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이 된 다음 해의 내 생일날 편지도 전화도 어떤 예고도 없이 마을로 찾아온 요슈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 얼마 전 중요한 배틀 참가를 앞두고 있다고 했었지 거기서 다친 걸까 아니면 마음이 꺾인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따라큐의 머핀에 넣기 위해 잘게 다지고 있던 라즈열매를 내팽개쳐두고 신발 신는 것마저 잊어버린 채로 그 애가 있다는 공터로 달려가 포켓볼에서 나온 에몽가, 펄스멍과 놀아주고 있던 소꿉친구가 기겁할 정도로 머리는 풀어헤쳐져 산발이고 흙길을 달려온 발바닥은 잎사귀와 나뭇가지가 붙어서 엉망진창인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호흡을 고를 새도 없이 헉헉거리며 질문을 던지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 애가 손을 맞잡고 말해 배틀에서 우승했어 유명한 기업에서 파트너십 계약을 맺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실력을 인정받은 트레이너로서 공식적으론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도 약간의 절차만 거치면 통행할 수 있다고
다쳐서 돌아온 건 아니었구나. 불안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려다 이어지는 말에 굳어버려 그러니 제리, 이제부터는 함께하지 않을래?
망상이라기엔 긴장한 상태로 내 눈을 바라보는 네 눈 조금 떨리는 손 네가 모험의 첫걸음을 디딘 그날부터 지금까지 꿈에서도 감히 떠올려본 적 없는 한 마디를 곱씹다가 그 순간 미지근한 온기가 올라와 두 뺨을 덥히고 내가 소리 없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말했잖아 나는 언제나 너를 기다릴 거라고, 그게 내 진심이었어…. 하릴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너를 기다리며 함께 보낸 시간을 되감는 게 내가 걷는 미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화기를 건네받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너는 그때부터 둘이 있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거구나 대답 대신 따뜻한 요슈아의 손등에 내 손을 올리면 긴장이 풀렸다는 듯 얼굴에 꽃처럼 환히 피어나는 미소
수 년의 기다림의 끝 프러포즈 같기도 한 소꿉친구의 진심을 받아본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도 가진 짐을 정리하고 그동안 신세졌던 마을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그 애와 모험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뎌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집은 초록 가득한 어릴 때의 기억과 다르게 여전히 내게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보이는데 예전처럼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안녕 잘 있어
요슈아가 나를 데리고 맨 처음으로 간 곳은 너무나도 추워서 사람은커녕 포켓몬도 몇 살지 않는다는 극지의 설원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고 왕관처럼 눈을 얹은 침엽수가 가득한 세상 붙잡은 손 외에는 전부 얼어버릴 정도로 추운 곳이야
흰색과 회색 검정밖에 없는 드넓고 공허한 공간인데도 몇 년 동안 내가 본 광경 중 가장 다채로운 풍경이었어



요슈아에게 안겨있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어 품에 들어간 나를 조용히 껴안아줬으면 해 눅진눅진한 감정을 고백하면 듣는 사람마저 지칠까 봐 말하는 걸 망설이다가도 그 품에 안겨있다 보면 결국 고해실에 들어간 죄인처럼 품고 있는 부정적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게 돼 스스로도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흐르면 조심스럽게 눈가를 닦아내 주려는 손길이 다가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꽉 껴안아줬으면 좋겠어…. 이거면 돼? 좋아한다고도 말해줘…. 평소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걸까…. 불안해지는 거야? 아냐 요슈아를 믿지 못해서가 아냐, 그 말을 들으면 힘을 낼 수 있어서 그래….
