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건 언제나 두려움이니까
소중한 건 언제나 두려움이니까

계단을 내려갈 땐 주로 내가 앞서고 요슈아가 뒤따라오는데 만약 내가 중심을 잃으면 그 애가 제 팔을 끌어당겨 헛디디지 않도록 잡아주고 반면 앞으로 넘어지려 하는 게 소꿉친구라면 나는 그 애를 꼭 안고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내가 다치는 것보다 그 애가 아픈 게 더 무서우니까

인생에서 내리막길을 걷는듯한 시기가 오면 계단을 내려오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일 거야 소꿉친구는 둘 다 넘어지지 않게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고 나는 밑바닥까지 같이 굴러 떨어져 주겠다 생각하는 쪽이네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연애 초반 보기엔 그럴싸한데 먹어보면 맛없는 요리만 만들었던 기억이 나
요리책과 인터넷에 올라온 조리법을 보고 재료의 중량, 종류, 넣는 타이밍을 그대로 따라 하는데도 항상 한 입 먹어보면 싱겁거나 덜 익었거나 둘 중 하나라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걸 먹일 순 없다는 생각에 요리할 의지가 꺾인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와이어드에서 요슈아에게 건넨 도시락은 몇 날 며칠 같은 반찬 만들기를 반복해 연습하면서 그중 그나마 자신 있는 것들만 담았어 성공하기 위한 대가로 만나기 전날 세 끼를 그을린 카라아게 그 전전날엔 타마고야끼만 종일 먹어야 했지만 그 애가 도시락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며칠 내내 같은 메뉴를 먹는 것 정도야 아무렴 좋다고 생각했어

너무 특별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너무 특별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겨울이 되면 우리는 코타츠 속에 들어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대신 부드러운 양털 담요를 뒤집어쓰며 둘이 앉으면 꼭 맞는 아늑한 너비의 소파에 앉아 식탁 외 장소에서 음식 먹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때만큼은 소꿉친구가 사 온 프레첼 과자와 팝콘을 그릇 한가득에 담아 우유 맛 하겐다즈와 함께 가져와서 영화 목록을 유심히 지켜보는 소꿉친구의 옆으로 파고들어
로맨스 영화만 틀면 꼭 관람 도중 조는 날 누구보다도 잘 아는 소꿉친구 졸리면 기대도 된다며 유명하지만 한번도 본 적 없는 로맨스 영화를 고르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일어나 있어야지 다짐하지만 또다시 스태프 롤이 올라갈 즈음 그 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깨어나….
잠결에 얼핏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건 영화의 대사였을까 아니면 네 고백이었을까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종종 함께 소파에 늘어진 채로 일본어 영어 한국어 그리고 가끔가다 스페인어나 불어까지 섞인 다국어 끝말잇기를 하는데 내 차례에 로스앤젤레스를 말하니 好きだよ로 대답한 소꿉친구 때문에 말문이 막혀서 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게 어딨어

…よしゅあ愛してる…너, 일부러 그런 말만 고르는 거지…. 글쎄, 어떨까….

네 눈에 담은 걸 같이 보고 싶어
네 눈에 담은 걸 같이 보고 싶어

매일 사랑할 이유가 생기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요슈아가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음료를 사랑하고 사람들의 환한 미소, 푹신한 녹색 잔디를 사랑하고 흘러가는 흰 구름과 은은한 달을 사랑해서 나 또한 저절로 사랑하는 게 많아지는 사람이 돼 내가 아는 가장 따스한 사랑은 네게서 배운 것
그렇기에 나는 그 애가 사랑하는 수많은 것 중 하나로 포함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에 밀려 맨 뒤에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애의 1순위는 매번 나였던 걸

그 미소 위로 닻을 내리고 내 하루가 쉬어가고
그 미소 위로 닻을 내리고 내 하루가 쉬어가고

완연하게 개화한 치바 현의 벚나무 아래 산책길을 그 애와 걷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흰 잎이 꼭 눈송이 같아서 떨어지는 궤적을 따라 손을 휘둘렀지만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했어 그러자 이번에는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요슈아가 나서는데 소득 없이 팔만 휘둘렀던 나와는 다르게 드레스 자락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몇 송이를 잡아내는 데에 성공해

대단하단 눈으로 바라보면 웃으며 내 손을 끌어당겨 펼치고선 손바닥 안에 쥐여줘 선물이야, 라는 말과 함께….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건 떨어지는 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미신 가진 사랑을 주저없이 나누어주는 건 네 천성의 다정함이겠지

너와 있을 때면 운명 같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단어도 근거 없는 미신도 존재할리 없는 영원마저도 믿고 싶어져

