근하게 울렁거렸다. 그것이 좋은 건지 아무것도 아닌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와서 내려다보니까, 위에서는 나도 넝쿨도 꽃도 전부 작고 작구나, 점처럼 보이는구나. 나만 어영부영 서 있는 건 아니네, 다행인걸. 이런 느낌을 받았어."

 

말을 마치고 제리는 요슈아를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둠에 가려져 표정이 보일락말락 했다.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그 눈 안에 비치는 요슈아 자기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똑같이 난간에 기대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서 큰 웃음이 터져 나온 건 그로부터 몇 초 후였다. 요슈아는 특유의 경쾌하고 마른 웃음소리를 내면서 하하, 웃었다. 제리가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요슈아는 한참 더 웃다가 갑작스럽게 제리를 껴안았다. 안는 힘이 억세었기에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제리는 요슈아, 하고 의문스러운 말투로 그를 불렀다. 그다음 한 번 더 말했다. 내 말 이상했어? 그러자 요슈아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아니. 전혀. 오히려 좋아서."

 

요슈아의 말은 어째서인지 하늘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귀가 먹먹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요슈아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는 잠시 제리를 말없이 보았다. 부슬부슬한 검은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 위에 얇은 입술을 눌러 얹듯이 입 맞추었다. 몇십 분 같은 몇 초가 이어졌다. 시간은 영원을 보낼 듯하다가도 금세 미래로 넘어갔다. 입을 뗀 그가 제리를 내려다보았다. 제리는 그 표정이 무언가를 저 먼 선착장에 두고 온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요슈아에게도 전해졌을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손을 요슈아가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요슈아는 끊어졌던 말의 매듭을 다시 묶기 시작했다.

 

"네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낀다고 했을 때, 놀랐어. 나는 그 기분을 항상 느끼고 있었거든.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그걸 제리 네가 정리해 준 것만 같았거든."

"요슈아도 그런 걸 느껴?"

"응. 많이. 셀 수 없을 만큼."

"그렇구나. 요슈아도 나랑 같은 거네."

"맞아. 그래서 좋았던 거야. 어영부영 서 있는 게 나뿐만은 아니어서. 아주 높은 곳에 있는 너니까, 닿을 수 있도록 한참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난 아무래도 또 너한테 진 모양이야."

 

요슈아는 손을 놓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었다. 굳게 마음먹은 눈동자 아래로 옅게 띤 홍조가 보였다. 건드리면 더욱 빨갛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그런 제리의 감상도 알지 못한 채로 그는 말했다.

 

"너도, 나도, 여기 서 있어. 어설프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느다랬다. 둘 사이를 유영하는 공기처럼 가벼웠다. 그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일부러 엉킨 채로 내버려 둔 그 말을 떼놓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가 표정으로, 말로, 손끝의 떨림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엉성하게 수 놓은 자수. 고장났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돌아가는 태엽. 한 조각이 빈 퍼즐. 그러니까 요슈아의 입에서 뱉어진 그 말은 맞지 않는 모서리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공백이 있었다. 그는 그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적막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낯섦은 단 하나의 되물음으로 깨졌다.

 

"같이?"

 

제리가 단 하나의 말을 던짐으로써 공백에 금이 갔다. 찢겼다. 하지만 동시에 치유였다. 무너지는 것도, 뭉쳐지는 것도 아닌. 그 경계선에 있는 무언가. 어리숙한 그들에게 딱 맞는 그 중간이었다.

요슈아의 눈동자는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말을 꺼내고 삼켰다. 그러다 결국 조용히 뱉어냈다.

 

"응."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떨어진 말들과 비틀거리는 중심과 끼워 맞춘 음. 숨을 쉬고 내뱉는 소리 이외에 들리지 않는 침묵이 다시금 이어졌다. 두 사람의 실루엣은 완전히 떨어지지도, 완전히 붙지도 않은 채 근거리를 유지했다. 침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경계인지 유대인지는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답처럼 조용히 자리를 굳히다가, 훅 불어오는 바람결에 요슈아가 기침을 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둘은 멍하니 서로를 마주 보다가 쿡쿡 조심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작은 웃음이 얼마 안 가 빠르게 커졌다.

