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보다 수조 속을 헤엄치는 게 어울릴 듯한 날씨인 요즘은 소꿉친구를 만나면 먹구름의 색을 입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몇 배로 부푼 모습을 볼 수 있는 걸까
빗방울을 피하고자 자그마한 접이식 우산을 펼치면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레 아래로 들어오는데 제 손에도 큼지막한 우산 하나를 들고 있어 요슈아…. 우산 있잖아?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면 이래야 너와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다고 당당히 답하면서도 애교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맞추는 남자친구
반달을 닮아 휘어지는 눈꼬리와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이는 속눈썹으로 부리는 미인계를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밀어낼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반칙이야,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속절없이 넘어간 나는 결국 요슈아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 줘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져 내려 우산을 쓰는 의미도 없이 우리 둘 다 강에 빠진 강아지와 쥐처럼 쫄딱 젖어버린 것은 그로부터 고작 몇 분 뒤의 일
함께 자동차를 탈 땐 내가 운전석에, 요슈아는 자연스레 조수석에 착석해 내 쪽이 운전면허를 이르게 취득해서 경력이 더 길잖아 접촉 사고가 생겨서 기사라도 나면 판다 사장님이 화내실 걸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차창 밖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네게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여주고 싶어, 라고 솔직히 말하니 순순히 납득해서 그다음부터는 전적으로 운전대를 맡겨주는 소꿉친구
부탁하기도 전에 척척 가장 빠른 경로로 내비게이션을 조작하고 깜빡이 없이 끼어드는 오토바이나 차체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뒤를 쫓는 차량 교통 체증 때문에 피곤해한다면 나 자신보다 먼저 알아채서 젤리벨리나 밀크 카라멜 같은 단 간식을 입 안에 쏙 넣어주곤 해
신호등의 불이 푸르게 바뀌길 기다리며 정지하는 동안 입 맞추는 장난만 안 친다면 최고의 운전 보조일 텐데


칼라 끝까지 답답한 단추를 채우는 것보다 쇄골이 도드라지는 윗옷을 선호하는, 지금은 극복해낸 과거의 상흔이 남아있는 손목을 소매나 팔찌 등으로 가리곤 하는 요슈아 종아리를 감싸는 머메이드 라인의 레이스 치마를 입을 바엔 치골 아래까지 오는 알렉산더 왕의 데님 바지가 한결 나은 나
우리에게는 각기 확고하게 굳어진 패션 철학이 있지만 연인이 내 생각을 하며 골라주는 옷이라면 어떠한 배척 없이 입은 뒤 피팅룸에서 나와서 그의 의견을 물어봐 그가 진심을 담아 어울린다 이야기해주면 아무리 어색하거나 거부하던 스타일이었던들 정성껏 포개서 옷장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에 두어 다음 데이트에 입고…. 까탈스러운 취향의 벽마저 거대한 애정으로 깨트리는 건 언제나 서로이기에
바깥을 향해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딛지 않아도 모든 게 온라인으로 주문 가능해진 비대면 시대 그래도 여전히 백화점과 플래그십 스토어를 여유로이 돌아다니며 완상하는 게 좋아 쇼핑 또한 여행의 일종이니까
아크네 스튜디오와 젠틀 몬스터에선 이런 걸 누가 써? 싶은 특이한 디자인의 선글라스를 착용해 보는데 아무나 소화 못 하는 패션은 요슈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는지 역시나 소화 못 해 엉뚱한 모습이 웃겨 작게 웃으면 이번에는 내 차례라며 얼굴 위로 장난스레 씌워지는 선글라스 그런데 기대 없이 착용한 내게는 되레 어울려서 원치 않은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마냥 기분이 얼떨떨해져 제가 선물해 주겠다며 직원분을 부르려는 소꿉친구를 급하게 잡아 멈춰 세우는 건 그 뒤의 일
향수관에 가서는 여러 니치향수를 한 번씩 시향해본 다음 마음에 드는 것은 디퓨저로 구매해서 각자의 집에 둘 계획을 세워 오래 맡아도 독하지 않고 금세 흩어져 버릴 듯 지나치게 옅지 않은 향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어 다른 공간이어도 같은 향조가 날 수 있도록 곁에 없어도 네 생각을 할 수 있게끔
