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stayus
1. Stand By…… Me?
부패한 마음과 선에서 해답을 찾은 날로부터 하루, 또 하루를 계속해서 지나갔다. 콘크리트에서 일어나는 열로 공기가 왜곡되어 보일 정도의 온도에 제리가 두 손을 펄럭거렸다. 덥다……. 자연스레 혼잣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었다. 제리가 주변을 곁눈질로 살피면, 스크램블 교차로의 사방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열기를 해소하고 있었다. 한여름 날씨에 양복을 빼입은 세일즈맨, 바람에 밑단이 흔들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 라무다 소다 병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는 어린 소년. 풍경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태양은 용서 없이 제리의 피부를 구울 듯이 쪼아댔다. 그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파랑이 되려면 얼마나 남았으려나.
그렇게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와중에 갑작스레 시야에 새하얀 것이 들이닥쳤다. 저쪽에서부터 경쾌하게 들려오는 구두굽 소리가 피아노 소리처럼 듣기 좋았다. 맞은편의 그가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제리를 마주했다. 그러자 금세 입가에 호선을 띄웠다. 하염없이 길게 느껴지기만 하던 신호가 어느새 파랑으로 물들었다. 하양, 검정. 다시 하양. 교차로라는 건 그와 그를 이상할 정도로 닮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자 교차로 중간에서 손이 맞닿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한 번쯤은 노래로 들어봤을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덥지? 얼른 들어가자."
"아냐, 괜찮아. 이제 좀 덜 더운 것 같아. 그런데… 연습 중인 거 아니었어?"
"몰래 빠져나왔지. 잠깐이면 괜찮을 거야. 자, 어서."
응, 요슈아. 뾰족한 마음을 양옆으로 둥글게 감싼 듯한 이름은 입에 담기만 해도 미소가 나왔다.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손을 맞잡은 채 밴드 연습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슈아를 바라보던 제리는 잠시 머리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렁이 한 마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격하게 움직일수록 지렁이는 더욱 조급하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리의 잿빛 눈동자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지렁이의 눈이 제리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급하게 고개를 돌려, 요슈아의 손을 아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손바닥 사이로 끈적한 땀이 묻어났다. 둘 모두가 서로의 혈흔을 마주한 날. 솔직함으로 기댈 것이라 확신한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바뀐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조금씩 다시 한번 제리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2. 관념적인 아이덴티티, 나를 봐줘!
너 말이야. 내 집에 이거 두고 갔었어. 자. 제리가 더운 열기를 최신형 에어컨 앞에서 식히고 있자 요슈아가 작은 검은색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제리가 의아한 시선으로 받은 뒤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바뀌는 건 몇 초도 안 되어서였다. 그 변화에 요슈아가 작게 웃었다. 쇼핑백을 열어보면 들어있는 것은 LA에 있을 때 종종 타고는 했던, 손길이 묻어나는 롤러스케이트 슈즈다. 제리의 머리카락과 꼭 닮은 검정색. 먹을 묻힌 붓처럼 슬쩍 안쪽에 넣어둔 추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고무로 만든 슈즈를 신으면, 신발 바닥이 땅을 차고 앞으로 나아가고, 그 바닥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발가락을 떨게 했다. 뒤꿈치 부분까지 이어진 딱딱한 금속 소리가 달그락달그락 나는 것이 기분 좋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스커트의 밑단이 허벅지 위를 쓰다듬으며 바람결에 따라 뒤로 흘러갔다. 중심을 잃을 것 같을 때 제리의 것보다 조금 더 큰 손가락이 마디 마디를 파고들며 지탱해주곤 했다. 조금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유롭게 구름 따라 움직이던 날이 기억났다.
"나도 정리하다가 찾았는데 말이야. 옛날 생각도 나서 타자고 했다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급하게 사무소로 돌아갔던 거 기억나?"
"아. 생각났어! 그때구나? 새삼 이렇게 오래 지냈는데도 계속 새로운 추억이 생겨서 신기해."
"아하하. 그 말, 어쩐지 기분 좋네."
요슈아는 제 머리를 제리의 어깨에 기댄 채 롤러스케이트 슈즈를 만지작거렸다. 발견했을 당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당연히 LA 시절의 제리의 표정이다.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때도 너는……. 입 밖으로 구태여 내뱉지 않는 생각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세 관두었다. 이제 이런 식은 그만두기로 했잖아, 멍청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건드린 뒤 배어 나오는 비릿한 향 하나 없자 안심한 채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바닥이 헤진 롤러스케이트 슈즈. 그것을 탈 때만큼은 그때의 제리 또한 아무런 걱정 없어 보였다. 거짓이나 가면의 조각 하나 섞이지 않고 맑은 하늘 아래를 품은 것처럼. 요슈아가 다시금 그를 쳐다보았다.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제리의 얼굴이 그늘져 보인다고 감히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괜찮은 게 분명한데, 여전히 무언가가 느껴졌다. 약속한 날로부터 수많은 하루가 지나갔다. 제리의 상태가 부쩍 좋지 않다고 느낀 건 얼마 전부터였다. 보은. 그것이 요슈아라는 사람이 품은 본능 중 하나였다. 자신을 발견해주었던 그때처럼 보답이 되고 싶다는 마음. 여러 생각 끝에 요슈아가 먼저 운을 뗐다.