품 안에 안겨 느리지만 꾸준한 템포로 뛰는 심장의 박동을 듣다가 어느순간 잠에 빠져들어 그러다 먼저 깨서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앉아있던 소파에 요슈아도 함께 누워 곤히 잠들어있는데 껴안은 팔은 풀지 않았어 네 위로가 뜨겁지 않아서 화상을 입지 않고 차갑지 않아서 내 마음을 얼어붙지 않게 해




요슈아의 사랑의 깊이를 느낀 건 그 애가 했던 그 한 마디를 들었던 순간, 네가 그만두라고 하면 나 음악을 그만둬도 좋아
우리 둘을 처음으로 이어준 매개체는 업라이트 피아노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이고 그 애가 광활한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 이유도 음악 때문인데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자기도 모르는 새 발걸음이 향하면서 고작 나 때문에 그렇게 의미 있는 음악을 관둬도 좋다니 너는 날 정말 사랑하는구나
처음과 마지막은 사실 별것 아닌데도 단어에 이유 모를 낭만이 스며들어있잖아 그래서 소꿉친구가 처음을 택한다면 나는 반대로 마지막을 고르기로 했어
내가 있는 곳과의 시차를 계산하고 시계의 초침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제일 먼저 전화를 걸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게 요슈아라면 나는 그 애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특별하게 보낸 하루를 완전히 끝마치기 전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는 것으로 그 애의 생일을 매듭짓고 싶어 방향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둘 다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란 건 다름없다고
요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스르르 내려오는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져보다 까무룩 잠든 오후가 있어
몇 시간 뒤 눈을 뜨자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나를 끌어안은 채 소파에 누워 곤히 잠든 소꿉친구의 편안한 얼굴이라 괜스레 잠이 덜 깬 척 여전히 졸린 척 가만히 그 품에 안겨있지만 귀 끝과 볼이 달아오르는 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져서
거실에 놓인 탁상시계의 초침보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아
천체관측을 좋아하고 세가의 홈스타 시리즈를 몇 년 동안 손에 넣고 싶어할 정도로 별에게 동경을 품었지만 정작 플라네타리움에 방문할 생각은 못 해봤는데 에타 유성군 덕분에 소중한 추억이 생겨서 기뻐
미국에 있을 당시 나는 밤하늘에 뿌려진 글리터처럼 반짝이는 빛을 발견할 때마다 소꿉친구를 떠올렸는데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을 이어준 건 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어 간절함이 그리움과 함께 천체의 궤도를 타고 혜성처럼 그 애에게 닿았다고
@juststayus
두 사람의 눈앞에는 온통 펼쳐진 은빛 세계가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에서 쏟아지는 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는 서릿발이 늘어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았다. 창문 밖으로 하얀 눈이 계속해서 내린다. 함께 몰아쳐 오는 강한 바람이 자꾸만 돌진하는 새처럼 몸을 부딪친다. 덜컹대는 유리창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자, 그는 추위에 한껏 붉어진 귓불을 잡아 만지작거렸다. 무척이나 불편하고, 동시에 아름답기 짝이 없는 풍경과 날씨다. 문이 굳게 닫힌 산장의 벽지는 하얗게 칠해져 있고, 천장 중앙에 설치된 연노란색 조명 불빛이 겨우 산장을 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 위에 깔린 두툼한 붉은색 융단마저도 덮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손끝이 어는 기분이 들었다.
요슈아는 제 가슴 속 시리게 다가오는 고동마저도 애써 무시한 채 옆의 소녀에게 담요의 넓은 면적을 더 건넸다. 눈을 닮은 하얀색 솜털 담요의 보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리는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하며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감사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상냥함은 노력이었으며, 다정함은 천성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제리는 요슈아의 그런 다정함에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리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읽는다. 지금부터 3박 4일간 단독-서바이벌이다냐. 알아서 잘 살아 남으라냐. 쓰레기. 판다 보냄. 천하의 요슈아에게도 식은땀이 흐를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제리, 정말 미안! 설마 판다 사장이 단독 서바이벌 같은 걸 생각했을 줄은!"
"…3박 4일, 요슈아랑 나랑…. 이 허허벌판 겨울 산장에서 살아남는 거야?"
"……응."
이번 하계휴가. 판다 사장이 각 밴드의 보컬리스트들에게 포상이라며 건네준 여행권이, 이러한 목적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란 소리다. 요슈아의 머릿속에서 지금쯤 호화롭게 일등석에서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을 판다 사장이 그려졌다. 평소 사장이 무슨 짓을 벌여도 즐겁게 넘어갔던 그가 처음으로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제리를……. 황당한 마음이 급경사를 그리는 산줄기처럼 기울어졌다.
벌써 6번째 서바이벌을 성공적으로 끝낸 클라이맥스 레코드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독특한 운영 방식은 가히 사람들에게 여러 말을 듣고는 했으나, 소속 밴드들 또한 이번에도 전력을 다해 다시 한번 신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판다 사장이 판다걸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내로 들어왔다. 스태프 전원과 직원, 밴드 멤버들까지 포함해 한껏 장식되어 이전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방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벽에 장식된 현수막에는 POP 글씨체로 'Climax Record'가 적혀 있었고, 바닥에는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진 풍선들이 보였다. 식탁보를 깐 테이블에 술과 음료가 잔뜩 배치되어, 이미 술이 들어간 이들의 입에선 흥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이 들어오자 일동들이 건배를 위해 중앙으로 모였다.
그의 입에서 여러 말―밴드 『Veronica』의 보컬인 모모치의 당시 기억으로는 굉장히 지루하고, 따분했고, 썩어빠진―들이 흘러나오고 마침내 건배를 알리는 팔이 위로 올라갔다. 클라이맥스 레코드 만세!