발을 맞추어 몇 시간씩 걷다가 다리가 아파오면 카페의 대표 메뉴라는 달큰한 라떼와 화이트 카페모카를 주문해서 머그잔을 감싼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조금은 불편한 의자에 가만 앉아서, 오늘 구경한 광경에 대해 고요히 이야기를 나누는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슬쩍 얽혀오는 흰 손가락을 마주 잡으며 다정한 기운을 건네받는 것이 우리의 충전 방법이자 마지막 일정이야
본래 눈 색과 머리카락은 무난하고 흔한 검정인데 길었던 짝사랑이 끝나자마자 발레아쥬 염색과 컬러 렌즈로 좋아하는 사람의 색을 내게도 담아버렸어 밝은 색이 어두운 색으로 물드는 게 보편적이지만 우리는 그 반례가 되었네 검정에 스며들어 번지는 하양
텅 비어있던 까만 도화지가 별처럼 희게 빛나는 소꿉친구 덕분에 의미를 얻고 색까지 일부 나눠 받아 밤하늘이 되었다는 게 좋아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요슈아를 내 하늘 속 일등성으로 남겨두는 것
뜬구름처럼 둥실 떠 있고 순백 양모처럼 보드라운 요슈아의 곱슬머리를 좋아해 채도가 없는 머리카락은 내리쬐는 빛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따뜻한 유백색 시린 은백색 둘 다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서 사랑스레 느껴
엷은 구름빛 눈에는 한낮의 편린이 선연하게 빛나고 목적지 없이 나선의 궤적으로 유람하는 유성이 떠다녀 그 중앙에 자리 잡은 건 뚜렷한 윤곽선과 그림자…. 홍채 안에 모든 시간대의 하늘이 머물러 있어서 종일 눈만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아 눈꼬리는 캔들라이트 장미에 난 가시처럼 뾰족하고 비스듬한 태양의 고도를 닮아 길게 늘어졌는데 마음속의 다정함을 세상에게 꺼내어 건네주는 순간 그리고 무심코 반짝거리는 웃음을 터트릴 때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게 좋아 곡선을 따라 촘촘하게 짜여진 가느다란 요슈아의 속눈썹은 유난히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부분
피아노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하며 그 핑계로 옆에 걸터앉으면 집중하느라 평소보다 높은 각도로 올라간 눈썹 결심과 진심을 물어 굳게 다물린 입술 매끄럽게 흑백의 건반 위를 유영하는 가늘고 흰 손가락도 슬쩍 구경할 수 있는데 결국에는 연주가 아닌 연인에게 온 관심이 가있다는 걸 들키고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처음의 순간부터 온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려 보이던 시기까지 매 순간 사이에 꽃갈피처럼 끼어있으니 나는 속절없이 그 애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야
언젠가 요슈아에게 기억을 은은히 밝혀줄 향초 같은 순간을 선물하고 싶어져 함께 하얀 별이 쏟아지는 짙은 밤하늘을 보러 가고 커튼처럼 하늘을 덮는 오로라를 관측하고 아무도 우릴 알아채지 못할 만한 곳으로 떠나 휴양을 즐기게 해줄래 천청색 상공과 녹음 가득한 삼림지, 끝없이 펼쳐진 소금의 평야, 그 애의 이름과 같은 나무가 가득 자라난 국립공원 그리고 청금석 빛깔을 띠는 블루홀…. 요슈아가 지닌 끝없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때까지 계속해서 곳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많네
회상하기만 해도 심지에 불이 붙고 기분을 아늑하게 덥히는 그런 추억들을 잔뜩 선사해서 종국에는 소꿉친구의 마음을 꽃덤불처럼 뒤덮을 수 있기를
중압감에 시달릴 때 피가 흐를 정도로 무심코 손톱과 거스러미를 뜯고 마는 건 오래된 버릇
엉망진창인 손톱 끝을 보이기 부끄러워서 젤 네일 위 다양한 종류의 파츠를 올려보기도 손목까지 올라오는 장갑 종류를 껴보기도 하고 아침마다 열 손가락을 거미줄에 걸린 먹이처럼 스포츠 테이프로 빈틈없이 꽁꽁 싸맨 채 외출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시도해본 방법 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소꿉친구가 직접 매니큐어를 발라주는 거였어
네일 샵에서 받는 것만큼 섬세한 디자인이 들어가거나 특별한 제품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어쩐지 요슈아가 칠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래도록 남겨두고 싶어져서 매사 조심하게 되었던
@juststayus