"저기, 있지. 저번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뭔가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렇다면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나한테 해준 것처럼, 나도 네게 의지가 되고 싶어."
"…나, 역시 조금 이상했으려나? 미안해. 나도 긴가민가해서 말을 못 했어. ……아, 옛날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정말 아니야!"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일순간 풍선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래로 휘어진 눈썹 따라 눈동자가 아래로 기울었다. 그러다가 입을 연 그는 마지막에서야 급하게 손사래치고,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조금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걸까, 서서 이야기하던 그가 풀썩 제리가 앉아 있는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제리의 어깨에 기대었다. 푸슬거리는 흰 머리카락이 제리의 목선을 간지럽혔다. 그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그렇다면, 응. 다행이다. 그리고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어째서? 그 말에 제리는 자신의 땋은 머리카락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무슨 기분일까? 뭐든지 쉽게 질려버리다가도 요슈아를 쫓아 좋아하고 있어. 서로 의지하고 있으면 무서울 건 없다고 생각해. 그런데, 요즘 따라 가끔…… 그런 기분이 들어."
뭔가에… 턱 막혀 있어서 조금만 더 하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뭘까. 계속 고민하고 있어.
3. Flyer, 그날 꿈꿨던 꿈이 바로 최고의 상승기류¹ Flyer, Chinozo
연습이 끝나고 돌아온 집 안의 기류가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음악 CD가 한가득 쌓인 모던한 디자인의 책장을 눈으로 훑었다.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덕분에 시원한 공기가 거실을 순환하고 있었다. 단순 그 이유로 차갑게 느껴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요슈아는 얇은 여름용 카디건을 벗고 바로 소파에 앉았다. 고개를 젖히고 편하게 앉아 있다가 아예 누워 버렸다. 어떻게 하면 그 녀석한테 도움이 될 수 있으려나……. 걱정 섞인 푸념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 뒤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우려하였던 감정은 아니었으니 그건 다행이지만, 막힌 기분이 든다는 건 요슈아 본인이 느끼던 감정에 가까웠다. 사방이 막혀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끈적한 타르들이 위에서부터 떨어져 바다에 잠식되어가듯 계속해서 쌓였다. 어느새 빠져나가려고 해도 팔다리를 질척하게 감싸왔다. 뻐끔.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물고기가 아가미로 호흡한다. 요슈아는 눈을 꾹 감았다가 조심스레 천천히 뜬 채, 이마를 오른팔로 짓누르고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얀 천장 중앙에서 조명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요슈아~ 너 뭔가 텐션 낮다?"
"에? 저, 정말? 그렇게 보여?"
"뭔가 고민 있으면 부담 없이 말하렴. 우리 네 명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공연하는 게, Devils들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잖아?"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앞으로도 다 같이 해주지 않으면 곤란한 건 내 쪽인걸!"
드럼 스틱을 내려둔 유키가 고개를 기울이며 요슈아의 당황한 대답에 웃었다. 그 옆에서 마츠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요슈아는 그제야 감추지 못한 당황을 식히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고뇌하는 듯 눈썹이 양옆에서 짓누르듯 구겨졌다. 옛날부터 쭉 함께했던 멤버의 컨디션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빠르게 파악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기겠어, 이 세 명을. 그렇게 생각하고 볼을 긁적거리며 나름 진지한 태도로 덧붙였다. 그럼 모두한테 질문 하나만 해도 되려나?
요슈아는 주어를 뺀 채 적당히 고민 중인 것을 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츠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연습은 잠시 중단된 상태였다. 한참을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소타가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익스트림 스포츠라든가! 갑작스레 나온 두 음절의 단어에 소타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몇 초 만에 유키와 마츠가 곧바로 소타의 말에 태클을 걸기 시작하자, 음표의 나열로 가득 채워지던 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운 수다 소리로 채워졌다. 그 구석에서 혼자 의자에 앉은 채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요슈아가 크게 탄성을 내뱉었다.
"될지도 몰라!"
"우, 우와! 갑자기 요슈아가 폭주했잖아! 될지도 모른다니…… 뭐가 된다는 건데?"
그 말에 요슈아가 한껏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마치 카나리아처럼 따스한 미소였다. 그러니까, 익스트림 스포츠!
