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처음과 마지막은 사실 별것 아닌데도 단어에 이유 모를 낭만이 스며들어있잖아 그래서 소꿉친구가 처음을 택한다면 나는 반대로 마지막을 고르기로 했어 

내가 있는 곳과의 시차를 계산하고 시계의 초침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제일 먼저 전화를 걸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게 요슈아라면 나는 그 애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특별하게 보낸 하루를 완전히 끝마치기 전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는 것으로 그 애의 생일을 매듭짓고 싶어 방향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둘 다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란 건 다름없다고 

여름처럼 기울어지는 어깨를 그 애랑 맞대고서
여름처럼 기울어지는 어깨를 그 애랑 맞대고서

요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스르르 내려오는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져보다 까무룩 잠든 오후가 있어 

몇 시간 뒤 눈을 뜨자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나를 끌어안은 채 소파에 누워 곤히 잠든 소꿉친구의 편안한 얼굴이라 괜스레 잠이 덜 깬 척 여전히 졸린 척 가만히 그 품에 안겨있지만 귀 끝과 볼이 달아오르는 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져서

거실에 놓인 탁상시계의 초침보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아

구름을 노란 손으로 꽉 쥐면 달이 된다는 믿음으로
구름을 노란 손으로 꽉 쥐면 달이 된다는 믿음으로

천체관측을 좋아하고 세가의 홈스타 시리즈를 몇 년 동안 손에 넣고 싶어할 정도로 별에게 동경을 품었지만 정작 플라네타리움에 방문할 생각은 못 해봤는데 에타 유성군 덕분에 소중한 추억이 생겨서 기뻐

미국에 있을 당시 나는 밤하늘에 뿌려진 글리터처럼 반짝이는 빛을 발견할 때마다 소꿉친구를 떠올렸는데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을 이어준 건 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어 간절함이 그리움과 함께 천체의 궤도를 타고 혜성처럼 그 애에게 닿았다고

서리꽃처럼 녹아떨어질 그 말은 널 종교로 삼고 싶어
서리꽃처럼 녹아떨어질 그 말은 널 종교로 삼고 싶어

요슈아와 교제하기 이전, 그 애의 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이기 전 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아는 동생이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한다길래 아무런 기대 없이 따라갔다가 그날 블랑 드 블랑의 음악을 듣고 별이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어
만화와 애니메이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숱하게 좋아해 왔지만 실제 사람 그것도 밴드를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암묵적 룰 같은 걸 잘 몰라서 주변에 폐도 많이 끼치고 그만큼 샤르도네의 친절을 많이 받았다

유튜브 계정이라도 파서 린의 목소리와 셰리의 베이스 영상이라도 올려볼까 어떻게 해야 유입을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 얼마 안 가 블랑 드 블랑이 해체해서 사흘 정도 방에 칩거해서 종일 울었어

처음으로 느껴본 상실의 감각은 달콤하기는커녕 고통스러웠고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려오지만 여전히 린을 사랑하고 블랑 드 블랑만이 완성할 수 있는 음악을 경배해