하늘 위에서 연분홍색 비가 24시간 내내 내린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로 카메라 셔터음이 들리지 않게 된 시기는 1주 정도 지났고, 제리와 요슈아가 한 달 전부터 기대하며 만반의 준비를 거친 출사 일정이 꼬인 지도 꽤 되었다. 이 무렵 오하요 닛폰¹ NHK 뉴스 오하요 닛폰(NHKニュースおはよう日本). NHK 종합 텔레비전의 간판 아침 뉴스 프로그램. 에서는 서글서글한 인상을 띤 남자 아나운서가 사상 최초 기상 이변이라며 속보 기사를 읊었고, 로손이나 세븐일레븐에서는 통유리 출입문 위에 붙여둔 '우산 상시 판매' 안내문이 심심찮게 보였다. 오늘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핑크 레인'. 누구든지 두 명 이상 모여서 수닷거리 삼는 데에 있어 아주 적법하고 간결한 통칭. 그 현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도쿄 상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두 방울, 물감을 풀은 물이 담긴 생수통 뚜껑을 실수로 닫지 않은 듯 작게 떨어지더니 이내 서서히 덩치를 불렸다. 기묘한 현상인데도 아무도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투명한 빗방울이 어렴풋이 분홍빛을 머금고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퍼졌다. 벚꽃이나 살구보다는 짙으며 장미보다는 확연히 옅은 색, 흡사 갓난아기의 말랑한 뺨에 부드럽게 물드는 홍조, 혹은 연정과 애정을 입에 올릴 때 생기가 감도는 입술을 닮은 색. 몽상가가 꾸는 꿈결을 파고들 듯이—아무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바라지 않았는데도—다가온 비에게 한 가지 특효가 있다는 점이 밝혀진 시기는 처음 관측 시점에서부터 약 사흘 뒤였다. 매일 침울한 낯으로 JR 야마노테 라인 칸츠메² かんづめ. 일본에서 꽉 막힌 지하철, 한국 기준으로는 지옥철을 뜻하는 용어. 원 의미는 통조림. 에 올라 출근하는 K 모 씨가 핑크 레인에 흠뻑 젖은 다음 날부터 기묘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변한 데다가, 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안 좋은 기억을 몽땅 잊어버린 사건이 알려진 후였다.
그 사건 이후 누군가는 이를 세상이 무너질 징조로 보았으며, 누군가는 현 정치사와 엮어 교묘하게 헤드라인을 써 내려갔고, 어떤 이들은 이를 신이 내린 영적 체험이라 이름 붙이고 심취했다. 또 누군가는 연인, 가족, 친구 엇비슷한 이들과 SNS 인증을 하기도 했고. 제리는…… 확실히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본인이 보든지, 타인이 보든지 간에. 물론 타인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인류 공통의 골칫거리이기에 제리 또한 요슈아가 어느 쪽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추측은 했지만, 그 스스로 불확실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제 몸이 시소처럼 흔들거리는 와중에도 영구운동으로 굴러간다. 부속품—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삐걱거리면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제리는 역 개찰구 근처 세븐일레븐 현수막 아래로 도망치듯 들어가 비를 피했다. 현수막 가장자리에 빗물이 맺혀 뚝뚝 떨어졌기에, 들어오면서 어깨가 젖는 정도는 감안해야만 했다. 블라우스 어깨 부분이 젖어 맨살에 들러붙었고, 얇은 손목 위를 감싼 손목시계의 메탈 밴드가 빗방울로 번들거렸다. 제리는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팔을 가슴께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반투명한 시계 유리 안 분침이 분주히 째깍거리며 향한 방향을 보아하니, 평소 그가 귀가하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딱 제리의 한 손 크기인 접이식 우산이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그는 푸념하는 대신에 가방 깊숙이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내 LINE을 켜고, 가장 최근 연락한 사람의 메신저 창으로 들어갔다. 으슬으슬한 기운에 얼은 손으로는 타자가 빠르게 쳐지지 않았다. 제리는 메시지를 전부 입력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요슈아, 미안한데 시부야역 세븐일레븐으로 와줄 수 있어?]