흔해 빠진 건배사가 끝나고 요슈아는 캔에 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왜 자기는 늘 콜라냐며 따지는 에이대시의 말에 웃고 있던 도중, 판다가 보컬리스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이, 쓰레기들. 이번에도 폐기처분되지 않아서 다행이겠다냐. 그런 너희 쓰레기들을 위해 이 상냥한 사장인 내가 하나를 베풀겠다냐. 판다는 그리 말하며 그들의 앞으로 홍보를 불러들여 무언가를 건네게 했다. 티켓과 사이즈가 엇비슷해 보였다. 요슈아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뭘까, 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야에 닿은 맨 처음 글자는 '3박 4일 휴가'라는 글자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변했다. 요슈아가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에게도 시선을 주자, 츠유가 티켓을 흔들며 묻고 있었다.
"저기, 이거 도대체 뭐야? 너무 그럴듯해서 현실감 오히려 안 나는데―"
"말을 꼭 해줘야 안다냐? 수고한 쓰레기들에게 주는 포상 휴가다냐!"
"우왓, 뭐야. 토치오토메 농장이 있는 곳?! 최고잖아!"
각자 떠날 위치는 다른 듯했으나, 모두가 똑같은 기간의 여행권을 받은 건 확실했다. 요슈아는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제리를 떠올리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눈이 수없이 쌓인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기로 유명한 삿포로 쪽의 산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판다가 기겁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한 번 꽉 안아주고 나서 급하게 로비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한없이 가벼워져 구름 위를 누르듯 움직였다. 스마트폰 너머로 익숙한 수신음이 가면 얼마 안 있어, 그를 무엇보다 기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요슈아의 목소리가 둥글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높아지기도 했다. 수락을 받아낸 요슈아는 그 이후로도 조금 더 대화하다가 제리가 통화를 끊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통화는 늘 서로가 먼저 끊길 기다리다가 어느 한쪽이 웃어서 따라 웃는 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기대감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입술을 혼자서 놀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JR 도쿄역부터 신 하코다테역까지는 신칸센 하야부사로 약 4시간 반. 그리고 다시 특급 슈퍼호토쿠를 타면 3시간 반. 비행기로 가려던 둘의 생각을 깔끔하게 접어버리듯, 결항으로 인해 요슈아는 급하게 사장에게 연락해야 했다. 예상이라도 한 것마냥 이미 신칸센 기차표를 구해두었다는 판다 사장의 말에는 의아함이 컸지만, 바로 옆에서 걱정하고 있는 제리의 옆모습을 보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어졌다. 사장이 구해준 표를 이용해 기차 내 자리에 안착했다. 창가 자리 쪽에 앉은 제리는 양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칼이 차창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그가 요슈아를 끌어당겨 같은 풍경을 공유했다. 녹음이 가득한 산, 맑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눈이 빗줄기처럼 창을 건들고, 새하얀 순수가 얇은 창 하나를 두고 제리의 손가락과 맞닿았다. 차창을 흐르는 경치가 그렇게 차례대로 바뀌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에 제 손을 자연스레 겹치고서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 붙어 있는 채로, 각자의 흑과 백을 바꿔 입은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하나의 체스판 같았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완전해질 수 없는 것처럼.
"이제 경치 말고 나도 봐줘."
"요슈아, 질투하는 거야? 자연한테?"
제리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속닥이는 요슈아에게 제리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서 장난스레 물었다. 이따금 제리는 이런 식으로 장난기가 발동하고는 해서, 요슈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는 건 덤이었다. 검은 코트를 느슨하게 걸친 요슈아가 그를 안고 잠든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장장 약 여덟 시간을 달려 도착한 삿포로의 풍경은 지친 마음과 몸마저 전부 노곤하게 만들 정도로 순수한 빛이 가득했다. 비행기를 연착시킬 정도의 날씨 덕분에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털 부츠를 반쯤 덮는 두께의 눈이 바닥에 쌓여 뭉쳐 있었다. 제리는 속으로 요슈아가 눈밭에 누우면, 잠깐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다. 많이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산장이니까. 요슈아의 말에 제리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칠 것 같으면 단 한두 마디로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은 제 인생에 그밖에 없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서. 요슈아는 부드러운 손을 그에게 건넸다. 매서운 추위가 손길이 닿자마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산장으로 향하며 오르는 느긋한 경사의 비탈길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양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쌓인 눈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가지 잎에 남은 약간의 새싹이 마지막 힘을 짜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땅을 덮는 하얀 융단 위에는 고개를 높게 쳐들어도 그 끝이 가늠이 가지 않는 나무가 제리의 시선을 끌었다. 언젠가 저런 나무 위에 올라가면 어떨까? 제리의 중얼거림에 요슈아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분명 자유로운 기분이 들지 않을까……나. 올라가 본 적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한눈에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슴이 상쾌해지는걸."
"그럼 그때가 오면, 같이 올라갈게."
"……너는 늘, 당연하다는 듯이 날 벅차게 만드는 말을 해주네…. 그래서 가끔은 정말 꿈같아."