4. Can you hear me?
격정적인 서바이벌 기간이 끝나고, 강화 합숙마저도 지나간 어느 날. 요슈아의 집에 제리가 데이트 삼아 찾아왔다. 요슈아가 제리의 풀어진 머리카락을 처음부터 다시 땋아주거나 가만히 침대에 누워 키득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요슈아가 마주 누운 제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부드러운 뺨이 누를 때마다 움푹 패였다. 제리는 한참 가만히 있어주다가 요슈아를 따라 똑같이 그를 건드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호수에 빗방울 한 두 방울이 떨어지듯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이 두 사람을 가만히 감싸고 있었다. 요슈아는 타이밍을 노리는 동물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심한 듯 운을 띄웠다. 저기, 제리. 이번 서바이벌도 무사히 끝났고, 너도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테니까… 이번 동계 휴일에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꿀꺽, 말을 마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퍽 잘 들렸다. 우리들…… 잠깐 LA로 돌아가지 않을래?
데이트라고 하면 서로의 집이 거의 반경 거리의 전부인 둘이었기에, 제리는 요슈아의 제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내나 유원지도 아닌 LA라니. 제리는 일전에 자신이 말했던 것을 그가 의식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네 상냥함이 너무 부드러워서, 조금씩 녹아 형체를 잃어갈 법한데도 오히려 공기를 끌어안고 점점 커진다. 그 마음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제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슈아는 대답 없는 정적에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 싫으면 물론 거절해도 돼! 그냥 둘이서 오랜만에 다녀오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가고 싶은 곳도 있고 해서! 강요같은 건 절대 안 할 테니까.
그런 말을 쭉쭉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제리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자신만 보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덧붙일 필요 없는데. 애초에 둘이서 가는 곳인데 어디든 안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살짝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던 몸을 바로 누웠다. 그런 뒤 똑바로 요슈아를 마주 본 채 웃으며 답했다. 왜 그렇게 당황해? 아하하. 당연하지, 요슈아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벌써부터 기대된다. 제리의 말에 요슈아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언제나 보여주는 그 표정이었다. 평소의 강도 높은 일정과 노력으로, 본인도 모르게 흐물거릴 때가 있는 표정에서 세상 무엇보다 기쁜 일이 생긴 듯이 바뀔 때.
"정말?! 아아, 어떡하지. 너무 기뻐……! 역시 너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
제리가 말릴 틈새도 없이 요슈아가 볼을 한껏 붉히며 그를 끌어안았다. 제리가 마주 안아줄 틈새조차 주지 않고 빈틈없이 채워졌다. 그런 와중에도 제대로 숨 쉴 공간 하나만큼은 무의식적으로 남겨두는 그 마음이 좋아서, 제리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웃었다. 응, 같이 가자. 단둘이서.
5. With Me, Ever Lasting
아니, 무리… 무리잖아, 이거. 덥썩 튀어나온 한 마디에 요슈아가 에, 하고 짧은 목소리를 냈다. 제리의 앞에는 보호용 고글을 쓴 안전요원이 간판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었다.
'The greatest thrill on earth! 13000 ft guarantee sky diving!' 스카이다이빙인 건 보기만 해도 아는데! 안내소의 천장에선 벽걸이용 모니터로 스카이다이빙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낙하산을 짊어지고 지상을 향해, 빠르게 낙하하고 있다. 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인조 날개를 펼친 새들이 예견된 추락을 위해 비상한다. 애초에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 가고 싶다는 곳이 여기였어? 요슈아는 제리의 말에 멋쩍게,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아서! 나도 한 번 해본 적 있거든, 엄청 옛날이라 다 까먹었지만. 씩씩하게 말하는 모습에 제리는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본능적인 걱정이 사각사각 뇌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본 요슈아는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제리의 귀에 속닥거렸다.