[아침에 들고나온 우산 망가져 있었어 ᅲ.ᅲ]
답장은 몇십 초 뒤에 금방 도착했다. 많이 젖지는 않았어? 연습실 근처니까 금방 갈게! 메시지를 읽기만 해도 제리는 요슈아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겼다. 돌아온 답장에 또 한번 간결하게 답을 보내고, 핸드폰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벼운 인사나 부탁일 뿐인데 매번 미소가 그려진다면 아직도 그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인지, 혹은 반대로 그가 주는 기쁨에 익숙하니 다가올 순간을 기대하게 된다는 의미인지. 그는 어느 쪽이든 요슈아에게 향할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히 다루고 싶다고 잠깐이나마 생각했다. 그러다 귀 안쪽에 현수막 위로 빗방울이 투둑 투둑 빗발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 소리에 집중했다. 그가 스마트폰 화면을 향해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어서 정면을 보았다.
두 눈동자에 연분홍색 빗방울이 사람들의 안쪽 깊숙이 침입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장난하듯 쏟아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모여서 어느새 빗줄기가 되었고, 지금은 일본 전역을 덮었다.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제법 상당수가 우산도 펼치지 않고 지나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제리는 지나가듯 보고 넘긴 K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제가 잊지 못하는 어린 시절 괴로운 기억이 있어서, 그걸 치료하려고 매번 정신과에 간 기억은 또렷해요. 그런데 그 기억이 말끔히 지워진 것처럼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그러니까, 마치 기적 같지 않나요? 정말로 싫은 기억을 고운 비로 씻어내리는 것 같잖아요.
참으로 고민 하나 없어 보이는 낭랑한 목소리였다…….
그마저도 검은색 긴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요슈아가 뛰어오는 광경이 보이자 머릿속 깊은 곳으로 파묻혔다.
오래간만에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 제리 덕분에 요슈아는 기분이 한껏 들뜬 채로 앞장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열쇠구멍에 알맞게 열쇠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요슈아는 젖은 우산을 현관문 앞에 놔두고 들어갔다. 제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 우산을 힐끔거리며 곁눈질했다. 매끄럽고 탄탄해 보이는 우산 표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분홍빛 빗물. 어쩐지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제리는 눈썹 머리를 휘고는 했다. 제리가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자니 먼저 들어간 요슈아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현관문 쪽을 살폈다. 혹시나 제리가 마음을 바꿨을까 싶어, 그는 으레 내는 것보다 조금 더 확신 덜 섞인 투로 물었다.
"왜? 혹시 무슨 일 생겼어?"
반대로 제리는 혹시나 요슈아가 오해할까 싶어 황급하게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질했다. 그가 서둘러서 보여 준 반응에 요슈아가 그렇다면 다행이라면서 다시 들뜬 티를 거리낌 없이 냈다. 서로 집에 방문하거나 묵고 가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닌데. 매번 이리도 작은 파편에도 당황하며, 순간의 불안정, 찰나의 망설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크기를 부풀려서 섭취했다. 권장량을 초과한 긴장이 제리의 위 속에서 꿈틀거렸다. 다행히도 긴장은 오래가진 못했다. 제리가 정신을 차리고 제 양 뺨을 가볍게 톡톡 쳤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 나쁜 생각은 그만해야지. 그는 다짐하면서 그제야 우산 곁을 벗어나 거실 쪽으로 향했다.
제리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들어간 와중에, 이미 얼추 홈웨어를 갖춘 요슈아는 모던하게 디자인된 개방형 주방 개수대에서 과일을 담을 그릇을 씻고 있었다. 제리가 친구와 방문했던 창고형 그릇도매점에서 요슈아가 생각난다며 사 온 보헤미안 스타일 그릇이었다. 노란 무늬가 테두리만 감싸듯이 새겨져 있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요슈아는 그가 준 선물이니 아껴서 사용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그릇을 제리와 있을 때만 사용했다. 제리는 요슈아의 손에 들린 그릇을 보면서 소파에 앉고, 방금 요슈아가 그랬듯 똑같이 고개만 빼꼼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할까? 요슈아, 연습 몇 시간 내내 하고 와서 힘들 것 같은데."