두 사람의 가까이에 있던 나무가 때마침 바람결에 잎을 흔들었다. 요슈아는 제리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입에서 나오는 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산이라고는 했지만, 분명 정상. 요슈아, 그리고 브레이브 차일드가 언젠가 닿을 정상까지 올라갈 때마저도 제리가 곁에 있어 줄 것이라는 나른하고도 기쁜 확신이 들었다. 나도. 제리의 입에서 간결하고도 무거운 대답이 나오고서 얼마 안 가 산장 하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로그하우스 풍의 목조 저택에 가까운 산장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로 이루어진 1층이 그들을 반겼다. 벽을 둘러싼 거대한 유리 창문과 고풍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곁들어져 한껏 분위기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굉음과도 같은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응, 갇혀버렸네……."
"…정말, 정말로 미안해. 설마 판다 사장이 애인하고 함께 있을 때도 이럴 줄은…."
"으응,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했지? 어쨌든 사장……님도 어느 정도 예상하셨던 거라면, 엄청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고. 쓰여 있는 대로 3박 4일만 버티면 나갈 수 있겠지!"
그래도……. 한껏 쳐진 요슈아의 눈썹을 본 제리가 오른손 검지를 뻗어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요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가 이렇게 자책하거나, 혼자서 멈춰있을 때면 제리는 그에게 다가와 이끌어주듯 손을 내밀었다. 제리가 눈을 둥글게 말고 웃었다. 그리고 요슈아랑 같이 산장 조난이라니, 솔직히 조금 재밌어져 버렸고. 그 실없는 농담에 그는 당황한 채로 무어라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분명 너도 무서울 텐데, 겁날 텐데. 내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겠지. 그의 손가락이 얼굴 앞에 머무르고 있는 제리의 손을 끌어왔다. 손끝이 얼어 차가웠다. 요슈아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천천히 엄지로 쓸었다. 제 얼마 안 되는 온기라도 전부 전해주고 싶다는 듯. 부드러운 피부가 한 번 닿고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네 손, 차갑구나."
……응, 그러게. 조금 춥네. 그러면서 제리는 그의 머리를 요슈아의 어깨에 얹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그의 입김이 요슈아의 귓가에 갈고리처럼 걸렸고, 간지러운 듯한 달콤한 감각이 요슈아의 온몸을 달렸다. 요슈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이 붙어 있는 살갗 아래 세포 하나하나에 신경이 집중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그는 제리의 검은 머리카락을 얇은 손가락으로 솎아댔다. 혈관이 도드라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검은 실타래 사이를 헤치듯 움직인다. 지금,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연인에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리고 싶진 않았다. 요슈아의 귓불이 단번에 홧홧하게 타올랐다. 벽난로 안 장작이 그를 놀리듯 불씨 튀기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를 부드럽게 껴안는 데까지만 머물기로 했다. 요슈아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리는 품 안에서 고개를 좀 더 안쪽으로 움직였다. 아아. 나는 정말 바보야, 바보……. 손등이 추위를 모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제리의 말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일단은 보컬리스트들끼리 있을 때보다는 덜 각박한 환경이었다. 산장 너머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꽉 채워진 스낵바, 동날 일 없을 듯한 수많은 장작 등이 그것을 증명했다. 물론 자연적인 추위와 고난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산장에 갖춰진 온방 장치는 죄다 먹통이었고, 이불과 벽난로의 열기 등으로 겨우 그것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제리의 허리에 털 담요를 가지런히 묶은 요슈아가 잠시 롤케이크 같다며 웃었다. 분명 보컬리스트 애들하고 있었을 때는 온종일 시끌벅적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들하고 같이 왔다면 난장판이 되어서 정말 조난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무언가가 시선에 들어와 다급하게 제리를 불렀다.
"뭔데?"
제리가 그리 물으며 요슈아의 근거리로 다가오자 온갖 서적과 레코드판으로 가득한 책장이 단번에 그를 압도했다. 8090 명반을 모아둔 것부터 시작해서 각종 음악 관련 책들은 먼지 낀 것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책장 바로 앞에는 광이 날 정도로 빛나는 축음기가 먹이를 기다리듯 나팔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요슈아가 눈을 빛내며 자신이 LA 시절 동경했던 밴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제리에게 설명했다. 제리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로 가득했다. 여기 혹시, 판다 사장의 사유지 같은 걸까……. 그렇다면 신기하네! 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리가 축음기를 쓸었다.
"어차피 갇힌 거, 네 노래가 듣고 싶다고 하면 욕심이려나?"