해는 기울고 하늘은 정체 모를 주홍빛으로 물들어 사방이 잔잔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탑 꼭대기에서 내려가기 직전, 요슈아는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얹었다. 동작은 빠르고 익숙했다. 그는 카메라에서 멀어지며 제리 옆으로 섰다. 차가운 공기는 숨을 쉴 때마다 그들의 호흡이 엉겨 붙게 만들었다. 브이. 요슈아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제리도 손가락을 들어 브이를 그렸다. 카메라 셔터 음이 울리기까지 몇 초의 뜸이 있었다. 그때쯤 바람이 한 번 더 강하게 불었다. 제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두 사람은 탑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를 때는 그렇게 가팔라 보였던 계단길이 내려갈 때는 한없이 친절해 보였다. 얼마나 방심했는지 제리의 손을 잡고 앞장서던 요슈아가 발을 헛디딜 정도였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돌부리도 없었는데 넘어질 뻔했다며 나름대로 웃어넘겼다. 제리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대신 택시에서 요슈아가 했던 대로 그의 뺨을 꾹 꼬집으면서 이 말썽꾸러기, 한번 말하고 말 뿐이었다.

제리는 탑 아래로 내려와 계획을 적어둔 노트를 꺼냈다. 그동안 요슈아는 백 팩의 짐을 정리하고 있기로 했다. 노트 속 계획표에는 벌써 여러 곳에 엑스 표를 그려두었다. 제리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면서 칼라오라 탑 위로도 엑스 자를 그었다. 어느새 남은 곳은 두 곳뿐이었다. 유대인 회당과 메스키타 사원이었다. 그중 거리상으로 먼저 갈 만한 곳은 메스키타 사원이었다. 현지에서 잠깐 만났던 가이드는 두 사람의 계획을 듣고 꽤 잘 짠 동선이라며 감탄을 보냈었다. 그 말에 요슈아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제리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정확히는 거의 끌어안은 것에 가까웠다. 요슈아는 그에게 스페인어로 무어라 말했는데, 제리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웃음기가 가득한 걸로 보아 또 짓궂은 말이지 않을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요슈아는 그런 것이 있다며 에둘러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이럴 때는 꼭 얄밉기도 했다. 동시에 사랑스럽기도 했고. 어느 한 감정만 우세하지 못하다는 건 싫은 듯 좋다.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가이드는 제리의 노트를 가리키며 꽃의 골목길을 이미 지나온 것 같으니, 이왕이면 유대인 회당을 마지막에 향하고 메스키타를 그전에 보는 것으로 수정하는 것이 동선상으로 편하겠다고 말했다. 제리는 군말 없이 그렇게 수정했다. 넘치는 수용성은 제리의 특기이자 자랑 중 하나였다.

메스키타. 그곳은 수많은 여행객이 코르도바를 찾는 목적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랜드마크라고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모스크'라고 하던가. 제리는 서치 중에 보았던 블로그 글의 제목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다리 건너편에서 멀찍이 보았던 풍경으로만 생각했을 때도 그것은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사원 전체가 불그스레한 홍예석과 흰 사암을 번갈아 만들어 교묘하게 짜인 상앗빛 조각 같았다. 이슬람 사원과 가톨릭 성당이 한 건물 속에 공존한다는 오묘한 조합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도착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저 추측에 불과한 어림짐작일 뿐이었다.

코르도바 기차역에서 내린 뒤 제리와 요슈아는 03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좁은 도로를 굽이굽이 지나갔다. 상점 진열장에 쌓인 먼지가 창문 너머 풍경 속으로 흩어졌다. 산 페르난도 정류장에서 하차한 두 사람은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도보 7분. 길 위의 소음과 부스러진 햇빛, 발밑에 굴러다니는 무언가가 그들의 사이로 스며들었다. 걷는 동안 두 사람은 주변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다. 뚱뚱한 고양이를 양팔에 가득 끌어안고 지나가는 중년 남성, 회색 정장에 신발 끝이 닳아 있는 남자. 그는 골목 모퉁이 근처에서 애인을 기다렸다. 손가락 끝으로 담배를 비벼대며. 그러나 애인이 나타나자마자 재빨리 담배를 꺼트렸다. 요슈아는 그 옆을 지나치며 고개를 돌렸다. 작게 기침했다. 담배 맛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제리는 이런 점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어긋난 데칼코마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둘이었다. 마치 데칼코마니를 만든 다음 어느 한 쪽의 물감을 손으로 문댄 듯했다. 제리는 흐트러진 쪽이 당연히 자신이라고 여겼다. 요슈아의 꾸밈없는 말투는 오히려 제리의 엉키고 흐트러진 생각을 도드라지게 했다. 표준이 있다면 요슈아일 것이라는, 애인 이전의 데빌즈로서의 막연한 생각이 그를 감쌌다. 제리는 요슈아의 중얼거림에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그 사람들도 뭐가 좋은지 모를 것 같아."