"괜—찮—아, 문제없어. 뭔가 먹고 싶은 건 없어? 어차피 밖에는…… 못 나갈 것 같으니까."
호흡을 한 번 끊어갈 때 요슈아가 고개 돌려 창밖을 확인하고서 말을 연이었다. 말의 진의를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아도 비가 현재진행형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걸 제리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스마트폰을 켜서 몇몇 가게를 살폈다. 즐겨찾기로 등록된 가게는 전부 요슈아 입맛에 맞추어 선정해둔 곳이었다. 식탐이 그다지 많지 않은 제리는 무슨 음식을 시켜도 요슈아가 먹는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었고, 그는 그게 퍽 좋았다. 한참 제리가 저녁 메뉴를 고를 동안 그릇에 몇 가지 과일을 담아 온 요슈아가 그릇을 내려놓은 다음에 그 옆에 앉았다. 세 명이 앉고도 넉넉한 널따란 소파인데도 살갗 닿을 정도로 가깝게 앉는 행위에 있어서 이유는 불필요했다. 제리는 제 어깨에 딱 붙은 요슈아의 어깨와 그 위쪽에 있는 안면을 번갈아 훑었다. 요슈아는 그와 시선이 스칠 때는 순진무구한 레트리버처럼 눈을 반쯤 감았는데, 태생부터 가로로 뾰족하게 뻗은 눈매가 둥글게 보일 정도였다. 요슈아는 사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크로 오른손을 뻗어서 사과 하나를 찍었다. 배어 나온 살짝 연노랗고도 투명한 과즙이 포크 끄트머리를 적셨다. 요슈아는 포크를 들어서 제리 입가 근처로 갖고 갔다.
매체 안 가리고 로맨스 주인공들이 갖는 만물의 법칙은 이 순간에도 적용된다. 가장 흐트러진 상태에 상대를 마주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오면 상대와 같이 쓰는 게 옳듯이, 둘 중 한 명이 식기를 들어 한 입 크기로 요리를 집었다면, 그 한 입은 무조건 다른 한 명의 입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법칙. 요슈아가 반쯤 감은 눈에 힘을 주며 미소 짓자 제리 머릿속에 무의식의 잡념이 들어섰다. 요슈아는 무엇이든 가느다랗고 길구나…….
때마침 상상 속 생각은 현실 속 목소리로 지워졌다.
"아—앙, 해봐."
"……진짜?"
"진짜."
둘만 있는 공간인데도 제리는 괜스레 부끄러워 주변을 살폈고, 곧이어 그 행동이 요슈아 보기에 더 부끄러운 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만히 있으면 무념해 보이는 듯한 얼굴에 옅은 붉은색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그가 망설일 동안에 요슈아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톡톡, 제리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눈도 감아 줘, 라고 태연하게 부탁을 하나 더 늘렸다. 제리는 새삼스레 이런 데에서만 뻔뻔한 면이 있다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핀잔을 주고, 머뭇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그다음으로 입을 작게 벌렸다.
그러나 입 안으로 느껴져야 할 단맛도, 콧속을 자극하는 단내—남자에게서 늘 풍기는 머스크 향과는 조금 다른—도 없었다. 다만 제리가 이상함을 감지하자마자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귓속으로 카메라 셔터음이 들어갔다. 그가 눈을 단번에 번쩍 뜨면서 본 광경은 왼손에 셔터를 누른 채로 DSLR을 들고, 오른손에 사과 한 조각이 여전히 박힌 포크를 든 요슈아였다. 요슈아가 검은 DSLR을 옆으로 치우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면서, 그가 가볍게 윙크했다.
"출사, 결국 못 나갔으니까 네 귀여운 모습이라도 찍어보고 싶어서 그만."
"분명 이상하게 찍혔을 거야."
"귀여운데 뭘."