그 말을 들은 요슈아가 고민도 안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 우리는 조난객이니까 조금 멋대로 구는 건 괜찮겠지? 장난스러움이 가득한 말이 끝나자마자 요슈아가 아래에서 3번째 정도 위치한 책장 안쪽에서 레코드 하나를 꺼냈다. 재생용 바늘 아래에 레코드판을 끼워 넣으면 익숙한 반주가 산장 전체를 덮었다. 요슈아가 허밍을 하며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제리 또한 그것이 LA서 자주 요슈아가 부르던 노래임을 기억해냈다. 알파벳이 모이고, 단어가 모여, 노래가 된다. 작은 모임이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요슈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줄곧 그리워하던 풍경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건 색달랐다. 소파에 앉아, 손가락을 튕기며 박자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주변이 뙤약볕처럼 타오르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태양이 제리와 요슈아의 살갗을 찍어누르고, 땀이 흐르는데도 둘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마음에 온종일 들뜨게 하던 그때로. 아아. 정말 너는 나의 매 순간에 존재하는구나. 제리도 요슈아도 그리 생각했다.
그의 노래가 끝나고서 제리는 옅은 손뼉을 쳤다. 그는 설마 그 노래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며 머쓱하게 뺨을 문질렀다. 소파에 누워 기대듯 앉은 요슈아의 옆에 앉은 그가 담요 반절을 그의 무릎 위에 덮었다. 요슈아는 고맙다고 답하며 이것저것 추억을 늘어놓다가, 한참 말이 없는 제리를 보고 걱정스레 눈썹을 움직였다. 괜찮냐고 묻는 그에게 제리가 작게 대답했다.
"요슈아,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괜스레 더 걱정되어서."
그의 말에 요슈아가 급하게 손사래 쳤다. 아, 아냐 아냐! 정말로! 제리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약하게 튼 요슈아는 그 상태로 감정을 담아,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게 말했다.
"네가 말해줬잖아, 자책하지 말라고. 어려운 일도, 기쁜 일도 함께 나누면 괜찮을 거라고. 맨 처음에는 확실히 많이 당황하긴 했지만……. 네가 있다고 생각하니 괜찮더라. 신기하게도 말이야."
마음이 담긴 글자는 서로의 존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당장 그 말에 제리는 진심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불안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건네든 요슈아는 늘 그렇듯 웃어주겠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밤하늘에 수를 놓는 수많은 나무 위 눈들이 시야에 걸렸다. 서리가 낀 창문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던 요슈아의 어깨를 제리가 톡 건드렸다. 눈앞에 들이 밀어지는 단 향이 그의 비강을 자극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였어? 놀란 그에게 제리는 잠이 깼다며 말하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코코아, 타 왔어."
"아……! 고마워. 따뜻하다."
요슈아가 그것을 받아들며 푸스스 웃었다. 제리는 뺨을 쪼이는 누군가의 따스한 열기와 담요 안쪽으로 파고드는 추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계속 머무르는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원치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느긋한 건 좋지만, 그와는 별개로 쉽게 답답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신기하게도 누구보다 자유를 쫓으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정착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슈아의 옆모습을 보면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 않냐는 생각이 자신의 안쪽에서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제리는 진심을 전하는 데에 있어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도 네가 있어서, 이런 눈밭도 괜찮은 것 같아."
툭 튀어나오는 본심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요슈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간질거리는 심정을 어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어휘를 나열하여 재배치하고, 뒤섞어도 나오는 말은 가장 직설적이고 간단한 것이었다. 제리의 곱게 묶은 머리는 어느새 풀은 채로 허리를 간지럽혔다. 요슈아의 시선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부터, 손, 어깨, 얼굴로 천천히 올라왔다. 1초, 2초, 3초. 그리고 이윽고 그의 입술이 다급하게 열렸다.
"……정말로. 기뻐…. 그리고 정말 미안해! 사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뭐랄까, 제리 너랑 있으면……. 이런 산속의 산장 안의 풍경도 계속된다면 좋겠다고. 무심코 그런 생각 해버렸거든. 이런 말까지는 역시 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진심이니까.”
볼을 붉히고, 망설이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먼저 선수 쳐 버리는 요슈아를 바라보며 제리가 뺨을 긁었다. 그는 자신의 것과, 요슈아가 들고 있는 반도 안 마신 코코아 잔을 앗아가 부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요슈아의 붕 뜬 목소리가 제리의 귓가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해서 머물렀다. 눈앞의 사람이 나눠주었던 온기가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두 손을 뻗어 양 뺨 위에 얹었다.
"바보."
요슈아의 손이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과 함께 제리의 손등 위로 똑같이 얹어졌다. 너도, 나도. 우리 둘 다 바보네. 아하하……. 숨결이, 마음이 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뜬 숨이 겹쳐졌다. 몇 번을 짧게 마주했다가,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서 깊게 파고들었다. 제리의 허리가 요슈아의 손에 의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추위 따위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들이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귓불도, 손가락 마디도, 뺨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말하는 요슈아의 어깨를 약하게 툭 치고서, 제리는 곁눈질로 바깥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창 너머로 내리는 눈이 마치 설탕 가루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 향이 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리 느꼈으므로.