실없는 표정에 치유되고 있는 걸
실없는 표정에 치유되고 있는 걸

살갗이 자주 트는 편이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날이 건조해지면 핸드크림을 꼭 챙겨다니는데 요슈아에게 요슈아도 필요해? 하고 가볍게 물어봤다가 핸드크림을 핑계로 온종일 손을 붙잡힐 것 같아 곤란한 척 하지만 깍지낀 손의 이어짐이 좋아서 진심으로 놓아버렸으면 하는 건 아니야

나중에는 나도 너무 많이 짰으니 조금 덜어가라는 핑계로 그 애의 보드라운 손등을 주물러보고 관리가 잘 되어 투명한 우윳빛 손톱을 뚫어져라 구경하기도 해 

이 근처를 산책하다 보면 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이 근처를 산책하다 보면 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동물의 숲 자그마한 마을 속 주민으로 살아가는 요슈아와 나

요슈아는 먹보 성격 회색 강아지에 말버릇은 데빌즈🎶일 거야 물건의 가치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에 집중하며 소중히 여기는 다정다감한 친구라서 어떤 선물을 줘도 좋아해 그렇지만 유독 음반을 받으면 호감이 최대치로 오를 것 같아 음악을 워낙 좋아하니까

반대로 나는 성숙 성격 점박이 고양이에 선호 색상은 검정색 흰색. 말버릇이 없어서 친해지면 직접 정해줄 수 있어 집에 오래 있지 않고 수족관에 가서 고래 상어를 구경하거나 부둣가에 앉아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어서 날 찾는 요슈아와 주민 대표를 자주 곤란하게 만들어

친한 주민을 발견하면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우고 말풍선으로 주민의 이름을 외치면서 달려오는 요슈아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주변에 꽃 띄우는 감정표현을 하는 게 귀여워 나는 그 애를 봐도 뛰어가진 않는데 느낌표를 띄우는 건 동일해 주민 대표와 사진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낮은 확률로 대표를 보고 우다다 달려오는데 더 낮은 확률로 종종 넘어지는 모션이 나와 그때 약을 건네주면 보답으로 직접 구운 쿠키를 주는데 맛은 요일별로 달라져 

이사 고민을 하는 우리 둘. 주민 대표가 [가지 마!]를 선택하면 요슈아는 오직 여기에서만 만들 수 있는 음악이 있을 테니까 라고 말하며 권유를 받아들이고 나는 요슈아가 여기에 있는데…. 하면서 남아. 소꿉친구이다 보니 그 애랑 가능하면 같은 곳에 있고 싶어서

요슈아의 방은 모던풍 가구와 오디오, 마이크, 피아노와 벽걸이 기타 정도가 놓여있는데 가끔 냉장고를 열어보면 💭 2인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것 같다…. 왜지? 라는 나레이션이 떠 혼자 사는데 침대와 소파는 2인용이라서 대화 도중 침대가 넓네~ 선택지를 고르면 웃음으로 어물쩍 대화 주제를 넘기는 그 애

나는 물건이 많은 걸 안 좋아해서 방에 생활감이 일절 없고 벽에도 아무런 사진이나 액자가 걸려있지 않은 채 조명 뿐인데 새벽 4시에 주민 대표가 노크하면 졸린 눈으로 환영해 집에 놀러와 준 손님에게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냉장고에 넣어둔 카스테라와 우유를 꺼내는데 우유를 머그컵에 따르는 순간 깜빡 졸아서 그대로 새벽중에 바닥 청소하는 이벤트가 뜨고

무수한 너와 내가 무수한 나와 너로 밀려왔다 사라진다
무수한 너와 내가 무수한 나와 너로 밀려왔다 사라진다

서로를 부르는 2인칭은 오마에お前와 아나타貴方. 나는 한 걸음 멀어지고 요슈아는 한 걸음 가까워지는 인대명사를 사용해 

호칭은 애칭 대신 이름을 불러 상대의 손을 붙잡고 집 근처 공원을 쏘다니던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불렀더니 받침 없는 둥근 발음이 입술 끝에 달라붙어서

휴대폰에 저장한 이름은 요슈아와 제리를 적을 때 가장 앞에 오는 알파벳 J야 비밀 연애이기 때문에 이렇게 설정해두기 시작했는데 수십 수백 명의 연락처 중 단 한 글자로 저장해둔 건 단 한 사람 뿐이라 헷갈리지 않아