요슈아는 DSLR 갤러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가 내뱉는 말이 간질간질해서 제리는 어색하게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자기도 보여달라고 뒤늦게 덧붙였다. 제리는 사진에 찍힌 본인 모습을 같이 보면서, 요슈아가 귀엽지 않으냐고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설명하는 게 창피한 나머지 요슈아에게서 DSLR을 뺏으려고 했다. 그러나 요슈아는 능숙하게 제리가 뻗는 손길을 전부 피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결국 웃음 뒤에는 빗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는 입꼬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올라갔다고 해서 기분마저도 좋다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짧은 침묵과 들숨 다음으로는.
"그래도 맑은 하늘 아래 제리가 찍고 싶었어."
요슈아가 조금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제리는 그 말에 아까 위를 헤집었던 긴장감이 되살아나는 기우를 감지했다. 그가 양손을 써서 요슈아의 왼손을 따뜻하게 덮으면서 말없이 문질렀다. 물기 없는 손등은 보드랍고, 또, 연약해서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린넨처럼 구겨질 것 같았다. 제리는 확신할 수 없는 일들에 약속을 거는 행위에 본능적으로 미약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기묘하게도 언제나 확신을 주고 싶은 상대와의 순간에서 자주 발생하는 감정이었다. 미래는 보증할 수 없어서 섣불리 새끼를 걸기에는 많은 부분이 제리의 몸과 마음 안에서 턱턱 걸렸다. 그 망설임은 제리에게 있어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였고, 지금껏 살아오며 어려웠을, 그리고 방만했을 여러 약속을 하지 않도록 제어를 거는 장치였다. 차라리 지난날 셀 수 없을 만큼 겪어온 기억 속 쓴맛으로 존재하는 일들을 잊었다면, 없던 일처럼 대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제리는 요슈아에게 아무런 고민 없이 비가 금방 그치고 해가 갤 게 분명하다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생각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직설적으로 묻기에는 아직 어리고 두려움이 많은지라 함께 맞이했던 추락을 가슴 속에서 되새기면서 질문했다.
"요슈아는 어떻게 생각해? 핑크 레인."
질문을 들은 요슈아는 카메라를 쥔 채로 제리를 빤히 보았다. 회색 홍채에 제리 머리카락의 두 색과 소파 바로 옆에 켜 둔 무드 등의 노란 불빛이 한데 모여 여러 색깔이 모래 알갱이처럼 섞였다. 그는 무언가 섞이는 일에 익숙했다. 눈동자가 품은 회색은 무슨 색이든 수용할 수 있었고, 작곡은 언제나 연주하는 이들이 만드는 화음을 생각하며 짓는 일이기에 더 능숙했다. 감정까지도 데칼코마니처럼 잘 영향을 받고는 했는데, 그늘진 면을 살펴보자면 두려움이나 불안이 섞이는 일에도 익숙하다는 점이나 다름없었다. 그 부분이 요슈아를 멈칫거리게 했다. 그래도 그는 진심으로 답해야만 했다.
"정확히 어떤 부분?"
"뉴스에서 그러더라, 잊고 싶은 기억을 잊게 해준대. 비를 좀 맞은 정도로…."
제리는 눈두덩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요슈아에게도 잊고 싶은 순간이 있어?"
빠르게 대답하기 어려운 나머지 요슈아는 말하기에 앞서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잊고 싶은 기억. 그런 기억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기 때문에 어려웠다. CD를 고르듯 손가락으로 짚어서 뽑아낼 만큼 어느 시간만 괴롭다면 좋았을지도 모르나, 그는 삶 대부분의 순간에 늘 손가락 하나만 한 우울함을 어금니 안쪽에 물고 있었고, 그것은 노래할 때 급작스럽게 튀어나와 그를 괴롭히고는 했다. 음식을 먹어도 먹어도 어금니 안쪽에 자리 잡은 불청객을 쫓아내지 못했기에 포만감은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래, 영구운동. 세상은 삐걱거리는 요슈아를 기다려 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인간은 결코 닿아본 적도 없는 완전하고도 평온한 상태를 평생 그리워하는 종이라서. 그 또한 죽는 순간까지 완벽해질 수는 없으리라고 직감한 지도 많은 날이 지났다.