널 향한 내 마음이 네가 받는 가장 작은 사랑이길
널 향한 내 마음이 네가 받는 가장 작은 사랑이길

포켓몬과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 속 실력을 인정받은 트레이너 요슈아와 그냥 평범한 여자애에 불과한 나
침대맡에 엎드려 지도를 펼쳐놓고 방문하고 싶은 지방과 만나보고 싶은 다양한 포켓몬을 이야기하는 요슈아를 보며 나는 소꿉친구가 커서 드넓은 세상을 탐험하는 모험가가 될 거라 직감해 가본 적 없는 곳을 이토록 그리워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꿈을 이야기할 때면 달을 닮은 눈이 윤슬처럼 반짝거리는 그 애를 어떻게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있을까…. 다만 그만큼 걱정돼서 13살이 되기 전까지는 곁에 있어달라고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어
요슈아가 모험의 첫걸음을 딛는 날, 그 애를 격려하러 나온 수많은 마을 사람 사이에서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다 그동안 조금씩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모은 용돈으로 구매한 전화기를 쥐여줘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고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너를 기다릴 거라고. 그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고백을 덧붙이며
요슈아의 파트너 포켓몬은 에몽가 의도치 않았지만 유달리 전기 타입의 친구가 많을 것 같고 온정이 넘치는 아이니까 분명 자신의 포켓몬과 동료들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겠지 전화 너머 오늘도 새로운 포켓몬을 만났다고, 얼마 전 캠핑장에서 모두와 함께 햄버그 카레를 만들었는데 매우 맛있었다고 텐션 오른 목소리로 안부를 전하면 그걸 들으며 앞으로도 소꿉친구의 여행에 행운과 좋은 인연만이 가득하기를 바라
이곳저곳에 발자취를 남기는 요슈아와 다르게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애와 함께 자란 마을에서 쭈욱 살아 소꿉친구가 떠난 이후로 익숙함은 곧 지루함이 되고 해가 지날수록 색채를 잃어버려서 세상이 모노크롬으로 보여 회색빛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건 매주마다 오는 요슈아의 편지야 새로운 마을에 도달할 때마다 꼬박꼬박 기념엽서와 즉석 인화한 사진을 편지에 동봉하는데 처음에는 책상 위 메쉬망에 하나둘씩 붙이던 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서 나중에는 두꺼운 앨범 서너 개를 꽉꽉 채울 정도가 돼
요슈아의 얼굴을 손으로 덧그리며 우울함을 달래던 나날 어느 안개 낀 날 나는 산책길 옆 풀숲에서 우연히 이로치 따라큐를 마주쳐 호기심이 많은 소꿉친구와 다르게 나는 포켓몬을 들일 생각도 트레이너가 될 예정도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따라큐를 안아 들고 집으로 데려가는데 몬스터볼도 없고 쓰다듬는 손길이 서툰 내게 순순히 안긴 건 같은 외로움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채서겠지
고독도 질투도 많이 타는 따라큐지만 종종 마을로 요슈아가 찾아오면 그 애가 데리고 다니는 포켓몬에겐 못되게 구는 대신 사이좋게 지낼 것 같아 따라큐도 아는 거지 모든 것이 재미없고 질릴 대로 질린 이 마을을 내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는 이유는 누군가의 돌아올 곳이 되기 위해서라는 걸 그리고 그 상대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란 걸 그래서 요슈아와 요슈아의 포켓몬에게만큼은 우호적일 거야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요슈아가 품고 있는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 딱 한 번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손목을 그었던 걸 빼면 우리는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자해와 자살 둘 중 어느 쪽도 할 수 없어 연인이 되기 전 서로를 여러 결의 감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해는 더 이상 자自해가 아니게 됐으니까 요슈아가 스스로를 상처 내는 버릇을 들키고 싶지 않아 했던 게 내가 그걸 알게 됨으로써 상처를 입을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처럼
그 애가 내 왼쪽 손목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나는 손목에 흉이 져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그걸 볼 때면 요슈아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소꿉친구와 같은 자리에 남은 상흔은 어쩐지 사랑의 증표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울 것 같은 얼굴로 손목에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다 댈 때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오히려 그게 더한 죄책감을 심어줄까 봐 아무 말 없이 껴안아 주곤 해

가장 때 묻지 않은 그런 감정은 우리만의 것
가장 때 묻지 않은 그런 감정은 우리만의 것

좋아하는 흰색 실크 잠옷이 서랍장 안에 없어서 기억을 되짚다 보면 요슈아의 집에 두고 왔다는 걸 떠올릴 때가 있어 새로운 곡을 만들기 위해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식사를 잊어버리곤 하는 소꿉친구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자 들렀다가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어리광에 휘말려 그대로 자고 가는 날도 있고

한 곳에, 특히 실내에 오래 머무르는 걸 답답해하는 편인데 신기하게도 그 집은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져서 갑갑함을 느끼거나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집안 곳곳에 묻어난 삶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일까 이제는 몇 시간이고 함께 소파에 파묻혀 미지근한 햇볕을 쬐는 시간이 오히려 기대돼

계속해서 머물러 있고 싶은 곳 돌아가고 싶어지는 그리운 장소를 집이라고 규정한다면 내게 집은 자그마한 자취방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본가도 아닌 요슈아가 있는 안식처야 가장 짧게 머물렀지만 가장 그립게 느껴지는 건 그곳에서 날 반겨주는 사람 그리고 사랑 덕분이겠지

궁금해 적당한 거리란 건 뭘까
궁금해 적당한 거리란 건 뭘까

몸살감기를 앓는다는 연락에 하던 일도 미뤄두고 감기약 이온음료 푸딩 곤약젤리 등등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찾아갔더니 나를 반겨주는 건 온몸이 불덩이 같은 소꿉친구
아픈 사람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아서 열이 내릴 때까지 옆에서 간호하고 있으면 평소보다 더 애처롭고 힘없는 목소리로 자그마한 어리광을 부려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죽 먹여줄래 추우니까 안아줬으면 좋겠어 잠들 때까지 떠나지 말고 곁에 있어 줘 키스해 줘