다행히 예상대로 4일째 되는 아침, 구조대가 찾아왔다. 구조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 요슈아가 대놓고 '거기 뒤쪽에, 홍보잖아'라고 말했지만 무시당했다. 역시나 산장은 판다 사장의 것인 듯했다. 둘은 산 아래로 내려와 겨우 밴에 탑승했다. 둘이 아무래도 첫 번째 구조―라고 쓰고 서바이벌이 끝난 뒤 수습하는 단계―대상이었던 건지, 차의 크기에 비해 아직 둘밖에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홍보가 한숨을 푹푹 쉬며 재밌었냐고 물었다. 예상했던 낯빛과 다르게 멀쩡해 보이는 둘 때문이었다. 제리와 요슈아는 서로를 보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웃음은 일상 중 하나였다.
"응, 무척 즐거웠어."
요슈아와 제리가 동시에 그리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못마땅하진 않다는 듯 따뜻한 보리차를 건넸다. 우리 둘 다 서로가 구조대이자 안심할 수 있는 존재.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마음 앞에서는 그 어떤 뜨거운 것도 설산처럼 차가웠고, 그 어떤 차가운 것도 벽난로의 장작처럼 뜨거웠다. 요슈아는 남은 한 손으로 제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틈새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깍지를 꼈다. 제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당연한 순서를 밟듯 머리를 기댔다. 그 위로 요슈아의 고개가 떨어졌다. 긴장이 풀리고 추위가 녹기 시작하니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요슈아는 정신을 차리면, 이번에는 반드시 판다 사장에게 한마디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두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을 태운 밴 뒤로 새하얀 설산이 멀어졌다. 잘 가, 메이데이. 세 번 반복할 필요는 없어.


@ijeongsoga
요슈아가 아프다.
감기 걸렸어, 와 함께 도착한 울먹거리는 이모티콘.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대체 뭐라고, 무슨 정신으로 요슈아의 집까지 달려간 건지 모르겠다. 노을이 곁드는 현관에 잔뜩 헐떡이며 다다랐을 때가 돼서야 제리는 자신이 양손 한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 안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있었다. 해열제부터 시작해 편의점에서 사 온 죽, 이치고모찌, 푸딩, 곤약 젤리 등 달콤한 간식거리까지. 혹 갈증 나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구매한 자그마한 이온 음료도 하얀 봉지에 보란 듯이 자리했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음에도 살뜰하게 챙겨야 할 건 전부 챙긴 것 같아 제리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결코 귀찮음과 같은 감정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려는 의도 반, 오랫동안 외롭게 혼자 앓고 있던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의도 반. 근심이 그득한 가슴이 답답해 입술을 문 그가 익숙한 듯 조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선명한 벨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반응하는 기척은 없었다. 누군가, 그러니까, 요슈아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라든가, 반가운 듯 제리라고 부르는 목소리와 같은 것들이 집안에서 들려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한 번 더 벨을 눌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는 어째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픈가? 대답할 기운도 없나? 그저 자고 있는 건데, 괜히 내가 야단스럽게 구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일순 제리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연기처럼 뭉게뭉게 불어나는 사고를 저지할 새도 없이 제리가 무거운 봉지를 팔에 낀 채 예비 열쇠를 꺼냈다. 항상 요슈아가 문을 열어주었기에 자주 써보지는 않았지만, 나름 능숙한 솜씨로 열쇠를 끼워 돌리자 문은 별 저항 없이 철컥. 부드럽게 열렸다.
제리는 그 안으로 자연스레 발을 옮겼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노을이 비추는, 불이 켜지지 않은 요슈아의 자취방은 퍽 밝은 편이었다. 혹시 몰라 요슈아, 하고 그를 부르는 제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숨길 수 없는 불안이 서려 있었다. 한참-고작 2초였지만-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탓이었다.
결국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와 함께 요슈아의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은 것과는 달리, 그것을 돌려 미는 행동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방문이 열리며 틈을 만들어내자마자 자그마한 기침 소리가 제리에게 들렸다.
콜록, 콜록. 마르고 갈라지는 기침에 놀라 눈을 키운 것도 잠시, 곧 마주하게 된 그의 발간 얼굴에 제리가 조급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요슈아와 눈을 맞추려 그 앞에 주저앉듯 몸을 낮추었다. 동시에 내용물이 가득 차 있던 비닐봉지가 손에서부터 흘러내려 바닥을 굴렀다. 약이며 간식들이 제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요란하게 나뒹굴었지만 그의 시선은 수척한 요슈아의 얼굴에서부터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요슈아. 제리가 입에 담는 단어는 음절이며 단어의 형태며 언제나의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 내재되어 있는 감정 하나만큼은 달랐다. 걱정을 넘어선 근심, 반가움보다는 가련함이 우러나오는 목소리. 한편으로는 괜찮냐 묻는 것 같은 따뜻함도 담겨 있었다.