다만 옆에 있는 존재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이나 기꺼워, 그를 위해서는 삐걱거리더라도 다시 한번 내일을 어렵사리 버텨보고 싶다고 다짐했을 뿐이었다.
괴로운 음절을 곱씹는 일을 제리 몫으로 하고 싶지 않아서 요슈아는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자기 안으로만 소화 시켰다. 잊고 싶은 순간.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은 기억. 지우고 싶은 고통. 그는 아까보다 거세진 빗발을 보면서 사실대로 토로했다.
"……응, 있어. 아마도 내 생각보다도 많겠지."
더 이어 나갈 말은 있었지만, 우선 운은 그렇게 띄웠다. 요슈아는 안팎으로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아까 전 제리와 마찬가지로 만지작댔고, 제리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 무언가 결심했다. 괴로운 기억이 없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가 품은 사랑의 형태는 요슈아를 감싸듯 가운데가 뚫린 원형이었다. 그가 소파에서 갑자기 예고 없이 벌컥 일어섰다. 요슈아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럼 나가자."
"에? 응? 어딜?"
"밖에. …비 맞으러."
요슈아는 제 말을 설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제리는 그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 하나만을 품고 집 밖으로 나갔다. 요슈아는 뒤따라 가면서 우산을 급히 챙기고 펼쳤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산을 펼치자 그들과 다른 이들이 펼친 우산 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공간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바닥이 분홍빛에 흠뻑 젖어서 축축해졌거나 웅덩이가 생긴 풍경이 더욱 생생하게 그들 눈에 띄었다. 제리는 자기 자신이 지금 충동적이라고 느끼면서도, 그에게 확신을 안겨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멈출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깻죽지에 닿을락 말락 스치는 빗방울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요슈아는 움찔거리는 제리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으며 우산을 조금 더 강하게 쥐었다. 제리가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는 그도 얼추 알 듯도 했다. 동시에 결국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을 갈무리했다. 그는 손바닥과 팔뚝에 닿는 옅은 체온에 얇은 눈썹 머리를 찌푸리면서 제 체온을 나누어주듯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제리는 어깨 뒤쪽에 딱 붙은 손목 위 자국이 주는 감촉에 결국 그를 안았다. 그가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요슈아에게 괴로운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결론만이 도출되어 도리어 그가 괴로웠다. 결국 파편처럼 흩어진 말이 정처 없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마저도 벗지 못한 아이 티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어째서?"
나, 요슈아가 잊고 싶은 건 잊었으면 좋겠는데, 아픈 기억도 전부,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제리가 흩뿌린 말은 조금씩 모여 무력할 정도로 상대를 아끼는 애정 어린 순수함이 되었다. 그 부드럽고 연약한 마음을 어루만지듯 요슈아가 입을 뗐다.
"분명, 제리. 너와 좋은 기억만을 갖고 싶은 마음도 있어. 하지만…… 말했잖아. 넌 내가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해?"
제리가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요슈아가 그 행동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을 골랐다.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야."
함께 추락했던 때를 떠올렸던 사람은 제리만이 아니라, 요슈아도 마찬가지였다. 고도 13,000피트에서 쿵쾅거리던 맥박과 하늘을 둘러싼 폭음을, 보이지 않는 지면을 향해 낙하하는 순간에 몸 전체에 들러붙던 묵직한 기압을. 그런 요슈아의 손을 꽉 잡았던 제리의 눈동자 속 자신을. 그 짧은 찰나에 요슈아는 깨닫고 말았다. 그렇게 한없이 못났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제리의 눈동자 속에서는 무척이나 눈부신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요슈아가 잊고 싶었을 기억 매 순간에 그는 살아 숨 쉬고 있었고, 반대로 제리가 잊고 싶었을 기억 매 순간에 요슈아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했을 뿐 쭉 그곳에 있었다.