나는 너를 매일 다른 이유로 더 사랑했었고
나는 너를 매일 다른 이유로 더 사랑했었고

요슈아 이름의 마지막 글자 아, 를 부를 때는 시원하게 탁 트이는 데에 비해 반대로 내 이름은 첫 글자부터 턱 막히는 발음인 게 대비감이 느껴져서 좋아 그렇지만 소꿉친구가 리를 발음할 때면 혀끝이 입천장에 닿아 부드럽게 끝나서 마지막 글자임에도 계속해 이어질 것 같단 느낌이 들고

요슈아의 이름은 성경에서 비롯된 반면 내 이름은 슬랩스틱 코미디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에서 따온 것, 우리의 이름 영어 철자는 동일한 J로 시작하는데 나머지 알파벳은 일절 겹치지 않는다는 점도 소소하게 좋아하는 포인트야

모든 순간을 여린 빛으로 감싸주던
모든 순간을 여린 빛으로 감싸주던

우리의 키 차이는 7cm로 소꿉친구의 어깨에 내 턱이 닿는 정도
고개를 살짝 들면 굴절 없는 시선이 그대로 마주쳐서 좋아 발뒤꿈치를 들지 않아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줄 수 있는 키라 다행이야 가까운 거리감이 편안해서 종종 그 애가 더는 안 컸으면 혹은 내가 더 자랐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어릴 때부터 키가 큰 게 너무 싫었고 좋은 점이라곤 단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그 애가 있어 준 덕분에 이젠 나를 이루는 부분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됐어 좋은 일이지

있는 그대로 솔직할 수 있게 다독여 날 일으켜
있는 그대로 솔직할 수 있게 다독여 날 일으켜

자기혐오로 인해 자신을 마구 상처 입히던 요슈아의 손목에는 이제 선혈 가득한 실선 대신 흰 새살이 돋아나고 매일이 우울하고 지루해서 죽어버리고 싶다 생각한 나는 이제 요슈아와 함께할 내일을 기대해

같은 결의 외로움을 앓고 있으니 서로를 불안하게 만드는 대신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내 빈칸을 채워 넣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상대가 잃어버린 퍼즐 조각은 주워서 빈자리에 끼워 맞춰주고 마이너스가 곱해지면 양수가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만큼은 모르는 사람들이 연인에게는 사랑받는다는 확신을 선사하는 게 모순적이지

이 성장은 누군가를 대신 구원하고 구원받는 이야기와는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아 구원은 깨닫고 변화를 결심한 사람이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것 나를 구원하는 건 결국 나 자신….

그러나 바뀌고 싶다는 마음과 동기를 부여한 게 상대라서, 그 애가 내 곁에 그 애의 곁에 내가 있었기에 실현 가능했던 거라서 모든 기원은 결국 사랑이라는 말 또한 맞아

텅 빈 푸른 언덕 위에 무지개는 지붕이 돼
텅 빈 푸른 언덕 위에 무지개는 지붕이 돼

미래에도 요슈아와 함께한다면 캘리포니아의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 위, 작은 마을에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한쪽 벽 대신 설치한 커다란 아크릴 창 너머로는 모래사장과 수평선이 보이고 다른 벽면에는 책장과 책이 가득해서 손님이 바다를 바라보는 동시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어린 손님이 오면 커피 대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머그컵에 담아주고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손님이 방문할 땐 데운 우유를, 그리고 종종 근처에 사는 동물 친구들이 문 앞을 기웃거리면 치킨저키를 주며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어 보기도 해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소꿉친구는 디게싱한 원두를 추출하고 나는 책의 책등 위 알파벳과 숫자를 확인해가며 원래 위치의 책장에 꽂거나 테이블을 닦아 손님이 없을 때에는 책방 앞에 꾸며둔 작은 정원 속 식물에게 물을 주거나 안락한 소파에 함께 앉아 둘만의 낭독회를 열어 종종 일찍 가게 문을 닫고서 함께 모래 위를 거닐거나 어린 손님이 주고 간 선향 불꽃을 파도 앞에서 태우기도 하고

매주 토요일 저녁 6시는 요슈아가 업라이트 피아노 또는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시간인데 단골 손님뿐만 아니라 바다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사람까지 종종 그 애의 목소리에 이끌려 가게로 들어올 것 같아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힘들어했던 내게 제대로 마주하는 법을 알려준 건 요슈아니까 훗날의 모습을 그려볼 때마저 그 애가 곁에 있는 건 당연한 일

순백의 사람으로서 우린 겨울밤 서로의 체온을 앓으며
순백의 사람으로서 우린 겨울밤 서로의 체온을 앓으며

널 향한 내 마음이 네가 받는 가장 작은 사랑이길

 