내가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내가 좋아하는 거 알잖아

가위 칼 바늘 조각난 유리 파편 하다못해 서랍의 각진 모서리까지 꺼리는데 그 애의 커터칼로 손목을 긋는 행동에는 어떤 망설임도 두려움도 들지 않아서
요슈아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어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직접 겪어보아야만 깨달을 수 있다 생각했으니까…. 소독약은 타들어 가듯이 따가웠고 왼쪽 손목에 희미하게 실선이 남았지만 후회하지 않아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거야
다치지 마 아프지 마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싫어

그저 손잡으면 우리는 다시 첫 모습 그대로
그저 손잡으면 우리는 다시 첫 모습 그대로

뭐든지 쉽게 질리는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취미는 바다 구경
매일 달라지는 물의 푸르름 쭉 뻗은 수평선과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 나는 파도를 눈에 담는 일은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싫증 난 적이 없어서 틈틈이 혼자 해변에 갔었는데 이제는 바라보는 경치를 공유할 사람이 생겼어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오랫동안 알아 온 소꿉친구인 만큼 우리는 전부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어 추억을 소중히 손안에 쥐는 습관부터 시작해 사랑하는 방식까지

행동으로든 말로든 아낌없이 전달하는 애정, 냉소 대신 온기를 가지고 온정을 베푸는 사람으로 살겠단 결심, 완벽하지 못하다면 적어도 모난 부분 없이 반듯하게 살아가겠단 다짐과 부정적 감정을 혼자 끌어안고 앓는 대신 털어놓아 슬픔을 반으로 나누기로 마음먹은 건 모두 한 사람 덕분

살며시 고개 들어 너를 보면
살며시 고개 들어 너를 보면

요슈아의 노곤하게 풀린 표정을 좋아해 피곤해서 흐물흐물하게 늘어져 있는 게 아니라 편안할 때 안심되는 장소에 있을 때만 나오는 얼굴

평소 힘이 들어간 눈썹도 그때는 내려앉은 느낌이고 생글생글 웃느라 몰랐던 날카로운 눈매가 귀엽다고 느껴 욕심이지만 이 얼굴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고 나만이 알고 싶어

햇살이 널 비출 때 나에게 웃어줄래
햇살이 널 비출 때 나에게 웃어줄래

길고 길었던 짝사랑에 종지부가 찍혔다는 게 아직 실감 나지 않은 연애 초반에는 애정을 표현하고 돌려받을 때마다 고장 났는데 후천적 면역 체계를 키우는 건 항원에 대한 학습이듯 요슈아가 계속해서 전하는 사랑한다는 말에 나도 쑥스러워하는 대신 기어코 적응했어 그리고 이제는 항상 아낌없이 사랑을 전달하려고 해 행동으로든 언어로든…. 요슈아가 내게 사랑받아도 된다는 확신을 줬던 것처럼 나도 틈만 나면 좋아해와 사랑해를 번갈아 가며 얘기해서 그 애에게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잡은 두 손은 왜 이렇게 따뜻한지
잡은 두 손은 왜 이렇게 따뜻한지

요슈아도 나도 기쁨 행복 사랑과 같은 긍정적 감정은 거리낌 없이 표현하지만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버거운 감정들…. 예를 들어 슬픔이나 우울 절망 이런 건 나아질 때까지 혼자서 끌어안는 사람들이라 서로에게 숨기는 것도 이런 무거움이야 내가 울색의 홍수에 매몰될지언정 네게는 끝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품은 것마냥

그런데 우리 둘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래 알았잖아 그래서 아무리 숨겨도 상대방이 곧잘 눈치채고 손을 잡아주러 와 우울의 바다에 가라앉지 않도록

해가 밤을 돌아 아침을 또 만든 것처럼
해가 밤을 돌아 아침을 또 만든 것처럼

요슈아를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곁에 있을 때가 아닌 우리가 일본과 미국, 17시간만큼의 거리를 떨어져 있었을 때

미국에서의 두 번째 생활에 적응이 어려웠을 때는 매 순간 얼굴을 떠올릴 정도였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우울하고 힘든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요슈아라는 걸 그때 깨달았네 옆에 머물러 있는 지금은 나아졌지만 그때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희미한 흉터처럼 남아있어서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면 그 애를 생각하게 돼

둘만의 언어로 말하고 싶어
둘만의 언어로 말하고 싶어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고 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영어도 사용 가능해 요슈아와 대화하기 위해 일본어도 조금은 할 줄 알고 고등학생 때 선택했던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라서 쉬운 문장이라면 다행히 읽을 수 있어

요슈아는 모국어인 일본어 LA에 있을 때 습득한 영어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배운 한국어 이렇게 구사할 줄 알아 Devils 덕분에 다른 언어도 조금은 쓰거나 들을 줄 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둘이 있을 때는 사용하지 않아서 얼마나 더 많은 말을 할 줄 아는지는 모르겠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 요슈아에게 더 많은 방법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기회가 된다면 배워보고 싶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