"꼭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있어. 그걸 보여주고 싶어서, 서프라이즈 겸…… 조금 제멋대로 데려와 버렸어. 미안! 나, 네가 싫어하는 짓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부담된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는 요슈아를 제리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낙하산을 짊어지고 서서히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하는 것도 얼마 안 가 고개를 홱홱 저으며 거절하려는 찰나, 요슈아의 팔이 제리의 시선에 들어왔다. 흉터가 사라지고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팔목은 전과는 달랐다. 그의 마음만큼이나 새하얀 피부가 선혈 자국 대신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네, 나…… 바보네. 너는 언제든 내 곁에 있어 줄 텐데…. 머릿속을 스치는 요슈아의 울음 섞인 말이 여름날 햇빛과 함께 녹아 들려왔다. 손목을 느리게 타고 흐르는 핏자국,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눈물과 빨강. 변하고 싶어. 아니, 변할게.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제리는 그것을 떠올렸다. 그 상냥함에는 도무지 고집을 피울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요슈아의 두 손을 맞잡았다. 대신 손은 꽉 잡고 있어 줘야 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둘은 천천히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긴 연수가 끊임없이 이어졌기에 벌써부터 둘은 조금 지쳐 있었다. 메인 패러슈트의 끈 네 개에 각각 달린 쇠고리를 가방 어깨끈에 연결하자, 찰칵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컨테이너의 가방에 달린 나머지 끈들도 전부 꽉 조인 뒤, 손목에 시계처럼 생긴 아날로그식 고도 측정기를 착용했다. 어느 정도 모양새가 갖추어지고 요슈아와 제리가 고글을 썼다. 안전요원의 말을 몇 번이고 새겨들으며, 제리가 낙하산을 펴는 연습을 몇 번 해본다. 요슈아는 대체 나에게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시간은 움직이고 마침내 둘이 비행기를 탔다. 프로펠러의 굉음이 고막을 찌르듯 강하게 울려 퍼졌다. 작은 비행기 안은 서로의 어깨가 딱 맞게 들어찰 정도로 좁았다. 고도가 서서히 올라가고 마침내 낙하지점인 고도 13,000피트에 들어서자 문 쪽에 서 있던 강사가 비행기의 문을 열어젖혔다. 소리치지 않으면 요슈아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폭음이 제리의 귓가를 때렸다. 요슈아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그저 조용히 제리의 손을 잡았다. 제리도 그의 손을 잡았다. 옆에서 강사의 외침이 순서에 따라 들려온다. Good Dive, lady and Gentleman. Ready, Set, Go.
네가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무엇인지, 그게 너무나도 궁금해서.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서 한 번 모든 생각은 잊고 뛰어보려고 해. 그리고 둘은 발을 뗀다.
6. 아드레날린 정키 젠틀맨!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서 둘은 나란히 낙하해 간다.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그저 지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예상보다도 훨씬 강렬한 풍압과 심장 소리에 온 청력이 예민해진다. 시각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약간의 변화조차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소리를 줍는 것처럼 반복한다. 바람의 포효, 이명, 기압의 변화. 질끈 감은 눈은 계속 뜨지 못한 채다. 제리, 나를 믿고, 눈을 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일순간에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양과 파랑. 눈에 비치는 풍경이 선이 되어가고 그 선들이 묶여 나간다. 몸이 느끼는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져, 곧 눈앞에 퍼지는 세계가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 중심에서 요슈아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맞잡은 손에 지금까지 보다도 더욱 다정하고 강한 힘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사이로 형언할 수 없는 푸른 빛이 아득하게 차올랐다. 손을 뻗어 낙하산을 펼치고, 천천히 부유감을 느끼며 지면으로 낙하했다. 쾌청한 햇빛이 두 사람의 착지를 축하하듯 더욱더 세게 쪼아댔다. 제리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실감이 안 나는 듯 요슈아를 올려다보았다. 땀방울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신선한 감각이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메인 패러슈트의 끈을 풀어주며 즐거웠다고 한참을 말하다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너おまえ는 내게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사람이야. 그걸 꼭 알려주고 싶었거든. 설령 네 앞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느껴지더라도, 같이 부수고 밀어내줄게. ……그 모든 일을 네가 있기에, 나는 사랑할 수 있어."
요슈아의 목소리는 남들보다는 좀 더 얇고 가늘어서 누군가는 금세라도 끊어질 것처럼 연약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제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그 아득한 풍경 자체가 아니라, 요슈아가 그렇게 말해주었기에. 그 풍경을 사랑하는 너あなた이기에 나도 그걸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야 제리는 계속 품어왔던 무언가의 의문이 풀렸다고 생각했다.
0. Stand By…… You!
똑같은 스크램블 교차로. 제리는 여전히 무더운 열기를 손부채질로 식힌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고 천천히 걸었다. 요슈아의 문자가 도착하는 알림음이 났다. 언제쯤 와? 마중 나갈게! 그의 목소리가 절로 들리는 듯했다. 제리는 교차로를 다 건넌 뒤 지금 도착했다고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의 끝자락에 익숙한 것이 닿는다. 열기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아스팔트 위를 배회한다. 제리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아지랑이. 제리는 쓰던 타자를 전부 지우고 다시 쓴 뒤 전송 버튼을 보냈다.
[잠깐만. 좀 더 걸려!]
메시지가 가고 나서 제리는 조심스레 다가가 지렁이를 살짝 집어, 흙 쪽으로 돌려보낸다. 그런 뒤 가방에서 생수병 하나를 꺼내 그 주변에 졸졸 뿌린다. 지렁이는 생기를 찾은 듯 젖은 흙과 대거리를 몇 번 하더니 그대로 파고 들어간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슬 웃고, 몸을 돌려 그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한다. 제리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