"너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
제리는 그 말을 듣고서 긴장한 것처럼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것 또한 무의식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깨달음은 언제나 한 박자씩 늦고는 했지만, 결론은 언제나 본인이 해야 할 몫이었다. 요슈아는 제리를 응시하며 아무 말 없이 숨을 쉬었다. 일정한 박자가 마치 오선보 위 음표처럼 들렸다. 그 순간 제리 또한 보았다. 아니, 볼 수밖에 없었다. 그 회색빛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은 분명 약하고, 여리고, 두려움 많은 어린아이에 불과해야 할 터인데. 그런데도 요슈아는 그를 여전히 가장 눈부시게 보고 있었다.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아팠던 순간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면서 기뻐할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고, 내일의 나를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제리는 돌려주지 못했던 대답을 일 년이 지나고서야 건넸다. 나도 그래僕も、そう。
요슈아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기묘한 확신을 하고서 우산을 쥔 손을 놓았다. 검은 장우산이 웅덩이 위로 '찰박' 소리를 내며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는 제리의 눈물샘에서 흘러나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제리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그만 안심하면서 뺨을 손바닥에 기댔다. 눈물과 비는 구분되지 않아야 정상인데도,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품은 분홍빛에 구분이 명백히 되었다. 요슈아는 그 빗줄기를 하늘에서 보란 듯이 조금 더 억세게 문댔다. 그 무엇도 잊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한 달이 지났다. 뉴스에서는 핑크 레인에 관하여 이제 보도하지 않고, 편의점 통유리창 출입문에 붙은 안내문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비를 맞고서도 아무 기억도 잃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바다 냄새 시원해……. 기분 좋다~ 제리, 제리! 얼른 여기에 서 봐!"
"요슈아, 조금 진정해."
둘은 일부러 인파가 몰리는 관광명소를 피해서, 한적한 해변으로 출사를 갔다. 바다 근처 새들이 내는 소리와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가 겹쳤다. DSLR을 든 요슈아는 쾌청한 하늘과 콧속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다 향에 들떴고, 제리는 요슈아보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꽤 신난 상태였다. 그는 제리가 바다를 등지게 서자 삼각대에 DSLR을 올려 두고 초점을 맞췄다. 렌즈에 제리가 담기는 동시에 바람으로 인해 제리가 걸친 반투명한 셔츠가 나부꼈다. 그는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그리며 셔터를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제리가 서 있던 자리에서 이탈해 요슈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만화였다면 요슈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다섯 개쯤은 떴으리라. 요슈아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제리는 그의 팔목을 붙잡고 말했다.
"이것도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니까, 함께 찍어야지."
내 말이 맞지? 어느 날을 되갚아 주듯 제리는 평소답지 않게 윙크까지 해 보였다. 그 모습에 요슈아는 한참 말이 없다가 웃음을 크게 터뜨리며 볼을 붉혔다. 그가 진정하고서 대답했다.
"네가 맞아."
그렇기에 그는 오늘도 그의 옆에 선다. 언제까지고, 쭉.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너를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너에게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전부 예속되어도 괜찮겠다고, 그렇게라도 곁에 있고 싶단 욕심을 품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요슈아를 향한 사랑을 자각하게 된 순간은 프락시노스코프의 한 장면처럼 빠르게 넘어가고 겹쳐지는 기억 사이에서도 소리와 향기까지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지만 정작 감정이 마음속에서 발아하게 된 순간은 불명료해 그 타이밍을 완벽히 명명할 수 없는 건 함께한 모든 추억에 책갈피를 끼워 넣는 그 애조차 마찬가지




현재 요슈아와 함께하는 멤버들이 브레이브 차일드에 정식으로 가입하기 전에는 그 애와의 연애를 가족 외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지만 가장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람 중 한 명인 판다 사장님께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그것도 연애 초반에 들통났어
소꿉친구의 집에 머문 다음 날 끊이지 않고 계속해 울리는 벨소리 때문에 비몽사몽 잠에서 덜 깬 채로 전화를 받았는데 그건 알고 보니 내가 아닌 요슈아의 핸드폰으로 걸려 온 업무 전화였고 그날은 종일 모든 걸 망쳤다는 자책과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 채 카페에서 나눠주는 진동벨처럼 덜덜 떨었네 불안해하며 못난이 당근 대신 손가락을 다질 뻔한 건 두 번 설거지하다 깨트릴 뻔한 유리 접시는 네 장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보컬리스트의 사생활 보호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 클라이맥스 레코드답게 정작 사장님은 그 애와 사귀기 시작한 첫날부터 우리의 비밀 연애를 알고 계셨을 거란 생각이 들어