 

요슈아가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하늘 아래에서, 뜨거워진 공기의 틈 사이에서 계속 눈앞에 고여 있는 것들을 확인하려는 듯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그의 시선은 사원의 첨탑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관자놀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반짝였다. 제리는 요슈아의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았다. 요슈아가 말했다.

 

"어쩌면 다들 그런 걸까."

"우리 둘만 어영부영한 건 아니네."

 

제리는 아까의 대화를 복기하듯 말했다. 요슈아가 그 말에 입꼬리를 솔직하게 끌어올렸다.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녹아내린 듯한 시간이 천천히 뒤섞이며 흐르고 있었다. 노을빛이 바닥에 떨어져 나른히 퍼지고 바람 한 점 없는 공기가 두 사람의 피부를 스쳤다. 한 발자국씩, 이름 모를 것에 이끌리듯 걸었다.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는 메스키타 사원이 서 있었다. 메스키타 사원은, 그 거대한 존재는, 웅장함 이상의 무엇이었다.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억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원의 첨탑을 좇아 눈높이를 올리자 자연스레 고개가 꺾여졌다. 압도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늘 높이까지 이어진 날카로운 첨탑. 그것은 직선이었고, 날이었고, 어떠한 무결함이었다. 첨예하게 건축된 그것은 모든 부분에 제각각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직선들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첨탑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 침묵은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직선들이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존재한다고. 이렇게 아름답게, 이렇게 폭력적으로. 오랜 시간 고개를 젖혀 바라보고 있노라면, 심장에서 서서히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저릿함이 느껴졌다. 입을 다물고 바라보기만 하던 두 사람은 이내 숨을 들이쉬며 감탄을 터뜨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요슈아였다. 감탄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있지, 서바이벌에서 오로라를 봤다고 했었잖아."

"응. 그랬지."

"그때 오로라를 봤던 것하고 비슷한 기분이 들어."

"그건…… 엄청난 감상이네."

 

제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폐 속에서 공기를 훔쳐 가 버린 것처럼. 그는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들이마셔 보아도 채워지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드는 열기.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꺼끌꺼끌한 천처럼 그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대로 벗겨지지도, 떼어내지도 못 하는 껍질과도 같이.

사원은 빛났다. 돌 하나하나가, 창 하나하나가 각각의 존재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 대단히 기묘했다. 요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천장이 있을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광경이 문득 오로라를 떠올리게 했음은 이루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차갑고 깊은 북쪽의 기운과는 달랐다. 그것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타오르는 열기였다. 모든 것이 밝고, 뜨겁고, 묘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제리가 천천히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요슈아도 제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다. 제리는 잠시간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 그 목적을. 하지만 머릿속에서 끝까지 잡히지 않았다. 그때 그를 현실로 복귀시키듯 요슈아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체온은 유난히도 따뜻해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만들었다.

 

"갈까."

 

둘은 짧은 시간 어정거리며 서 있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옆 작은 데스크에서 돈을 넣었다. 동전 몇 개의 소리가 귀에 대롱대롱 메아리치듯 울렸다. 제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사원의 폐장 시간은 일곱 시였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여섯 시 반이었다.

조용했다. 거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른 오후에 보이던 수많은 여행객들은 대부분 사라진 듯했다. 대신 어느 정적이 그곳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웠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발을 맞추었지만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필요한 말이 딱히 없었고 굳이 끌어낼 이유도 없었다. 침묵이 싫지 않은 사이였다. 제리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잠시 확인하며 말했다.

 

"다 둘러봐도 시간 넉넉할 것 같지 않아?"

"응, 생각보다?"

 

요슈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런 일을 걱정하는 곳은 아니었다. 대신 한적한 적막이 둘을 반길 뿐이었다. 그것은 고요하기도 어쩐지 쓸쓸하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사원의 벽과 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들이 이곳의 진짜 주인이었을지 모른다. 본격적으로 사원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풍성하게 열매를 감싸 쥔 오렌지 나무가 시야를 채웠다. 열매는 잔뜩 매달려 있었고 이파리는 햇볕에 윤기를 띠며 마치 살아있는 듯 바스락거렸다. 나무들은 안뜰 한가운데에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그 주위를 걷자마자 묘한 무게감을 가진 달큰하면서도 날카로운 향기가 코끝을 휘감았다. 향이 콧속을 파고들 때마다 한순간 기억의 벌판으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 어디선가 맡았을 법한, 익숙하다 못해 알 수 없는 냄새. 그것은 로스앤젤레스의 냄새였다.