붉다 못해 새빨간 얼굴에 제리가 요슈아의 이마에 오른손을 대었다. 부드럽게 손등에 닿아오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뜨겁다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와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던 찰나 줄곧 대답이 없던 요슈아가 멀어지는 손을 붙잡고 다시 그것으로 제 볼을 감싸게 하였다. 자그맣게 시원하다며 중얼거리고, 손바닥에 입술을 붙인 채 입을 맞추듯 비벼오는 것은 덤이었다.
…요슈아, 괜찮아?
그리 묻자 으응,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낸 요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리의 질문에 부정을 표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부려오는 어리광이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작은 안도감이 깃들다가도, 제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요슈아의 행동은 무언가 미심쩍었다. 제리가 천천히 요슈아의 볼을 쓸어주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저만이 볼 수 있는 그의 어리광은 오히려 좋다면 좋았다. 다만, 걱정해주는 내가 보고 싶어서, 잔뜩 어리광을 부린 뒤 사랑받고 싶어서, 라는 핑계로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열이야 온기가 가득한 이불에 꼭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오르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진위를 가리기 위해 요슈아와 눈을 맞추었다.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는, 자신의 것과 닮은 잿빛의 눈은 천진하게 웃었지만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고,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열기는 도저히 연기라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제리가 의심을 믿음으로 뒤바꾸었다. 설령 정말 연기였다 할지라도, 요슈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약도 아직이겠네.
이것저것을 물어도 요슈아는 말끝을 늘이기만 하였다. 말이며 행동이며 모든 것이 굼뜨기만 해 답답할 만도 하건만 제리는 얌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아무것도 먹지도, 하지도 않았다는 응답이 되돌아왔다.
정말 내가 오기까지 기다리기만 한 건가? 금방 심각해진 제리가 간단한 해열제라도 먼저 먹이려 잊혀 있던 비닐봉지를 왼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른손은 요슈아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라 차마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툭, 하고 손에 닿는 것은 의외로 비닐이 아니라 딱딱한 병이었다. 액상 해열제라는 라벨이 버젓이 붙어있는 병. 단번에 잡혔다면 좋았겠지만 건드림과 동시에 데구르르 굴러 더 먼 곳으로 가버린 해열제는 움직이지 않고서는 잡을만한 거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잠깐만. 작게 요슈아에게 속삭인 제리가 그의 볼에서부터 손을 떨어트렸다. 멀어지는 손이 아쉬운 듯 제리에게 꽂히는 요슈아의 시선은 퍽 노골적이었다.
몸을 일으켜 해열제를 찾은 김에 바닥에서 쿨링 패치며 이온 음료며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가득 갖고 요슈아의 곁으로 돌아온 제리가 이번에는 침대맡에 앉았다.
해열제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일어날 수 있어? 말을 맺음과 동시에 달콤씁슬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병을 요슈아에게 건넸다. 그는 제 앞에 뻗어진 제리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불 덩어리와 함께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제리가 빨리 열부터 내리자며 약병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받으라는 신호였으나, 어째서인지 요슈아는 손을 들기는커녕 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약을 가지러 가기 위해 멀리 떨어졌을 때처럼, 빤히 제리의 눈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 먹여주면 안 돼?
의아해 고개를 기울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들려온 요슈아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목소리였다기보다는 칭얼거림에 가까웠다.
거절을 말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결국 "이번만이야?"라고 덧붙인 제리가 얌전히 입을 벌린 요슈아에게 해열제를 먹여주었다. 열 때문에 땀은 또 어찌나 흘렸을지. 이온 음료도 조금이나마 마시게 하고, 이마에는 쿨링 패치까지 붙여 주었다. 약이 쓰다며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작은 젤리도 덩달아 입에 넣어주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오물오물. 얌전히 제리가 주는 것들을 전부 받아먹은 요슈아가 또다시 비치적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열이 너무 높아 어지러웠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래 앉아있는 것보다 편하게 누워있는 편이 휴식하기에는 훨씬 나았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던 제리의 시선이 요슈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리는 모습은 정말로 어린 고양이 같아 제리가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어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파란 쿨링 패치가 깔끔하게 앞머리로 가려졌다.
그 다정한 손길에 요슈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곧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꿈질거리며 침대의 한쪽으로 붙은 그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가벼운 수신호는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픈 사람을 외롭게 두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옆에 누워주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평소보다 더 애처로운 눈으로 저를 바라봐주는데 어느 누가 이런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어리광을 들어주는 것은 이번만이라는 제 말마따나 제리가 조심스레 요슈아의 곁에 누웠다. 몸을 옆으로 돌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이렇게 옆에 있어 주니까, 좋다….
작은 속삭임이 제리의 귀를 간질였다. 열감에 시야가 흐릿한 건지, 몽롱한 건지. 열심히 이것저것 먹였음에도 잠이 덜 깬 것일 수도 있겠다. 잠들 때까지 어디 가지 말아 줘. 요슈아가 웅얼거리듯 덧붙였다.
그 말에 제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디 가지 않겠다는 듯.