성인이 된 다음 해의 내 생일날 편지도 전화도 어떤 예고도 없이 마을로 찾아온 요슈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 얼마 전 중요한 배틀 참가를 앞두고 있다고 했었지 거기서 다친 걸까 아니면 마음이 꺾인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따라큐의 머핀에 넣기 위해 잘게 다지고 있던 라즈열매를 내팽개쳐두고 신발 신는 것마저 잊어버린 채로 그 애가 있다는 공터로 달려가 포켓볼에서 나온 에몽가, 펄스멍과 놀아주고 있던 소꿉친구가 기겁할 정도로 머리는 풀어헤쳐져 산발이고 흙길을 달려온 발바닥은 잎사귀와 나뭇가지가 붙어서 엉망진창인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호흡을 고를 새도 없이 헉헉거리며 질문을 던지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 애가 손을 맞잡고 말해 배틀에서 우승했어 유명한 기업에서 파트너십 계약을 맺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실력을 인정받은 트레이너로서 공식적으론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도 약간의 절차만 거치면 통행할 수 있다고
다쳐서 돌아온 건 아니었구나. 불안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려다 이어지는 말에 굳어버려 그러니 제리, 이제부터는 함께하지 않을래?
망상이라기엔 긴장한 상태로 내 눈을 바라보는 네 눈 조금 떨리는 손 네가 모험의 첫걸음을 디딘 그날부터 지금까지 꿈에서도 감히 떠올려본 적 없는 한 마디를 곱씹다가 그 순간 미지근한 온기가 올라와 두 뺨을 덥히고 내가 소리 없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말했잖아 나는 언제나 너를 기다릴 거라고, 그게 내 진심이었어…. 하릴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너를 기다리며 함께 보낸 시간을 되감는 게 내가 걷는 미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화기를 건네받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너는 그때부터 둘이 있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거구나 대답 대신 따뜻한 요슈아의 손등에 내 손을 올리면 긴장이 풀렸다는 듯 얼굴에 꽃처럼 환히 피어나는 미소
수 년의 기다림의 끝 프러포즈 같기도 한 소꿉친구의 진심을 받아본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도 가진 짐을 정리하고 그동안 신세졌던 마을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그 애와 모험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뎌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집은 초록 가득한 어릴 때의 기억과 다르게 여전히 내게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보이는데 예전처럼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안녕 잘 있어 
요슈아가 나를 데리고 맨 처음으로 간 곳은 너무나도 추워서 사람은커녕 포켓몬도 몇 살지 않는다는 극지의 설원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고 왕관처럼 눈을 얹은 침엽수가 가득한 세상 붙잡은 손 외에는 전부 얼어버릴 정도로 추운 곳이야

흰색과 회색 검정밖에 없는 드넓고 공허한 공간인데도 몇 년 동안 내가 본 광경 중 가장 다채로운 풍경이었어

아픈 것은 차라리 고요한 것
아픈 것은 차라리 고요한 것

요슈아에게 안겨있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어 품에 들어간 나를 조용히 껴안아줬으면 해 눅진눅진한 감정을 고백하면 듣는 사람마저 지칠까 봐 말하는 걸 망설이다가도 그 품에 안겨있다 보면 결국 고해실에 들어간 죄인처럼 품고 있는 부정적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게 돼 스스로도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흐르면 조심스럽게 눈가를 닦아내 주려는 손길이 다가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꽉 껴안아줬으면 좋겠어…. 이거면 돼? 좋아한다고도 말해줘…. 평소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걸까…. 불안해지는 거야? 아냐 요슈아를 믿지 못해서가 아냐, 그 말을 들으면 힘을 낼 수 있어서 그래….
품 안에 안겨 느리지만 꾸준한 템포로 뛰는 심장의 박동을 듣다가 어느순간 잠에 빠져들어 그러다 먼저 깨서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앉아있던 소파에 요슈아도 함께 누워 곤히 잠들어있는데 껴안은 팔은 풀지 않았어 네 위로가 뜨겁지 않아서 화상을 입지 않고 차갑지 않아서 내 마음을 얼어붙지 않게 해

네게 닿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색이 화려해져
네게 닿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색이 화려해져

요슈아의 사랑의 깊이를 느낀 건 그 애가 했던 그 한 마디를 들었던 순간, 네가 그만두라고 하면 나 음악을 그만둬도 좋아

우리 둘을 처음으로 이어준 매개체는 업라이트 피아노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이고 그 애가 광활한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 이유도 음악 때문인데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자기도 모르는 새 발걸음이 향하면서 고작 나 때문에 그렇게 의미 있는 음악을 관둬도 좋다니 너는 날 정말 사랑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