바깥의 태양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뜨거웠지만 안쪽은 미적지근하다 못해 서늘했다. 바닥을 스치듯 느릿하게 번지는 물 냄새가 그곳을 더더욱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사흔 덕택인 듯했다. 폭발할 듯한 더위 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가히 중독적이었다. 사원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건물은 더더욱 자신을 낱낱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방이 대리석과 석영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표면은 얼음처럼 매끈했고, 결마다 고유의 반짝임을 품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완전해 보였지만, 결정 하나하나에 미세한 금이 서려 있었다. 붉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말발굽 모양의 이중 아치가 끝없이 이어졌다. 약 850개쯤 되었던가. 정확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니 숫자는 의미가 없다. 마치 붉은 피와 하얀 뼈를 휘감아 만들어놓은 거대한 숲 같았다. 아치 사이사이마다 세워진 돌기둥은 흑요석으로 깎아낸 듯 검고 단단했다. 길쭉한 그림자들이 눈길을 잡아챘다.

제리는 한순간—더욱더 완벽하고, 완전하게—작아지는 기분에 숨을 삼켰다. 요슈아 역시 자신이 먼지만큼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돌기둥을 따라 위로 끌려갔다. 마침내 도착한 끝에는 검은 원반 모양의 샹들리에가 천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구조, 직선과 원형의 반복. 지나치게 단순해 보였지만 그 단순함은 반대로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어스름하게 깔려오는 은광의 빛은 장내를 가득 채우면서도 투명하게 사라졌고 모든 것을 조금씩 더 희뿌옇게 덮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요슈아가 그것을 다시 잡았다. 제리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얗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앞머리를 가릴 듯 말 듯 흩날렸다.

왜, 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 작아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까.

제리는 말을 삼켰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전달되는 말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내뱉지 않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었다. 제리는 그것이 지금의 순간임을 잘 알았다. 그는 말없이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유약한 미소였다. 요슈아는 그것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손에 힘을 주려던 것을 포기하고 손가락을 얽혔다. 그의 굳은살과 제리의 부드러운 살이 스쳐 지나가면서 맞닿았다. 손마디 끝이 담홍색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그것을 애써 모른척했다. 무심코 가지고 있는 속마음을 전부 내뱉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내뱉어버리는 것이 맞을지 그대로 삼켜버리는 것이 맞을지,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두 사람 모두 모르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손마디 끝에 힘을 주고 서로의 것을 문질렀다. 손가락이 굽어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제리의 시선은 어느새 요슈아의 얼굴에서 두 사람의 손끝으로 향해 있었다. 제리는 잠시 짓궂게 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얽힌 검지로 요슈아의 손등뼈를 쓸었다. 요슈아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도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리가 한 행위를 똑같이 따라 했다. 그런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제리는 역시 그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속으로 삼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손을 맞잡고 한두 마디 말장난을 섞어가며 천천히 걸었다. 둘은 발 끝이 가벼운 사람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덜컥 멈췄다. 사원의 제단 앞이었다. 중앙 제단은 온통 금빛이었다. 금색으로 도금된 조각들이, 오래된 붓질로 덧칠된 그림들이 사방에서 빛을 뿜어냈다. 벽을 따라 늘어선 성경의 장면들. 성인과 천사 조각들이 엄숙하게 제단을 감싸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다듬어진 천사의 날개를 보면서 제리는 불현듯 생각했다. 원래라면 가장 부드러워야 하는 것이 천사의 날개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고 흠잡을 데 없이 매끈했다.

제단 뒤편, 중앙에 작은 돔이 있었다. 돔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노르스름하여 금빛과 비슷하게 찬란했다. 제리는 저곳에 태양을 몰래 심어놓는다면 저런 빛이 날까, 생각하였다. 돔 안에는 성인이 모셔져 있었다. 빛이 그의 얼굴을 침착히 비추고 있었다. 빛 때문에 눈가가 반짝이고 있어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아니면, 어쩌면 성인의 조각상도 울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요슈아가 조용히 제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제리의 귓가를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요슈아가 속삭였다. 비밀처럼 말했다.

 

"누구라도 우는 걸 감출 수는 없나 봐."

 

제리는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속삭여 답했다.

 

"요슈아는 잘 감추던데. 내 앞에서만 빼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짓궂은 거야, 제리!"

"평소의 복수라고 생각해."

"정말이지, 화도 못 내는데. 알면서 그러는 거지."