…나, 추우니까 안아줬으면 좋겠어.
점점 요구의 크기가 커졌지만 제리는 큰 저항 없이 요슈아를 품에 안았다.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끌어안고, 더운 숨을 들이켰다 뱉어 부러 간지럽히는 요슈아에게 싫은 소리 하나도 뱉지 않았다. 몸은 조금 움츠러들지언정, 그가 안락하게 잠이 들 때까지 등허리를 토닥여주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요슈아의 눈이 감겼다 뜨이며 긴 속눈썹이 제리의 맨 살갗에 닿는 것도 언뜻 느껴졌다. 어느새 노을이 다 진 방에는 빛 하나, 소리 하나 스며들지 않아 고요했지만, 딱 하나. 서로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탓에, 살아있음을 알리는 심장 소리가 선명히 고막을 파고들었다.
고즈넉한 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파장이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요슈아의 등을 다독이는 손은 느려진 지 오래였음에도 그의 눈은 여전히 더디게 깜빡이기만 할 뿐 가만히 감겨있지만은 않았다. 끌어안은 몸에서 열이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는데도 졸음이 그득했던 요슈아의 목소리와는 달리 행동은 전혀 그러지 않으니 결국 제리가 잠이 오지 않냐 묻자,
키스해주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돌아오는 대답에 언뜻 몸을 굳혔던 것도 같다. 요슈아가 제리의 목덜미에 묻었던 고개를 고쳐 베고는 제리를 바라보았다. 간절하고도 애절하고, 힘없이 풀려 자극적인 눈.
언제 보아도 참 예뻤다. 그 색에 홀려, 제리가 옆으로 안고 있던 몸을 굴려 요슈아를 바르게 눕혔다. 자신은 그 위에 올라탄 채였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건지 요슈아가 상기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순수한 미소였다. 그에 호응하듯 제리가 고개를 내리자, 이번에는 그가 손을 뻗어 제리의 볼을 감싸기도 하였다. 흘러내리는 옆머리는 귓가로 넘겨주어, 자그마한 입술을 머금기 쉽게 만들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자 애써 넘겼던 머리카락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것을 신경 쓸 틈은 없는지, 요슈아는 혀를 내어 조심스레 제리의 입술을 핥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조심스레 깨물기도 하였다. 어설프게나마 혀를 섞으려 드는 제리가 사랑스러워, 무심코 목을 울려 웃는 소리를 그가 내기도 하였다.
취한 것 같았다. 점차 고갈되는 호흡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키스를 할 때면 항상 그랬다. 숨을 쉬는 법을 까먹어, 물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마냥 부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우울이 아니라, 안식에 빠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기에 열이 날 리가 없었는데도 정신은 점점 몽롱해져 갔다. 조금이나마 고여있는 둘 사이의 산소를 먹으려 입을 조급하게 벌리면 다시 다물지 못하게 요슈아가 제리의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겹치던 찰나, 아, 하는 짧은 탄식에 놀란 그가 닿아있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 틈에 숙였던 고개를 든 제리가 다시 입을 맞추지 못하게 요슈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급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산소의 양은 성급하게 뛰어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작게 미안해, 사과한 요슈아가 제리를 끌어안았다. 말소리며 행동이며 지독하게도 느려 잠결임을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피곤함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어조였다.
요슈아는 제리가 숨을 고르기 편하게 하려는 듯 자신을 재우려던 그 손길을 모방하여 등을 쓸어주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제리가 어리광을 부리듯 요슈아의 품에 고개를 비볐지만, 그 행동은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토닥, 토닥. 움직이던 손은 금세 정지, 열기 서린 숨은 규칙적으로 호흡.
설마, 싶어 제리가 고개를 들자마자, 제 등에 얹혀 있던 요슈아의 손에 힘이 빠져 주르륵 침대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으응, 하는 잠꼬대와 같은 소리가 굳게 감겨있는 요슈아의 눈과 함께 제리를 맞이했다.
약속을 지켰다고 해야 할지. 키스를 마친 요슈아는 순식간에 오른 열에 피로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빤히 그린 듯 잠든 요슈아를 바라보다, 쿡쿡 웃으며 그를 품에 가득 안은 제리가 요슈아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더 길게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같잖은 미련이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제리는 요슈아에게 잘 자라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내가 너의 손을 잡을 때면 우울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너도 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안식의 바다에 아늑하게 잠겼으면 좋겠기에.
아침이 밝아와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곁에 머물며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었으니까.
📍 서울 마포구 포은로 143-1 1층
🗓️ 8월 21일
젤리밤과 생화, 생크림 시트, 라즈베리 앤 블루베리 콤포트 🎂 요슈아와 브레챠 데빌즈 모두에게 의미 깊은 날을 챙길 수 있어서 기뻐
내년에는 더욱더 서프라이즈로 다가올 만한 추억을 만들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