 

요슈아는 이미 좁혀진 거리를 다시 넓히지 않겠다는 듯 손깍지를 풀지 않은 채 팔짱을 꼈다. 그의 움직임은 가볍고도 견고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성인의 울음 앞에서 그들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꼭 장난스럽다고 할 수 없는, 그렇다고 충분히 진지하지도 않은 어떤 애매한 웃음. 그 웃음 속에는 연인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순간이 찰나에 길드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였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이 정도 모독에는 눈을 감을 법하다. 숨길 수 없는 무덤덤한 고백 앞에서 말이다.

그늘에 반쯤 잠긴 먼지 낀 빛 아래 천사 조각상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다고 믿는 쪽이 맞겠다. 반짝이는 눈썹 밑, 돌 조각의 균열이 흘낏 그들 쪽을 향하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뒤로 젖히고 날아오를 것 같은 자세. 그런 허상이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맴돌았다. 그 속에서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견고한 두 사람이 있었다.

 

유대인 회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어둠이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노을은 멀찍이 자취를 감췄고, 거리는 뜨거웠던 햇살의 흔적을 겨우겨우 지우고 있었다. 붉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길 망설이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녁 공기는 그 틈새를 타고 스며들었다. 그들은 로마교를 따라 호텔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틈에서 좌판대를 펼친 한 상인이 요슈아의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 나란히 서서 구경을 했다. 이것도 예쁘다, 저것도 귀엽다,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옥 귀걸이 하나를 보았다. 반짝이는 옥 귀걸이가 천 조각 위에서 빛을 품고 있었다. 요슈아가 말했다.

 

"나눠서 끼면 엄—청 좋지 않을까? 게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특이해 보일 것 같고."

 

그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귀걸이에 다시 눈을 돌렸다. 한쪽만 들어올려 보았다. 뒤집어 보기도 하고 빛에 비춰 보기도 한 다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일본에는 안 팔 것 같은 디자인이긴 해."

 

그 귀걸이는 4분음표 모양이었는데, 중심이 작은 헤일로처럼 동그랗게 비어 있었다. 귀걸이의 장식 자체가 너무나 작은 크기였기 때문에 그것이 헤일로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한참 걸렸다. 그런 소소한 깨달음도 여행의 묘미라면 묘미일까. 제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소한 것들. 중요치 않은 것들. 그러나 지나치려야 지나칠 수 없어 마음을 건드리는 어떤 것들.

코르도바의 바람은 쌀쌀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숨을 밀치는 듯 뜨거웠다. 바람은 혀끝으로 스며들었다. 그 자극은 매콤하고 날카로웠다. 선들선들했지만 땅 위로 달궈진 열기가 어딘가 바람 사이에서 길을 잘못 들어버린 듯 느껴졌다. 그들은 그 더위에 익숙해져 있었다. 호텔 앞에 멈춰선 제리와 요슈아는 얼마간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잠들기 직전 요슈아가 제리의 귀에 속삭였다.

잘 자. 그리고 내일 또 봐.

 

 

"와—아! 일본이다!"

 

요슈아가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외쳤다.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공항에 퍼졌다. 활주는 이미 끝났다. 비행기는 멈췄다. 하네다 공항의 공기는 그들의 도착을 환영하듯 맑고 깨끗했다.

요슈아는 작은 손에 스페인 국기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크기도 작고 색도 선명했다. 그것을 들고 있으니 그의 손이 마치 어린아이의 손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들떠 보이는 듯한 그런 손을, 제리는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요슈아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얼굴에 적혀 있었다. 그가 입을 움직였다.

 

"나, 제리가 그때 뭘 봤길래 그렇게 놀랐는지 알 것 같아."

"응?"

"왜, 탑에서 내려가기 직전에 말이야. 사원 쪽이었나? 그쪽을 보면서 제리 눈이 엄청 커지길래, 뭘 봤는지 한참 고민했거든."

 

요슈아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았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냥 물어봤어도 좋았겠지만…… 음~ 어쩐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리고 또, 제리에 관한 건 꼭 스스로 알아내고 싶으니까."

 

요슈아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지금 확신했어. 나도 본 것 같거든. 왜냐하면, 그때도 네 손을 잡고 있었잖아."

 

제리가 숨을 들이마셨다. 제리가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깊게. 옥 귀걸이가 손안에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촉감은 제리를 지금 여기로, 바로 이곳으로 붙잡아 놓았다. 현실이라는 단어가 형태를 가지면 꼭 그 귀걸이처럼 생겼을 것 같았다. 그 붙잡음은 강제적이었지만 동시에 상냥했다. 제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을 벌렸다.

 

"……뭘 봤어?"

 

요슈아가 시선을 왼쪽으로 보냈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다시 오른쪽을 보았다. 이번에는 천천히. 시간을 곱씹듯이. 마침내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중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